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봄 3월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 이후 김알지는 마정부인(摩貞夫人) 석씨(昔氏)와 결혼하여 세한(勢漢)을 낳았다.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김씨로서 첫 번째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이다. 경주김씨는 미추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 경순왕(慶順王)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를 통치해 왔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개의 관향(貫鄕)으로 분적되었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파계(派系)가 복잡하지만 대표적인 파로는 경주김씨는 김명종(金鳴鍾)을 일세조로 하는 영분공(永芬公) 명종파(鳴鍾派), 김은열(金殷說)을 일세조로 하는 대안군(大安君) 은열파(殷說派), 김장유(金將有)를 일세조로 하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장유파(將有派), 김인관(金仁琯)을 일세조로 하는 태사공(太師公) 인관파(仁琯派), 김문기를 일세조로 하는 백촌공 문기파, 김덕재를 일세조로 하는 병판공 덕재파, 김존일을 일세조로 하는 장사랑공 존일파, 김정백을 일세조로 하는 수문장공 정백파로 크게 분파되었고, 각 분파마다 작은 지파가 여러 개씩 있다. 경순왕 아들 9형제가 각각 분적하여 나갔다. 다만 셋째 아들 김명종과 넷째 아들 김은열과 김순웅(金順雄) 장군 후손들만이 경주김씨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정순왕후의 상계(上系)는 태사공(太師公) 인관파(仁琯派)이다. 태사공 인관파는 신라 경순왕의 4남 김은열(金殷說)에서 나뉘어졌다. 김인관은 시조 김알지로부터 41세손이다. 김인관을1세 선조(先祖)로 하여 12세손 김희(金僖) 대에 이르러 좌랑공(佐郞公) 영원(永源)의 장자 장단공(長湍公) 희(僖)파로 분파되었고, 다시 17세손 김홍욱(金弘郁)에 이르러 학주공파(鶴洲公派)로 분파되었다. 정순왕후는 학주공파 중에서 학주공의 2남 김계진(金季珍)의 후손이다. 김계진은 정순왕후의 고조부이다.
김알지(金閼智)
김알지는 경주김씨의 시조로 65년(탈해이사금 9) 신라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탈해이사금 9년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와 유사한 알지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영평(永平) 3년 8월 4일,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쪽을 가다가 시림(始林) 가운데서 큰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았는데,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부터 땅에 드리워졌으며, 구름 속에 황금으로 된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빛은 그 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탈해왕이 시림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궤에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나니 혁거세의 일과 같았다. 왕이 알지(閼智)라고 이름하였는데, 알지는 신라의 말로 어린아이를 지칭한다. 왕이 안고 궁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기뻐하며 따랐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김씨로 하였으며,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은열(金殷說)
김은열(?~968)은 통일신라의 왕족으로, 경주김씨(慶州金氏) 대안군(大安君) 은열파(殷說派)의 시조이다.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장녀 효목왕후(孝穆王后)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에서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내고,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김태화와 안동김씨(安東金氏) 시조인 김숙승(金叔承), 김녕김씨(金寧金氏) 시조 김염(金濂)이다. 『경주김씨족보』에 〈김은열묘지명(金殷說墓誌銘)〉이 수록되어 있는데, 968년(광종 19) 3월 4일 김은열을 장사하면서 돌에 새겼다는 묘지(墓誌)이다. 그러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김자수(金自粹 )
김자수는 1351년(충정왕 3)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중(純仲)인데 처음에는 거광(去礦)이라 하였다. 호는 상촌(桑村)이다.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珸)이다. 정순왕후의 13대조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받았다. 우왕초에 정언이 되었다. 이 때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가 밀성(密城)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수십 명을 죽이자, 우왕이 의복과 술, 말을 내렸고, 이에 조민수가 사은편지를 올렸다. 우왕은 김자수에게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촌은 조민수가 전날 김해·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사졸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의 수졸(戍卒)로 유배되었다.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고, 공양왕 때에 이르러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에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92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부르자 아들에게 관을 준비하고 뒤따르게 하여, 경기도 광주 추현(秋峴)에 이르러 무덤에 결코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때가 1413년(태종 13)으로 63세였다.
○ 金子粹字純仲雞林府人 恭愍末擢魁科授德寧府注簿 辛禑初爲正言時慶尙道都巡問使曹敏修擊倭于密城斬數十級禑賜衣酒及馬敏修上箋謝命子粹製回敎子粹辭曰 敏修摠一道兵金海大丘之戰怯懦敗沒多殺士卒 密城小捷功不掩罪衣酒廐馬賞已過矣 又何回敎 且回敎錄功績今敏修無功可紀不敢奉命 禑怒下子粹巡衛府命池奫及大司憲河允源鞫之奫等欲坐以違旨子粹曰 先王置諫官所以補君之失也 自古王言有不可諫官諍之 願諸公察國家置諫官之意 奫大怒欲杖流議于都堂諸相畏之無敢出言密直副使李寶林曰 子粹雖小儒諫官也 且所謂違旨者盖如置人于東擅移于西者也 子粹之罪恐不得以此論 都堂是其言只請流之 禑曰 巡衛府已議其罪今復可輕耶 遂不聽右使金續命入白太后曰 臣武人不曉事 然文臣皆言諫官雖忤旨不罪者所以開言路也 今子粹罪小不宜重論 太后乃謂禑曰 予老經事多未聞杖辱諫官 若爾人皆杜口國事將日非矣 於是免杖流于全羅道突山戍 奫等意子粹必與郞舍議又流諫議大夫鄭寓于慶尙道竹林戍 踰年許從便給告身 久之拜典校副令累遷判司宰寺事.
恭讓朝除成均大司成世子左輔德上書曰 伏覩敎書以天文示異責己甚切訪求直言謹條狂妄之言 殿下潛德著聞人心推戴廓除異姓之禍光復祖宗之業皆奉玄陵大妃之命而行之 其主盟定策之功實殿下之所由興三韓之所共賴 故卽位之始卽封王大妃以正位號獻冊寶甚盛典也 殿下事之之禮當厚於所生者自去年南幸之時以至今日其於國大妃之殿親幸非一奉養亦至獨於王大妃之殿曾不一詣是狃於生育之恩忽於承睇之重其可乎 傳曰 爲之後者爲之子 此古今之大義也 王大妃萬世之後亮陰之禮固所自盡生事之禮其可不盡心乎 願自今歲時伏臘必先詣大妃殿以奉寒暄然後詣國大妃殿以明大義 近日設封崇都監以冊王世子臣不能無惑焉 殿下未受宣命而世子先受冊寶之禮其可乎 傳曰 子雖齊聖不先父食 言先後之序不可亂也 待殿下親朝
帝所受命而後徐議而行未爲晩也 况今朝廷使臣來徵良馬萬匹百司疲於奔命當此之時强欲行封崇之禮恐未合於輿論也 唐韓愈言於憲宗曰 自黃帝堯舜至于三代皆享壽考百姓安樂當此之時未有佛法 自漢永平始有佛法其後亂亡相繼運祚不長宋齊梁陳元魏以降事佛漸謹年代尤促 此非韓子之臆說考之史冊瞭然可見 殿下卽位之始修廣演福寺塔破民家三四十戶今又大起浮屠屢興土木之役厥今農務方劇而交州一道斫木輸材人畜盡悴曾不小恤欲以徼未可必得之冥福以貽現在生靈之實禍爲民父母其可若是乎 乞申降明勑以寢其役以寬民力 或者以爲役遊手之髡徒無害也 髡徒果枵腹而趨役乎 糜費國用莫甚於此歛怨于民亦莫甚於此 殿下卽位以來其於太廟諸陵未聞有修葺營繕之擧而急於起塔是報本追遠之誠反不逮於求福利生之念矣 豈非足爲盛德之一欠乎 昔宋景有君人之言而熒惑退舍成王惑流言之讒而雷電以風 由是觀之人君一心之得足以感天心一行之失足以召天變 願殿下存心以居對越上帝雖居幽暗之中常若有臨之者及其應接之際尤謹其念慮之萌視聽言動必以禮出入起居罔不敬而其處事不蔽於私欲不流於姑息則此心之敬足以感天心而消變異斡敎化而興邦國矣 又何必崇奉浮屠大起塔廟而後國祚靈長也哉 况無若新羅多作佛事以至於亡神聖垂訓其可違耶 浮屠之說猶不可信况怪誕荒幻之巫覡乎 國中設立巫堂旣爲不經所謂別祈恩之處又不下十餘所四時之祭以至無時別祭一年 糜費不可殫記 當祭之時雖禁酒之令方嚴諸巫作隊托稱國行有司莫敢詰焉故崇飮自若九街之上鼓吹歌舞靡所不爲風俗不美斯爲甚矣 乞明勑有司除祀典所載外一禁淫祀痛斷諸巫出入宮掖以絶妖妄以正風俗 近日下敎求言甚切然臣嘗見臺省有言事者遽見天威或奪其見任或黜之外寄或抑之下官臣恐求言之敎雖切而拒諫之念猶在也 乞前日落職之臣一皆擧用所言之事一皆施行以勸將來則有志之士孰不爲殿下盡言乎.
成均生員朴礎等亦上疎曰 伏惟國家自聖祖創業以來金枝玉葉繼繼承承無墜厥緖者幾五百年于玆矣 中遭否運異姓之禍口不忍言 惟我殿下以神聖之資應天順人掃除凶竪不勞兵刃誕受厥命克復宗社 飛龍之初三韓億兆懽欣拭目想望太平 此正復古中興以致雍熙之秋也 臣等獲逢明時齒于胄學徒費廩祿踰蒙聖恩慨然有志於堯舜君民排斥異端者有日矣 然無路而不得行無位而不得達懷憤鬱抑竊議私嘆得通上聽一悟聖心雖被妖言之罪無所悔焉况今殿下發德音下明旨開廣言路求言如渴臣等安敢糢糢以負平生之志 伏惟殿下更加優容不使盛朝有讜言而受戮者乃國家之幸也 臣等竊聞有天地然後有萬物有萬物然後有男女有男女然後有夫婦有夫婦然後有父子有父子然後有君臣有君臣然後有上下有上下然後禮義有所措此天下之達道古今之常經不可須臾離也 苟或廢焉者則覆載所不容日月所不照鬼神所共殛天下萬世公論之所共誅也 彼佛何人也以世嫡而叛其父絶父子之親以匹夫而抗天子滅君臣之義以男女居室爲非道以男耕女織爲不義絶生生之道塞衣食之源欲以其道思以易天下 信如此焉則百年之後人類絶矣天行乎上地載乎下其所以生育於其閒者惟草木禽獸魚鼈龍蛇而止爾 三綱五常之道竟何寓其於閒哉 夫佛本夷狄之人與中國言語不類衣服殊制口不言先王之法言身不服先王之法服不知夫婦父子君臣之倫僞啓三途謬張六道遂使愚迷妄求功德不憚科禁輕犯憲章且生死壽夭由於自然威福刑德關之人主貧富貴賤功業所招而愚僧矯詐皆云由佛竊人主之權擅造化之力塗生民之耳目溺天下於汚濁醉生夢死不自覺也 是以築樓殿宮閣以事之飾土木銅鐵以形之髡良人男女以居之雖桀之璇宮象廊紂之傾宮鹿臺楚靈之章華呂政之阿房不加也是豈不出乎百姓之財力歟 嗚呼痛哉其誰正之 必也上之人德修於己敎成於下以明禮義使斯民知天理之所在然後可以正之矣 洪惟我東方自新羅之季奉浮屠之法至於閭里比其塔廟佛氏之說洋洋乎盈耳淪於肌膚浹於骨髓未可以義理曉也亦未可以口舌辨也 惟我太祖統三之初深懲積弊禁後代君臣私立願刹 於是太師崔凝請除佛法太祖以爲新羅之季佛氏之說入人骨髓人人以爲死生禍福悉佛所爲今三韓甫一人心未定若遽革佛氏必生駭心乃作訓曰 宜鑑新羅多作佛事以至於亡 然則太祖之垂訓於後世者至深切矣 歷代君臣不能體聖祖之遺意因循苟且營菴立塔無代無之 式至于今其弊滋甚爲人心世道計者可不痛心哉 傳曰 一夫不耕或受之飢一婦不蠶或受之寒 彼佛氏之徒不耕而飮食充不蠶而衣裳具安居自養者不知其幾千百萬由是而凍餓者不知幾何人矣 彼雖飮風吸露巢居野處爲國家者所當斥之者也 况坐華屋食精饌遊手而揖君親者其可一日容於天地之閒乎 誠不共戴天者也 柰何殿下以英明之資惑於浮屠讖緯之說往遷于南以國君之尊親幸檜菴以倡無父無君之敎以成不忠不孝之俗以毁我三綱五常之典 臣等爲殿下中興之美惜也 且誕降之辰殿下宜率百官上壽太妃以示殿下中興孝理之盛德於三韓臣庶也 此之不爲反遵胡敎區區於拜僧供佛以沮臣庶中興至理之望可乎 至若窮人之力歛人之怨演福塔廟之役中外嗷嗷士民缺望 臣等未知所營之木鬼輸神轉歟 所用之財天降地湧歟 欲求福於冥冥之中反貽患於昭昭之際 臣等意一旦風塵再擾霜雹荐臻沙彌不能操干戈塔廟不能禳飢饉 昔後周壞經像而修甲兵齊崇塔廟而弛刑政一朝合戰周興齊滅然則佛氏之不能作禍福於人世者亦可知矣 伏惟殿下法堯舜三代之所以興鑑齊陳梁蕭之所以亡上繼聖祖之遺意下副吾儒之素望使彼佛者勒還其鄕人其人以充兵賦廬其居以增戶口焚其書以永絶其根本所給之田使軍資主之以贍軍餼所屬奴婢使都官掌之以分各司各官其銅像銅器屬於軍器寺以修甲兵其所用器皿屬於禮賓寺以分各司各官然後敎之以禮義養之以道德不數年閒民志定而敎化行倉廩實而國用周 然則向之背君父毁人倫逆天理者將去其舊染之汚以發其秉彝之良心知父子君臣之倫知夫夫婦婦之道男耕女織以生其生含哺鼔腹以樂其樂致理之豐可以肩三代而軼漢唐矣 且今佞臣金琠以不肖之資無知之見阿意順旨變亂是非欲興無父無君之敎以廢古今聖賢之道以爲太祖開國皆蒙佛力指闢佛者爲太祖之罪人 太祖聖德神功順乎天而應乎人心同堯舜行法湯武三韓之民其畏威也如雷霆其懷德也如父母雖盡誅境內沙門如元魏盡鑄佛像爲錢如周世宗彼佛者安能使太祖不能成統合三韓之功乎 我國家自. 庚寅 癸巳 而上通儒名士多於中國故唐家以爲君子之國宋朝以爲文物禮樂之邦題本國使臣下馬所曰 小中華之館 自庚癸之後不死兵亂則逃入山林通儒名士百無一二存者 彼學佛者始倡邪說上誣群臣下誑愚民乃作太祖九世之像曰 太祖前身某生爲某院主某生作某塔某生造某經至曰某生太祖爲某寺之牛至某生乃得王位上賓之後今爲某菩薩 成書開板藏于深山以欺萬世 玄陵見之深加敬信於是內佛堂之法席演福寺之文殊會 講經飯僧至屈千乘之尊拜髡爲師親執弟子之禮至于. 甲寅 未蒙事佛之福 臣等未知太祖九世像釋迦達摩復生於東方親見太祖於天堂佛刹而作此像歟 太祖前身爲牛爲院主之時親見者何僧歟 彼之邪說誣上以太祖爲牛此豈聖子神孫之所可開口者也 嗚呼正學不明人心不正不修德而惟福之是求不知道而惟怪之欲聞豈不痛哉 豈不惜哉 自孟子闢楊墨尊孔氏以來漢之唐之韓子宋朝之程朱子皆扶斯道闢異端爲天下萬世之君子也 王安石張天覺等興佛敎易風俗而爲天下萬世之小人也 若董韓程朱之輩安石天覺之徒並生於今日則殿下用董韓程朱爲天下萬世之法歟用安石天覺倡夷狄禽獸之敎歟 臣等未敢知也 殿下若遵安石天覺之所好髡三韓之民弃國弃家弊屣王位入山求佛則納金琠之言可也若遵董韓程朱之學以正人心明人倫去民之蟊賊以興堯舜三代之理以光中興與天無疆之業則彼金琠者當轘諸都市以示三韓萬世中興大聖人之不惑於邪說可也 殿下以金琠爲忠於國家之臣則禑昌父子絶我太祖列聖三十一代之祀之時彼琠者能立興復王氏之策乎 兼大司成鄭道傳發揮天人性命之淵源倡鳴孔孟程朱之道學闢浮屠百代之誑誘開三韓千古之迷惑斥異端息邪說明天理而正人心吾東方眞儒一人而已 是上天授殿下以▩陶伊傅之佐以興堯舜三代之盛於中興之日也 殿下以道傳闢佛之策爲祖宗之罪人歟金琠奉佛之說爲殿下之忠臣歟 臣等亦未敢知也 殿下疑道傳之正學信金琠之邪說則豈不取笑於天下見譏於萬世哉 此臣等所以敢言也 爲理之本捨正人心何以哉 盖人心之趨向不正則其本亡矣 雖有屑屑於事爲之末皆苟而已未有源未潔而流淸者也亦未有本未固而末茂者也 故臣等獨以闢異端爲正人心之本獻焉 伏惟殿下萬機之暇特留宸念擧而行之非特當今之幸抑亦永有辭于萬世矣 若殿下以臣等之言勿以爲迂採而納之臣等更爲殿下陳理道之萬一 ▩上王大怒.
初司藝柳伯淳知礎等將上疎招諸生止之曰 天下旣廣雖有異端何害吾道 生員尹向曰 天下安有二道 伯淳曰 諸生之志則大矣 雖上書王必不聽何補於治 向曰 孟子云 吾君不能謂之賊 吾輩雖不才安敢背前賢之格言受賊君之名哉 伯淳竟不能禁 唯礎向及韓皐許遲金綣李子撰等十五人上書餘皆不從 伯淳又言於知申事成石瑢曰 礎等▩請勿上聞 礎等知之議欲不受業子粹等惡其無禮博士金貂金租學正鄭包學錄黃喜等以生員徐復禮不署名於▩鳴鼓黜之 子粹等又怒貂等不告長官擅黜生員囚貂等家奴召復禮還入學及子粹赴衙貂等不庭迎子粹上箋辭職略曰 臣斗筲淺量樗櫟微材曾忝言官旋竄邊陲之遠暫爲郡守遽罹縲絏之拘 每因事而徑情反招尤而速禍 夤緣驟貴超拜大司成榮幸逾涯 又兼左輔德旣尸素而曠職宜引退而避賢况爲下官之侵陵能不中心之羞愧 君子貴於見幾 小臣安於知止 伏望賜以兪音遂其愚抱 不允下貂等于巡軍尋釋之. 未幾判典校寺事轉左常侍與同列上疎曰 年前,
朝廷所遣宦官十人皆是本國之人乃有僥倖冒進之徒或依倡妓或聯親戚邀請官爵殿下一皆曲從眞差添設動以百數名器之濫廉恥之喪一至於此 乞付攸司盡奪其職以儆後來 又三司官數至十五署祿牌外無餘事 自今凡中外錢穀出納先報都評議使司使司移文三司使精核會計量入爲出則庶幾財用有所撙節且無曠官之誚矣 王從之 尋拜刑曹判書 自此以後入
『고려사』 권120, 「열전」 권33, 〈김자수〉
김적(金積)
김적은 1564년(명종 19) 8월 23일에 태어났다. 자는 선여(善餘)이고, 호는 단구자(丹丘子)이다. 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김호윤(金好尹)이며, 어머니는 나주박씨이다. 정순왕후의 6대조 이다.
월사 이정구(李廷龜)에게 수학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에게 배웠다. 그러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올라, 다음 해에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여 이이첨, 허균 등이 난을 일으키려는 모의를 하자, 가족을 데리고 서산(瑞山)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평릉찰방(平陵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고향에 내려가 곡식 수천 석을 내어 난민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1646년 1월 16일 병으로 세상을 뜨니 향년이 83세였다. 부인은 화순최씨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홍익(弘翼), 홍량(弘亮), 홍우(弘遇), 홍필(弘弼), 홍욱(弘郁)이며, 딸은 이신여(李信輿)에게 출가하였다.
후에 막내 아들인 김홍욱으로 인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산시(瑞山市) 대산읍(大山邑) 대로리(大路里) 묵수촌(墨水村)에 있다.
〈贈吏曹參判金公墓碣銘〉
洪淸觀察使金君弘郁。狀其先人參判公之行。以書來請曰。先人仁厚之德。恬淡之操。高於人遠矣。而埋光隱跡。終於林下。世鮮有知之者。恐遂沈沒無聞。唯得當世名人紀述碣于墓。可冀不朽。敢以請。予老病昏瞀。文又鄙。刊石以傳遠。非其任也。顧公之德義實可慕。而觀察交遊久。情義已深。其可辭焉。公諱某。字某。新羅國君金氏之後裔也。麗朝有諱仁。官至檢校太子太師。麗末有諱自粹。家安東。以孝行旌閭。文科狀元。官至都觀察使。本朝受命。以刑曹判書徵。不欲事二姓。行至廣州自裁。厥後冠冕世襲。高祖諱僖。王子德寧君之壻。文科長湍府使。曾祖諱良彥。靑松府使。祖諱堧。安州牧使。考諱好尹。贈左承旨。妣羅州朴氏。左議政訔之後。司評謹之女也。公幼孤。大夫人念無以敎。夫人之舅李公。月沙相公之考也。能文章有名。命公受業焉。旣長。又從南窓金公玄成學。累擧不利。晩而中己酉司馬。其明年。補安奇察訪。光海政亂。賊臣爾瞻謀廢母后。許筠謀作亂。公在京嘆曰。彝倫斁矣。其可居乎。遂挈家歸瑞山舊廬。勸子孫學業。課僮僕耕耘曰。此可以終吾生矣。構一堂。扁以養性。多植花竹。客來。無貴賤皆欣然相待。其居有溪山巖石之勝。蓋異境也。有亭名曰丹丘。因自號丹丘子。常杖屨逍遙其間。有以自樂。每良辰美景。率子弟親戚及鄕人耆舊儒士。置酒會于亭上。竟日談笑盡懽。又乘月掉小艇。沿洄潭渚間。至夜深乃罷。嘗見仲長統樂志論,韓昌黎送李愿序。每想隱者物外之樂。淸高閑逸。非世俗得志者所可比。公可謂得此樂也。反正後。除平陵察訪。月沙相公以書招隱。公答曰。相公非與我同庚乎。今甲子已周。安能趨走少年間。仰鼻息求斗祿乎。竟不就。唯喜靜居。以老絶出入。雖地主來訪。只以書謝。未嘗入城府。平生與人無忿爭。接人嘗溫謹。見鄕人後輩。禮貌甚敬。子弟或言待卑幼太過。答曰。是何言也。待人之禮當如是也。居常悅豫。雖有不如意事。亦未見有憂悶之色。未嘗有所干請。至於周恤窮乏。如恐不及。嘗謂求丐於人。甚苦事。唯施與爲可樂耳。壬辰亂。自京城下鄕時。有穀數千石。及癸甲饑饉。餓死者相枕。而有穀者皆閉而不出。利以賤直買器物寶貨。公白大夫人。傾囷散給。告之曰。他日欲償者持去。不能償者亦持去。來者雲集。守奴請錄其名。公笑曰。第書之。後遇豐年。一無所問。親舊流離糧絶。來至者相續。或載或負。無不滿望而歸。以是家貲遂空匱。不以爲意。守奴請更蓄穀以求息。公不許曰。凡貲產。纔足宜矣。若謀贏利。乃鄕俗鄙人之事。吾不爲也。觀察登朝通淸路。公戒之曰。事君之道。惟義與比。持身不可不謹也。臺諫論劾。摘人過惡。如或失實。不但結怨於人。必有後殃。尤當戒愼也。子弘弼得小科。將歸榮。觀察時在玉堂。陳疏願一時歸覲。仁祖大王命本道給宴需。乃異恩也。公泣且言曰。我窮鄕一老人。主上安得以知之。緣汝職在近密。蒙此榮光。吾今老且死。無以上報。圖報萬一。其責在汝。汝其勉之。丙戌正月十六日。以疾卒。享年八十三。夫人先四歲卒。葬于瑞山北里大山墨水池壬坐丙向之原。某月某日。葬公於夫人之右。夫人姓崔氏。同知中樞府事遠之女也。柔順閑靜。事舅姑以孝。事夫子以敬。待宗族以厚。愛子女以均一。撫婢使以仁恕。家中內外和悅油油也。與公同年生。歲在戊寅。夫婦俱至七十五。而其牢禮之年再回也。觀察上疏乞縣。得唐津。其秋設壽筵。觀者皆稱嘆之。以觀察位二品。贈公吏曹參判及夫人貞夫人。生五男一女。長弘翼。連山縣監。丙子。死王事。贈承旨。弘亮。將仕郞。弘遇夭。弘弼。內侍敎官。觀察其季也。女適學生李信輿。四男一女皆有子女。內外孫曾三十餘人。銘曰。新羅之王。金姓三傳。君國子民。遙遙千年。狀元死義。忠孝俱全。善人之後。宜其緜延。公其裔孫。其稟粹然。避世好遯。歸來海濱。千石之富。散盡周貧。爵命之榮。棄如煙塵。婆娑林丘。樂以終身。邈焉物表。是謂逸民。夫婦偕老。兒孫滿前。較其享福。孰爲之先。大山之原。墨水其奔。公宮其問。萬歲之安
『浦渚先生集』 卷32, 「墓碣銘」
김홍욱(金弘郁)
김홍욱은 1602년(선조 35) 5월 6일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문숙(文叔)이며, 호는 학주(鶴洲)이다. 아버지는 찰방 김적(金積)이며, 정순왕후의 5대조이다.
1623년(인조 1) 생원과와 진사과에 연이어 모두 합격을 하였으나, 방이 취소되었다. 다음해인 1624년(인조 2) 진사에 다시 합격을 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겸설서(兼說書)를 지냈다.
다음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호종,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당진현감으로 나가서는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다시 복관되어 대교(待敎)·전적·지평·부수찬·정언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41년 수찬이 된 뒤 교리·헌납을 거쳐 1646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1648년 응교가 되어 관기(官紀)·전제(田制)·공물방납(貢物防納) 등 시폐(時弊) 15개조를 상소하였다.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1650년(효종 1) 사인(舍人)이 된 뒤 집의·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가 되어 그곳에 대동법(大同法)을 처음 실시하였다.
1654년(효종 5)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그때 천재로 효종이 구언(求言)함에 8년 전 사사된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의 嬪)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에 의해 하옥되어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제향되었다. 『학주집(鶴洲集)』이 전하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黃海監司金公墓碣銘 幷序〉
鶴洲金公弘郁字文叔之胤世珍狀公行。謁銘於余而不忍備書。嗚呼。於其狀旣有所不忍。則於其銘亦何心忍書其事耶。旣而思之。孝宗大王以天縱之聖。其於覆盆之下。偶失臨照。而旋卽悔悟。洗冤復官。 則榮耀多矣。公應感泣於泉下。而後人乃反諱之。亦獨何心哉。謹按公慶州人。有仁琯以新羅後裔。麗朝大師。其後有自粹號桑村。有孝行。我太宗以官徵。自以麗氏臣。自殺以立其節。曾祖堧牧使。祖好尹贈承旨。考積察訪。妣和順崔氏。同知遠之女也。公以萬曆壬寅生焉。早歲游場屋。輒屈其人。仁祖反正。中進士第三名。其榜罷而復設。故公復中焉。除齋郞不拜。乙亥。捷文科。由槐院入翰林。兼說書。丙子。賊鋒猝急。公私蒼黃。有武士林恒壽等奮曰。若得數百兵甲。則當以死迎戰矣。公卽以恒壽等見于體府。且曰。 賊兵飆忽。今日當到京城。何不使此等人。賈勇奮擊乎顧眄之間。適遇內官。又以啓於上。上卽允之。公見太僕提調老不能應猝。亟言于承旨曰。賊鋒已逼。而輿御尙未戒。奈何等待。上聞。遂以寡約先出。到崇禮門。聞賊果薄西郊矣。公時以卑官。能越職副急。人服其忠勇。遂自崇禮門。扈蹕轉向南漢。公又白上曰。卽恐賊兵追躡。請亟遣重臣于虜。緩以和事。則其間庶可入城矣。上亦從之。旣入城。又將冒危西幸江都。公又力言其不可僥倖。上以爲然。故事遂已。上旣定城守計。而和議又起。以解將士心。 公又慷慨極言之。亂已。卽覲于湖西。伯氏戰亡于廣州。公尋尸歸葬。以扈從勞陞典籍。歷禮曹佐郞。拜持平。奉命廉察于關東。選入玉堂爲修撰。自是出入三司。未嘗有佗遷。乞養得唐津縣。未幾罷。石室金先生被拘於虜。得釋而還。公請上召見。且言鄭桐溪蘊。宜有褒典以勵風化。公兄弘弼中進士。公上疏乞與榮歸。上命給宴需以榮之。憂吉。甲申校理。乙酉吏曹佐郞。罷復拜。時金自點久專威福。欲交歡公。問候頻仍。公不爲應。自點銜之。公卽謝歸鄕里。遭外憂。戊子服闋。以應敎。上疏力言言路不通。官方淆亂。民 生困瘁。戎政頹廢之狀。末言無忘城下之恥。己丑。孝宗大王卽位。公以執義。將擧劾自點而有勳臣自成傾軋之端。公兩斥之。且言昭顯諸兒坐其母。徙處瘴海之中。宜思保全之道。末言言事被謫臣李應蓍,沈,洪茂績,李敬輿等禦魅窮荒。沈東龜被謫尤可冤。雖事在先朝。皆當有以疏釋。終以典學誠心。爲爲治之基本。上嘉納焉。公欲劾自點。發簡于同僚。僚議不咸。遂引避遞職。又製進大行挽詞。有忌諱語。幾被詩案。賴議政李公景奭救解得免。復廉察于關西。歸拜舍人。時虜人聞賊臣交搆語。遣八使根査。 中外洶洶。以爲公亦將不免。或勸公以計得免者。公笑曰。以賂而生。不如死之安也。時孝宗大王爲士類。身自彌縫。故事遂已。間爲尙瑞掌樂正。以輔德陞拜承旨。蓋錄祔廟都廳勞也。會議行湖西大同法。朝廷難其人。以公爲觀察使。翌年壬辰。辭遞。由承旨移禮曹參議。公不樂在朝。求外爲洪州牧使。甲午。自洪州移拜黃海道觀察使。先是姜庶人得罪仁祖。以逆論死。及上卽位。閔公鼎重上疏訟其冤。上引見於便殿。從容語其首末。且曰。姜之邪謀。無可疑者。後復有敢言者。當以不道論。遂下禁令矣。公交事 後。適有旱災。七月。上疏以爲咎在姜死。上怒甚以爲纔下禁令。而復冒犯如此。不爲重究。後將不止。遂拿致公。上親鞫。公辭氣益厲。天威甚震。公素瘦弱。杖下顏色不變。仰呼侍立所親。責其不言。人皆壯之。以其十六日。還下棘寺而絶。公穎悟絶倫。又甚堅介。立言制行。必以先哲爲準。公兄弟五人。三人早亡。公每念父母悲傷。設娛戲以慰之。察訪公年老鰥居。公必侍寢於側。未嘗入私室。凡所使令。必自承奉。不令婢僕代之。嘗曰。人能孝於其親。則推以及佗。無不盡道矣。及其立朝。則慷慨激礪。常若危亡之勢迫在 朝夕。遑遑汲汲。不敢寧息。知無不言。無所媕婀。其論常主於辨邪正立紀綱。革弊法厚民生。修軍政雪國恥。而其要則歸於人主之一心而已。其於舊要。情義篤好。未嘗以毀譽而易心。公蓋非今世人也。惟其遇事敢言。觸犯天怒。猝被刑禍。爲世大戒。然雷霆旣收。雨露旋濡。恩及九泉。善類相賀。光榮永世。公又何慼。公臨絶顧言曰。葬我於父母之側。遂以翌年乙未。窆于瑞山墨水村負壬之原。配吳氏。參議靖之女。長男卽世珍察訪。次季珍。郡守李基稷,進士韓聖悅,士人趙持韓,郡守李基敍,士人朴尙胄。其五女壻也。察 訪男斗星,斗井,斗奎,斗璧。二女爲朴錪,尹明遠妻。內外孫曾總若干。余與公交誼甚厚。聞公之亡。驚痛之心。蓋不但爲私而已。記昔己亥伸冤之日。筵臣進說。同春宋公浚吉曰。殿下須於暇時。靜思其有罪無罪。上曰不然。如知其無罪。何待靜思。卽下德音。筵臣皆感泣而退。噫。斯其所以爲大聖人歟。只今十數年間。世道變嬗。而公之墓木亦已拱矣。俯仰今昔。爲之抆血而書公之事如此云。銘曰。侃侃惟公。才豪志潔。忠孝存心。勔追古哲。在丙丁歲。國步危急。公於此時。職是載筆。慷慨奮發。有如狂易。 忠赤之激。言而多中。士心旣附。名論益重。賊臣秉柄。勢若漫天。人爭炙手。公獨退然。衆流之奔。亭亭一柱。群目皆側。公益不顧。洎聖祖初。爰有二老。公爲輔介。以翼世道。聖主明明。豈不知公。一語攖鱗。恩義未終。公又何慼。公議在人。日月之更。況不留辰。德音溫溫。上天孔仁。維茲墓道。草木含榮。千秋萬歲。維其永寧。
『宋子大全』 卷178, 「墓碣」
김계진(金季珍)
김계진은 1646년(인조 24)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서(仲瑞)이고 호는 회우당(悔尤堂)이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으로, 고조는 목사(牧使) 김연(金堧)이고, 증조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김호윤(金好尹)이며, 조부는 찰방(察訪)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적(金積)이다. 부친 감사(監司)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문정공(文貞公) 김홍욱(金弘郁)과 모친 참의(參議) 오정(吳靖)의 딸 동복오씨(同福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현(愼晛)의 딸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 정순왕후의 고조부이다.
처음에 전랑(殿郞)에 제수된 후 별제(別提)·예원사평(隷院司評)·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지례현감(知禮縣監)·황간현감(黃澗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여 정사(政事)를 펼칠 때에는 혹독한 정책을 펼치지 않았으며, 성심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펼쳤다. 사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두광(金斗光)이다.
〈縣監贈判書金公 季珍 墓碣銘〉
仕宦而能知止人鮮焉。知止而又能知優閒之樂者。爲尤鮮焉。吾見多矣。惟金公諱季珍。仕而能自優閒。其不待仕止。心不役於仕也歟。公月城人。字仲瑞。新羅王之後。麗朝有太師仁琯。始見譜書。八世至都觀察使自粹有至行。號桑村。逮我太宗。以刑曹判書召。自決以明不事二君之意。牧使諱堧。贈承旨諱好尹。察訪贈參判諱積。監司諱弘郁。號鶴洲。寔公高曾祖考也。鶴洲公文學經綸。爲士類所推重。在海營。應旨疏言姜嬪獄寃。忤旨遘禍。尤菴同春兩文正筵白直之。孝廟命卽復官。後肅廟伸復姜嬪。蓋因其一疏。而亦特贈公吏曹判書。諡文貞公。妣貞夫人吳氏。參議靖女。參判號晩翠億齡其祖也。以仁廟丙戌三月廿七日生公。九歲遭文貞禍。哭泣哀慕。若成人焉。隨伯氏贊成公。奉母夫人歸湖庄。孝養數十年。甘旨藥餌之供。竭誠敬無所闕。起居節宣之際。親扶將不少懈。及喪。慟毁踰常。自以穉秊居慽。多不如禮。今吾可以自盡也。執哀幾滅性。喪餘必備物豐潔。將事於宗家。終身不廢。蓋遵吳夫人遺命也。平日事伯氏如嚴父。與諸姊盡愛友。以至宗族無踈近。一以誠曲待之。公產業頗裕。親戚之貧者。必愍恤之。其尤無依而衣食於家者亦多。雖素不知人。有丐則輒與之。日累至而無垂槖而去者。辛巳。始除殿郞。旋移翊衛司洗馬。平陞至別提。乙酉。以掌隷院司評。出監知禮縣。以方伯姻嫌。翌年遞。復由該司簿。除黃澗縣監。用財極簡嚴。如薧醢之屬。取用於家。不以害公。知黃之民久愈稱說。居不久。告病遞。歸卧鄕廬。以爲終世閒放之計。公爲邑。勤以政成。廉以威生。未嘗以刑杖施人。不但性本仁恕。蓋有隱痛而然也。以是公才藝邁倫。意不欲進取。早拋鉛槧。趯勒有法。亦不自有。俱不肆力。人無知者。公娶居昌愼氏僉知晛女。左議政守勤六世孫。婦德咸備。事姑克孝敬。待妯娌御婢僕。務盡和惠。敎子女。必以義方。治家事。亦必誠勤。常曰。怠則業益荒。慢則家漸乖。此不可不知云。公沒於己丑三月二十日。壽六十四。墓在瑞山芝谷栗室里負酉之原。夫人先公四年生。沒後公七年。葬同竁。己丑後五十一年己卯。我聖上冊今中宮殿下。正位坤極。寔公曾孫漢耈之女。桑村,鶴洲俱以名節直道。捐身殉國。正氣所萃。潛光毓祥。公又長厚淳德。鍾美在後。載誕聖女。母儀王家。積善餘慶。焉可誣也。漢耈遂拜領敦寧府事鰲興府院君。推恩公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帶如例。愼氏從贈貞夫人。公一男斗光。一女適府使李箕恒。運慶,選慶縣監。李夏瑞妻。斗光出。選慶己卯超資。除戶曹參議。蓍迪,蓍選,蓍進伯仲皆郡守。正字宋翼長,縣監金光遂妻。李婿出。運慶生三男。長漢禧生員。次漢祿。以學行見推士友。漢祚夭。女生員鄭存愼妻。選慶生四男。長漢耈。寵貴若驚。謙謙退遜。不改儒素規模。次漢耆,漢老,一幼。三女申景若,洪相休,李憲養妻。李夏瑞生四女。承旨鄭存謙,金載敬,魚錫文妻。玄孫男女摠若干人。嗚呼。公長身美鬚髯。風儀頎偉。性厭趨囂喜處散。仲長統所謂良田廣宅。背山臨流。溝池環匝。竹木周布。場圃築前。果園樹後者。卽公所居。而其又所謂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嘉時吉日。則烹羔豚以奉之。躕躇畦園。遊戲平林。濯淸水追凉風者。亦公所自爲也。若其逍遙一世之上。永保性命之期者。亦惟公之平生所自冀也。嘗書此論。揭之座右曰。人生於世。如斯足矣。何嘗營營於爵祿爲也。此可以見公之志之所存也夫。余以公故人子。穉髫時。屢侍公隅坐。後又就拜公於橋西時。公方仕而偃仰邱原。隨分任眞。恥世之潝潝者類。豈非其爵祿不入心者耶。今參議以公狀授余以謁銘。余追念撫頂之恩。不敢以老病詞拙辭。謹撮其狀而序次如右。銘曰。嗟公之世。公自踈而。嗟公之具。公不居而。低徊蔭塗。猶自捲而。我稼我釣。愛閒遣而。裕以貽昆。煥莘摯而。不顯其光。邦之懿而。公之有知。敢只榮而。公當謙約。想益兢而。先思以勖。惟後承而。芝谷之山。鬱松翠而。封土崇崇。永千禩而。
『屛溪先生集』 卷49, 「墓碣」
김두광(金斗光 )
김두광은 1674년(현종 15)에 태어났으며, 자는 자휘(子輝)이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으로, 고조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김호윤(金好尹)이고, 증조는 찰방(察訪)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적(金積)이며, 조부는 감사(監司)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문정공(文貞公) 김홍욱(金弘郁)이다. 부친 자헌대부(資憲大夫) 증 이조판서 문정공 김계진(金季珍)과 모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신현(愼晛)의 딸 거창신씨(居昌愼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통덕랑(通德郞) 이두소(李斗熽)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정순왕후의 증조부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우애가 돈독하였다. 부모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소매에 넣어 두었다가 집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부모가 병환이 들면 탕약에 이상이 없는지 직접 맛을 보아가며 부모 곁에서 밤낮을 잊고 병간호에 힘썼다.
성품이 온화하여 친인척과도 돈독하게 지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 아무리 아끼던 물건이라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청하면 아까워하지 않고 주었다.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화려한 음식과 의복은 좋아하지 않았다.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병에 잘 걸렸다.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가 병이 들어 1702년(숙종 28) 7월 11일에 죽었다. 사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운경(金運慶)·참의(參議) 김선경(金選慶)이다.
〈贈左贊成金公 斗光 墓碣銘〉
公諱斗光。字子輝。鶴洲金公諱弘郁之孫也。鶴洲公忠節炳然。感動神人。宜其庇及後孫。是以他支蕃茂。而公內美旣具。年未三十而沒。子姓又數世無章。人或致疑於司命者之權矣。今公後孫玉潤金章。而漢耈篤生聖女。入膺翟褕之選。正位坤極。以基王化。蓋積之厚故。發之遠矣。孰謂醴泉無源。靈芝無根也。福善之理。如執左契。而公不食之報。亦可以見於此也歟。金氏系月城。新羅國姓。始祖諱仁琯。高麗太師。八世至自粹。都觀察使。號桑村。我太宗大王以官徵之。效死罔僕。有諱好尹贈左承旨。諱積察訪贈吏曹參判。公之高曾祖也。鶴洲公孝宗朝。以海西伯。進應旨疏。論姜嬪獄事。致上怒遽震。身殞桁楊。德音旋下。昭雪無餘。後肅廟復贈公吏曹判書。謚文貞公。考諱季珍。官縣監。靜養邱園。無進取意。妣居昌愼氏。僉知晛之女。左議政守勤六世孫。以甲寅十一月二十五日生公。公生有美質。孝愛之誠。出於天性。自孩提時遊戲膝下。不離側。出而得一味。輒袖而歸遺父母。及長。親有病則衣不解帶。憂形於色。藥必親嘗。食必親在。晝夜扶護。復常。始退私室。有一姊。敬愛甚篤。而推其愛。視諸甥若己子。待宗族親知。一無緇磷。和樂愷悌。人以是莫不傾心愛好。性且澹然。雖平日寶愛之物。人或請之。則便與之無吝。家業素饒。而不喜華靡。大布秸薦。處之晏如。所謂謙恭自牧。淡泊自守者非耶。先公屢擧不育。公自幼善病。不以課學督過。而自能悟達。其爲文。條暢無艱澁之態。翰墨亦隨意飄灑。皆可爲而初不用力。先公嘗歎曰。惜乎病也。使之盡其才。則足以昌吾門也。壬午。隨父母入京師。以其年七月十一日。病不起。年纔二十九。人莫不嗟惜。初葬廣州桑村公墓下。後移瑞山雙峴丁坐之原。配李氏。系出璿派。邊城君繼連之後。通德郞斗熽之女。婦德甚備。奉舅姑盡其誠。事夫子必以禮。及舅姑歿。持家御衆。亦遵成法。奉祭祀。不事豐侈。潔而且旨。理家產。切戒鄙嗇。節以使裕。兩孤兒在穉年。而課書甚嚴。使不敢遊惰。尤以飭行爲重。諄諄敎誨者。常在於修身立名。以不墜舊家之聲。槩之舅姑在。爲孝婦。夫子在。爲順妻。敎子爲贒母。鄕黨之稱以贒婦人者。誠有以也。生於壬子。沒於庚子十一月十三日。祔於公墓。後己卯大婚。漢耈卽拜領敦寧府事鰲興府院君。以其顯。贈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妣貞敬夫人。公有二男。長運慶。次選慶參議。女士人李夏瑞。運慶三男。漢禧生員。漢祿有學行。漢祚夭。女生員鄭存愼。選慶四男。長卽漢耈。次漢耆,漢老。一幼。三女士人申景若,洪相休,李憲養。李夏瑞四女。承旨鄭存謙,士人金載敬,魚錫文。漢禧三男。獻柱,勉柱,德柱。出爲漢祚後者其季也。一女幼。漢祿三男。懿柱煕柱。一與二女幼。漢祚一女幼。漢耈一女。卽我聖妃。二男龜柱,麟柱。漢耆一男一女幼。內外孫曾多不盡錄。公世居瑞山之大橋。一村數十家。簪裾蟬聯。桑柘掩翳。世之稱湖右士大夫者。必以大橋之金先數焉。蓋桑村公守志於先。鶴洲公著忠於後。以立其基本。潛德幽光。世承其休。而公又仁而無壽。故天之報施者。不于其躳而于其後。子孫振振。衍祥塗宮。慶我邦家。光輝赫煥。將以見德善之流無竆也。斯可以爲銘。銘曰。使福壽之在身兮。百歲之間。使慶祉之貽後兮。萬世之傳。嗟惟公之所得兮。羌不可以易彼。於戲石之不泐兮。銘以示乎無止。
『屛溪先生集』 卷50, 「墓碣」
김한구(金漢耉)
김한구는 1723년(경종 3)에 태어났으며, 자는 국로(國老), 호는 기졸정(寄拙亭)이다. 아버지는 참의 김선경(金選慶)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1759년(영조 35) 그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아울러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금위대장을 거쳐 1763년에는 어영대장이 되어, 1764년 아들 구주(龜柱)가 척신으로서 당론에 관여했다 하여 파직될 때 함께 파직되었다.
1766년에 장악원제조로 복직되었고, 다음해 어영대장이 되었다. 1769년(영조 45) 11월 5일에 죽으니,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부인은 원풍부부인(原豊府夫人) 원주원씨로 증판서 원명직(元命稷)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구주(金龜柱), 김인주(金麟柱)이며, 딸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졸기〉
○癸未/鰲興府院君 金漢耉卒。 上震悼曰: “予非但以國舅也, 爲國事如有失矣。” 右議政金尙喆曰: “國舅之弟在, 無異於國舅矣。” 漢耆方爲嶺南伯, 上謂此時不可在外, 卽命遞之, 以李瀰代之, 令卽日辭朝。 漢耉爲御將, 及是備局將薦望, 上曰: “吾不忍見望單。” 命成服後入之。
『英祖實錄』 113卷, 45年 11月 5日(癸未)
정순왕후(貞純王后)는 1745년(영조 21) 11월 여주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이고, 어머니는 원풍부부인 원주원씨이다.
1757년(영조 33)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 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6월 9일 삼간택을 행하여 왕비로 정한 후 6월 22일 가례를 행하였다.
〈敎書〉
王若曰: 三紀丕御, 政篤風敎之原, 六禮載成, 允協神人之望。 用昭邦慶, 爰播群聽。 言念帝王致理之要, 實係后妃媲美之德。 虞五敎敷治之績, 亶由嬀汭之觀刑, 周二南敦俗之休, 亦資聖姒之贊化。 顧玆寡躬之缺耦, 竊歎內輔之無人, 近歲憂戚之屢經, 非懷安於宮室, 晩政闕遺之莫補, 奈閟音於簪珥, 何幸得慈旨於在笥之餘, 乃復念宗禋於薦盎之際, 天道未能獨運, 惟博厚光大之相須, 壼職難容暫虛, 故寤寐恩服之愈切, 援古人取德之諭, 宜先擇賢, 勉聖王端本之治, 蓋欲求助。 王后金氏, 家推喬木, 慶叶曾沙。 淑愼柔和之儀, 允合良佐, 幽閑貞靜之性, 當嗣徽音。 肆蠲吉辰, 庸備嘉典。 乃於本年六月二十二日辛未, 授冊寶正位。 淸渭之舟梁賁飭, 萬姓莫不聳欣, 長秋之門鑰復開, 九嬪亦皆動色。 日月垂幷耀之象, 儼成儷極之尊, 鍾鼓奏相和之聲, 可做正家之則。 斯非但一人之攸幸, 抑將與八方而維新。 道由造端, 自今辰而更始, 政攀布惠, 罔群品而均霑。 自本月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幷宥。 於戲! 國欲治則先齊, 詎少忽威如之訓。 化自邇而及遠庶, 不懈惕若之心。 勖新謨於惇倫, 冀綿籙於永世。 故玆敎示, 想宜知悉。【大提學金陽澤製進。】
『英祖實錄』 93卷, 35年 6月 23日(壬申)
정순왕후는 영조의 계비가 된 때가 15세였다. 이때 영조는 이미 66세였다. 왕비가 된 후 18년 동안 영조를 섬겼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었지만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참소를 많이 하였다. 결국 사도세자가 서인으로 폐위되고 뒤주에 갇혀 굶어죽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정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1805년(순조 5) 정월 12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에서 향년 61세로 승하하였다. 18일 시호를 정순(貞純)으로 하니, 정(貞)은 큰 계책을 성취시키는 것이고, 순(純)은 중정(中正)하고 정수(精粹)한 것이다. 휘호는 소숙정헌(昭肅靖憲), 전호(殿號)는 효안(孝安),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으로 의정(議定)하였다. 그러나 장지를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의 왼쪽에 정하면서 경릉이라는 묘호는 필요가 없어졌다. 6월 20일 장례하였다.
〈哀冊文〉
維歲次乙丑正月丙戌朔十二日丁酉, 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大王大妃殿下, 昇遐于昌德宮之景福殿, 移殯于歡慶殿。 以是年六月癸丑朔二十日壬申, 將薦祔于元陵, 禮也。 禹穴啓兆, 商殯就紼, 侍御褕捲, 工祝祖撤。 陳仙仗而外辦, 戒靈駕而前發。 背三朝之翟衛, 指一岡之象設。 主上殿下, 皇皇攀號, 纍然沖年, 誠未罄於報暉, 痛永違於終天。 惟徽化之不沫, 雖百代而可傳, 思徵信於石室, 命揚烈於瑤篇。 其辭曰, 王道之興, 肇自壼政, 歷攷彤史, 我朝最正。 於! 赫聖母, 法門毓慶, 潛光儲祥, 天啓德性, 配體英廟, 繼範貞聖。 紘紞克勤, 藻蘋惟敬, 坤化默運, 承乾以靜, 運丁艱虞。 歲在乙、丙, 密贊大策, 永鞏邦命, 日輪初昇, 陰翳自屛。 猗! 寧考孝, 舜、文之行, 慈心爲心, 尊我所秉, 愉台洞屬, 寢膳溫凊, 準之四海, 嗚呼其盛! 練裙含飴, 樂寓晩景, 時有疑危, 炳幾察影, 聲色不大, 宗祏永靖。 正考禮陟, 隆養未竟, 國勢綴旒, 神人靡騁。 我后天只, 簾帷深靚, 曾孫有道, 纉述是儆。 初筵慈敎, 玉音嗚哽。 曰若大義, 生民綱領, 先王之守, 未亡攸警, 極天罔墜, 日星其炳。 君君臣臣, 反則梟獍, 袞鉞斯嚴, 琬琰藏倂。 大防斯立, 凶穢莫逞, 邪術斯蔓, 正敎漸梗。 五刑五用, 廓以四境, 牖彼群蒙, 永言喚惺。 野詢疪瘼, 朝徠諫諍, 賢德無隱, 弓旌遍聘, 遇慶益謙, 應災必省。 薄海以東, 咸游咸泳, 自任、姒來, 功莫與競, 亟釋機務, 不待群請, 寂若無迹, 太虛寥淨。 花甲重廻, 寶婺增暎, 鏤玉稱觥, 縟儀方整, 萬年之祝, 庶伸忭幸。 云胡理舛, 哀慶俄頃, 佇海屋之騰頌, 奄繐幄之告凶。 三光盪而失躔, 百靈號而徹穹, 春暉邈而莫攀, 慨徽音之長終。 嗚呼哀哉! 居后妃位, 法勛、華治, 後于宣仁, 太母有之。 無能名於至德, 莫匪極於斯民, 措國脈於泰磐, 繄誰功而誰恩? 嗚呼哀哉! 一人在疚, 孺慕靡極, 殷闇恭默, 滕廬深墨。 躬艱大而藐爾, 奉至意於身敎, 違慈顔於一夕, 更無地於追孝。 嗚呼哀哉! 不嫌預凶, 用示寧儉, 後事之戒, 民國是念。 籝白金而孔碩, 篚文綺而有章。 頒宿儲於內帑, 詔勿煩於水衡。 嗚呼哀哉! 鬱彼元寢, 聖祖攸藏, 玉匣將祔, 珠邱允藏。 知有慰於陟降, 儘無憾於幽明。 悽焄蒿於一閣, 共月遊之洋洋。 嗚呼哀哉! 靈辰不居, 遠日奄屆, 祥車夕列, 菆殿晨啓。 風樹悲而莫定, 逝水忙而難回, 蕭輓緩而出都, 眷京闕而低徊。 嗚呼哀哉! 籲天無從, 沒世可忘? 眞遊寖遠, 遺烈彌長。 嗟! 至大而至博, 與宇宙而齊化, 衍積慶於本支, 永於萬而錫嘏。 垂蒼珉而載颺, 史不勝於摸寫。 嗚呼哀哉!【弘文提學金載瓚製。】
『純祖實錄』 7卷, 5年 6月 20日(壬申)
〈誌文〉
惟我大行大王大妃垂簾之四年癸亥, 命鑾司撤簾帷, 就閒長樂。 粤一年甲子冬, 以明年寶甲載周, 我聖上, 因群情, 親上尊號, 將以瑤冊、金寶, 贊揚供休, 《湛露》、《勻天》, 賁开太平。 歲籥方新, 慶赦纔頒, 而后遽有疾不豫, 上煼煎憂遑, 命設侍藥廳, 招聚中外名能醫術者, 使之同參醫藥。 技殫百方, 罔克奏效, 則又命禱于廟社、山川。 而竟以乙丑正月十二日丁酉午時, 昇遐于昌德宮之景福殿, 春秋六十有一。 嗚呼! 豈所謂天不可諶, 而理不可推者歟? 我殿下攀號靡逮, 旣卜因山之吉, 乃命臣秉模, 俾爲幽宮之誌, 臣嚴不敢辭。 臣謹按, 后姓金氏, 籍慶州, 新羅金姓王之後。 至麗末, 有諱自粹, 號桑村, 有孝行。 我太宗大王, 徵以官, 自以麗氏臣, 殺身以立節。 入我朝, 簪組蟬奕, 至諱弘郁, 號鶴洲, 官至觀察使, 以忠直敢言, 名於世, 寔后五世祖也。 曾祖諱斗光, 贈贊成, 祖諱選慶參議, 贈領議政, 考諱漢耉, 領敦寧府事, 封鰲興府院君, 贈領議政, 諡忠憲。 配原州元氏, 封原豐府夫人, 縣監贈判書命稷之女也。 后以崇禎紀元百十八年乙丑十一月丁丑丑時, 誕降于驪州邑私第。 英宗丁丑, 貞聖王后薨, 王乃擇以門族, 審以德行, 以歲之己卯六月, 冊封王妃, 仍行嘉禮。 后旣正位坤極, 小心翼翼, 夙夜靡懈。 英廟已躋大耋, 而所以內資寬仁恭儉之治者, 十八年如一日。 嘗曰, ‘女君聲敎, 不出房闥, 參預朝政, 非美事也。’ 正廟時在東宮, 而恩愛篤至, 正廟每涕淚而言于廷臣。 乙未間, 英廟倦勤, 逆臣洪麟漢、鄭厚謙等, 忌正廟英明有聖德, 深相附結, 力沮聽政, 謀傾儲位。 而厚謙之母和緩主, 恃愛自恣, 嘗在永善堂, 潛煽以助之。 時變起戚畹, 禍釀宮省, 岌乎殆哉, 而后翊護正廟湯膳之際, 未嘗跬步暫離, 而察厚謙母辭氣, 逆折亂萌, 丕贊大策, 使凶謀不得售, 而天討遂行。 己亥, 逆臣洪國榮, 敢懷異圖, 陰沮儲嗣大計, 以逆宗䄄之子湛, 號爲完豐, 仍肆凶言, 圖危國母, 后以廣儲嗣之道, 布示諺敎, 又以至誠, 扶護中宮。 榮賊之謀乃沮。 及至丙午, 文孝世子薨逝, 國勢又復孤危。 罪相金尙喆, 與具善復, 暗挾逆䄄, 凶謀狼藉, 而正廟以因心之友, 隱忍而不之罪, 后又下諺敎於賓廳, 首尾數千言。 痛辨汕徒之情跡曰, ‘未亡人所秉執, 將以明大義, 討君讎國賊, 保我邦家, 則雖死之日, 猶生之年,’ 遂盡廢湯劑常膳。 大臣、三司, 因以齊聲庭籲, 正廟不得已出置逆䄄于江華府, 善復等皆伏法。 而正廟不勝鬱陶之思, 歲輒召見, 又嘗於江館, 召接䄄, 經宿不返。 后爲之焦遑, 遽下移蹕之命, 正廟乃始旋轝, 還配逆宗。 逮聖上卽阼之後, 䄄率其子, 穿棘而出, 大臣以下, 力請置辟, 后以爲主少國危, 目下憂虞, 異於先朝, 遂命磬甸。 當庚申崩坼之變, 宗國危於綴旒, 后勉循群請, 行貞熹聖母故事, 而保護聖躬, 靡不用極, 飮啖起居之節, 一念憧憧。 尤以輔導聖學爲急務, 命大臣、閣臣, 輪日勸講, 以至發一令措一事, 憂勤惕厲, 幾乎寢膳之不能一夕安也。 嗚呼! 正廟平日所秉執之義理, 至精至嚴, 宮園之儀, 亞于太廟, 凡所得爲而爲, 不得爲而不爲者, 可以建天地而不悖, 俟百世而不惑。 臨御二十有五年, 守之如金石。 后於垂簾之初, 特下敎曰, ‘大行大王盛德大業, 一則義理, 二則義理, 一或違越於此, 大行朝逆臣也, 當宁朝逆臣也。 敢有爲嘗試之計者, 斷不饒貸, 曉諭中外。’ 自是厥後, 每臨筵以固守先王義理, 闡明先王志事, 申申飭勵。 先是, 戚臣洪樂任, 背馳義理, 角戰公議, 流布訛言, 詿惑人心, 正廟屢發隱歎於中朝, 而以恩掩義, 曲加全保。 至是, 益無所忌憚, 廷臣乃言, ‘其譸張凶圖, 疑亂典禮, 今若鋤草, 而不祛其根, 則滋蔓難圖。” 后敎曰, ‘予以先王聖心爲心, 必欲終始曲保,’ 久而後從之。 西洋邪敎, 自十數年前, 浸盛於閭巷間, 滅倫敗常, 貨色以相誘, 嘯聚徒黨, 犯刑憲如飮食, 視刀鋸如樂地, 正廟心常患之。 時李家煥、丁若鍾等, 包藏禍心, 潛通異域, 廣播妖書, 熾若炎火, 混名分瀆風敎, 不但爲伊川被髮之歎, 將有綠林、黃巾之變。 后因臺啓, 命鞫治, 大臣有以此時輕興大獄, 難之者, 后曰, ‘不治則人胥爲禽獸而國亡。 治之亦恐召亂, 與其汚國而亡, 豈若潔而亡?’ 蒐捕京外, 殲其魁, 散其黨, 申明五家統之法, 俾各紏察邪穢之氣, 卽日廓淸。 至於恤民之政, 尤惓惓焉。 嘗敎曰, ‘廟堂諸臣, 苟有保恤民生之策, 隨事提稟。 雖以身蹈水火, 予豈惜之? 民弊中還穀, 名色無數, 吏胥奸弊, 由此而生, 廟堂從長相議。’ 以備局句管戶曹穀爲名, 賤糶貴糴, 略倣常平古法制。 又曰, ‘生民切害, 莫急於貪吏。 目下貪風之盛, 日甚月加, 養廉恥嚴法防, 然後可以拯救民生。 廟堂講究弊源, 嚴立科條, 畫一遵守, 俾有實效。’ 嘗以繡衣褒貶, 諸道殿最多相左, 敎曰, ‘守令罷斥, 太半是無勢蔭官, 顯族皆是良吏, 弱蔭偏爲不治乎?’ 又以度支經費之不足、兩西民庫之蕩然, 深加軫念, 庚申因山之役, 都監所費, 皆令壯勇營擔當, 辛酉一年度支之用, 亦命壯營劃送。 兩西所在壯營穀, 一付諸該道民庫, 用大臣議, 特罷壯營。 蓋其設置, 卽正廟精義之一端, 而庚申以後, 則民國事勢, 又不容不通變, 其設其罷, 其揆一也。 嘗減罷供上六十, 撤簾後, 又出付四十五供上, 曰, ‘此雖不多, 亦可以稍補國用。’ 又慮他日之用, 衣衾之具, 一皆預備, 且以白金三千兩, 各色緞屬, 爲之措置。 聖上擧似, 而飭敦匠之臣, 敬遵遺意, 八方傳誦, 感泣不已。 用人材, 則以激濁揚淸爲務, 曰, ‘銓曹但以節次推排爲事, 則一政吏足矣。’ 杜私徑則曰, ‘予不欲以朝廷政令間事, 問於私親。 有從密逕告知予者, 爲予政令之累。’ 開言路, 則諭在廷大小曰, ‘凡係予躬之闕德, 朝廷之失得, 其各洞陳無隱。 雖草野踈蹤, 毋或嫌外。’ 每諸臣有所論奏, 初雖不槪於慈心, 旋卽轉圜如流, 事關宮掖, 尤無不言下開納, 亦未嘗不深惡痛斥於怪鬼跳踉之習。 前縣監洪履猷輩, 欲逐一相臣, 誣捏其先臣己亥疏句, 轉而壞亂辛、壬大義理, 后輒燭其奸, 命正其罪。 當廷議之請垂簾也, 后以守經之意, 十啓靳兪, 末乃勉許, 及垂簾之日, 特敎曰, ‘予則垂簾, 沖子侍坐, 殊非正名位之意。 更以予則從以垂簾書頒。’ 及其撤簾也, 召大臣宰執, 敎曰, ‘予否德, 久居不當之地。 今主上春秋長盛, 聖學日進, 萬機可以總斷, 予豈可一向蹲仍, 不思所以存國體正大經乎?’ 斷自慈衷, 立命撤之, 嗚呼! 之德之功, 太史將不勝其書矣。 臣何能摸畫萬一哉? 謹就筵綸敎令及章奏文字之昭布耳目者而撮之, 自附簡嚴之體。 而竊伏惟念后妃之德, 莫盛於周之任、姒, 然詩人之所詠美, 不過《葛覃》、《樛木》、《思齊》諸篇而已。 有宋宣仁高太后, 以所値之不同, 當時有女中堯舜之稱, 而讀其史, 尙不能無一、二可議焉。 猗! 我太母, 以任、姒之聖, 遭元祐之時, 德化旁流, 寰宇寧謐, 欲報之恩, 昊天無極。 而其終始而論之, 折奸萌以贊丕策, 后之明也, 炳幾先以鞏國勢, 后之義也, 嚴秉執以靖世道, 后之正也, 杜私逕以肅宮闈, 后之嚴也, 察幽隱以奠民生, 后之仁也, 節供奉以紓經用, 后之儉也, 蕩邪穢以新汚俗, 后之斷也。 至若兩宮之間, 人無間然, 勇撤簾帷, 以正其終, 又豈宣仁之所能彷彿也哉? 初正廟爲聖上擇配, 厥祥已定, 而仙馭遽賓, 賊臣權裕, 謀欲沮遏, 遂投凶疏, 指意叵測。 后穆然玄覽, 不眩不撓, 大禮以時, 以基我億萬年《關雎》、《麟趾》之化, 蓋慈覆之天, 於是乎益無能名焉。 嗚呼! 太母之盛德至善, 固已極摯, 而亦由我正廟曁我殿下至孝根天, 洞洞屬屬, 承意順志, 動不違則, 慈德愈隆而聖孝彌光, 於乎休哉! 英廟壬辰, 群臣上尊號曰睿順, 丙申加上尊號曰聖哲, 正廟戊戌憂吉, 又上尊號曰莊僖, 癸卯、甲辰、丁未、乙卯, 連上尊號曰惠徽翼烈明宣綏敬。 聖上甲子, 上尊號曰光獻, 又議上曰隆仁, 而追進冊寶於殯殿, 大臣徐邁修等, 率諸宰, 上諡曰貞純, 徽號曰昭肅靖憲, 殿號曰孝安。 山陵卜於元陵同原, 以六月癸丑朔二十日壬申, 祔左焉。 此可以少慰后平昔密邇之志願也歟!【領府事李秉模製】
『純祖實錄』 7卷, 5年 6月 20日(壬申)
김한기(金漢耆)
김한기는 1728년(영조 4)에 태어났으며, 자는 덕수(德叟)이다. 아버지는 참의 김선경(金選慶)으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버지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홍주화(洪胄華)의 딸이다.
1765년(영조 41) 9일제(九日製)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전시(殿試)에 바로 나갈 자격을 얻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의 후광으로 그해에 바로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당상관에 올라 승지·성균관대사성·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70년 형 김한구가 죽자 이를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 영조의 배려로 특별히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이어 수어사·어영대장에 발탁되는 등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조카 김구주(金龜柱)가 물러나자, 앞으로는 절대로 외척은 청화요직(淸華要職)에는 임명하지 말라고 영조에게 눈물로 호소하였고, 영조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지냈다.
정조가 즉위한 뒤 벽파로서 시파(時派)처벌에 관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의 무고함을 알고 또한 대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배만은 금하여 주었다. 뒤에 다시 서용되었으나 현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지중추부사에 머물렀다.
1792년(정조 16) 1월 6일 졸하였다. 묘소는 서산(瑞山) 화변(禾邊) 창촌(倉村) 동쪽 둔덕에 있다. 부인은 정부인 청주한씨로 도사 한사제(韓師悌)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용주(龍柱), 익주(益柱)이며, 딸은 서격수(徐格修), 정재찬(鄭在瓚), 이헌수(李憲垂), 안은(安檃)에게 출가하였다.
김한로(金漢老)
김한로는 1746년(영조 22)에 태어났으며, 자는 양지(養之), 호는 죽포헌(竹圃軒)이다. 아버지는 참의 김선경(金選慶)으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버지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로 홍주화(洪胄華)의 딸이다.
1766년(영조 42)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771년(영조 47) 신묘 식년시에 진사에 올라 교관에 제수되고, 부솔(副率)을 지냈다. 다음 해에 탕평정시(蕩平庭試)에서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삼사 응교를 거쳐, 병조참의, 수원부사, 부총관,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799년(정조 23) 2월 7일에 졸하였다. 묘는 양주시 건천면 오룡동에 있다. 부인은 정부인 영일정씨이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준주(駿柱), 기주(驥柱), 경주(駉柱)이며, 딸은 윤치정(尹致正), 유남주(兪南柱), 유운환(兪雲煥), 이정우(李亭愚)에게 출가하였다.
김구주(金龜柱)
김구주는 1740년(영조 16)에 태어났으며, 자는 여범(如範), 호는 가암(可菴)이다.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이다. 홍양해(洪量海)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어서 충청도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스스로도 사대부 중에 시세에 아부하지 않는 청류(淸流)로 자부하였다 한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 급제, 그해에 도당록(都堂錄)에 올라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강원감사·승지를 역임하였다.
1772년 공조참판으로 있을 때 청의(淸議)와 명절(名節)을 우선하는 모임인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가 발각되어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당시 홍봉한(洪鳳漢) 외척정치의 탓으로 돌려, 홍봉한을 제거하는 것이 의리라는 상소를 사촌동생 관주(觀柱)와 함께 올렸다.
이 상소는 홍봉한이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의 외가였으므로 왕세손의 위치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1776년(정조 즉위)에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또,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 및 홍인한(洪麟漢)·정이환(鄭履煥)들과 결탁하여 정조를 해치려 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784년에 왕세자 책봉으로 감등되어 나주에 이배되었다가 1786년(정조 10) 7월 18일 죽었다.
1790년(정조 14)에 복관되었으며, 1801년(순조 1)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1806년(순조 6)에 다시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1865년(고종 2)에 다시 신원되었다.
부인은 정부인 덕수이씨로, 2남을 두었는데, 노충(魯忠)과 노서(魯恕)이다. 묘소는 여주 공심동(公心洞)에 있다.
김노충(金魯忠)
김노충은 1766년(영조 42)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심(中心), 호는 습정재(習靜齋)이다. 아버지는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이다. 정순왕후의 장조카이다.
1800년(정조 24)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1805년(순조 5) 10월 17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정부인 연일정씨이며, 소생은 없으며, 동생 노서(魯恕)의 아들인 후재(厚載)가 뒤를 이었다.
원릉(元陵)은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묘로 1776년 7월 27일에 조성되었으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으로만 이어져 있는 쌍릉이며, 각 봉분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능의 좌우에 망주석이 한쌍 있으며, 문인석과 무인석도 한쌍이 있는데, 대체로 어깨가 좁고 섬세하며, 특히 일반적으로 문무인석은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을 가지는데, 원릉의 문무인석은 환한 미소가 특징이다.
〈사진〉 원릉(영조, 정순왕후)
(1) 묘소의 위치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耈)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二牌洞) 산23번지 마산(馬山)마을에 위치한다. 이동 방법은 서울외곽고속도로에서 남양주 요금소를 나와서 6번 국도를 따라 남양주 시내로 주행한다. 중앙선 양정역을 지나서 2차선 도로로 좌회전해서 마을로 들어가 부원군 묘를 탐문하면 찾을 수 있다. 현재 마을 뒤편을 통과해서 도로공사가 진행중이며, 공사구간 내의 굴다리를 통과해서 산자락 바로 옆켠에 김한구와 부인 원주원씨의 묘가 위치해 있다. 부인은 현감 원명직(元命稷)의 딸이다. 바로 뒤편에 군부대가 있다. 참고로 주소는 남양주시 이패동 산 29-1번지로 되어 있다.
(2) 묘소의 이동 내력
김한구가 1769년(영조 45)에 몰하자 1년 뒤인 1770년(영조 46) 1월에 장남 김구주(金龜柱)가 선부군묘표(先府君墓表)를 작성하였다. 김한구는 처음에 경기도 장단(長湍) 성자곡(聖子谷)에 묻혔다. 그로부터 6년 뒤에 김한구의 부인 원풍부부인(原豐府夫人) 원씨(元氏)가 졸하자, 같은 김구주가 모 원씨의 일대기를 선부군묘표속기(先府君墓表續紀)란 이름으로 작성하였다. 원풍부부인의 묘는 당초 장단에 있는 남편의 묘와 합장해서 묻혔다가 지세가 불리하여 1786년(정조 10) 5월에 양주 동편 마산리로 옮겨서 묻혔다.
양주 마산리로 이장하게 된 것은 영조의 사위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소유지인 관계로 가능하였다. 박명원은 영조 서3녀인 화평옹주(和平翁主)의 남편이었다. 양주로 이장하였을 때는 장남 김구주가 1786년에 오랜 유배생활 끝에 죽었으므로 김한구의 조카인 군수 김용주(金龍柱)가 주도하여 일을 완성하였다. 묘표 전면에는 영조가 76세였던 1769년 겨울에 죽은 김한구를 위해서 써준 유명조선국국구증영의정오흥부원군시충헌김공한구지묘(有明朝鮮國國舅贈領議政鰲興府院君諡忠憲金公漢耈之墓)라는 어필(御筆)을 새겨넣었다.
(3) 김한구 묘 관계사항
김한구와 부인 원씨의 합장묘는 2010년 여름에 불어온 태풍 때문에 상수리나무가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문인석을 비껴나가면서 상석 방향으로 덮치고 있었다. 여름내 자란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봉분 뒷부분으로 더욱 우거져서 근접해서 사진을 찍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 문인석·망주석·석양
김한구 묘의 문인석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아담한 편이다. 왼쪽 문인석을 비껴나가면서 상수리 나무가 상석쪽으로 쓰러져 있다. 좌우 문인석·장명등은 넘어진 나무 때문에 외관상 장애를 입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석양은 타격을 받아 원위치에서 10m 가량 떨어진 곳에 넘어진 채로 있었다.
[사진1]김한구 묘 문인석, 망주석, 석양
2) 묘표
부원군의 묘에 신도비가 의례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만, 김한구의 아들 김구주가 정조 즉위와 더불어 유배에 처해졌으므로 정조 재위시에 비문을 받을 만한 처지가 못되었을 것이다.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낙인찍혀 김구주가 죽었고 이후로도 가문이 영락해서 신도비를 부탁할 여건은 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묘표는 세운 지 230여년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비석의 품질이 좋아서 글씨도 매끄럽고 표면도 흠집이 없었다. 묘표 전면의 글씨는 영조가 76세의 나이로 부원군의 죽음을 맞아 예우하는 차원에서 25자로 된 어필이었다. 영조가 1769년 앞으로 닥칠 일을 위해서 ‘원풍부부인원씨부좌’ 9자의 글씨까지도 같이 써 주었다고 한다.
[사진2] 金漢耈 묘표
묘표의 옥개석 크기는 가로 121×세로 93×높이 60cm이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42×세로 66×높이 162cm이다. 묘표의 기단부는 가로 120×세로 93×높이 88cm이다.
묘표의 본문은 후면과 양측면으로 새겨졌다. 김구주(金龜柱)의 문집 『가암유고(可庵遺稿)』에 의거하여 비문을 검토해 보면 후면과 측면 한 면에 1770년에 완성된 김한구의 일대기가 새겨졌고 다른 측면에 새겨진 원풍부부인(原豐府夫人) 원씨(元氏)의 일대기는 1774년에 역시 장남 김구주가 작성하여 비석에 새겨졌다. 묘표 본문은 김한구의 조카인 군수 김용주(金龍柱)가 이장의 공역을 담당한 김한구의 손자와 손서의 이름을 추가해서 글씨를 써서 1797년(정조 21)에 완성되었다.1) 김한구와 부인 원씨의 합장묘가 완성된 것은 1786년이지만, 경기도 장단에 처음 묘표가 건립된 것은 1780년의 일이다.
[사진3] 金漢耈 묘표(측면)
3) 혼유석 및 상석
혼유석과 상석은 반들반들한 재질이고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매끄러운 석재이다. 방향을 뜻하는 ‘곤향(坤向)’이란 글자만 새겨져 있다. 아쉬운 점은 상석 위를 덮친 나무 때문에 제대로 된 모습을 잃은 것이다.
[사진4] 혼유석 및 상석
4) 차정(次釘)
차(次) 치는 돌 못이 사방으로 있는 것이 정식이나, 4개 가운데 3개만 찾을 수 있었다.
(4) 보호대책
조사자는 남양주시 문화원과 시청 관계자에게 나무가 묘를 덮친 사실을 제보하였고 서산의 경주김씨 종중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묘가 관리되지 못한 점은 주손이 관리할 형편이 되지 못하고 남양주시 문화재로도 등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경주김씨 학주공(鶴洲公=김홍욱金弘郁)파 종중의 김윤환 선생이 주도하여 남양주시청에도 민원을 넣고 문화원에도 협조를 요청한 결과 근시일 내에 한전에서 원상으로 복구해 주겠다는 응답을 받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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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구 김한구가 죽자, 영조는 현종 장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묘표 글씨를 현종의 사위 해평위(海平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쓰게 한 예에 따라서 사위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묘표 음기를 쓰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774년에 죽은 원주원씨의 일대기까지 덧붙여서 묘표를 세웠을 때 글씨는 김한구의 둘째 아들 김용주가 썼다. 김용주가 글씨를 써서 묘표가 완성된 시점이 1797년이었다. 좀더 고찰을 요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