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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혼이 담긴 예술정신. 귀금속 제일 명장 이임춘 선생!!
날아라 마린보이 : 야생마~린 생생 리포트!/홍보마린의 스토킹
2012/01/10
건물 전체가 금 공예 예술을 하는 공방인가봅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갖가지 공구소리가 들리는 군요.
“오오. 어서와요!”
나이답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거칠면서도 섬세해 보이는 손이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귀금속 공예 명장 이임춘 선생(59, 부후111기). 대한민국 귀금속 공예 역사를 담고 있는 듯 멋스러운 수염이 인상적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신이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는 공예의 길로 들어섰죠. 그리고 해병대 부사관으로 입대.
전역 후 다시 공예의 한 길만을 걸어오며 대한민국 귀금속 공예의 최정상에 오른 이임춘 선생의 이야기는
간단히 정리만 해보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시간 여 동안 이임춘 선생에게서 해병대 이야기와, 귀슴속 이야기를 들으며 장인정신에 대한 철학을 들어보았습니다.
『날아라 마린보이』 가족들도 이임춘 선생과의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보자구요^^
<작업하는 모습에서 명장의 얼이 느껴집니다>
[나의 운명 하나. 해병대]
“공예하는 애들은 하나같이 군대를 안 갈려고 그래. 군대 가 있는 동안 손이 쉬고 있으면 굳어버린다 이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야! 내가 너네들 대표로 간다.’ 이왕이면 멋있는 곳을 가야지. 그렇다면 답은 뭐겠어. 해병대아냐.
우리 지역에서 해병대 부사관 10명을 선발하는데 300명이 넘게 온거야.
시험도 국,영.수는 물론이고 면접에 체력검정까지 3박4일을 꼬박 보더라니까.”
30대 1을 뚫고 지역에서 선발되었는데,
진해에 가보니 이게 웬일 각 지역에서 선발된 400명이 모여있는데 가입소 기간이 또 예술이었다고 합니다.
“교육대에 400명이 모여 있는데 여기서 또 시작이야.
가입소 기간이 어찌나 혹독한지 말이야. 아예 안될 것 같은 사람들을 애초에 가려내려고 한 거지.
거기서 버티고 또 버텨서 임관을 했는데. 기분 좋았어. 해병대 간거 절대 후회안해.
군 생활을 너무 훌륭하게 잘 내기도 하거니와 진급시험에서 1등을 해버린 탓에 장기 복무하라는 권유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빗발치는 군생활 유횩을 뿌리치고 이렇게 외쳤답니다. ‘나 공예할 거야!'
모범적(?) 이고 훌륭했다는 이임춘 선생의 부사관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술술 쏟아져 나오는 군대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구요 ㅎㅎ
“내가 72대대 창설 멤버였는데, 포항 거기 완전 허허벌판이었어.
맨땅에 헤딩하는 자세로 아주 그냥 불도저로 밀어서 연병장 만들고, 연못 만들고,
잔디밭, 활주로, 체력단련장 만들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 와중에 72대대에 화기중대가 창설되면서 황중호 장군(당시 중위)과 함께 화기중대 보급/작전하사로 보직됐어.
당시 모든 군대가 그랬겠지만 보급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개인 병기만 머릿 수대로 맞춰져있고 다른 보급품들은 형편이 없는거야.
개인장구류 채워넣느라고 황중호 장군과 내가 정말 피땀을 흘렸다는거 아니야.”
<해사교관 시절 이임춘 선생의 젊은 모습입니다 ㅎㅎ>
못하는 것 없고 안 하는 것 없던 선생의 군생활은 해군사관학교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는데요,
군사학과 교관으로서 해사 32기까지 총검술, 화기학, 전술학 등의 교육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 때 맺은 군 인연은 지금도 매우 소중히 이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군대에 가 있는 것을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잘못된거야. 단체생활을 언제 또 해볼거야? 군대가서 배우는거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생활을 미리 연습해 보는거야.
안일한 마음을 먹지말고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살면 모든게 도움이 될 거야.다 자신의 태도에 달린 일이라구.”
복무자세에 대한 선생의 큰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이제 이야기는 제 2막. 선생의 예술인생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나의 운명 둘. 귀금속 공예]
- 어린 나이에 예술의 길을 알아보다.
선생의 가정은 부유했습니다. 백미가 귀해 혼식이 정부 정책차원으로 권장되던 시절,
선생은 하얀 쌀밥을 싸서 친구들의 보리밥을 얻어다 혼식을 만들곤 했는군요.
남 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어떻게 춥고 배고픈 예술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요?
“난 그 자수성가 하는 스토리가 정말 마음에 안들어.
기자들도 나 하고 인터뷰를 하면 하나같이 힘들었던 이야기만 캐내려고 해요.
‘그것을 극복하고 장인이 되었다’ 뭐 그런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거지. 그거 인터뷰 하는 사람에 대한 실례야.
그 사람의 아픈 기억을 자꾸 강요하잖아.
꼭 그런 기적의 스토리가 있어야해? 그럼 난 뭐야? 나는 부유했지만 예술에 모든 것을 걸었고 나름의 실력을 갖게 됐어.”
<선생님의 작업실 전경. 작업에 필요하다면 노력과 돈을 아끼지 않고 시설을 갖추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예술에 대한 철학은 통념을 깼지만 확고했습니다. 그리고 수긍이 가는군요.
“가난한 환경에서는 미안하지만 예술의 경지에 오르기가 힘들어.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가난한 사람은 돈 벌러 나가야해. 가정을 먹여살려야 하니까.
그 순간 더 이상 기술이 늘 수 없는 거지. 기술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돈 되는 기술만 배우고 만다는 거야.
진짜 기술에는 닿아보지도 못해. 안타깝지. 하지만 나는 먹고사는 걱정이 없으니까 기술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배우러 간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기술이 있고 새 장비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가서 배우고,장비를 구해놓아.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기술도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는거야.”
공예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진정성있는 관심을 촉구함과 동시에
경제성 있는 얄팍한 기술에만 집중되는 현대인에게 따끔하게 경종을 울리는 말입니다.
정말 귀금속 공예가 좋아서 예술에만 매달린 선생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구요.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손재주 있다는 걸 알았어. 공예할려고 집을 뛰쳐나왔지, 학교도 다니다가 그만두고.
공부도 곧잘했지만 예술이 너무너무 하고 싶었거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일을 하고 싶어서 일하고 갔어.”
젊을 때 꼭 해보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른다면 연애를 해보고싶다며 호쾌하게 웃는 명장.
군대다니던 시절 아가씨를 한 번 만났었는데, 연애를 하니 시간도 돈도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연애 역시 한켠으로 접어버리고 예술에만 집중했습니다.
귀금속 예술 최고의 경지를 바라보며 다른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고 달려온 40여년의 인생.
지금와서 잠시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내 스승님이 그렇게 하지말라고 뜯어말리시던 예술의 길을 나는 미쳐서 한 평생을 바쳤는데, 최근 들어서 처음 후회를 해봤어.
40년을 바쳤는데 끝이 안보여. 내가 기술은 참 많이 가지고 있는데 너무 쓸쓸한거지. 같이 가는 사람도 없고.
배울려는 사람도 없고. 내가 참 너무 한길만 걸어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정말 일에만 미쳐 살다가 이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외로운거지 허허.”
1인자는 외롭죠. 혼자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외로움이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치부하기에 선생의 마음은 너무 무거워 보였습니다.
예술의 순수함에 주목하지 않고 그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는 현세인들에 대한 실망 때문인까요.
아무도 그의 뒤를 따라 고되고 외롭되 고고한 예술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예술의식의 실종때문일까요.
- 왁싱기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다.
어떻게 이어오고 어떻게 발전시킨 높은 수준의 한국 귀금속 공예기술을 이대로 스러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임춘 선생은 귀금속 공예에 도전하는 후진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있습니다.
“내가 처음 이 일을 배울 때 너무 힘들었거든.
후배들은 좀 더 쉽게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왁싱기법을 고안했지.
아마 10년 배울 기술을 1년 정도로 단축시켜줄거야. 한..4년 동안 연구하고 커리큘럼짜고 책을 만들어서 출판했어.
금덩어리를 직접 깎아서 세공하는 것 보다 초(wax, 밀랍)에다 조각해서 활용하면 훨씬 수월하거든.
시간도 절약되고,표현도 무척 자유롭지. 금속자체에는 표현안되는 기술들도 많은데 왁싱기법으로 많이 극복돼.”
<선생님의 모든 것이 담긴 왁스기법 서적. 1997년 초판본입니다>
귀금속 가공에 혁신적인 왁싱기법.
출판 당시 사진을 찍어주는 스튜디오가 없어서 직접 사진을 찍었고 기천만원을 들여서 책을 냈지만 백만원도 채 못 벌었다고 합니다.
기술은 곧 장인의 경쟁력이죠. 자신의 독자적인 기술력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소위 밥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임춘 선생은 자신의 왁싱기법을 책으로 출판하며 세상에 공개해버렸군요. 왜 그랬을까요?
“나 혼자 잘하면 뭐해. 귀금속 업계가 죽어가는데. ‘나는 어렵게 배웠지만 후배들을 그런 고생 안하게 하자’ 그런 생각이었어.
자기 밥그릇을 열어주는데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했지”
나 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역시 보유한 기술만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왁싱기술이 담긴 책으로 학원을 열어 후진양성에도 힘썼습니다.
“이 책으로 한 천명정도 가르쳤어.
그 땐 이 건물을 다썼는데. 정말 미래가 안보이는 학생들을 다 돌려보내고 수료시킨 사람들이 500명 정도였어.
미국, 일본, 베트남 각지를 다니며서 실력을 뽐내더라고. 아프리카 왕실에 가서 일하다 오는 사람도 있고.
이 왁싱기법이 대량생산하기에 좋으니까 악세사리 업계에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 IMF 어렵던 시기에 아마 큰 힘이 되었을거야.
제작시간이 1/5로 줄고 다양하고 복잡한 디자인도 표현이 가능해 졌으니까.
전국 귀금속 시장에서 내 디자인을 받으로 몰려드는데 단돈 500만원으로 시작한 사람이
내 디자인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30억까지 벌더라고. 사람들은 그러지,왜 내가 직접 사업을 안 하냐고. 근데 나는 이게 좋아.”
물질적 가치까지도 초월하는 예술에 대한 선생의 사랑과 열정. 선생은 그 사랑과 열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긴 하지만 나는 이게 너무너무 좋은 걸. 완전히 미쳐있어. 허허.
하고싶은 것도 너무너무 많고, 해야할 것도 너무너무 많고. 눈에 보이는 건 다 디자인이고, 눈에 보이는 건 다 해보고싶어.
근데 해지면 집에 가야하잖아. 그게 너무 싫어.”
- 나는 귀금속 제일 명장 이임춘이다!
작품활동과 함께 후진양성에 힘쓰고,
기능경기대회 출제위원, 평가위원, 기능장 출제위원, 대학 출강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무렵
출전한 디자인 공모전으로 이름을 보다 널리 알리게 됐습니다.
“홍콩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이라는게 있어. 세공기술을 겨루는 대회 중에 명성이 매우 높은 대회인데,
내가 국내에서는 기술이 좀 있긴 하지만 어디 평가 받을 데가 없는거야. 과연 내 실력이 어떨까 궁금하더라고.
이 대회에 출품을 하고 또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팩스가 하나와. 홍콩에 출품한게 1등 했다는거야. 너무너무 좋더라고.
막 기쁘다기 보다는 뭔가 멍~ 했다고 해야하나? 건국이래 처음이었어. 영화로 치면 대종상을 탄거지.
우리 업계가 너무 미약해서 별로 큰 반향은 없었지만 권위로 따지면 그래도 대단했어. KBS 9시 뉴스에도 나오고.”
기술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 솜씨와 수작으로 포장을 해도 작품이 공개되는 순간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기술을 가진 이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기술이 아닌 것으로 수작을 부려서도 안되죠.
그래서 이임춘 선생과 나눈 대화와 표정에 더더욱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일하듯 장인들도 결국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활짝 웃는 이임춘 선생님.
대한민국 최고 명장의 지위에 이른 지금, 명장을 넘어서는 큰 꿈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업계 실력이 이제는 세계적이야. 세계대회에서 17번째 우승했거든.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널리 알리지 못해서 안타까워.
일단 이거부터 해결하고. 그리고 문화재 복원으로 나라에 보탬에 되야지.
공예 장인들이 나라에 기여할 방법이 이게 최고인거 같애. 경주에 있는 감은사 터 확인하는 데에 나도 보탬에 됐다고. 하하”
<이임춘 선생님의 작품 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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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경받아 마땅할 분이군요!
나이는 나보다 한살 적지만 선임 이군요 120기와 같이 입대하여 자대가니
110기가 있더군요 ㅎㅎㅎ
대단하신 분이구요
필승,,금속공예품을 보니 과히 예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