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66)
여름 감기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모두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해변으로 걸어가게 하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무엇으로 이토록 삶에게
안내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식물이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 없이
햇빛도 없이
사람도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여름에 대해 말한다 /황은주
예뻐지지 않는 아이
너는 계단을 오르듯 노동을 노동 이후에 어른을 어른 이후에 위대한 설산을 믿지만
철거되고 장마가 시작됐다
장화를 신은 너
여름에 대해 말한다 표백이라는 노동
거대한 유리상자 속에 운동화가 쌓인다
너는 운동화를 빨고 운동화를 모으고 신을 수 없던 새 운동화처럼 결백하지만
더러운 흰 빛
열대야가 시작됐다 네 앞의 계단이 녹은 이후 네 앞의 산양이 녹는다
벽돌에 대해 말하는 너
벽돌을 던지면 벽돌이 결백해지는 골목에서 더러운 아이가 울었다
슬픔은
철거되고
여름 숲에서 /박인걸
당신의 기운이 충만한
칠월의 숲속에서
아담의 이비인후의
루하흐를 경험합니다.
참 솔이 내뿜는
살균의 효능이나
떡갈나무 잎의
피톤치드가 아닙니다.
정수(淨水)된 공기와
아침 같은 고요가
찬란한 햇살과 섞여
한껏 채워지는 편안함보다
더 충만한 생명의 신비가
오염된 영혼을 감싸며
무성(無聲)의 광선으로
세속의 욕망을 녹입니다.
누구도 채워줄 수 없고
이끌 수 없는 힘이
숲속을 걷는 나의 온 몸을
강력하게 포옹합니다.
냉국에 헤엄치는 여름 /윤관영
우려낸 다시마를 만지면
돌고래 등껍질을 만지는 듯하다
다시마튀각은 깨진다 찡긴다
미역만 보면 괜히 눈시울,
미역국만 보면 마음이 뿌예진다
밥알을 말아서 입술로 먹으면
왠지 미안하고 괜스레 고맙다
미역을 그냥 잘게 잘라서 맨물에
오이채에 맨 소금 간,
싱거우니, 그래서 식염식초
그거 좋다, 암것도 안 들어간 투명이 좋다
미역은 또 물과 어울려 노니, 맑아
이때는 업소용 레시피도 용서된다
바다 소식 바다 소식 바다 소식
미끌거리는 미역과 사각거리는 오이와
찡기는 밥알이면 소식도 좋다
다시마야 제 물을 다 뺐으니 불어 미끌거리는 것
입천장에 붙어도 이쁜 미역
신맛마저 맑은 냉국
미역만 보면 몸도 마음도, 멱 감듯
해산한 듯, 다, 풀린다
여름 코스모스 /오보영
고운 얼굴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애탄 마음
그만
달래주고 싶어서
장마비에
초록 빛깔
움츠러든 사이에
상기된 모습
홍조 띤 얼굴로
살폿
피워 올랐다
지난 여름 /이진희
함께 햇볕에 그을리고 그늘에서 함께
다정하게 포옹하고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한들
네가 겪은 지난여름과
내가 간직한 지난여름은 달라
알 수 없는 모양으로 피어오른 구름을
동시에 보고도
너는 한없이 노곤한 낮잠을 희망했고
나는 모두 떠나버린 쓸쓸한 광장을 떠올렸다는 거
서로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깍지 끼고 걷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말하기 미묘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거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었거나
깊은 밤 예리한 칼날을 손목에 대보았던
서로에게 바쳐져서는 안 되는 그런
이제는 식은 재처럼 부드러워진 사소한 의례들
전부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빠짐없이 얘기하고 나서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해줬으면
여름을 기다림 /정민기
봄의 끝자락에서 여름을 기다린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행이 있다
발자국이 찍힌 진흙길을 걸었다
봄날의 끝이었다 벌레가 기어간 듯
닭살이 돋는 하루가 길게만 느껴진다
비린내가 나는 횟집 수족관을 지나다가
눈 뜨고 자는 듯한 물고기를 가만히 본다
빗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유리창,
마주친 입이 지루하게 뻐끔거린다
뜨거운 태양이 소처럼 혀를 휘두르는
여름을 간절하게도 기다린다
여름 /정세기
숲에 가면
바람이 많이 이는 건
햇볕이 뜨거워
바람도
몸을 식히러 온 때문이다
때론
소풍가듯
바람도 쉬고 싶은 것이다
계곡물에
찰방찰방 발 담그고 있다가
마냥 놀아선 안 되지
바람은
마을로 내려간다
여름비료주기 /강영란
꽃이 많이 피거나 수세가 약한 나무는 반드시 주고
지온이 높아 흡수율이 좋으니
봄비료에 비해 주는 양은 적게
시기를 놓치면 착색이 지연되고 부피과 발생하고
새로운 순과 열매가 크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해거리 방지에도 도움을 준다하니
5월 하순에서 6월 상순
달력에 "여름비료주기" 써놓고
행여 눈에 잘 안 띄나 싶어
그려둔 동그라미 표시를
어지간히 바라본다
그러니까 저건 기다려야 오는 날
모든 달력에 동그라미가 그렇듯이
모든 너를 생각하는 마음 가상이가 그렇듯이
여름이 오는 길 /박정재
진달래가 뵈지 않고
철쭉과 영산홍이 시들고
모란이 벌린 입을 닫으면
봄은 작별 인사를 한다
은빛 모자 쓴 가로수
길섶에 길게 늘어서서
여름으로 가는 길을 열면
여름이 손을 흔들며 온다
장미꽃이 미소를 짓고
넓은 꽃밭을 차지하면
여름은 점점 익어가고
길손들은 그늘을 찾는다
여름이 지나가는 길
하얀 머리 이팜나무가
은빛 등불을 끄는 날
여름은 발길을 멈춘다
그늘 만들기 /홍수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여름인가 /김연희
바람소리 맑게 들린다
영롱한 햇살 쏟아지는 들판
아름다운 꽃 펼쳐진다
푸른 하늘엔 나의 꿈 비상하고
달짝지끈한 깨꽃 심홍색 향기는
불붙고 있다
한 낮 돌 틈 지친 풀꽃은
더운 숨 내쉬다
소나기에 젖어 화장을 하듯이 싱그러워지며
매미 울음도 시원히 목청 연다
여름인가
걸음마다 눈부신 신록 디뎌보면
초록 노래 심장으로 안긴다
여름 숲 /김헤천
숲에 들면
숨 소리도 푸르러
굴참나무 몇 그루
몸 속으로 옮겨 앉는다
초록으로 성장(聖裝)을 한
유월의 숲에는
산새들 호로롱 영혼을 맑히고
정령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
숲의 자정(自淨)에 나를 맞기고
핏줄마저 고요해진 정갈한 몸 속에
암자 한 채 들일 자리 비워 놓아야겟다
그해 여름, 처용 /조숙향
긴 장마 잠시 주춤거리던 여름날
결혼생활 십오 년 만에
방 한 칸 어렵사리 타향에 걸어놓은 장씨
중환자실 아버지 일반병실로 옮기고
들끓는 국수가닥 같던 노사분규도
팽팽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장씨
어린 아들과 딸아이 짧은 그림자 밟으며
천천히 태화강변으로 들어갔다
마른어깨 위에 걸쳐진 성긴 투망 사이로
축축한 바람 한줄기 일렁일렁 지나갔다
몇 마리 피라미로 즐거운 식탁을 꿈꿀 때
아파트신축공사로 모래 퍼내어진 강바닥 웅덩이가
어린 아들을 사정없이 잡아당기고 말았다
손목에 투망이 옥죄며 휘어잡음과 동시
첨벙, 소용돌이 요란스레 돌고 있었다
강가에서 작은 발이 동동동 뛰고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황톳물에 휩쓸려 빠르게 흘러갔다
소주에 삼겹살을 구워먹던 발걸음들 분주히 오갔지만
검은 웅덩이는 동심원만 굵게굵게 그어대고 있었다
시신으로 거센 강물을 벗어난 장씨
어린 아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영안실로 실려가는 구급차 안에서도
장씨의 양팔은 결코 펴지지 않았다
여름 견디기 /김길남
여름이 좋은 것은
덥기만 한게 아니고
어딘가 시원함이 있어 좋다
산길 걷다 보니
우거진 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그 옆 계곡에 흐르는 물은
냉골이라 시원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함을 몰고와서
좋기만 하다
저기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
바람 불어 와
여름이 여름이
날아가는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