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가학전통] 퇴계 이황은 정치보다는 교육에서 활로를 발견한 사람이다. 고려 말기에 길재가 그러하였듯이, 이황도 ‘풍교’와 ‘흥학’을 통하여 유학적 이상향을 현실 속에서 이루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졌다. 그는 70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많은 문인들을 길러낸다. 권오봉 교수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가르친 제자는 당시 6살 난 처 이종4촌 과재 장수희라고 한다. 그의 초기 문인들은 거의가 다 집안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진성이씨 대종회가 92년에 펴낸 열화 13호의 64쪽에서 권오봉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록 하자. “…초기의 퇴계 문인은 모두 가인들이다. 퇴계는 위로 형이 다섯 분 있는데, 다섯째 형 외에는 모두 일찍 타계하여 조카와 조카사위, 종손자, 생질, 종질과 누님의 사위, 형제의 외손자, 질녀의 외손자까지 모두 와서 배웠고, 성취하고 살림사는 일까지 도와주는 처지가 되었다. 나중에는 문중의 청소년이 몰려왔고, 인아 척당의 아이들까지 와서 배웠다.” 이것은 이황의 강학이 가학적 성향을 다분히 띄고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황의 가학 연원은 상당히 깊다. 뚜렷한 스승을 따로 갖지 않고 스스로 성취한 측면이 강한 이황에게 있어서는, 가학으로부터 상속받은 부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에서 이황의 숙부인 송재 이우는 주목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점에서 이황의 학문은 고려 말기에 향리로부터 입신하여 진성이씨 가문의 역사를 열어낸 이석으로부터 이 가문의 사람들이 갖추어낸 의식과 태도, 학문적 성취 같은 것이 원경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조 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송안군 이자수-부정공 이운후-부사공 이정으로 이어져 내려왔던 두루 종가 계열의 진성이씨 상계는 크고 작은 벼슬자를 생산하여 냈지만 문학적 전통이 그리 강한 특성을 보여준다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온혜 종가 쪽으로 넘어와서 노송정공 이계양-진사공 이진송재공 이우-이황의 형제들에 이르는 계열에서는 이황의 숙부인 송재공 이우, 이황의 형인 정민공 이해, 이황 자신, 이렇게 2 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문학적 전통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황에 의하여 확립된 이들 진성이씨 일문의 가학 전통은 이황의 강학을 통하여 광범하게 확산되고, 이후 이 가문의 삶을 이끌어가는 역할과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진성이씨 일문에 속하는 후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 강고하게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퇴계학이 이 일문의 가학전통으로 확고한 위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퇴계 이황의 강학역사 속에서 최초에 본격적으로 훈도를 받았던 것은 이황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열화 4호의 95쪽에서 이희대씨가 제출하여 주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황에게 직접 배운 이황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 행적이 뚜렷한 사람만을 가려 뽑더라도 몽재공 이안도, 동앙공 이영도, 기암공 이완, 만랑공 이녕, 문곡공 이문규, 만취헌공 이빙, 동강공 이희정, 송간공 이정회, 학천공 이봉춘, 낙금헌공 이정백, 송계공 이형남, 원암공 이교, 지간공 이종도, 우암공 이열도, 영모당공 이선도 등 2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을 통하여 퇴계 이황의 학문은 진성이씨 일문의 가학전통으로 확립된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이 당파와 학파가 겹쳐져 진행되어 나갔던 그 이후의 남인 학맥의 전통 속에서 가졌던 입장과 태도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스승인 이황의 학설을 수호하여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황의 현실에 대한 책임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대변혁을 위한 책무를 실천하여 내는 것이다. 전자는 영남에 기반을 둔 남인학맥의 주류 측에서 선택하였던 입장이고, 후자는 기호 남인들이 밟아나갔던 길이다. 영남 남인들은 이황 학설의 순결성을 신앙처럼 받들어 나갔다면, 기호 남인들은 현실에 대한 책임의식에 바탕하여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출현시켜 내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영남 남인들이 이황 학설을 교조처럼 받들어 나가는 입장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면, 이 점에서 특별히 이황주의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황 가문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이황의 입장을 자구 하나 하나까지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끝까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황주의의 입장과 태도가 진성이씨 일문의 가학 전통에서 갖추어 냈던 의식은 학문전통의 수호와 선인의 얼굴을 더럽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황가문 사람들의 이황의 ‘이기설’을 그대로 지켜내고자 하였던 노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가 19세기 후반의 휘재 이운산-용산 이만연-이류재 이중수 등, 진성이씨 일문의 가학 전통 속에 놓여지는 3대 학맥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운산 이휘재는 정조 19년(1795)에 태어나 고종 12년(1875)에 타계한 인물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10세 손으로, 20살에 노암 정필규에게 수학함으로써 퇴계 학설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정필규는 대산 이상정의 문하로서 ‘호문3로’로 지칭되던 천사 김종덕의 문인이다. 그러니 이휘재는 그 가문에서 이어 내려오던 가학전통 위에 김종덕, 정필규를 통하여 이상정 문하의 학술을 부가하여 학자적 식견을 갖추어낸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휘재는 1827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842년에 경산 현령으로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1874년에 한성부 우윤이 되는데 까지 이르는 관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1866년에는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양인을 성토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운산 이휘재는 “…뒤에 와서 여러 선비 중에 ‘마음’의 ‘허령지각’을 오로지 ‘기’로 지적하여 말한 자가 과연 있지만,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으로써 ‘동정’을 주관하고 ‘체용’을 겸해서 한 몸을 주재하게 될 것인가” 라고 하여, 마음의 ‘이’에 의한 주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황의 ‘이발설’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그는 이치의 주재력에 바탕을 두는 ‘경 공부’를 통하여 자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 점에 대하여 유명종 교수는 열화 10호의 96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산에게서 특수한 것은, ‘경 공부’가 결국 기질을 변화사키고 덕성을 성취하자는 것이므로, 종래에는 기질은 수양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나 형질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운산은 기질이 변화한다면 형질도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위의 인용부분은 문맥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을 필자가 조금 바로잡았음을 밝혀둔다. 어쨌든 이 인용문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이치의 명철성이 갖는 권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던 이휘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이치’개념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이해하였던 이황의 성실한 사도임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용산 이만연은 이휘재의 문인이다. 이만연은 퇴계 이황의 11대 손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낙북 이효순의 손자이다. 그는 늦게 벼슬살이에 나서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용산은 퇴계의 가르침을 돈독하게 지키고, 여러 학자의 주장이 조금이라도 퇴계설에 위배된 것이 있다면 반드시 변론하여 퇴계의 ‘성학십도’의 ‘중도’와 ‘하도’의 뜻을 크게 밝혔다고 한다.” 역시 위의 책 97쪽에서 유명종 교수가 하고 있는 말이다. 용산 이만연은 율곡 이이의 이기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치의 무위함’에 대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이 ‘이치의 발용’을 말한 것은 ‘주동’을 ‘발용’이라 하고, ‘피동을 ’수(따른다)‘고 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용산 이만연에게서 특이하게 살펴지는 것은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는 두 편의 논문에서 이진상의 학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한주 이진상이 “발용하는 것은 이치요, 발용하게 하는 것은 기질이다”라고 한 것을 들어서 비판하기를, “아마도 발하게 하는 것이 주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발하게 하는 것이 이치‘라는 것이다.
한주 이진상의 위의 생각은 ‘이치의 능동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그 논의 속에서 ‘발하게 하는 것’이란 주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동성을 뜻하는 것인데, 용산 이만연은 그러한 수사적 측면조차 용인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발하게 하는 것’이라는 수사를 ‘주동성’의 측면으로 환원시켜 내어서 ‘이치’와 연결시켜 놓는 수정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류재 이중수는 퇴계 이황의 12대 손으로, 용산 이만연의 문인이다. 위의 용산 이만연의 입장을 통하여 볼 수 있듯이, 이황의 가학전통을 잇는 진성이씨 일문의 후인들은, 이황의 입장과 태도를 지켜냄에 있어서 철저하다. 그들은 크게 이황설의 기본 입장을 지켜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표현방식과 문자까지를 수호하여 내려고 하는 진지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발하게 하는 것’이 ‘이치’와 연결되어 말하여 졌던 이황의 태도가 이진상에게서 바꾸어져 나타났을 때, 이진상이 이황의 ‘이발설’을 강화시켜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황 설의 자귀 하나까지를 지켜내고자 하였던 이 가문의 학문전통은, 한말을 살았던 우국지사 이만도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여 단식 순절한 이만도의 정신은 우국의식으로 대표될 수 있는데, 그가 생각하였던 ‘강한 나라 만들기’는 ‘주자학 근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유학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주자학이 세상 속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나라는 저절로 강성하여지고, 서양세력은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이만도의 말을 여기에 간단히 소개하여 보도록 하자. “오늘날은 천하의 대경동의 시대인데, 이 시대를 다스리는 방법은 ‘안을 닦고 밖을 물리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안을 닦고 밖을 물리치는 방법’은 다른 것에 잇는 것이 아니라, ‘유학을 높이고 도리를 중히 여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생각하건데, ‘유학을 높이고 도리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는…서원을 다시 세우는 길 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 향산집 3권에 나오는 글이다. 생각하여 보면 반도의 역사 속에서 주자학의 시대는 왕조창업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열렸지만, 주자학적 세계관은 이황의 학문적 작업을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주자학적 세계관이 파괴되어 나가는 것은 이황의 가학 전통을 철저하게 계승하는 이만도 로서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주자학적 세계관의 파괴는 그대로 조선왕조의 패망으로 직결되는 역사적 조건을 안고 있는 형국이 아니던가? 이만도는 전통적 세계관을 등에 업고 크게 노호하며 떨쳐 일어나서 그의 가학 전통인 주자학적 세계와 조선왕조를 동시에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기를 희구하였다. 그런 그의 소망을 위하여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모든 이들이 떨치고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그의 그러한 소망은 일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켜, 그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가문에서 3 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생산하여 냈으며, 그 외에도 안동 일원에서 많은 젊은 인재들이 떨치고 일어나 우국일념으로 목숨을 바쳐 헌신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발 빠르게 해체의 모습을 띄어나갔던 왕조말기의 혼란 속에서 어느 누구인들 분명한 역사적 통찰력을 갖추고 변화하는 세태에 대응하여 나갈 수 있었으랴!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성이씨 일문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가문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 하나 더 갖추어져 있었으니, 바로 조선 사상계의 정점에 버티고 서 있는 그들의 조상 이황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김한주가 이만도의 죽음을 애도한 시에서 말하듯이 ‘해동부자’로 지칭되는 이황가문 사람이라는 것은, 이 가문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하였지만,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의식은, 이 가문 사람들이 수구적 태도를 취하고 있든 혁신적 입장을 갖추어냈든, 크게 잘못을 범하지 않고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여 나갈 수 있게 한 소중한 자산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가문 사람들은 이만손과 같이 전통적 세계를 지켜내고자 하는 입장에서 개화 반대에 몰두하기도 하고, 이원록(육사)와 같이 현대적 학문을 선택하여 공부하면서 우국충정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도 한다. 이만손은 1811년에 출생하여 1891년에 타계한 사람으로 조선 말기에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운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던 ‘영남만인소’의 소두로 활동하였다. 1880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오자, 조정은 본격적으로 개화논의를 시작한다.
이에 자극을 받아 개화 반대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그동안 여러번의 대규모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력이 있는 영남유림은 대규모 개화반대 상소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 상소운동의 첫머리에 이만손이 잇었던 것이다.
이만손은 조선책략을 읽어보고, 황준헌이 일본을 위하여 조선책략을 저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안동과 상주지역의 유생들이 연서하여 1881년에 고종에게 올린 것이 바로 ‘영남만인소’이다. 그러므로 ‘영남만인소’ 속에는 이만손의 의식은 물론이고, 안동과 상주 지역 유림의 일반의식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 상소 속에 담겨져 있었던 의식은 이만도의 그것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안동과 상주지방의 유생들이 주로 퇴계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 남인 계열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만손과 이만도로 대표되는 반 개화적인 의식은 의리와 명분중심의 퇴계학, 의리의 능동성에 기초하여 유학적 도리를 구현해내고자 하였던 퇴계학자들이 한말에 가지고 있었던 일반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육사 에게서 나타나는 의식은 만손이나 이만도 등에게서 나타나는 의식과는 외견상 다른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퇴계학을 학문으로서 지켜내고자 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삼아서 말할 때에만 가능한 평가이다. 진리의 능동적 실천력을 절대화하고자 하였던 퇴계의 정신을 시대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여 내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본다면, 이만손이만도 등과 이원록 사이에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이원록과 그 형인 이원기, 그 동생 이원일 등의 독립정신도 진리의 절대성을 실천적으로 구현하여 내고자 하는 퇴계의 정신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 가학연원 속에서 저절로 몸에 익은 정신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육사 이원록의 가계는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 이영도에게로 연결된다. 동암 이영도는 목사 벼슬을 한 사람으로,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은 바 있으며, 그 손자는 호군 벼슬을 지낸 갈봉 이극철이다. 갈봉 이극철의 아들은 원대 이거인데, 온혜를 떠나 원촌에 삶터를 개척한 사람이다.
이거 이후 진성이씨 일문의 한 갈래는 원촌에서 오래도록 삶을 영위하여 내려왔는데, 조선말기에 이르러 아은 이가호를 아버지로 하여 이원록 형제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원록의 조부 이중직은 호가 치헌인데, 참봉을 지냈고, 유림에 명망이 있어 태학장의로 추천되었으며, 향당의 영수로 추중되었다. 이원록의 부친인 이가호는 을사년에 경기도 양주군수로 추천되었으나, 단발을 하여야 하고 일제가 행정에 관여하는 것이 싫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가호와 김해허씨 사이에서 이원록 형제들이 출생한다. 이들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출생하는 것이다.
이원록은 1904년에 출생하고, 그의 형 이원기는 1899년에 출생한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니, 조부로부터 퇴계학의 가학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예안지역에 신식교육을 위하여 ‘보문의숙’이 생긴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원록의 년보에 1915년에 ‘보문의숙’에서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때의 일일 것이다. 1915년까지는 이원기와 이원록은 조부의 훈도 아래 있었을 것이고, 1915년에 ‘보문의숙’이 문을 열고 초대 숙장으로 조부 치헌공이 추대되자 이들 형제들도 ‘보문의숙’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보면 이원록은 12세까지, 그의 형 이원기는 16세까지 전적으로 조부인 치헌공의 훈도 아래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고, 그 때 익힌 가학전통은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이원기는 1925년에 동생 원록, 원일과 더불어 정의부와 군정서, 의열단 등에 입단하여 활동한다. 이원록은 연경으로 가고, 이원기는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때 이원기는 진주에서 기묘명현록을 발간 판매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그가 굳이 기묘명현록을 골라 발간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유학적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하다가 화를 당한 조광조 계열 사람들의 실천적 의리정신을 높이 간주하는 이원기의 의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기는 1927년에 일어난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후 내내 요시찰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1942년에 서울에서 62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다. 이원기는 자신의 집에 ‘6우당’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는데, 권노섭이 지은 「6우당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원기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옛날 연암 박공의 말에, 일에 당해서 규정을 지키는 사람이면 소나 돼지를 기르는 사람일지라도 진실로 나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며, 의리를 보고 나에게 충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록 땔나무를 하는 종아이 일지라도 나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나 돼지를 기르는 사람은 시서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는 어려우며, 땔나무를 하는 아이는 스스로를 낮추어 겸양하는 대열에 두지 못할 것이니, 옛날과 지금을 살펴봄에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좋은 친구를 구하고자 하는 이원기의 마음과 의리를 행하고 절도 있는 삶을 살고자 희구하였던 이원기의 생각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의리와 절도를 구현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자신과 더불어 그러한 세계를 어깨를 걸고 걸어나갈 수 있는 친우를 희구하였던 김원기의 생각과 태도는 위기의 시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그의 고단한 삶과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독립운동이야말로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의리와 절도를 다한 실천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리와 절도를 다하고자 하는 치열한 실천정신은 그의 동생인 이원록, 즉 시인 이육사에게서도 우리가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다. 육사 이원록의 구도자적 실천정신은 그의 시 「절정」에서 극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39년에 문장지에 발표된 이 시는 육사 이원록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아마도 한국에서 쓰여진 것들 중 이만한 투지와 치열성을 담고 있는 시는 없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손가락뼈를 날카롭게 갈아서 붓을 삼고, 심장에서 분출하여 나오는 더운피를 먹물로 삼아서 글자 하나하나를 폐부 깊숙이 아로새기면서도, 끝내 서릿발같은 정신의 투명성과 냉철함을 잃지 않는 긴장의 미학이 이 시속에서는 너무나도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절망 속에 있다. 매운 계절, 겨울, 그것도 채찍에 내몰려 쫓겨난 시인의 삶이 거기에는 있다. 쫓겨온 땅은 어디인가? 쫓겨 나온 땅에는 절망이 있을 따름이지만, 쫓겨온 곳에도 구원은 없다. 하늘조차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한 암담한 현실. 그러나 시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한 극단적 절망 속에서도 그는 스스로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자신을 세우기를 소망한다. 목숨을 건 인내, 그리고 하늘의 권능보다도 더 크나큰 투쟁의 의지가 그 속에는 있다. 아무도 구원하여 줄 수 없고, 하늘조차도 구원하여 줄 수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 서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는 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의지를 불사르는 것뿐이다.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이것은 이 시의 여러 연들 중 시인의 의지가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 폭발의 와중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씨근거리는 숨소리도, 아픔을 호소하는 신음소리도, 마음 속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외침소리도, 이를 악무는 결연함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서릿발 칼날진 절망과 고통의 땅에 우뚝 서서 천공을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버리는 시인의 그림자를 본다.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물론 그것으로서 그는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서도 그는 속수무책의 답답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섬으로써 그의 절망과 그의 고단함과 그의 매운 겨울 속에는 희망의 씨앗이 심겨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서 더는 후퇴할 수 없는 결연함, 목숨을 건 의지를 투명하게 내보임으로써 어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희망의 씨앗, 매운 겨울을 굳건하게 돌파하여나갈 ‘강철로 된 무지개’는 그의 하늘 위에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의 치열성은 이원록을 평상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몰아댄다. 그의 삶이 놓여져 잇는 시대가 어디이던가! 식민지 시대. 빛을 상실한 어두운 역사의 시대가 아니던가?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서 어떻게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겠는가? 이원록이 그의 형제들과 같이 정의부․군정서․의열단에 참여한 독립투사임은 앞에서 말하였던 바이다. 이원록은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왜경에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1944년 북경 감옥에서 옥사한다. 그의 유작시로 추정되는 「꽃」을 남겼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꽃」의 전문이다. 「절정」속에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참혹한 절망 속에서 길어올리는 의지의 언어였듯이, 여기 「꽃」속에서도 우리는 절망 속에 웅크리고 있는 희망의 언어를 본다. 「절정」에서의 치열함을 「꽃」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시인의 시적 감성이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도래를 노래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은 「꽃」을 통하여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절정」에서 얼움장 밑에 고이 숨겨 심었던 희망이 「꽃」에서는 밖으로 터져나와서 조금은 흐트러지고 조금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영어의 몸이 되어있는 동안 많이 지친 탓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육사 이원록과 그 형 이원기의 삶의 녹아들어 있는 문양은 동질적이다. 치열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의지를 칼날같이 날카롭게 탁마해서 의리를 다하는 실천력을 갖추어내기를 소망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한 의지의 치열성, 그러한 정신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렇게 목숨을 다하여 합리적 이성에 헌신하려고 하는 태도-이러한 것들은 육사 이원록의 시정신 속에서 극명한 모습을 갖추고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 이원록 만의 것이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단식 순절을 향하여 치달려 나아가는 이만도에게서도 볼 수 있고, 유학적 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글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침잠한 결과 도덕적 의지의 절대적 권능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여 낼 수 있는 무기를 확보하였던 이황의 학문정신, 생활정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하여 보면 ‘이치의 발용’을 중심으로 하는 이황의 학문정신은 정신의 절대치를 추구한 것이며, 인간적 의지를 극도로 발현하여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 절대주의와 이성절대주의적 기조가 그 속에는 견고한 토대로써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만도나 이원록 등에게서 나타나는 목숨을 결하는 치열한 우국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의 진성이씨 일문 사람들은 이황의 학문적 정신을 계승하여 이황의 학문과 문자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하고, 이황이 조선 중기의 역사 속에서 갖추어낸 세계를 유지 보전하기 위하여 몰두하거나, 이황의 치열한 학문 정신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절대적 의리룰 구현하기 위하여 몸 바쳐 헌신하였다. 그것은 퇴계학의 가학 전통이 이 가문의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하겠다. <윤천근 : 안동대 국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