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후 시인>>
<<서윤후 시인의 양력>>
*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2009년 <현대 시>로 등단.
* 시집 :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 여행 산문집 : 『방과 후 지구』.
* 만화 시편 : 『구체적 소년』.
* 제19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
<<서윤후 시인의 시>>
독거청년 / 서윤후
나는 집에서도 가끔 나를 잃어버립니다
단 하나의 실핏줄로 터진 얼굴들을 생각하며 창백한 창문을 봅니다 실내에서 유일하게 한 일은 웅크림이라는 도형을 발명한 것뿐입니다
테라스엔 바깥을 서성이다 온 사람들이 있고, 그곳엔 버스나 기차가 정차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씩 밀려나는 연습을 합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감히
나는 나를 슬퍼할 자신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포개거나, 일 인 분의 점심을 차리는 일에 능숙합니다 홀수와 짝수가 나란해집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모험이 끝났습니다 못에 박힌 벽처럼 단단해집니다 헐렁한 손목에서 시계가 자꾸 죽습니다 쓸모 없는 시계추가 눈덩이로 내려앉습니다
안으로 침투할수록, 이불은 넓어집니다 안에도 바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열대어들이 서로 친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끝나지 않는 어항을 바라보다가
나는 약속 시간에 늦습니다 나를 꾸짖지 않는 나를 만날 때마다 무거워집니다 배치될 가구의 기분으로, 서랍마다 나를 구겨 넣습니다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나를 찾는 날엔, 운 좋게 천장을 걸을 수 있습니다 걸터앉은 곳마다 부러지면 실내가 실내를 이해할 때까지, 온토계는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발육의 깊이/서윤후
대자연이 왜곡된다
검은 강이 범람하지 못하게 쌓아 둔 방죽에서
다 큰 아이들이 몰래 발을 담그면
생태계는 자연스러워진다
이미 증기기관차는 떠났다 짐칸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기차가 우리를 두고 떠났다고 말하지만, 기차는 디젤기관차가 되어 돌아올 시간이다
남모르게 자라난 아이들의 비밀 같은
세상의 모든 구멍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기차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철로 위
배웅과 마중을 동시에 하는 손뼉을 흔들고
이번 좌석에도 우리가 계획에 없다면 다시 뚝방으로 간다 공장의 방광에서 헤엄칠 것이다
물장구칠 수 있는 길고 가녀린 팔과 다리가
검은 물 밑에서 살색의 형광물질로 남겨질 것이다
그것은 오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물이 될 수 있고
기차가 실은 짐이 될 수 있는 염색체
매달린 평행봉에서 떨어진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건, 더 괜찮은 쪽으로
또다시 떨어지는 일뿐입니다
몇 년째 끝나지 않은 잠수 시합
물속에서 처음 눈 떴는데
물 밑으로 지나가는 거대하고 긴 기차가
해안류/서윤후
바다에 문짝을 던지고 나는 기다렸다
누군가 문 열고 나오리라 믿으며
문이 사라진 방에선 어둠이 처음으로 기어 나왔다
보행법을 잊은 너의 양부모가 언제 보챌지 모르니
바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가
그렇게 우리는 바다에서 재회했다
발길질이 심해서 입덧도 몰랐는데
걷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과거형의 미래를 자주 산책하던 아이는
저녁 먹을 시간에 돌아올 것이다
깍아놓은 사과를 먼저 드세요 찌개는 그만 데우
세요
바다에 던진 문을 두드릴까 노크를 듣기 위해서
파도보다 더 먼저 일렁였다
장대비가 등에 꽂히더라도 소라게가 귓속에 득
실거려도
한번 엎드린 사람은 도통 깨어나지 않아
반복이 필요했다
반복도 살의를 느끼는 생활은 이따금씩
바다가 지워가는 문을 잊게 만들었다
다행스러운 생각들이 옷핀처럼 열릴 때마다
어딘가를 쿡 찌르고
아이는 없는 사이 저녁 먹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
고 갔다
물속에서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저 문 뒤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자가 있다
던질 문이 없다 모두 창문을 내렸기에
빛은 새어 나올 틈 없다
이 시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저 문의 손잡이를 잡아본 사람들만이
시간의 헛바퀴에 대해 마저 이야기할 것이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니?
너의 양부모는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어둠을 닮았
지만
결코 어둠은 아니에요 친절하게 굴지 마세요
그 말은 삼키고 바람이 불면 날아다니는
가벼운 돌 되고 싶어요
저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만큼만
심장 구슬과 어울려 놀 수 있을 정도로만
창문을 빼꼼히 열어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내가 보여? 우리 서로의 거울이 되자
깨지지 않게 조심히 놀자
자 이제 문 열어줄게
희디흰 / 서윤후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얼룩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하게
애어른 같은 아이를 키우는 집은 행복할 것 같다고 옆집 사람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공사장을 다녀온 사람은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도 검은 발바닥은 검은 발바닥이었다 더려워도 더럽다고 할 수 없었다
팔레트의 굳은 물감
두 번째 신는 흰 양말
마른 빨래를 개키던 어머니를 돕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조용히 책도 읽었다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는 깨끗한 손이 있었다
타일이 풍기는 표백제 냄새
깨끗하다고 믿는 중독
그의 발바닥을 그렸다 검은 생각들이었기 때문에 깊은 밤 속에 파묻혀 아버지가 화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우는 일만 하던 어머니의 표백된 얼굴이
자꾸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병에 걸렸다
흰 색을 잃어 가는 여전히 흰 옷 같은 나의 세포
나에게 묻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호하는 이 깨끗한 색으로부터
나는 가장 위험했다
너는 있다/서윤후
기운이 없어서 물을 쏟았다
쏟은 물인 줄 모르고 너는 핥지
나는 너를 쓰다듬고
너는 나를 깨무는 안간힘
나를 만나러 오기 위해
너무 많은 화분을 쓰러뜨리며 온 너를
품에 두자 냄새만이 남는다
금방 돌아가야 할 것처럼 보채는
시간 앞에서 우린 자주 미끄러졌다
너는 나의 어떤 냄새를 알까
우리는 어떤 꽃의 실패한 향기일까
(재채기)
젖은 코에 묻은
오늘의 건강함
단지 우리가 견뎌야 할 몇 분
기운이 나서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 본다
이름보다 늦게 도착하는 네가
나에게서 그치는 얌전함으로 엇갈리고
우리가 우리로서
엎드려 있던 시간이 멎는다
너의 자명종 울리고 나는 늦잠 자고
너는 없고 나는 있다
더 분주하고 바쁜 빈자리
나만 남겨진 오후
냄새만이 마지막을 들킬 때
마침표를 입에 물고
도망가며 멀어진다 너는
내게 다시 마침표만큼 작아지고
친밀한 면회가 끝난다
나는 내 안에서 나갈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냄새에 맺히는 건
오랜 떨림이었으므로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기로 한다
너는 내 이름을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으면서
내게 있다는 신비
햇빛이 꼬리를 흔든다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서
너는 있다
괴도/서윤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 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 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르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필요하므로
어제와 내일을 교환하는 오늘을 살게 되고
고개 숙인 자리로 벌레들이
실눈을 그으며 떠났다가 뒤집혀 죽는 일로 돌아온다
찡그린 자의 얼굴을 베껴 간 벌레의 배가
이 밤에 가장 환하다
*프란츠 카프카의 분장을 변형
내가 되지 않을 것들/서윤후
높은 곳에서 떨어졌거나 바닥을 구슬프게 흐리고도
멀쩡한 것들
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사람을 고치는 일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기도가 엇나가는
신의 겨드랑이 뒤에서 어린양 부리는 것들
두서없는 꿈의 멀미를 앓는 것들
표본과 다른 독개구리들
제 안에서 독을 터뜨려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이 꽉 물었던 이름을 놓아버린 것들
매번 진심이었던 생일 다음날처럼
허겁지겁 먹었던 사람의 눈빛이
사과나무 밑에서 배앓이하는
뒤틀린 틈으로 마구 솟구치는 송충이들
하하하 갉아먹히는 오래된 농담들
실없이 저물었다가 돌아오지 않는
옛사랑에 꽂아둔 실핀들
결코 흘러내리지 않을 것들
내가 매달려도 내가 될 수 없는
공중의 손잡이들
손님 없이 시동 거는 버스 안에
내가 되진 않고
나를 기다리기만 하는 옆자리들
유리 물산/서윤후
눈앞에 너무 많은 것들이 아른거려
가짜가 진심을 애원하듯이
쓰보야 거리를 걷다가
유리를 불어 만든 공예품이라고 적힌 좌판 앞에 선다
생각보다 비싸군요 그저 그렇고 그런 것들이 아니랍니다 쉽게 깨지지 않을까요?
깨지지 않는 유리는 없습니다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게 슬픔의 자세라면
담벼락에 박혀 있던 맥주병 조각들은 무엇을 그치게 하는 언어였을까
다치게 해서라도?
공책 맨 뒤에서부터 적어 내려간 것들이
무엇을 그만두게 했나 생각했을 때
손에 들고 구경하던 유리 화병을 떨어뜨렸다
깨지는 소리가 사람들에게 박힌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공예품 가게 앞에서
나는 외국어로 최선을 다해 사과했다
스미마센, 스미마센
자주 있는 일이란 듯 진열대 밑에서 빗자루를 꺼내 온 점원은 어쨌거나 웃고 있다
그 미소가 나의 균열을 만지고 있었다
변상하기 위해 지갑에서 가장 큰 지폐를 꺼내어 건넸다 점원은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받았고
거스름돈도 내주었다
파친코에서 나온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도 불을 붙였다
가지고 싶은 것을 정확히 상상하면 눈동자가 욱신거렸다
건물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구슬 섞이는 소리가 맑고 투명하게 들렸다
오늘 내가 산 유리 화병을 상상하며 캐리어에 넣었다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운반해야 한다고
자면서도 내내 생각했다
없으니까 있고 싶어
옆방 아이의 일본어를 알아듣게 되었다
소소소(小小小)/서윤후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자꾸 큰 것을 물어 온다
식별 불가능의
삶을 다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잠자리 날개를 잡으려는 아이의 집게손가락은
아마도 가리키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을 잠깐 멈추게 할 수 있는지
조생귤의 단단함에 침 흘리고
우산 하나에 여럿이 깃든 어깨의 단란함으로
이 거리가 잠깐 들썩일 수 있다면
열댓 명 모인 농성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회전문을 막지 못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울부짖음이 거리 어디에도 맺히지 못할 때
소실점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점 뒤에서 이 세계를 요약하진 않는다
직통 버스 없는 터미널에서 떠나온 사람이
몇 시간을 먼저 기다리는 것이다
이 작은 도시에 멀미가 나서
아스피린과 타이레놀
다솜이와 영은이
동교동 삼거리와 공덕 오거리
(지도를 그리는 바늘들)
열심히 마늘을 빻는 부엌 작은 창 속에
한 스푼 설탕을 푸는 사람도 있어
복도식 아파트가 나눠 갖는 냄새
학원 가던 아이가 샌들을 벗어
자갈 하나를 떨군다
잠깐 완벽해지는 세계
슈가 코팅/서윤후
반짝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도화선에 오른 슬픔을 내려오게 하거나
일그러진 얼굴에서 입술을 빛나게 할 때
서로를 엎질러서라도
핥아서라도 캐러멜라이징
깊고 풍부한 맛이 되었다
울고 난 사람에게 윤기가 나듯이
누군가 벗어준 외투에 묻어서도
반짝임을 그칠 줄 몰랐을 때
녹이는 점 녹는점 필요해
끓이는 점 끓는점 가져가
너무 반짝이면 모형 같아서 만져보는 음식이 있었다
입가에 묻은 파우더
머뭇거리는 발자국의 글썽거림
우리가 정말 달고 맛있었을 때
굶주린 얼굴 흘러내리는 줄 모르고
도처에 진열되어 있는 굳은 얼굴들
아 맛있겠다……
아 목말라……
그다지 슬프지 않은/서윤후
들판이 몸살을 앓으면 불도 잘 붙지 않더군요
방화범의 변명을 떠올리는 밤
밤에 도착해서 아침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을 깨워 내보내기 전에
나의 근사한 요리를 대접하는 것
품위는 지켰지만 어딘가 일그러지는
얼굴을 헹구는 세수
머나먼 길을 가는 사람일수록 대충 씻더군요
손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
굴뚝 속에서는 빛을 의심하는 직업을 갖는다
한 사람을 낳은 이불을 마당에 털고
한 사람이 빠져나간 주름을 가늠한다
다 빠져나가는 신비로움을
들이닥친 비에게 내줄 수 있는 방은
나의 폭풍우뿐
더 크고 웅장하게 범람할 수 있도록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누추한 태풍의 눈이 있어
휘몰아칠 적에도 볼 수 있는 것
내가 한 번 더 사랑한 것들
다시 손님을 기다리는 밤
나는 가장 다정한 환영 인사를 고르다가
들판에 불이 붙은 것을 본다
점점 밝아오는 어둠의 줄행랑을 본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찾아온 첫 손님이었지
매복/서윤후
밤에만 환해지는 백자귀 목마르고
나는 나를 떠나려고 하네
저의 완전한 고독을 믿으십시오*
흉터 직전의 욱신거림으로 나를 달래느라
젖은 줄도 모르게 오는 고백이지
여기는 어둠이 배긴 방이어서
온 사람도 없이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지
입술 없이 혀만 가져가는 곳
드물게 나를 베껴 적는 곳
분간하기 어려우니 어둠인 것이지
나는 알 수 없이 울창해지는 병을 얻고
살아 있다는 것은 그래
산성비와 진눈깨비도 걸음을 멈춘 태풍에
끊임없이 흔들려주는 것
혼자서 끊임없이 이 밤을 쇄도하는 것
시간은 질주하네 풍속도 없이
어둠의 우렁찬 송곳니처럼 나는 씹다가
깨문 혀에 벌떡 일어나는 아침조차 비껴갈 수 없으니
사실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이보다 더 어울리는 나는 없었다고
쪽문 모양으로 들어차는 밤빛에게 말하였지
그럴 리 없을 것 같은 일들로
진짜가 만들어지는 시절이군요 지금은
내 혼돈은 어둠 속에서 가장 희고 고운
발꿈치를 들고 맴돌았지
춤처럼 발악하라
음악처럼 사악하라
어둠을 거역한 순간부터 나는
반짝거리기 시작했지 눈이 멀어도 좋으니까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면서
향기만 남은 밤 이런 것은 뭐지
그것은 어둠이 내 고독을 의심했다는 증거
*다자이 오사무.
슬픈 지네/서윤후
가는 대로 돌아오는 정직한 벌레
나는 오늘부터 슬픔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여러 개 다리로 솟아나
방황하다 끝나버릴 줄로만 알았다
너희는 너희의 좀먹은 곳마다 살을 부대끼고
마치 한 몸처럼
가장 웅장한 속눈썹을 흉내 내기 위해
내가 낳은 것들이라니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는 바닥에서
끝날 줄 모르는 지네 잡기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슬픈 지네는 다시 몸을 구하러 다닌다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흩어질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은 인간을
아니면 한때 지네가 깊은 구덩이를 파놓았던 인간을
젖은 바닥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
발걸음을 모아 비 오는 이 지상을 찢는 것이지
서로를 짓이겨 계단 오르는 것을 보라
아픔에 아픔이 들어맞는
슬픈 몸통을 보라
낳은 대로 태어나는 슬픔을 이젠
아무렇게나 부르기로 했다
지네는 머리에서 가장 먼 자신의 다리를 잊고
휘청거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젖은 밑바닥을 횡단한다
그렇게 기어 다니는 슬픔보다 더 밑에
불러도 오지 않는 나는
깊을수록 좋은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지네도 잊어버린 머나먼 걸음 속에 있는 것이다
영원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그라운드 제로/서윤후
우리는 고작 십 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미래는 양껏 웃는다
아이는 공원에 앉아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언젠가 이곳에 있었던 것들이다
구경하던 아이는 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뒷모습인 채로
앞을 향해 걷고 있다 서로의 손을 움켜쥐고
꺼내 준 얼굴을 낙서하며
회전문의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되돌려 놓을 수 없게 된 시간 속에서
원점을 울리는 오르골이 된다
두 사람이 울창하게 서 있다
폐허에서 그들은 서로를 꺼내어 주었다
혼자가 되는 기분에 필요했다 서로가
만지거나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마음으로 비볐다
뺨과 입술과 눈물의 거리를
우리는 십 분 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은 흑백 사진으로 인화되고
아이는 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비축지대/서윤후
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 있고
모두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라서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내가 깨우지 못한 꽃들이 꺾여 가는 언덕을
좋은 경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견뎌 내고 있겠지 그런 얇은 믿음으로
멸종 직전의 수많은 이름을 불러 주었다면
아마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
남겨진 사람들은 청소부터 시작한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을 헷갈리면서
구호물품 속 컵케이크나
죽은 자의 숨으로 불어 놓은 풍선
무너진 선반을 받치는 선반
재난은 내게 아름다웠던 시간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림자도 없이 햇빛 속을 가로지르며 왔다
여기에는 아직 많은 것들이 쌓여 있지만
다행이라고 여기는 불길한 날들로부터
이번엔 손 흔들며 배웅하던 사람들을
기차에 태우고 떠나보내자
내가 슬픔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
아껴 둔 것들이 짓물러 가고
나는 이곳에 홀로 남겨져서 찾기 시작한다
두고 갈 것이 없는지
떠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작별인사 받아 줄 사람을
흑설(黑舌)/서윤후
눈을 치우는 사람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가
한 골목에 나란히 있다
그해 겨울엔 검은 눈이 내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내렸다
눈송이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빛보다 먼저 내려앉아 눈을 거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행이라는 물방울 속에 적설량을 감춰 왔나
사람들의 눈금을 지우며
쌓여 가는 검은 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들에게 소원을 빌었다
하얀 입김이 빚는 검은 눈사람의 형태를
눈이 녹아 가는 거리
그들은 이제 모두 같은 골목을 걸어간다
검은 눈은 세상의 하얀 것을 데려간다
없었던 일은 될 수 없겠지만
해프닝으로 남겨지기 위해
머리를 찾는 눈사람이 굴러간다
검은 눈은 사람들을 관찰자로 만들어 놓고선
이제 아무 때나 오지 않고
피오르드의 연인/서윤후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려웠다
개와 물푸레나무 울타리와 트랙터 발작과 키스......
하염없는 것들의 견고한 사랑으로 이루어졌으니
종종 당신의 예외가 되고 싶었던 모양
고전 속 은유들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내일이 무표정으로 찾아오는 것은
당신의 단골손님처럼 살아간다는 것
불 끄면 푸줏간은 이토록 무서운 곳인데,
물컹 꼬리를 밟고 우는 것도 정작 나뿐인 곳에서
위험한 쪽을 내다보지 않는 우리의 아늑함을
애태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서재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내가 숨길 것이 더 많아지는 일처럼
당신을 사랑한 이들이 두고 간 수많은 편지는
미응답 속에서 각자 품어온 열매를 베어 풀게 했다
나는 나만 겨우 매달 수 있는 텅 빈 나무를 기르느라
겨울에게 잠시 체온을 빚졌고
이웃의 다툼마저 살가워 보일 때
나는 누가 수선 맡긴 사람입니까?
찻잔도 그릇도 아닌 나는 어디가 바닥입니까?
당신을 닮은 겨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디에도 기울지 못한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쫓아오는 것은 모두 파편이었으므로
그게 나의 어디를 찌르게 될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눈을 뜨면 처음 만지는 게
당신의 얼굴이었다
공범/서윤후
뜸해져요 우리
갈 길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를 등한시해요
우리 잠시만 위로를 멈춰요 당신이 물을 길어오기 전에 나
는 땅굴을 파놓겠어요
검은 머리의 짐승이 울면 누군가는 목을 축인 것이고
숨어 있어요 잠시만 나타나지 말아요
석고상의 흰 눈알을 만지는 기분으로
마치 비밀의 부연 설명처럼 살고 있진 않았는지
부축을 그만하기로 해요
넘어지는 쪽에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진 말아요
누가 나타날 것 같다는 기대를 저버려요
멀리 가려는 당신의 마음을 볼 수 있어요 투시력 같은 건
믿음과 의심이 사랑할 때 생기는 능력이지요
두고 가는 것과 버리는 것이 다르듯
우리 서로의 나머지는 되지 말아요
더하고 뺄 것 없이 속삭여요
유행을 벗어난 거리에 걸려 있는 중절모처럼 당신은 쓰게
되는 날이 올 것 같지만
대머리만이 대머리의 기분을 이해해요
감출수록 돋아나는 우리는
모든 걸 멈추고 잠깐만 창피해져요
지금은 빨강이 필요하니까
우리는 과녁 앞에 쏟아져버린 화살이 되어
부러지더라도
희미해지지 말자는 약속을 해요
서로의 가장 빨간 부분을 겨누면서
멀리 가려는 뒷모습에
잘 가지 말라고 말하는
오늘은 당신이
내게 참 잘 어울리는 날이었어요
누가 되는 슬픔/서윤후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녹슨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 망설이던 말이 발을 절며 다가와 매일 낭떠러지
에 있다고 나를 종용하고
이제 등에 몰두하자는 말을 했지 두 눈동자의 주름을 펼치
며 바라보자고 했지 그러나 너무 많은 슬픔이 기성품이 되
어 집에 돌아온다 누구나 붙잡고 말하게 되는
마른 헝겊이 모자란 세계로 출국하고 바닷바람 머금은 손
수건을 선물하지 이 모르는 슬픔이 움직이는 이유를 잠깐
떠들고 싶다 비행운의 연기력처럼
포로의 잠꼬대를 닮은 위로만 해댔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등에 업고 가려고 해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헤맬
수록 정확해지는 그 주소로 향하려고 해
슬픔의 묘기가 나를 흉내낸다 눈물을 훔치던 네가 어디까
지 이야기했었는지 되묻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달
라고 간청한다 슬픔이 이렇게 반복된다면
신빙과 결속/서윤후
싸움이 끝난 뒤 깨진 화병은 누가 치우나
남겨진 사람은 조심성 없이 쓸어 담고
집 잃은 새를 보듬듯 꽃을 주웠다
종량제 봉투 앞에 서게 될 때
그렇게 향기가 스민 어둠은 밤새 사라지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생각하면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눈감으면 비로소 눈뜨는
화병에 베인 손날의 붉은 눈
유월의 신호위반 딱지가 팔월에 날아온다
빙빙 돌려서 하게 되는 말은
멈춰야만 알 수 있는 팽이의 표정 같아
어둠이 붙잡아둔 빛과의 일화
바깥은 어떻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는지
잠시 멈춰 서면 보이는 것이 있고
휘몰아쳐서 뒤섞인 모든 풍경이 검정으로 갈 때
나는 섞이지 못한 색깔처럼 분명해지고
나를 바라보는 종려나무 한 그루가
물 한 번 준 적 없는 내게
눈동자 위로 흐려진 것을 공짜로 털어준다
어둠은 어둠에게만 친절한 법이지
형편없는 예의를 갖추고서
창문을 거울 보듯 한다
까마득하다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
미도착/서윤후
양생 중인 바닥을 갖고 싶다
지금은 도착에 대해 생각 중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떤 무지가 될래?
약속에 늦는 사람은 내 기다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것은 불시착일 수도 있고
게워낼 수 없는 주소일 수도 있다면
천장을 하늘이라 여길 만큼
어둡고 깊은 곳에 나는 먼저 와 있었다
매일 시동 거는 꿈을 꾸고
매일 난분분한 바닥을 짐작했으며
떨어지는 법을 배운 적 없이 추락을 쌓고
들이닥친 빛 한 줌이
내가 누비던 바닥을 훤히 비췄을 땐
내 손바닥 자국을 누더기로 쓴
악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서
먼저 갈게, 말하고 여태껏 기다리게 된 진동하는 심장
나는 몇 시간째 양생 중인 바닥을 보고 있다
우리 산업의 도착은 콘크리트 재질
끝없는 나락 속에도
콘크리트 입장을 앞둔 사랑의 반죽이 있고
누가 나를 낳았던 깊은 지하에도
휘갈긴 우중충한 사랑이었고
그 후로 나는 도착하지 않는 생각이다
흐르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을 푹 담그고는
신발 밑창을 다시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나아가는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다
약속에 늦게 나타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하자
자꾸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가 나를 근처 스키야끼집이나 우동집에 데려가면
나는 양생 중인 바닥을 잊고 만다
그건 내가 지워지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뜻
아무도 도착할 수 없는 바닥이 될래?
식당 앞에는 끝없는 줄이
끝없게도
발광고지(發光高地)/서윤후
버려진 산소호흡기를 핥다가
어린 고양이 입김 서리는 것을 본다
무언가 닦아내면 어떤 것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이를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아른거림만이
유일한 궁금증
또, 또 지리멸렬한 날씨
무너진 성곽이 더이상 관여하지 않는
잘 닦아놓은 미래가 있었다
모두가 돌아오게 되는 반환점으로
숨쉬는 것을 가엾어하게 되는 전개를 펼치고
그 사이사이의 안개
오리무중의 발진이다
창광하는 밤 벌레들처럼 거리로 나온
아침 인간의 얼굴을 구경한다
전망할 수 없는 표정들에 휩싸여 있으면
어린 고양이의 숨 같은 건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또, 또 어두워지려는 심장
들리지 않는 것을 어둡게 하면
꿈 밖으로 나와 소리치는 빛
환호는 환희의 별미라도 되는 듯이
인간을 재주넘는 (영혼, 마음 다음에 생각나는 것) 취미
활동
무담가의 구구절절한 침묵을 듣는다
사랑은 절판된 기억으로 세워져 있다
그들은 모두 옛사람 같다
세련된 스카프를 해도
영어로 된 개 이름을 불러도
죽음이 신간처럼 여전히 새롭다는 사실은
새로울 게 없다
푯말의 역사를 읽는다던지
소문이 눈앞 미래로 유인한다든지 하는
장례식장에 막 납품된 수육의 뜨거운 김
아무도 배고프지 않은 곳에서 해치워나가게 되는
무엇이 신비로운 감옥을 짓는가
그 안에서 알고 싶어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또, 또 아름답기 위해 사라지는 것들
어제 입었던 옷을 입는다
이변이 없는 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몇 개의 부음을 화면에서 쓸어넘긴다
열몇 개 와이파이 중에
비밀번호 들어맞는 게 없다
매일 두절되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있어
어두운 것 중에 가장 어둡지 않은
그런 머리색을 가진 학생이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전속력으로 달려나간다
아무도 없는 우리/서윤후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
여기는 이미 다 읽어본 슬픔뿐이니까
우리는 눈물을 감싸고 있던 껍질처럼
바스라지면서 만나게 될 거야
텅 비어 있더라도 놀라지마
세계는 약속의 묘지였으니까
제철 과일 실은 푸른 트럭이 오고
길 잃은 전조등과 후미진 형광등 오고
헤어진 사람의 얼굴을 베낀 눈이 내리고
심부름 간 아이가 등 굽어 오고
찢어버린 책들이 펄럭이며 내려앉고
이웃들은 이제 모두 손을 흔드네
헤어지는 일에 솔선수범하게 되었지
환송되는 기도들이 닿지 못했던 곳에
용서가 있을 거야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이름의 험준한 소표
집에 돌아가 불을 켜고 창문을 열자
슬픔을 시작하기
심장구슬을 윤이 나게 닦기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번져나가는
불길 속에서 따뜻함 찾기
태어나는 것을 꾹 참고 슬픔이 차려준
스프에 빠진 바늘
입체 과일
갓 구운 빵만큼의 입김을
돌아오느라 수고한 우리들의 발을 씻어다가
햇빛에 바짝 굽자
오고 있는 것들이 세상을 시작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