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에 관한 시모음 35)
다시 동백 /이성진
어느 새 삼월 하순 모두 종종걸음치는데
수억 년 되어야 볼 수 있는 도솔천 미륵 기다리다
대웅보전 단청은 이미 새가 되어 날아간 지 오래
선 곳의 경계가 선계인지 알 수 없는
다시 찾은 선운사 동백
봄 햇살 몇 개 주어 한달음에 찾았으나
무량한 붉은 입술 아직도 열지 못했으니
남녘 매화 소식 난감하고 부끄럽다
그대를 두고 안부 무를 때가 있었다
피 흘리며 묻는 안부
여여하다 웃으며 별일 없다 했었지만
붉음은 밤낮없이 가슴을 치고
여태 정수리에 올리지 못한 답장
당신 아직도 참선 중인가요
겨우내 몰아친 도솔산 송곳 바람
흔들림없이 꼿꼿이 선 그대를 두고
누가 동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어
먼발치 돌아 나오는데
사월 초순 바람도 자고
군네 나는 산벚나무 고목에 물이 오르면
온몸으로 쓰내려간 지독한 노래
마침내 검붉은 하혈로 흐른다는
열꽃보다 더 아픈
차마 울 수도 없는 그 몸짓
올올이 볼 수 있다는
다시 동백
동백 여인 /안영준
해안선 싸한 바람아
붉은 열정 곤두세움을
시샘하지 마라
언 땅을
당차게 딛고
터트리는 고고함
첫사랑처럼 아름답다
시린 밤하늘
달덩이 하나가
그녀 가슴에
차분히 내려앉은 밤
빨간 목도리 두르고
먼바다를
응시하는 여인
시림도 모른 체
말뚝처럼 꼼짝 않는다
월하동백 /이성진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워 말자 그리워하지 말자
어느 천 년에 그리움 들어 줄
그 사랑 다시 찾아올 것이더냐
야속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도저히 지워버릴 수 없는 숫자들이 목줄 흔들어 놓고
문풍지 시린 귀 얼얼하도록
삿된 바람까지 무시로 불어 되는데
섣달 보름
바람의 자리가 된 지 오래인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림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거기 누구요?
저릿한 마음에 웃음도 저물고
서늘한 그림자 대답이 없는 들
누구에게 한밤 퉁소 소리처럼 처량하고
애잔하다 하겠는가
하기야
그리움도 사랑의 배다른 형제이니
어금니 아프도록 버틸 만큼 붙들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다가
그대 입김 뭉근하게 데우고
붉은 피 철철 흘리도록 뜨거운 사랑 하다
봄기운 스멀거릴 때 쯤
보란듯이 자진하는 것도 슬프지만은 않겠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마당 한 귀퉁이 기대선 동백
보름달 한 아름 안고 툇마루에 앉았다
에잇 고얀 놈들!
겹동백 피고 /목필균
눈밭 속
겹동백 피었다
겹겹이 갈무리 된
어머니가 풀려나온다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한 세월 그리워했던 지아비
어머니 붉은 눈물
기억의 강으로 흐른다
겨울이 피고
치마 속 겹동백 피고
어머니가 말을 걸고
주름살 깊어간다
동백 예찬 /임재화
동백 그 아름다움이
붉은 꽃으로 피어날 때는
선비의 지조와 기개를
마음에 품고 피는 꽃이어라.
모진 겨울바람에도
의연하고 당당한 그대
동백의 덕과 기품을
어느 누가 모를 것인가
잎 새 뒤에 숨어서
살며시 꽃봉오리 자라고
겸손의 미덕과 붉은 열정으로
꽃을 피워내는 용기 가득하다.
사랑으로 가득한 동백을
지나가는 길손은 아는지 몰라
진정한 사랑은 열린 마음이라오.
동백의 지조와 기품
그리고 마음에 가득한 순정이여
너 붉은 모습으로 활짝 피어나니
이 추운 겨울도 마냥 따뜻하구나.
동백 /청아 이세복
검푸른 파도에 쪽빛 타는
아름다운 남쪽 섬이 출렁일 때
사랑 찾는 그리운 동백이 운다
애끓는 애심 바다는 알까
빨강 저고리에 초록 치마 입고서
다소곳한 새색시 꽃단장이로다
살포시 내민 볼우물 연지곤지
순정은
눈물 되어 행주치마 적시는
피운 꽃 시들기 싫은 절개로다
피를 토하고 죽은 여인의
애틋한 사랑 넋이 있고 없고
세월 잃은 사랑은 얼마나 애달팠나
눈꽃 가지에 동박새 내려앉아
임 부르는 사랑가 애절하다지만
네 마음만큼 아픔은 아닐 것을
동백이 필 때 /권애숙
조 이뿐 가시내
빨간 조막손 호호 불며
무언가 자꾸 펼치고 있다
은밀하게 소곤거리는 소리
기웃기웃 귀 자꾸 갖다대면
골방 깊숙이 까르륵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호롱불 밝혀놓고 밤새 몰래 읽던
까마득한 그때 그 연서처럼
두근거리며 훔쳐보고 있노라면
수줍은 동박새
그리운 그 소년인 듯
포롱포롱 행간을 날아다니며
말줄임표 꼭 꼭 찍어대고 있다
그게 동백꽃이더라 /한옥순
이모네 집은 두어 시간 걷고 또 걸어서 가야 있었다
스레트울타리 끼고 칠이 벗겨진 파란색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들반들한 툇마루가 먼저 보이는 마당 깊은 작은 집,
이모는 말이 별로 없는 대신 소리 없이 크게 웃는
걸걸한 우리 엄마보다는 아주 조금 이뻐 보이는 여자였다
이모가 국수를 삶아 내오는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는
휘 둘러볼 것 없이 작고 좁은 방을 한바퀴 돌아본다
이모네 안방 벽엔 포플린인지 옥양목인지 이름만 아는
흰색의 횃대보가 서커스 천막처럼 늘 씌워져 있었다
그 안엔 이모의 단벌 외출복인 공단한복이 걸려져 있었고
이모부의 잿빛 양복과 겨울 외투가 귀한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이모네 벽에 걸렸던 옷들은 오래전에 다 잊었다
다만 쉰다섯 해가 너머 가도록 잊혀지지 않는 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빨아 꼭꼭 눌러 다려 놓은 횃대보에 핀
꽃, 아주 붉고 작은 슬픈 얼굴의 꽃송이었다
왜 난 궁금하면서도 그 꽃 이름을 묻지 않았었는지
밤새 하얗게 내린 눈밭에 금방 떨어진 듯한 꽃송이들
맨 처음 생리혈을 묻힌 듯 생경스럽고 가슴 뛰는 그 색 색 색
금세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한 그 얼굴 얼굴 얼굴들이
동백꽃이란 걸 너무 많이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생전 처음 본 동백은 이모네 방 바람벽에 피었다가
나이 서른아홉에 모가지 툭 내던지듯 목숨 떨군 이모와 함께
연기로 날아간 흰 색 횃대보에 핀 핏빛보다 더 선명하게 붉던 꽃이었다
여덟살 계집애 가슴을 붉게 물들이며 숨이 막히게 하던
그 꽃 이름이 동백이라 하더라
뭔지모를 어린 시절에도 괜스레 눈시울 뜨겁게 하던 꽃들이,
초겨울 석양처럼 늙어서 가 본 서귀포 낯선 길 가 마다에
이모 얼굴을 수도 없이 그려 놓은 것 같은 꽃들이
그게 글쎄 동백이라 하더라
나는 동백꽃을 너무 어릴 적에 보았어라
겨울 冬栢꽃 /정민호
우리는 鋪道를 따라 기슭으로 올라갔다
海星학교 돌담길을 돌아가는 울타리에
빨간 바다동백이 입술을 열고 있었다.
바다의 파도소리가 조용히 들려 오는
따뜻한 겨울 1월에도
여기는 바닷바람으로
붉디붉은 동백을 피웠다.
東山 手町 5번지에 오르면
멀리 大洋과 잇닿는 수평선이
꿈을 꾸듯
長崎港의 노을 속으로
겨울무지개가 굽어 내린 산 중턱에
빨간 동백꽃이
이야기처럼 날이 저문다.
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 /이생진
나뭇잎은 시달려야 윤이 난다
비 바람 눈 안개 파도 우박 서리 햇볕
그 중에 제일 성가시게 구는 것은 바람
그러나 동백꽃나무는
그렇게 시달려야 고독이 풀린다
이파리에 윤기 도는 살찐 빛은
바람이 만져 준 자국이다
동백꽃은 그래서 아름답다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 동백꽃은
혼자서 희희낙락하다
시달리며 살아남은 것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달려드는 동백꽃 /송기원
단돈 일백만 원에 거문도 팔려올 때가
꼭 팔 년 전 이맘때였지요.
너울만 까마득한 뱃길을 흘러흘러
스물둘 어린 나이로 팔려왔어요.
어질머리 뱃전에는 눈물도 자취없어
울다 못해 뚱뚱 부어 팔려온 곳을 바라보니
낯선 선창보다도, 사람들보다도
얄궂어라, 맨 먼저 나를 향해
붉게, 또 붉게 달려드는 동백꽃!
그럭저럭 빚도 갚고 마담도 되었지만
그렇게 안 미치고 바다에도 안 뛰어들었지만
지금도 이맘때면 나를 향해
붉게, 또 붉게 달려드는 동백꽃!
붉은 시전지 /곽재구
부용리 마을회관
시멘트 벤치 앞에 차 세우고
가스불 피워 라면을 끓입니다
이따금 방목하는 염소도 지나가고
동천다려 민박집 진돗개 봉순이도 지나가고
멀구슬나무 열매 쪼던 콩새들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고
부산이나 광주 번호판 단 승용차들 때 없이 지나가는
길가에 쭈그려앉아 라면 가닥 익기를 멀거니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마을회관 앞 늙은 동백나무 한그루가
툭 꽃망울 하나를 길 위에 떨굽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용리 동백나무 숲길에는
떨어진 동백꽃들 지천이어서
떨어진 동백꽃 하나 보고
라면 한 가닥 입에 넣고
동백꽃 하나 눈 맞추는 동안
청별항 뱃고동 소리 길게 들어오고
여기저기 떨어진 동백꽃
세월은 절로 가고
떨어진 동백꽃 눈 맞추는 동안
나 역시 저 늙은 동백나무처럼
붉디붉은 사랑의 시 한편
이 지상에 툭 떨굴 날 부끄러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동백꽃의 사유 /백오 이승기
베란다에서 칠 년 자란 나무
보름달 속 계수나무, 옥토끼
처음 싹 틔운 떡잎의 나이테
육층까지 후손 한 가문일세
선산 윗쪽 옮겨 심어 볼까.
빨갛고 노란색 꽃잎과 수술
한겨울이나 봄철에 남의 눈
자극할까. 근심거리이다네
설중매가 아름답다 하지만
사철 실록인 이 나무와 어찌
견주 리오. 빨간 잎 속 노란
수술 봄을 안고 오는 듯하네
작년 한송이 올해 세 송이째
꽃이 피고 있다. 한 사람만
지켜보거늘 당신 사랑한다
베란다 속 고개 갸웃거린다
동백꽃 /書娥 서현숙
남해안
인적없는 섬마을에는
타는 듯 붉은 입술
멍울 져 피어나는
예쁜 아가씨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려오면은
수평선 저 너머에
살고 계시는
그리운 임의 창가
사랑의 고운 연서
전해 달라고
붉은 눈물 흘리며
애절하게 서 있는
동백 아가씨
동백꽃 /이영하
봄바람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줬더니
속 보인다고
시큰둥 하네
말 못 하고
고백 못 한 못난이라고
삐죽삐죽하며
토라진 그 입술이
팍! 터트릴
붉은 꽃망울 닮은
동백꽃 같아서
그 모습에 눈멀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