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 俗 部 門
<目 次>
Ⅰ. 槪 要
Ⅱ. 通過儀禮
1. 產 俗
2. 育 俗
3. 書堂俗
4. 冠 禮
5. 婚 禮
6. 喪 禮
7. 祭 禮
I. 槪 要
江原文化研究所에서 年例行事로 하고 있는 江原道內의 文化調査가 今年으로 꼭 열번째가 된 다. 그동안 山岳中心의 調査 海岸線을 따른 港浦口의 調査 嶺路交叉地域의 調査등 여러 地域에 對한 調査를 해 왔으나 水系를 따른 水系文化의 調査는 한바 없어 今年은 蟾江流域에 關한 調査를 實施하였다.
蟾江은 横城郡 晴日面 鳳鳴里의 泰岐山 수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홀러 甲川面 境界에서 東쪽으로부터 홀러 온 甲川을 합하여 公根面 梧山里 앞에 이르러 北西 쪽에서 오는 錦溪川을 다시 합하고 横城邑 부근에서 北川이 되고 横城邑에 이르러 東쪽에서 오는 前川을 合한 뒤에 原州郡 호저面에 이르러 原州JII(鳳川)을 合한 후,이어 書院川 玉溪川 梨11|川 및 沙堤川을 合流하여 原州郡 地正面을 지나 文幕에 이르러 文幕平野를 이루고 富論面 興湖里 부근에서 南漢江으로 홀러드는 江이다.
江原道 嶺西地域을 흐르고 있는 강은 五臺山에서 發源하여 忠淸道를 거쳐 漢江에 이르는 南漢江系와 金剛山과 雪嶽山에서 發源하여 春川을 거쳐 京畿道 兩水里에서 南漢江과 合水되는 北漢江系의 이대 幹流가 있고 이 兩幹流의 中間을 흐르고 있는 江이 蟾江이다. 南漢江은 그 發源을 江原道에서 했으나 流域의 一部에 忠淸道가 있고 北漢江은 一部가 休戰線地方에 있어 調査活動이 現時點에서는 不可能하다. 이러고 보면 江原道에서 發源하여 他道를 거치지 아니하고 漢江에 이어지는 江은 蟾江 밖에 없고 이러한 点에 이번의 調査對象地를 섬강으로 잡은 綠由의 하나가 있다. 섬강은 강원도 嶺西지역의 中心部를 흐르는 강이다. 南漢江이 강원도 남부를 흐르고 北漢江이 강원도 북부를 흐르고 있는데 이 南漢江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강이 섬강이므 로 이 江의 自然地理的 여건으로 보았을때 江原道의 한가운데를 貫通한다는 点에서 水系文化的側面에서 한번은 눈길을 돌릴 값이 있는 강이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지난날 文化의 傅播가 水系다라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섬강수계는 강원도에서는 重耍한 幹流의 하나이고 이 水系에 옛날에는 舟運의 便이 있었던 곳이기에 注目이 가는 곳이다.
섬강수계에는 横城 原州의 두개의 郡과 原州市가 있고 江原道에서는 原州와 横城을 한데 묶어 原横城이라 通稱하는 俗稱이 있다. 原州와 横城은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高句麗時代 부터 獨立된 行政區域으로 되어 있으나 이 두 고을이 섬강에 의하여 連接되어 있어 거이 同一 한 化圈域으로 여겨 왔음으로 이 지역을 通稱할 때는 原横城이라는 俗稱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하나의 水系가 지닌 文化的 意義는 큰 것이 있고 江原文化硏究所에서 여러해동안 강원도 各지역의 文化調进틀 한바 있으나 水系文化調在는 이번이 처음으로 調査對象地는 横城에서 甲川面 梅日里와 橫城邑 邑下里, 原州에서 地正面 艮峴里를 擇하였다. 이 세곳을 택한 緣由는 이 세 마을이 다 섬강의 本流에 걸쳐 있는 마을로 梅日里는 上流地域 邑下里는 中流地域 艮峴里는 下流地域이라는 地域性의 암배에 留意하였음을 밝혀 둔다.
< 提報者 >
横城郡 甲川而 梅日里
朴淳甲 (72)
李道普 (78)
洪顯鳳 (81)
鄭壽安 (81)
金德龍 (75)
徐春潭 (73)
周泰會 (81)
橫城邑 邑下里
李榮珪 (75)
崔榮培 (75)
李世萬 (76)
李在甲 (73)
害圭楠 (78)
林容王 (77)
原州郡 地正而 良峴里
柳聖美 (79)
沈相浩 (62)
沈相儀 (72)
沈文變 (70)
柳東九 (75)
李仲馥 (63)
李東變 (73)
李玉圭 (61)
李基蓮 (72)
Ⅱ. 通過儀禮
崔 承 순
1. 產 俗
⑴ 祈 子
세 調査部落이 다 지금은 祈子의 俗이 거이 없으나 흑 他人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게 하는지 의 與否도 調査에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產兒制限은 都市 뿐만 아니라 農村에서도 잘 지켜져 거이가 近年에는 二子女 以上 두지 아니하게 되었고 受胎할 수 있는 婦女子가 學校敎育을 받은 婦女子이기에 지난 날과 같은 土俗信仰에 의한 祈子는 거의 없어졌다.
이번의 調査地域에서도 光復後까지도 祈子의 習俗이 있었다. 甲川面 梅日里에서의 祈子의 當 處는 洞里 山神堂에서도 했고 이 곳은 섬강의 發源地인 泰岐山이 있어 祈求의應感은 名山이 靈驗하다하여 泰岐山에서 祈子致誠을 했다.
橫城邑에서의 調查에서도 光復後까지 祈子俗이 있었으나 여기서는 사람이 많이 가지아니하는 溪谷에 當處를 定하고 祈子를 했으나 祈子處로 널리 알려진 곳은 없고 여기서는 泰岐山 보다 维岳山이 더 가까워 维岳山에서 하기도 했다.
地正面 艮呢里도 이 習俗은 上記 두 地域과 크게 다를 바 없고 여기는 現在는 山神堂이나 城 隍堂이 없다. 이 곳의 元老들의 提報에 의하면 山神堂이나 城隍堂이 있을 때도 이 곳에서의 祈子當處는 큰 바위와 같은 自然物이 되어 있었다.
初產 때 產婦가 親媤家 어느 쪽에서 出產하느냐에 關한 調查를 했던 바, 지금은調查地域에서 는 病院에서 出產하기도 하고 혹 親家에 가서 出產하기도 하며 혹 媤家에서 출산하기도 하여 正確한 통계는 잡을 수 없으나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親媤家 出產이 半半程度로 推算된다는 提報者의 口述이다. 出產處를 親媤家 中 한 곳을 선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事情이 있을 때에 限하는 수가 많다. 첫째 初產일 때, 둘째 한 집에서 年에 두번의 出產이 있을 때 產處를 선택한 다.
初產일 때 產嫌는 精神的인 부담이 크므로 比較的 마옴 편하게 出產에 임할 수 있는 곳이 親 家이기에 產日이 臨迫하면 產婦는 親家에 가서 친정 어머니의 바래질옴 받으며 出產하기를 願하여 친가에서 출산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친가 출산은 거이 초산에 限하고 두번째 부터는 시가에서 出產한다. 출산처의 선택에 관계 되는 것에 俗僧으로 연유한 것이 있다. 이것은 江原道 內의 거이 모든 地域에 分布되어 있는 俗信으로 한지붕 밀에서 1年에 2回의 출산이 있으면 不吉하다는 俗信이다. 이 것은 사람일 때는 더 말 할 나위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집에서 기르고 있는 家畜의 出產과도 同年內에는 겹쳐서는 아니 된다는 俗信이 있다. 이런 탓으로 한해의 두번의 한지붕밑 出產올 避하기 위하여 親媤家中 어느 한 곳을 產處로 擇하게 된다. 이 俗習은 세 調查 地域이 다 같다.
(3) 出產禁忌
出產禁忌는 아기를 懷姙하였을 때의 禁忌와 出產後의 禁忌가 있고 禁忌의 對象도 本人禁忌와 家族禁忌가 調査되어 진다. 또 禁忌自體로는 行爲禁忌와 飲食禁忌의 두가지가 있다. 以上과 같은 禁忌는 이번의 調査地域에만 있는 것은 勿論아니고 全國 어디에서나 있는 一般化된 出產禁忌로 調查地域의 特有禁忌는 調査되너지지 아니한다.
(4) 胎處理
出產의 첫 過程이 胎處理이다. 胎를 이지역에서는 “아기집”이라고도 불러 그 아기의 運命과도 연계시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胎를 자를 때 쇠불이를 쓰지 아니하고 竹刀등으로 자르는 地域도 있으나 여기서는 가위로 잘라 태를 태운다. 王室에서는 胎를 重視하여 王子의 胎는 “태호”에 넣어 地師가 風水를 보아 吉地에 埋胎하는 習俗이 있어 지금도 各地方에 있는 胎峰이라 불리우는 峰은 거이가 王子의 胎를 埋胎한 峰으로 보면 되고 그 實例가 寧越에 있는 正祖胎室 이 그것이다.
民家에서는 風水까지 보아 吉地에 처리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태처리에 埋胎 燒胎 棄胎 등 서너가지 方法이 調査되어 진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胎를 燒胎하고 있다. 大門앞 마당을 파고 거기에 왕겨를 넣은 뒤 胎를 왕겨 속에 묻어 불을 질러 태운다. 겨에 불을 지르면 단 몇분에 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서서히 타듈어간다. 胎를 태우는 것은 難治病에 걸린 사람이 胎파고 거기에 왕겨를 넣은 뒤 胎를 왕겨 속에 묻어 불을 질러 태운다. 겨에 불을 지르면 단 몇분에 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서서히 타들어간다. 胎를 태우는 것은 難治病에 걸린 사람이 胎를 먹으면 낫는 다는 俗信이 있어 胎 도둑이 있었음으로 이 것을 피하기 위함이라 한다. 여기서는 태를 태운뒤에 그 재를 모아 섬강물에 띄운다.
橫城邑 邑下里에서는 燒胎를 하는 家門도 있고 섬강물에 胎를 버리는 家門도 있다. 地正面 艮峴里에서는 胎는 태우고 있으며 그 節次나 方法이 甲川面 梅日里와 다르지 아니 하다. 여기서도 섬강을 끼고 있으나 胎를 물에 버리지는 않고 태운 뒤에 그 재를 버리고 있다.
江原道 東海岸 一部漁村에서는 胎에 돌을 달아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嶺東地方 一部 湖畔취 락에서는 胎를 湖水에 버리고도 하는데 蟾江流域의 취락에서는 섬강이 있어 물에 홀려버릴 수도 있을터인데 邑下里의 調査에서 나타난 一部住民을 除外하고는 다 태우고 있고 그 재를 물에 훌려버리고 있다.
(5) 금 줄
出產이 있으며 產標로 금줄을 쳤는데 지금 病院에서 出產했을 경우는 금줄을 치지 아니하고 이번의 調査地域에서는 產標로 아직도 금줄을 치는 家門이 더러 있고 금줄은 產標로 不淨을 가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外人의 出入을 삼가라는데 있다.
금줄을 쳐 놓은 期間은 一般的인 通例와 다를 바 없고 標物도 男子는 숱과 고치 각각 3개 女 子는 숱과 소나무 가지 3개로 되어 있어 通例와 다를 바가 없다. 邑下里와 艮峴里에서는 調査되어지지 아니하였으나 梅日里에서의 調査에 의하면 女子를 낳았을 때 금줄에 솔가지를 꼽는데 이 때 솔가지는 소나무곁가지의 끝部分을 잘라서 꽂는 것이 아니고, 소나무 상수네(가장 윗部位)를 잘라 꽂는다고 한다. 소나무의 상수네를 잘라 꽂는 것은 소나무는 맹아가 나지 아니 하므로 어린소나무의 生長点을 잘라 놓으면 그 나무는 더 크지 못한다. 女子의 금줄에 소나무의 상수네를 쓰는 것은 生長点을 잘랐으니 이제 더는 女子를 낳지 말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提報者는 말한다.
금줄의 새끼는 왼새끼를 꼬고 男子의 경우 고치를 다는 것은 男根과의 同類形狀에서 由來하 였고, 男女 共히 술을 꽂는 것은 숱에 不純物 吸引性이 있어 不淨을 여기서 吸引하고 그 以上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숱과 不淨과의 關係는 삼신을 빌 때라던가 神堂에 致誠을 드릴 때 이남박에 물을 담아 거기에 숱을 띄워 不淨을 가래는 行事에서도 나타나 있다.
2. 育 俗
育俗은 아이가 나서 자라는 過程의 習俗으로 病의 치유 百日 돌등 아이를 기르기 위한 傳統
的 習俗을 말하고 收養子習둥도 이 育俗의 하나이다.
(1) 삼신할머니
이번의 調査地域에는 삼신할머니의 標徵이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出產을 하고 나면 지금도 첫국밥을 미역국으로 먹는 習俗은 아직도 있고, 삼신할머니의 標徵은 없으나 삼신할머 니에게 삼신상을 차려놓고 비는 家門은 더러 있다.
出產 때 첫 국밥에 쓰는 미역은 親庭에시 出產 할 때나 媤家에서 할 때나를 不問하고 친정어 머니가 준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으나 섬강流域에서는 親姆家 가래지 아니하나 다만 이 때 쓰는 미역을 사올 때 꺾지 아니한다는 것은 거이 共通性이 있다. 시장에서 미역을 사올 때 가지고 오기 不便하더라도 긴것을 그대로 가져 오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둥글게 말아 돌고 오지 가지고 오기에 편하다고 몇번 꺾지는 아니 한다. 첫국밥에 쓸 미역을 꺾으면 產母가 難產 한다는 俗信이 있기 때문이다.
梅日里와 横城의 邑下里에서는 삼신할머니의 標徵을 알고 있는 提報者가 없으나 艮峴面에는 지금은 없지마는 얼마전까지 삼신할머니의 標徵도 있었고 그 祈求行事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內容에 關하여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있다. 艮峴里는 初產을 親家에서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아니 한 경우 보다 많고, 初產의 場所가 어디이던 간에 첫국밥의 미역은 반드시 親家가 준비하게 되어 있다.
삼신 床은 梅日里와 色下里에서는 아기가 나면 우선 沐浴을 시키고 곧이어 미역국과 白米밥 을 지어 소반에 놓고 안방 구석진 곳을 向하여 親母나 媤母가 아기 잘 자라게 해 달라는 사설을 외우며 빈다. 巫을올 데려다 하는 家門은 없고 親姆母가 하거나 친시모도 없을 때는 산바라질을 하는 婦人이 하게 되어 있다. 삼신床은 祈求行事가 끝나고 나면 그 자리에 돌려놓고 產母가 첫국밥을 먹는다. 삼신床에는 미역국과 白飯 以外에 간장만 놓고 다른 副食은 놓지 아니한다.
(2) 收養子
지금은 거이 없어진 習俗이나 아이가 자랄 때 탈 없이 잘 자라 달라고 賣子 卽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살 사람은 收養父母가 되고 팔린사람은 산사람의 수양아들 또는 수양 딸이 된다. 이 것은 토속신앙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있는 일로 이번 調査에서도 있었던 것을 傳聞한 提報者는 있으나 그 內容을 상세히 알고 있지는 아니하다. 主로 收養母가 되는 사람은 巫女일 경우가 많다하고 養子를 해야 無病長壽한다고 하기 때문에 이 貴한집 子孫으로 賣子한 경우가 많다.
(3) 作 名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育俗과는 別로 關係를 가지지 아니하나 앞서의 收養子가 無病長壽 와 관계 되는데가 있듯이 作名도 無病長壽의 育俗과 관계되는 것이 있다. 아이가 난지 얼마만에 作名을 한다는 規範이 있는 것은 아니나 되도록이면 빠른 時日內에 이롬을 짓는다. 옛날에는 유아의 死亡率이 높아 이름을 일찍 짓지 않고 出生申告도 심하면 아이가 홍역을 치리고 나서야 이제는 長成 할것 같다고 이름도 짓고 出生申告를 한다. 이런 탓으로 戸籍上의 나이와 실제의 나이가 틀리는 것이 非一非再였다.
이름 가운데 戸籍上의 이름은 行列을 따라 지으나 兒名이라하여 아이 때 아무렇게나 부르는 이름을 도 따로 지어 전에는 아이 때는 이 兒名을 많이 불렀다. 이러한 現象은 이번의 調查地域이 다 그러하였고, 이 兒名을 천하게 지어부르면 無病하다하여 “바위” “쇠들” “개똥” “쇄똥” 등으로 지어 불렀다. 이것도 앞서의 收養子의 경우와 같이 유아사망이 잦아 孫이 貴한 집에서 아들에게만 限하던 것으로 女兒에게는 이러한 兒名은 짓지 아니한다.
(4)治 病
育兒期의 가장 큰 病이 紅疫이고 홍역을 無事히 치러야 사람구실을 한다고 하여 紅疫의 異名 을 “구실”이라고도 한다. 이에 對하여는 같은 마을의 提報者中에 異說을 말 하는 사람이 있다. “구실”은 “구실”이 아니고 “구슬”(玉)의 음와로 홍역을 할 때 온몸에 구슬같은 斑點이 내부쳐야 고비를 넘기게 됨으로, 구실이 아니라 구슬이라고 主張하기도 한다.
育兒때에 病이 나면 자금은 農村도 의료보함이 되어 있어 病院에서 治療하지마는 在來式 治 療에는 3가지 方法이 있다. 그 하나는 삼신할머니가 덧나서 병이 났으니 삼신을 달래기 위하여 비는 行爲이고 다음 治藥은 傳來漢方이나 土俗的으로 傳하고 있는 토속식 약으로 치료하는 方法이 있고, 혹 굿으로 病을 고치려고 巫堂을 불러 푸닷거리를 하기도 한다. 지금은 재래식의 이런 方法은 거이 없어지고 있다.
(5) 百 日
近年 產兒의 制限으로 農村도 子女數가 적어졌고 거기에다 經濟的事情이 좋아져 男女를 不問 하고 百日 잔치를 하고 있다. 梅日里에서의 提報에 의하면 前에는 幼兒死亡이 많아 百日을 하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여기는 俗信이 一部地域에는 있어 백일을 하지 아니하는 家門도 있었으나 지금은 거이가 하고 있다.
이번의 調查地域에서는 그 지역 나름의 特別한 百日行事가 調査 되어진 것은 없다. 돌에는 돌床을 차리는 行事가 있지마는 百日에는 百日床이라고 따로 차리는 것은 없다. 다만 떡을 하여 이웃에 나누어 먹는데 섬강수계에서는 모든 地域이 百日떡으로 백설기, 송편, 수수떡을 한다. 백설기는 먹을 사람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나누어 먹기가 좋은 떡임으로 百日이 나 돌과 같이 이웃과 나누어 먹을 때는 흔히 하는 떡인데다 白米以外의 다른 材料를 넣지 아니 하므로, 고사 致誠祭等 淨潔을 耍할 때 많이하는 떡이다. 수수떡은 그 빛이 붉으므로 옛부터 僻邪의 뜻이 있는 떡으로 아이의 無病을 祈願하는 念願이 있는 덕이다.
(6) 돌
百日 때와 같이 近年 구女를 많이 두지 아니 하는 탓으로 돌을 盛大히게 하고 있다. 전에는 드물던 習俗이였으나 요지음은 돌에는 반두시 寫眞을 찍옴으로 돌床도 盛大하게 차리고 돌빔도 格式에 다라 盛裝을 시키는 俗이 생겼다고 提報者들은 말 하고 있다. 우리의 經濟事情이 좋지 못하였고 子女도 많이 나을 때에는 맏아들이나 돌잔치를 했지 그밖은 하지 아니 하는 경우도 많고 설사 한다 할지라도 제 格 대로 하지 아니하는 수가 많았다. 요지음은 男女 가리지 아니하고 한복차림으로 男子인 경우는 복건을 씨우고 女子일 때는 한복에 조바위라는 帽子까지 씌운다. 이날 돌잡이 아이에게는 한복에 복주머니를 달아준다. 이 곳 習俗에 돌飲食은 공으로 먹는 법이 아니라는 俗이 있어 돌집에서 초청을 받으면 반드시 禮物로 아이의 옷이나 속옷 잘하면 반지등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반지인 경우는 直接 돌잡이 아이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物品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돈을 갖지고 갔다가 올때쯤 “돌잡이 덕에 돌을 잘 먹었으니 오늘의 主人인 돌잡이나 보고가자”고 하여 데려오면 한번 안아주고 그 아이의 복주머니에 돈을 넣어준다. 따라서 돌잡이 服裝에서 福주머니는 겉치레의 하나이기도 하지마는 이러한 實用性도 있다.
돌床은 이벙의 調査地域에서 다른 것이 발견되지 아니하였다. 飲食은 百日 때와 다르지 아니 하고 돌床은 男女 없이 다 차리고 있다. 돌床에는 붓 책 돈 태실 쌀등을 놓고 성장을 한 돌잡이 가 돌床앞에서 무엇을 먼저 잡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장래를 점친다. 섬강수계에서는 돌음식으로 송편을 하고 있는 것이 特異하다. 백설기와 수수떡은 반드시 만든다.
나서 돌까지를 育俗에 넣어 調査하였다. 育俗의 限界를 어디까지 하느냐하는 것은 여러가지 로 問題가 있어 古儀禮에 의하면 四禮가 시작되는 冠禮 前까지를 育俗이라 보아도 無妨할 것 같아 冠禮前 까지로 限定하였을 때 敎育俗인 書堂俗을 빼고 나면 돌이 育俗의 하나의 基點 구실이 되기에 돌까지를 育俗으로 限하였다.
3. 書堂俗
書堂俗은 어찌 생각하면 育俗中의 敎育俗으로 볼 수도 있으나 本調査에서 모든 民俗이 다 變 하였다고는 하나 現在가지 行하여지고 있는 習俗을 調査하였고 설사 오늘 一般的으로 通用이 되지 아니하는 習俗은 現在의 狀況이 어떠하다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이 書堂俗이 오늘에 繼承 된 것을 學校敎育이라 할 수 있으나 書堂과 오늘의 學校는 敎育機關이었다는 点에는 共通性이 있으나 構造나 機能的으로는 同脈의 것이 아니다.
現在 江原道內에는 在來式 書堂이 開設되어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혹 放學期間中에 郡의 鄉校나 마을에서 漢文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 書堂 비슷한 것을 不定期로 開設하여 敎學하고 있는 것은 學童들이 餘暇로 하는 工夫이지 지난 날의 書堂과 같이 볼 수는 없다.
이 書堂俗은 지금은 完全히 없어진 習俗이기는 하나 아직도 生存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書 堂敎育을 받은 사람이 相當數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날에 있어서는 오늘의 國民學校 義務敎育制와 같이는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適齡期의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기에 後日을 위하여 여기 調查記錄한다. 10年 前만하여도 江原道의 民俗調査에서 간혹 書堂의 訓長을 지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나 지금은 書堂에서 修學했던 經驗이 있는 學童들도 7, 80세의 고령이므로 訓長은 거이 만날 수 없다.
(1) 書堂의 開設
이번의 섬강수계 3調査部落에 書堂은 다 있었고 書堂에서 修學했던 經驗이 있는 提報者들을 만날 수 있었다. 大體로 書堂敎育은 初學入門인 千字에서 시작하여 經書까지 하면 修學의 年限과 關係 없이 修了하는 것이 通例로 되어 있으나 書堂修學의 經驗이 있는 提報者中에서 三經까지 書堂에서 修了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實際로 筆者 自身 10餘年을 江原道內의 民俗 調査를 했으나 10餘年前 高城郡 竹旺面 五峰里에서 만난 前職書堂訓長 成氏와 東海市 新興洞에서 만난 前職書堂訓長 張氏 外에는 書堂修學의 有經驗者로서 三經까지 마쳤다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번의 調査에서도 梅日里에서는 書堂修學의 有經驗者中 大部分은 千字 童蒙先習等을 읽다 말았고 그 中 한 사람이 12세에 通鑑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事情은 橫城邑 邑下里나 原州의 良峴里에서도 같았다. 四書를 읽고 文選을 보고 律한首 지을 수 있으면 識者로 대접된다는 共通性이 있다. 儒家의 敎育機關인 書堂에서 經書의 全課程을 마치지 못하고 中途에 書堂을 그만 둔 理由를 提報者에게 물었더니 첫째는 지금의 上老人이라 할 수 있는 7, 80老人들도 學校 敎育을 받은 사람이 많아 書堂에 다니다가 學校에 入學하게 되어 書堂課程을 마치지 못하였다는 사람과 學校에는 가지 아니하였으나 서당에서 通鑑을 읽을 나이가 되니 家事에 從事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中途에 서당을 폐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書堂의 全課程을 이수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理由이다.
(2) 訓長의 形態
書堂은 私學이기에 地域의 형편에 따라 訓長이나 開設의 形態가 다를 수 있다. 書堂은 自然部 落 單位로 거이 있었음으로 오늘의 學校와 같이 書堂專有建物을 갖일 수도 있고 訓長이 自己집 에서 書堂을 開設 할 수도 있고 訓長을 外地에서 迎入하여 特定家屋에서 書堂을 開設하지 못하고 學童의 집을 一定期間 順次的으로 돌아가면서 書堂을 開設하는 3가지 形態가 있다. 이번의 調査地域內에는 書堂建物을 가지고 있는 書堂은 한 곳도 없고 訓長이 自己집에서 書堂을 開設 한 이른바 座訓과 學童의 집을 一定期間 돌아가면서 書堂을 開設하는 番次의 두 種이 있다. 梅日里에는 座訓과 番次가 다 있었고 邑下里는 番次書堂은 없었고 座訓書堂만이 있었고 艮峴里도 訓長집이 곧 書堂인 座訓書堂 만이 있었다. 書堂이나 訓長의 形態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 곳의 글에 關한 關心度를 엿볼수 있다. 書堂의 建物을 오늘의 學校와 같이 專有建物로 지을 수 있는 部落은 學問에의 熟意가 強한 部落이고 座訓으로 되어 있는 部落은 그 部落에 書堂訓長 할 程 度의 識者가 定住해 있옴을 表象하게 되고 番次訓長이라면 그 마을에는 書堂訓長할만한 識者도 없어 外地에서 迎入하여야 할 마을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하나, 이것이 絶對性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例컨대 한 마을에 學問이 깊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個人의 事情으로 書堂訓長 되기를 拒否하면 職者는 있으되 番次訓長을 두게 되는데, 조사지 중 梅日里만이 경우에 따라서 番次도 있었다.
(3) 料 米
訓長의 보수를 料米라고도 하고 艮峴里에서는 料米라는 말 보다 學債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보수를 料米 外에 講米라고도 부르는데 料米나 講米는 現金으로 보수를 주지 아니하고 쌀(米) 로 주었기에 料米 또는 講米라 이름 했고 學債라고 하는 것은 글배우느라 진 負憤라는 말로 3部落中 유독 艮峴에서는 學債라고 한다.
梅日里에서 料米는 白米일 대는 年5斗이고 벼로 받을 때는 10斗이다. 邑下里에서도 年에 벼 한가마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記憶된다 할 뿐 提報者의 記憶이 正確하지 못하다고 添述한다. 長峴에서는 白米 한가마로 되어 있다. 이들 學債는 部落의 형편 學童數둥에 의하여 다르고 料米는 書堂의 學父兄會인 堂俞에서 每年 決定한다. 江原道內의 어던 部落에서는 不均等 配當 卽 家勢가 富하면 더내고 가난하면 덜내는 書堂도 있었는데 이번의 調査部落은 모두가 均等 配當을 하고 있다.
(4) 敎 課
入舉은 年初에 하는 것이 原則이나 随時入學도 可能하고 敎課는 舉年制가 아니고 敎科中心制로 되어 있다. 따라서 入學은 같이 하였다 할지라도 材質이 우수한 사람은 年末가지 千宇와 童蒙先習 百聯抄까지 完修하였는데 才質이 좋지 못한 學童은 年末에 千字도 다 띄지못할 수도 있어 書堂敎育은 個人能力主義敎育이다. 敎科課程은 어느 書堂이던 다를 바가 없고 先後修의 順次까지도 비슷하다. 三經을 먼저 읽고 四書를 나중 읽는 書堂은 없고 다만 四書는 그 讀順이 一部 다를 수도 있으나 이 것도 極히 例外로 거이는 모든 書堂의 請順은 같다.
書堂敎育은 暗記爲主의 敎育으로 배운데를 얼만치 어떻게 理解하고 있느냐가 問題라기 보다 는 原文을 暗誦하느냐 못하느냐에 의하여 及落이 評價 된다. 千字의 課程을 다 띄었다는 것은 千字를 다 順序대로 暗誦한다는 말이다. 千字에 있는 글字를 다 理解한 것으로는 千字를 제대로 띈 것은 아니고 이러한 것은 實生活에서도 援用되고 있다. 卽 지난 날의 族譜를 보면 쪽마다 數字로 페지를 記錄하지 아니하고 千字文으로 記錄이 되어 있는 것이 許多하다. 이 것은 千字文을 알고 있는 것으로는 援用이 되지 못하고 千字文을 구 順序대로 한字도 틀리지 아니하게 暗記했 을 때 비로서 援用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暗記 爲主의 主敎科 外에 作文과 習字가 있다. 作文은 크게 둘로 行文作文과 律文作文이 있으나 律文作文을 爲主로 하고 習字는 粉板과 沙板에 글씨 쓰는 練習을 한다.
(5) 日 課
書堂敎育이 暗記爲主로 되어 있어 아침 부터 저녁 파할 때 까지 소리내어 朗讀하므로 書堂 近處에만 가면 글읽는 소리가 들려 서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침에 서당에 가면 먼저 訓長에게 절을 하고 前日 배웠던 곳을 暗誦한다. 이 암송이 막히지 아니하고 通하여야 다음 進度로 들어간다. 이 암송에는 本文의 암송과 內容의 解釋도 함께 한다. 午前中에 한번의 休息과 점심시간 오후의 한번의 休息 合하여 하루에 세번의 休息時間이 있다.
書堂行事의 하나로 初中終이 있다. 이것은 江原道 거이 모든 書堂에서 했던 것으로 學童이 얼만치 文句를 暗記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一種의 評價方法이다. 初中終의 方法은 江原道內 다른 地域에서한 것을 이미 調査한바 있으니 여기서는 略하거니와 이번의 조사지역 에서도 모든 서당에서 했고 甲川面 梅日里에서의 提報者中에는 이에 參與했던 사람이 있었다.
習學 : 서당의 교과를 크게 나누면 學科工夫와 習字의 두가지가 있다. 習字는 東洋에서는 옛 부터 身言書判의 하나로 사람을 評價하는 重要한 節目의 하나로 重視하였다. 종이가 귀하던 때라 練習을 종이에 할 수 없어 練習用器具로 粉板과 沙板이 있었다. 沙板은 함지와 같은 그릇에 세모래를 담아 그 表面을 고르게하여 여기에 막대로 글씨를 쓰고 그 表面이 다 차면 다시 손으로 表面을 고르게하여 되풀이 쓰는 것으로 原州郡 地正面 艮峴里에는 아직도 沙板으로 글씨 練習을 했던 提報者가 있었다.
粉板은 판자에 조개가루를 입혀 그 위에 기름을 먹여 절구어 만든다. 嶺東地方에서는 海岸에 조개가 많아 이 조개를 곱게 빠아 그 가루를 판자에 입혀 기름을 먹여 만드는 것이 通例인데 이번의 調査地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조개가루를 쓰지 아니하고 개뼈를 곱게 빠아 그 가루를 판자에 입혀 기름을 먹여 절군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조개를 구할 수 없고 돌가루를 낼만 한 石質의 돌이없어 개뼈를 쓰는 것이 通例로 되어 있다.
粉板 첫머리에 訓長이 體本을 써 주면 學童은 그 옆에 이 체본에 따라 臨書를 하고 臨書한 것이 紛板에 가득 차면 訓長의 體本만 남기고 學童이 쓴 글씨는 지워 다시 쓴다. 이렇게 하여 글씨가 어느 程度 익으면 다른 體本을 訓長에게서 받는다.
이 外에 漢詩를 지을 때 쓰던 분첩이라는 것이 이번 調査地域에서도 있었으나 이에 對하여는 이미 調查發表한 것과 다를 바가 없어 그 詳述을 피한다.
書算 : 書堂用具의 하나로 이번의 調査에서도 있었으나 이미 앞서의 調査에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아니 하다.
책씻이 : 곳에 따라서는 책거리라고도 하는 것으로 이번의 조사지역에서는 通例的으로 다 하였고 하는 方法이나 節次도 道內의 다른 地域과 다르지 아니하나 다만 그 명칭이 横城에서는 책거리라고 하지 아니하고 책 씻이라고 부르고 있다.
4. 冠 禮
冠禮의 消滅이 家門이나 地域에 따라 一定치 아니하나 近年 完全히 消滅된 것 만은 事實이 다. 冠賊는 지난날의 通過義禮 四體中의 成人禮로 士大夫家門에서는 나이 15歲前後하여 論晤를 읽은 少年이 하는 禮로 加冠禮 授字禮 謁廟禮 見尊丈嫌를 했으나 이번의 調査에서는 70歲前後 한 提報者中에는 冠禮를 한 經驗이 있는 사람이 드물고 80歲前後한 사람은 冠禮의 經驗이 있으나 이도 거이가 略式 冠禮를 했다. 이 略式 冠禮는 結婚 直前에 상투를 짜서 外形을 成人으로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提報者에 의하면 그 消滅의 時期는 대개 高宗年間의 斷髮令 以後이나 保守的 家門에서는 늦게까지 冠禮를 했고 일찍 開化한 家門에서는 冠禮廢止가 빠르다.
이번의 調査에서 冠禮를 하고 그 때 授字禮까지 했던 사람이 있다. 甲川面 梅日里의 鄭壽安 (81)老人은 本이 草溪로 이吾의 行列字가 鎬字이나 지금 戸藉에는 壽安으로 되어 있다. 本是는 이 壽安이 戸籍名이 아니고 冠禮때 授字禮에서 받은 字였던 것을 뒤에 戸藉을 할때 字를 이름으로 戸藉에 을려 戸藉名이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時期만 하여도 冠禮에서 授字禮를 했던것을 알 수 있다.
成人禮 가운데 男子의 成人禮를 冠禮라 하고 女子의 成人禮를 禮라고 하나 이번의 調査에서는 女子高齡提報者가 없어 그 狀況을 알 수 없으나 男子 提報者의 傅言에 의하면 女子의 視禮를 目睹한 일이 없다는 것으로 보아 禮는 冠禮 보다 먼저 消滅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男子가 結婚前日에 略式으러 상투를 짜는식으러 女子도 結婚前日에 채머리를 올려 비녀를 찌르기는 했다.
5. 婚 禮
(1) 婚 路
婚路라는 것은 두가지 意味를 가진다. 그 하나는 社會性이고 다른 하나는 空間性이다. 오늘의 自由結婚에서는 問題되지 아니 하지마는 舊式 結婚에서는 兩家間의 社會的 지체. 財產程度에 따라 議婚이 될 수 있는 相對가 있고 그렇지 못한 相對가 있다. 이것을 일러 婚路의 社會性이라 하고, 空間거리가 너무 멀어 結婚에 여러가지 不便이 있을 때도 議婚의 相對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곧 空間婚路로 지난 날에는 이 두 婚路가 議婚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婚路의 社會性에 對한 調査는 지난날의 身分울 드러내는 일이 되어 調査者도 公然하게 묻기 어렵고 提報者도 具禮的인 提報를 하기를 꺼려 調査地域의 具禮的인 狀況을 調査하기 어려운데가 있다. 다만 婚路의 空間性은 別로 구애 받을 제약이 없어 調査가 可能하다.
甲川面 梅日里의 경우는 部落內婚과 面內婚이 많다. 部落內婚이 많다는 것은 이 部落이 集姓 村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部落이 同一性의 集姓村일 때는 部落內婚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面外婚으로 가장 많은 것이 晴日面이고 屯內와 橫城邑도 婚路가 成立되어 있다. 郡外婚으로 比較的 많은 곳이 洪川郡 瑞石面이라 한다. 郡外婚路인데도 불구하고 洪川의 端石面과 婚路가 이어져 있는 것은 甲川과 端石 사이에 來往이 많고 彼此間의 生活習俗이 類似한 데가 많은데 緣由한다. 隣接郡인 平昌과 大和에도 婚路가 트이어 있기는 하나 稀少하다. 南쪽으로는 橫城邑까지가 많고 原州는 간혹 있기는 하나 드물다.
橫城邑은 郡廳所在地인데다 東西로는 京江國道가 지나고 南北으로는 內陸을 貫通하는 道路가 지나고 있어 交通의 要衝地로 往來가 많은 곳이여서 婚路도 多岐한 곳이다. 橫城邑을 中心한 都內의 모든 面과 婚路가 通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드물기는 하지마는 東으로는 平昌을 거쳐 江陵까지 西쪽은 京幾道 楊平 南쪽은 原州 北쪽은 洪川까지 婚路가 이어져 있다.
地正面 良現里의 婚路는 里內婚과 面內婚이 많고 面外婚으로는 文幕과의 婚路가 가장 두텁고 原州市內와의 婚路도 있고 京幾道 鱺州와 隣接하여 있음으로 그곳과의 婚路도 트이어 있으나 많지는 아니하다.
(2) 四 柱
定婚이 되면 全調査地域에서 四柱를 다 보내고 있다. 四柱의 記錄方法 四柱보 傳交方法等은 江原道의 다른 地域과 다른 点이 없고 新婦집에서 四柱 받는 方法도 이 地域 나름의 特色은 없다. 다만 四柱를가지고 가는 사람이 곳에 따라서는 中媒인이 가지고 가는 곳도 있으나 良峴里에 서는 그 마을에서 지체가 낮은 사람이 가지고 간다.
(3) 尊雁•酿禮
모든 調査地域에서 婚禮는 新婦집에사 하게 되어 있으나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新婦집이 極貧 하였을 때는 兩家 合意하여 新郞집에서 擧式하기도 한다. 婚禮를 하기 위하여 尊雁時에 맞추어 新郞의 新行이 新婦집에 당도하면 一行은 新婦집 이웃집을 빌려 여기에서 禮式에 必要한 準備를 하고 그 준비가 끝나면 尊雁을 한다. 尊雁 에 必要한 함은 모든 調査地域에서 다 社會的 지체가 낮은 사람이 지고 가고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함애비가 新郞을 引導하여 新婦집 초례마당에 이으러 함을 초례상 위에 벗어 놓는다. 江原道內에서는 家門이나 地域에 따라 함을 초례상에 놓지 않고 소반을 따로 놓고 그 소반 위에 놓는데도 있으나 여기서는 초례상에 놓으면 신랑이 그 함을 열어 木雁을 꺼내어 木雁을 높이 들고 “웨이”라고 크게 외치고 초례상에 놓으면 新婦 의 母자 받아 안으로 드려간다.
橫城邑 邑下里에서는 함애비가 함을 대청에 놓는데 이 때 소반에 淸水를 떠 놓고 木雁을 받아 新婦母親이 가져간다. 尊雁이 끝나면 곧 이어 酿級를 하기 위하여 酬禮床을 차린다. 초례청은 대청이 있으면 거기서 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당에 遮日을 치고 한다.
초례상 차리는 것은 같은 部落이라 할지라도 家門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地正面 艮峴里에서는 화병에 松竹을 꽂고 용덕 밤 대추를 놓고 床 양쪽에 新郞 新婦가 서서 交拜하는 것으로 끝인다. 이 때 혹 흘기를 읽으며 進行하기도 하고 흘기 없이 進行하기도 한다. 초례가 끝나면신랑은 上客으로 온 自己 尊親과 장인 來貧에게 절을 하고 큰상을 받는다.
(4) 新 房
江原道內에는 초례 뒤의 初夜까지의 몇가지 習俗이 있다. 그 하나는 초례 후 當日로 新郞집에 가서 폐백을 드리고 그대로 新郞집에서 新房을 치르는 類形이 있고, 초례후 그대로 신부집에서 新房을 치르고 三日후에 新郞집으로 가서 폐백을 드리는 類形이 있고, 초례를 신부집에서 치르고 當日 新郎집에 가서 謁廟와 폐백을 드리고 되돌아서서 다시 新郎집에 와서 新房을 치르는 세가지 類形이 있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당일도복으로 신랑신부가 함께 신랑집에 가서 폐백을 그날로 드리고 여 기서 新房옴 치린다. 橫城色 邑下里에서는 當日도복일 때는 梅日里와 같이 當日로 신랑집에 가서 거기서 新房을 치리고, 當日로 新郞집에 가자아니하고 신부집에서 新房을 치리는 家門도 있어 두개의 類形이 있다. 地正面 艮峴里에서는 초례후 신부집에서 그대로 新房을 치리는 것이 原則이나 家勢가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그 날로 新郞집에 가서 新房을 치린다.
當日도복으로 그날로 신랑집에서 신방을 치린 신랑 신부는 三日만에 再行이라하여 신부신랑 이 함께 신부집으로 온다. 이 때 甲川面 梅日里의 習俗으로는 반드시 엿을 고아 가지고 가게 되어 있다. 신랑이 초례후 신방 三日을 신부집에서 지낼 때는 신랑의 후객으로 따라왔던 尊親도 함께 三日을 신부집에서 머물고 신방 三日이 지낸 뒤 新郞新婦와 그 후객 一行이 新郞집에 갔을 때도 신부의 후객인 尊親도 여기서 三日을 지나고 가는 것이 慣例로 되어 있다. 新房을 치리 는 곳은 이번의 調査地域마다 다르나 三日 만에 再行을 가는 習俗은 다 같다.
新房엿보기는 全調査地域에서 다 하였다. 신부신랑이 신방에 들어 불을 끄면 문종이를 뚫고 안을 엿보기도 하고 혹은 말 소리를 엿듣기도 한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엿보거나 엿듣지 아니하고 신방 밖을 빙빙돌면서 신방을 지키는 습속이 있다. 이 습속은 신방을 보호 한다는 意味를 가진 습속이다.
(5) 幣 帛
지금의 新式婚禮에서 舊式 節次가 남아 있는 것이 幣帛이다. 이것은 婚禮節次 가운데서 뺄 수 없는 것으로 시집 식구에 대한 신부의 첫 人寧이다. 신부가 처음 신랑집에 이르면 祠堂에 謁廟 하고 다음으로 見舅姑禮를 한다. 이 見舅姑禮가 一名 幣帛드린다고 하는 것으로 堂內親 尊屬에게 술잔을 올리고 신부는 大禮服 차림으로 큰절을 한다. 이 때 신부의 큰절은 혼자하지 못하여 女人들이 부축한다. 調查地域의 家門에 따라 幣帛 받는 사람의 親等에 差異가 있으나 이 것은 繁族한 家門이면 가까운 親等에만 하고 그렇지 못한 家門에서는 堂內親을 거이 하고 있어 一定치 아니하다.
(6) 東床禮
신랑이 처가에 再行을 갔을 때 그 이웃의 신랑 또래의 靑少年이 신부집에 모이어 신랑을 달 고 주식을 나누어 먹는 一種의 놀이로 이번의 調査에서는 모든 提報者가 다 經驗을 했던 놀이다. 그 內容은 江原道內 各調査地域에서 조사된바와 다르지 아니하다. 事端은 처녀를 도적 맞았는데, 그것을 찾기 위한다는데서 시작하여 마침내 그 眞犯이 신랑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 죄과로 酒食을 내는 것으로 끝인다.
6. 喪 禮
(1) 臨 終
父母의 臨終을 하지 못하면 不孝라는 慣習이 있어 病者가 危重하면 外地에 나가 있는 아들이 나 出嫁한 딸들을 다 불러 모아 臨終을 하게 한다. 臨終은 故人의 直系는 勿論, 堂內親들은 다 하게 되어 있으나 外人은 臨終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常例로 되어 있는 것은 세곳의 調査地域이 다 同一하다. 임종때 코에 부드러운 솜을 올려 놓고 그 솜털이 숨결에 움직이면 아직 生命이 있는 증거로 보고 음직이던 솜털이 움직이지 아니하면 호흡이 끝나 운명했다는 것을 判識하는 習俗이 있다.
(2) 驗 襲
驗襲은 小驗이라하여 숨거둔 直後에 시신을 가즈런히 하는 節次와 入棺式에 수의로 가라 입 히고 시신을 마지막 거두는 大殮의 두 節次가 있으나 調査地域에 따라 細部의 사소한 差는 더러 發見이 되나 大要는 다르지 아니하다. 이 것은 四禮便覽과 같은 文典에 依據하고 있는 탓으로 差異가 크게 날 수 없는데 기인한다.
招魂 : 사람이 죽으면 사자밥을 지어 門前에 내 놓고 招魂을 한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사자밥을 밥 3접시 채 3접시 집신 3컬 돈 3개를 大門 앞에 놓는다. 橫城邑 邑下里에서도 梅日里와 同一하고 地正面 艮峴里에서도 供物은 다르지 아니하다.
招魂하는 方法은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臨終했던 堂內親中에서 招魂할 줄 아는 男子가 故人의 살이 다은 속 적삼을 사다리를 지붕에 놓고 반쯤 을라가 그 적삼을 지붕 위에 던지고 “朝鮮國 橫城郡 甲川面 梅日里 姓名 복복복”이라고 한다. 地正面 艮峴里에서는 梅日里와 같이 속적삼을 지붕에 던지고 "某年生(甲子)속적삼 가지고 가시오 북북북”이라 하여 그 內容이 横城과는 약간 다르다.
含飯 : 小殮할 때 死者의 입에 白米를 물에 뿔구어 넣온 含飯도 調査地域이 모두 비슷하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小殮을 맡은 사람이 含飯을 하되 세수까락을 입에 넣으며 매 수까락 넣을 때 마다 "百石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라 한다. 이 때 수까락은 버드나무로 깍아서 쓴다. 橫城邑에서는 甲川과 같고 地正面에서는 小驗하는 사람이 하지 아니하고 상주가 한다. 地正面에서는 “百石이요 千石이요 萬전이요”라고도 하고 家門에 따라서는 “百兩이요 千兩이요 离兩이요” 라고 돈의 單位를 말하기도 한다.
大小殮은 禮書에 따르고 있어 그 節次나 方法이 거이 四禮便覽 따르고 있어 地城에 따른 差異가 없다.
(3) 成 服
殮이 끝나고 나면 入棺하여 棺을 대청 喪幕 뒤에 놓기도 하나 大部分의 提報者에 의하면 土 壟이라하여 마당 가에 임시로 가매장하는 습속이 있다. 魂魄을 造成하여 喪暮을 만둘고 喪主의 喪服이 이 期間中에 完成되면 죽은지 3日 만에 成服祭를 지낸다. 成服祭까지는 喪主는 平常服 을 考批에 따라 左袒 右袒으로 한쪽 소매를 빼고 옷을 걸쳤다가 成服때에 白衣喪服으로 바꾸어 입는다. 옛날 상투가 있을 때는 男女喪主가 다 成服前까지는 散髮을 했다가 成服때에 머리를 平常 모양으로 한다.
土壟이 되고 魂魄의 造成이 되어 成服祭를 지낼 때는 喪主는 喪主의 服裝을 가추고 孝杖이라 는 막대를 집는다. 孝杖은 地域에 따라 그 材料가 다르다. 甲川에서는 男子喪主는 대(竹)막대를 짚고 女子喪主는 버드나무막대를 짚으며 地正面에서는 父喪에는 男女 共히 대막대틀 짚고 母喪 에는 男女 共히 버드나무 막대를 짚는다. 대는 共通的으로 다 쓰고 있으나 버드나무는 地域에 따라서는 梧桐나무를 스고 있는데 이 세 地域調査에서는 다 버드나무를 쓰고 있다. 대와 오동으로 孝杖옴 만드는 理由는 대나 梧桐이 같이 속이 비어 있어 같은 크기의 나무 보다 땅에 닿는 面續이 적게 마련이다. 상주는 罪人이라하여 殺生을 삼가야 하기 때문에 孝杖을 짚되 着地面績 이 적은 대나 오동과 같은 나무를 막대로 쓰면 殺生을 주릴 수가 있다는 意味에서 原則은 대와 오동을 썼으나 오동을 求하기 어렵기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버드나무를 썼다. 또 이 孝杖은 天圓地方 卽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 하여 男喪의 孝杖은 둥군 대를 쓰고 女喪에는 나무를 쓰되 막대를 둥글게 깎는 것이 아니고 네모진 막대를 썼으나 이번의 調查地域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는 提報者가 드물다.
成服祭는 魂魄읍 神禮로 지내고 成服祭가 끝나고 나면 모든 參祀者가 喪主와 맞절을 하고 問 喪에 대신한다. 成服择에는 外人 卽 堂內親外의 사람은 參祀하지 아니 하는 것이 通例로 되어 있고, 外人의 問喪은 成服祭 뒤에 하는 습속이 모든 調查地域內에 있다. 설사 特殊한 事情이 있어 성복전에 喪家를 尋訪했을 때도 상주를 만나 問喪을 하지는 아니하고 護喪을 만나고 가는 것이 고작이다.
(4) 治 葬
入葬 : 장사 前日을 入葬日 또는 우리말로는 드장날이라 하여 治葬節次는 이날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葬日을 3, 5, 7等 홀수의 날로 잡아 治葬하는 關係로 따로 葬擇을 하지 아니하나 옛
날에는 달을 넘겨서 하는 유月葬 外에도 擇日하여 治葬하는 俗習이 많았다. 이번의 調査에서는 最近은 거이가 3日葬이고 5日葬도 드물다 한다.
入葬日 午後에 喪輿를 組立한다. 지금도 全調查地域에 상여가 다 있고 아직도 葬事에는 상여 를 쓰고 있다. 橫城邑 邑下里는 横城邑인데 아직 상여를 스고 있다. 喪輿는 部落의 大同契에서 共同出資하여 만든 것으로 契員은 임대료 없이 쓰고 非契員은 임대료를 내고 있다. 喪具에는 喪輿 外에도 腰輿라고 부르기도 하고 혼교라고도 부르는 혼백奉安 가마가 따로 있으나 이번의 調查部落에 요여는 한 곳도 있는 곳이 없다. 이 것은 요지음 葬禮에는 魂魄을 쓰지 아니하고 사진을 奉安하는 風俗이 생겨 거이가 사진을 쓰므로 혼교가 必要 없게 되었고 사진은 故人의 孫子나 사위가 가슴에 奉安하고 간다.
問喪客의 大部分이 入葬日 午後에 問喪하는 습속이 있고 或 喪主와 함께 過夜도 하나 요지음은 거이가 問喪이 끝나면 술 대접을 받고 돌아 간다. 男子의 喪에는 親知의 輓詞가 있고 가까운 親戚일 때는 祭文을 지어 奠을 드리는 것도 入葬日 저녁이 였는데 지금은 奠은 있으나 祭文은 드물고 鞭詞도 거이 없어졌다. 發靷前에 請朝祖 祖奠 日哺時等의 節次를 前에는 儒式에 의하여 빠짐 없이 行하였으나 지금도 儒式 대로 行하는 家門에서는 그대로 하고 있다. 四禮 가운데 冠禮는 完全히 자취를 감추었고 婚禮는 幣帛을 除外하고는 舊習이 完全히 없어졌고 一部에서나마 原形 그대로를 保存하고 있는 것은 喪과 祭禮 뿐이다. 이 喪俗도 아직은 喪具가 있어 原形이 保 存되고 있으나 喪俗 가운데도 喪主의 服飾인 祭服은 이번의 調査地域에서는 없어졌다. 굴건 제복을 제대로 한 喪服은 없고 중단에 頭巾을 쓰는 것이 고작이다. 喪與의 行列은 江原道內가 다르지 아니하고 行列에서의 順次도 다른 地方과 다를 바가 없다.
상여는 28人用이고 작은 것은 14ᄉ用도 있다. 상여行列은 선소리꾼이 앞에서 선소리를 맥이 면 상여군은 後敏을 合暗한다. 아직도 地方마다 선소리군이 있어 葬事 때는 선소리를 부르고 있다.
下柩 : 지금도 共同墓地의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 아니하나 私有地에 묘를 쓸 때는 地官이라는 사람이 묘터를 잡고 方位도 잡는다. 梅日里에 서 의 提報에 의 하면 묘터와 그 方位는 生氣福德과 도 關係가 있어 살아 있는 家族의 吉凶과 크게 交關性이 있다는 意識에서 治葬에서 가장 重耍한 行事가 묘터잡는데 있고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緣由가 오래 되어 族譜에는 반드시 “○○坐原”이라고 묘의 方位를 記錄한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묘의 方位가 잡히면 그 方位에 따라 金井을 놓고 金井에 따라 천광을 하고 下柩 뒤에는 관 둘레에 生石灰와 진흙을 섞은 石灰土를 먼저 넣는다. 이것은 石灰가 成石이 되면 草木根이 城中 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이다. 石灰土읍 다지고 横帶를 깔고 그 위에 다시 石灰土를 다지고 成墳을 한다. 成墳 때는 상여군들이 모여 선소리에 따라 덜구질을 한다. 이 때 선소리군이 막대에 새끼를 걸어 近親者들이 이 새까에 돈을 꿰게 한다. 이 든은 葬後 상여군둘이 나눈다.
묘를 쓰기 前 開土할 때에 土地之神祭를 다 지내고 있다. 이 土地之神祭는 이 땅에 새로운 시 신을 묻었으니 잘 保佑해 달라는 뜻이다.
(5) 返魂 虞祭 卒哭
葬事가 끝나고 나면 상여는 分解하여 상여군이 가지고 가나 혼백은 요여에 살려 還家한다. 이 때 요여는 반드시 상여가 왔던 길을 되들아 가야하고 상주는 요여 뒤를 곡을 하며 따라 간다. 지름길이 있다 할지라도 요여는 왔던 길를 되가야 하는데 이것은 죽은 영혼이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며 세 조사지역이 다 같다.
혼백이 집에 이르면 집에 있던 女子 상주들이 門前에서 곡을 하며 이를 맞아 喪幕 祭床에 혼 백을 奉安하고 返魂祭인 初虞를 지낸다.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장사 常日에 女喪主도 장지까지 갔다고 하나 女喪主는 장지에 가지 아니하는 습속이 있다.
虞祭는 날을 택하여 지내게 禮書에는 있으나 이번의 조사지역에서는, 儒式으로 格式을 가추 어 지내는 家門에서도 葬事 다음날에 再虞 그 다음에 三虞를 지내고 그 다음 날에 卒哭祭를 지 낸다. 卒哭祭를 지내기 前 까지는 朝夕上食때 곡울 하나 卒哭祭를 지내고 나면 無時哭은 하지 아니하고 초하루와 보름의 朔望 때만 哭을 한다.
死亡後 만 1年에 小祥 만2년만에 大祥을 지내고 大祥 뒤 담제를 지낸 뒤 脫喪한다.
지금은 喪幕에 魂魄 대신 사진을 놓고 脫喪은 모든 調査地域에서 百日脫喪이 일반적이라 한 다. 前에 三年喪을 치를 때는 三年間에 아무 때나 問喪오는 弔問客이 있었으나 지금은 葬事 때까지 問喪을 하고 장사지나고 나면 거이 問喪客이 없다고 한다.
7. 祭 禮
(1) 忌 祭
이번의 調査地域內에는 神主를 奉安하고 있는 家門은 한집도 없다. 江原道內에는 6.25事變前 에는 神主奉安한 宗家가 많았으나 6.25事變 때 피난길에 오르느라 다 埋安하고 現在 江原道內에 神主를 奉安하고 있는 家門은 春城郡 南面 亨里에몇집 있다. 이번의 調査地域에서도 儒式의 忌祭는 지내되 다 紙榜을 써 놓고 紙榜祭를 지내고 사진이 있는 사람은 사진을 놓고 지낸 다.
奉祀節次는 아직도 古俗이 그대로 傳受되고 있어 讀祝까지 하고 있다. 앞에서 잠간 言及되었 지 마는 四禮 가운데 그래도 古俗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喪禮와 祭禮인 탓으로 그 節次는 降神에서 撤床까지 地域이나 家門에 따라 相異한 点이 發見되어지지 아니 한다. 다만 近年 家門에 따라 合祭를 하는 家門이 더러 있다. 이 습속은 調查地域마다 있는 習俗으로 四代까지의 忌日마다에 忌祭를 지내는 家門도 있고 四代까지를 날을 따로 잡아 合祭를 하는 家門도 있다. 地正面 艮峴里에서는 祖父母와 父母의 忌祭는 제날에 奉祀하고 증조부모와 고조부모는 一年에 한번 合祭로 奉祀하는 家門도 있어 家門에 따라 奉享方式이 다르다.
祭享時間도 忌日子正에 지내는 옛식 대로 지키는 家門도 있고 忌日 초저녁에 지내는 家門도 있다. 같은 橫城郡이면서 農村인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거이 古俗을 다라 子正祭를 지내고 都市 地域인 橫城邑 邑下里에서는 초저녁제가 많고 農村都市인 艮視里도 초저녁제가 많다. 이로 미루어 보면 四禮의 變遷課程도 都市가 急速하고 農村일수록 古俗이 많이 남아 있다.
神主祭를 지낼 때는 忌祭는 반드시 神主를 奉安하고 있는 宗家에서 바께 지낼 수가 없으나 紙榜祭는 紙榜은 어디서나 써놓고 享祀하면 되기에 宗家以外에서 享祀하는 家門이 江原道內에는 더러 있다.
이번의 調査에서도 甲川面 梅日里의 一部 家門에서는 批位祭는 次子집에서 지내는 俗習이 있 다. 她位忌祭에도 考批位合設로 지내되 次子집에서 지내는데 每年 그렇게 하고 있다.
橫城邑 邑下里에서 調査한바에 의하면 次子집에서 批位祭를 지내는 習俗은 없고 近年에 考位 祭 때에 考批位 合設祭를 지내고 批位祭는 省略하는 家門이 있다고 提報한다. 地正面 艮視里에 서는 批位祭를 次子가 지내는 習俗은 없다.
(2) 茶 禮
茶禮는 節日茶禮와 生辰茶禮의 두가지가 있으나 이번의 調査地域內에서 生辰茶禮를 前에는 했으나 지금 行하고 있는 家門이 있다는 것을 提報者들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生辰茶禮는 거이 없는 것으로 보이고 節日 마다 다 하였으나 지금은 오직 설과 秋夕茶禮가 있을 뿐이다. 다만 甲川面 梅日里에서는 提報者에 의하면 섣달 그믐날에 지내는 除夕茶禮를 行하고 있는 家門이 혹간 있는데 이 것도 土着人으로서 除夕茶禮를 行하는 家門은 없고 外地에서 梅日里에 移居하여 살고 있는 家門 가운데 몇 집 있다. 除夕茶禮의 祭需는 떡국을 쓰고 설茶禮에 는 白飯을 祭需로 쓴다는 家門도 있고 떡국을 쓰는 家門도 있다.
같은 自然部落內에 同族이 살고 있을 때는 秋夕茶禮는 直系子孫만이 奉祀하고 설茶禮는 同高 祖의 直傍系가 다 參祀한다, 설茶禮를 이렇게 同高祖 直傍系가 다 參祀하는 것은 門內의 歳拜를 茶禮 뒤 에 하기 때 문이 다. 梅 日 里에서의 설茶禮는 隣近에 堂內가 살고 있으면 同高祖 孫들이 合 同하여 支宗茶禮를 路巡에 의하여 順次的으로 享祀하고 最後에 宗家에 모여 宗家茶禮를 行한다.
秋夕茶禮는 설茶禮와는 달리 直傍系 合同으로 祖上 있는 집마다 다니며 享祀하는 것이 아니 고 直系祖上의 茶級에만 參祀한다. 祭需는 송편과 白飯을 쓰되 白飯은 햅쌀을 쓴다.
(3) 時 祭
우리나라의 儒家祭俗이 五世則遷으로 되어 있어 親盡祖 卽 五世以上祖의 위패는 나라에서 不 遷位로 指定되지 아니한 限 위패를 埋安하고 忌祭를 지내지 않고 1年에 한번 基所에서 時祭 또는 時享이라는 祭를 지낸다.
時祭가 난집은 最小限 五代以上의 宗家로 가장 가가운 時祭祖라 할지라도 五代祖이므로 그 後孫들이 많은것이 通例이고 時祭는 祭官도 많아 忌祭 보다는 祭費도 많이 所耍된다.
家產이 있고 親盡年代가 오래되었고 그 先祖가 顯祖일 때는 그 時祭 奉享읕 위한 재산도 많 아 해마다 이 財產에서 時祭盡用을 염출하나 祖上이 顯祖도 못되고 後孫돌의 家產도 넉넉치 못 하여 時祭盡用을 염출할 位土가 없으면 그 盡擔用은 子孫둘이 分播하고 있다. 이번의 調查地域의 宗財는 全部 土地로 되어 있다. 田畓 山林으로 되어 있어 비용의 염출은 토지를 耕作한 사람의 小作料로 代置한다. 提報者에 의하면 前에는 小作料 가운데서 一部를 祭置로 썼으나 지금은 小作料는 없고 그 土地를 耕作하는 代價로 祭費만을 대는 家門이 大多數라 한다.
그나마 位土가 마련되어 있는 墓는 時祭費用을 位土의 收入에서 充當하나 그렇지 못한 家門 에서는 後孫들이 費用을 分擔 염출한다. 梅日里에서 調査한데 의하면 時祭費用의 充當에 세가지 方法이 있다. 그 하나는 位土가 있을 때는 位土 收入에서 充當하는 方法, 들째 位土가 없을 때에는 直孫들이 해마다 費用을 分擔하는 方法, 세째는 派別로 順次的으로 費用을 내는 方法이 있다.
近年 崇祖의 思想이 前과는 많이 달라졌고 土地에 關한 생각도 많이 달라져 이미 옛날에 位 土가 만들어졌던 것은 別問題이나 親盡年代가 오래지 아니한 基는 位土가 없는 것이 많아 요지음은 時祭의 费用으로 둘째나 세째의 方法을 쓰는 家門이 많다.
時祭의 時期는 10月初가 세 조사지역에서 다 압도적으로 많고 지금도 時祭가 끝나고 나면 모 처럼 宗中이 모였기에 宗會를 하고 있다. 門財가 있는 門中에서는 時祭 뒤에 門中事 外에 그해 의 門財의 決算도 함께 한다.
時祭의 祭享은 茶禮와 같이 宗孫의 單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三獻을 하게 되어 있고 初 獻을 宗孫이 하는 것은 이 곳에서도 같다.(자료: 최승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