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동막골에서 <웰컴 투 동막골>은 어떻게 영화로 옮겨졌나 | |
[필름 2.0 2005-07-23 17:50] | |
장진 감독의 동명 연극 <웰컴 투 동막골>을 제작비 80여 억 원의 대작 영화로 만드는 과정은 험난했다. 가상 마을 동막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으로 새 옷을 입기까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제작진을 만났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 하나쯤 생길 법한 긴 제작 기간 동안 <웰컴 투 동막골>은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다. 대사가 빗발치는 3시간여의 연극 원작이 영화 시나리오로 거듭 나고, 50년대의 동막골을 ‘창조’하기 위해 제작진이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 극단처럼 떠돌며, 일본의 거장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가 거짓말처럼 음악에 참여하면서 3년을 매달린 프로젝트가 드디어 끝을 보게 된 것이다. 투자사가 교체되고 제작비가 늘어나고 후반 작업이 길어지면서 영화는 수많은 물음표를 낳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크랭크인해 올해 3월 크랭크업하고 5개월여의 후반 작업을 마무리 지은 지금까지, <웰컴 투 동막골>은 세간의 시선과 달리 단 하루의 공백도 없이 달려왔다. 감독을 비롯해 베테랑보다 ‘신인급’으로 채워진 스탭들은 말 그대로 끝을 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오랜 시간을 달랬다. 장진 감독의 연극 원작이 박광현 감독의 영화로 탈바꿈하기까지 <웰컴 투 동막골>의 거대한 껍질을 야금야금 벗겨 보았다. <웰컴 투 동막골>은 처음부터 영화였다
<웰컴 투 동막골>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연극을 영화화할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늘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웰컴 투 동막골>은 처음부터 영화였다고. “<내 나이키>를 끝내고 장진 감독과 함께 서로 차기작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내가 단편으로 생각한 것, 그리고 장진 감독이 구상했던 것, 둘 다 한국전쟁에 관한 아이디어였다. 장진 감독이 ‘한국전쟁이 끝났는데 작전을 잘못 이해하고 남한으로 내려와 버린 인민군들의 얘기’를 들려줬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게 바로 <웰컴 투 동막골>의 초기 구상이었고 애초에 연극이 아닌 영화로 구상됐다. 연극 <웰컴 투 동막골>은 애초에 영화로 구상했던 것을 연극 무대로 축소시킨 것이다. 이렇게 당초 영화로 기획된 것을 이제야 영화로 만들게 됐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후 장진 감독은 다른 멜로영화를 준비하다 뭐가 꼬였는지 갑자기 강원도로 떠나서는 <웰컴 투 동막골>의 희곡을 써서 돌아왔다.” 결국 연출을 맡으라는 계시였을까? 할까 말까 긴 고민을 하던 차에 박광현 감독의 눈에 연극 <웰컴 투 동막골>의 빈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체를 관통하는 좋은 정서와 이야기는 물론 누구나 반할 만한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 식으로 만들 것이냐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항상 작품을 설명할 때 ‘신비한 마을 동막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신비하다기보다는 그저 어느 작은 마을이다. 설정만 보면 사람들이 무기에 대해서도 알고, 부락민들이 외부로도 왔다 갔다 하며, 그들 중에는 군대를 가고 싶어 하는 아이도 나온다. 나는 정말 동막골을 영화적으로 신비롭게 포장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연극에서는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친해지는 과정이 시간과 장소의 제약 때문에 다소 쉽게 이루어졌다면 그걸 좀 더 드라마틱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또한 영화인 만큼 보다 큰 스케일을 담아야할 텐데 연극의 마지막 전투가 간략하게 표현됐다면, 영화에서는 전쟁 신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봤다. 이렇게 신인감독으로서 드라마와 패기, 그리고 볼거리 제공에 대한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비어 있다고 봤다. 그 빈 곳에 나를 채워 넣을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동막골, ‘한국적’과 ‘환상적’의 교집합
<웰컴 투 동막골>을 준비하던 당시 박광현 감독은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미용실에서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최근 한국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를 봤는데 두 영화 정말 똑같다고 그러는 거다. 나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웃음) 두 남자의 형사 영화고 범인이 안 잡히니까 똑같다는 거였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니 <태극기 휘날리며> 등 이전 영화들과 비교하는 시선이 있어 좀 부담이 된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 애초에 생각했던 것들을 잃지 말자, 정말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 주자고 다짐했다.” 그러한 다짐의 중심에는 앞서 말한 동막골을 신비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신비롭고 환상적인 공간이라 하면 보통 가짜처럼 보이기 쉽기에 제작진들은 그 속에 ‘문화’를 담으려 고심했다. 김중 비주얼 수퍼바이저의 말에 따르면 ‘한국적’과 ‘환상적’의 교집합을 찾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였다. CG를 맡았던 인디펜던스의 조이석 실장 역시 동막골을 위한 ‘드러나지 않는 CG’ 작업이 무척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슴푸레 깔리는 새벽 안개,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비롯 미세한 계절의 변화까지 CG는 무척 큰 역할을 했다. 동막골의 순박한 쌍둥이 할아버지 역시 CG 작업을 통해 한 사람을 두 명으로 만든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은 그 말투부터 다르다. 세밀한 조사와 경험을 기초로 마을을 살아 있게 만들고, 판타지를 표현할 때도 주민들의 언어와 습관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개념화된 언어나 생활 습관은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게 할 것”이란 생각에 시나리오를 쓰던 단계부터 언어 문제에 신경을 썼다. 보통 감독이나 작가가 일방적으로 시나리오를 쓴 뒤 그것을 다시 사투리로 고치는 게 관례겠지만, 박광현 감독은 아예 처음부터 ‘사투리 트레이너’와 함께했다. 귀순한 북한 음악인 채수린은 우리가 흔히 북한 말이라 착각하는 연변 사투리를 지양하고, 진짜 북한 사람이 마을에 당도한 것 같은 생생함을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막골은 지리상 강원도에 위치하기에 마을 사람들의 언어도 중요했다. 과거 강원도 사투리 개그로 큰 인기를 끌었고 <조폭 마누라>(2001)에 마징가 역할로도 출연했던 심원철도 1년 정도 함께했다. 단지 말투만 바꾸는 게 아니라 채수린, 심원철 모두 말에 문화와 기질을 담아내자는 데 적극 공감했다. 연극 속에서는 단지 조그만 세트에 불과했을 뿐인 동막골이 이렇게 생명력이 숨쉬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꿈만 같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웰컴 투 동막골> 프리프로덕션이 진행되던 당시 이은하 PD는 영화음악을 맡을 사람으로 누굴 택할 것인지 물었다. 얘기를 꺼내면 딱 욕 먹기 좋음에도 불구하고 박광현 감독은 “솔직히 이 영화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딱 맞을 것 같다. 정말 다른 사람을 못 찾겠다”고 털어놓았다. ‘쿠사리’를 먹을 것을 각오하고 한 말이었지만 이은하 PD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럼 편지 한번 써보죠”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 편지를 건네준 사람도 “괜한 짓 하네” 하는 표정이었다. 예산상 특별히 국내 음악감독 수준 이상의 금액을 제시할 수 없었기에 진심을 다해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은하 PD가 써온 편지는 감동적이었다. 영화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당신을 꼭 필요로 한다는 우리의 사정도 얘기하면서 ‘당신이 거절한다 해도 우리는 영원한 당신의 팬’이라는 말로 끝맺었다. 그래도 그건 누가 봐도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그런데 히사이시 조로부터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박광현 감독은 이번 작업을 통틀어 가장 큰 비명을 질렀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 컨셉은 ‘사람들 사이의 어우러짐’이었다. 굉장히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과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군인들이 한 마을에서 함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야기가 그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그는 아주 심각한 장면과 코믹한 장면이 리드미컬하게 교차된다는 점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스케줄 관계로 한국을 드나들 수 없었던 그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오키나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작업 당시 오키나와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일반적인 풍경과 전혀 다른 오키나와의 중심에서 이전과는 조금 색다른 음악들을 접하면서 작업에 참고했다. 그 결과물은 박광현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 모두를 감화시켰다. 애초에 17곡으로 계약했지만 히사이시 조는 영감이 넘쳐난 나머지 그보다 딱 2배인 34곡의 음악을 완성했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작곡의 음악을 미디로 들으면서 박광현 감독은 매번 소중한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의 변함없는 감수성뿐 아니라 드라마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 장인 정신까지, 함께 작업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물론 히사이시 조도 조금 예산을 넘겼다. “히사이시 조는 최근에 작업을 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영화에도 오케스트레이션을 쓰고 싶다며 추가 비용 얘기를 해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빠듯한 예산 내에서 지원을 해드렸다. 얼마 전에 일본에 가서 그 녹음을 보고 왔는데 우리가 지원한 그 비용으로 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려 70인조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졌다. 정말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영화 끝까지 봐주시라
그럼에도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도 있다. 영화는 처음에 크레딧이 뜨지만 연극은 마지막에 모든 출연진들이 인사를 한다. <웰컴 투 동막골>은 파격적으로 초반부에 규칙과도 같은 감독, 배우 등의 크레딧이 뜨지 않는다. 실제 영화 러닝 타임이 2시간 9분 정도기에 약 5분 넘게 라스트 크레딧이 뜬다. “영화 볼 때 초반부에 크레딧 뜨는 거 늘 지루했다. 어차피 아는 사람들이 출연하고 연출한 건데 처음부터 따로 보여 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다. 만약 영화가 좋다면 사람들이 스탭들을 하나씩 기억할 수 있게 라스트 크레딧을 길게 담았다. 거기에는 히사이시 조의 4분 10초짜리 메인 테마까지 흐르니, 관객들이 좋은 음악 들으면서 영화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박광현 감독은 <웰컴 투 동막골>을 두고 "신인들의 영화"라 말한다. 자신도 신인일뿐더러 <내 나이키>를 함께했던 최상호 촬영감독도 수많은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과 함께 입봉했다. 그가 인정하는 김중 비주얼 수퍼바이저도 신인이고, CG 감독을 맡은 인디펜던스 조이석 실장도 아직은 작품 편수가 많지 않다. 선뜻 연극의 영화화를 꿈꾸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스탭들의 도움이 컸다. “히사이시 조의 경우에도 이은하 PD가 아닌 베테랑 PD가 함께했다면 이런 제의를 코웃음치며 묵살했을 게 뻔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해도 "네가 몰라서 그런 거다" "영화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가 아니라 "함께 해보자"고 말하는 그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지막의 크레딧을 특별하게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웰컴 투 동막골>은 맹렬한 속도로 후반 작업을 마무리한 뒤, 8월 4일 개봉과 함께 그 신인들의 조용한 반란을 보여 줄 것이다.
박광현 감독 한국전쟁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있나? 전혀 없다. 우리 부모님은 당시 전라도 두메산골에 사셨다. 이산가족이 있다거나 힘들게 피난왔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다. 그래도 전쟁의 상흔은 워낙 광범위한 것이니까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맡겨져 열 살까지 산골 마을에서 지냈는데 그때의 기억들이 동막골에 많이 담겨져 있다. 비주얼의 반 정도에 그런 기억이 담겨 있다. 그래서 뒷간의 위치와 계단의 높낮이 등 굉장히 디테일한 비주얼까지 철저하게 관여했다. 전작 <내 나이키>를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떤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웰컴 투 동막골>을 만들 때의 기분은 <내 나이키>의 확장판과도 같다.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두 영화는 모양이 달라도 대단히 흡사하다. 한국전쟁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기획됐던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교되기도 한다. 한창 기획 단계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이 발표됐을 때 많이 당황했다. 스탭들과 있을 때는 "서로 다른 영화야, 아무 걱정 없어" 그랬지만 사실 선발 주자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웃음)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건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우리가 화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현실의 모습을 유쾌하고 훈훈하게 풀어보고 싶었다. <웰컴 투 동막골>은 가슴 따뜻한 판타지로 보면 된다.
CG 감독, 인디펜던스 조이석 실장(가운데) 투자받는데 3D 콘티가 유용했다고 들었다. CG 회사 인디펜던스에 몸담고 있으면서 박광현 감독과는 여러 편의 광고를 통해서도 호흡을 맞춰왔기에 기본적으로 끈끈한 믿음이 있었다. 영화 전체는 아니지만 박광현 감독이 콘티를 그리고 3D로 콘티를 만들었다. 이전에 참여했던 <분신사바>에서도 시도했는데 점차 전문화되고 일반화될 것이다. 투자자나 배우도 이해하기 쉽고, 촬영감독도 카메라 워킹을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물론 3D 콘티 역시 초기 투자 비용이 들어가는 거라 만만치 않은 작업이긴 하다. 팝콘이 터지면서 마치 흰 눈이 내리는 듯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각 군인들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옥수수 알갱이들이 팝콘처럼 터져 순간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 장면들이 바로 <웰컴 투 동막골>의 전반적인 정서다. 실제로 팝콘을 찍은 장면과 3D CG를 섞은 거다. 팝콘을 가져다 옆에서 드라이기로 열을 가하면서, 초당 300 프레임 이상으로 촬영하는 ‘액션 마스터’ 카메라로 촬영했다. 그걸 앞쪽에 클로즈업으로 크게 배치했고 뒤쪽으로 보이는 자잘한 팝콘들은 CG다. CG 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종종 비교된다. 일단 CG 컷 수가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많은데 물론 그 성격은 다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지상전이 주류를 이뤘고 전투기는 그저 쓱 지나가는 정도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의 엔딩 전투 신은 풀 3D로 공중전을 치른다. B-19 3대를 비롯 여러 대의 전투기가 날아가는 모습, 집중 포격을 퍼붓고 선회하는 장면 등 전투기 공중전만큼은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걸 해냈다는 자신감이 있다. <청연>의 경우 비행기 신을 미국에서도 촬영했다는데 우리는 순수 국내 기술로 했다.
비주얼 수퍼바이저 김중 흔하지 않은 ‘비주얼 수퍼바이저’라는 크레딧을 올렸다. 친구이기도 한 김현성 감독이 <흑수선>(2001)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비주얼 수퍼바이저라는 이름을 썼다(정확히는 ‘비주얼 디렉터’). 스토리와 비주얼이 일관되도록 시각적인 부분에 관한 한 혼자서 총괄적인 관리를 하는데,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까지 책임을 진다. 비주얼 수퍼바이저라는 게 촬영, 조명 등 남의 영역들을 조금씩 건드려야 하는데 그런 협조와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이런 팀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나 역시 영화 연출을 준비하고 있는데, 미국 유학 후 박광현 감독이 몸담고 있는 ‘잉크스팟’이라는 광고 회사에 들어갔다가 같이 영화 하자고 해서 이렇게 엮였다.(웃음) 2003년 시나리오 개발 단계부터 시작해 계속 의견을 조율했다. 기본적으로 박광현 감독은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했고 오래도록 광고를 해서 비주얼에 대해 남다른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라 통하는 부분이 많다. 동막골의 전체적인 비주얼 컨셉은 뭐였나? 우리나라 기존의 문화가 있지만 이게 현대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죽은 매력적인 마을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환상적이며 순수하다는 것이 동막골의 비주얼 컨셉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옛날 집하면 초가집만 생각하는데 강원도 헌팅 갔을 때 너와집에 대해 알게 됐고 정말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동막골의 집은 나지막한 너와집들이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웃음) 우리나라 옛날 집에도 벽난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워낙 바람이 세니까 바깥에서 장작을 땔 수 없어 생겼던 것 같다. 이렇게 전통적이면서도 잊고 있던 우리 문화의 판타스틱한 부분들을 컨셉에 많이 적용했다. 의상 디자인도 새로이 해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 봐도 미처 몰랐던 일본적인 것들을 잘 찾아내서 시각화해내고 있지 않나. 사진 서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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