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항. 1899년 대한제국이 이 항구를 개항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군산을 스쳐갔다. 서글픈 식민의 풍경 속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조선사람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조선을 찾은 일본 서민과 자본가까지. 군산이라는 도시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애써 지우지 않고 21세기 대한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보존해놓았다. /사진가 서경석
이 가을 항구도시 군산으로 많이들 가봤으면 좋겠다. 되도록이면 근대사 공부를 하고 가면 좋겠다. 그러면 미곡(米穀)을 수탈당한 군산항은 평화로운 산책로로 변해 있을 것이다. 일본으로 향한 욕망 가득한 쌀가마가 쌓였던 장미동(藏米洞)은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이 응축돼 있던 조선은행은 근대 건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조선 농민을 부려 대형 농장을 경영했던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 별장은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의학박사 이영춘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군산에는 그 모든 역사가 일상화돼 있고, 그 일상 속에서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역사를 호흡하는 것이다. 한 단어로 종잡기 불가능한, 이 땅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시작.
군산의 개항과 미곡상 히로쓰
1898년 5월 26일 대한제국 정부는 군산을 외국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경남 마산과 함북 성진도 함께였다.(1898년 5월 26일 ‘고종실록’) 이듬해 5월 1일 군산이 정식으로 개방됐다. 군산 개항은 쌀이 필요한 일본 측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호남에 펼쳐진 곡창을 일본과 연결할 수 있는 최단거리 물류지가 군산이었다. 군산은 순식간에 상전벽해의 땅이 되었다.
1892년 염전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조선 부산에 와서 살던 히로쓰 기치사브로(廣津吉三朗)는 1895년 청일전쟁 통역관으로 취직해 2년 동안 일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9년 뒤인 1904년에는 러일전쟁 첩보원으로 또 징병돼 남포와 평양과 압록강과 만주 봉천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나고 받은 생명보험금 450엔으로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인 지주와 합작해 군산에 미곡상을 차렸다. 땅을 사서 지주도 되었다.(후지이 가즈코, ‘식민도시 군산의 사회사1- 신흥동 일본식가옥과 히로쓰집안의 역사’,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 기요 115집,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연구회, 2012)
군산 하면 쌀이고 그때 쌀 하면 곧 돈인지라 히로쓰는 이내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인에게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큰 집을 지었다. 1935년이다. 그 집이 지금 군산 신흥동에 있는 ‘히로쓰 가옥’이다. 누가 봐도 큰 집이었고 누가 봐도 조선이 아니라 일본 그 자체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그 큰 부(富)를 그대로 놔두고 가방 하나 들고 귀항 티켓을 샀지만 부산항에서 그 가방마저도 도둑맞았다. 적수공권으로 귀향한 히로쓰는 4년 뒤 화병으로 죽었다. 그 집은 지금 군산에 남아 있다.
히로쓰 가옥. 군산에서 미곡상과 농장을 경영했던 일본인의 흔적이다./박종인
임피 사람 이진원(86)의 기억
“우리 아버님이 한의사라 비교적 잘살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일본 사람 옆에 가도 못 했어요 무서워서. 우리 집 옆에 직사각형으로 터를 잡고 수천 평, 조선 사람들은 주변에 토막집 그냥 천막처럼 지어놓고 사는 거예요. 80년 전이네. 제가 여섯일곱 살 됐을 때 그 일본사람 집에 넓은 밭이 있었는데 팥을 심는 거예요. 그걸 작은 부삽으로 심는데 그게 신기했어요. 내가 꼬마니까, 왜 그랬는가 몰라요, 울타리 너머 가서 그 부삽을 가지고 와서 우리 집 마당 도랑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막 거인이 부엌을 통해서 들어오더니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려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기절을 했습니다. 깨어나서 보니까 우리 누님하고 어머니가 나를 안방에 뉘어 놓고 울고 있는 거예요. 그게 기억이 나요. 아주 그냥, 일본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고 우리는 그냥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인식을 가졌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학교 선생님이 그래요. ‘이제부터 마음대로 조선말 써도 된다.’ 아, 이게 해방이구나 하고 느꼈더랬습니다.” 미곡을 실어나르던 임피역은 2008년 영업을 멈췄다. 역 앞 공원에는 거꾸로 가는 시계탑이 서 있다. 탑신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시실리(時失里)’, 시간을 잃은 곳.
'악덕지주'와 '의료사업가'라는 이중적 기억, 구마모토 리헤이. /이주민 제공
시마타니의 금고, ‘악덕지주’ 구마모토
개정면 발산리에는 발산리 유적군이 있다. 안내판만 보면 옛 절터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자기 농장에 그러모은 옛 석물들이다. 몇 개는 훗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1903년 조선에 건너온 이 야마구치현 출신 중년 사내는 농장 안에 금고를 ‘지었다’. 2층 건물 하나를 콘크리트로 지어서 금고로 썼다. 해방이 되고 농장은 초등학교로 변했다. 금고, 발산리 유적은 학교에 남아 있다. 미군정청에 귀화를 신청했으나 불허됐고, 시마타니 또한 히로쓰처럼 가방 두 개 들고 귀국선을 탔다.
군산 발산리 유적군. 농장주 시마타니가 자기 농장에 수집해놓은 옛 석물들이다. /박종인
시마타니보다 한 해 전 군산에 온 구마모토 리헤이는 게이오대 이재과(경제학과) 출신이다. 호남 옥토(沃土)를 본 구마모토는 물주를 모아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이어 호남 지주로는 가장 땅이 넓었고, 관리인들은 ‘총독부 정책보다 10년 정도 앞섰다고 농장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농업 전문가들이었다.(’화호리,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기억1′,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p36) 갑부가 된 구마모토는 군산에 당대 최고 재료만 써서 별장을 지었다.
농장은 생산성도 높았지만 조선 농부들에게 물리는 소작료도 고율이었다. 소작료를 둘러싸고 총독부가 나설 정도로 갈등이 깊었다. 소작민들이 “소작료 주고 나면 먹을 게 없어서 못살겠다 싶어 만주로 가는” 슬픈 일이 다반사였다.(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20세기 화호의 경관과 기억’, 눈빛, 2008, p47)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이영춘. 구마모토 농장 무료진료소에서 활동했다. /이주민 제공
의료사업가 구마모토의 별장, 이영춘 기념관
그런 반면 1934년 농장 안에 병원을 설치하고 소작인과 그 가족에게 무료 진료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 사업을 위해 고용된 의사가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 이영춘(1903~1980)이었다. 평남 용강 사람 이영춘은 이후 군산 사람이 되었다. 이영춘은 구마모토가 한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게 농장의 정략 사업이라 혹평할지 모르나 이 선생만은 진의를 이해해주시라.” 그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해 일부러 소작을 신청하는 조선인도 많았다.(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p28)
구마모토 별장, 그리고 이영춘 기념관. /박종인
해방이 되었고, 구마모토 또한 농장을 두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영춘은 그가 남긴 별장에 살았다. 그 옆에 병원을 짓고, 간호학교를 짓고, 진료를 하고 강연을 하며 농촌 보건 사업을 벌이다 1980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남에게 주고 죽었다. 삼촌을 보며 자라나 치과 의사가 된 조카 이주민(78)이 말한다. “삼촌 행적이 찬란해 똑같이 살려고 노력했는데, 어쩌면 돈 못 버는 것까지 똑같이 살았네.” 구마모토가 남긴 별장은 지금 남김없이 주고 간 이영춘 기념관이 되었다.
그렇게 같은 바닷바람 속에서 같은 시대에 서로 다른 방향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해본다, 그 도시에 남은 흔적에 대하여.<다음 주 계속>
② 황제 지주제를 설계한 대한제국
[박종인의 땅의 歷史]대한제국 황실이 설계한 식민 수탈 시스템
군산 들판. 지평선이 보이는 이 들판은 고려 말 왜구부터 구한말 근대 일본까지 조선을 침략하는 큰 원인이 됐다./박종인
왜구와 군산항 뜬다리
14세기 고려 내륙까지 쳐들어왔던 왜구(倭寇)가 노린 목표는 쌀이었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노리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순신이 방어한 곳도 곡창 지대 호남이었다. 고려 말 호남 세미(稅米)을 모은 진성창이 군산에 있었고, 진성창을 공격한 왜구를 최무선이 물리친 진포해전도 군산에서 벌어졌다.
전북 군산항에는 ‘뜬다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식민시대 호남평야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싣고 가는 대형화물선 접안시설이다. 간조와 만조 물때에 따라 수면 위로 뜨고 내리는 부잔교다. 당시 대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받으며 소작농을 통해 쌀을 생산했고, 생산한 쌀은 많게는 생산량의 절반을 일본으로 팔았다. ‘식민지 지주제’라는 이 토지 시스템은 대한제국 황실이 실질적인 설계자였다./박종인
그 군산항에는 뜬다리가 있다.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 왜구 이후 마침내 조선 침략에 성공한 일본이 만든 대형 콘크리트 접안 시설이다. 1926년 이후 ‘왜놈들이 우리의 고혈을 빨아 먹기 위하여 쌀을 실어 내갈 목적으로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다리다.(1948년 11월 30일 ‘군산신문’) 해방 뒤에는 ‘뻣정다리처럼 삐쭉하니 병신이 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앞 신문)가 됐지만, 뜬다리는 간조와 만조 수위에 따라 시설 전체가 오르내릴 수 있는 첨단 구조물이었다.
군산은 일본이 호남 지역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항구도시였다. 그 쌀을 군산으로 운반하기 위해 전주~군산 도로(1908)를 만들었고 익산~군산 철도(1912)를 만들었다. 철저하게 쌀을 위해 만든 도시였다. 그리하여 해방이 됐을 때 군산은 ‘미처 몇 달 가지 못해 선박 출입이 전연 없이 말할 수도 없이 한산해진’ 항구가 돼 버렸다. 지금 군산은 전쟁과 전후 눈물 나는 노력으로 재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지금 군산항 풍경 속에는 저 끔찍한 기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일본이 어떻게 자기네 식민지 조선에서 쌀 ‘수탈’에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보기로 하자.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일본 미곡 수탈의 설계자는 대한제국이었다.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 목적은 조선의 토지 실태 파악 및 근대적 소유제도 확립이었다. 일찍 근대화한 일본과 동질 구조를 만들어야 지배가 용이했다. 그리고 지배 구조에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땅이었다. 특히 봉건 지주-소작농이 역사적으로 결합돼 있는 농지는 말 그대로 접수 대상 0순위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쌀 소비량이 폭증하던 시기였다. 이미 값싼 조선 쌀을 수입하던 일본은 식민지화와 함께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곧바로 토지조사에 들어가 국유지 실태를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토지 측정과 서류 조사를 통해 조선 토지 실태를 파악했다. 그때 만든 토지대장이 21세기 대한민국 토지 측량에 여전히 쓰인다. 이때 통감부와 총독부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법 체계에 없는 관습적인 조선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조사가 완료돼 국유화된 토지에 대해 행정적 이의 제기는 허용하지 않는다.
관습적 소유관과 행정적 이의 제기는 모두 일본 본국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된 농민의 권리이고 구제 방식이었지만 조선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다.(남기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개념과 소통 27권0호, 한림과학원, 2021)
이런 원칙으로 이뤄진 토지조사 결과 대규모 토지가 국유화됐고, 그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대지주에게 불하돼 농장으로 변했다. 고율의 소작료를 내며 소작인들이 거둔 쌀은 군산 뜬다리 부두를 거쳐 쌀값 경쟁력이 높은 일본 시장으로 건너갔다. 저가인 조선 쌀 수입에 일본 농민들 반발이 심했지만 조선에 있는 대지주들은 거부(巨富)를 쌓았다. 이런 미곡 생산 시스템을 ‘식민지 지주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행정적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고 관습적 소유권을 부정한 토지 수용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정답은 대한제국이다. 더 정확하게는 대한제국 황실이 그 설계자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의 금고 건물. 미곡 생산과 수출이 만든 거부(巨富)의 상징이다./박종인
구한말 국유지 조사
봉건 조선 농업은 이러했다. 국가와 왕실, 민간 대지주는 자기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땅 없는 농민은 그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냈다. 대개 소작료는 병작반수(並作半收), 수확한 곡식 절반이었다.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그 지주제의 모순과 탐관오리의 부패가 원인이었다. 가혹한 소작료와 더 가혹한 세금과 부패에 질린 백성은 세금 포탈을 위해 땅을 숨겼고, 소작농은 고향을 벗어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1894년 8월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갑오개혁정부는 국유지로 분류된 땅에도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하고 전국에 있는 국유지 조사에 착수했다. 각 역원(驛院) 소속 역토(驛土)와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둔토(屯土), 왕실 소유 궁방전(宮房田)이 대상이었다. 주민이 농사를 짓고, 해당 역과 관청이 소작료를 받는 땅들이었다. 조선정부는 500년 동안 면세(免稅) 대상이던 이들 땅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895년 9월 처음 현장에 나간 관리들이 조사를 해보니, 어떤 국유지들은 엉뚱한 사람들이 지주(地主)라며 서로 땅을 사고팔고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받고 있지 않은가. 몇 백 년 건드리지 않았던 땅에 자연발생적으로 주인이 생기고 땅 거래가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매매계약서가 ‘권축(卷軸·두루마리)을 이룰 정도로’ 몇 백년 대대로 거래를 해온 땅도 있었다.(배영순, ‘한말 역둔토조사에 있어서의 소유권분쟁’, 한국사연구 25, 한국사연구회, 1979)
갑오개혁 정부의 토지개혁
갑오개혁 정부가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내건 원칙은 ‘어떤 땅이든 경작하는 사람이 세금을 낸다’였다. 언뜻 보면 ‘경자유전’ 원칙과 유사하게 읽히지만, 실질은 매우 달랐다.
국가 소유로 확정된 땅에 농사짓는 농민은 그때까지 각 관청에 내던 소작료와 함께 중앙정부에서 납세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중과세라는 농민들 항의에 정부는 “소작료는 해당 관청에 내는 것이고 세금은 중앙 탁지부에 내는 게 마땅하다”며 이중과세 주장을 일축해버렸다.(1896년 11월 ‘각도각군소장보고’ 3책 ‘개성부송서면 사포둔민의 소장’, 배영순, 앞 논문 재인용)
대한제국의 역주행
1897년 3월 아관파천에서 복귀한 고종이 명을 내렸다. “토지를 군부(軍部)로 이관하라.”(1897년 3월 10일 ‘고종실록’) 군부는 민씨 척족을 비롯해 고종 최측근이 도맡아하던 부서였다. 그리고 국가가 지주(地主)로 변신한다.
군부는 현금으로 받았던 소작료와 세금을 다시 곡식으로 받는 도조(賭租)로 징수 방식을 바꾸고 소작료 또한 민간 농지 소작료에 달할 만큼 인상해버렸다. 쌀값이 폭등하고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하락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조치였다.(김양식, ‘대한제국기 역둔토에서의 항조 연구’, 역사학보 131, 역사학회, 1991)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등극했다. 3년 뒤 고종은 국유지 담당 부서를 내장원(內藏院)으로 변경했다.(1900년 9월 30일 ‘탁지부각부원등 공문래거안’ 3책, 배순영, 앞 논문 재인용)
‘황제 지주제’의 완성과 내장원
내장원은 황실 금고를 담당하는 부서다. 부서장인 내장원경은 이용익, 고종 최측근이다. 이용익은 돈을 찍어내는 전환국장(1899), 탁지부협판(1900), 탁지부대신서리(1901), 토지 조사 및 등록 사업부서인 지계아문(1901)과 양지아문(1902) 부총재를 연달아 혹은 동시에 지낸 인물이다. 대한제국 재정을 한 손으로 움켜쥔 사람이었고, 바로 그 사람이 황실 금고를 지키는 내장원경이었다. 개혁정부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이 농상공부에서 탁지부로, 군부, 그리고 마침내 황실로 그 주체가 바뀐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진행된 이 토지개혁을 ‘광무양전’이라고 한다.
1900년 광무양전을 위한 사전조사 원칙(‘사검겸독쇄장정’)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첫째 기존 조사와 무관하게 토지를 남김없이 재조사할 것, 둘째 징세를 거부하는 자는 장을 때려 옥에 가두고 납세를 독촉할 것(杖囚督捧·장수독봉), 셋째 도조가 낮은 곳은 농민을 지도한 뒤 인상할 것.(이윤상, ‘대한국기 황실 주도의 재정운영’, 역사와 현실 26권, 한국역사연구회, 1997)
과중한 징세에 전국적으로 납세를 거부하는 민란이 벌어지자 1902년 고종은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2년 뒤 고종은 “상납이 부실하다”며 감독관을 재파견했다.(‘훈령조회존안’ 54책 1904년 8월 1일 훈령 각도관찰사, 이윤상, 앞 논문 재인용)
그렇게 국유화된 토지에서 세금과 소작료가 징수됐다. 1896년 5만1000냥이었던 내장원 토지세 수입은 1903년 500만냥이 넘었다. 500만냥이 넘는 그 돈은 모두 국가가 아닌 황실로 귀속됐다. 국가 재정 담당 부서인 탁지부는 ‘당장 한 달 경비가 부족해 집부허산(執簿虛算·장부만 보고 헛계산)을 하며 벌 몇 마리가 빈 벌집 지키듯 할 정도’로 금고가 비어 있었다.(1898년 12월 28일, 1899년 3월 1일 ‘황성신문’)
황제 지주제와 식민지 지주제
근대 소유권 확립이 아니라 ‘황제의 지주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사였다. 이 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두루마리로 쌓아놓은’ 민간 매매 문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유지에 관습적⋅역사적으로 존재하던 지주들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농민에게 내장원은 ‘이미 조사가 집행됐으므로 사유지라는 주장은 부당함’이라고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배영순, 앞 논문) 수백년 국유지를 거래하며 살던 농민들은 국가 아니 황제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내장원은 경리원으로 바뀌었고, 통감부와 총독부는 그 틀대로 식민지 지주제를 완성했다. 여기까지가 군산에 뜬부두가 서게 된 역사적 경로다.
식민시대, 그 이중적인 삶과 기억과 군산에 남은 흔적들
278.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3(끝) 구마모토 농장과 의료 선구자 이영춘
군산 동국사. 1913년 구마모토 리헤이를 비롯한 군산 지역 일본인 시주로 만든 금강사가 원형이다. 지금도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남아 있다. 식민시대 탐욕으로 점철된 삶이 있었고, 단칼로 재단하기 어려운 삶이 있었다. 식민 본국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식민지 조선의 삶은 요동쳤다./박종인
# 세월과 공간을 넘어, 이성당
남원 사람 이석호는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해 살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군산 중앙통에 정착해 빵집을 냈다. 이름은 이성당(李盛堂)으로 지었다. 이씨가 번창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948년 6월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옆집 적산가옥으로 가게를 옮겼는데, 지금은 이석호의 집안 손주 며느리 김현주(59)가 주인이다.
지금 이성당 주소는 군산시 중앙로177인데, 해방 전 주소는 군산부 메이지마치(明治町) 2초메(丁目) 85번지2였다. 거기에는 1906년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出雲)에서 군산으로 이주한 히로세 야스타로가 운영하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 이름은 이즈모야(出雲屋)다.
1981년 군산을 방문한 히로세의 손녀 쓰루코는 자기네 빵집 자리에 있는 빵집 문을 열며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함한희 등, ‘빵의 백년사’, 전북대 무형문화연구소, 2013, p21) 이 글은 빵집 이즈모야와 이성당, 그리고 세월과 공간을 초월해 군산에서 벌어졌던 삶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군산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 뒷뜰. 이 자리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모은 석물(石物)이 박물관처럼 모여 있다. 상당수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박종인
# 농민을 옥죈 소작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만 35년. ‘왜 일본이 그 식민 시대를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부질없다. 자기네에게 득이 되니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조선에게 득을 주려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조선인은 매년 지주는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자작 겸 소작으로 화하고 자작 겸 소작은 순소작으로 화하는 반면에 일본인은 매년 소작은 자작으로 화하고 자작은 지주로 화하여 매년 농가 호수가 증가하는 까닭에 조선인의 생활 상태는 나날이 퇴보하여 살 수 없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북만주로 향하게 되었다.’(1928년 8월 1일 동아일보 ‘매년 3000여 정보가 일본인의 소유화’)
500년 동안 조선 농민을 옭아맸던 소작제는 식민 지주제로 진화했다. 식민 조선 농민은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 땅을 빌어먹으며 살아야 했다. 조선 쌀은 분배 단계에서는 그 지주에게, 가공 단계에서는 대규모 정미업자에게, 최종 유통 단계에는 이출항의 대규모 이출상인에게 집중된 분배와 유통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송규진, ‘일제하 쌀이출 좁쌀 수입 구조의 전개 과정’, 사총 55권0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2)
# 떼부자가 된 지주들
생산성은 증가했고 쌀 생산량 또한 증가했지만, 이런 독점적 유통 구조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비율은 더 증가했다. 1910년 조선 쌀 생산량은 1040만석이었는데 수출(일본 이출 포함)은 83만석으로 7.98%였다. 그런데 1928년 생산량 1351만석 가운데 49.65%인 671만석이 일본으로 나갔다. 1931년에는 생산된 쌀 가운데 54.29%가 대일 이출 물량이었다.(‘조선총독부총계 연보 농업편’) 그동안 잡곡을 포함한 조선 내 일본인-조선인 곡식 소비량은 2.03석(1915~1919)에서 1.64석(1930~1936)으로 감소했다.(菱本長次, ‘朝鮮米の研究’, 千倉書房, 1938, p703: 이상 송규진, 앞 논문 재인용) 그런데 조선 내 일본인은 쌀 소비량이 1920~1928년 1.20석으로 변동이 없지만 같은 기간 조선인 쌀 소비량은 0.62석에서 0.52석으로 감소했다.(이여성 등, ‘數字朝鮮硏究’ 1권, 세광사, 1931, p37) 재한 일본인은 쌀을 양껏 소비했고, 조선인은 부족한 쌀을 잡곡으로 충당했다는 뜻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중반 조선은 대일 쌀 생산기지 역할을 했다. 이 시기는 조선 농민들이 대지주로부터 수탈당한 시기가 분명하다. 대일 쌀 이출(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수출’이 아니라 ‘이출’이라고 한다)로 돈을 번 집단은 지주들이었고 소작 농민들은 고액 소작료와 고리대로 힘든 삶을 살았다.
조선 시대 평균 50%였던 소작료를 식민 시대에는 70%가 넘게 받는 지주들도 있었다. 여기에 비료와 볏짚, 종자 값을 별도로 책정했다. 아무리 생산량이 증가했어도 지주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일본인이 됐든 조선인이 됐든 지주에 대한 적의와 피수탈의 경험은 민족 차원의 수탈로 각인됐다. 1930년대 말 전국 500정보(150만평) 이상 대지주 가운데 조선인은 43명이었고 일본인은 65명이었다.(’화호리, 일제강점기 농촌 수탈의 기억1′,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0, p27)
구마모토 리헤이.
#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와 군산
그 대지주 가운데 조선반도 1위가 군산과 정읍 일대에 대농장을 소유한 구마모토 리헤이였다. ‘수탈’로 상징되는 모든 일이 구마모토 농장에서 벌어졌다. 70%가 넘는 소작료, 비료와 볏짚 비용 소작인 전가, 계약 위반 시 소작 계약 일방 해지 등등.
구마모토 농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거대한 쌀 창고가 가마니를 공룡이 먹이를 빨아들이듯 했다’고 기억한다.(함한희 등, ‘식민지 경관의 형성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 한국문화인류학 43권1호, 한국문화인류학회, 2010)
한때 대지주 구마모토 별장이었다가 더 오랜 세월 농촌 보건의 아버지 이영춘의 사무실로 쓰였던 군산 이영춘 기념관.
그런데 그때 지역 신문인 ‘군산일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구마모토를 비롯한 (전북) 지방 지주들은 토지와 농사 개량, 소작인 지도에 열심이지만 소작료 징수에는 다소 비난을 받고 있다. 다작(多作)하여 다취(多取)하는 주의인데 다취가 과하다는 비난이 없지 않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반면 (조선인 대지주인) 현준호 같은 사람은 경영 방식이 상당히 원시적이고 소작료는 아버지 시대 그대로이지만 소작인 지도도 별로 하지 않아 오히려 좋지 않다는 비평까지 있다.’(1935년 9월 19일 군산일보 ‘전남북 지주 색채 양분’)
구마모토가 ‘소작료를 많이 취한(다취‧多取)’ 악덕 지주인가 혹은 ‘근대 기술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인(다작‧多作)’ 자본가였나에 대해 당시에도 여론이 엇갈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기가 수확한 쌀을 절반 이상 바친 조선 농민에게 구마모토는 그냥 지주가 아니라 악덕 ‘일본인’ 지주였다. 대신 구마모토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아주며 먹고살던 가난한 일본인 시가(志賀)는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초라한 사람’으로 낮춰보며 살았다.(함한희, 앞 논문)
# 선한 지주 구마모토, 선한 의사 이영춘
1935년 6월 17일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에 근무하던 이영춘이 일본 교토제국대 의학박사 학위논문 심사에 통과됐다. 조선인 지도교수 윤일선 아래 조선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박사였다.(1935년 6월 19일 ‘동아일보’) 사흘 뒤 경성 조선호텔에서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지주가 세브란스 교장 오긍선을 만나 병리학교실에 3년간 연구비 500원을 매년 지원하겠다고 약정했다. 이영춘은 8월 31일 정식으로 일본 문부성에서 박사 학위 인가증을 받았다.(같은 해 6월 23일, 9월 1일 ‘조선일보’)
이영춘
1호 박사가 확정되기 두 달 보름 전인 4월 1일, 이영춘이 학계와 의학계를 버리고 구마모토 농장 조선인 전담 병원 주치의로 취직했다. 구마모토는 본인이 운영하는 재일 조선 유학생 장학회 혜택을 받은 조선인 의사들에게 먼저 의뢰를 했으나 거절당한 터였다.(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p27: 영문학자 이양하도 구마모토 장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취직을 청하는 구마모토에게 이영춘은 “월급이 아니라 무료 진료가 목적이니 귀하가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답했고, 구마모토는 총독부 의원부 고등관 월급인 150원을 주겠다고 답했다.(이영춘, 앞 책, p23)
조선인 진료는 전액 무료였다. 이영춘에 따르면 구마모토는 ‘수일 전까지 건강하던 소작인이 농장 앞 공동묘지로 장사(葬事)해 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하고,’ ‘수의사는 두 명이나 두고도 가장 중요한 소작인 질병에 대비하지 못해 자책감을 느꼈다’고 했다.(이영춘, 앞 책, p26)
이영춘은 또 구마모토가 한 말을 이리 기억한다. “세상은 선의의 사업도 호평하려 하지 않는 법이니, 우리 무료 진료 사업도 농장의 정략 사업이라 혹평할지 모른다. 이 선생만은 내 진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구마모토 농장 자혜진료소 문 앞에는 연일 소작인과 가족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영춘은 1935년 첫해에만 환자 7000명을 진료했고 연인원으로는 3만명을 진료했다. ‘지랄병 발작’이라는 응급 요청에 회충약만으로 순식간에 치료된 아이도 있었다. 소작인을 가장해 찾아오거나 소작권을 사려는 사람도 생겨났다.(이영춘, 앞 책, p28)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날랐던 임피역./박종인
# 해방, 그리고 그들
해방이 되었다. 구마모토처럼 군산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시마타니 야소야는 개정면 발산리 농장에 그동안 수집한 석물(石物)과 농장을 그대로 두고 귀국했다. 농장에는 2층짜리 콘크리트 금고 건물도 있었고, 석물 몇몇은 훗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인 동시에 식민지에 각인해둔 탐욕의 흔적이다. 농장 앞에서 말편자를 박던 일본인 사기는 어찌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구마모토 또한 모든 걸 놔두고 두 번 다시 조선으로 오지 못했다. 도쿄 조선인 YMCA는 용산에 고아원을 운영했던 소다(曾田)와 구마모토에게 감사장을 증정했다. 이영춘은 1961년 일본에서 구마모토와 재회했다.(이영춘, 앞 책, p45)
이영춘은 구마모토농장 병원을 인수해 농촌보건사업을 계속했다. 간호대학을 설립하고 병원을 증설하고 농촌을 순회하며 보건 활동을 벌이다 1980년 재산 하나 없이 죽었다. 사무실로 쓰던 군산 구마모토 별장은 이영춘기념관이 됐다. 그는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아버지다. 큰아버지를 보며 자란 조카 이주민(78)은 의료와 봉사 그리고 가난까지 똑같은 길을 걸으며 군산에 살고 있다.
2011년 이성당 대표인 집안 며느리 김현주와 이즈모야 창업주 손녀 히로세 츠루코가 일본에서 만났다. 츠루코는 사위와 함께 이마리시에서 제과점을 운영했다. 사위에게 넘길 때까지 제과점 이름은 이즈모야였다.<군산기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