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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chungju.grandculture.net/?local=chungju)
풍산홍씨 관련 자료(충북 충주에 거주한 남원공파 조상님)
[정의]
홍지경을 시조로 하고 홍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연원]
풍산홍씨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한다. 홍지경은 1242년(고종 2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국학직학을 역임한 인물로 풍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풍산홍씨는 고려시대 홍유(洪有) 등 대제학 4명을 배출했고,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28명, 무과 급제자 4명, 왕비 1명, 재상 4명, 공신 1명, 청백리 7명을 배출했다.
충주에 입향한 풍산홍씨는 수운판관을 지낸 홍박(洪溥), 남원부사를 지낸 홍탁(洪濯), 이천부사를 지낸 홍만운(洪萬運),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만수(洪萬遂), 승문원저작을 지낸 홍만통(洪萬通), 의정부사인을 지낸 홍만우(洪萬遇), 전라감사를 지낸 홍주삼(洪柱三), 예산현감을 지낸 홍주문(洪柱文), 사간원헌납을 지낸 홍주진(洪柱震) 등을 배출했다.
[입향경위]
문경공 홍이상(洪履祥)의 6형제 중 셋째 아들 홍집, 다섯째 아들 홍박(洪溥), 여섯째 아들 홍탁(洪濯) 삼형제가 1600년대 초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 후 홍이상(洪履祥)의 둘째 아들 홍입(洪雴)의 4세손으로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중현(洪重鉉)이 1700년 초에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현황]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주시에 거주하는 풍산홍씨는 2000년을 기준으로 178가구, 496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현재 세거지 별 분포를 보면 노은면 수룡리에 13가구, 금가면 잠병리와 월상리에 10여 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홍이상을 배향한 하강서원과 홍이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모현정(慕賢亭)이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있고, 홍만종 묘와 홍중하 묘가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에 있다.
[참고문헌]
1. 홍봉상 1556 ~ 1592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문서(文瑞). 아버지는 사직 홍수(洪修)이며, 어머니는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대사헌 홍이상(洪履詳)의 아우이다.
[활동사항]
홍봉상은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컸으며 경사의 서적을 읽다가 옛 사람이 살신성인한 부분이 있으면 몇 번씩 다시 읽으며 강개하였다 한다. 1579년(선조 1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85년(선조 18)에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이 되어 임진강에서 왜적과 대치하였다. 이때 왜적이 복병하고 군사를 유인하는 것에 속아 김명원과 선봉을 다투며 진격하다 적에게 포위되었으며, 사면에서 공격하는 적과 용전분투하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찬한 묘표가 있다.
[상훈과 추모]
뒤에 도승지·직제학 등에 차례로 증직되었다. 후손이 없어 외손(外孫)인 전주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파의 후손이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살면서 봉축(奉祝)하고 있다.
2. 홍집 1582 ~ 1638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택(景澤), 호는 연자(撚髭). 부사용 홍우전(洪禹甸)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직 홍수(洪脩)이며,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선무랑 김고언(金顧言)의 딸이다.
[활동사항]
홍집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12년 형방도사를 역임하였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25년 지평·장령 등을 역임하고 전적(典籍)으로 다시 1626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에 올랐다. 1630년 사헌부지평으로 집의 권도(權濤), 장령 신달도(申達道) 등과 함께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논하여 시정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지제교(知製敎) 물망에 오른 25명 중의 한명이 되었다. 1633년 평산현감으로 나갔고 1635년 의정부의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46-7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3. 홍탁 1597 ~ 1651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행가(行可). 부사용 홍우전(洪禹甸)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직 홍수(洪脩)이며,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이며, 어머니는 선무랑 김고언(金顧言)의 딸 안동김씨이다.
[활동사항]
홍탁은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었다. 1643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이 이일원(李一元)·권억(權澺) 등과 모의하여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려한 역모 사건을 적발하여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이 되었고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미흘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었다.
4. 홍주삼 1621 ~ 1682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홍수(洪脩)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홍곽(洪㰌),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친아버지는 홍탁이다.
[활동사항]
1646년(인조 24) 생원이 되고, 1653년(효종 4) 알성시 문과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1655년(효종 6)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같은 해 함경도어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165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을 때, 효종은 사헌부집의 윤집(尹鏶), 장령 권집(權諿), 지평 김우석(金禹錫)·홍주삼 등을 불러놓고, “그대들은 나의 이목(耳目)이니 각자 직분에 힘써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 어사로 파견되어 전라남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선졸(船卒)을 해변에서 제사 지내주었으며, 그 후 지평과 집의 등에 다시 임명되었다. 1660년(헌종 1) 홍문관수찬이 되어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662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수령직을 청하여 예천군수가 되었고, 1663년 수찬, 사헌부장령, 1664년 사간원사간을 거쳐, 현재의 청주인 서원의 현감으로 전출되어 재직하던 중 충청병사 이두진(李斗鎭)과 불화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1667년 사헌부집의가 되었고, 1670년에 응교(應敎)로 재직 시, 충주에 와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장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1671년 동부승지, 1672년 승지에 이어, 1675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좌부승지가 되었다. 홍주삼은 주로 삼사(三司)에 근무하며 바른 말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두 번이나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산46-7번지에 있다. 묘지(墓誌)는 조카인 판돈영부사 홍만조(洪萬朝)가 지었다.
5. 홍주진 1634 ~ 1705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사직(司直) 홍수(洪脩)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이며, 아버지는 남원부사 홍탁(洪雨+濯), 어머니는 조안국(趙安國)의 딸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활동사항]
홍주진은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어 1680년(숙종 6) 문의현령이 되었다. 169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91년 사헌부장령이 되고, 1692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이어 승지·안변부사를 역임하였다. 1700년 사헌부헌납이 되어 이현일(李玄逸)과 심계량(沈季良)의 죄를 감하도록 상소하였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석교에 있다.
6. 홍만종 1637 ~ 1688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産). 자는 여수(汝受). 사헌부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남원부사 홍탁(洪雨+濯)이며, 아버지는 예산현감 홍주문(洪柱文)이다.
[활동사항]
홍만종은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6년(현종 7)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67년(현종 8) 춘방겸관(春坊兼官)에 이어 대교가 되고 1669년 지평(持平)을 거쳐 정언·부수찬·장령·헌납·수찬 등을 두루 거쳐 1674년(숙종 즉위년)에 사간이 되었다. 1675년(숙종 1) 황해도암행어사가 되었고, 이듬해 연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부교리에 이어 이듬해 부수찬·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682년 승지로 옮겼다. 1686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아홉 달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무하면서 힘들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기 때문이었다. 1687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1688년 진위사겸진향사(陳慰使兼進香使)로 청(淸)에 다녀왔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에 있다.
6. 홍만수 1647 ~ 1695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중(成中), 호는 채봉(彩峰). 사헌부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장령 홍집(洪雨+集)이며, 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홍주삼(洪柱三)이며, 어머니는 경림군(慶林君) 이정(李淀)의 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사항]
홍만수는 1673년(현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79년 중시에 승문원정자로 시험을 보아 을과 1등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관원의 후보자로 간선된 사람) 12명에 선발되었고 지평·정언·부수찬을 역임했다.
1681년 양재찰방이 되었다가 1684년 사간원헌납이 되어 관의 기강을 바로잡도록 상소했으며 1685년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690년 도승지 민창도(閔昌道)가 “홍만수는 경악(經幄: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의 신하로 눈이 멀었으니 그 정세가 가엾습니다.”고 말하자 숙종이 특별히 녹을 주라고 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채봉집(彩峰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래울에 있다.
7. 홍중하 1658 ~ 1716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천서(天敍), 호는 두담(杜潭). 할아버지는 예산현감을 역임한 홍주문(洪柱文)이며, 아버지는 참판 홍만종(洪萬鍾)이다.
[활동사항]
홍중하는 1679년(숙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8년 검열이 되고, 1691년 정언·지평, 1693년 부수찬·부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이듬해 교리로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일본 사신이 자기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죽도(竹島)가 우리나라의 울릉도임을 밝혀 일본인의 울릉도 내왕을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697년 보덕·필선, 1704년 사간·보덕·집의·승지 등을 거쳐 1706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709년 다시 승지를 지내다가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며 태안방어사(泰安防禦使)를 혁파하고, 안흥진(安興鎭)을 승격시켜 방어사로 하고 항금진(杭金鎭)을 평신(平薪)으로 옮기어 호칭을 평신첨사(平薪僉使)로 고쳤다. 1711년 형조참의가 된 후 정시(庭試)의 고관(考官)이 되었다가 과거시험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교체되었다. 1715년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1716년(숙종 42)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에 있다.
8. 홍중해 1658 ~ 1704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식(士式). 예조참판 홍영(洪霙)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며,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홍만형(洪萬衡), 어머니는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홍중해는 송준길(宋浚吉)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에게도 배웠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되자 동문들과 무고임을 상소하였다. 진사과에 합격하여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내섬시주부를 거쳐 공조좌랑을 지냈으며 그 뒤 돈녕부판관·공조정랑을 역임했다.
김천현감으로 나갔다가 김천현이 군으로 승격함에 따라 그곳에서 김천군수가 되었다.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상을 당하였는데 왕후의 외종형으로 소렴(小殮)·대렴(大斂)으로 입참하였다. 김천군수 재직시 어사 유명홍(兪命弘)과 관찰사 신임상(申銋相)이 공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후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창고를 조사하여 모실(耗失)이 심한 자를 효수(梟首)하고 다른 창고를 조사하던 중 독살당하였다. 그 뒤에 범인이 잡혔으나 고을 백성들이 홍중해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천현면 부작동에 있다.
사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9. 홍중주 1659 ~ 170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범(聖範). 사헌부장령 홍집(洪雨+集)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홍주삼(洪柱三)이며, 아버지는 이천부사 홍만운(洪萬運), 어머니는 군수 정하(鄭何)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홍중주는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4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장희재(張希載)와 이의징(李義徵)의 일에 대해 “장희재의 죽음을 용서해 준 것은 진실로 깊고 원대한 생각으로 한 일입니다. 이의징은 이미 역적이란 누명을 국청(鞫廳)의 의계(議啓)에서 벗게 되었으니, 극률(極律)에 처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숙종에게 아뢰었다.
이에 정언 임원구(任元耉)가 숙종에게 “장희재와 이의징은 국법에 반드시 베어야 할 사람인데, 전 정언 홍중주가 사심을 품고서 악인과 편당하느라, 인피(引避)하는 말에 감히 대론(臺論)을 이미 심한 것이라고 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라고 하여 탄핵을 당하였다.
1708년 세자시강원필선이 되고, 170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716년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제주도가 흉년이 든 상황을 글을 올려 곡물을 얻기를 청하자 숙종은 조정에서 호남에 있는 강도미(江都米) 3천 석과 어영청의 호남 연해 군보미(軍保米) 3천 석을 각 진포(鎭浦)의 병선을 징발하여 기일을 정하여 제주도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에 있다. 식산(息山) 이만돈(李萬敦)이 묘갈을 찬술하였다.
10. 홍만우 1671 ~ 1722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회(季會), 호는 추헌(楸軒).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장령 홍집(洪雲+集)이며, 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홍주삼(洪柱三)이며 어머니는 이문량(李文諒)의 딸이다.
[활동사항]
홍만우는 1693년(숙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1702년 알성문과에 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1710년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1713년 홍문록에 뽑히고 이어 부수찬이 되었으며 1715년 수찬으로 승진한 뒤 교리가 되었다. 1717년 영부사 윤지완(尹趾完)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울산으로 정배되었다. 1721년(경종 1)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한 때 부교리겸사서가 되었다가 1722년 다시 이조좌랑이 되고 이 해 4월에 의정부검상이 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산46-7번지에 있다.
11. 홍일보 1680 ~ 17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면천군수 홍주후(洪柱後)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만최(洪萬最)이며, 아버지는 호조좌랑 홍중태(洪重泰)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기징(李箕徵)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홍일보는 1702년(숙종 2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합격하였다. 1729년(영조 5) 2월 사헌부지평으로 재직시 1728년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소현세자의 증손인 이탄(李坦)을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펴지자 대사간 오명신(吳命新), 응교 신치운(申致雲), 부응교 성덕윤(成德潤), 교리 이현모(李顯謨), 부교리 이종성(李宗城) 등과 합계(合啓)하여 이탄을 엄하게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1729년(영조 5) 윤 7월에 지제교(知制敎) 29인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11월 상소하여 탕평(蕩平)에 관한 도리를 진달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해서 할 것을 청하고, 또 서원의 양역(良役)에 관한 폐단을 논하자 영조가 “마땅히 유의하겠다.”고 답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목행동에 있다.
12. 홍성보 1685 ~ 1742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유량(幼亮), 호는 삼성와(三省窩)이다.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의 하강서원(荷江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는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예산현감 홍주문(洪柱文), 조부는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 아버지는 생원 홍중화(洪重華), 어머니는 심윤원(沈胤元)의 딸이다.
[활동사항]
12세에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분발 면학하여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4년(숙종 40) 장령참봉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서·병조좌랑·문학을 거쳐 1726년(영조 2)에는 정언·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수찬으로 경연검토관·부교리를 겸했다. 이어 광주부윤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노론이 화를 입게 됨에 따라 파면되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로안무사 윤헌주(尹憲柱)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지제교·병조정랑을 거쳐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31년(영조 7)에는 교리·수찬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다.
이어 공조·형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1735년(영조 11)에는 승지, 그 이듬해부터 대사간·판결사(判決事)·무주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741년(영조 17) 영월부사로 지낼 당시 단종이 죽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민충사(愍忠祠)를 지어 매년 한식제(寒食祭)를 올리게 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있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3. 홍경보 1692 ~ 1745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이(大而), 호는 창애(蒼厓). 할아버지는 홍만종(洪萬鍾)이며 아버지는 형조참판 홍중하(洪重夏)이다.
[활동사항]
홍경보는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영조 3) 정언이 되어 형률(刑律) 시행의 잘못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728년 부수찬과 참찬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숙종에게 수덕(修德)과 정요(政要)에 관한 6개조의 소를 올렸다. 1729년(영조 5) 탕평(蕩平)의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온성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732년 승지가 되었다. 1733년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승지·참찬관·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인재 등용에 있어 먼저 역사(逆詐)의 인격을 의심하고 당적(黨籍)에 따라 안배하는 탕평책의 폐단에 대하여 다시 상소하였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에 의하여 품행이 추장(推奬)되었고 승지로서 소대(召對)에서 사대부들의 방납(防納) 폐해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734년 정월 김약로(金若魯)에게 탄핵을 받았고 7월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11월 4일 정사 윤유(尹游), 서장관 남태온(南泰溫)과 함께 청(淸)에 다녀왔다. 같은 해 춘당대(春塘臺)에서 검사친시(劒士親試)의 불체(不體)를 간청하였다. 1736년 3월 도승지가 되었고 5월 시법(諡法) 시행에 있어 불성(不誠)을 들어 상소하였고, 11월 호조참판이 되었다.
1737년 대사헌으로서 당색 안배만 고려한 채 진정한 인재 등용을 못하는 것과 당시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고 강렬하게 상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다시 서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에 따라 공조참판·병조참판·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8년 도승지를 거쳐 1739년 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가 되었으며, 그 해 9월에는 도승지로 특제(特除)되었다. 1740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1741년(영조 17) 지의금부사·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한 뒤 1743년 대사간이 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4. 홍차기 1759 ~ 1772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여(養汝). 모당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홍만최(洪萬最), 조부는 홍문관교리 홍중현(洪重鉉), 아버지는 홍인보(洪寅輔)이고, 어머니는 수원최씨이다.
[활동사항]
홍차기(洪此奇)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홍인보는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수원최씨는 홍차기가 열 살이 되자 부자간에 상면이나 시키고자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비로소 알려 주었다. 홍차기는 크게 놀라며 즉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 옥중의 아버지를 만나고 통곡하니 보는 이가 모두 애처롭게 여겼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일렀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관가에 호소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그 효성의 소리가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직접 옥사를 처결하니 홍차기의 아버지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영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결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었다. 홍차기는 아버지의 죄가 완전히 사면되도록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 유배지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천여 리를 수없이 오르내리며 형조에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다 객지에서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이러한 홍차기의 지극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왕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죄를 풀고 석방하였다. 그러나 홍차기는 아버지의 석방 사실도 모르고 병석에서 신음하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풀려난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에 감사드린 후 조용히 숨졌으니 이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홍차기의 지극한 효성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울 것을 명했으나 정문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1795년(정조 19) 당시 충주목사였던 이가환(李家煥)이 내용을 쓴 비석과 보호각을 정려와 같은 형태로 세웠는데, 현재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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