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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이야기 스크랩 김교각 지장보살(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성헌 추천 0 조회 44 14.07.08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교각 지장보살(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696~794)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일찍이 불교에 귀의해 중국 구화산에서 중국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인 지장도량을 일구어 중국 국민들로부터 지금도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자랑스런 스님입니다.

    서기696년, 신라의 왕족 집안에 한 사내아이가 탄생하였으니 그의 아버지는 훗날의 성덕대왕이며 어머니는 성정왕후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교각(喬覺)또는 수충(守忠)이라 불렸으며, 어릴?부터 총명하고 마음씨 또한 자애로웠고 학문을 즐겼습니다.

    특히 독서를 좋아해 불교의 경전과 천문지리에 밝았으며, 청년시절에는 용모가 뛰어나고 키가 7척에다 힘도 세어서 열 사람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의 신라는 넓은 바다를 사이에 둔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가 빈번하였습니다.

    서기714년 성덕대왕은 수충의 나이 18세때 그를 당나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당나라 현종은 신라의 왕자 수충을 보자 사람됨이 크고 골격이 장대하고 출중하여 벼슬을 주고 집과 비단을 하사하였습니다.
    이 때 수충은 둘레가 칠십리에 달하는 장안성의 발달된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또 낙양의 백마사를 방문하여 고승을 친견하고 불교의 진리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하남성의 숭산 소림사를 찾아 달마선실을 참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717년 수충은 어머니의 급한 편지를 받고 신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때 신라왕실에 싸움이 벌어져 어머니와 수충은 궁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지내면서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고 여기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수충은 마침내 이름과 성을 숨긴채 한 사찰에서 출가하니 법명을 지장이라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큰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였습니다.

     

    719년 스님은 흰개를 데리고 당나라로 향하였습니다.
    스님이 탄 상선은 절강성의 보타산 근처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잠시 정박하였는데, 그날 밤 숙소에 험상궂게 생긴 해적이 들이닥쳤습니다.

    스님은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였으나 해적들은 스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뛰어난 무술로 해적을 굴복시키고 측은한 마음에 해적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고 죄를 짓지말라고 이른 후 풀어주고,
    풍랑이 가라앉자 스님은 다시 수행길에 올랐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며칠 사이에 스님의 높은 덕에 감동하여 스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였습니다.

    항주의 만불사에 도착한 스님은 경을 읽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니 수많은 승려들과 신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만불사를 뒤로 하고 머나먼 여행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구화산에 이르렀습니다.   스님은 산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동굴에서 고된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또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고음성다라니경》등의 경전을 소중히 여겼는데, 제자인 유탕이 백리밖의 남릉으로 가서 경전을 구해오게 되니 스님은 비로소 보배와도 같은 경전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장스님은 고된 수행을 멈추지 않고 항상 정성을 다하여 경을 읽고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스님의 정성은 관세음보살을 감동시켰고관세음보살도 스님의 앞에 나타나 경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스님은 수행하는 틈틈이 제자 승려들을 이끌고 물길을 만들고 밭을 개간하였는데 화성사 계곡에 색깔이 누런 벼인 황립도를 시험 재배하니 산속의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립도는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제자를 거느리면서 먹을 것이 부족하자 하얀 흙(백토)을 쌀과 섞어 밥을 지어 먹었고, 직접 짠 삼베옷으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런 청빈한 스님을 본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하나 둘 모여 나무를 깎고, 땅을 골라 절을 지으니 마침내 구화산 화성사(化城寺)가 완공되었습니다.

    스님은 찾아오는 승려들이나 신도들에게 대자대비한 마음을 지녀 악을 짓지 말라고 설법을 하였습니다. 서기 794년 스님의 나이 99세 되던 해 7월30일 스님은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스님의 시신을 석함에 그대로 넣어 봉한 후 3년 뒤에 열어보니 얼굴색이 살아있을 때와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스님을 보살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황제들과 시인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스님을 위해 앞 다투어 칭송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펌]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구화산이 성지가 된 것은 서기 794년 한 스님이 열반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김교각. 신라 왕자라고 중국의 역사서는 적고 있다.

    김교각 그는 열반 후 등신불이 돼서 자신의 서원을 이루고 구화산을 지장보살에 성지로 일군 신라왕자였다



    중국 안휘성 구화산. 해발 1352미터로 아흔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가 아름답고 명승고적들이 많아 동남 제일 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아흔 아홉 개의 사찰과 일만 여기의 부처를 모신 곳이다. 중국 불교의 사대 성지 중 하나로 지장 신앙의 본산이다. 수도하는 승려만 천오백여명에 이른다.



    구화산의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장하는 기원선사. 지장보살을 섬기는 이곳에선 매일 오후 1시에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하는 법회가 열린다. 불교 성지답게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들어선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동남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삼보일배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이들이 끊임없이 구화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신보전

    “김교각 스님이 99세에 열반하고 3년이 지나자 스님을 모시기 위해 이 보탑을 지었다. 탑 주위에는 전당을 지었다. 탑 안에는 3층 목탑이 있고 그 안에 김교각 스님의 육신이 모셔져 있다.”

                        

     

    건물 내에 7층탑을 세운 것은 그만큼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내에 7층 석탑. 7층 석탑 안에 3층 목탑. 그 탑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것이다. 등신불이란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육신에 금칠을 한 것이다.

      

          김교각 그는 누구일까? 그는 과연 신라 왕자였을까?

      

    김교각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최고의 김교각 전문가로 알려진 셰슈텐 교수. 당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인 전당문. 이 책에 구화산 화성사기가 있다. 김교각 스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책이다. 구화산 화성사기는 813년 비관경에 의해 쓰여졌다. 이 책에는 화성사기를 쓴 비관경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구화산이 위치한 청양현 출신으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화성사기는 지장이라 불리는 김교각은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온 신라왕자라는 것이다.

     

     

                         

    당나라 유학생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 신라 승려 혜초였다. 일찍이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 스님. 그는 인도를 다녀온 뒤, 당나라에 머무르며 불경 번역 등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나라 때 사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종남산. 그곳엔 신라 승려들의 흔적도 많다. 흥교사는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스님을 모신 곳이다.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와 쉽게 번역하고 법상종을 창시했던 곳이다. 현장 스님은 중국 불교 신도들에게 가장 인기 많고 영향력 있는 고승 중 한명이다.

     

    리리안 불교연구 소장(서안시 서북대학)

    “한국에서 온 스님들은 불법을 연구하고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일을 했는데 원측스님이나 의상대사는 중국에 머물면서 많은 책을 썼다. 당시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책을 열심히 읽었고 좋아했다.”

     

     

    혜초, 원측 스님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한 스님들도 있었지만 유학 후 신라도 돌아간 고승들도 많았다. 지상사에 머물렀던 의상대사도 그 중 한명이다. 중국 화엄종에 본산인 지상사. 원효대사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화상으로부터 수년간 수학했다. 서기 670년 신라로 돌아간 의상대사 그는 신라에 화엄 신앙을 널리 알렸으며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상대사처럼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승려는 이백 여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왕자의 신분으로 유학길에 올라 보살에 지위에 오른 김교각 스님 그는 누구일까?

    구화산 최초의 사찰인 화성사. 8C초 김교각 스님이 세웠다는 이곳은 역사문물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황제가 구화산 스님들에게 하사한 교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올 때 데리고 왔다는 삽살개의 형상도 남아 있다.

     

    스성푸 스님(육신보전 주지)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 올 때 한국에서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볍씨와 차씨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의 유품으로는 유일하게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도 엄청 커 보이는 짚신 한 켤레. 길이만도 40cm에 이르러 그가 기골이 장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화산 정상의 고배경대. 김교각 스님이 수도 기간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곳에 사찰을 세워 그이 뜻을 기리고 있다. 이곳엔 김교각 스님이 수도할 당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있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 신장이 150cm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크기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김교각 스님은 7척의 키에 장정 열 명을 상대할 만큼 장사였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다는 김교각. 그가 신라왕자였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그는 어느 왕의 아들이었을까?

     

    뤄위위리에 교수(북경대 종교 철학과)

    “비관경이 쓴 <화성사기>가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비관경은 김교각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사기>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화성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교각은 696년생. 그러나 우리나라에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출생시기로 유추해보면 그가 성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중국학자들은 추정한다. 성덕왕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성덕왕의 아들 중 장자 김수충이 중국의 유학을 다녀왔다고 기록한다.

    그가 최초로 중국에 유학을 갔을 때가 성덕왕 13년인 서기 715년. 그러나 김수충이 당나라로 유학한 이듬해 신라에서는 태자 책봉이 있었다. 김수충의 동생인 중경이 책봉 된 것이다. 김수충이 태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어머니마저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했다.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수충의 어머니가 왕으로부터 폐출 당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김수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더 이상 김수충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만약 김교각이 신라왕자라면 김수충일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와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에서 고민했던 김수충.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나라 유학길에 접한 불교경전들과 사상들이 마음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치적인 암투대신 선택한 것은 수행의 길이었다.

    당시 신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신라를 떠난 김교각은 양자강 하구를 통해 구화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양자강 하구에 위치한 안휘성 무호시. 이곳에도 김교각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제사가 그 중 한곳이다.

     

    페이예차오 교수(구화산 불학원)

    “김교각 스님이 중국에 도착하여 구화산으로 오시기 전에 절강성과 안휘성에 머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경에도 여러 곳 있고 절강성을 비롯 안휘성의 무호시 남령현에도 그 흔적이 많다.”

     

     

    이상적인 수행지를 찾아 떠돈 지 10년 만에 그는 신비에 쌓인 구화산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구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이었다. 그가 구화산 최초의 정착민이 된 것이다. 김교각 스님이 터를 잡고 수행 처로 삼은 곳은 구화산 정상에 한 동굴. 지장스님이 수도한 옛 동굴이라고 해서 지장고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의 험난한 수행이 시작됐다.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동굴. 이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행이 이어졌다.

     



     

     

    그는 동굴 주변에 경전을 갖다 놓고 하루 종일 향을 피우며 선정에 빠져 들었다. 남루한 배장삼 차림, 추위를 달랠 그 무언가도 없이 세 발 달린 솥 하나가 전부였다. 끼니는 이 지역에서 나는 흰 흙에 약간에 쌀을 섞어 해결했다. 스님의 고행이 알려지면서 스님에 가르침을 받으러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백토로 끼니를 때우며 수행 정진하는 스님을 보며 감동하여 직접 나서서 절을 지었다.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구화산 산기슭에 살던 제갈절이라는 사람이 스님이 수도하는 모습을 보고 ‘스님이 이토록 힘든 고행을 하는 건 모두 저희의 업보입니다’라고 말하며 김교각 스님을 위해 구화산에 절을 지었다. 이 사찰이 바로 화성사다.”

     

    당시 당나라의 정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서기 755년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은 안녹산의 난(서기 755년)으로 표면화 되었다. 전쟁은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약탈과 방화, 살인 등 만행이 저질러졌다.

    당나라의 호구수가 9년 새 1/3이 줄어들 정도였다. 마음 둘 때 없는 백성들의 현실과 어려움은 수도승에게도 큰 숙제였다. 특히 중생 구제에 대한 염원이 컸던 김교각 스님에겐 더욱 그랬다.

     

     

    그는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제할 방도를 찾고자 했다. 그는 농경지가 부족한 구화산을 개간하고 직접 농사도 지었다.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백성을 구제한다는 수도승마저 기생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성구 교수(국민대 한국학연구소)

    “기록을 보게 되면 거기 그 화성사라는 사찰을 창건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농지를 개간했다라는 거죠. 그리고 벼를 심기도 했다라는 거, 차나무를 심어다라는 거, 그것은 당시 당나라 라는 사회 다시 말해 안녹산의 난으로 전국적으로 황폐화 되고 어려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 백성들의 어떤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러한 행위를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거죠.”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김교각 스님이 출가를 하고 중국에 온 것은 단순한 불교 신자여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교각 스님은 참된 진리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김교각의 사상은 지장보살의 정신과 흡사했다. 지옥의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한다는 지장보살. 사람들은 김교각에서 지장보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영담스님(불교방송 이사장)

    “어떤 사람이 옷이 없었는데 자기가 옷을 다 벗어 줘야 하는데 자기 몸을 의지할 때가 없어서 땅을 파고 자기 몸을 의지하고 자기 옷까지 다 줬다. 이런 데서 땅지자, 감출 장자, 땅에다 몸을 감췄다해서 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데 그 지장보살의 원력이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지 않는 한 당연히 성불하지 않겠다,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하고 난 다음에 맨 마지막에 내가 성불을 하겠다해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데서부터 지장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야겠죠.”

     

     

       페이예차오 교수

    “황제가 금인을 내린다는 것은 김교각 스님에게 황족 대우를 해준 것이다. 황제와 왕만이 옥새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인을 받음으로써 김교각 스님은 지장왕보살이 될 수 있었다.”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수도하던 시절 당대에 시인이었던 이태백이 구화진에서 서당을 열며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이태백은 김교각을 만났고 그의 수행에 감탄하여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보살의 자비로운 힘 끝없는 고통에서 구하나니

    하해와 같은 그 공덕世世孫孫 빛나리로다 - 이태백

     

    地獄未空 誓不成佛(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 성불하지 않으리라) 

    김교각 스님이 수행의 화두로 삼았던 서원입니다. 이처럼 모든 중생들이 구제되기 전엔 성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서원은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1200여 년 전인 서기 794년 음력 7월 마지막 날이었다. 김교각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고별인사를 건넸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3년이 지나거든 꺼내 보거라. 그때까지 썩지 않았거든 내 몸에 금칠을 하여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99의 일기로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당시 구화산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산이 울리고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종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님의 유언대로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그의 육신을 항아리에 모신지 3년이 지났다.

    제자들은 시신을 수습해 탑에 안치하기 위해 스님을 모신 항아리 앞으로 모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님의 육신이 썩지 않고 열반에 들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마주 들자 뼈마디에서 금쇠소리가 났다. 불경에 따르면 뼈마디 속에서 쇳소리가 난다는 것은 보살의 현신을 의미했다.

    제자들은 스님의 육신에 금칠을 해 석함에 모시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등신불이 되므로 김교각은 지옥의 비기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서원을 이루었다. 그의 중생구제에 대한 염원은 지장보살을 방불케 했고 등신불로 남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했다. 이후 구화산은 여러 스님들의 등신불이 이어져 등신불의 성지이자 지장신앙의 본산이 됐다.

     

        영담스님

    “지장보살. 그러니까 김교각 스님으로부터 시작이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굉장히 습한 지대입니다. 그렇다면 육신불이라고 한다면 미라가 되어야만 육신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습한 지역에서 과연 육신불이 미라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그러한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김교각 지장보살께서 말씀을 하셨죠. ‘내가 삼년 후에 다시 이제 육신불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장보살의 월력이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러한 서원하고도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구화산에는 아홉 전의 등신불이 보전되어 있다. 김교각 이래에 구화산의 등신불에 성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빌기 위해 구화산을 찾고 있다. 중국의 4대 불교 성지에서 모시는 보살들은 대개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지만 구화산의 김교각 지장왕보살은 유일한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 9월 9일 구화산 불교협회는 김지장보살 대동상 건립 기공식을 거행했다. 99m에 이르는 세계 최대 높이의 불상을 세우는 대 역사다. 김교각을 기리는 이 동상은 2009년 9월 9일에 완공될 예정이다.

     

    뤄위위리에 교수(북경대 종교 철학과)

    “중국인들은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를 아주 중시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충과 고통을 해결해 준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김교각 지장왕보살을 따르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김교각 스님을 높이 추앙하는 이유는 또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효를 강조해왔는데 김교각이 추구하는 지장신앙이 효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 빠진 마지막 중생도 구제하겠다는 그의 서원이 중국 민중들의 소망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영담스님

    “중국의 달마대사나 육조혜능대사 이런 분들은 전부 다 조사에 불과합니다. 조사면 한참 아래 단계인데 신라에 그것도 당나라 하면 그 당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국가였었는데 조그마한 신라의 스님이 와서 수행해 가지고 고승이고 보살이라 호칭을 부친다는 것은 이것은 엄청난 것이죠.”

     

    신라 왕자 출신으로 낯선 땅 중국에서 평생 구도자의 길을 간 김교각. 그는 지장왕보살이 됨으로서 신라인의 자존심을 세웠을 뿐 아니라 마지막 중생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실천한 민중의 등불이었다.

     

    각고의 노력과 오랜 수도 끝에 자신의 서원을 이룬 신라왕자 김교각. 그는 신라인으로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김교각 스님에 대한 존경이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옥이 비기까지 성불하지 않겠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개인의 영달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김교각 스님이 몸소 실천한 서원은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자료 참고: KBS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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