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714 역사학과 김지희 김만덕기념관 답사보고서.hwp
20141714 역사학과 김지희 효사정 답사보고서.hwp
김만덕기념관(金萬德紀念館) 답사보고서
강의명: 인물로 본 조선시대사
교수님: 박경하 교수님
제출일: 2018. 11. 25
학번: 20141714
이름: 김지희
답사 일자: 2018. 11. 16
2015년 개관한 김만덕기념관은 제주 제주시 산지로 7에 위치하고 있다. 설립 목적은 나눔과 베풂을 몸소 실천한 김만덕의 삶과 그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 널리 전파하기 위함이다. 전시관은 1층의 나눔문화관, 2층의 나눔실천관과 나눔명상관, 3층의 상설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설전시관에는 김만덕의 영정이 있었고, 그녀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또한 후세들이 남긴 기록자료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김만덕은 1739년(영조 15)에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12살에 부모님을 잃고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다. 김만덕이 노래와 춤에 뛰어나고, 거문고에도 능숙하자 기녀는 김만덕을 기녀로 만든다. 이후 생활에 여유가 생긴 김만덕은 관가에 나가 기녀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목사인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양녀로 환원시켜달라고 요청하여 결국 양인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김만덕은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1793년 제주도는 계속되는 재해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쳤다. 이때 김만덕은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하여 제주민들을 살려내었다. 이 일은 당시 임금인 정조 귀에까지 들어가, 명예직이긴 하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여성으로서의 최고의 벼슬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었고, 김만덕은 당시 여성은 육지에 갈 수 없다는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고 여성 제주도 여성 최초로 금강산을 관광하게 되었다. 김만덕은 “재물은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양인 신분 회복 후 시작한 장사에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워 지켜 나갔다. 첫째로는 ‘싸게, 그러나 많이 판다’로, 박리다매를 원칙으로 기녀 생활의 경험을 살려 제주 양반집 부녀자들이나 기녀들에게 옷감, 장신구, 화장품 등을 싼 가격에 팔면서 그 양을 점차 늘려 큰 이익을 남겼다. 둘째로는 ‘알맞은 가격으로 사고판다‘ 즉 정가매매를 원칙으로 삼았다. 큰 이익이나 눈앞의 이익을 보려 하기보다 판매자나 소비자 모두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적정 가격으로 변함없이 거래하였다. 셋째로는 ’정직한 믿음을 판다‘로 신용본위를 원칙으로 삼았다. 정직한 신용으로 철저하게 상거래를 하며 돈이 아니라 인간의 정직과 성실성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장사 철학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 주변 이들을 도왔다. 김만덕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를 넘고 여성의 몸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제주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정조는 사회경제 개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김만덕의 삶을 널리 알려 자신의 개혁 의지를 밝히고자 신하들에게 김만덕의 전기를 집필하라 명을 내렸다. 김만덕에 대한 기록은 체제공이 쓴 『만덕전』,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박제가의 『정유각집』등에 남아있다. 체제공의 『만덕전』은 한문으로 쓰였으며, 『번암집』 권 55에 실려있다.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육지에서 사들였다. 모두 만덕의 은혜를 찬송하여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네”라고 했다. 만덕은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서울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내의원 의녀로 삼아서 모든 의녀의 반수에 두었다. 만덕의 이름이 서울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들 모두 만덕의 얼굴 한 번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김만덕에 대해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에 실린 몸으로 관부로 수절한 것,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 바다의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함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중동(重朣)이고 종의 신분으로 역마(驛馬)의 부름을 받았고, 기녀로 중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다.’라고 하였다. 박제가의 『여유당전서』에는 ‘을묘년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자 여인 만덕은 곡식을 내놓아 백성을 진휼하였다… 여자라는 운명에 항거하여 창명을 건너 서울의 궁궐에 가서 임금님을 알현하고 명산을 구경하였으니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동안 넉넉하게 멋쟁이로 살다간 사람으로 귀하다 할 만한 사람이다.’고 평가되어 있다.
김만덕 기념관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김만덕 전신상과 쌀가마니들이었다. 김만덕이 제주도에 기근이 왔을 때 주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기부한 쌀이 자그마치 3백석이라고 한다. 쌀 한가마니는 약 80kg으로, 쌀 300석은 600가마니 정도로 즉 약 48000kg이다. 이는 현재의 시세로 매긴다면 1억 5천만원 가까운 금액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리고 양으로 따진다면 당시 제주도민 전체를 열흘 동안 연명시키고 수천 명의 백성을 살려낼 만큼이었다고 한다.
전시관에서 김만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장사로 큰 부를 축적했다는 점과 그 돈을 제주도민들을 구휼하는데 썼다는 두 가지 점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가난한 집 출신에 12살에 부모를 잃은 여자가 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면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일을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게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많았던 조선시대에 이루어 냈다는 점에 있어서 김만덕은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또한 김만덕이 당시에 장사를 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힘들게 모은 재산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즉 이타적인 행동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김만덕은 쌀 삼백석을 기부할 정도로 큰 나눔을 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또한 정조가 김만덕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소원을 물었을 때 금강산 관광이라고 대답하여 제주도 여성 최초로 여자는 뭍을 밟으면 안 된다는 한계를 깨고 육지 관광을 하였다. 요즘에야 여성에 대한 금기가 많이 사라지고, 모든 일에 여성도 한계가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김만덕이 살던 조선 후기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많았고, 이것을 스스로 일정부분 깼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김만덕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용기 있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지금의 우리도 모두가 김만덕처럼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스스로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효사정(孝思亭) 답사보고서
강의명: 인물로 본 조선시대사
교수님: 박경하 교수님
제출일: 2018. 11. 25.
학번: 20141714
이름: 김지희
답사 일자: 2018. 11. 23.
효사정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로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55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의 별장이었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이 붙였다. 넓이 46.98m²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온돌방 1칸을 들인 건물이다. 민도리집 구조의 5량집이며 난간을 두르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노한(1376~1443)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이다. 아버지는 대리경(大理卿) 균(鈞)이며, 좌의정 민제(閔霽)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6세기에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지사간원사를 거쳐 태종 3년에 좌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이조전서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풍해도관찰사 등을 거쳐 1408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이듬해 처남 민무구, 무질 형제가 신극례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고 불충의 언동이 있었다고 하여 유배, 사사되자 이에 연좌되어 1409년에 파직당하였다. 그 후 고향 양주별장에서 14년간을 은거하였는데, 세종 4년에 상왕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고신(告身)까지 거두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이라.”는 전교에 의하여 다시 한성부윤에 복관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참찬의정부사, 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에 찬성사, 1434년에 찬성사 겸 대사헌,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내고, 1437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는 노량진동에 있었으나 1940년에 파주시로 이장되었다.
노한은 1439년(세종 21년)에 어머니 개성왕씨대부인의 상을 당하여 선영에 예장하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을 시묘하고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별장을 짓고 일생을 살면서 등을 밝혀 추모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묘지 북쪽 깎아지른 듯한 언덕 위에 정자를 세우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의 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강석덕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를 남겼는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제 10권 금천현 누정조에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일부를 보자면 ‘효사정 옛터가 노량 남쪽 언덕에 있다. 우의정 노한이 어머니 왕씨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마친 다음 집의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여막을 삼고 올라 바라봄으로써 부모님을 사모하는 회포를 풀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효사정이라고 한다.’ 이다.
이 외에도 정인지[1396(태조 5)∼1478(성종 9)], 서거정[1420(세종 2)∼1488(성종 19)], 신숙주[1417(태종 17)∼1475(성종 6)], 김수온[1410(태종 10)∼1481(성종 12)] 등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을 남겼다. 신숙주는 ‘산세가 큰 들 머리에 꿈틀거리며, 영수(靈秀)한 기운을 잉태하여 어느 때나 아름답다. 세 봉우리는 하늘 밖에 솟아 화산(華山)이 푸르고, 한 줄기는 뜰 앞에 돌아 한수가 흐른다. 착함을 쌓아 선세부터 간단히 없었고, 효성은 대마다 전해 유명(幽明)에 통했네. 잇달은 경서가 다하지 않으리. 아름다운 기운이 밤낮으로 떴구나.’라는 시를 남겼다. 정인지는 ‘사정이 높이 큰 강 위에 임했는데, 효성스런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다. 세덕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 가성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 굽어보고 쳐다보는 정회를 누가 알아주리. 때때로 북궐을 보니 서기 띤 연기가 떴네.’라고 남겼으며, 김수온은 ‘정자는 푸른 강 끝나려는 곳에 있네. 들 풍경 아득하며 더욱더욱 아름답고, 푸른 봄 구룡은 긴 길에 임했고, 붉은 대궐 연하는 상류에 닿았구나. 높은 나무는 반쯤 사당을 가리워서, 어둡고 한가한 구름은 때로 골 어귀를 잠겨 그윽하다. 공사(公事)에 휴가 내노라 늦게 오면 술을 내어 큰 잔으로 먹으리라.’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전해진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고,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흑석동 한강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에 그 자리에는 한강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효사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러 시문을 참고하여 원래 효사정이 있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지어져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라 건축물 자체에 대한 역사적 가치는 없지만 사료 고증을 통해 비슷한 위치에 지어져 명맥을 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답사를 간 날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임에도 몇몇 사람들이 그 곳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또 그 주위에는 효사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적힌 안내판이 다수 있어서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효사정이 어떤 건축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정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출입금지 테이프가 너저분하게 붙어 있어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노한은 어머니의 묘소 북쪽인 이 노량진 한강변 주변에 효사정을 짓고 때때로 올라와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효사정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풍경과 그곳에서의 시원한 바람은 부모님을 여읜 마음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자는 주로 놀거나 쉬기 위해 경치나 전망이 좋은 곳에 사방이 트인 상태로 높다랗게 지은 집이다. 노한이 이러한 목적으로 효사정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효사정을 잘 이용했으면 좋겠다. 한강을 가까이서 내려다 보면서 경치를 즐기고, 이제는 조금 춥기는 하지만 날이 다시 풀리면 시원한 바람을 맞는 장소로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효사정이 관리가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오래도록 주변 주민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