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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허기, 그 견고한 결속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 ‘히사이시 조(ひさいしじょう)’는 그의 저서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 서문에서, 작곡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계속 곡을 쓰는 것 입니다.” 라고 말한다. 천여 곡이 넘는 앨범을 작곡한 그의 창조성의 비밀이 이 한 문장에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은 눈으로 읽고 머리에 저장되어 부단한 쓰기를 거친 후 손을 통하여 풀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단한 쓰기를 통한 연마 작업을 거친 후에라야 비로소 뇌와 손의 오케스트라가 펼쳐짐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엎어진 물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覆水不返盆).”강태공이 한 말이다. 이 문장을 ‘말’에 비유한다면 “한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의미와 같을 것이다. 말이 차고 넘치는 시대이다. 뒤틀리고 망가지고 짓밟혀 그 형상이 참혹하다. 몸으로부터 나온 말이 다시 몸을 치고 들어간다. 꿈·농담·말실수·증상과 같은 무의식의 형성물에는 시적인 형태를 지닌 비유법들이 있다. 말은 침묵으로부터 시작되며 이에 앞서 정신이 창조적으로 작용하며 선행한다. 아래의 다섯 시 편들을 이루는 주체의 자기 기억과 표현의 욕망이 이루는 서정의 깊이는 사유를 복사하지 않고 추동한다.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의 축적이 아닌 전체의 문맥을 통해 표현하는 감각의 구체와 기억은 아득함을 결속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입양을 신청해 왔다
오른손엔 프라이팬을 왼손엔 꽃기린을 든 해가,
현관문을 열어준 나는 프라이팬을 햇살 위에 올려놓고
섭씨 40도의 붉은 가시를 볶았다
나를 볶아대는 불안이 가시처럼 돋아나는 한여름 밤
하늘이 흘리는 이야기가 촛농으로 녹아
별들의 요람이 되는데
열대야와 기아가 도처에 잠복했다는 소문이 꼬리치기 시작했다
헬리오스가 탄 태양의 범선이 침몰해 있는 아스팔트
제 등에다 익힌 계란후라이로 허기를 채우며 부화를 꿈꾸는가
땀과 눈물과 발자국마저 고온에 가열되어 끊임없이 상승을 시도한 나,
허공 어디쯤에서 찬 공기인 당신과 만나 태풍이라도 일으킨다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여름이 겨울이 될지도 몰라
내 등줄기에 33개의 가시가 돋아났다
피부엔 붉은 꽃기린이 피어나고
- 송시월,「그 여름 꽃기린과 프라이팬」(시집『간수의 산통은 진행형이다』시산맥, 2023)
송시월 시인의 세 번째 시집(『간수의 산통은 진행형이다』 시산맥, 2023)이 지난해 연말에 출간되었다. 두 번째 시집(『B자 낙인』 예술가, 2014) 이후 9년 만에 치르는 산고이다. “송시월 시인의 주된 관심은 존재의 의미와 시(쓰기) 이다.(오민석)” 그런 연유인지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전복적이면서 창조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몸이 된 상처가 보여주는 말의 운명을 살펴보자.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찬 화자의 시선 속으로 “오른손엔 프라이팬을 왼손엔 꽃기린을 든 해”가 “입양을 신청” 해온다. “현관문을 열어준 나는 프라이팬을 햇살 위에 놀려놓고/ 섭씨 40도의 붉은 가시를 볶는”시인의 비밀스런 시쓰기는, 텍스트 밖의 독자를 향하고 있어 상상력을 도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억제된 무의식적 우울과 공격성으로 인해 “나를 볶아대는 불안이 가시처럼 돋아나는 한여름 밤”은 결여와 불안의 공간으로 감정의 점화와 열감을 보여준다. 시인은 알 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개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 여름’을 입체화하고 있다.
“제 등에다 익힌 계란후라이로 허기를 채우며 부화를 꿈꾸는” 시의 어떤 결여는 언어 속으로 진입하여 분열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부를 소외당한다. “찬 공기인 당신과 만나 태풍이라도 일으킨다면/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시 전반에 걸쳐 보여주는 공포의 외침은, “내 등줄기에 33개의 가시가 돋아”나는 고통을 거친 후 “피부엔 붉은 꽃기린이 피어나”는 선명하고 또렷한 피어남이 기다리고 있다. 도전적이고 자학적인 광기는 현실과 사회라는 괴물과 맞서게 하는 용기를 수반하는데 시대를 반영하는 통증이 가일층하다.
시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의미를 종합해 보면 모두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몸’과 ‘말’을 통해 세간의 잡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인의 독특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나’라는 괴물을 쓰러뜨리고 나의 몸을 넘나드는 사회체제와 마주하면서, 억눌렸던 자아는 생의 무거움을 회복하고 뒤바꾸려는 의식성을 반영하고 있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계속 일어날 것 같아
동네 개가 짖어도 심장이 뛰어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절부절못합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요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반복되는 생각 반복되는 게으름 반복되는 실망
머릿속에서 공회전이 일어나 소변부터 마려운데
속없는 말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와
소문나는 바람에 이제는 숨을 곳도 없습니다
땅바닥에 매달린 기분 분명 불치병 맞습니다
죽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살아도 숨이 막힙니다
365일 오류를 일으키는 불안 불안은
아침에 경건하고 저녁에 견고합니다
송은영,「불안을 말한다」(시집『돌멩이 국』달아실, 2023)
인간은 객관적인 시선 안에서 살지 않고 저마다 고유한 주관적 시선 안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시인은 남성중심의 문학적 성채와 전통에 갇혀 경험적 실감과 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상처의 어둠 속에서 갈등하고 충돌한다. 시를 쓰는 창작 행위에 여성이 참여하기 힘든 원인은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여성의 경험이나 감성,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시 쓰기 방식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다면 사소한 주제만을 다루는 것으로 판단되고 언어의 경험적 사용에 제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가 겪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계속 일어날 것 같아”라는 기이하고 불편한 예감은 일상에서 지금 나에게 계속 찾아오는 맹렬한 소음 같은 것이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게 하며 제 몸 깊이 퍼져가는 뜨거운 불안은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겉은 멀쩡한데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는 은밀한 내적인 고백에 이른다. 시에서 나타나는 ‘무슨말’, ‘속없는 말’은 은폐된 폭력성을 내포하며 억압의 기제로 나타나기도 하며, 반성적 기제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반복되는 생각 반복되는 게으름 반복되는 실망”은 말이 물질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떠한 흐름과 지향성을 가진 힘으로 작동한다. ‘겉’,‘속’,‘의지’,‘불안’,‘썩어 문드러짐’과 관련된 시어들이 끊임없이 반복 사용되는 것을 보면, 시인의 말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집중을 알 수 있다.
“죽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살아도 숨이 막히”는 이러한 말의 속성은 불안에서 빠져나갈수록 힘이 붙으면서 기억으로 회귀와 말의 물질성을 획득하며 시적 욕망을 견고하게 결합한다. “365일 오류를 일으키는 불안은/아침에 경건하고 저녁에 견고”해지며 더 이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불안을 찾아 헤매며 더욱 단단해진다. 세계는 기억의 상처로 존재하며 시인의 시선이 만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 내 ‘경건’과 ‘견고’의 오류가 암시하는 무한증식의 시적 발화를 꿈꾸며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뱀 한 마리의 몸이 내용물 쏟아진 주머니처럼 뒤집혀 있다 누군가 임도를 건너가던 저 몸 위를 지나간 것이다
분홍빛 속살이 거죽을 뚫고 나와
너는 황홀하고 슬픈 혀처럼 향기로웠다고 하고
산벚 그림자 흔들거리며 바퀴 자국의 길이를 재고 있을 동안 햇볕이 뱀의 등을 껴안고 있을 동안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으며
나의 바퀴가 지나갔을 작은 몸들을 생각한다
내가 뱉은 말의 바퀴도 굴러가며
누군가의 가슴을 짓이겼을지 모른다
이들의 몸은 분홍깃발 치켜든 채 말라갈 것이고
속살을 드러낸 채 첫눈을 맞을 것이고
그날 이후로 내 속에는 꿈틀, 무언가
자꾸 기어오르는 게 있다
이주언,「바퀴와 분홍깃발」(『시와경계』2023, 겨울호)
산길을 걸으면서 본 극단적 경험이 시인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내는 내적 동인이 된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불안한 몸은 무엇으로부터 두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불안의 원인은 막연한 두려움에 있으며 말하자면 화자는 예상되는 상황으로 인해 불안한 상태에 직면한 것이다. “뱀 한 마리의 몸이 내용물 쏟아진 주머니처럼 뒤집”힌 상황을 본 시인은 내용을 의식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아의 팽창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 임도를 건너가던 저 몸 위를 지나간 것” 시인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식적으로 관여한다.
시인은 “분홍빛 속살이 거죽을 뚫고 나”오는 고통을 “너는 황홀하고 슬픈 혀처럼 향기로웠다”는 원경遠景으로 대체하면서 공유적 상황으로 유도해 낸다. 시인은 정신적 팽창으로 인한 자기 포기 즉 ‘탈 자기화’를 거친 후 이를 넘어서는 본래의 고유하고 특정한 자기실현의 발전 과정을 다음에서 보여준다. “내가 뱉은 말의 바퀴”는 소거되지 않고 자멸적인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누군가의 가슴을 짓이기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처럼 말의 욕망은 목적이나 방향을 잃어버린 채 일상 세계에 만연되어 무한 증식한다. 말실수는 자아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증폭되어 혼란 속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분홍깃발 치켜든 채 말라가고”, “속살 드러낸 채 첫눈을 맞는”/ “그날 이후로 내 속에는 꿈틀”하는 육화된 언어가 단절된 심연을 메워주는 심리적 공간으로 심화되고 있다. 시인은 기표로 넘쳐나는 로고스의 언어를 거부하고 생동감으로 충만한 “자꾸 기어오르는” 말랑한 말들을 추구한다. ‘말의 바퀴’가 낸 생채기와 단절을 와해시키는 이러한 심리적 공간 비유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킴으로써 영원한 시간성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이스크림을 사고 있는 아이가 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일어나니 아이가 없다 광장 어디에도 없다 아이스크림 트럭 주변을 살핀다 바퀴 사이 지붕 위 내부 곳곳을 두리번 아무도 없고 아이스크림 기계만 남아 있다 어디로 빨려 들어갔나 아이가 없다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가 증발했다 없어진 게 또 있을까 아이마저 없어진다면 음악도 설레임도 없어질텐데 분수대는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어릴 적 나도 없어져 누군가를 쭈뼛하게 만든 적 있었다 농담과 미소를 거두게 한 적 있었다 팽이만 남고 줄은 사라진 마당의 허허로움 위로 드리운 느티나무 그림자에 지워진 적 있었다 바퀴 주변의 흙 자국을 살핀다 남겨진 단서는 나의 영혼 바깥에 있을까 눈빛을 떠올려보자 그러고 보니 눈을 보지 못했다 아니 눈이 없었다 그러면 없어질 확률은 줄어든다 내가 또 없어졌나 내 눈이 없어졌나 더 정확히 아이만을 볼 수 있는 내 눈의 일부가 없어졌나 기도와 주문 사이를 진자가 되어 숨차게 달린다 징소리 울리는 굿판을 벌이기엔 퇴마사의 지팡이가 너무나 멀리 있다 벌써 해가 중천이다 지평선 위에 아이스크림 트럭과 나, 태양만 남았다
윤태원,「아이스크림」(『시와징후』2023, 가을호)
흔히 시인은 언어 이전의 언어를 찾아 나서는 연금술사라고 표현한다. 아이의 언어를 찾아 나선 시인은 ‘아이스크림’을 통해서 아이의 언어를 만난다. 아이의 말은 ‘아이스크림’처럼 모음이 풍부하고 말랑말랑하고 연한 말이다. “아이스크림을 사고 있는 아이”의 말은 비밀스럽고 획일화되지 않은 말이며 꽉 차고 텅 빈말이다. “신발 끈을 고쳐매고 나니 아이가 없다”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듯이 화자는 시적 자아를 중심으로 한 대상 관계를 설정시키고 있다. 의식이란 깨어 있어 관찰하고 세계 주변이나 의식 내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인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아이가 없다”는 말에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아이라는 주체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는 아이’가 사라졌는지, 시인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범인 ‘내면의 자아(아이)’가 사라졌는지 시적 자아의 자유연상自由聯想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시인의 말놀이는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시인 자신이 지향하는 상상의 공간을 세움으로써 ‘트럭 주변’, ‘바퀴 사이’, ‘지붕 위 내부’라는 분리된 세계를 “아이스크림 기계만 남은” 공간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아이가 없다/ 아이가 사라졌다/ 아이가 증발했다”에서 ‘아이’는 가장 순수한 생명체로써 혼돈과 무질서가 모두 제거된 정화된 존재를 함축한다. 이어지는 “아이가 없어진다면 음악도 설렘도 없어질텐데”에서도 이와 같은 상상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눈을 보지 못했다/ 아니 눈이 없었다”에서는 시의 배경이 ‘아이’에서 ‘눈(目)’으로 바뀌었다. 시인 자신의 존재론에 대해 통찰하고 표현함으로써 궁극의 순간을 탐구해가는 시선으로 깊이 조응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아이의 사라짐‘을 ’내가 사라지는‘ 순간의 초점으로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다. “내가 또 없어졌나/ 내 눈이 없어졌나”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통일되고 안정된 자아가 아니라 허구이기 때문에 시적 자아들은 소외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시적 자아는 벽사辟邪를 꿈꾸지만 “굿판을 벌이기엔 퇴마사의 지팡이가 너무나 멀리” 있다. “지평선 위에 아이스크림과 트럭과 나, 태양” 이미지들은 주체의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상상의 대상은 몸의 흔적이며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눈빛이 부서진다
깨지지 않으면 얼마나 굳어지겠니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맛있게
와삭
깨문다
풀밭에서 흰주름버섯이 자란다
너도 모자 장수 티파티에 초대받았니
블루엔젤 두 그루가 서 있는 정원에 흰 탁자가 보인다 의자는 세 개 너와 나 사이 삼월 토끼가 졸고 있고 각자의 독백을 즐기는 우리들의 티파티, 접시엔 크래커가 수북이 쌓여있지
네 눈동자를 깊게 쓸어주는 건 내 눈동자에 너를 가두는 거래
측백나무를 오래 바라보는 건 먼 들판을 달리는 거래
눅눅해진 계절을 놓치기 위해 눈썹 없는 얼굴을 그려 볼까
네가 건넨 사금파리 조각에 손목을 깊게 베었어 핏방울이 번지는 들판에 종달새가 튀어오른다
우리의 균열은 길어지는 지평선
우리의 틈에는 푸른 밀밭이 자라는구나
너는 오른쪽
나는 왼쪽 어디에 치약을 놓든 수도꼭지의 물은 쏟아지고
씹는 소리들이 물줄기의 거품으로 빨려들고
축축한 녹말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휘파람을 불면 좋겠어
부풀어 오르는 눈빛으로
밀이 익어가는 들판에서
파티는 언제 끝나는 거지? 되돌아온 여섯 시처럼 의자를 한 칸씩 바꾼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크래커는 바삭바삭해
김은닢,「크래커」 (『시와경계』2023, 봄)
인간은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공간과 그곳으로부터 벗어 나고자 하는 갈등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면, 상황에 대한 고백은 존재의 뿌리를 잊고자 하는 자기 부정의 ‘말’로 심화된다. 김은닢 시인의 「크래커」는 당시의 감정을 이 자리로 불러일으켜 그 순간 시적 자아는 단절적 심연이 아닌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가는 영원의 순환적 질서를 따르고자 한다. 시적 자아를 가두고 있는 ‘부서진다’, ‘깨진다’, ‘굳어진다’ 는 “입안에서 서걱거리는”시어와 등가의 의미를 갖는다. 시적 자아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신 삶의 토대이다. 시인은 산책가이다. 호흡은 느리게 천천히 걸으며 “풀밭에서 흰주름버섯이 자라”는 것을 보기도 하며 “너와 나 사이 삼월 토끼가 졸고 있는” 생명이 충만한 특별한 시· 공간으로 의미 부여된다.
“네 눈동자를 깊게 쓸어주는 건 내 눈동자에 너를 가두는 거”라며 시인은 스스로를 서로의 눈동자에 가둔다. 이러한 행위는 은폐와는 좀 성격이 다르며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서 그 배경을 은밀히 관조한다. “측백나무를 오래 바라보는 건 먼 들판을 달리는 거래” 시인에게 ‘측백나무’와 ‘들판’은 사랑의 배경으로써 모두 감내해야 할 대상이며 ‘들판’은 양가적 공간성을 갖는다. 잠재력은 언제나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눈썹 없는 얼굴을 그려보는” 시인의 행위는 변화와 생성의 힘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균열은 길어지는 지평선”이 되고 “우리의 틈에는 푸른 밀밭이 자라”는 수평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지평선’ 과 ‘푸른 밀밭’은 공간의 넘나듬을 자유자재로 하는 상상력의 단계를 거친 후, 시인은 보다 현실적인 공간 “밀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일상 공간의 정화를 유도한다. 시인은 “우리는 제 자리로 돌아오고 여전히 크레커는 바삭바삭”하다며 인간의 현실 자체를 자신의 시각에서 재발견함으로써 현실과 자신의 초월의식을 융화시키는 특이성을 보여준다.
위 다섯 편의 작품은 ‘말의 허기와 그 견고한 결속’이 주는 언어 이미지에 주목하여 분류하였다. 어떤 유형의 문장이든 객관적 분류는 불가능하다. 정상적인 언어에 반하는 불구적인 언어들과 몸의 내면적인 언어가 불완전한 언어를 꿈꿀 때, 새 말들은 탄생하고 소멸하며 말의 허기는 견고한 결속을 이루며 발화되는 것이다.
이화영 /전북 나포 출생. 2009년 《정신과표현》 등단. 시집 『아무도 연주 할 수 없는 악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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