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후손으로 찿은ㅡ논산 명재고택
황소1(부산) 조회 198 22.03.11 17:34
18차례 벼슬을 거부한 논산 명재고택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명재 윤증
명재 윤증은 인조 1629년에 태어나서 효종, 현종대를 거쳐, 조선 숙종 때의 학자로 살다간 선비다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윤증은 18차례나 왕이 벼슬을 내리며 불렀는데도 단 한 차례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
물론 과거시험도 응시하지 않았다. 81세에 우의정을 제수하며 숙종이 정사를 함께 논하자고 불렀는데도
응하지 않아 백의정승이란 칭호를 얻었다. 윤증은 그때까지 숙종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예는 윤증이 전무후무하다.
죽어서는 자신의 무덤에 비석도 세우지 말고 일체의 비문도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86세로 평생을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 손수 빗자루를 들고 방과 마루를 쓸었고 혼자 있어도 어려운 손님을
맞은 듯이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바르게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또 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집안의 동절이라는 여종이 죽고 제사를 지낼 아들이 없자 기력이 남아있던
85세 때까지 그 여종의 제사를 손수 지내주었다고 한다.
윤증은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의 유봉 아래에서 살았다고 해서 유봉(酉峰)노인이라고도 했다
이곳의 지명을 노성(魯城)이라고 한 것은 공자가 중국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기리며 공자에 버금가는
조선의 대학자 윤증을 추모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하니, 평생 관직에 오른 적이 없으나 백의정승으로
불린 명재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마을이름 교촌리(校村里)도 선생의 고택 바로 옆에 노성향교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사당
윤증은 생전에 논산 노성유봉이라는 산기슭아래 초가를 짓고 원체 검소, 청빈하게 살아오셨는데
이런 선생을 위해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지금의 명재윤증고택을 지어드렸으나
생전에 이집에 기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논산 명재고택은 약한 구릉지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에 사랑채를 두고 후면에 안채, 후면 동쪽에
사당을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튼口자형 양반 주택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두고, 약한 구릉에는
크게 4단의 축대를 설치하여 축단에 맞춰 남측 전면을 향하도록 건물을 배치했다 제일 하단은 사랑마당을
두고 마당 한쪽에 우물을 설치해두었다
선비의 기품을 연상케하는 이 고택은 조선 후기 한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후손이 거주하며 살고 있다
논산 명재고택의 특징은 호서 지방의 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당을 생략하고, 대신 사랑채 공간을 조금
크게 하여 별당 기능을 수용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입면구조는 팔작으로 처리하여 안채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가 안채와 가깝게 붙어 있고, 행랑채와도 연결되어 있어 입면구조를 아름답게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보면 사랑채를 별도로 떨어진 듯 처리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는 떨어져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안채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내외벽’이라고 하는 가벽을 만들었는데,내외벽의 아랫부분이 뚫려있다.
주인은 안채에서 작은 구멍으로 방문객의 발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에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동양사상에서 동쪽을 서쪽보다 중히 여긴다. 동쪽 궁궐에 왕자를 살게 하여 동궁이라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시어머니 방이 서쪽인 반면 며느리 방은 동쪽이다. 며느리 방은 윗방 아랫방을 나누어
미닫이로 칸을 두었다. 아랫방은 일상 생활용이며 윗방은 육아전용이다. 자녀의 나이가 7살에 이르면
공부방으로 옮긴다. 남녀칠세부동석은 남녀의 구분도 짓지만 학문에 전념할 시기가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 공부방에 자녀를 서방님이라 부른다
이은시사(離隱時舍)ㅡ 사랑채
다른 고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가 특징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안고지기 문(안쪽 미닫이문을 바깥쪽
여닫이 문과 겹쳐 여닫을 수 있는 문) 은 미닫이와 여닫이문의 기능을 합쳐 만들었다. 미닫이문은 열었을 때
반은 가려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닫이문의 기능을 합친다. 사랑채에 손님이 많을 경우 안고지기 문 뒤의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둘째는 '일영표준'이라는 표식이다. 정남향의 고택 툇마루 아래 축대 끝에 해시계를 두었다. '일영표준'이라
적힌 앞에 기물을 설치하여 시간을 헤아린 모양이다. 현재 일영표준에 세웠던 기물은 다른 곳에 보관 중이다.
300여년 세월 속에 마모된 옆에 새것을 만들어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무산십이봉 (자료사진)
정원 화단의 돌도 12개이다. '무산십이봉'이다
무산십이봉은 중국에 있는 산 이름으로 중국 시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산이다
이 십이봉에는 선녀가 산다는 전설이 있다
석가산'
금강산을 상징하는 석가산이다 금강산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사랑채에 앉아서 마루 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금강산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명재고택은 금강산 구름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집주인 역시
일반 사랑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위에 사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
돌솟대 명재 윤증
송시열과 윤중의 부친인 윤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조선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에 있기 때문인데, 퇴계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율곡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라 할 것이다.윤선거와 송시열은 집권세력인 같은 서인으로 요즘으로 치면 여당이었다. 또한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다.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윤문거의 며느리, 즉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조카며느리였다 윤증은 9세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병자호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어머니 공주 이씨와 누이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신한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만다. 이때 어머니 공주 이씨가 목을 매고 자결한다. 청나라 병사에게 욕을 보는 수모를 겪느니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자신을 지켰던 것이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도 친구 권순장, 김익겸과 함께 청군이 쳐들어오면
의병을 일으켜 분연히 싸우다 순절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손 한번 쓸 새도 없이 청군이 밀려와
강화도 성을 점령해 버렸다. 이때 순절을 약속했던 두 친구는 김상용이 분신하자 이어서 순절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노비 복장으로 변장해서 강화도를 몰래 탈출한다 술이부작 [述而不作] ㅡ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 송시열은 당시의 남인인 유학자 윤휴가 사서 삼경 중 중용에 대해 집주(해석)를 달자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인다
윤휴의 오랜 친구였던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제도 개혁론을 수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친구 편을 들었다
.송시열의 경우 주자의 학문을 절대시하는 자세를 보인 반면, 윤휴나 윤선거의 경우는 주자도 비판받을 수
있다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던 것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와 절교를 한다.
두 사람의 논쟁은 윤증에게로 이어져 서인을 노론·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후 효종의 죽음이 계기가 된 예송논쟁은 이 감정의 앙금이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윤휴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기 때문에 1년설을 주장한 것이라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실각한 송시열은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사소한 예법이나 감정싸움으로 인한 보복의 악순환으로
윤휴가 처형되고 이어 무려 1백여명의 남인들이 사형·유배·삭탈관작 등의 화를 입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을 누구보다 일찍 깨닳은 윤증은 결국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반려하며 일생을 학문에만
매진하였다.윤휴를 둘러싼 송시열과 윤선거의 갈등은 이후 윤선거 사후에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 윤증은 부친인
윤선거가 죽었을 때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하였으나 송시열은 ‘친구와 부인이
모두 순절했는데 윤선거가 혼자 살아나온 것은 내 덕이 부족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고 썼다. 윤증이
죽은 자에 대한 예가 아니라며 이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자 송시열이 끝내 거절당하자 절교했다고도 한다 이를 송시열이 살던 회덕과, 윤증이 살던 이성의 첫 자를 따 "회니시비"라 한다
아직까지도 윤증의 파평(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효종대 부제학을 지낸 유계는 『가례원류』라는 책을 썼다
윤증의 스승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 가례원류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아들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 발간되는데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으며 '스승을 배신한 패륜아'라고 비난했다. 서기 1714년 86세로 윤증이 사망했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수년 후 그 일이 탄로나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화가 나서 절교 편지를 보냈다.
스승이 쓴 책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난 윤증은
두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이를 가리켜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한다 하지만 윤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당시의 임금 숙종은 이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또한 『윤증연보』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사가 무려 2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그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백명의 유생들이
포함돼 있었다.더구나 그의 집은 서울도 아닌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라는 한적한 시골까지 2천여명의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했던 것이다. 윤증의 숙부 윤문거 직계 후손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자 대통령 후보의 방계 조상이다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아버지까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고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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