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량리역 혹은 뽀르뚜갈 광장
경춘선을 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봄이었으므로. 그러나 곧바로 떠나는 기차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즉흥적인 여행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량리역 광장이 아닌 뽀루뚜갈 광장에 서 있는 이국의 여행자들처럼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 위를 어슬렁거리며 광장의 시계탑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을 공유하며.
#2 기차 안과 밖
어두운 차창 밖으로 몇겁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그 어둠속에서 전생 혹은 전전생을 시청 중이다. 홍익회의 삶은 계란과 캔맥주를 홀짝이며. 이어폰의 리시버를 한쪽씩 나누어 꽂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부에나 비스따 쏘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가 부르는 「 Dos Gardenias」. 이국적인 그 음악은 전생의 당신을 닮았다. 당신은 노래한다. "치자꽃 두송이를 그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잘 돌봐주세요 그것은 당신과 나의 마음입니다."
#3 새춘천교회 그리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간다. 성경책도 믿음도 없이. 그러나 당신을 향한 찬송가처럼 몇개의 빗방울 흩뿌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말한다. " 이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어."
#4 공지천과 이디오피아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를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았던 그 봄 춘천에.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