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 중국의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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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09.10. 16:30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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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중국의 애니메이션
요약 중국은 국가주도형 애니메이션 제작 체제를 고수해왔으며 수묵 애니메이션과 인형 애니메이션 등으로 특화된 작품이 두각을 나타냈다.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거친 후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다양한 소재와 표현기법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이 선보였다. 21세기에 들어 정부의 지원, 거대자본 유입,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적·질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 중국 애니메이션의 탄생
중국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완라이밍(萬籟鳴), 완구찬(萬古蟾), 완차오천(萬超塵), 완디환(萬滌寰)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형제는 중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화실대소동(大鬧畫室)>(1926), 중국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낙타의 춤(駱駝獻舞)>(1935), 중국 포함 동양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철선공주(鐵扇公主)>(1941)를 제작함으로써, 중국 애니메이션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길이가 90분에 이르는 <철선공주>는 <서유기(西遊記)>의 ‘우마왕(牛摩王)’ 편을 다룬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그림1]).
그림1. <철선공주>의 한 장면
한편, 중국의 1930년대와 1940년대는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시기였고 교통도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애니메이션은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서만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상영되었다. 상업 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조건에서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대체로 경제적 보상을 기대하기보다는 개인적 창작욕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의 설치와 애니메이션의 부흥
초기 중국 애니메이션이 일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중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일본인 모치나가 다다히토(特永兄仁)는 일본의 거장 세오 미츠요(瀬尾光世) 문하에서 애니메이션의 기초를 닦았다. 모치나가는 일본 최초로 멀티플레인(multiplane) 카메라를 사용하는 등 뛰어난 제작 기술을 갖추었던 애니메이터로, 종전 직전 만주로 건너가 1947년 동북영화제작소(東北電影制片廠)에 애니메이션 분과를 설치했다. 이는 후에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上海美術電影制片廠)의 모태가 된다.
모치나가는 인력과 장비 부족이라는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 최초의 작품이자 중국 최초의 인형 애니메이션인 <황제의 꿈(皇帝夢)>(1947)을 만들었다. 모치나가는 완라이밍 형제에게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전수했으며, 1952년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도 중일 문화 교류에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는 중국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계획경제 체제하에서 중국 애니메이션은 상업성의 압박에 구애받지 않고 안정적인 규모와 우수한 제작환경 속에서 창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완라이밍 형제와 터웨이(特伟)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완라이밍의 <천궁대소동(大鬧天宮)>(1964)은 제작비과 인력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 스튜디오의 장점을 살려 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완구찬은 종이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해 <어동(魚童)>(1959)을 발표했다.
터웨이가 만든 <엄마 찾는 올챙이(小蝌蚪找媽媽)>(1961), <피리 부는 목동(牧笛)>(1963)은 세계 최초의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피리 부는 목동>은 피리를 부르며 잃어버린 소를 찾는 목동의 이야기로, 중국 산수화의 이상과 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걸작이다([그림2]). 수묵화의 농담(濃淡)과 여백이 셀 드로잉과 카메라 필터, 매팅 기술의 절묘한 운용으로 섬세하게 연출되었다.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의 초대 소장을 지내기도 한 터웨이는 중국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림2. <피리 부는 목동>의 장면들
자연을 인간에 대한 객체로 파악하는 서양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달리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 문화대혁명의 암흑기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본토를 휩쓴 문화대혁명은 중국 애니메이션의 암흑기와 겹친다. 거의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되거나 정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면서, 애니메이션 또한 제작 편수가 급감했다.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1975년까지 10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단 한 편의 작품도 외부로 발표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휴머니즘에 기초한 주제의식이나 작가주의에 따른 창작이 불가능해지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사상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터웨이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교시에 따라 만든 <금빛기러기(金色的大雁)>(1976)는 반혁명분자와 싸우는 영웅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터웨이가 같은 해에 발표한 <죽순(長屋裡的竹筍)>(1976) 역시 반혁명적 생각을 반성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애니메이션의 부활과 위기
1977년, 중국에서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예술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상영금지 당했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다시 관객을 만나게 되었고, 애니메이션 제작 역시 활발히 이루어졌다. 상하이만화영화제작소가 애니메이션을 독점 제작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베이징과학교육영화제작소(北京科敎電影制片廠), 광시영화제작소(廣西電影制片廠) 등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기 작품들의 내용이 정치 선전에 갇혀 있던 것과 달리,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은 민간 전설, 속담 등 다채로운 소재를 다양한 제작방식과 표현양식으로 구현했다. 중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귀신 나자와 바다의 소동(哪吒鬧海)>(1979)은 명나라 때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를 다룬 작품이다.
초능력을 가진 나자라는 소년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용왕을 격퇴한다는 내용으로, 왕수선(王樹沈), 쉬징런(徐,景達), 옌딩셴(嚴定憲)이 공동으로 제작했다([그림3]). 쉬징런의 <세 승려(三個和尚)>(1980)는 기존과 달리 리미티드 기법을 도입하여 만든 셀 애니메이션이다. 민족적 색채가 강한 우의적 작품으로, 세 승려의 심리적 갈등을 빠른 템포로 풀어냈다.
그림3. <귀신 나자와 바다의 소동>의 한 장면
선명한 색감과 부드러운 움직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80년대의 단편들은 유머와 재치, 풍자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원숭이의 달 낚시(猴子撈月)>(1981)는 연못에 비친 달을 손에 넣으려 다투는 원숭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그림4]). 열대의 자연을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으로 담아내 이국적인 정취를 잘 살린 작품이다.
그림4. <원숭이의 달 낚시>의 장면들
현대적 색감과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원숭이들은 연못의 달을 ‘낚기’ 위해 함지박을 사용하는 묘수를 쓴다.
탕청(唐澄)과 우퀴앙(邬强)의 <녹령(鹿铃)>(1982)은 매에게 쫓기는 아기사슴과 이를 구해준 소녀 사이의 교감을 따뜻하게 풀어낸 작품으로, 스토리나 시각적 스타일에서 복고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그림5]). 그밖에 <남곽선생(南郭先生)>(1981), <서른여섯 글자(三十六個字)>(1984), <손오공이 요괴를 물리치다(金猴降妖)>(1985)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림5. <녹령>의 장면들
<녹령>은 사슴방울이라는 뜻으로, 소녀가 아기 사슴과 헤어질 때 아쉬운 마음에 사슴의 목에 방울을 달아준다.
한편, 1980년대에 해외 애니메이션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대규모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미국과 일본의 작품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TV를 비롯한 각종 문화오락 시설의 보급으로 극장 관객이 감소하는 가운데, 방송국은 싼 가격에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해외 애니메이션을 선호했다.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국 애니메이션은 활력을 잃고 점차 자국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 애니메이션 강국으로의 도약
1990년대에 들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애니메이션 진흥 정책을 펴고 방송사의 투자가 확대되면서 중국 애니메이션은 전환기를 맞이했다. <사슴과 소(鹿與牛)>(1990), <열두 마리 모기와 다섯 사람(十二隻蚊子和五個人)>(1992), <1인의 여정(1的旅程)>(1997) 등이 제작되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란마오 장난스러운 3000가지 질문(藍貓淘氣三千問)>(1999~2012)이 큰 성공을 거두며 장기간 제작·방영되었고, 2005년 방영되기 시작한 <희양양과 회타이랑(喜羊羊與灰太狼)>은 2016년 현재까지 전파를 타는 중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 <보련등(寶蓮燈)>(1999), <양산백과 축잉태(梁山伯與祝英台)>(2004), <토끼대협전기(兎俠傳奇)>(2011)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역시 꾸준히 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큰 폭으로 성장해온 중국 애니메이션은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산업 규모가 1000억 위안(한화로 약 17조 5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애니메이션 산업을 선도하는 가운데, 방송 애니메이션이 3D를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인터넷 및 모바일 기기의 확산과 새로운 플랫폼의 구축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의 디지털 배급이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2015년 개봉된 3D 애니메이션 <몽키킹: 영웅의 귀환(西游记之大圣归来)>은 현재 중국 애니메이션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그림6]). 높은 기술적 완성도와 안정감 있는 연출로 손오공과 동자승 장뢰의 모험 이야기를 풀어내 역대 중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림6. <몽키킹: 영웅의 귀환>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