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다”
미두(米豆) 시장은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 증거금만 가지고 청산거래 형식으로 사고팔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인천 경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번창했다. 청산거래란 미리 매매를 약정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뒤 실제 물건과 대금을 주고 받는 일종의 선물거래이다.
전국의 투기꾼들을 인천으로 불러 모은 미두 시장이 처음 개장한 것은 1896년이었다. 한국 땅에 설립된 미곡거래소였지만, 한국인이나 한국 정부는 설립에 관여하지 않았다.
가쿠를 비롯한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에 미두 취인소(취(取引所:거래소)의 설립 허가를 얻어 그해 5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인천 미두취인소’의 설립 명분은 미곡의 가격과 품질의 표준을 정하고, 미곡의 배집 경쟁에 따른 폐해를 방지하며, 이를 통해 미곡의 수출을 증대시키자는 것이었다.
인천 미두취인소
그러나 실제로는 ‘오사카도지마취인소’에서 투기 거래로 파산한 일본 상인들이 투기거래에 익숙지 못한 한국인들을 꾀어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처음에는 쌀 대두(大豆) 석유 명태 방적사 금사 목면 등 7가지 상품이 거래되었지만, 1904년부터 쌀과 대두로 축소되었다. 기간을 두고 쌀을 거래하는 시장이라고 해서 ‘기미(期米) 시장’이라고도 불렸다.
미두의 최소 거래 단위는 100석이었다. 더러는 쌀과 현금을 주고받으며 청산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전체 거래량의 0.5%에도 못 미쳤고, 99.5%는 차액만큼 현금을 주고 받는 것으로 청산이 이뤄졌다. 역설적으로 미두 시장에는 쌀이 없었다.
미두 시세는 그해 농사의 풍흉, 날씨, 거래량, 정치·경제적 변인 등에 두루 영향을 받았지만, 오사카 시장의 미두 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초기 인천 미두 시장의 큰손이었던 아라키는 오사카에서 전보로 타전되는 시세를 조작해서 한국 미곡 시장을 교란시켰다.
미두 취인소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한국인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인천 객주 안인기와 송창주 등은 한 번에 수만석씩 거래하며 초창기 미두 시장을 주름ㅁ잡았으나, 곧 전 재산을 날리고 무일푼으로 미두 시장을 떠났다.
강제 병합 이후 미두는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인천 외에도 서울·강경·군산·목포·대구·진남포·신의주·원산·부산 등 9곳에 ‘연시장(延市場)’이라 부르는 소규모 미두 시장이 설치되었다.
반복창이란 상인은 단 1년 만에 400원 밑천을 40만원으로 불려 ‘미두신(米豆神)’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2년 만에 파산하고 30ㅅ에 중풍을 얻어 미두 시장을 광인(狂人)처럼 떠돌았다.
중일전쟁이 3년째 접어든 1939년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분류하고 쌀과 쌀값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쌀의 시세를 결정하는 미두 시장의 기능도 중지되어 4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