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자> 강연 중에 호박사님께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쓴 것이라고 하시면서
신비주의에 대한 브리태니커의 설명 중 훌륭하게 설명한 '단락'이 있다고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 옮겨봅니다. (어느 단락인지는 모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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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감춰진 진리나 지혜를 영적으로 추구하는 것.
신(神) 또는 신성한 존재(초월적인 영역)와 합일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모든 주요종교는 신비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미개한 문화의 주술, 입신(入神) 의식, 세속적인 체험에서도 그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종종 신비주의를 신학과 비교하여 우위에 두고 신비주의가 신학보다 더 진정하거나 더 주관적이며 열정적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형태의 종교사상은 사실상 병존해왔고, 한 개인이 2가지를 모두 지니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 체험을 신학적인 의미로 환원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신비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분석으로는, 신비스러운 정화(淨化)·계시·합일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파악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고 분명히 주장해왔다.
힌두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 신비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힌두교 의식 가운데 최고의 이상으로 꼽히는 고행자, 즉 '목사'(mokṣa : '해방'이라는 뜻)는 힌두교를 배우는 서구인들뿐만 아니라 힌두교 스승들에게도 커다란 주목을 받아왔다. 요가파 (Yoga)는 전통적인 힌두교 안에서 선택된 소수가 신비스러운 통찰의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신비주의적 기법에서 유래했다. 요가의 기법들은 개인의 영혼이 삼라만상에 흡수된다는 힌두교의 전통적인 교리들과 결합되었다. 힌두교 신비주의의 어떤 형태들은 신자 개인을 힌두교 만신전(萬神殿)의 특정한 신(예를 들면 크리슈나 또는 시바)과 연결시켜주는 등 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띠는 데 반해, 몇몇 형태들은 궁극적 실재의 은총과 권능에 의지하고 굴복하는 수동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여러 불교 종파의 공통점은 명상과 관조를 열반(涅槃 Nirvāṇa)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강조하는 데 있지만, 그 목표에 대해서는 각기 해석이 다르다. 불교 신비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색인 : 금강승)과 선종 (禪宗 Zen)(→ 색인 : 선종)이다. 티베트의 금강승 또는 탄트라 불교의 구도자들은 신비적인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기 위해서 요가 훈련과 함께 절대주의적 철학과 고도의 상징언어(象徵言語)를 사용한다. 한편 일본의 선종은 실천을 강조하고 사실적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교의 신비주의 지류와 정반대되는 지류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종파도 일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는 부분적인 지식 대신 반야(般若 prajnā : '지혜'라는 뜻)를 얻기 위해 수련하므로 신비주의 사상과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의 수피(Ṣūfῑ) 신비주의는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대답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등장했으며, 기존의 이슬람교에 있던 신비주의 체험을 중시하는 일부 추세를 받아들였다. 수피 신비주의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다른 여러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신랑과 신부 사이의 도취와 사랑에 관한 은유를 사용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알라의 절대주권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코란〉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은 언어였다. 그러나 수피 신비주의는 〈코란〉이 가르치는 '전적 타자'인 신이 너무 엄격하고 멀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신의 실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성서의 예언자들이 본 환상과 성서시대 이후 유대교의 묵시적인 상상에 근거하고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가장 독특하고 심오한 주제는 카발라 (Kabbala)인데, 이것은 13세기말경에 등장한 〈세페르 하 조하르 Sefer ha-zohar〉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색인 : 카발라). 이 책은 하느님의 권능과 내면적 삶을 묘사했으며, 참된 신자는 원칙들과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인간이 천진한 순수성에서 타락함에 따라 무너지고 만 데베쿠트(devequt :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뜻)를 회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는 이러한 조하르의 지혜를 토대로 꾸준히 발전되어갔다. 특히 하시디즘 형태는 일반인들의 신앙과 의식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색인 : 하시디즘). 마르틴 부버의 사상에서 하시디즘은 그리스도교 사상뿐만 아니라 세속적 사상의 형태로 나온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인 양상들은 동방 신비주의를 특징짓는 체계화된 비의(秘儀) 전승들과는 대조적으로 회상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물의 본질이 본래 악함을 강조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靈知主義)는 조로아스터교와 그외 동방 종교들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교 신비주의의 잔재였던 것 같다. 바울로와 요한의 종파에서 자연스럽게 자주 등장하는 '그리스도-신비주의'가 그 뿌리를 이룬다. 3~4세기의 사막 교부들은 신비스러운 계시를 받기 위해 의식(意識)을 갖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은둔 전통을 세워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의 주제들과 표상(表象)에서 이끌어낸 '존재의 신성한 빛'은 후대 신비주의자들의 문헌에서 강하게 등장했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29 죽음)에게서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에크하르트는 이상세계의 실재를 강조했으며, 만물을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영원히 존속하는 요소들로 보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가 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 종파 안에서도 번성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뒤 여러 시대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비주의자들은 신적인 빛 또는 불꽃이 보편적인 원칙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인정하는데, 이것은 가톨릭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중세 이래의 서양철학사는 우주적 신비주의(cosmic mysticism)라는 말로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는 사상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는 이 사상형태를 철학의 체계로써 가장 명석하게 설명했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합리하고 위협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주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구조와 목적에 일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존경과 헌신의 태도를 수양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고대의 서사시에서부터 윌리엄 블레이크, 스테판 말라르메, 그밖의 시인들의 시(詩)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 신비주의적 환상과 문학적 영감의 관계가 미학(美學)의 주요쟁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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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진리나 지혜를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20세기에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이전 시대에 신비주의가 했던 것과 유사한 역할까지도 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현대에서 겪게 되는 소외감이 부분적으로 그 원인이 되고 있다.
신비주의의 목표는 신이나 신성한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결합은 4단계로 이루어진다. ① 신체적인 욕망의 억제, ② 의지의 정화, ③ 정신의 각성, ④ 신과 의지적·존재적 합일이 그것이다. 신비주의는 존재의 근거로 회귀하는 방식의 하나이며, 소외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신비주의에는 비물질적·비논리적·역설적인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반합리적인 '사고를 배제한 종교'는 아니다. 심층적인 삶의 형식인 신비주의는 인간이 실재의 근거와 만나게 되는 차원은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차원에서는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과 같고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종교와 신비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분명히 앞서간 신비주의자들이다.
신비주의는 마술·기적·기도·예배·과학과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과 신비주의는 접근방법과 강조점에 있어서 다르다. 신비주의는 예배나 기도처럼 감각적 체험의 연속이 아니라 순수하게 통일된 의식(unitary consciousness)이다. 과학이 분석적이라면 신비주의는 시적·역설적이다. 열광적인 감정주의(emotionalism)와는 달리 신비주의는 사주를 받거나 계략에 악용되지 않으며 정숙하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주장을 긍정하며 사후의 세계를 예시하기도 한다.
신비주의는 예언적 종교나 샤머니즘과는 구별된다. 예언적 종교는 신비주의에 비해 행위를 강조하며, 신과 인간의 절대적인 차이를 말한다. 샤머니즘은 신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신비주의의 정화의 단계와 유사점도 있지만 초자연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한다. 신비주의는 감각적인 지식이나 추론적 지식을 뛰어넘는 제3의 지식에 대한 신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비주의의 본질은 일시적인 이해의 범주를 뛰어 넘어 직관의 세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중세 때의 유신론적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이 사랑의 열망을 통해 신을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결과 절대자와 교류를 통해 기쁨을 누리게 된다. 19세기의 오토 플라이데러는 종교 신비주의를 자아와 신과의 직접적인 일치의 감정이라는 배타적인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리처드 네틀십은 반대로 신비주의는 인간이 경험하는 요인에 대한 상징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신비주의 형태는 상징을 뛰어넘어 절대자와 적나라한 대면을 시도한다. 내향적 신비주의는 밖을 주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함으로써 절대자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이것은 전반적인 의식의 내용을 거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국의 학자 R. C. 제너는 격리형식의 신비체험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영과 물질, 영원과 시간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생물학자인 L.V.버탈란피는 자아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일치와 자유를 체험하는 정상체험(peak experience)을 고백하기도 했다. 신비주의에 대한 태도는 20세기 중반부터 무의식, 초감각적 인지, 진화론적 관점 등에 의해 상당히 수정되었다.
지성적·관상적(觀相的)인 형태의 신비체험은 분별력에 의존하면서 신이나 지고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사고·의지·감정을 동원하여 지식(지냐나)·업(業: 카르마)·신애(信愛: 박티)를 연결하는 인도의 신비체험이나 요가는 이 유형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유형에서 모든 삶과 삶 속에서 수행해야 할 일이 명상이다. 헌신적인 형태의 신비체험은 사랑이나 헌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서적 접근방식의 유형이다. 기도·예배·경배의 의식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유형의 신비체험은 황홀경이라는 보상을 제공해준다. 황홀하고 에로틱한 형태의 신비체험은 교회의 교부들이나 현자들에 의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유형으로, 정화되지 않은 에로틱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접근방식이다. 인도의 바이스나바 또는 탄트라(性的) 체험은 이 유형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색인 : 에로티시즘). 20세기에는 약품 등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료적 신비주의가 등장했다.
신이나 신성한 것을 직접 체험하려는 신비주의는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었다. 직접적·직관적 신(神) 인식은 계시 종교와 유사하지만 나름대로 그것은 과학이며 철학이다. 신이나 신성한 것과 합일하려는 신비체험은 인격의 변화인 회심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존재'나 힌두교의 '재생'(再生)이 그 예인데, 그것은 불경건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여기'로부터 '저기'로의 이행을 뜻한다. 우주를 체험하는 신비주의는 역설적인 신비체험이다. 모든 신비주의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체험자는 시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 밖에 있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편견이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성숙을 촉구하는 체험이다. 사람들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비체험은 발전적인 인간생활을 도모하려는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를 담고 있다. 신비주의가 초월을 지향하는 데 반해 이 체험은 인간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성한 것이 있고 신비주의는 신성한 것에 대한 학문이며 예술이다.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인간과 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이단으로 생각했으며 범신론으로 보았다. 이슬람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신성한 것에 대한 체험은 언제나 유쾌한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불안과 공포를 주기도 한다. 어떤 신비가들은 신비체험의 수단으로 금식·명상·자기암시 등을 활용한다. 신비신학에서는 체험 자체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다. 신비체험은 인간이 신성한 것과 다양한 신비적 관계를 맺도록 한다. 서방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힌두교에서는 구원(mokṣa), 불교에서는 열반(nirvāṇa), 이슬람교에서는 자아의 소멸(fanā⁾)이라고 한다.
대극(opposite)의 합일은 '대극적 일치'라는 의미로 체험의 한 차원을 가지고 다른 차원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상징이며 역설이다. 그리스도와 사탄이 형제라는 말이 이에 해당된다. 겸허와 충만은 표현의 이율배반적 방법을 통해 균형을 찾는 상징이다. 긍정적인 방법은 충만이고 부정적인 방법은 겸허로 표현되어 신은 우주 만물을 다 소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신의 사자(使者)라는 상징주의는 신비의 실재를 체험했으나 이를 널리 보편적으로 알릴 수 없을 때 특별한 통로를 통해 전달한다는 뜻이다. 사랑과 결혼의 상징주의는 체험자의 영혼을 여성으로 보고 체험의 대상을 남성으로 보면서 모험적이고 심도 깊은 관계를 추구할 때 쓰는 말이다(→ 색인 : 신성한 결합). 여행의 상징주의는 탐구, 순례의 길을 의미한다. 여기서 길은 위로, 안으로 열려 있으며 역사의 피안으로의 도약도 이루어진다. 이 모든 상징은 발전적인 자아 이해의 과정에서 터득한 지혜이다. 신비체험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해주며 우주의 본질을 보는 제3의 눈과 지혜의 눈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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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관련된 인간의 경험.
신비주의는 심리학적 상태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적인 서술로 비약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심리학과 신의 심리학을 섞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의 주된 방향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전환하면서, 인간의 안과 밖에 있는 신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신비적 생활의 특징은 다량의 에너지와 확대된 자각으로 삶의 비전을 획득하여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랍어로 '정신의 궁전'이라는 뜻의 '마캄'이나 산스크리트로 '대지'라는 뜻의 '부미'는 모두 생의 비전을 찾고 세계의 나그네로서 삶을 시작하려는 조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자각이다.
신을 예배하는 자는 신처럼 되어야 한다는 인도의 경구처럼 신비주의에서 에너지의 활달한 발산은 의식을 어떤 대상이나 상념에다가 고정시키고 집중할 때 촉진된다. 인도심리학은 인간의 의식을 자각상태(jāgrat)·몽상상태(svapna)·수면상태(suṣupti)로 분류 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순수한 자기 실존 또는 존재의 의식(turῑya)이다. 이러한 4개의 척도는 인간이 절대정신인 존재의 근원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의 단계를 시사한다. 신비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두꺼운 자아의 벽, 감각, 제한된 관심이라는 감옥 안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의 천사와 사랑의 천사는 인간이 위를 향하도록 부르고 인도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장기간 또는 단기간 사회로부터 떨어져서 지식과 사랑으로 나아간다. 신비의 길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것은 이중 감정이다. 곧 많이 사랑할수록 고통도 크다는 것이다. 신비의 병적 상태란 이러한 사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발전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다. 상징과의 동일시 역할은 이런 의식의 발달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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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관련된 인간의 경험.
신비체험은 확실히 개인 단독자가 초월자와 갖는 체험이다. 야코프 뵈메의 말처럼 신비체험 속에서 세계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재형성되기 때문에 외형적 권위나 교회에 대항해 나타난 신비주의는 그 배경이 다양하다. 신비주의가 지니고 있는 타계적 편견과 신과의 수직적 관계 때문에 신비주의자들은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비판받아왔다. 그래서 그는 소외자이며 죽은 시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R.D.라나데는 "사회에 대하여 최선의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신비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다소 소박한 형태의 신비주의는 자선·격리·헌신의 태도와 원칙을 통해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를 유도한다.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신비주의는 자연과 사회를 초월하여 집단적인 삶을 변화시키려고 했으며 세계의 질병을 치유하려고 했다. 신비주의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가장 크게 힘쓰는 사람은 궁극적 혁명인 의식의 혁명을 자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비적 정신의 구조를 통해 의식(意識)의 문화도 전망해볼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