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무대는 길에서 가까운 어느 소공원의 전경이다. 한쪽에 가지만 을씨년스러운 작은 가로수 한 그루가 서 있다. 다른 한쪽 적당한 곳에 가로등 하나 서 있고,가로등 가까운 뒤편에 벤치가 하나 있다.
등장인물:등장인물들은 얼굴과 팔다리에 회칠을 해서 한 인간으로서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석고상이나 미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은 육체적인 외양보다는 몸에 걸친 모자,안경,옷가지,신문 등 소도구들로 신분이나 성격이 드러나도록 하고,몸짓이나 행동은 판토마임을 하듯 다소 과장되게 하여 의사전달이 잘 되도록 한다.
특별히 소도구를 지정하지 않은 부위는 몸뿐만 아니라 옷 등의 소도구도 회칠이 된 상태로 한다. 회칠한 상태이므로 한 배우가 여러 배역을 맡는 것이 가능하지만 적어도 남자 3명,여자 3명이 필요하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배역을 지정해 준다.
역술가(남,50대 후반)
거리화가(남,20대 후반)
스님(남,40대 후반)
샐러리맨
오징어
배낭가방
남자행인1
남자행인2
뻥튀기(여,40대 후반)
핸드백(여,20대 후반)
고물상(여,40대 후반)
아줌마
여자행인1
여자행인2
막이 오르면 무대 중앙에 하얗게 회칠된 몸에 양복바지만 걸치고 노티가 나는 안경,검은 구두,회칠된 중절모로 치장하고 있는 역술가(이하 '역술가'라고 표기한다)가 앉아 있다. 사주며 관상 따위의 문구가 적힌 광목 천과 역학책을 바닥에 늘어놓고,사람 얼굴을 관상학적으로 조잡하게 그려놓은 조그만 입간판도 하나 서 있다.
무대 한쪽에 오징어를 구워 팔고 있는 남자 노점상(이하 '오징어'라고 표기한다)이 서 있다. 회칠된 몸에 눌러쓴 빛 바랜 모자,허름한 잠바,손에 낀 장갑 등이 그의 노점상 신분을 요약하고 있다. 지정되지 않은 부분은 옷을 입고 있어도 회칠되어 있다.
무대 다른 한쪽에는 뻥튀기 노점상 여인(이하 '뻥튀기'라고 표기한다). 회칠된 몸에 바지,목도리,모자,전대 등을 걸치고 있다.
오징어:오늘도 종쳤군. 불경기야,이러다간 오징어가 말라 비틀어지기 전에 내 오장육부가 뒤틀리겠어. 초가을 날씨가 왜 이리 서늘하지,어허 뼈 시려.
뻥튀기:(오징어에게 삿대질하며) 냄새 피우지 말고 거 자리 좀 더 멀리 떨어뜨리라니까. 귀에 말뚝을 박았나.
역술가:(싸움을 가로막고 나서며) 좀 팔려?
뻥튀기:절더러 물었소?
역술가:그랬소.
뻥튀기:명색이 점쟁이가 그걸 한눈에 척 보면 알아야지,묻긴 왜 물어. 계룡산의 찍새라고 큰소리치던 건 술김에 터져 나온 망발인가.
역술가:오늘 일진이 심상치 않더니만,어려울수록 맘보는 곱게 먹으라니까.
오징어 : (불현듯 역술가에게) 오징어 다리 하나 뜯으시겠어요?
역술가:어휴,살짐이 참 실하군,고맙구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 보자,이런 한데서 구를 인물은 아닌데 그랴. 그래 나이는 몇이고?
오징어 : 나이는 알아서 뭐하시게요.
뻥튀기:소갈머리하고는,오징어 다리 한 가닥에 눈을 게슴츠레 뜨는 저,저,저.
역술가:보자보자 하니까… 빠지지 못 해 이 여편네야! 남정네들 일에 끼지 말라고 내가 입이 닳도록 일러줬지. 저 남골지상(男骨之相)이 어딜 가. 그러니 남편 잡아먹고 뼈 빠지게 사서 고생하는 거라고. 알아?
뻥튀기:뭐라? 남편 잡아먹어? 눈은 보라고 달아놨지,가죽이 모자라서 찢어졌나.
오징어:아주머니 참으세요. 다들 어려운 처지에.
역술가:(오징어를 보며) 서른이 끝나기 전에는 운이 트이겠어. 이게 다 세상 공부하자고 나선 게지. 얼마나 건실해. 요즘 젊은 것들이 어디 남부끄러운 이런 일에 선뜻 나서는 놈 몇이나 되겠어.
뻥튀기:누에고치처럼 희멀건하게 생겨서 뭐가 뭔지 분간이 안 가는데,어딜 보라는 말이오?
역술가:척 보면 몰라. 이목구비 뜯어보기 전에 온몸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라니까. 정 모르겠으면 그저 선하고 건실한 느낌이 들면 돼. 빛과 그림자는 같이 있는 법이니,그저 세상 크게 흘러가는 거야. 요즘 같은 세상이야 라이프 사이클은 또 얼마나 빨라,알아들어?
뻥튀기:이 양반이 날 일자 무식 취급하네. 내가 나이프 사이클을 모를 줄 알고.
역술가:나이프 사이클 좋아하시네. (칼 휘두르는 시늉하며) 누구 칼 맞을 일 있나.
뻥튀기:(다가가서 오징어를 뜯어보며 역술가처럼 말한다) 그러고 보니 좋네 그랴.
오징어:뭐가요?
뻥튀기:인중이 훤해,부처님 같아.
오징어:제가요? 아주머니도 관상 봐요?
역술가:보긴 무슨 개뿔 같은 소리,그래 인중이 어딘데?
뻥튀기:(눈썹 사이 미간을 짚으며) 여기!
역술가:거긴 인당이야,(코와 입술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인중은 여기라고,여기.
회칠이 되어 드러나지 않는 이목구비를 회상이라도 하듯 얼굴 여기저기를 짚어보는 '뻥튀기'. 순간 깊은 정적이 잠시 흐른다.
행인 하나 등장한다. 회칠한 몸에 배낭가방을 메고 스포츠화를 신고 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이따금 음악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동작을 보이는 대학생 티가 나는 젊은이다(이하 '배낭가방'이라고 표기한다). 뻥튀기 과자 더미로 다가가자 '뻥튀기' 재빨리 원위치 한다.
배낭가방:뻥튀기 얼마예요?
뻥튀기:한 봉지에 천 원.
배낭가방:(들리지 않는지 다시 묻는다) 아주머니 얼마냐구요.
뻥튀기 : 그 빌어먹을 귀마개나 빼. (손짓으로 이어폰을 빼는 시늉을 하고,손가락 하나를 펴보이며) 천 원이라구,일 천 원.
'배낭가방' 오징어 판매대 쪽으로 가자,'오징어' 재빨리 원위치.
배낭가방:이거 한 마리에 얼마죠?
오징어:큰 건 이 천 원,작은 건 천 오백 원. 맛이 기똥차. 한 마리 구워줄까?
'배낭가방' 아무 대꾸 없이 '뻥튀기'에게 간다.
배낭가방:뻥튀기 주세요.
뻥튀기:좋지. 얘가 뭘 아네. 이런 날씨에 뻥튀기 먹는 맛이 최고지. 습기가 없어서 과자가 여간 바삭바삭하지 않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면 뻥튀기를 아그작아그작 씹어먹으며 그 따위 거 날려버려.
'배낭가방' 사라지고,'오징어'와 '뻥튀기'는 역술가에게 다시 모인다.
오징어:젠장. 코 묻은 돈 한 푼 얻자고 온갖 아양을 떨어야 하다니….
역술가:아줌마 매상 올렸으니,기분 좋게 뻥튀기 하나씩 돌려봐.
뻥튀기:미쳤어. 몇 시간 만에 뻥튀기 하나 팔았더니,두 개를 돌리라고? 내가 골이 볐지. (머리를 때려보는 시늉한다)
행인 하나 역술가 쪽으로 다가오자 대화판은 깨지고 각자 원위치.
회칠된 몸에 세련된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깐깐해 보이는 안경을 쓴 여성이다. 세련된 재킷을 입고 입술을 붉게 칠한 사무직 여성의 인상을 준다(이하 '핸드백'이라고 표기한다). 역술가 곁에 쭈그려 앉는다.
오징어:('뻥튀기'에게) 장사도 안 되는데 우리 자리나 옮겨봅시다. 공원 입구 쪽에서 만나요.
'오징어' 리어카를 끌고 퇴장한다. 무대 조금 어두워지고 역술가가 앉아 있는 자리는 더욱 밝아진다.
역술가:고얀 것들 같으니라고. 아가씨 미안허우. 자,보자. 육오년에다 가설라무네,(손가락을 꼽으며 한동안 종이에 끼적이고 난 뒤) 대운이 나가고 있어. 부모덕은 있지만 쩍하니 차려줄 만한 건 아니고,문기(文氣)가 서려 있어서 아가씨가 총명하고 미적 감각이 있는 데다 이렇게 예쁘게 빠진 게야. 스물 셋부터 대운이 온 걸 모르고 있었나?
핸드백:그걸 어떻게 알아요. 매일 야근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살다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했는데.
역술가:그래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구?
핸드백:카피라이터.
역술가:오호라,커피 끓여주고 라이터 불 붙여주는 일이라면,술집? 아니지 비서님이신가?
핸드백:아니에요! 이 아저씨 사람 우습게 만드네…. 광고 문안 만드는 사람 모르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여러분 부~자 되세요' 이런 광고 들어보셨어요?
역술가:알다마다.
핸드백:그게 다 카피라이터가 만든 거라구요.
역술가:아하. 요즘 세상에 하도 새로운 일이 많이 쏟아지니까 내 다 모르오. 이해하소. 하지만 운명이란 건 그런 사소한 변화들과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는 거니까. 어험,어디 보자. 남자들이 여러 명 들락날락하는군. 레퍼토리는 많은데 히트 곡이 없단 말씀이야. 성격은 참 좋구먼. 남들한테 싫은 소리 못하지,싹싹하지,끊고 맺는 게 확실하지.
핸드백 :남들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끊고 맺는 걸 확실히 할 수 있죠?
역술가:(당황해 한다) 바로 그거야. 너무 총명해. 남자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여자를 경계한다구. 아시겠어요? 알아도 모르는 척할 줄 아는 지혜. 그 지혜가 부족한 게 옥에 티지. 이 귓불이 백만 불짜리군.
핸드백:암담해요. 예전처럼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 자리 보존도 쉽지 않아요. 애나 기르면서 늙긴 싫고,모아놓은 돈은 없고,이러다 오갈 데 없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 아닐까요?
역술가:아가씬 수(水) 기가 전혀 없어요, 금(金)으로 가득차 있으니,수가 있어야 상생의 운세를 탈 텐데. 신장 쪽이 안 좋겠구랴. 수는 없는 데다 화(火) 기운이 여기저기 박혀 있어서 가문 논바닥처럼 몸이 타들어 가고 있는 형국이야.
핸드백:(흰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걱정스러운 듯) 이 몸에 그런 게 박혀 있어요? 어쩌면 좋죠?
'핸드백' 불안해하는 몸짓이 이어지는 동안 잠시 정적.
역술가: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고,혼자 살기가 어려운 시대니 만큼,대충 남자 하나 잡아서 애 낳고 살도록 해. 정 안 되면 몸이라도 주고 코를 확 꿰차라구. 여자의 일생이라는 건 성공해야 맛이 아니라,씨 뿌려서 자식 번창시키는 거 아니유.
거리화가(이하 '거리화가'라고 표기한다)가 등장해서 잠시 자리를 살피다가 '오징어'가 있던 곳에 자리를 편다. 회칠한 몸에 푸석푸석한 머리.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다. 연필로 그린 초상화 하나 걸어두고,손님용 간이의자와 이젤을 펼쳐놓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두 손을 쳐들어 구도를 잡아보는 등 다소 과장되게 까탈스러운 몸짓을 계속한다. 이윽고 진지하게 연필로 데생을 하는지 손놀림이 진지하고 바빠지는 '거리화가'.
역술가:나로 말할 것 같으면,자식이 다섯이오. 다 제 밥벌이는 하고 살아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평생 아니유. 그저 내가 이 우주의 주인이다 생각하며 아랫배에 힘 딱 주면 만사가 저절로 풀릴 거유…. (잠시 침묵) 아시겠소?
핸드백:(마지못해) 예.
'핸드백' 사라진다. 무대는 조금 더 어두워지고 적막하다. '거리화가'는 열심히 손을 놀리고,역술가는 꾸벅꾸벅 존다. 정적을 못 참고 좀이 쑤시는지 '뻥튀기' 뻥튀기 과자를 하나 조심스럽게 꺼내 소리 죽여 먹는다. 그러나 의외로 큰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는 순간,조명이 밝아진다. 뻥튀기 과자 먹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거리화가'가 '뻥튀기'에게 눈총을 준다.
거리화가:아줌마,소리나지 않게 먹을 순 없어요?
'뻥튀기' 의기소침해져서 과자를 내려놓고,동시에 역술가 잠에서 놀라 깬다.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거리화가' 신경질적으로 연필을 집어던진다. 한동안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듯 집중하고 있다가 일어나 연필을 주워 자리에 돌아와 정성 들여 연필을 깎는다.
거리화가:(연필 깎으며 자기암시를 하듯 말한다) 나는 박수근보다 위대하다. 나는 위대하다. 예술은 위대하다. 나는 사후에 유명해질 것이다. 나의 고통은 위대한 신화다. 세상은 어리석다. 나는 위대하다.
거리화가 말 없이 연필로 선 긋는 연습을 계속한다. 역술가 조심스럽게 거리화가에게 다가간다. 그때 '뻥튀기' 갑자기 뻥튀기를 소리내어 씹는다.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역술가:교양머리하고는…. 같은 계열의 사람끼리 나눠 먹기라도 할 일이지.
거리화가:(다시 자기암시를 되뇐다) 나는 위대하다.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물질의 깊이다. 고흐는 생전에 그림 한 장 팔지 못했다. 나는 하루에 네 장은 팔고 있다. 나는 위대하다. 정열은 만물의 어머니다. 나로 인해 세상은 다양해질 것이다. 나로 인해 세상은 부드러워진다.
역술가:이봐,젊은이. 복 달아나겠어. 중얼거리지 마,정신 사나워.
거리화가:(모른 척,오히려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진다) 물질의 한가운데는 영혼이 있다. 만물은 영혼으로부터 태어난다. 나의 손은 나의 영혼이다. 나의 개성은 죽음 위에 핀 꽃이다.
'뻥튀기' 뻥튀기를 미친 듯이 마구 소리내어 먹는다. '핸드백' 헐레벌떡 등장해서 역술가에게 다가간다.
핸드백:아저씨 제 핸드백 보셨어요?
역술가:핸드백? (자기 자리를 둘러보고 나서) 어,저거야?
핸드백:아,저기 있구나. 십년 감수했네. 아저씨 고마워요.
역술가:젊은 색시가 정신을 어디 두고 다녀….
'핸드백' 거리화가의 앞을 지나가다가 걸려 있는 초상화를 보고 호기심이 동했는지 곁으로 다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한다. 거리화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몸짓을 서서히 보인다.
핸드백:선생님은 한눈에 예술가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요. 저는요,예술만이 이 갑갑한 세상을 아주 예쁘고 빛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걸랑요. 선생님처럼 고고하신 분들이 살아있는 한,뭐라고 할까….
'뻥튀기' 심술이 돋은 듯 뻥튀기를 와작 씹어 소리를 크게 낸다.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쳐다본다.
핸드백:(눈살을 찌푸리며) 어휴,몰상식해. 이건 예술에 대한 모욕이야. 모욕. 열심히 먹은 당신 떠나라!
역술가:신경 끄시죠. 우리 계열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리화가:(핸드백에게) 아가씨,제 모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핸드백:(좋으면서도 마지못해) 제가 좀 바쁘걸랑요. 빨리 그리실 수 있으시다면 잠시….
거리화가 열심히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핸드백:세상 사람들 눈이 제법 높아진 것 같아요. 요즘 들어 부쩍 왜 이렇게 귀찮게들 구는지 몰라요. (남자 목소리 흉내를 내며) 차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피부가 어쩌면 그렇게 백옥같이 하얗습니까,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그 가슴에 뻥 넣은 건 아니지요?
뻥튀기:(딴전 부리다가 귀가 솔깃한 듯 쥐고 있던 뻥튀기를 흔들어대며) 뭐? 뻥을 넣어?
거리화가:('핸드백'의 말에 무신경한 채 손을 놀리며 중얼거린다) 내 손은 빛보다 빠르다. 뛰는 가슴은 초원을 질주하는 야생마. 아아 형식을 거부하는 영혼이여. 색은 존재의 가장 바깥쪽을 맴돌고 있다.
핸드백:그게 무슨 뜻인가요?
역술가:다 헛소리야.
거리화가:(열에 들떠 있다) 가라. 나는 내 영혼의 나라로 가라.
사이.
거리화가:자,다 됐습니다.
'핸드백' 그림을 받아든다. 그러나 종이에는 아무 것도 그려 있지 않다.
핸드백:(백지를 바라보며) 이야,아저씨 정말 죽인다. 어머머 황신혜를 갖다가 복사 떠도 이렇게 안 나오지. (거리화가 목소리를 흉내내며) 색은 존재의 가장 바깥쪽을….
역술가:어디 봅시다. (요란스레 그림을 뜯어보며) 이건 피카소 저리 가라다.
핸드백:그쵸? 선생님 저 이거 가져도 돼요?
거리화가:그럼요. 가만,사인을 해드리죠. 잘 보관하십시오,머지않아 큰돈이 될 겁니다.
핸드백: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쩌죠,바빠서. 다음에 꼭 들러서 보답할게요. 고마워요 선생님.
'핸드백' 사라진다.
역술가:(사라지는 '핸드백'의 뒷모습을 보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다산형의 둔부군. 죽인다. 오긴 뭘 와. 사요나라지. 그나저나 내가 사주를 잘못 본 건가? 육오년 팔월 십오일 술시에 태어난 여자가 저렇게 엉덩이를 흔드는 일은 없을 텐데…. (화가 옆에 걸려 있는 잘 그려진 초상화를 보며) 명작일세 그려. 표정이 섬세하게 잘 그려졌어.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이 험한 세상에….
역술가 제자리에 앉는다. 세 사람 무료하게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 정적과 함께 조명이 차츰 어두워진다. 서로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충분히 어두워졌을 때 '뻥튀기'가 뻥튀기를 한입 소리내어 씹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그쪽으로 눈길이 쏠린다. 암전.
사이.
어둡고 텅빈 무대. 가로등만이 서서히 밝아져 정점에 이른다. 행인 하나 신문을 말아 쥐고 맥없이 무대를 가로질러 간다. 온몸은 회칠이 되어 있고 회칠이 되어 있지 않은 상의,넥타이와 안경,정장구두가 사무직 샐러리맨의 이미지를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펼쳐든다. 무엇인가 심각한 기사를 읽은 듯 신문을 덮고 낙심해 한다. 잠시 후 신문을 바닥에 내던지며 일어나 생각에 깊이 잠긴 듯 자리에서 맴돌다가 멈춰 선다.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서서히 무대가 어두워진다. 사람이 어렴풋이 보일 즈음에 가로등의 어두워지는 속도가 정지된다. 잠시 후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조금 밝아지다가 다시 급속히 꺼지는 가로등. 암전.
사이.
서서히 밝아진 무대 중앙 불전함 앞에서 스님이 배를 올리고 있다. 회칠한 몸에 승복을 걸쳤다.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기도 한다. 이후 스님은 특별한 지시가 없는 경우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적당한 시점에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거나 배를 올린다. 무대 한쪽에는 역술가 판을 벌여놓고 졸고 있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등장해 커다란 보따리와 낡은 큰 여행가방을 끌고 와 스님을 가운데 두고 역술가의 반대쪽에 물건을 풀어놓는다. 회칠한 몸에 다소 화사한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여자(이하 '고물상'이라고 표기한다)가 풀어놓는 물건은 중고 옷 등 벼룩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핸드백' 등장해서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다가 벤치에 앉는다. 손에 들고 있는 그림 펼쳐들고 음미하다가 스님에게 다가간다.
핸드백:스님,스님. 아니 이 양반 귀가 먹었나. 중생이 부르면 돌부처도 돌아본다던데… .
스님은 들은 척도 안 한다.
핸드백:스님,이 근방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 혹시 못 보셨어요?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 넋이야 있고 없고(2)
/장경린/
스님:(목탁을 불전함 위에 올려놓고 땀을 닦으며) 그래 무슨 일이오. 내게 볼일이 있소?
핸드백:장발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그림 그리는 화가를 찾고 있걸랑요.
스님:장발이라면,난 명함도 못 내밀겠군.
핸드백:내가 찾는 사람은 이 자리에 있던 화가라구요. 스님이 쫓아낸 건 아니죠?
스님:몸이 불덩이처럼 달았군.
핸드백:뭐라고? 이 냉장고 같은 아저씨야.
스님:이봐요 아가씨,말투가 게 뭐요. 애가 있었으면 당신 같은 딸이 있었을 어른한테.
핸드백:어른 좋아하시네,아유 재수 없어.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그 물건 밑에서 나올 정도는 아니네요.
스님:예끼 이 년,보자보자하니. 썩 꺼지지 못해!
'핸드백' 도망치듯 사라진다. 스님의 고함소리에 놀라 역술가 잠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책을 펼쳐들고 스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공부를 하는 척한다. 잠시 후 분위기 파악이 끝난 듯 역술가 '고물상'에게 다가간다.
역술가:야 만물상이네.(메트로놈을 추켜들며) 무슨 시계가 자판도 없이 길쭉하나.
고물상:무식하긴,그건 음악할 때 쓰는 아주 중요한 기계요. 일제 세이코인데 유명한 음악가가 쓰던 귀한 거요. 정명훈이 쓰던 거라지,아니 이미자든가.
고물상 메트로놈을 작동시켜 놓자,다소 빠른 박자로 똑딱거리기 시작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깔리는 메트로놈 작동소리는 침묵이 깔리는 동안에는 무엇인가 진행되는 듯한 상징적 청각효과를 자아내도록 배려한다.
역술가:이거 얼마요?
고물상:오만 원,사만 오천 원까지 가져가요.
역술가:이런 고물을 몇 만원씩이나 받아먹다니.
고물상:고물이라니,이건 고물이 아니라 골동이오,골동. 국민가수 이미자가 쓰던 거라니까. 섬마을 선생님,기러기 아빠 같은 명곡들이 이 기계와 함께 만들어졌다는 거 아닙니까. 눈 딱 감고 사둬요. 몇 년 지나면 집 한 채 값 나가는 골동이 될테니.
역술가 :골동 좋아하시네, 이걸 사는 놈이 꼴통이지.
고물상:아직 개시도 못했는데 어디 와서 침 튀기는 거야 정말. 소금 뿌리기 전에 썩 꺼져요.
역술가:농담 좀 했기로서니,야박하기는.
고물상:야박이 아니라 맞아도 싸지. 이 물건들도 한때는 삐까번쩍하던 것들이오. 세월이 흘러 이제 박물관으로 가느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느냐 기로에 서 있는 거 뿐이지. 개 밥그릇으로 쓰던 우리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명품 찻잔으로 거래된다는 소리 들어는 봤어요?
역술가:하긴. (낡은 양복 상의를 걸쳐보며) 괜찮네,이건 얼마요.
고물상:구천 원.
역술가:백범 김구 선생님이 입으시던 골동 아냐?
고물상:누구 약올리는 거요?
역술가:내가 입던 골동 벗어 줄 테니 이천 원 깎읍시다. 옛수. (돈을 건네주고 상의를 갈아입으며) 그럴 듯한데.
회칠이 된 옷을 벗고 위아래 짝이 맞지 않는 낡은 옷을 입자 우스꽝스럽지만 색상이 있는 옷을 입어 한결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인상이 드러난다. 역술가 신나게 고물들을 뒤적이다가 자신이 쓰고 있던 회칠된 모자도 정상적인 모자와 교환한다.
역술가:거울 있으신가?
고물상:훤하시네,마카오 신사 같아. 거울이 필요 없다니까.
역술가:그래? 그 대가로 내가 아줌씨 사주 봐줄 테니 오천 원만 내슈.
고물상:헌 옷 하나 판 돈 되돌려 달라고?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당신한테 돈 흘리느니 불우이웃이나 돕겠소.
'고물상' 일어나 스님에게 다가가 시주하고 돌아온다. 시주하는 동안 스님 신명나서 목탁 두드리다가 '고물상' 돌아가자 일손 놓듯 기지개를 켜며 쉰다.
역술가:사람 기죽이는 법도 여러가지군. 돈이 남아 돌아가도 유분수지. 저런 백수한테 내 돈 갖다 바칠 건 뭐야.
고물상:남이사.
역술가:정머리 떨어지게 말하네 그랴. 내가 인심 썼다,공짜로 봐드리지.
고물상:일 없다니까 왜 그래요.
역술가:아무렴,일이 없으니까 이런 장사나 하고 있는 거지. 가만 목소리는 제법 윤기가 흐르네 그랴,한창 때는 남자깨나 울렸겠어. 어디 마이크 테스트나 다시 해봅시다. 따라 해보시게. 마이크 실험 중입니다,하나 둘 셋,고물이나 다 떨어진 구두 팝니다.
고물상:(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역술가:자,어서 해보라니까 마이크 실험 중입니다,하나 둘 셋!
고물상:야 열 받네.
역술가:(빈정대듯 귀기울이는 척) 묘하지,말은 사나워도 목소리에는 제법 뿌리가 내려 있단 말씀이야.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초년 운이 녹록치 않았을 텐데 무슨 우여곡절 있으오?
고물상:(한동안 침묵하다가 애잔한 목소리로) 여자 운명이란 게 남자 인연따라 피고 지는 거 아니겠소. 길게 묻지 말아요.
역술가:하긴. 아버지,남편,아들 팔자따라 삼복에 개 헐떡거리듯 따라 다니는 게 여인네 운명이지만서두. 임자나 나나 거쳐온 세월이 빡빡하니 그게 어디 사람 운세라고 하겠소,시대운이지. 사람이야 이 땅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인데.
고물상:가요,돌이키기 싫으니….
역술가:고개를 숙인다고 하늘이 사라지나. 한 사람의 운이라는 게 가운(家運) 밑에 있는 거고,가운이라는 것도 하늘 같은 국운(國運) 밑에 있으니,누구 탓이랄 것도 없는 게요. 계절따라 흘러가며 마음 턱 놓고 있다보면 뱀이 허물벗듯 오행(五行)이 돌면서 운세가….
고물상:(말을 자르듯) 가소.
역술가:(짠해져서) 가네.
역술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잠시 후 회칠한 몸에 하얀 쇼핑백을 든 아줌마 등장한다. 치마와 스카프만이 회칠되어 있지 않다. 무대를 가로질러 가다 고물상에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골라든다.
아줌마:이거 다 해서 얼마죠?
고물상:삼만 육천 원인데,삼만 삼천 원만 내요. 파장이라 거저 주는 거지.
아줌마 : 짧게 끝냅시다.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이며) 삼만 원!
고물상:이거 밑지는데… 에이 기분이다,좋소. 가져가슈.
아줌마 흥정이 끝나자 자신이 걸치고 있던 회칠된 것들을 벗어 건네주고 골라 든 정상적인 것들과 바꿔 입는다. 쇼핑백을 버리고 골라 둔 가방을 바꿔들자 전보다 훨씬 사실적인 인상으로 바뀐다. 자신의 변한 모습에 무척 만족해하며 간다.
아줌마가 불전함 쪽으로 다가가자 얼른 자리를 잡고 목탁을 세게 두드리며 배를 올리는 스님. 그녀가 불전함에 시주하고 사라지자 스님은 목탁을 내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딴짓이다. 고물상 좌판의 한 부분은 이제 회칠된 물건들이 제법 쌓여있다.
잠시 후,'핸드백' 등장해서 고물상 앞을 지나치다가 되돌아가 스카프,선글라스,구두,셔츠 등을 골라 회칠된 자신의 것과 바꿔 걸치니 훨씬 더 발랄하고 사실적인 인상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가발도 하나 걸친다.
핸드백:아줌마 저 어때요? 캡이죠?
고물상:그러엄. 그래 보여두 다 째야. 국산하고는 때깔 빠진 게 전혀 다르다니까. 착용감도 다를걸.
핸드백:글쎄,(몸을 빌빌 꼬아도 보고 춤추듯 사지를 건들거려 본다. 외국인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말도 버터 칠이 돼 있다) 오우 예! 입어보니 정말 다른 것 같습네다. 얼마죠?
고물상:칠만 원만 내.
'핸드백' 셈을 치르고 간다. 열심히 배를 하고 있는 스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 앞을 지나칠 때는 얼굴을 모로 꼬고 발걸음을 살살 떼며 유난스레 조심스럽다. 고물상의 물건들은 이제 완전히 회칠이 된 것들로 가득하다. '고물상' '핸드백'의 야한 걸음걸이가 부러운 듯 흉내내 보다가 자리에 앉는다.
핸드백:(역술가에게 다가가) 야 아저씨,근사해지셨다,저 기억하시겠어요?
역술가:(엉덩이를 흔들며) 하다마다. 다산형 둔부님,아가씨도 화색이 도는 게 인물이 훤해졌구랴.
핸드백:훤해지긴요. 화가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이제 보니 영 돌팔이셔. 그나저나 어딜 가셨나….
역술가:글쎄,그러고 보니 통 나타나지 않는구랴. 승천하셨나?
핸드백:말장난하지 마세요. 이러다 저 상사병 걸리겠어요.
역술가:상사병이 아무나 걸리는 게 아니오. 천년지기 인연 정도는 되어야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거지. 근데 자네 지난번 나한테 직업이 코피 라이터라고 한 거 거짓말 아니여?
핸드백:제가 어때서요? 그래요,사실은 길 건너 업소에 나가요. 놀러 오세요. 가방끈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그 길로 갔을 거라는 말이지….
역술가:쳇,빤스 끈이 너무 느슨한 뎁쇼?
핸드백:뭐라구요?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핸드백' 뒤쫓자 역술가 도망가다가 배를 올리고 있는 스님 뒤로 숨는다.
스님:뭣들 하는 짓이오. 네 이년,또 나타났어. 돼 먹지 못한 버릇 내 오늘 요절을 내고 만다.
'핸드백' 달려드는 스님을 피해 이제는 역술가 뒤로 숨는다. 서로 뒤엉켜 몇 바퀴 맴돌며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다가 '핸드백'이 스님에게 덜미 잡힌다.
스님:잘 잡혔다! 이 엉덩이에 뿔이 난,바람 난 암소 같은 년.
역술가:아 아 성직자가 이럼 돼나. 스님,참으시죠,자 자 참으시라니까.
핸드백:성직자 좋아하시네,대머리 백수건달이지.
역술가:아가씨가 나빠,입을 너무 험하게 놀리는 경향이 있어.
스님:저게 입이오? 주둥이지.
핸드백:내 입이 주둥이면 당신 입은 아가리다!
역술가:아가씨 입 닥쳐. 여자가 구업을 잘 쌓아야지. 배추벌레가 배추색으로 자신을 감추듯이,어쨌거나 말은 곱게 해야 해.
핸드백:그런 말은 저 성직자에게나 하시죠.
스님:난 치사하게 보호색 같은 걸 지니지 않소.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머리를 보오,대자연 그대로지. 화학염료로 절여놓은 저 머리 봐,천박하게스리.
핸드백:고리타분한 소리 그만해요. 몸에 걸친 거 죄다 벗겨놓고 보면 사람이 짐승하고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내 몸 내가 알아서 물주고 가꾸는 데 아저씨가 보태준 거 있어요. (역술가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쵸,선생님?
역술가:말 되네.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당신이야 멋을 낼 조건이 아니지만,요즘에는 남자들도 취직하려고 성형수술을 하는 판인데 여자가 지지고 볶는 거야 당연하지. 얼마나 멋있어. 섹시해 보이는 게 괜찮지 않수? 속세를 살아가는데 이 정도야 예의지,예의.
스님:포장해봤자,속은 텅텅 비었을 텐데.
역술가:마음 비워라,속 비워라,잡은 걸 놔줘라,이 모두가 부처님 말씀 아니오. 당신 화두도 공이라며. 우리와 같은 계열이 아니니 냅둡시다.
핸드백:언제는 같은 계열이라고 하더니… 말 바꾸네.
역술가:그리고 아가씨만 해도 그렇지,그 머리가 뭐야. 내 딸년 같았으면 머리털을 죄다 뽑아버리고 싶어. 이 색 저 색 바꿔가며 지지고 볶아봐야 남자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구,이것아.
핸드백:어떻게 보이길래요?
역술가:어떻게 보이느냐…. 그야 머,머,멋있지 뭐.
스님:(역술가를 흘겨보며) 같은 계열이 아니군.
핸드백:나를 알아보시다니 역시 계룡산 쪽집게야. 쪽집게답게 화가 선생님이 어디 있는지 콕 찍어 찾아주세요.
역술가:아까 일러줬잖아 승천하셨다구. 인연은 가까운 데 있다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게 사람이라며. 나처럼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이 속은 짱짱하다구.
핸드백:장난이 아니라니까요,난생 처음 느끼는 아아….
역술가:그 친구 복 달아나는 소리를 듣고 있다보면 나는 정신이 완전히 쑥 빠져나가는 것 같던데…. (화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나는 위대하다,가난은 물질의 높이라고 할 수 있다,물질의 깊이라고 했던가? 아무튼,나로 인해 세상은 다양해질 것이다,영혼은 형식을 거부한다,색은 존재의 가장 바깥쪽을 맴돌고 있다,가라,나는 내 영혼의 나라로 가라.
스님:그게 무슨 뜻인데요?
역술가:다 헛소리야.
스님:반야심경처럼 들리네. 색즉시공 공즉시색.
핸드백:그렇죠? 스님,우린 같은 계열인가 봐요.
스님: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우린 이제 한 몸이나 다름없어. 색즉시공!
스님 '핸드백'을 서둘러 끌어안는다.
역술가:떨어져! 떨어져! 어서,떨어지라구! 이 여잔 내 여자야. 당신은 빠지라구!
스님:무슨 소리.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하나가 된 사이요. 당신 같은 골동하고는 차원이 달라! 저리 비켜, 그 손 떼!
역술가:지금 당신은 성직자로서 이상한 선을 넘고 있는 거야,알기나 알아! 난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여자를 사랑했소. 떨어져!
핸드백:그만해요. 김칫국 마시지 말고,이 손들 치우지 못해요!
서로 떨어뜨려 놓으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핸드백' 손에서 그림이 바닥에 떨어진다.
핸드백:어머,내 그림.
역술가:(그림을 주워 펼쳐들며) 아니 이게 누구야.
그림에는 백지에 불과했던 전과는 달리 여자 얼굴이 제대로 그려져 있다.
스님:(다가와 그림을 보며) 백문이 불여일견일세. 낙장불입이야.
역술가:이게 댁이유?
핸드백:그럼 누구겠어요.
역술가:이게 무슨 조화야. 전에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니었어. 그 작자가 백지로 그려냈다구. 그래서 난 생각했지. 아 이 아가씨의 내면을 그린 것이겠거니,생긴 건 밀가루 반죽 통에 빠진 생쥐 같아도 속은 맑고 깨끗하겠거니….
스님:속이 아니라,('핸드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고,겉이 그래.
핸드백: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 나무라네. 벗고 보면 저도 한 미모 한다고요.
역술가:얘가 순진한 총각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림을 보며) 이런 얼굴은 아주 옛날 지기와 천기가 어우러지던 시절에나 있을 법한 골동이지. 우리 같은 물건들이 지기를 받겠어 천기를 받겠어.
핸드백:개똥철학이다.
역술가:이 그림을 그 작자가 정말 그렸다면,내 눈에 장을 지져라,장을.
스님:(역술가의 눈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공!
역술가: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스님:내 이십 년간 들고 있는 화두가 빌 공자 공이오. 삼라만상이 다 우리 오관의 장난이지 본체는 없단 말이오. 당신의 그 검은 눈동자도 간장에 절여진 콩장 같은 것. 공!
역술가:공돈 좀 벌더니 공,공,공 배부른 소리 하는구랴.
스님:(그림을 넘겨받아 들고 뒤집어 보이며) 보소,이 백지를 보라구.
모두 다가가 스님이 뒤집어 보인 백지를 놀라서 본다.
역술가:맙소사. 미안허이,내 눈동자야 이미 콩장 같은 건데,또 다시 장을 지질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핸드백:(역술가를 향해 스님 흉내를 내며) 콩!
역술가:무슨 뜻이오. 그건,내 눈에 장을 지지겠다는….
핸드백:내 사랑 찾아내면 봐주겠다는 뜻.
역술가:내 실력으론 안 되겠소.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스님에게) 당신이 빽 좀 써보오.
역술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따라 눈길이 모두 위로 서서히 움직인다. 하늘이 거부한다는 뜻처럼 조명이 다소 어두워진다.
스님:쑥스럽구먼,이럴 줄 알았지. 내 평소에 수도를 게을리한 탓이야. 어지러운 세상이니만큼 돌팔이지만 콩장 같은 당신 눈이 더 밝겠소.
역술가:어쩔 수 없군.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으며) 오늘이 가설라무네,경자에다 신축 임술로 빠지니까,금생수 수생목,으흠,맞아,동쪽으로 가야겠군. 자 갑시다.
세 사람 짐을 챙겨들고 사라지면 더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밝아진다. 무대에는 회칠된 물건 앞에 웅크리고 앉은 고물상만 남아 있다. 정적 속에 메트로놈의 째깍이는 소리 사뭇 크다. 잠시 후 암전.
사이.
어두운 무대에 가로등만 켜 있고,거리의 소음이 사실적으로 적당하게 깔려있다. 가로등 주위에 전혀 회칠하지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의 여자행인1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누군가 기다리듯 서성이며 시계를 들여다보기도 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때 '거리화가'가 종전의 모습에 소도구 없이 등장하여 무대를 천천히 가로질러 여자행인1 앞을 지나 벤치에 앉는다. 여자는 가까이 스쳐 지나가는 거리화가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후 여자행인1은 회칠한 등장인물들이 마치 혼백 같은 비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개의치 않는다.
'거리화가'는 벤치에 앉아 주위를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 잠시 후 몸과 옷을 완전히 회칠한 남자행인1이 등장해 여자행인1을 가로질러 간다. 무대 가운데서 무엇인가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거리화가'에게 다가간다.
남자행인1:저,지하철역이 어느 쪽입니까?
거리화가:이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생각난 듯) 불 있습니까?
남자행인1:(라이터를 꺼내주며) 예.
거리화가:(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감사합니다.
남자행인1 사라진다. '거리화가' 담배 피우는 연기가 무대에 자욱하다. 잠시 후,회사원 같은 남녀가 등장해서 무대로 가로질러 지나간다. 두 사람 모두 몸에 회칠을 하고 옷과 신발,장신구 등은 적당히 회칠된 상태이다.
남자행인2:존심 상하는 말 골라서 하네.
여자행인2:그게 어디 존심까지 상할 일이야? 그저 있는 그대로 하는 말인데. 넌 새장 속에 갇혀 사는 새 같아. 문을 열어주어도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위인이야. 그렇게 살다 가도 괜찮겠어? 인생이 아깝지 않아?
남자행인2:우리 회사 사장이 비서하고 놀아나면서 망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김과장이 다 둘러댄 얘기야. (갑자기 재채기한다) 에에에에엣 취. 난 우리 회사를 사랑해. 어떤 음모가 깔려있는 거 같아.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덤핑을 치거나,돈줄을 막은 게 분명해. 에에엣 엣 취.
'거리화가'는 재채기 소리가 날 때마다 놀라 행인들을 쳐다본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여자행인1은 전혀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여자행인2:주제에 회사를 사랑해? 순진하긴. 나이 값을 해야지. 자기 나이에 정일권이는 참모총장을 했어. 참모총장.
남녀행인 사라진다. 남자행인2 거의 퇴장할 무렵 재채기 한 차례 더 한다. '거리화가' 재채기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자행인1은 주위와 아랑곳없이 시계를 꺼내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이다. 한동안 배경으로 깔려있는 거리의 소음이 마치 살아있는 실체인 양 무대를 이끌어 간다. 차동차 오가는 소리와 호객하는 소음들 속에서 대화 소리가 점점 커져서 선명하게 들린다.
소리(남):참았다가 바겐세일 할 때 사지,돈이 쌨어.
소리(여):사이즈 맞는 게 흔치 않잖아. 그리고 철 지난 뒤 사서 한 철 묵히는 비용이 더 크지 않아? 이거 봐 레이스는 또 얼마나 예뻐.
소리(남):아무튼 살을 빼든가,이혼을 하든가 가부간에 양자택일 해.
소리(여):이 양반이,목소리 좀 낮춰. 창피하게 거리에서 무슨 망신이야.
소리(남):나도 섹시한 여자 한 번 안아보자. 니가 살을 빼봐라 악어가죽으로 속옷을 맞춰 입어도 나 아무 말 안 해.
한동안 소음이 계속 깔린다. '거리화가' 일어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끄고는 여자행인1을 가로질러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