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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는 사랑/푸른꿈
만약 시간이 꺼꾸로 흐른단면 그대는 이런 광경을 볼수 있을것이다. 화창한 3월의 어느날 한 여자애가 창문가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불고있다, 여자애의 마음은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다........그렇다, 이 여자애가 바로 나다.
한창 꽃피는 나이였던 나는 산뜻한 발걸음으로 치마폭을 날리며 해빛아래에서 한가롭게 거니는것을 얼마나 바랐던가.그러나 사실상 나는 두다리가 불구인지라 휄체어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불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의 음악소리에서 배여나온 처량함이 그를 나의 창문앞에 걸음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 낯선 남자애가 내 곁에서 나의 음악소리를 듣고 있는것을 발견했다. 어쩔바를 모르는 나한테 그는 <하모니카 소리가 참 아름답네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마워요.> 하고 대답하면서 수줍게 웃었다.
훤칠한 키의 그는 젋음의 활력으로 충만되어있었고 밝은 하늘색 중산복은 여러가지 트랜드가 성행하는 시기에 오히려 그에게 각별한 매력을 더 해주었다, 그와 나는 이렇게 서로 알게 되었다. 그는 방금 이곳으로 이사온 남자애였는데 이름은 제운이고 모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있었다.
그후부터 나는 제운이라는 이 남자애와 아주 친해졌다 그는 늘 내 곁에서 하모니카를 듣고 나의 시를 감상하고 나와 속심도 나누었다. 제운은 늘 나의 휄체어를 밀면서 나무그늘 아래의 작은 거리를 산책하기도 하고 조용한 강언덕을 거닐기도 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흡사 한쌍의 연인과도 같았다. 가끔씩 다른 사람에 의해 연인으로 오해받으면 나는 서둘러 머리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때마다 제운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을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운을 연모하였다, 그런데 장애인인 나는 감히 현실을 무시하고 과분한 생각을 가질수가 없었다, 나는 이 감정을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장미꽃으로 바꾸어 마음속깊이에 묻어두고 묵묵히 그 향기를 느끼기로 했다.
시간은 손가락사이로 물 흐르듯이 빨리도 흘러갔다. 어느날, 제운은 나한테 <기연아, 네 이름 참 듣기 좋다.>하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데 아버지는 내가 아름다운 연처럼 높고 멀리 날수 있기를 바랐어. 그런데 나는 줄 끊어진 연이야> 이렇게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너는 잘 날거야,점점 더 잘 날수 있을거야,왜냐하면...내가 영원히 너의 곁을 지켜줄거니까.> 제운은 나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삽시간에 나의 얼굴에 그늘이 비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냉정하게 거절했다,<당신는 지금 일시적인 충동일뿐이야,나는 당신이 이렇게 대해줄만한 사람이 못돼요.>.<아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어, 나는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후회없는 사랑을 할수 있을거라고 믿어>제운은 계속하여 말했다. <그만해요.>나는 애써손을 뺐다, 눈물이 저도 몰래 흘러내렸다, 그후부터 나는 계속 고집스레 제운을 거절했다.
어느하루,제운이 문득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기연아 날 거절하지 마, 난 이젠 네가 거절하는 것이 무서워,이거 알아, 매번 네가 거절할때마다 나에게 상처가 된다는것을 ,기연아 ,나한테 더이상 상처를 주지마, 너한테도 고통을 주지 말고, 난 네가 날 사랑한다는걸 알고 있어.너 이렇게 연약해서는 안돼. 넌 원래 생활에 대한 추구가 높았잖아>제운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줄기 눈물이 그의 눈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날 나는 끝내 제운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에 나는 제운이가 아주 낭만적임을 발견했다. 이런 낭만은 제운이의 과감성을 키워줬고 그의 과감성으로 인해 우리는 한번 또 한번의 위기를 물리쳐왔고 사람들의 유언비어를 이겨낼수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것 같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의 완정한 생명을 이루게 됨을 의미하며 서로 갈라놓을수 없다, 사랑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끈끈하게 이어져서 운명을 같이 하는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곤난이든지 극복할수 있으며 대가를 아끼지 않는다.
드디어 그날, 나는 혼례복을 입고 제운이의 안해가 되였다.<제운씨,사랑해요,나의 모든 생명으로 ,그런데 이 다리때문에 나는 훌륭한 안해가 될수 없어요, 난 당신을 위해 옷을 씻고 밥을 지으며 방안을 거두는등 일체 내가 해야할 일을 할수 없군요, 오히려 당신이 나의 일상생활을 보살펴 주어야...>
<그런말 하지 말아요.> 제운씨는 나의 입을 막고 나의 귀에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냥 나만 사랑하면 돼요.>나는 제운씨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행복의 눈물이 양볼을 타고 주체없이 흐른다.......
아버지의 언덕길 /흥부
중병을 진단받고 약물치료와 함께 운동료법을 병행하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아침단련길은 감회가 새로왔었다. 마을어귀를 벗어나서 뒤산언덕을 오르노라니
꼭 마치 아버지의 굽은등을 련상게하는 산등성이너머로 한줄기 서글픔이
너울너울 파도쳐오는것만 같았다.
아득히 펼쳐진 밭한가운데서 따가운 해볕을 받으며 허리를 굽혀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금방 눈앞에 보는듯이 선했다. 파종이 끝나면 농약이나 쳐놓고
모두들 그늘밑에서 보내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풀이 있는 밭만큼 보기싫은것이 없다며
한여름에도 밭에 붙어살다싶이 했다. 오불꼬불 산허리를 따라 먼밭으로 점심밥보자기까지 들고
다녀오는 발길은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가? 아버지는 평생 돈방석에 한번 오르지도 못했지만
찬바람이 불어치는 허허벌판에서 뿌리를 찾아 헤매이고 지지리도 못난
가난을 품어 희망을 꽃피우고 땅에 대한 믿음하나로 한평생을 살아왔던것 같다.
너도나도 동구밖길을 빠져나갈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농사를 천직으로 간주하고 온갖 더위와 추위를 땀으로 씻으며 알뜰히 일하셨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많은 밭을 소한마리로 어떻게 다루는가고 도리머리질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 랭대와 멸시로 메마르고 척박한 묵은밭까지 억척스럽게 살찌우셨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땅은 생명줄이였고 분신같은 존재였다.
돈 몇천원에 아무꺼리낌없이 밭을 팔고사는 사람들을 안타까와했는가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었다.
<지금 내가 좀만 더 젊어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휴~>
산골짜기에 뭉게뭉게 피여난 진달래가 낯설고 가끔씩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들꿩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펐다. 나는 그 외줄타기인생의 방관자로서
심한 죄책감에 갈마들었었다. 아버지는 직접 밭에 들어가셔서 금방 싹이트기 시작하는
종자를 파보기도 하고 부드러운 흙을 매만지기도 하고 냄새까지 맡아보기도 하며
한결 색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계셨다. 어쩌면 그 두손에서는 가파르게 톱아오른
꿈의 언덕을 눈앞에 두고 어떤 미련과 애착이 부서져 내리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께서는 그 피땀으로 애지중지 가꾸어온 삶의 언덕받이에 내가 서서
보다 큰 세상을 더 멀리 바라보기를 기대했던것 같다.
농업기계화의 쾌속적인 보급으로 농경사회를 뛰여넘어 땅에 부여된 가치를 간과할수는 없다.
혹자는 그림속의 떡보듯이 넋을 놓고 있겠지만 혹자는 법정에까지 몰려가서
쟁탈전을 벌린다. 아버지께서 최대한 허리를 굽혀 고여준 사랑의 언덕은
너무나 높은것이였고 커다란 깨달음을 안겨주고 있었다. 적절한 기회를 잡고
잘살아보려는것은 우리모두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겠지만 밭임대료마저
고공행진하는 요지음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여직껏 그 누구에 못지않게 명멸하는 불빛만 쫒아다니며 어두운 밤길을 헤매여왔다.
농사일은 아예 뒤전에 두고 어느떡이 더 클가 궁싯거려보기도 했고
졸지에 실업자가 되기를 반복하며 기껏 생각했다는것이 출국이 꿈이였으니까
설마 도시화의 물결이 제아무리 거세차고 벌어들인 외화가 어느만큼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었더라도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세대에게는 덤으로 차례진
이 땅을 버리기에 너무나 익숙하고 또 더부살이를 자초하는게 분명하다.
언제부터 밖에서는 온갖 수모와 멸시에 길들여지며 돈을 버는 충실한 일군이 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무직자로 되여 돈만 잘 쓰는 사람들로만 락인되여 왔던가.
아버지의 굽은 등에서는 우리들의 외곡된 황금몽이 벌겋게 퍼렇게 멍든 가슴들을
움켜쥐고 굴러떨어지며 가냘픈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조상들이
개척한 땅과 고향은 더 이상 자기에게 부를 가져다줄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기피하거나 팔아버리는 단견성과 조급증은 우리들의 미래운명에 대한
우환의식이 결여된 사고방식이다.
자기를 진정 낳아주고 키워준 고향에 대한 분별력 상실과 부평초와도 같은
뿌리의식이 결여됨으로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수 없는 혼인관념,
그에 따르는 가정파탄과 급속하게 진행되는 인구감소, 허영과 향락에 빠진 무절제한
소비관념, 부모없는 자녀교육과 돈으로 모든 마음을 사로잡는 허망한 생각들,
이런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이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그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있으며 전반사회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에 페허를 만들어가고 있는 등 실속있는 미래계획과
꿈이 결여된 사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착잡한 생각에 빠져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사랑은 정때문에 울고불고 가슴을 찢는다. 누군들 행복을 꿈꾸지 않았으랴만
시장경제의 충격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심한 멀미를 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한숨은 나의 귀뿌리를 뜨겁게 달구었었다.
흙냄새 풍기는 산등성이에 올라서노라니 어느새 시려왔던 겨울들판에서는 봄이 한결 색다른 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동녘하늘에서 떠오르는 아침해가 반가왔는가하면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봄바람이 혼탁한 내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리는것만 같았다.
알고보니 나도 행복한 사람이 였어요/콩새
세상에 무조건 행복한 사람은 없는가 봅니다 나름대로 고통과 아픔을 갖고 사는게 인생인가 보네요 나는 늘 주변 사람들은 다 행복하고 나만 불행한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런건 아니였어요
지난 음력설에 북경 모 회사에 출근하는 딸애가 집에 설쇠러 왔었댔는데 초 사흩날에 딸애 고중때 동창생 둘이 저의 집에 자가용차를 몰고 놀러 왔었어요 <설련 어머니설은 잘 쇳어요?> < 오 너들도 설은 잘 쇳지 야,너들은 정말 잘 나가고 있구나 차까지 몰고 다니니>딸애 친구래도 자가용을 척척 몰고 놀러오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가지고 마음이 흐뭇했어요.<아니,잘 나가긴 뭐요 부모님들이 사준거래요> <저도요> <야 너들은 정말 행복하다야 우리 설련인 언제..>내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어머니 전 나중에 비행기 살건데>라고 딸애는 웃으며 말했어요 <남들은 자식을 자가용차까지 사주는데 이 에미는 달마다 딸애한테서 돈을 받아쓰는 신세니>내가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을때 <설련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우리친구들 중에서 설련이가 제일 행복합니다 엄마아빠함께 설이랑 쇠는게 우린 부러워 죽겠어요> <오 그렇지 내가 제일 행복하지, 어머니 얘들 마음속엔 부모라는 큰 존재가 비여있어요> 딸애는 나같은 엄마래도 곁에 있는걸 행복해 하는 눈치였어요
나는 애들끼리 재미나는 대화를 나누도록 다른 방에 옮겨 앉았다 < 야,너네 부모님들은 외국에서 잘 보내고 계시는거지?>라고 딸애가 묻자 <야, 말도 말아라 이젠 엄마 얼굴본지도 4년이 되였다 > 다른 한애는 <야,난아빠얼굴 기억도 안난다 부모들은 자식한테 돈이나 보내주면 최고인줄 아는지.이젠 그만 돌아 오시라고 권해도 맨날 한해만 더 한해만 더 하는데 이젠 돌아 오라는 말도 지친다 > <야 너네 부모들도 그러니 어쩌면 부모들의 마음은 다 마찬가지니 난 이젠 돈소리도 지겹다 맨날 돈 돈 하는게 명절때면 고아처럼 이제 저집 떠돌아 다니는것도 창피하다야 그래도 설련이네집에 오면 명절분위기 나는게 제일 좋다야>딸애 친구 둘은 하소연하듯하는데 저의 딸애는 <우리 엄마아빠 부럽지 난 사실 누구 부모들 돈 많이 버는거 부러워 한적없고 엄마아빠가 장애인이라고 원망해본적 없다 오히려 장애인인 몸으로 살기힘든 이세상 떳떳이 살아가시는게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냥 걱정 되는것은 부모님의 건강이다 나한테 효도할 시간만 길게 준다면 더 이상바랄것 없는데 > 라고 하는것이 였다.<설련이 엄마아빠도 행복하시다야 설련이 같은 효녀를 두었으니 > 애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는 순간 딸애가 너무 바르게 성장해준게 고마워 눈가에 이슬이 맺혔어요
세상에 부모마음 다 이해하는 자식이 없고 자식마음 다 이해하는 부모가 없는가 싶었어요
부모가 자식한테 아빠트를 사주고 자가용 차를 사준들 자식마음에 부모라는 큰 자리는 채울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그래도 부모들 한테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은 행복하고 나같은 장애인 자녀들은 불행한 줄로 알았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그런건 아니고 나도 행복한 사람이 였어요
우연한 만남/커피한잔
<<아니, 이게 송철이....아닌가?>>
<<예?..예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떻게...>>
이는 스승과 제자가 만나 나눈 첫 대화이다. 지난 5월 3일 오전 11시경 하남시장에 금방 도착하여 막 차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부른다. 돌아보니 나의 첫번째 선생님이였다. 내 생애 <<선생님>>이라 처음 부른 소학교1학년때의 김금자선생님, 20여년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답하며 애기를 나눴다. 나에게도 선생님과 스승이 많다. 그 수를 헤아리자면 아마 커피한잔 마시는 시간보다 더 걸릴것 같다. 그중에서도 제일 잊지못할, 또한 잊어선 안되는 선생님이 바로 이 김금자선생님이다.
김금자선생님은 延边师专을 졸업하고 스물두살꽃나이에 자그마한 우리동네 시골학교에 처녀선생님으로 왔다. 그때엔 보통 여덟살에 학교에 다닐수 있었는데 나는 걸을수 없다보니 한해늦어 학교에 붙었다. 때는 문화혁명이 한창이라 집체일에 눈코뜰새없이 바삐 보낸 부모님은 제때에 나를 데리러올수 없었다. 그럴때면 김금자선생님께서 나를 업고 오갔다. 나는 따뜻한 선생님의 잔등에서 부모도 아닌 다른 사람도 나를 업어주고 걱정해준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기도 했다. 허나 당시엔 어려서인지 특별히 고마운 마음은 있은것 같지않다. 이렇게 선생님은 2학년 여름 내가 지팽이를 짚고 걸어서 등교할때까지 나를 시시로 업고 등하교했는데 그 수도 역시 헤아릴수 없다.
어느해 겨울이던가 그때 겨울은 정말 추웠다.지금의 겨울은 비교도 할수없을만큼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였다. 그때 남조선특무라 몰린 아버지로 인하여 우리집은 여느집보다 살림형편이 훨씬 더 어려웠다.그렇게 추운 악천후에도 나는 털모자마저 변변치못해 늘 귀가 빨갛게 얼 지경이였다. 이를 본 선생님이 남편이 쓰던 털모자를 나의 머리에 씌워줬는데 나는고맙단 말 한마디없이 넙적 받아썼다. 어찌나 따스한지. 그 모자가 있어 나는 그 추운 겨울을 무난히 지낼수 있었다.
더 고마운것은 소학교 5학년때 일이다. 당시 우리대대학교에선 어찌되여 5학년만 공사중심학교에 가게 되였다. 우리동네와 7리나 떨어진 중심학교를 매일 오가며 등교한다는것은 나에겐 큰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이때 역시 선생님이 이 사정을 알고 자진하여 나를 선생님집에 주숙하게 하였다. 그땐 선생님은 이미 공사중학교로 조동한지 한참 되였다. 선생님은 내가 한창 밥 먹을때라면서 내 그릇에 언제나 수북히 밥을 얹어주었다. 나는 선생님집에서 처음으로 세수비누를 써보았다. 선생님이 가을엔 손이 튼다며 나에게 세수비누를 준것이다.
이렇게 선생님은 생활상에서 나를 친부모처럼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우리집은 생활이 어려워 인사 한마디 변변히 못했는데 참으로 아둔하고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滴水之恩涌泉相报 이런 말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엄청나게 큰 은혜를 입고도 그때엔 정말 몰랐다.
남들도 다 그랬겠지만 소학교땐 나도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동데방네서도 나를 개여 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 인기가 지금의 톱스타급이라 할가. 그러니 어린 나는 자연 둥둥 떠 안하무인격이 되였고 당시 말로 교오자만했다. 그때도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자만하면 낙후해진다면서 잡아주고 자고자대해진 나에게 고개를 번쩍 쳐들줄도 알뿐만 아니라 또 고개를 숙일줄도 아는 겸손함과 겸허함을 갖춰야 한다고 일깨워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낙관적이고 자신심을 잃지않으며 또한 늘 배우는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한다. 이것도 아마 선생님이 가르침의 덕분이 아닌가싶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나에 대한 요구를 낮추지 않았다. 사람은 포부가 있어야 한다. 포부는 나이에 있지않고 한사람에게 포부가 없다면 백년을 살아도 헛산것이라 했다. 그외에도 기억나는것은 참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진선미는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하며 언제 어디서나 버려선 안될 보물로서 꼭 지니고 지켜야 한다던 말이다.
그런데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 나는 세월의 흐름속에서 자신을 잃고 지낼때도 많았다. 인생은 꿈과 같고 꿈은 안개같아 짧고도 허전하니 무정세월에 낙을 누리며 놀아보자고 많은것을 잃었다. 오늘 선생님과의 이 우연한 만남이 나더러 뒤를 돌아보게 했으며 잃었던 초심을 되찾도록 일깨워준다.
동풍 불어 따사롭고 대지엔 봄기운 가득한데 길옆의 살구나무 하얀 꽃 곱게 피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5월이다. 이 생기 넘치는 5월 선생님과의 우연한 만남은 너무 즐겁고 뜻깊은 만남이다. 길 험하고 때 멀다고 이르지 말라 닭이 우는 숲새로 먼동이 터온다. 이 화창한 봄날에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가야 할 길도 한번 살펴봐야겠다.
피자 세 조각/고슴도치
며칠전부터 피자먹으러 가자고 칭얼대던 아들애 생각나 퇴근 길에 선심을 써서 피자가계에 갔다. 아들한테 깜짝쇼를 하려는것이다. 근데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결정할수가 있어야지.
하는수 없이 아들애한테 전화했더니 의외라 생각을 했는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들뜬 목소리로 고구마피자를 먹겠다고 한다. 작은 싸이즈로 주문해도 되련만 오늘은 큰 맘먹고 중간 싸이즈로 정했다. 피자값 88원을 지불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으나 아들이 애타게 기다릴 생각을 하니 한편 급하기도 하였다.
한참후 직원인듯한 청년이 잘 포장된 피자를 나한테 넘겨주었다. 갓 만들어진 피자는 따끈따끈하여 감각이 너무 좋았다. 써비스로 콜라 한캡을 주는것을 잊지 않고 가방에 잘 챙겨넣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니 친구들과 함께 놀던 아들이 <엄마>하면서 달려온다. 그뒤로 같은 학년에 다니는 애들이 셋이나 달려왔다. 아들애는 별말없이 피자를 들고 먼저 들어갔다. 그 애들 다 데리고 들어가려면 피자가 얼마 안되고 눈을 딱 감고 나도 들어와 버렸다.
아들은 손을 씻고 피자 한쪼각을 들었다. 치즈가 실처럼 쭉 늘어났다. 아들애는 <와~>하면서 감탄한다. 피자광고속의 모델이 된양……
실은 아까부터 밖에 있는 아이들이 은근히 신경씌였다. 그래서 아들애한테 넌지시 물었다.
<밖에서 친구들한테 엄마가 피자 사온다고 자랑했어?>
<아니>
<오~ 애들과 나누어 먹지 못할거면 자랑하지 말어. 알았지?>
<네.>
아들애는 그렇게 피자 한판을 세쪼각만 남기였다. 그리고 배부르 노라고 호소하면서 일어 났다. 아마도 밖에서 친구들이 기다리는것이 급햇나 본다. 아들애가 방금 나갔는데
<피자 다 먹고 나온거야?> 하는 한 여자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창문쪽을 내다 보니 아이들이 창문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이 여태껏 아들이 피자 먹는걸 창문에 매달려 본것인가? 이걸 어쩌나 정말 큰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한순간 멍했다.
내가 바보지. 아들이 말을 안했을거라고 믿은 내가. 지금 세월에 피자를 못 먹어 저렇게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겠나만 맛나는것이 차려지면 자랑하고 또 남이 먹으면 먹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맘이 아니런가?
미안한 생각에 급히 아들을 불러 들였다.
<창선아~ 들어와.>
<왜요?>
<아이들이 너 피자 먹는 걸 보고 있었대? 너 이제라도 이 피자 세 조각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라. 근데 좀 있다가 너 먹을거 없어도 괜찮을가?> 하고 물었다.
아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신이나 발에 신도 제대로 뀌지 못한채 피자박스를 들고 불이 나게 달려 나갔다.
흙장난 치던 손이 더러워서 어쩔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손 씼으라고 음료수병에 물을 가득 담아 내 보내려고 했더니 아들애가 언녕 친구들 입에 피자를 한입씩 먹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싶었으면 가져가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달려나가 저렇게 입에까지 넣어줄가? 그러고는 웃읍다고 친구들과 함께 까르르 웃어댄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더니 옛말 틀린거 없구나. 엄마 따라 칭얼대던 때도 지나고 인젠 엄마보다 친구가 더 그리운가 본다. 그런 아들을 이해 못하고 하마트면 평생 씼지못할 큰 죄를 아이들한테 지을뻔 했다.
피자 한입 가득 물고는 좋아하는 아이들은 그렇게 티없이 맑았다. 어른들 같으면 속으로 삐졌을지도 모르건만 아이들은 그런 어른 들과는 달리 사탕한알이라도 나눌수 있는 그런 순정이 있었다. 아이들의 그 맑은 웃음은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심이 부끄러워 지게 한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우린 어른으로 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린시절에는 무작정 친구가 좋았었는데 지금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될수 있는가부터 따지게 된다. 또 방금 싸우고 인츰 화해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별로 싸우지도 않고 멀어져가는 친구, 하루에도 몇번씩 만나도 반갑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도 랭랭해지는 나, 누가 아프다면 함께 걱정하였건만 지금은 그런 말에 너무 랭정하게 반응 하는 나 자신이 괜히 미워진다.
피자 세 조각, 그것으로 나눌수 있는 따뜻한 정, 지금 나는 하나씩 잃어 가고 있던것을 저 천진한 아이들을 보면서 찾아가고 있다. 아이들만이 할수 있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란것을……
래일을 위해/엔젤
언제부터인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삷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였다. 따라서 따분하게 지속되는 내삶이 싫어 질때가 많았고 이렇게 보내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지 갈팡질팡할때가 많았다.나는 이 의문에 따르는 답안을 찾으려고 무등 애를 썼지만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한번은 친구들 모임에서 친구들이 트럼프로 카드놀이를 하는것을 구경하게 되였다.그러다 보니 나는 옆에 제일 가까이 앉은 친구의 패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분위기로 앉아 보았다. 친구의 패가 잘 왔을때에는 나도 덩달아 흥분되고 패가 나쁘게 왔을때에는 괜히 기분이 나빴고 긴장해났다.
친구가 패가 나쁘게 차려졌을때 난 친구보고 포기할것을 권고했지만 친구는 계속 놀고있었다.결국 친구는 이기고 말았다.친구는 나를 보며 웃으면서 말햇다.<나쁜 패가 없고 다만 놀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사색에 잠겼다...
친구의 한마디는 나의 여태껏 고민하고 있던 의문들을 풀어 주었고 무언가 깨우쳐 주었다.인생은 바로 트럼프의 패를 다루는것과 같은것이다.손에 차려진 패가 좋든 나쁘든 포기하면 우리는 성공을 생각할 여지도 자격도 없는것이다.우리 손에 쥐여있는 패가 거칠지라도 잘 다룬다면 성공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삷, 따분하고 지루한 하루하루가 바로 우리의 패를 다스려가는 무기와 같은것이다. 성공으로 나아가는 무기말이다.나쁜 패는 없고 다만 놀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뿐이다.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굳센의지로 아름다운 래일을 위해 분투노력해야 할것이다.
새벽운동/좋은세상
시계바늘이 정각 4시를 가르킨다. 남들은 한창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있을 때지만 매일 이맘때면 저도 몰래 눈이 떠진다. 서둘러 일어나서 쌀을 씻어서 전기밥솥에 앉힌다. 간단하게 세수하고 엷은 화장까지 마치면 네시반이 거의 된다. 그 다음엔 옷을 주어입고 밖으로 나선다. 5월이라고 하지만 새벽 날씨는 아직 쌀쌀하다.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일선종점역으로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다. 이른 새벽이지만 운동하러 가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모아산으로 향하는 길을 메우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웃고 떠들며 서둘러 휴일호텔 서쪽길로 올라가는 산으로 향한다.
어느때부터인가 퇴직하고 집에서 놀고있는 친구언니가 매일 아침마다 산에 운동하러 간다는걸 알고 친구들중에 유독 혼자만 출근하는 나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생각끝에 다섯시에 운동을 떠나는 그들에게 네시반에 떠나자고 약속하고 매일 아침 이맘때면 분주한 것이다.
새벽녘 숲속의 청신한 공기는 정말 한입으로 어떻게 표현할수가 없다. 우리들은 들꽃이 다문다문 피여있는 산길에서 저마다 그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떠들썩하며 마음껏 목청을 돋우어 노래곡조를 뽑는다. 목청이 거칠면 어떻고 곡이 틀리면 어떠랴 ㅎㅎㅎㅎㅎ…..우리들의 노래소리에 놀란듯 산속에 들꿩도 장단에 맞추어 울어댔고 뻐꾸기도 뻐꾹뻐꾹 목청을 뽑는다.
산에 가면 우리들의 운동방법은 다양하였다. 줄띄기를 하기도 하고 학교다닐적에 하던 업간체조를 애써 기억을 더듬으며 함께 한다음 무릎굽혔다 펴기、아름드리 나무에 다리를 높이 걸고 다리펴기 운동도 하고, 누가 더 소리높이 웃나 히스테리적으로 웃어도 보고… 비탈길에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나무기지에 걸채여 구울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하루 우리들중 누군가가 문득 산에서 산나물을 발견하였다. 그 후부터 우리들의 호주머니엔 저마다 비닐봉다리가 하나씩 첨가되였고 매일 하던 운동은 종적을 감추었다. 대신 산의 골을 따라서 나물을 채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물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하였다. 혀끝에 대면 알싸하게 매운맛이 나는 고추나물、생으로 장에 찍어먹어도 구수한 닥지싹、우리지 않으면 쓰거워서 먹지 못하는 우정금、많지는 않지만 가끔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애고사리、기름고비、고추장을 듬뿍 놓고 쌈을 싸먹으면 그렇게 맛있는 참취…….어느날이던지, 우리는 뜻하지 않게 내리는 새벽비에 저마다 웃옷을 벗어머리에 뒤집어 쓰고 쫓겨오는 신세로 된적도 있었다…..
산에서 머무르는 한시간반의 시간은 그처럼 짧았지만 우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그 시간이 그렇게 흥미롭고 즐거울수가 없었고 밤새 이불속의 혼탁한 공기속에서 벗어나 청신하고 시원한 공기를 량껏 마시고 손에는 돈을 주고야 사먹을수 있는 산나물 봉다리를 하나씩 들고 산에서 내려오는 그 심정은 이루 말로서 는 형용할수 없었다. 하루동안 번다한 일터에서의 각가지 스트레스에 응부할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를 매일마다 공짜로 저장하는거였다.
래일도 모레도 우리들의 새벽운동은 계속될것이고 철따라 피여날 자연의 아름다운 선물; 들꽃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즐겁고 기쁘다………
문학협회를 이끌던 나날들의 이야기/안도현 박영옥
연변은 물론 한국에까지 10여년동안 이름을 떨쳐온 한 민간단체가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안도현백두산아동문학협회”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1997년 1월의 어느날, 이용득선생이 날보고 지금 연변에 아동문학협회가 공백인데 안도에 이 협회를 설립할 계획이니 김동철씨가 회장, 내가 부회장을 맡아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다리가 장애인 내가 해낼수 있을가? 하고 고민하다가 믿어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쾌히 동의하였다.
그해 2월 1일, 그날은 대한절기에 어울리지않게 날씨가 봄처럼 따스했다
오전 열시에 우리 다섯회원(이용득, 김동철, 류영녀, 장은숙, 박영옥 )은 장은숙집에 모였다. 붓글씨를 잘쓰는 김동철씨가 하얀종이에다 빨간색으로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 설립모임”이라고 쓴 글을 객실벽에다 붙혔다. 그런후 여자 셋은 한복을 입고 남자 둘은 양복에다 넥타이까지 매고 그 앞에서 “찰칵 ㅡ”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안도현 토월산 아동문학협회가 너무나 비좁고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소박한 방안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그때로부터 우리의 힘든 걸음이 시작되엿다. 회원들의 열정을 식히지 않기위해 우리는 일주일마다 모여앉아서 작품을 평의하였고 또 자주 만나는것으로 서로간의 정을 돈독히 하였다.
협회가 활동하려면 돈이 있어야했고 그 돈을 벌기위해 회원들은 신문팔기에 나섰다. 그때 “연변건강생활보”에서 편집을 맡으신 이용득선생님이 주일마다 연길에 가서 이 신문을 삼백부씩 가져오시면 우리회원들은 한사람이 60부씩 나누어가지고는
힘자라는대로 팔았다. 한부를 팔면 30전씩 벌수있는데 그 신문들을 가지고 기차역, 시장, 거리에 다니면서 판다는게 참 체면잃을 일이기도 했다.
“아니 글 쓴다는 사람이 왜서 신문장사를 해요?”
이렇게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신문을 안 사겠다고 우리회원들을
보기만하면 피하느라고 길을 에돌기도 했다. 또 어떤회원은 신문을 채 팔지못하면 자기가 몽땅 사기도 했다. 이렇게 협회의 활동경비를 얼마라도 해결할수 있긴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그러나 회원들은 누구도 원망없이 잘해나갔다. 얼마나 고마운 회원들였던가!
많은 사람들은 여름이면 그늘진 곳에서, 겨울이면 따스한 온돌에서 한가히 보냈지만 우리는 글을 써가지고 여름이면 산으로 찾아다니고 겨울이면 옷을 꽁꽁 입고는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활동하였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가슴이 뜨거워났고 또한 우리글을 굳건히 지켜가려는 그들만이 진정 사랑스러운 사람이엿고 존경스런 사람이 아니겠는가를 다시한번 느끼기도했다.
그렇게 반년동안 모지름쓰며 견지하다다 김동철씨가 가정문제로해서 사직하는바람에 이 협회가 활동을 잠시 중지하였다.
1997년 9월의 어느날 이용득선생님이 날 찾아오셨다.
“이 협회를 해제시킬가요? 너무 힘들어서요”
“아니, 그냥 견지해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여나갔다.
나는 왜서인지 협회가 해제되는게 가슴아팠다. 어떻게 세운 협회인데? 또 이만큼 만이라도 걸어오기 위해 얼마나 모지름 써왔던가?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의 건실한 성장과 꿈을 살찌우기 위해 꾸린 협회인데 계속 꾸려나가는게 우리들의 사명이 아닌가?
“장부에 지금 돈이 얼마 있는가요?”이용득 선생님이 계속 물으셨다.
“60원이 있습니다.” 그때 협회의 장부가 내손에 있었던것이다.
“그럼 내일 글쓰기 열성자들을 조직하여 들놀이하던지. 그리고 영옥씨가 잠시 회장을 맡아서 하세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계속 운영하는게 고달프지만 그러나 잠시라지않는가?
그러나 그 잠시가 꼬박 10년일줄을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튿날, 나는 글쓰기 열성자 여섯분을 불러서 저수지로 떠났다 가을의 하늘은 푸르다못해 유리알처럼 알른거렸다. 우리 일곱글쓰기 열성자들은 그날 가을하늘을 향해 또다시 새로운 꿈, 더 큰 꿈을 펼쳤다.
. 물론 장부에 있는 돈 60원을 그날 들놀이에 몽땅 썼지만 모자라서 내돈을 조금 더 보탰다.
그날 저녁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인차 잠들지못했다.
“난 인제부터 아동문학협회의 코기러기다. 어깨가 무겁더라도 중도에서 절대 주저앉지 말아야지!” 나의 속다짐이였다.
그 들놀이를 계기로해서 몇달간 수면상태에 처했던 문학회가 새봄을 맞이한 풀처럼 파아랗게 살아났다. .
자주 활동하고 또 새로운 회원들을 발굴하니 원래는 다섯명회원뿐이던것이 후에는 스무명도 넘었다. 나는 할수록 힘이 생겼고 희망은 수림처럼 자꾸 커갔다.
회원들에게 신심을 주기위해 매년마다 회원들의 특집을 조직하였는데 그때는 컴퓨터 시대가 아니여서 우편으로 보내지않으면 나는 늘 자기돈을 팔며 두툼한 원고들을 가지고 직접 잡지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버스만 타면 멀미를 하는 나는 멀미약을 먹기도했고 때론 멀미를 예방한다는 귤껍질도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에서 내릴때까지 코를 감싸기도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무릇 내가 가지고 간 회원들의 글들은 모두 신문잡지에 실렸다.
2003년부터 우리는 내부간물을 꾸리기로 했다. 그러자면 돈이 좀 많이 있어야했다. 그때 함창도선생이 나와 함께 돈 구하러 나섰다. 돈이 좀 있을거다하고 생각하는 단위는 다 돌아다녔다. 상사앞에서 좋은 말을 다하면서 “돈구걸”했더니 200원, 300원, 500원…돈이 불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나는 돈을 얻기가 좀 쉬운 우월한점이 있기도했다. 절뚝대는 다리로서 숨을 헐떡이며 3,4층까지 올라오는 모습에 많은 상사들이 감동 받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스트레스도 받았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글이요? 우리도 살기어려운데 언제 당신들에게 줄 돈이 있겠소?”
그것은 우리에 대한 비방이고 모욕이엿다. 돈 안주려면 좋게 거절하면 될건데 왜 하필 이렇게 짜증까기 낸담?
퇴자를 맡고 구름이 꽉 찬 얼굴로 돌아서서 나올때면 눈물이 나기도했다. 정말 울고만 싶었다. 그러면서 자문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내가 왜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협회를 위해 이렇게 뛰여다니고 이렇게 모욕도 당하고…아니아니, 모든일이란 순풍에 돛 단듯 순리로운게 아니잖아? 그리고 난 또순이야!”
이전에 어느작가분이 나에게 “또순”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던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그 작가분이 “이악스럽고 끈질긴 여자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라고 했다 그래! 난 이악스럽고 끈질긴 여자다. 그런데 내가 어느새 이악스런 여자로 변했단말인가? 난 나의 변화를 두고 정말 깜짝 놀라기도했다. 원래 나는 양띠를 타고 태여나서인지 양처럼 온순하기로 소문이 있었댔다. 그누가 욕해도 대꾸도 바로 못하는데…해야 할 말조차 하기 싫어하는데…그러던 내가 글쎄 협회를 위해 돈있는 사람들을 잘 구슬려서 돈을 잘 얻어들이는 재간둥이로 되다니? 그리고 원칙앞에서는 사정을 두지않는 여자로 되다니? 협회를 이끌면서 나는 바로 이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변해야 했다.
그러다가 많은 상사들의 칭찬을 들을때면 나의 작은 가슴은 사해의 바다처럼 마구 설레였고 꿈은 어느새 저 멀리로 날아가서 영글고 있었다.
“네. 참 좋은 사업을 하십니다.”
“우리민족의 영웅들입니다”
협회에 경비가 부족할때 많은 회원들이 자기주머니 돈을 터는 일도 있었다. 특히 잊을수 없는것은 홍복녀씨 그리고 정성호씨다. 이 두 회원이 한국에 가서 힘들게 번 돈을 협회에 내놓았을때 나는 코마루가 쩡해났다. 특히 홍복녀씨는 한국에 가서 갖은 어려움 당하면서 일하다보니 잔뜩이나 작은 체대인데다 더구나 여위였고 얼굴은 초췌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뭉치돈을 내놓았을때의 그 모습은 영원히 잊어지지 않는다. 후에 식당을 꾸리면서 협회에 많고도 많은 후원을 했다. 그 외에도 자그마한 식당을 꾸리고 있는 정옥희씨도 몇번이나 후원금을 내놓았다. 이런 고마운 회원들로해서 나에게는 샘물처럼 힘이 자꾸 생겼으리라.
2003년부터 우리는 “토월산아동문학회”를 “백두산아동문학회”라고 개칭하였다. 인제부터 백두산의 호랑이처럼 뛰여보자는 회원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은 이름이였다. 그러니 신끈을 더 단단히 조여야했고 호랑이처럼 더 멀리 뛰여야했다.
나는 신체가 허약해서 늘 전신이 무너질듯하면서도 정신만은 잃지않았다. 한달에 적어서 한번, 많으면 두세번씩 활동했는데 이렇게 해해년년 견지하고 또 견지했다.
그리고 그해부터 “백두의 메아리”라고 명칭한 내부간물을 꾸리기도했다 .그러니 나는 더구나 바삐보내야했다. 돈을 얻어야했고 일부 회원들의 서투른 글을 보아주고 수정하고…때론 생글대는 햇님과 만날 여유도 없이 하늘빛을 머금고 내주변을 맴돌아치는 곤충도 볼사이 없이 간물에 실을 글들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였다. 한기 또 한기의 간물이 출판될때마다 우리회원들은 마치 장한 일을 한것처럼 기쁨을 감추지못한 나머지 어떤 회원들은 벌써부터 축하파티를 조직하느라고 야단이였다. .정말 그럴만도 했다. 조선족이 22%밖에 안되는 안도란 이 지역에 이같은 한글로 된 책이 나왔으니말이다.
힘겨웠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2003년 4월의 어느날 나는 감기때문에 개인진료소에 가서 점적주사를 맞게되였다. 그때 의사선생과 동창이 되는 김은철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놀러왔는데 내가 아동문학글을 쓴다는걸 알고는 제꺽 내곁에 다가왔다.
“이것참 너무 좋은분 만났군요. 저도 그 협회에 가입할수 있는지요?.만약 동의하신다면 오늘 저녁 한턱 낼게요.” 하고 농담절반 진담절반하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그 남자는 정말 나를 불고기집으로 초대하였다. 얼마나 좋았으면 초면인사이에 이렇게까지 했을가? 협회에 가입한 그는 협회활동에서 아주 열정적이였다. 매번 회의때면 제일 먼저 왔고 협회로 찾아오는 외지손님은 자기집에 모셔다가 잠자게하고 식사하게하고…정말 협회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군하였다.
또 한번은 버스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옆에 앉은 잘 아는 사람이 날보고 지금도 글쓰는가고 묻자 앞에 앉은 삼십대중반에 이른 웬 남자가 제꺽 돌아앉더니 나의 손을 덥썩 잡으며 이렇게 반기였다
“아, 오늘 끝내 찾았군요. 전 조봉산이라 부릅니다. 며칠전에 이 협회가 안도현텔레비전에 소개되는걸 보고 저도 의향이 있어서 찾던중입니다. 정말 하늘이 내 마음 알아준셈입니다”
물론 그도 협회에 가입한후 글도 부지런히 쓰고 협회의 일에 자기돈을 많이 써 왔다. 그는 지금 협회의 부회장직을 맡아하고 있다.
회원 이 정남이란 분에 대한 얘기를 할라면 더구나 재미있다. 내가 이 정남씨를 알게 된 이유는 이러했다.어느한번 친구를 따라서 초면인 김정옥씨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끝내고는 서로 전화번호까지 남겼다. 그날 거기서 김정옥씨의 남편인 이 정남씨와 넷이서 저녁을 먹게 되였는데 내가 글 쓰고있다는 말이 나왔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간후 이 정남씨는 장밤 잠을 못 잤다는것이였다. 어릴때부터 지향하던 문학을 지금까지 힘든 삶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나를 만난것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그런 기쁨때문이란다. 그런데 나의 전화번호를 몰라서 더구나 실면했단다.. 그렇다고 아내와 물으면 “당신 그 여자한테 반한게 아닌가요? 정말 그러는 날에는 이혼이에요” 하면서 오해할가봐 묻지도 못하고 그냥 끙끙대며 속을 앓았단다.
그 이튿날 그는 아내 몰래 전화번호책을 뒤적였는데 마침 “박영옥”이란 이름이 있더란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웬걸. 어떤 할머니더란다. 그후로부터 이 정남씨는 나를 찾기위해 일부러 병원 앞골목에서(그때 우리집은 병원 앞골목에 있었댔다) 온하루 서성댔단다. 연속 며칠 이렇게 기다리다가 끝내는 날 만나게 되였는데 그래서 협회에 가입하게 되였다. 문학의 매력은 바로 이같이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밤잠 이루지못하게 했고 또한 가슴 설레이게도 했다.
문학은 아름답고 숭고하다지만 울퉁불퉁 험난한 길이엿다. 새로 가입한 회원들에게 신심과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나는 그들의 글을 다듬어서 신문사에 추천하고는 시름이 놓이지않아서 신문사에 전화를 두세번 걸다가 편집선생의 “참 시끄럽게 구는군요. 차라리 당신이 와서 편집할거지”하고 짜증내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일이 어제일 같았다.
한 사람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나이가 많아서 친구도 없고 놀러다닐곳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니 협회에 가입시켜달라고 사정한적 있었는데 내가 거절하자 대번에 성을 버럭 내면서 마구 욕까지 하는것이엿다. 날 인정이 없다니. 회장이라고 권리를 내세운다니…어떻게 욕해도 나는 좋았다. 이 협회는 엄숙한 우리글쓰기 애호자들의 삶의 터전인만큼 놀러갈곳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찾아오는 협회가 절대 아니다. 협회란 협회의 원칙이 있고 규정이 있는만큼 나는 에누리 없이 그대로 하고만 싶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에누리 없는 성격이였고 옹고집이기도했다.
문학협회라해서 엄숙한 장소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나는 일년에 두번씩 문체활동도 조직하였다. 재미있는 오락프로로 온하루 즐거움속에서 보낼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어느회원이 곤난이 있으면 곧 위문했고 또한 명절이거나 생일이면 함께 모여서 식사도하다보니 협원들은 협회를 늘 자기집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만나기만하면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 모르기로한다.
열혈 문학인들의 발기로 90년대에 안도에는 여러 문학단체가 많았다. “이룡산문학회”, “샘물문학회”, 초생달문학회”…그러나 이런 협회들은 얼마되자않아서 해산되였다. 오직 아동문학회만이 끊임없이 끓어번지였다. 때론 너무도 힘들어서 몇번이나 회장직을 내놓겠다고 했더니 회원들이 누구나 반대해나섰다.
“만약 박회장이 아니라면 우리협회가 해산된지 오라지요.그러니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글쎄 오늘까지 이 협회를 이끄느라 고생도 많았지요. 더구나 성한 몸도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박회장을 장애인으로 생각한적 없었어요”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만점이란 점수를 주는 회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장애인 나를 언제나 성한사람처럼 인정해주어서 고마웠고 믿어주고 밀어주고 격려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다시금 다져보기도했다 ㅡ더 힘내자. 더 높이 날자!
2007년3월21일 안도현백두아동문학회는 설립 10주년을 맞는 모임을 가졌다. 그날의 하늘은 여느때보다도 더 파아랗고 산과 대지도 여느때보다 더 푸르렀고 앞내가에서 조잘대며 흐르는 시내물의 노래소리는 여느때보다도 맑지고 구성지였다.
연변의 각 현시에서 오신 수십명의 귀빈들을 모시고 발언대에 올라서 10년동안의 회노애락에 대해서 발언하는 나는 왜서인지 눈시울이 자꾸만 젖어들었다. 사진사의 섬광등과 박수갈채속에서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10년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총화하였다 꼭 10년이다. 정말 기나긴 10년이였고 때론 눈물, 때론 웃음, 또 때론 한숨, 또 때론 즐거움으로 보내던 나날들이였다
그날 연변주안동문학학회에서는 나의 수고를 기리여 공로패를 증정하였다. 그 공로패에는 나의 십년간의 회노애락이 담겨져 있었다.
3년전부터 나는 회장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고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제날의 열정을 식히지않고 많은 회원들의 글을 수정해주고 추천해주고 있는데 지난해만해도 안도현백두아동문학회 회원들이 쓴 글을 수정하여 한국kbs방송”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프로에 보냈는데 많은 회원들이 우수상에 선정되였다.
내가 회장직으로 있던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회원들의 작품이 “월간아동문학”잡지, “중국조선족소년보”, “연변아동문학”,”흑룡강신문”, “종합신문”, “아동문학샘터”등 잡지에 실렸는데 발표수는 360여편이 되고 안도현백두산아동문학회는 2004년과 2005년에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로부터 “우수협회”로 선정되였고 나는 또 우수회장으로 뽑히여2007년에는 연변아동문학작가대표단으로 한국에까지 갈수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10년동안 우리글을 위해 열심히 뛰여왔다고 안도현정부에서는 나에게 “안도명인”이란 영예를 주었고 2012년 1월 16일에는 안도현 10대도덕모범이란 칭호를 주었다. 그외에 나는 또 많은 작품에서 수상하였는데1995년도에 동북조선족신문계통우수통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2008년에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탐구회에서 동시우수상을, 한국kbs방송국해외동포수기에서 대상을, 2009년도에는 백두아동문학상을, 2011년에는 중한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일송정”응모에서 대상에 선정되여 한국에 갈수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였다. 그외에도 연변일보, 연변녀성, 연변방송국, 흑룡강신문 등에서 조직한 생활수기응모에서 수상하는 영예를 지녔으며 2010년도에는 연변방송국에서 주최한 “9.3 내고향 퀴즈”도전에서 우수상을, 연변조선족아동문학학회 우수회원으로 표창받기도 했다.
나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해야하며 우리민족의 사명을 위해 더 열심히 뛰여야한다. 그래서 오늘도 인생이란 이 도화지에 열심히 내일의 인생 설계도를 그려본다.
어머니 사랑/초불
누가 나의 얼굴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깬 내가
눈을 떠보니 어머니의 손이 나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눈길은 꼭 마치 쌕쌕 곤히
자고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빛 이셨다,
이 20여일간 중병을 않고 계시는 어머니 병시중으로 고생하며 부모님
집에 유하고 있는 고생이란 모르고 자란 내가 몹시 안스러우신가 보다
50을 바라보는 다 큰 딸 자식이나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직도 내가
철없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여겨지나 보다, 아마도 고생하나
않시키고 곱게곱게 키운 연약하고 부족한 딸애가 이동안 어머니의
병시중으로 고생한것 같아 몹시 안스러우신가 보다 <에크 엄마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어쩌니, 몹시 피곤하지?> 어머니두 참 내가 무슨
고생 했다고 그래요 난 어머니의 그 사랑에 목이 메오면서 눈물이 났다
자식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부모님 눈에 마냥 어린애로 보인 다더니,,,,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 사랑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우리 자식들이 그 사랑의 깊이를 알면 얼마나
알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을수 없을 부모님의 고귀한 사랑,,,,
우리 자식들은 부모님 생전에 아무리 큰 효도로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혜에 보답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은혜를 다 는 갚을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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