낯선 집 - 정든 고마운 집 / 장 명 옥
아무런 인기척 없는 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찌 이리 생소한 기분인가. 먼지조차 미동이 없는 적막감. 한 달 여의 기간이, 내 삶의 본거지를 완전 타인의 것인양 느끼게 한다. 낯설다. 고즈녁하다는 실감이다. 둘러 보면 화초들도 싱싱한데… 소금등의 주황불은 여전히 밝혀 있는데… 정수기의 불들도 껌뻑이는데… 그래! 사람 냄새가 없는 거구나!
보글보글 끓는 미역국 냄새, 매콤한 김치 냄새, 짭짜름한 멸치 고추 조림 냄새, 물 뚝뚝 떨어지는 상추 쌈과 고추장 냄새… 전혀 없다. 집이란게 벽과 천정 마루 만으로는 미완성이구나! 뼈대가 있고, 휘둘리는 먼지와 툭탁 보글거리는 부엌의 온기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떠들어대는 사람 사는 냄새가 있는 곳이 집이구나!
떠난다는 들뜸으로 문을 나설 때는 미처 몰랐었다. 내 집이 나의 분신이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리라는 건 꿈도 꾸지 않았었다. 고국에서의 3주일, 구라파 크로아티아와 슬로바니아에서의 7박 9일. 이런 바삭 달콤한 여행의 기다림은 너무나 긴 세월인 듯, 1년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고, 먹을거리 챙기기에만도 가슴 터질듯 벅차 있었다. 꾸미 꾸미 개나리 봇짐 챙기듯 뭉치뭉치 쌓아놓은 보따리로 트렁크 2개 단단히 단도리하는 건 진땀나는 일이었다. 막상 서울에 도착해 펼쳐 보니 쓸모 없는 것들이 태반인 것을… 하늘을 동서로 날아 다닌 것이 한 두 번도 아닌데, 이번 길은 싱숭생숭, 걷잡을 수 없는 기대를 가득 품고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나이 탓이었나? 다시 또 나서기 어려우리라는 두려움도 함께 였던 건 아니었을까?
힘들었다. 40여 년을 같은 집에서 안락한 내 침실에서, 4계절 파란 태평양 바다를 내려다 보며 즐기던 집. 아침의 먼동과 저녁의 석양을 만끽하며 지내던 일상들을 벗어 났으니… 좁은 방 하나에서 짐 가방 옆에 두고, 뜨거운 온돌방에서의 옹졸한 시간들은 내가 자초한 일이니 하소연 할 길도 없는 갑갑한 시간들이었다. 사서하는 고생이라는 말, 듣고 넘기기에는 쉬웠지만, 당하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춥다기에 준비한 두툼한 옷들, 때로는 덥다고 벗었다가 덜덜 떨던 날들. 조석으로 변하는 마음과 몸은 나폴레옹의 무시무시한 독재 아래서라도 굴복 못할 지경이었다. 내 집에 가면, 만사형통하리라는 기대로 견뎌낼 수 있음이 다행이었다. 집이라는 게, 내 집이라는 게, 바로 이런 애착은 가져다 주는구나 했다.
내친김에 호화 여행을 다녀 보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도 때때로 눈앞에 아롱거리는 영화속 장면들. 귀여운 쌘드라 디 와 완숙미인 지나 롤로 부리짙다가 지중해 연안의 푸른 잔디 위에 길고 잘 차려진 잔칫상앞에서 즐거운 <Come September>,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제임스 딘이 함께 나온 <Giant>,스칼렛 오하라와 크라크 케이블이 아옹다옹 어울리던 <Gone with the Wind>, GWTW 는 1939년에 만든 영화란다. 그 때, 우리는 일본 통치하에 고생고생하며, 짚신 신고 지게지고 살아있음만 고마워하며 지냈는데… 모든것보다 하나 더, 내가 사진 찍으면서 그 잔디도 밟아 본, 펜실베이니아 1600 번지의 하얀 2층집, 그 집의 첫 입주자는 제 2대 대통령 John Adams였다. 그는 그 집을 위해 기도 했단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집과 앞으로 거주할 이들에게 최고의 축복을 내려 주시길 빕니다. 오직 정직하고 현명한 이들만이 이 지붕 아래에서 통치하기를.” 짧으면 4년 길면 8년마다 바뀌는 주인을 맞는 백악관. 집을 위해 이렇게 아름답게 진정으로 기원하며 살게 되면, 그 집의 공기가 달라질 것이다. 아직도 그 염원이 계속 함께 하는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내집을 위해 어떤 기원을 했었나? 오손도손 화목하게, 항상 건강하게, 거짖 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지금이라도 빌어 본다. 파란 바다위를 하얀 파도를 일구며 보트 2척이 쾌속으로 달린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한 순간의 지남은 다 같은 것. 백세 인생이라고 노래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날들이 무궁무진 많이도 남은 듯 이런저런 꿈들을 꾼다. 여행 계획도 세워보고 이사 계획도 맟춰본다. 예전처럼 작은 집으로의 이사가 아니라 더 큰 집으로의 움직임이 늘어난다는 기사도 읽었다. 누군가는 새로운 연인을 만들 핑크무드에 들뜨기도 한다. 새롭다는 호기심을 발동시켜 생기를 주기도 하지만, 내 친숙한 울타리 안에서 안온한 시간을 보낼수 있다면, 그보다 더 한 행복은 없을거라는 깨달음으로 오늘 이 순간이 고맙고도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