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발자취를 찾아
이헌 조미경
광야의 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조국의 독립운동과 17번의 옥사, 행동하는 민족시인, 시, 소설 수필. 평론에 이르기까지 문인으로 활동, 40년의 짧은 생애를 옥에서 보낸 저항 시인으로 살다 간 이육사의 발자취를 찾아 안동을 다녀왔다. 이육사 문학관 뒤편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아 참배 하면서 숙연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살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위대한 인물을 만나면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가지며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 되었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며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선비 집안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유년 시절 한학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 한 때 처가가 있던 영천의 백학 학원에서, 그리고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수학했다.
'장진흥의'에 엮여 옥고를 치렀고, 그 뒤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졸업하고 기자 생활과 항일 투쟁을 함께 펼쳤다. 이후 주로 육사와 활이라는 필명으로 시와 평문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하고. [자오선, 영화예술, 풍림]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40년이란 짧은 삶 가운데 20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거듭하여 붙잡히고, 옥고를 치렀으며, 끝내 1943년 가을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끌려가 이듬해 순국했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2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양싱포(楊杏佛) : 중국국민당 정권 특무에 의해 피살)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인사를 나누었다는 본인의 회고가 있으며, 관련된 내용이 이육사의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에 기록되어 있다. 이육사는 루쉰이 1936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난 후 4일만인 10월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이육사가 당시 「조선일보」에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을 연재하며 루쉰을 만난 사실은 언급하며, 루쉰의 생애를 요약하고 루쉰 문학의 전개 과정과 특징을 분석한 후 마지막에 그에 대한 애틋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도문'에서 이육사는 루쉰 문학의 성숙한 깊이에 주목하면서 당시 혼란한 중국 사회 현실에 맞서 명확하고 진실한 묘사로 감동 깊은 문학작품을 창작한 측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로 설명하고 있다. 「루쉰추도문」을 연재한 후 이육사는 루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고향故鄕」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하여 1936년 『조광朝光』 12월호에 발표했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육사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 ‘의열단’에 가담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작을 한 까닭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구하였으며, 자신의 시작활동에 대한 생각은 "계절의 오행"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 짧은 글을 통해 육사 본인의 시작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읽어낼 수 있으며, 대표적인 시는 다음과 같다.
계절의 오행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발자국이라도 물러 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유언은 쓰지 않겠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르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육사 수필 (계절의 오행) 1038년 일부
이육사는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는데, 시 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평론등의 전 양식에 걸친작품활동에 매진했다.
육사가 1934년 부터 발표한 수필은 1942년 까지 총 14편으로, 밀도 높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시화비평 8편을 비롯해 문예비평 8편을 내놓아 뚜렷한 사회 의식을 드러냈다. 이육사 문학과과 그의 묘비를 참배 하면서,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고귀한 작가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숙제에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어린시절 이육사 시인의 광야와 청포도를 배우며, 시적 아름다움과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에 대한 것을 심어준 시인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이육사 문학관을 다녀와서 문학인의 한사람으로 느낀바 매우 크다.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육사의 작품세계와 독립운동에 관한 공부를 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문학인으로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후대에 길이 남을 것이라 사료 된다. 더불어 문인은 다양한 체험과 읽고 쓰기를 한시도 멈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자료 참조" 이육사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