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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소식 스크랩 통일교인이 본 문선명 총재의 일생
아야꼬-마산 추천 0 조회 40 09.10.23 21: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본 글은 인터넷상 일부 악티즌들의 통일교 문선명 총재에 대한 비하글이 있어, 이를 올바로 알려줄 필요가 있어 그간 본인이 25년간 직간접적으로 본 통일교 문선명 총재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것입니다.

                                           

                                    

                                                 (문 총재의 어린시절 모습)

 

 - 일제치하 1920년 음력 1월 6일 평북 정주에서 : 통일재단 설립자 문선명 천주평화연합 총재(이하 문 총재)는 1920년 음력 1월 6일에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문경유씨와 어머니 김경계씨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탄생하셨다. 그런데 문 총재가 15세 되던 해에 집안에 일어난 엄청난 재난이 동기가 되어 집안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 1935년, 만 16세 부활절에 : 그러던 중 만16세 되던 4월 17일, 부활절 아침 기도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 인류구원사업에 대한 엄중한 당부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남모르는 하늘섭리를 위한 공의의 노정이 시작되게 된다.


 - 청년 문 총재의 조국광복의 꿈 : 문 총재는 18세 청년기에 정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서울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예수교회 명수대 예배당의 반사로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41년 만 21세 때,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정진하면서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하게 된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일본 내 항일운동이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겪게 된다.


 - 1946년, 평양으로 가라 : 해방 직후 1946년 6월 2일에 "평양으로 가라"는 하늘의 지시를 받고 그길을 평양에 도착하여 개척전도를 하여 평양 시내에 최초의 개척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8월 2일 남한에서 올라왔기에 공민증이 없어 남한 이승만정권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대동보안서에 구속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러 풀려나게 된다. 이후 1948년 2월 22일 북한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문 총재는 ‘사회질서 문란죄’로 구속되어 5년형의 언도를 받고 ‘노동지옥’으로 불리는 흥남감옥에서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루면서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문총재의 흥남감옥 동기였던 독립운동가 김인호씨가 문총재를 '감옥안의 성자'로 저술한 그의 책표지) 


 - 1950년, 유엔군 반격으로 구사일생으로 남하하다 :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0년 10월 14일 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남하하여 이듬해 1951년 1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1951년 5월 현 부산시 범6동 1513번지에 약 2평짜리 단칸방의 토담집을 새 출발하게 된다.


-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약칭 통일교) 창립하다 : 한국전쟁 후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속칭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되게 된다. 문총재는 훗날 협회창립 자체가 불행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기독교를 품지 못한 회한의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 1955년, 아 잊으리야. 이대연대 수난 : 하지만 1955년 3월 통일교회를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독교 재단이었던 이화여대, 연세대 학생, 교수들이 퇴학/퇴직을 받게 되는 사상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고, 급기야 7월 4일 문 총재가 서대문서에 투옥되게 된다. 이는 당시 기독교(이대연대)를 기반으로 한 권력층과 언론의 유착관계가 강고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4일 서울지방법원 결심공판에서 문 총재의 무죄선고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당시 ‘혼음’운운의 언론오보가 현재까지 피가름 논쟁의 ‘아니 땐 굴뚝’으로 이어지게 되는 통한의 사건이 되어 있으니 어찌하랴.

                

 (문총재의 무죄를 알리는 동아 55.10,.5일 기사)


- 1958년, 일본으로 미국으로 : 1958년 6월 일본에 최초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지 59년 10월 2일 동경 교회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59년 1월 2일 미국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또 1961년 2월 박보희씨가 주미대사관 무관보좌관으로 발령됨에 따라 미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1960년 2월 1일 미국 성헬렌스 통일교회의 헌당식의 결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 1966년, 인류구원의 원리강론 마침내 탈고 : 1966년 5월 1일에 통일교의 이론적 침서인 ‘원리강론’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상징적 또는 예화적으로 쓰여진 성경 66권을 기독교의 일반해석과는 달리 새로운 각도로 재해석하여 훗날 원리공부의 표준적 참고서로 공인되게 되었다.


- 1971년, 미국중심의 섭리궤적이 맞춰지다 : 1971년 12월 5일부터 1972년 5월 8일까지 156일 동안 15개국 순회노정에 오르신 선생님 양위분께서는 일본과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시어 뉴욕 ‘월가’ 광장에서 ‘하나님대회'(The Rally of GOD)개최하시는 등 본격적인 미국발판을 준비하게 된다. 이어 1972년 2월 3일 뉴욕 등 7대도시 제1차 순회강연, 1972년 11월 제1회 국제과학통일회의 주재, 그리고 1973년 10월 1일부터 74년 1월 29일까지 “기독교의 위기와 새로운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21개 도시에서의 제2차 순회강연으로 이어지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섭리의 궤적을 미국에 맞추시고 활동을 시작하셨다. 이후 74년 2월 15일부터 4월20일까지 32개 도시 제3차 순회강연, 그리고 다시 74년 9월17일부터 12월23일까지 뉴욕 등 8대도시 제4차 순회강연으로 미국 중심한 세계적 섭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74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 희망의날 집회에서 열변을 토하는 문총재)

 

- 1974년, 아메리카의 ‘태풍의 눈’이 되다 : 특히 제4차 미국 8대도시 순회강연의 한 부분이었던  1974년 9월1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 2만 5천여명의 인파가 모인 ‘희망의 날’ 집회, 그리고 74년 10월과 75년 12월 두 번에 걸친 국회 초청강연으로 미 조야를 흔들었고, 마침내 1976년 6월 미 독립 2백주년 기념 ‘뉴욕 양키스타디움 집회’, 그리고 그해 9월 ‘통일교회 쇼크’로 알려진 워싱턴 머뉴먼트 광장 30만집회로 일약 문 총재는 미국을 움직이는 ‘태풍의 눈’으로 알려지게 된다.


- 1975년, 반공애국애족의 함성으로 : 1975년 6월7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구국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이미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의 도미노 공산화로 아시아 전역에 공산침략의 위협이 증대되고 있던 당시 위기상황에 경종을 울린 집회로 60개국 1천여명의 대표들과 국내 1백만 명의 놀라운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문 총재의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이어 결의문을 통해,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수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만큼 만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무력침략하게 되면 즉각 세계의 모든 통일교인들은 대한민국의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지킬 것을 선언하여 ‘애국’하는 통일교회로서 국민적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된다.


- 1978년, 미 좌파로부터 불려간 청문회는 한국민의 심금을 울리고 : 그런데 동양의 소수종교이면서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는 통일교의 미국내 급성장에 위협을 느끼던 미국 내 좌파들의 정치적인 음모는 문 총재의 특별보좌관이었던 박보희씨를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위원장 프레이저)에서 1978년 3월 19일부터 4차에 걸쳐 소환하는 첫 시련을 겪게 만든다.

 그때 미 소위에서는 ‘통일교회는 한국정부의 앞잡이다’라고 몰아세웠고, 이에 박보희씨는 3차의 공개증언을 통해 자신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요 통일교인이며 반공주의자로서의 양심에 의거하여 행동했을 뿐이며, 자기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몰아가는 것은 용공주의자들의 붉은 음모에 불과하다고 응수하였다. 이 한판 승부에 대한 판정은 프레이저 의원이 청문회 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여 통일교회에 관한 의회조사가 서둘러 종결되게 되어 진실의 승리를 맞게 되었으며, 오히려 박보희 씨의 감동적인 미 의회 증언이 국내 TV로 방영되어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이어졌었다.

 

                                 

                    (늘 변함없이 왕성한 활동 중인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박보희씨)


- 1982년, 탈세(?) 그리고 댄버리의 시련 : 82년 7월16일 뉴욕 지방법원은 문총재를 탈세혐의로 확정선고하고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른 바 미국에서의 두번째 시련이다. 1972년 선교기금 160만달러를 뉴욕체이스 맨하탄 은행에 예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미 국세청이 그 예금액을 종교단체의 자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문 총재의 개인 돈으로 간주하여 탈세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단체의 자금을 종단대표자의 이름으로 은행에 예치하는 것이 미국 관례이며, 그 160만달러가 종교활동에 쓰여지는 선교기금에 해당하기에 면세였던 것이다. 이에 그간 통일교를 백안시했던 여타 종교단체의 이 사건에 대한 반발과 함께 통일교회를 지지하는 상황반전이 되는 등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거기에 문 총재 수감 중 4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가운데, 문 총재 복역 13개월만인 85년 8월 20일 출감하게 된다.

 

                             

      (미국 댄버리 옥중인 문선명 총재에게 쇼우신학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가 수여되다)

 

- 1985년, 금의환향 이제는 남북통일운동으로 : 1985년 12월 10일 문 총재의 (한국)금의환향은 단순한 댄버리 출감 후 귀국이 아닌 향후 조국한국에 닥칠 엄청난 정변을 대비하는 섭리사의 한 각본이었다.

 이미 80년대 들어 당시 비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의 그늘에서 우후죽순처럼 커져왔던 좌파이론에 속수무책이었던 위기의 한국정세 속에서 문총재는 1986년 남북통일학생연합(통학련)을 결성하여 대학가에 일대 경종을 울렸으며, 이어 1987년 좌익과 우익의 이념을 넘어선 두익사상의 국민운동 연합체인 ‘남북통일국민연합’을 창설하여 남북통일시대의 본격적인 운동과 국민교육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 1989년, 워싱턴 타임즈를 이끌어 공산권 붕괴의 주역이 되다 : 1989년 동서독 통일, 동구권 몰락, 소련 해체 등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른 바 공산권 붕괴가 있었다. 문 총재는 일찍이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신의 실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대항하여 세계적인 연대투쟁으로 외롭고 의롭게 전개해 나오신 반공 승공의 세계참피언이었다.

 더우기 1980년대 공산주의 최절정기의 속수무책이었던 때에 미 정치수도 워싱턴 한복판에1982년 워싱턴 타임즈를 창간하여 미국 주류사회 속에 강력한 반공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문 총재의 의지에 찬 각종 정책들이 입안되고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마침내 미국이 움직이고 세계가 변혁된 진실의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문 총재야말로 1989년 공산권 붕괴의 가장 원초적인 힘을 제공했다는 세계사적인 평가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미 워싱턴 정가의 유일 보수지, 워싱턴 타임즈)

 

- 1990년, 무너진 철의 장막, 고르비를 만나다 :  90년 4월 11일 모스크바 제11차 세계언론인회의에서 소련 해체의 주역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문 총재와의 단독요담에서 러시아 미래에 대한 주요 의견을 나누었으며, 이날 고르비도 "한국과의 수교는 이제 시간문제이며 아무런 장애요소가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한-소 수교의 작은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무너진 철의 장막의 실체적 만남이었다.

                               

                                              

                             (한소 국교정상화의 물꼬를 텃던 문총재. 고르바쵸프와의 만남)

                                    

- 1991년, 물보다 진한 피의 심정으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문총재는 고향을 떠난 지 무려 40년 11개월 만에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세계적인 만남을 갖는다. 당시 세계의 언론은 문선명 총재에 대한 종교적 편견에 눈이 어두워 그 만남을 애써 외면했지만, 이는 2천대전 이후 이루어진 냉전시대, 그리고 1989년 공산권 붕괴로 인한 냉전시대 종결을 실체적으로 증명하는 하나의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문 총재는 여타 한국 지도자들의 방북과는 달리 북한 체재시 “주체사상으로는 절대 안된다.”며 오히려 북한 지도부를 훈계하면서 당당한 소신을 폈었고 이에 김일성 주석도 오히려 흔쾌히 단독만남을 받아들여 ‘극과 극은 통한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91년 북한 김일성 주석과 절묘한 외나무다리 위의 역사적 만남)

 

 - 축복 그리고 참가정의 모델부모가 되다 : 문 총재는 절대 순결. 순애의 참가정을 위하여 꾸준히 대규모 ‘축복결혼식’으로 유명하다. 문 총재는 먼저 1960년 4월 11일 한학자 여사와 성혼식을 거행한데 이어, 이후 36쌍, 120쌍, 430쌍, 777쌍, 1800쌍, 6000쌍, 6500쌍, 3만쌍, 36만쌍, 360만쌍을 거쳐 현재도 4억쌍을 목표로 꾸준히 순차적인 축복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배출된 축복가정은 절대순결과 절대사랑으로 참가정의 삶을 살고, 이어 그 가정 가운데서 태어난 참자녀를 통해 참부모가 되는 인류대가족 운동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누구나 가야할 참가정 축복의 길. 축도하시는 문총재 양위분)


- 2003년, 피스컵국제클럽축구대항전으로 진정한 한류브랜드를 만들다 : 2002년 기적의 한국 월드컵축구 4강이 꿈이련가 싶더니, 그 여세를 몰아 문총재는 2003년 국제 유명프로축구클럽 대항전인 '피스컵'을 개최하여 국내외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를 통해 그간 국가대표 경기에 집중했던 국내 팬들이 국가대표의 뿌리인 클럽축구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이젠 축구가 더이상 외국브랜드가 아닌 한국중심의 브랜드로 성장하는 진정한 '한류'를 만들게 된다.   

 

                                                

                            (2005년 제2회 피스컵에서 우승한 토트넘을 격려하는 문총재)

  
 - 2005년, UN갱신의 세계섭리 천주평화연합(UPF)이여 : 2005년 9월 12일 문총재는 미국 뉴욕에서 본격적인 세계섭리를 위해 천주평화연합을 창설하게 된다. 특히 기존 UN이 자국중심의 각축장으로 변모하여 본연의 기능을 발휘 못하는 점, 그리고 작금의 국제분쟁의 배후에 뿌리깊은 종교문제가 얽혀 있음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UN 상하양원제 개혁추진를 목표로 본 연합은 출발하게 되었다.

 

             (유엔 비정부기구세계연합으로부터 만국평화상을 수여받는 문총재 내외분)


- 2007년, 여수엑스포 유치의 밑거름이 되다 : 그간 통일그룹은 2002년 여수엑스포 유치실패 와중에도 여수화양반도에 과감한 투자로 엑스포심사단의 높은 평가를 이끌게 만들었다.

 그런 2012년 여수엑스포 유치가 결정되던 파리 회의장에는 다국적 어린이 예술단인 '리틀엔젤스'합창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11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여수 거문도 앞바다에서는 한 노구의 할아버지가 낚시를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여수엑스포가 결정되기 며칠 전부터 여수 거문도 앞바다에서 기도 중인 문총재) 

 

- 현재, 88세 미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 문선명 총재는 부인 한학자 총재(세계평화여성연합) 슬하에 14자녀와 43명(2007년 8월 기준)의 손주를 거느린 우리네 이웃집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도 인류구도의 정년 없는 대내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문선명 할아버님? 한학자 할머님?)

 

 문 총재는 우리에게 할아버지로, 아버지로, 때로는 형처럼, 친구처럼 다가옵니다. 지난 2007년 연초 지도자대회때는 한참 나이어린 자녀들을 위해 무대 앞뒤를 뛰어 다니면서 기쁘게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동요 '봄이 오면' ‘ 엄마야 누나야’를 좋아하고, 대중가요 '허공' ‘홀로 아리랑’도 성가처럼 즐겨 부르시면서 세상과 허물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카리스마’와는 너무도 다른 그 누구보다도 ‘탈권위’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 총재에 대하여 단 하루를 본 사람이나 일생을 곁에서 모신 분이나 모두가 하나같이 그분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인 문 총재의 16세 부활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간절한 당부를 듣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류역사 처음으로 하늘의 양심으로 살아온 그의 너무도 깊은 실천적 삶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문 총재의 아름다운 삶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고 있지 않을까요?


2008년 1월

 

신길동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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