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세계에 녹아든 중용(中庸)의 미학
- 이순금 첫수필집 《그물》을 중심으로
金善化/ 수필가·시인·청소년문학가
1. 들어가며
2. 위트로 접근하는 사색의 의미망
3. 사회를 향한 풍자와 내면 들여다보기
4. 유년기의 애틋한 서사에서 묻어나는 문학적 가치
5. 나가며
1. 들어가며
마음 가라앉혀 글을 읽다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글쓴이가 보이고, 글쓴이를 가만히 마주하다 보면 언행에서 넌지시 그의 글이 읽힌다. 특히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문학에 있어서이랴. 여러 가지 수식어를 거론할 필요 없이, 글 쓰는 사람을 독립된 그릇에 비유하면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그릇의 외형이나 질감은 곧 그 사람, 수필을 담아내는 이의 인품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작가 개인이 빚어내는 문체 하나하나는 외적으로 묻어나는 그 사람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우리들은 어느 작가가 어떠한 문장을 형성해내는지 예의 주시하며 기대를 걸게 된다. 그것은 각기의 그릇에 채워진 내용물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그 내용물에는 글을 글답게 하는 미학이 들어있다.
등단 5년 만에 첫 수필집을 엮은 이순금 수필가는 습작기부터 헤아리면 그 시간이 결코 녹록치 않다. 그 후 건실한 문체로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제2수필집 《물을 토하는 화공》을 출간해 문학적 위상을 정립한 시점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다시 한 번 짚어나가려 한다.
2. 위트로 접근하는 사색의 의미망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와 관련된 시대적 지형적 배경을 따라가 보란 말이 있는데, 작가 이순금은 충청도 온양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그런 연유인지 그의 수필에서는 종종 잊혀져가는 마을꾼들의 이야기였음직한 소재가 등장해 흡인작용을 한다. 그 두런두런 펼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밤이 이울고 날이 밝아올 것 같다. 그럴 즈음이면 얽히고설킨 삶의 꾸리들이 시나브로 풀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토속적 향수 때문이리라. 농촌의 봄철정경이 물씬 묻어나는 재미있는 글을 보자. 문학의 요건 중에 필요한 반전의 묘미가 한껏 살아있다.
어제까지 연둣빛이 아른거리던 못자리판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죽-죽- 사방으로 밀고 다닌 자국에다 볍씨는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부초의 신세가 되어 물위로 둥둥 떠다녔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흙탕물이 덜 가라앉았다. - 상상의 비약이 절정에 이를 때 나는 흙탕물 속에서 반짝이며 움직이는 눈망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또 옆에 두 눈을 꿈벅이며 몸을 꿈틀대는 놈들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등위에 올라 앉아 짝짓기를 하기도 하고 물속에 몸을 숨긴 채 망을 보기도 했다. - 밤새 평화롭게 불러대던 그 ‘개굴가’의 무대가 우리 집 못자리판이라니 기가 막혔다.
-‘개구리의 신방’ 中에서
논농사의 밑천인 못자리판을 그리 만들었으니 얼마나 기가 찼을까. 한데 범인이 개구리란다. 그것도 사랑가를 부르며 종족번식을 위해 사력을 다한 그놈들이란다. 여기서 예상 밖의 위트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아마 일을 낸 자가 사람이었더라면 원성이 하늘에 닿았을 터인데 기껏 개구리라는데 어쩌겠는가. 더구나 작가의 어머니는 가정경제를 도맡다시피 하여 여장부기질이 탁월했던 바, 그대로 묘사된 입담을 통해 우리는 재차 웃게 된다. 아울러 논이 품고 있는 희망을 엿보게 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에 의한 구성 덕이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잊은 채 망연해 하였다. 그리고 체념한 듯 한마디 뱉으셨다.
“참, 고놈들도 풍수쟁이를 따라다녔나벼. 워~찌 명당자리는 알아가지고서 내 논에까지 와 신방을 차리고 지랄들여! 올핸 새끼는 원 없이 치것구먼. 니들도 어젯밤에 지은 죄가 있으니 똥은 반드시 내 논에 와서 싸거라. 알것냐?”
하고는 논둑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해 논농사는, 모자라는 모를 이집 저집 동냥을 해다 심었다.
-‘개구리의 신방’ 中에서
‘내 손안에 있소이다’는 봄철 쑥떡반죽을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글이다. 양푼에 갈은 쑥을 붓고 그 위에 얼개미로 쌀가루를 쳐서 내려놓았단다. 거기서부터 일은 비롯되는데, 수북이 쌓인 흰 가루를 눈으로 묘사한다. 생명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태초의 신비가 서려 있다며 빙하기로 나아가는데, 형상화에 비범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물 주전자를 들고 산꼭대기에다 줄줄 부어본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 내려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낮은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려 한다. 아직 추운 빙하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금방 얼어붙는 듯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 한 움큼을 쥐고 잡아당겨서 바라본다. 녹색이다. 그 속에 생명이 숨어있다. - 나는 다시 열손가락으로 중앙의 대륙을 뒤집어본다. 푸른 평원도, 오대양 육대주가 내 손아귀에 들었다. - 빈부와 인종의 대립과 재난의 각기 다른 색깔들을 한데 버무려서 오직 녹색으로 만들려 한다. 딱딱하게 뭉치지 않고 얼룩얼룩 소외된 곳 없이 정성을 다해 주무르고 있다. 지구에 물이 모자라도 흠이요, 넘쳐도 흠인 것처럼 물 관리를 적당히 해가면서…. 마침내 둥근 모습의 큰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中에서
이 글을 읽고 나면 여인네들이란 일상 속에서 지혜를 얻는데 명수라는 것을 실감한다. 작가는 동글납작하게 만든 쑥개떡을 찌며 투명한 뚜껑을 통해 익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서먹서먹하게 모여서 녹색이라는 합일을 어렵게 이룬 재료들이 열을 가하자 점점 끈기 있게 뭉치는데, 감내(堪耐)의 시간이 흘러간다고 표현하며 함께 힘을 모아야 새롭게 변할 수 있음을 터득하고 이를 의미화 한다. 그러면서 거기엔 어떤 차별이나 이색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가 되어 녹색의 찬가를 부르고 있더라는 인정을 보여준다.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에서 사람과 사람사이는 물론 오대양 육대주까지 화해와 화합으로 버무려내는 솜씨가 신선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정신적 순환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 순환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그만큼 작품세계도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글은 이순금 수필가의 정신적 경계가 어디인지 가늠해보게 하는 글이다. 베를 짜던 여인 필녀와 연관된 약수터를 찾아가 뜻밖의 신비를 체험하는데, 계곡에 흐르는 물에서 영험성과 성스러운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하물며 유년에 그린 그림 속 풍경과 닮아있었다고 속삭일 때는 강한 흡인작용을 한다.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에 도화지에 연필로 몰두해서 그린 적이 있었다. 내가 미래에 꿈꾸는 집이었다. 푸른 솔밭에 맑은 물이 흐르는 평평한 곳에 입 구(口)자 모양의 기와집을 그렸다. - 나지막한 툇마루를 다 돌려서 짜 넣고 사방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마지막엔 낮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위에 얹었다. 이 그림은 인도 가비라국의 실달태자의 사시전(四時殿)을 상상하며 축소해서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와 흡사한 장소를 만나지 못했고 그런 집을 마련하지도 못했다. 필례약수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낯익은 풍경에 흠칫했다.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아냈다. 자연은 흡사한데 건물이 다르고 정원이 달랐다. 이건 나만의 비밀이었고 내 어릴 적 꿈의 편린이었다.
‘필례계곡’ 中에서
누구나 위와 같은 체험을 한 바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자신도 모르게 전율이 일어나리라.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작가 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세계의 절정을 보았다. 그 기점은 타인이 허투루 넘볼 수 없는 지극히 고유한 또 하나의 우주라 하겠다.
환한 달빛 속 버들가지 사이로 얼핏 스치는 것이 있다. 검은머리 길게 묶어 내리고 야윈 듯 흰 얼굴에 소박한 남부여의 여인이다. 그때는 작은 방죽이었을 이곳에서 달빛을 따라 홀로 거닌다. 다리도 쉴 겸 그녀는 버드나무에 기대서서 그 달을 보며 수줍게 웃고 있다. 그 무렵 잠 못 드는 사람이 있었다. - 천년의 세월로 날줄을 삼고 흥망과 성쇠로 씨줄을 삼아 짠 옷을 우리는 입고 살고 있다. 지금 이곳에 모여 슬픔과 기쁨을 같이 느끼고 있다. 선조들의 허와 실을 물위에 비춰보면서.
-‘방죽가에 살던 여인’ 中에서
백제가 낳은 서동의 어머니를 다루는데 있어 작가의 시선은 여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를 심어 생계를 유지했다는 장(璋) 모자에게로 연민이 실린다. 따라서 이 시대 만연한 사회상을 풍자한다. 훗날 그녀의 아들이 왕위 계승자로 책봉되지 않았다면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을 여인이라고 방죽가에 살던 여인을 품어버린다. 넉넉한 인정이 배어난 작품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그물이 있다고 술회하는 작가는, 이것이 상대를 구속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보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일갈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그물을 가지고 있으며, 형태가 다를 뿐 먹이를 위해 어느 곳에든 펼쳐놓는데 시장에도 빌딩숲에도 가는 곳마다 누군가의 그물이 있다는 말로 설득력을 보인다.
도리천 하늘을 덮은 그물인데 그물의 매듭마다 수정구슬이 달려있다. 그 구슬마다 모든 세계가 다 비추인다고 한다. 세상의 물질이나 생명들이 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석류나무 사이의 작은 거미집에도 한로(寒露)가 지나면 영롱한 이슬이 맺힐 것이다. 하늘의 인드라망처럼 유리구슬이 송송 매달리면 그 속에 또 다른 모습들이 분명 들어가서 비치게 될 것이다.
-‘그물’ 中에서
석류나무 가지사이의 쌀알만 한 몸집은 거미의 행위를 지켜본 표현이다. 거미의 십자문 그물에서 시작해 하늘의 인드라망에까지 접근한다. 이는 의식이 무한대로 열려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어서 그는 어부가 던지는 그물엔 물고기가 잡히는데, 생존관계에서 치는 그물은 무엇을 막아내기 위한 그물이 있고 무엇을 얻기 위한 그물도 있다고 해석한다. 자신은 물론이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주변의 수많은 그물에 대해 의문을 던져주는 문학의 효율성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그의 글은 결코 가볍지 않고 무겁지도 않다. 어떠한 소재든 진지하게 다가가 섬세히 풀어내는데, 그 과정에서 위트가 번뜩이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전체 44편 중 특히 1부에서 다루는 작품은 대체로 고운 서정과 깊은 사유가 어우러져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다.
3. 사회를 향한 풍자와 내면 들여다보기
어떤 일에 정면으로 마주하면 그 게임이 바로 끝나 재미가 덜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회와 해학을 겸해 풀어 가면 삶의 지혜가 배어나와 미소가 괴기 마련이다.
죄인은 눈을 가린 채 형장으로 끌려나온다. 장작을 둥글게 쌓고 그 위에 큰 무쇠 솥을 걸어 놓는다. 집행관은 죄목을 소상히 읽어주고 팽형(烹刑)을 시작한다. 죄인의 웃옷을 벗긴 채 무쇠솥에 넣은 뒤 뚜껑을 덮고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한다. 가마솥 안에서 죄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뜨겁지 않은 솥 안의 온도는 그에겐 펄펄 끓는 물 속 보다도 더 참담하지 않았을까. 짧은 시간에 생(生)과 사(死)를 눈 뜨고 체험함이 아닌가. 스스로 허물을 반성하고 죄를 인정하여 목숨을 내놓을 각오라면 그는 앞으로 죽은 듯이 살아도 감사할 것이다.
-‘팽형(烹刑)’ 中에서
솥에서 꺼내진 죄인은 죽은 척하라는 명을 받고 시체가 되고, 염습과정을 거쳐 관에 들어가 상여를 타고 집으로 간단다. 그리고 집안에서 숨을 쉬되 송장처럼 살아야 한다니 기막힐 노릇이다. 울타리 안에서의 제한된 삶이지만 목숨은 건졌으니 오히려 관대하게 느껴질 것이라나. 가마솥 안에서 끝난 명줄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는 대목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죄인이 자식을 낳으면 아비 없는 과부의 자식으로 대접을 해주었다니 숨구멍으로서의 여지가 보인다.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형벌 중에서 이 다소 장난기어린 벌 을 물고 늘어진 작가의 눈이 참으로 밝다. 그러면서도 명예를 중시하던 사회에서 이는 모든 것을 잃는 수치스런 일일 수 있다고 짚어나가는 은근한 표현이 따끔한 채찍보다 강하다.
작가는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섬뜩한 일을 상상하는데 ‘삶다’, ‘익히다’의 뜻에 벌을 가하니 어떠하겠는가. 한데 죄 지은 사람의 웃옷만을 무쇠솥에 넣고 삶는단다. 그것도 부정한 관리들에게만 내려졌던 형벌을 거론하며, 명예를 중시하던 사회상과 맞물려 구겨진 체면을 염려한다.
삶는 빨래통에 왱왱거리던 파리 한 마리가 걸려드는 것에서 착안한 글인데, 그 발상이 놀랍고 깜찍하다. 그러면서 의미 확장을 하여 만약 끓는 물에 죄인을 넣는 팽형이 있다면 어떨까 하고 접근한다. 실제보다 크게 과장하는 향대과장의 보기이다. 현대에서는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의 대표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팽형이라는 형벌 얘기가 나온다지 않은가. 일반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를 벌주기 위한 공개 형이었다는데서 해학미가 흐른다. 따라서 이 시대 뇌물수수로 거론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비판의식이 깔려있되 해학과 풍자로 돌려댄 솜씨가 수작(秀作)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모양의 집을 짓고 살아갈까. 각양각색의 보금자리들이 한없이 줄지어 있으리라. 도심에선 호텔 같은 아파트가 위용을 뽐낸다. 추녀 끝이 날렵한 한옥도 아름답다. 그런 집도 좋겠지만 모든 욕심 내려놓을 작은 토굴 하나 가슴에 품어보면 어떨까. 세상 살아가다 힘이 들 때 모든 것 잠시 내려놓고 그곳에서 쉬어보면 좋지 않을까. 가끔은 은근히 오래 타는 장작불도 한 아름 지펴놓고 내 마음에 훈기를 가득 채워보면서. 작은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마음을 찾고,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는 힘을 길러보면 참 좋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철없는 낭비는 없었는지 의식주에 과분한 무리는 없었는지 뒤를 돌아보면서.
-‘토굴’ 中에서
장작불도 조금이 아닌 한 아름을 지펴 마음에 훈기를 가득 채우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은근히 오래 타는 장작이라야 한단다. 작은 것을 크게 보고 지나친 욕심을 자제하는 힘을 길러보면 좋겠다고 작가는 실로 큰 욕심을 부린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게 정신을 가무려가면서도, 성에 차지 않아 중용을 탐한다. 오지에 있는 지기의 토굴에 다녀오며 돌아보는 마음자리이다. 이순금 수필가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읊조리는 글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는 ‘나’를 통한 공감대 형성에 성공하고 있는 보기이다.
완급(緩急)을 조절해 가며 오름실댁 그녀는 맷돌을 잘도 다뤘다. 볶은 콩을 쪼개서 거피를 할 때면 그것들은 툴툴거리며 깨진 쪼가리들을 사방으로 뱉어냈다. 마치 화난 사람이 분풀이 하듯이. 반대로 고운 가루를 갈아낼 때는 사뿐사뿐 유순하게도 돌아간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발레리나의 느린 회전동작처럼 말이다. - 그러나 오름실댁은 맷돌자루를 손안에서 자유롭게 했다. 숨이 막히게 꽉 잡지도 않았고 팔에 별로 힘을 넣지도 않았다. 돌이 돌아가는 속도에 한 번씩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맷돌의 움직임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 운동과 혼연일체가 되어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무거운 돌을 천하장사처럼 여유 있게 다루고 있었다. 늘 부지런하여 걸음마다 바람소리가 났던 그녀가 맷돌 앞에만 앉으면 그렇게 침착할 수가 없었다.
-‘맷돌’中에서
잊혀져가는 생활도구 맷돌을 다루는데 어머니가 등장한다. 3인칭 기법으로 객관화시켜 모녀간에 거리를 두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이순금 수필가의 역량을 읽게 된다. 구성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자유자재로 거리낌이 없다.
다음 수필 세 편은 공교롭게도 대상에 빗대어 내면을 형상화하고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낸다. ‘바람골 겨울나무’에서는 현자의 모습이었다가, ‘연꽃 향기’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을 품은 존재였다가, ‘양귀비꽃’에서는 열정적 모습을 띠었다가 하며 절제미를 확인하게 된다. 은유와 풍자로서 내면 들여다보기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4. 유년기의 애틋한 서사에서 묻어나는 문학적 가치
개개인의 정서는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다. 그때에 이루지 못한 간절했던 일이 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곧잘 잠결에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순금 수필가가 이따금 그 시절의 꿈을 꾼다. 유년기는 물론이고 청소년기에 병약하여 겪은 비애 때문이다.
어릴 적에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늘 건강한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 애들처럼 맘껏 뛰놀 수 없었던 까닭이다. - 초등학교 4학년 교실 옆에 황토흙이 흘러내리던 언덕이 있다. 그 아래 양지쪽에서 고무줄놀이를 한다. 단발머리의 어린아이가 되어 팔짝팔짝 뛰어노는 꿈이다. 몸은 예순을 바라보는데 어찌 된 일일까, 빙그레 웃음이 난다. 꿈속에서처럼 몸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유년의 꿈’ 中에서
시골의 외딴 기와집 대청에 하얀 모시바지저고리를 입은 육십 대 노인이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 초여름 농번기에 식구들이 모두 들에 나가면 빈집에서 홀로 파적(破寂)을 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도 잠깐, 바람처럼 훌쩍 떠났다가 계절이 바뀌면 다시 집에 돌아오신다. - 고령(高齡)의 할머니는 세 살 난 손자를 안고 공주 땅의 영은암을 찾았단다. 무오년 돌림병에 가족을 다 잃고 늙은 할머니는 손자의 명줄을 잇기 위해 절을 찾은 것이다. 일곱 살이 되던 해 머리를 깎고 마곡사의 우화스님을 의지하여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 넓은 방에서 혼자 엎드린 자세로 왼손에 물감종지를 들고 오른손으로 붓질을 한다. 한창 몰두해 있는 모습을 보면 세상의 시시비비는 아주 잊은 듯 했다. 그렇게 탄생한 불화들은 지금은 어느 곳에 봉안되어 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몇 군데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금어金魚 용해당’ 中에서
큰오빠 내외가 병수발을 들었는데 어쩌다 내가 시간을 내게 되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논둑길로 밭둑길로 돌면서 바람을 쐬어드렸다. 그럴 때면 힘은 약해지셨어도 또랑또랑 맑은 목소리로 하고 싶은 얘기들을 쏟아내셨다. 당신이 가꾸어 놓았던 농토에 대한 애착은 이미 없는데도 꿈을 꾸듯이 뇌이셨다. 만약에 다시 몸이 회복된다면 깊은 산중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터를 잡고, 감자를 심어 양식 삼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가 금생에서 겪어온 시간 속에서 힘이 들 때마다 진정으로 쉬고 싶었던 세상이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금어金魚의 아내 오름실댁’ 中에서
이 책 말미에 놓인 ‘금어(金魚) 용해당’과 ‘금어의 아내 오름실댁’은 작가의 부모님 이야기이다. 한 개인의 가족사라 하더라도 그 서사가 역사적 가치를 품을 때는 그 자체로 문학이 된다. 한 가정의 남편이요 아버지이기 전에 스님으로서 여러 곳에 불교미술의 흔적을 남긴 분의 일대기와, 공주시 신풍면 오름실이란 마을을 친정으로 둔 어머니의 일대기를 축약하여 덧붙이고 있는 점으로 이렇다 할 수사 없이 감동을 부른다. 한 여인으로서 가정을 도맡아 꾸리며, 한편에 간직해온 꿈 자락이 노년기에 몸이 쇠해서야 은연중 비쳐지는 소박한 모습에서 인간적 연민이 물씬 풍긴다. 사람살이의 원초적 면모까지를 보여주는 작가의 숨결은 암암리에 내려 받은 혈육 간 소통이며, 딸로서 작가로서 긴 호흡으로 풀어 젖혀야하는 한바탕 춤이다.
5. 나가며
이상으로 이순금의 수필세계를 통해 그의 인간적 면모까지 살펴보았다. 일차적으로 수필가 이순금의 성장배경엔 입담 좋은 어머니가 우뚝하다. 생활일선에서 식솔들을 건사하느라 질곡의 삶을 살아온 우리네들의 보편적인 어머니상이다.
반면, 그 존재 이면에 속세와 적응이 몹시도 어려웠던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다. 일생의 반은 산사(山寺)에 걸치고 반은 속세에 머물며 사념에 잠겼던 화공(畵工)이 바로 수필가 이순금의 아버지이다. 그렇기에 양친의 영향을 고루 받은 작가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필(筆)로서 사람살이를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해학적인 언변은 어머니의 대물림이요, 씨줄과 날줄의 무게 실린 묘사는 몸소 도(道)를 수행한 아버지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우뚱하지 않아 건실하다. 위트로 접근하여 사색의 의미망을 구축하는가 하면, 사회를 향한 풍자가 세련되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땐 더없이 다감하다. 글의 세계가 이미 중용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어 더욱 미래가 촉망된다. 수필의 화법이 다양해진 이 시대, 그가 개성적 문체를 통해 그려낼 문장에 대해 또 다른 기대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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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화(金善化) morakjung@hanmail.net
1999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2006년 《월간문학》 청소년소설 등단. 수필집 《모퉁이엔 바람이 산다》 외 12권, 선우명수필선 《공진共振》. 시집 《빗장》 외 3권, 청소년 소설 및 동화 《솔수펑이 사람들》 외 2권. 한국문협작가상, 한국수필문학상 외 다수. 한국수필 편집장역임. <지송문학회> 지도강사
주소 : 경기도 의왕시 오전로 208, 매화아파트 101동 1114호
폰 : 010-2716-3365
첫댓글 이순금 고문님의 <<그물>>이 나온지가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귀한 추억이고 기록입니다.
열신히 써오신 길에 박수를 얹습니다. ^^ 앞으로도 건강히 좋은 글 많이 엮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