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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경기지역 문화교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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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it수다 스크랩 단묘사 8-종묘
노수윤(동문06) 추천 0 조회 34 08.04.26 08: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번에는 종묘입니다. 사직단과 함께 '종묘사직'이라 불리며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지요. 종묘야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그래도 뺄 수야 없겠지요.

 

종묘는 조선 역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1394(태조 3) 12월에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황천후토(皇天後土)와 백악(白岳), 목멱(木覓), 한강(漢江) 등 산천지신(山川之神)에게 종묘 건축을 알리게 하고, 이듬해 4월 중추언부사 최원이 개기제(開基祭)를 거행하는 동시에 공사에 착수, 동년 9월에 낙성하였다.

 

총면적 5만 6,503평의 대지에 지금은 정전(正殿),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향관청(享官廳), 공신당(功臣堂) 등이 있고, 세종 때 따로 지은 별묘(別廟)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종묘가 완성된 다음 달인 윤(閏) 9월에는 개성에 모시었던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를 이 곳으로 옮겨 모시었다.

 

세종 때 봉사제도(奉祀制度)에 대한 논의가 있어 영녕전을 짓고 정전에는 금상왕(今上王) 4대조와 그의 비 및 조선의 창업주인 태조와 역대 임금 중에서 공덕이 큰 왕과 왕비만을 모시고, 영녕전에는 정전에 모시지 않는 5대 이상의 원조(遠祖)를 모시기로 하였다.

 

종묘가 창건된 지 200년을 경과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 당시 서울에 침입하였던 왜군에 의하여 종묘는 완전히 타버렸고, 그로부터 10여년이 경과한 1608년(선조 41) 정월에야 중건에 착수하여 그 해 5월에 완료하였다. 그후 영조, 헌종, 고종 때 중수하였고 정전의 칸수(間數)도 중측되어 현재와 같이 거대한 구조물이 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정전과 영녕전이 모두 2익공(二翼工) 맞배지붕의 간결한 수법으로 되어 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이다.


종묘의 역사

1394년(태조3년) 종묘기공

1395년(태조4년) 9월 25일 정전 7실 준공

1395년(태조4년) 9월 26일 송도 4묘(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종묘로 이안

1398년(태조7년) 2월 종묘 남쪽에 가산(假山)조성

1406년(태종6년) 2월 재궁건립

1421년(세종3년) 정종(定宗)을 부묘할 때 태실(太室)부족으로 송조사조 전전례(宋朝四祖 殿典例)에 따라 동년10월 태묘서방에 영녕전(永寧殿) 4실을 건립[12월9일 추존(追尊) 四祖를 遷하였음]

1546년(명종원년) 정전 3실 증축

1592년(선조25년) 5월 3일 임진왜란으로 정전·영녕전이 모두 병화(兵火)로 소실

1608년(광해군원년) 5월30일 정전·영녕전 동시에 중건(重建) 정전 11실이 됨.

1726년(영조2년) 정전 4실 증건(增建)

1836년(헌종2년) 정전 2실 증건

1870년(고종7년) 3월29일 정전 2실 증건

1928년 正殿(太祖→純祖 19室 49位)

永寧殿(穆祖→莊祖 15室 32位/室空間)

功臣堂(太祖부터 純宗까지 83位의 功臣配享)

1931년 육교가설

1945년 종묘대제(宗廟大祭) 폐지

1961년 일반공개

1963년 1월18일 종묘 史蹟 125號 지정

1964년 12월7일 宗廟祭禮樂 重要無形文化財 1號로 지정

1969년 종묘대제봉행 재개

0월1일 1회 대제봉행(국가)

1970년 英親王 昇遐 1973年 부태묘로 영녕전 16室 33位가 됨.

1971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5월초 일요일에 종묘대제를 봉행키로 결정함.

1975년 5월3일 종묘제례가 重要無形文化財 56號 지정

1985년 4월15일 정전·영녕전 일반공개

1995년 12월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정기총회에서 "서울문화및자연유산의보호에관한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1997년 5월 2일 세계문화유산 표석 제막

2001년 5월18일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

 

 

 

 

 

 

 

 

 

   종묘공원의 입구에는 작가 염상섭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뒤로 월남 이상재의 동상과 어정, 하마비가 있습니다.

 

 

  종묘에는 작은 연못(지당)이 있습니다. 연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향나무를 심어 제례를 지낼 때 이 향나무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연못 만든 것은 조경상의 이유도 있지만 불이 나면 물을 사용하기 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망묘루 왼쪽으로는 향대청이 있는데 이곳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또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입니다.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옆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는데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支堂)'으로 1994년부터 공민왕추모회에서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고려의 역대 왕 가운데서 공민왕을 위한 신당이 있는 까닭은 이성계가 공민왕때 두각을 나타냈으며, 공민왕의 개혁정신의 정통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정전 앞쪽의 어숙실은 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숙실 동쪽에는 신관이 머물던 예재실이 있고, 서쪽으로 왕이나 신관들이 목욕을 하던 욕청이 있다.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가 있는 행각이 있습니다. 

 

   제정은 제향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전사청 동쪽에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시원하다고 합니다. 대개 중요한 우물은 다 그렇다고 하지요?

 

   정전앞의 풍경입니다.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그 좌우의 협실 두 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문쪽에서 바라보면 이런 풍경입니다.

 

 

   신실 내부는 이런 풍경입니다. 문화재청 사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례는 계속되어야 하고, 천막을 치기 위해서는 고리도 필요하겠지요.

 

   처음에는 정전의 규모가 작았는데 왕들이 계속 훙(사망)하니 건물을 늘려야 겠지요. 건물이 길어짐에 따라 계단도 옮겨야 합니다. 옮긴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매년 5월에 있는 종묘제례때의 모습입니다. 사람들 매우 많습니다. 특히 이씨들이 많지요. 특히 어도를 살짝 밟기만 해도 아주 화를 냅니다.

 

   정전의 문입니다. 여기는 동문으로 왕이나 신관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당연히 삼문으로 되어 있지요.

 

   남문입니다. 원래는 혼백이 출입하는 곳으로 사람이 다니면 안되지요. 남문에는 신도가 정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문으로 악공이나 제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당연히 규모가 작지요. 이상 정전을 마치겠습니다. 칠사당과 공신당, 영녕전은 다음으로. 그리고 정전이나 영녕전에는 단청이 화사하지 않은 까닭은 당연 혼백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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