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61 마을 길
떠나는 딸을 어머니가 뒤에서 눈물로 전송한다.
옥영 자꾸 뒤돌아본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김씨.
김씨의 모습이 조그맣게 멀어지더니 길모퉁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S♯62 화면(자막과 함께), 6. 25 사변
S♯63 서울, 파괴된 건물 지하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
지하실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인다.
떨어지는 물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시는 입. 하선이다.
하선, 발소리 죽여 계단으로 올라간다.
S♯64 동 건물 1층
식료품점이다. 흩어져 썩고 있는 야채와 과일, 곡물, 건어물들.
하선 무너진 벽 틈으로 기어가서 쌀과 건어물을 치마에 퍼 담는다.
거리에서 땅땅땅 총성이 들린다.
인민군들이 집집을 수색하고 있다.
인민군들이 붙잡은 시민을 거리에서 처형한다.
젊은 여자는 죽이지 않고 한쪽으로 끌고간다.
바로 하선의 눈앞에서 여자를 능욕하는 인민군들.
하선 부들부들 떨면서 바라본다.
하선의 소리(E) “저것들이 내 동족인가? 신이시여, 왜 한국의 여자에게 이런 고통과 설움을 주시나이까?”
인민군 일부가 식료품 건물 안을 수색한다.
인민군 간부 “남조선 반동분자들을 보이는 대로 총살하라!”
S♯65 동 지하
하선, 계단으로 달려 내려와서 치마에 싼 것들을 포대종이로 싸서 숨겨 둔다.
군화발 소리가 들리며 인민군들이 지하실로 내려온다.
하선 무너진 계단 틈바구니로 들어간다. 콘크리트 조각으로 틈을 가린다.
지하실 내부를 꼼꼼히 수색하는 인민군들. 숨죽이고 기도하는 하선.
한 인민군이 계단 밑을 훑어본다.
하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간다.
인민군들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하선, 콘크리트 조각을 밀고 나와 쌀과 건어물을 씹어먹는다.
순간, 요란한 포성에 먹던 걸 떨어뜨린다.
S♯66 달리는 기차 안
귀향 열차에 몸을 실은 하선.
전쟁의 포성이 멎고, 여기저기 복구하는 광경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S♯67 선창, 섬으로 가는 철선
피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로 철선이 만원이다.
살림도구를 등에 진 사람, 두 아기를 안고 젖 주는 여자, 갓을 쓴 할아버지.
살아서 귀향하니 즐거운 표정들.
부웅- 고동 울리며 철선이 떠난다.
갑판 높은 곳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하선. 마음이 착잡하다.
S♯68 섬, 하선의 집
폐허가 된 고향 집. 잡초가 무성하다.
잡초를 헤치고 하선이 들어온다.
하선 “어머니!”
불러도 대답이 없다. 큰방을 열어 보고 작은방을 열어 보고 행랑채의 문을 열어 본다. 텅 빈 방-
하선 “아버지!”
하선 찌그러진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부엌도 잡초밭이다.
하선 “언니야! 오빠야! 동생들아! 모두들 어디 갔니? 죄 많은 딸이 돌아왔는데 부모님은 왜 모르시나요? 일제 치하에서 가족들이 흘린 피눈물이 아직도 질척거리는데 왜 대답 안하시나요? 죽었나요? 살았나요?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내 고향을 큰맘 먹고 찾아왔으나, 고향도 산천도 전쟁이 다 앗아갔네요. 넋은 일본이 앗아가고, 피와 살은 동족상잔이 앗아갔군요. 어머니이.”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S♯69 도만고물상(낮)
도만, 절뚝거리며 산더미같이 쌓인 고철들을 정리한다.
같은 종류끼리 묶어서 묶음을 만들고 보기좋게 정돈한다.
한쪽엔 폐휴지와 헌책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도 묶거나 자루에 담는다.
다리병신인 그는 혼자서 힘들게 그 많은 일을 다 한다.
도만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차 떠나는 소리에 구고산 큰애기 밤봇짐만 싸누나. 삼수갑산 머루 다래는 얼크러 설크러졌는데 나는 언제나 임을 만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멈칫 놀라 물러서는 도만.
폐휴지 속에 여자가 쓰러져 있다.
도만 “이것은 내가 수집한 고물이 아닌데. 하필이면 내 집에 와서 죽을 게 뭐야? 재수 노굿이다 쳇!”
도만, 여자를 흔들어 본다. 무반응.
여자 코에 귀를 대 보고 맥을 짚어 본다.
도만 “잉, 죽지는 않았구나. 파출소에 신고할까? 신고하기 전에 우선 꺼내 주고 보자.”
도만, 여자를 종이더미에서 꺼내어 들쳐업고 집 안으로 간다.
S♯70 동 실내(판자막이 방)
도만, 여자를 방에 눕히고 주전자의 물을 따라 먹인다.
여자의 목구멍으로 꿀꺽 물 넘어가는 소리.
도만 표정이 밝아지며 부엌으로 달려가 무언가 한다.
잠시 후 미음죽을 끓여 가지고 와서, 후후 불어 식히고 여자에게 먹인다.
여자는 미음죽을 다 삼킨다.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헤헤 웃는 도만.
도만 “살았다. 살았어. 이히히히.”
밖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S♯71 동 마당
노부부가 주운 고물들을 리어카에 싣고 들어온다.
도만 밖으로 나가서 고물을 저울에 달아 값을 계산해 주고 방으로 들어온다.
S♯72 동 실내
여자, 춘화가 깨어나 앉아 있다.
춘화, 더러운 옷과 때묻은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상거지가 된 춘화. 도만 악취에 코를 막는다.
도만 “상거렁뱅이네 상거렁뱅이여.”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퍽퍽 피우는 도만.
도만 “살아났으면 나가쇼.”
춘화 “예.”
가냘피 대답하고 비칠비칠 일어나서 문간으로 간다.
“인물 아깝다”고 중얼거리는 도만.
도만 “남은 죽이나 다 먹고 가쇼.”
춘화 수줍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도만 “고기죽이요 고기죽! 나도 안 먹고 아껴 둔 거란 말이오. 거렁뱅이가 먹다 둔 걸 누가 먹으란 말이오?”
춘화 “많이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만 “어라? 교양 있게 구는 품이 타고난 거지는 아닌가베. 어디 갈 데라도 있소?”
춘화 “없어요.”
도만 “나 귀가 어두워서 잘 안 들려요. 좀 크게 말하시오.”
춘화(크게) “전 집이 없어요.”
도만 “부모형제도 없소?”
춘화 “있지만 갈 수 없어요. 죄를 너무 많이 져서……”
도만 “고향이 어디요?”
춘화 “군산, 시골이예요.”
도만 “응, 그건 그렇다치고, 직업거지는 아니신 것 같고, 떼거지들한테 걸리면 당신 온전치 못해요. 떼거지가 뭔지 알아요?”
춘화 멀거니 도만을 쳐다본다.
춘화의 뱃속에서 꾸루룩 소리가 난다.
도만 “모르는 모양이군. 내 당신 인물이 아까워서 충고하요만, 여자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 취직하시오. 사지가 멀쩡한테 왜 거렁뱅이짓을 해요?”
춘화 “아무도 써 주지 않아요.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도만(놀란다) “뭐, 뭐요? 일본군 위안부? 그럼 당신은 창녀?”
춘화 고개를 끄덕인다.
도만,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부벼 끄고 한심해한다.
도만 “당신 참 바보군. 얼굴에 써 있는 것도 아니고 뭣하러 자랑해요? 일본군 위안부가 자랑이오?”
춘화 “저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상처투성이 과거를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살아요. 그래서 자랑했어요. 결과는 이렇게 됐지만 끝까지 속이지 않을 거예요. 속인다고 해서 묻어질 과거도 아니고요. 제 성격상 도둑질은 못하고, 일본군 위안부 자존심 지키려고 닷새 동안 곡기를 굶었더니 창자가 놀랐나 봐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도만 머리가 복잡한지 두 손으로 머리칼을 북북 긁는다.
S♯73 동 마당
춘화, 도만에게 곱게 절하고 마당으로 나간다.
야적된 고물이 많아서 어디로 나갈지 모른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춘화를 보던 도만,
도만 “아가씨, 그쪽이 아니오!”
춘화 돌아본다. 도만이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S♯74 동 실내
춘화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도만 “갈 곳이 없으면 당분간 여기서 기거해도 좋소. 뭐, 아가씨한테 흑심을 품어서가 아니고 국민된 도리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방이 두 개니까, 좀 불편하더라도 직장을 구할 때까지 있어 봐요. 싫으면 언제라도 떠나시고.”
춘화, 구세주를 만난 기분.
S♯75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인서트)
야적된 고물들이 비에 젖는다.
S♯76 도만고물상 실내
방에 엎드려 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듣는 춘화.
방안엔 살림도구는 없고 고물 서적이 잔뜩 쌓여 있다.
이 책 저 책 빼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춘화.
고통이 몰려온다.
몸을 뒤틀며 뒹굴고 끙끙대다가 진통제를 꺼내 먹는다.
진통이 갈앉지 않는다. 또 먹는다. 진통이 조금 해소된다.
전신이 땀에 젖은 춘화.
책을 보니 글씨들이 살아서 일본군의 얼굴로 변한다.
방의 벽과 천장에도 일본군들이 넘실댄다.
춘화 “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고 끅끅 우는 춘화.
도만이 마당으로 고물들을 싣고 들어온다.
S♯77 동 마당
도만, 고물들을 리어카에 그득 싣고 들어와 비 맞지 않게 덮개로 덮어 놓은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닦고, 비에 젖은 옷을 벗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방안을 들여다본다.
춘화 몸을 뒤틀고 고통스럽게 엎드려 있다.
도만 “약 좀 먹지.”
춘화(엎드린 채로) “먹었어요.”
도만 “아프면 병원에 가요. 괭이로 막을 때 호미로 막아야지.”
춘화 “괭이로도 호미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예요.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천형 같은 병.”
S♯78 동 실내
춘화 흐트러진 매무새로 일어나서 도만을 맞이한다.
춘화 “고생하셨어요. 시원한 것 좀 드릴까요?”
도만 “내가 먹겠소.”
도만 얼음물에 채워 둔 냉수를 꺼내와서 마신다.
도만 “나 기분 좋아서 한 잔 했소. 당신이 집을 봐 주니까 내가 돌아다닐 수 있어서 수입이 더 짭짤하다니까. 이러다 부자 되겠어.”
하선 “제가 무슨 한 일 있나요? 편히 놀고 먹으면서 아저씨 짐만 됐지요. 이렇게 호강시켜 주셔서 감사드려요.”
도만 “편히 놀고 먹다니? 아픈 몸으로 쉬지 않고 무거운 고물 운반하고 정리해 줬지. 나 같은 절뚝발이 다리병신을 누가 따라 살겠소? 당신이니까 따라 살지. 감사할 사람은 나요.”
도만, 하선의 몸을 만지며 수작을 건다.
도만이 살을 맞대자 소스라치는 하선.
하선 “비에 젖었으니 옷 벗고 씻으세요. 저녁 지을 시간이예요.”
도만의 애무를 뿌리치고 부엌으로 나간다.
닭 쫓던 개모양 멍청히 입맛을 다시는 도만.
S♯79 김포공항 활주로(낮)
마닐라 발 여객기 한 대가 활주로에 도착한다.
S♯80 국제선 게이트
게이트로 나오는 탑승객들 속에 선글라스를 낀 미례가 보인다.
삼십대의 멋진 숙녀가 된 미례.
S♯81 달리는 시내버스 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화려한 풍경에 어리둥절한 미례. (M 음악)
미례의 소리(E) “내 목숨을 구해 주신 노부부가 돌아가시고, 나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로 가서 노부부가 가르쳐 주신 그들의 친척집을 찾아갔다. 할아버지의 사촌조카인 그 친척은 시장에서 자그만 공예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친척 가족들은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공예품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공밥을 얻어먹었다. 물론 가게 장사일과 잡일을 도와 주었다. 필리핀은 영어를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는 쉽게 영어를 배우고 그들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시내버스가 멎고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미례, 여자 차장에게 내릴 곳을 묻는다.
차장은 무뚝뚝하게 가르쳐 준다. (M 계속)
미례의 소리(E) “몇 해가 지나 나는 일류 공예사가 되어 나의 가게를 갖게 되었다. 수입은 신통치 않았지만 밥은 먹고 살 정도였다. 나는 내 가게의 단골인 한국 수입상을 통해서, 대학 교수가 된 옛날 여학교 선생님의 근무처를 알아냈다. 그 선생님은 나를 근로정신대에 천거하신 분이었다. 나는 지금 그 선생님을 찾아가고 있다. 근로정신대를 모집하던 일본 관리와 손잡고 제자를 일본군 창녀로 만든 교사가 한둘이겠으며 그 피해 학생이 한둘이겠는가? 그리고 제자를 창녀로 만들고 싶은 스승이 어디 있겠는가? 그 모두가 일본의 계략이고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선생님을 만나 문안 인사 드리고 일자리라도 하나 부탁하고픈 마음뿐이다. 서울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국에 와서 먹고 살기 위해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에서……”
미례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
S♯82 ××대학 교수실 복도
미례, 교수실 문앞에 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표찰을 본다.
‘교수 강인영’이란 표찰이 붙어 있다.
노크하자 “네, 들어오세요.” 낭랑한 목소리.
미례, 문을 열고 들어간다.
S♯83 동 교수실
미례 들어오자, 강 교수 안경 너머로 유심히 바라본다.
미례 공손히 인사한다.
강 교수 “누구시죠?”
미례 “엄미례입니다.”
강 교수(놀라며) “엄미례! 네가 진정 엄미례란 말이지?”
강 교수, 의자에서 일어나 미례의 두 손을 잡는다.
마주 보는 두 얼굴.
그 사이로 일제 강점기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S♯84 ××고등여학교(여중) 교장실 (추상)
깡마른 몸집의 일본 관리가 와서 수십 명의 여학생을 근로정신대에 차출하라고 강요한다. (M)
진땀 흘리는 한국인 교장.
옆에는 강인영 등 여교사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일본 관리, 이하 일본식 발음 섞인 한국어로,
일본 관리 “천황폐하의 명령을 거역하겠단 말이오?”
교장 “그럴 리 있습니까? 학생들 부모님 동의도 얻어야 하고, 생각할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해서……”
일본 관리(구둣발로 탁자를 땅 차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소? 지금 전선에선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소. 무기가 부족해서 대일본제국이 전쟁에 패배할 위기에 직면해 있단 말이오.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손이 모자라 기계가 작동되지 못하고 있소. 우리가 요구하는 숫자를 오늘 중으로 차출해서 보내 주시오!”
수행한 한국 관리가 한몫 거든다.
한국 관리 “교장의 따님도 예외가 아니오. 여교사도 마찬가지요. 순순히 우리에게 협조하면 당신들의 딸은 명단에서 빼 줄 용의가 있소.”
강인영 “난 딸이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가겠습니다.”
일본 관리(고함) “무슨 개소릴 하는 거요? 근로정신대가 늙은 여자들 화투방인 줄 아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피가 팔팔한 아이들이오. 기혼자는 필요없소. 그러나 원한다면 당신도 보내 주겠어. 근로정신대보다 더 좋은 부대로!”
교장과 한국 관리가 진정하라고 말린다.
일본 관리 벌떡 일어서서 나가며,
일본 관리 “오늘 오전 중으로 명단을 보고하여 저녁 여섯 시까지 지원자를 우리에게 보내시오!”
강인영도 일어서서 나가 버린다. 그러자 다른 여교사들도.
남은 교장 혼자 고민한다.
교장 “협력을 안하면 학교가 문을 닫을 판이니 원……”
S♯85 동 여학교 교실(추상)
강인영 들어온다.
사십여 명의 눈들이 불안하게 선생님을 바라본다.
수업도 중단한 채 고민에 싸인 인영.
제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다가 미례의 얼굴에 멈춘다.
강인영 “네가 반장이니 대표로 희생해 줘야겠다. 나머지 9명은 공부 잘하는 성적순으로 자르겠다.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다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선생님도 운다.
교실은 통곡의 울음바다가 된다.
S♯86 ××대학 교수실(현실)
마주보는 두 얼굴. 원한도 증오도 없다. 눈물만……
강 교수 “날 보려고 그 먼 길을 찾아왔구나. 다리 아픈데 좀 앉으렴.”
강 교수, 미례를 소파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털썩 앉는다.
강 교수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정신대로 보낸 애들이 군 위안부가 됐단 말을 듣고 편한 잠을 자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선생님이 잘못했다. 죽음으로 그들의 범죄를 막지 못한 죄.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으마.”
미례 앞에 무릎 꿇고 빈다.
미례, 선생님을 포옹한다.
미례 “선생님. 나라를 잃은 국민이 무슨 힘이 있었겠어요? 저는 선생님을 이해해요.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잘 알아요. 저는 선생님 원망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저를 끔찍이 아껴 주셨죠. 훌륭한 사람은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공부 잘하는 성적순으로 지명하셨겠죠.”
강 교수 “미안하다. 선생님이 못나서 너희들을 악마들에게 팔았어. 나만 살자고.”
미례 “아녜요. 선생님은 잘못 없어요.”
오히려 선생님을 위로하는 미례.
강 교수 일어나서 녹차를 끓여 대접한다.
녹차를 마시며 회상에 잠기는 두 여자.
미례 “저는 남지나해 필리핀 군도에 있는 어느 섬으로 끌려갔어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군 위안부란 허울을 쓰고 온갖 만행과 학대를 다 받았어요. 일본에서 떠날 땐 훨씬 더 많은 숫자였는데 여러 부대로 분산됐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도 많이 봤어요. 일본이 망한 건 당연해요. 그땐 망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미례, 창가로 걸어가서 평화롭게 잔디에서 노는 대학생들을 바라본다.
미례 “일본군 부대가 연합군의 폭격을 맞고 아수라장이 됐을 때 위안부 친구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어요. 도망칠 기회는 그때뿐이었죠. 함께 도망친 친구 중 두 명은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저 혼자 살았어요. 다른 네 명의 친구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어요. 살았다면 기적이겠죠.”
그 말을 들으며 연신 눈물을 닦는 강 교수.
죄책감에 고개 들지 못한다.
미례, 일어서서 강 교수의 많은 장서들을 구경한다. 부러운 듯 책을 쓰다듬고.
미례의 소리(E) “선생님은 내가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내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굳이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당장 먹고 잘 수 있는 집과 직장이다. 나는 선생님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비록 작은 월셋방이지만 내 보금자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겉으론 생활의 안정을 찾았으나 만신창이가 된 육신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군들이 불칼로 전신에 새긴 문신의 후유증과 낫지 않은 성기 질환, 그리고 여자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수치심 때문에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다.”
S♯87 ×× 바닷가(낮)
아낙들이 갯벌에서 조개를 캔다.
익숙한 솜씨로 조개를 잡아 바구니에 담는 손이 빠르다.
옥영의 바구니에도 조개가 그득 찼다.
조개를 자루에 붓고, 다른 아낙과 함께 깊은 바다로 들어간다.
S♯88 갯바위 부근
갯바위섬 굴 서식지.
부지런히 갈쿠리로 갯바위에 붙은 굴을 따는 옥영.
기침을 콜록거린다. 바닷바람이 거세다.
허벅지 아래로 피가 흘러내린다. 아낙1이 놀란다.
아낙1 “옥영이, 피 흐르네! 닦을 것도 없어 어쩌나?”
옥영 태연히 머리의 수건을 벗어 사타구니에 차고 묶는다.
아낙2 “괜찮은가?”
옥영 “괜찮아요.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가요?”
아낙1 “무리하지 마 이 사람아. 몸도 안 좋으면서 일은 건강한 사람 곱으로 하고 있네.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낙2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게. 몸을 생각해야지.”
옥영 “괜찮다니까요. 콜록콜록.”
아낙1 “저렇게 콜록거리면서 고집 부리긴!”
바닷물이 들어온다. 갯바위섬이 조금씩 물에 잠긴다.
아낙들 하나 둘 뭍으로 나간다.
옥영 맨 뒤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굴을 딴다. 아낙들이 어서 가자고 소리친다.
바닷물이 옥영의 코앞까지 밀려온다. 발목이 물에 잠긴다.
옥영, 그때서야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모래톱으로 달려간다.
S♯89 읍내 시장
시장길에 노점을 펼쳐 놓고 조개, 굴, 소라, 새우, 참게 등을 파는 옥영. (M)
가싯수가 제법 많다. 오가는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지나간다.
옥영(행인들에게) “좀 사세요! 싸게 드려요!”
참게들이 자꾸 대야통 밖으로 도망친다.
옥영 길바닥으로 달아난 참게를 잡아 대야통에 담는다. 다른 놈이 또 달아난다.
옆의 장사꾼 아낙이 자루에 담으라고 해도 듣지 않는 옥영.
한 중년부인이 옥영을 유심히 바라본다.
중년부인 “혹시 옥영이 아닌가? 옥영이 맞지? 그래, 옥영이가 틀림없어. 나 윗마을에 살던 순례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더니 살아 있었어?”
옥영 “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저는 옥영이가 아닙니다.”
시치미를 떼는 옥영.
중년부인 “그래요? 공부 잘하고 마음씨 곱던 옥영이와 꼭 닮아서 내가 실수를 했나 봐요.”
중년부인 섭섭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간다.
옥영, 중년부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본다.
옥영(혼잣말) “순례 언니, 미안해요. 행복하게 잘 사세요.”
기침을 심하게 콜록거린다.
옆의 아낙이 걱정한다.
노점상 아낙 “돈 아끼지 말고 병원에 가 봐요. 그러다 큰병 되겠어.”
옥영 “아는 병이예요. 그리고 병원 갈 시간이 있어야죠. 콜록콜록콜록.”
노점상 아낙 “장사는 내가 봐 줄 테니까 병원에 다녀와요. 시장 입구에 병원이 하나 있더구만.”
옥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럼 좀 봐 주실래요?”
노점상 아낙 “그래요. 어서 다녀와요.”
옥영, 아낙에게 장사를 부탁하고 병원으로 간다.
S♯90 병원 진료실
의사, 엑스레이를 찍어 옥영에게 보여 주며,
의사 “기관지와 폐천식입니다. 폐결핵이 아니어서 다행이자만 그대로 방치하면 폐결핵, 폐천공으로 발전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지요. 충분한 영양 섭취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약은 계속 드시고요……”
옥영의 표정은 담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