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CMI 개척간사 개관
1기 여명기(1961-1965. 9): 베드로 기록
미국 남장노교 선교사로 파송된 대전대(현 한남대) 영문과 허니커트 교수를 대표로 한 여명기: 미국 선교사를 주체로 한 역사
2기 개척기(1965. 10.1-1968.2): 베드로 기록
광주 UBF에서 파송한 정수일 총무를 통한 개척기: 한국 대학생 선교를 위한 한국 대학생이 주체가 된 역사.
3기 성장기(1968.3-1984.2): 베드로 기록
대전 지역출신 베드로 학생총무를 통한 성장기 역사
1) 대전 충남대, 대전대, 간호대에 주인을 세우는 역사
2) 국내 개척역사
(1) 공주 개척(1968)
(2)청주 개척(1972)
(3)인천 개척(1982)
(4)천안 개척(1984)
3) 세계선교 역사
(1) 독일 개척(1969)
(2) 미국 개척(1972)
(3) 월남 개척(1971)
4기 발전기(1984.3-2000.3): 홍덕순 기록
홍덕순 청주목자 대전 인사이동과 발전기
1. 국내 개척
(1) 천안 개척
2. 해외 개척
(1) 독일 파송
(2) 미국 파송
(3) 캐나다 개척
(4) 호주 개척
(5) 네덜란드 개척
(6) 말레이시아 개척
(7) 헝가리 개척
(8) 일본 개척
(9) 중국 개척
(10) 몽골 개척
(11) 백러시아 개척
5기 전환기: 박윤제 기록
UBF 제2차 개혁운동과 CMI의 탄생
대학선교협의회, 해외선교협의회, 교회협의회가 연합하는 역사로 홍덕순 목사가 사임하고 박윤제 목사 임직을 맡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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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CMI 開拓簡史
(Campus Mission International)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십 일간 제자들에게 천국신앙과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심으시고 마침내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앞으로 전개될 성령의 역사, 곧 성서 이스라엘과 세계선교를 약속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계선교의 약속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19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20세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한국과 전 세계에 파송하였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들의 헌신과 선교열정으로 개척되었고, 이제 21세기 한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피선교국가에서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제2위의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경륜 가운데 성령께서 오늘날 대전 CMI 열방선교교회를 탄생시키신 것을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20세기 말 대전 CMI를 어떻게 개척하고 성장 발전하게 하셨는가? 살펴보고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적인 사명인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21세기에 계승하고 발전시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1기, 여명기(1961-1965. 9)
대전 국제대학선교협의회(CMI; 구ubf)는 1961년 광주의 Sara Barry 선교사와 같은 시기 같은 미국 남장로교 교단에서 1955년 경 파송받은 대전대(현 한남대) 영문과 교수인 허니커트 선교사 (한미성 교수, Melicent Huneycutt (결혼 후의 성: Verghess) (선교사)가 1962년 11월 대전 CSC 역사를 시작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1962년 6월부터 학생 성경공부모임을 가졌었던 김정일 등 7인의 대전대 학생들 모임이 이 모임에 합류하였다.
광주 대학생성경연구회는 배사라 선교사[1][2]가 1961년 4월 22일 고등학생 그리고 4월 23일 대학생을 위한 주일예배를 봄으로 Christian Student Center (기독교학생연맹)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얼마 후 한국인 천 전도사가 이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천 전도사가 6월에 군에 입대하고 1961년 9월부터 이창우 강도사[3]가 동역 을 시작 하였습니다. 이 때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캠퍼스 그룹성경공부가 시작되어 한국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 대학생성경연구회는 미국 선교부에서 선교정책상 분할한 광주지역을 벗어나 전국 캠퍼스 개척역사에 도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전남대를 졸업한 정수일 형제[4]를 1964년 대구를 거쳐 1965년 대전 선교회 총무로 파송하였고, 같은 해 고광옥 형제[5]를 전주 선교회 총무로 각각 파송하였습니다. 대학생성경연구회는 이 보다 앞서 제주도에 김한옥 선교사를 파송하고 동남아 선교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한편 대전 CMI는 전술한 바와 같이 허니컷 선교사를 중심으로 출발하여 주로 대전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대전 중심의 캠퍼스 선교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허니컷 선교사를 대표로 하여 대전지역 장로교회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CMI를 돌보았는데, 마지막으로 이근섭 목사가 간사로 시무하였습니다. 이 때 대전대를 중심으로 충남대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이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대전 개척기 역사에 동참하고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다 1965년 초 광주에서 ubf 출신 첫 스텝인 정수일 목자를 대구에 파송하였습니다. 그 후 1966년 초엔 정수일 목자를 대전에 파송하여 대전 개척역사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미국 선교부에 소속된 “여명기 역사”는 일반교회 출신 학생들의 교회활동이 중심이었다면, 광주를 통해 새로 시작한 “개척기 역사”는 한국인을 주체로 하는 일반대학 불신자를 선교하고 그들을 주인으로 세우는 선교중심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2기 개척기(1965. 10.1-1968.2)
광주 ubf에서 파송한 정수일 총무가 대구 개척을 통해 이진화(현 부산 CMI 대표), 허승구 형제를 세우고 1965년 10월 1일 대전 CMI를 개척하였습니다. 이 때 대전 목척교 부근 혜화당 약국 뒤편 작은 다락방에서, 대흥동에 있었던 대전시청 맞은 편, 농협 우편의 6,70명이 모일 수 있는 비교적 넓은 2층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간판도 거창하게 가로 8메타 세로 2메타 정도의 크기로 만들고 위에는 <대학생성경연구회>, 아래는 영어로 (University Bible Fellowship)이라고 써서 달았습니다. 광주에서는 대전 회관을 수리하는데 실내 문짝까지 떼어 보내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이 때 잠시지만 대전 개척역사에 참여한 분들이 있었는데 한 분은 배사라 선교사입니다. 그 분은 서울로 개척하러 가기 전에 약 6개월간 대전에서 매일 새벽 영어성경을 인도하며 일대일 제자양성을 도왔습니다. 또 다른 분은 배사라 선교사를 수행하였던 전선지 자매[6], 대전대를 막 졸업하고 광주 인턴훈련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일 형제[7]가 잠시 과도기 개척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정수일 대전 총무는 경제적으로 아주 열악한 환경 가운데, 열정을 다해 충남대, 대전대(현 한남대)와 간호대(현 혜천대 간호학과)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는 흙먼지가 날리는 시멘트 바닥에 의자를 놓고 새우잠을 자며 연탄불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얼마 안되어 먼지를 너무 많이 마셔서 콧병이 생겼고, 또 행동이 느린 충청도 양들을 섬기다가 속이 타서 신경통까지 발병하였습니다. 60년대 당시는 충청도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 모두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코리안 타임”이라고 말했습니다. 60년대는 “어글리 코리언”,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한국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 이분의 열정과 헌신으로 대전 개척소기도회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회원들은 충남대 문건연[8], 백광전[9], 송정호[10], 베드로[11]; 대전대 이수민[12], 박행순[13], 장정자[14], 양신아[15]; 간호대 이순희[16], 서인경[17], 이화자[18] 등으로 기억됩니다. 다음해 1966년 신입생 제자들 가운데 이근표, 박희웅, 이규환, 조봉연, 전영수, 권영백, 등 제자들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주일예배가 60명 대를 넘어섰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전역사는 제자양성의 튼튼한 기초 위에 성서한국과 동남아 선교의 비전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는 오전에는 각자 지역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오후 3시에 “기독교 사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주일집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주일집회는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혁명의 직후라서 그랬는지 모르나 대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의미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시작하였습니다. 찬송가는 주로 “십자가 군병들아”를 많이 불렀습니다. 당시 우리는 혼자 있으면 성경을 읽고, 둘이 모이면 합심기도하고, 셋이 모이면 양들을 심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모임에는 일대일 제자양성, 일용할 양식이나 강의안 소감 쓰기는 없었고, 다만 그룹성경공부를 주로 하였습니다. 또한 “세계선교”의 “세계”라는 말도 없었고 다만 동남아 선교는 가능하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반교회는 동남아 선교도 젊은 대학생들의 일시적인 구호로 보았습니다.[19] 그러나 매일 새벽과 저녁 그룹성경공부와 기도회가 있었고, 지역에 따라 매일 캠퍼스 아침기도회가 있는 곳도 있었으며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단과대학별 캠퍼스 그룹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그 때 중심회원들은 학교 수업 외에는 거의 센터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당시 학생 소기도회 선서는 “하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한다” “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성서한국과 동남아 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칙에 “나는 다른 서클에 절대 가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대학생 선교회를 얼마나 절대적으로 섬기고자 했는가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처음 오는 양들을 소개할 때 양들을 세워 놓고 “나는 주인이다”라는 선서를 시켰는데 이것 역시 선교회의 모임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하는 일군이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정을 다해 대전 개척의 기초를 놓은 정수일 총무가, 개인사정으로 1967년 공군장교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생성경연구회(ubf)의 형편상 대전에 후임으로 보낼 목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수일 총무는 충남대 3학년에 재학중인 베드로 형제를 억지로 잡아다가 학생총무로 세우고 떠났습니다.[20] 이는 마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우고 예수님을 따르게 한 역사가 되었습니다(누가23:26).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원하여 지든지 억지로 지든지 감당만 하면 마침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제 3기 성장기(1968.3-1984.2)
하나님은 CMI 개척기에 전임 목자가 부족하여 아직 3학년 학생인 베드로 형제를 학생총무로 세운 대전역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를 개척할 때 그 지역의 사람을 전도하여 그 지역의 목자로 세웠는데, 바로 이런 복음적인 역사가 대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목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를 도와야 할 위대한 동역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개척소회원 가운데 남은 자들로 대전 개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충남대의 문건연, 백광전, 조용현, 허선일[21], 송정호, 대전대(현 한남대)의 이수민, 장정자, 양신아, 박행순, 김득룡[22] 등이며, 후에 홍덕순[23], 임열수[24] 형제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전 복음역사의 환경을 잘 이루어준 간호대 이순희, 서인경, 이화자, 선배들의 헌신에 이어 이 론[25], 조순옥, 유광희, 박인순 등 자매들이 역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분들이 대전CMI 역사의 성장기에 충성하여 충남대, 대전대, 간호대에서 제자양성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분들의 기도의 열매로 충남대는 박희영[26], 김삼열, 양한경, 김혜순[27], 조준찬[28], 길병석, 김주연 의대생들이 성장하고 공대는 허선일 형제의 섬김으로 최명환[29], 우남식[30]에 이어 안재룡[31], 김용대[32]에 이어 방덕신[33], 구기욱, 한성수, 김옥중, 김만흥, 김태일, 김다윗, 한석근에 이어 서양희, 김홍자, 오준경; 문리대에는 손장원[34], 박성자[35], 안은경[36]에 이어 정진희, 임두혁, 송명옥, 임녹주에 이어 홍명희, 심영희, 오학영, 오종화에 이어 박혜자, 김정연, 법경대에 윤영기[37], 도안드레, 농대에 임인섭[38]에 이어 이동주, 여경진, 안재민, 김명자, 박원, 임건택, 한문갑, 박모세 형제자매들이 목자로 성장하였습니다. 대전대는 임열수 선배의 열정적인 섬김으로 문영희 자매에 이어 김영환[39], 이광복, 우영수, 김은옥, 서혜민, 임인영에 이어 정덕오[40], 이일영[41], 한정희[42], 김영자, 정숙희 형제자매들이 주인들로 충성하였습니다. 목원대의 김정희 자매의 충성으로 장사라, 김상수, 이리브가 등 형제자매가 성장하였고 간호대는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 김숙철, 이기향, 조경숙[43], 김영숙, 허유강에 이어 양인숙, 장영애, 김원숙에 이어 양신영, 임정희에 이어 이만우, 임보영, 신영묘에 이어 김 숙, 구정원, 송순정에 이어 이복순, 유경순, 황양희, 김 룻, 한인숙 등 많은 선교후보들이 성장하였습니다. 대전 성장기에 훈련 받은 목자들이 거의 모두 오늘의 국내개척과 세계선교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1. 국내 개척역사
(1) 공주 개척(1968년):
공주 개척은 그 기원이 1968년 3월 대전의 개척자인 이수민, 베드로 형제가 대학 4학년 때 제주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공주에 가서 당시 대전 간호대 김숙철 자매의 친구인 교육대 홍성희 자매를 만나 기도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대전의 많은 형제자매들(충남대 안은경, 우남식, 한남대 정숙희(말레시아), 목원대 김정희(독일) 등)이 순회선교를 하여, 그곳의 주인으로 공주사대의 김선정, 이승주 형제들과 신연미, 김미경, 이리브가 자매들을 목자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헌신으로 1995년 이승주, 구은자 목자 가정을 오뎃사 선교사로 파송하고, 현재 이천석 목사를 중심으로 류명영 장로와 이숙영권사, 그리고 많은 분들의 헌신으로 공주 CMI 주영광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2) 청주 개척(1972년);
청주 개척은 장영애(대전 간호대) 자매가 충북 보은의 고향 친구인 [44]송희순(청주 간대) 자매를 대전에 소개하여 매주 대전 형제 자매들이 청주 간호대와 충북대에 가서 그룹성경공부를 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충북대 김승희[45], 박성환[46] 형제들과 박종숙, 이근화, 김혜식[47] 자매들이 충북대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개척조상인 김승희 형제는 말씀을 사모하여 먹을 쌀을 싸가지고 와서 대전 창세기 성경학교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한 목자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전대를 졸업한 홍덕순 형제를 서울 인턴훈련(70년), 대구개척(71년)을 섬기게 하시고 72년 청주개척을 위해 파송하셨습니다.[48] 하나님의 오랜 경륜 가운데 파송하셨지만 한국에서 유일하게 바다에 접하지 않은 보수적인 충북의 청주를 개척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빌리 그래햄과 같은 대 부흥사를 꿈꾸던 홍덕순 목자는 3년 동안 다섯 명을 놓고 설교를 해야 하는 겸손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훈련을 통해 홍덕순 목자를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위대한 일대일 제자양성가로 키우셨습니다. 홍덕순 목자의 인내와 충성 그리고 이정순 사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는 청주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청주는 한 때 가장 모범적인 제자양성 센터가 되었고, 충주(김빌리), 수원(박갈렙), 조치원(김사무엘)과 후에 우암(이요한네스) 등 국내 개척과 세계선교를 가장 열정적으로 섬기는 대학생 선교회가 되었습니다.
1984년 홍덕순 목자가 대전으로 인사 이동된 이 후, 고광옥 목자가 3년간 섬기다가 수원으로, 수원을 9년간 개척하고 섬기던 박성환 목자가 1987년 청주CMI 선교교회로 인사 이동하여 현재까지 충성하고 있습니다.
(3) 인천 개척(1982년);
1982년 10월 대전에서 우남식 목자와 안은경 사모를 인천으로 파송하여 개척하였습니다. 본래 인천은 서울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청주에서 정피터(현재 미국 피츠벅 선교사) 형제를 보내어 개척하다가 본부의 명령으로 철수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개척이 안되자 대전의 재차 건의에 따라 성령께서 우남식 목자를 인천에 파송하고 개척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인천은 인하대와 인천대 그리고 교육대를 중심으로 개척하여 그곳의 제자들이 러시아와 동구권 개척에 선봉이 되었습니다. 1990년 7월 러시아가 한국과 국교를 맺어지기 전에 인하대 출신 황제임스 선교사가 헝가리를 거쳐 모스크바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개척에 힘써 제자양성을 하며 열심히 전공을 공부하여 한국인 중에 모스크바 대학 제1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총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현재 한국교회에서 설립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대학 총장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3) 천안 개척(1984년);
천안은 1984년 10월 대전에서 오학영(요한) 목자와 유경순(모니카) 사모를 파송하여 개척이 시작되었습니다. 단국대 천안캠퍼스와 호서대, 순천향대를 개척하여 제자양성을 하였습니다. 오학영(유경순) 목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학원 전임강사를 하며 한 지구를 개척하는 평신도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단국대 호숫가에 아담한 홈 센터를 거의 자비로 구입하여 양들을 섬겨 단국대를 개척하고, 유럽의 오스트리아를 개척하고 독일 킬 개척을 지원하며 미국선교를 위해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현재는 학원 전임강사를 사직하고 신학교를 다니며 책임목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직 UBF에 속해 있지만 단체를 초월하여 대전 지부로서 영적 관계성을 가지고 제자양성과 세계선교 역사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2. 세계선교의 역사
(1) 독일 개척(1969년):
1969년 7월 17일 서인경, 이화자, 설동란 선교사를 서독에 파송하였습니다. 같은 해 봄에 우리는 8년간 열정적으로 기도한 동남아에 김세윤 선교사를 파송하고 동남아 선교비전이 넘쳐 있었습니다. 당시는 한국 교회의 형편과 의식수준은 동남아 선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선진국인 유럽이나 미국은 우리의 선교지역으로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식 수준을 초과하여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독일 선교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를 개척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성령이 허락하지 않아 유럽인 마게도냐로 향하였던 선교역사와 같은 것입니다(행 16:6-10). 우리는 서독에 노무수출로 직장을 따라 출국하는 한국 간호사들을 서독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파송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에는 평신도 선교사(Tentmaker)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때, 가난하고 작은 시골 선교단체에서 대전 간호대 첫 졸업생인 서인경, 이화자, 설동란 자매들을 감히 평신도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파송한 것입니다.[49]
대전의 첫 선교사가 된 서인경, 이화자, 설동란 자매들은 서울 본부에 가서 2주 동안 배사라 선교사와 이창우 전국총무의 사랑과 보살핌 가운데 일용할 양식과 간단한 성경공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후 7월 15일 대전 책임 목자인 서덕근 총무가 ubf 본부인 종로센터에서 사도행전 1:8절 말씀을 전하고 이들을 안수하여 전국적인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50]. 그런데 장마 비로 하루 순연되어 마침내 7월 17일 목요일 당시 한국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김포공항에서 다시 기도하고 파송하였습니다.
처음 이들을 파송할 때는 함께 서독으로 파견되는 간호사들로 인해 김포공항이 온통 눈물바다였습니다. 간호사 부모님들은 멀리 서독에 딸들을 보낼 때, 가난한 한국의 운명을 슬퍼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들을 출구로 보내고 다시 환송대에 나가 비행기에 오르는 딸들을 향해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김포공항이 머지 않아 이별의 눈물바다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찬송바다로 변할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얼마 후 공항은 찬송바다가 되어 당국의 건의에 따라 찬송을 부르지 못하고 얼마 동안 기도와 말씀으로 공항예배를 보았습니다. 이런 역사 가운데 파송된 우리 서독 선교사들은 70년 4월 4-5일 부퍼탈에서 첫 주말수양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40여명이 참여했는데 많은 분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난한 한국 사람이 감히 기독교 선진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여 1972년 제1대 서독 지부장으로 대전 화요회 목자 출신인 간호대 김숙철[51] 자매와 그의 동역자로 이기향[52]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이런 대전의 세계선교역사에 전국 각 지구 센터들이 참여하여 점차 선교사 파송이 늘어나며 선교의 중심을 독일 캠퍼스 학생으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또한 독일 각 지역에 지역장을 세워 나가며 체계가 있는 선교 역사를 섬겼습니다. 이 때 대전에서 조경숙, 청주에서 송희순, 대구에서 배영자, 윤숙남, 전주에서 박문행 등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독일 개척역사를 확장하여 나갔습니다.
김숙철 선교사가 경희문 허벤허 목자와 목자 가정을 이루게 되어, 이미 베를린에 파송된 대전 화요회 목자 출신인 허유강[53] 선교사를 선출하여 제2대 지부장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후에 서독 선교사들이 결혼하면서 형제 선교사들이 참여하였는데 이기향 선교사의 남편이 된 퀠른의 이강복(아브라함) 선교사를 비롯하여 보쿰의 최명환(스테반), 프랑크프르트의 권파울로스, 쾰른의 이베드로, 본의 피터장, 슈트트가르트의 이이삭, 하이델베르크의 홍디모데 선교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독일로 가는 간호사와 광부의 진출이 막히자 우리는 모두 당황하고 있었는데, 이 때 하나님은 대전CMI에 유학생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때 충남대 건축과 출신 안재룡 선교사를 첫 유학생 선교로 파송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54] 그 후 대전의 윤영기(아헨), 손장원, 한요셉(담슈타트), 황수근, 김정희(브레멘), 안암의 이택용, 강성자, 한양의 배동운, 정혜원, 정용선, 장정재, 김용수, 최정아, 김봉태, 김한옥(이상 독일) 선교사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수 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독일로 유학생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 후 유학생 선교사는 독일 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러시아와 호주와 세계 각지로 파송되고 있습니다.
1969년의 서독 선교역사는 우리 CMI의 선교역사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피선교국가에서 선교국가가 되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은 피선교국으로 기독교 선진국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은 감이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독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한국 사람들을 통해 서구 사람들이 변화하는 역사를 체험하며 더욱 세계선교 비전과 선교신앙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서독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러시아와 동구권, 오대양 육대주 약 80여개국에 1500여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서독 간호원과 광부들은 가난한 한국의 산업발전에 국가적 차관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 기금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선교사들의 넘치는 헌금은 가난한 CMI 학생선교단체를 부유하게 하는데 큰 공로가 있었습니다.[55] 하나님은 이런 역사적인 세계선교 개척 역사에 작은 대전을 귀하게 사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전 출신 중에서 첫 순교자도 나왔습니다. 1985년 강영숙 선교사(1955.12.2-1985.5.3)는 양들을 데리고 부활절 수양회 장소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두 이방양과 함께 하늘 나라로 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서인경, 이화자, 김숙철, 이기향, 조경숙, 허유강 선교사들은 살아있는 순교자라 할 만큼 서독 개척역사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하였습니다.
(2) 미국 개척(1972년):
1972년 1월 31일 양신영 자매를 시카고 개척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양신영 자매는 시카고 한인교회 개척자요, 부친인 양치관 목사의 초청으로 가족이민을 가게 되어 우리는 그를 평신도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파송하였습니다. 양신영 자매는 대전 CMI 개척자였던 양신아, 김영길 부부와 함께 성경공부하며 시카고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1981년 부터는 서덕훈(디모데) 선교사가 양신영 선교사와 가정을 이루고 시카고 역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렇게 개척된 시카고 ubf는 6년 후, 1978년 배사라 이창우 선교사가 파송되어 오늘의 세계본부가 되었다.
그 후 대전은 전국역사에 동역하여 시카고에 임정희(74년)와 이상복(77년) 부부, 이만우(76년)와 임종식(82년) 부부, 송순정(77년)과 정덕오(82년) 부부, 이윤성(81년)과 구정원(77년) 부부, 한마태,김영서 부부. 송페트라(84년)과 이바울(88년) 부부를 선교사로 뉴욕을 거쳐 시카고로 파송하였습니다. 또한 문건연 김세연 선교사를 조지아 애틀랜타에, 이요셉 김정녀 선교사를 시카고를 거쳐 오하이오 콜럼버스에, 이동주 김숙 선교사를 시카고를 거쳐 시애틀에, 배행봉, 이복순 선교사를 시카고를 거쳐 북씨애틀에 각각 파송하여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대전 성장기 역사는 국내 개척과 해외 독일과 미국 개척에 집중하던 시대입니다. 대전은 서독에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전국 CMI에서는 광주를 ‘성서한국의 시온성”, 대전은 “세계선교의 시온성”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의 형제자매들의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헌신은 현재 12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대전 CMI, 열방선교교회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대전과 청주와 공주, 천안, 그리고 인천의 선교열정은 전국 선교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제 21세기 한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모범적인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단체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전 1:8절)”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순종하고 헌신하는 주의 종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베드로 기록)----
제 4기 발전기(1984.3-2006.3)
홍덕순 대전 인사이동과 발전기
미국, 독일, 호주(방바울 루디아, 박갈렙 은혜, 이사무엘 한나), 네델란드(임제임스 에스더, 한피터 은혜, 황모세 한나, 주여호수아 그레이스, 김요셉 한나), 말레시아(여여호수아 드보라), 백러시아, 중국(최요한 폴린, 이항호, 김 수진, 서피터, 서샤론) 몽골(이희철 난경), 일본(김남제 한결) 등 개척
제 5기 전환기:
ubf 제2차 개혁운동과 CMI의 탄생
박윤제 담임목사와 CMI
[1] Sara Barry 선교사가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 1961년 4월 23일자로 보낸 편지와 9월에20일 보낸 편지.
이 Sara Barry 선교사 편지는 CMI History란의 46번의 글에 실려 있음.
이 편지에 Sarah 가 아니라 Sara 라고 쓰여 있음.
[2] 배사라(Sarah Barry): 미국 남장노교 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 한국 대학생성경연구회(ubf) 창립회원 중 일인. 대학생시절 IVF 에서 은혜를 받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한국에 파송 받아 한 때 전라북도 위도에서 농촌선교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1978년 귀국 현재 시카고 ubf에 재직 중이다.
[3] 이창우(사무엘): 대학생성경연구회(ubf) 창립회원 중 일인; 전주 신흥고교, 전북대 철학과, 총신대를 졸업하고 ubf 세계총재, 시카고 선교사로 재직 중 2001년 사택화재로 질식사망.
[4] 정수일: 대학생성경연구회(ubf) 창립회원 5인중 일인, 1964년 전남대를 사학과 졸업하고 대구선교회와 대전 선교회를 개척.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하여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무역협회 회장, 뉴욕 한인교회에서 선교부장 및 장로로 임직 시무하다가 2007년 은퇴하고 2009년 대전CMI 제1회 미션캠프와 평창대회 참석함.
[5] 고광옥: 국제대학선교협의회(CMI) 창립회원. 1965년 조선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전주 선교회, 서울 경희문, 성동, 청주 선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다 수원합신대를 졸업하고 현재 수원 선교회 담임 목사로 임직.
[6] 전선지(사라): 전남대 농대 졸업하고 배사라 선교사를 동행하며 광주, 대전, 서울 개척역사를 섬김. 전 한국 총무, 전창선(요한) 목자의 부인.
[7] 김정일(요한): 1965년 대전대(현 한남대) 졸업. 국제신학대학 총장 역임. 1966년 광주 인턴훈련을 거쳐 60년대 대구, 전주, 제주 등 전국개척역사에 수습역사를 섬김. 명륜 선교회를 개척하고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음.
[8] 문건연(이삭): 1968년 충남대 농대를 졸업하고 대전 CMI 학사회장으로 대전 개척을 섬기다가, 1976년 CMI 선교사로 미국 죠지아주 애틀란타에 파송되어, 15 년간 지부장을 담임한 후, 에모리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클리브란드 한인연합감리교회 담임으로 시무하고 있다.
[9] 백광전: 1968년 충남대 농대 졸업하고 ROTC 복무. 충남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한미타올주식회사 대표, 대전 문창장로교회 장로로 임직시무 중.
[10] 송정호(피터): 1969년 충남대 공대 졸업하고 ROTC 복무. 미국 선교사 서인경 자매와 결혼하고 뉴욕에서 무역회사 운영. 미국 UBF 선교사로 남아있음.
[11] 베드로: 1969년 충남대 농대 졸업하고 한양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 1967-1984년 대전CMI 담임 목자. 1984-1995년 한양 선교회 담임 목자를 역임하고 현재는 오지 선교사로 재직.
[12] 이수민: 1969년 대전대(한남대) 졸업하고 충남대 공대 석사, 고려대 박사학위. 한남대 화학과 교수, 이과대 학장과 나노생명과학대 학장 역임. 대전CMI 학사회장을 거쳐 김군자 권사와 결혼하고 대전성결교회 장로로 시무.
[13] 박행순: 1969년 대전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주리 대학 석사 박사학위. 교회 권사로 다민족 가정을 위해 헌신하며 전남대 약대 학장을 거쳐 현재 약대 교수와 국제과학문화교류센다 이사장을 겸임.
[14] 장정자: 1970년 대전대 졸업. 대전CMI 개척실무자로 헌신. 달구벌교교 교장 역임. 현재 경동정보대학 겸임교수. 대구대 교수와 결혼 대구중부장로교회 권사로 시무.
[15] 양신아: 1970년 대전대에서 경희대로 편입하고 졸업. 1972년 미국이민 시카고 개척역사에 참여. 1968년 충남대 농대를 졸업한 김영길 장로와 결혼하고 시카고 한인교회 권사로 시무하다가 현재 알라바마에 거주.
[16] 이순희: 1968년 간호대 졸업하고 간호장교로 복무. 대전개척역사에 참여하여 다수의 후배양성하고 1968년 12월 정수일 목자와 결혼. 72년 미국이민 현재 뉴욕 한인교회 권사로 헌신하고 있음.
[17] 서인경: 1968년 대전 간호대 졸업. 1969년 서독에 첫번째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되고. 현재 송정호 선교사와 결혼 미국 뉴욕에서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선교사로 활동중.
[18] 이화자: 1968년 대전 간호대 졸업하고 69년 서인경, 설동란과 함께 첫 서독선교사로 파송되고 1976년 동대문 출신 심운용(현 한국의 신학대 교수) 형제와 결혼 현재 독일 부퍼탈에서 독일교회를 섬기고 있다.
[19] 60년대 한국교회의 형편은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 선교부의 의존도가 대단히 높았다. 한 예로 한국에서 교회를 건축하려면 개교회가 삼분의 일의 비용이 준비되면 삼분의 이는 미국 선교부를 통해 미국 교회가 헌금하여 건축하였다. 이렇게 미국 선교부에 의존하던 시기 한국교회가 바라보는 동남아 선교는 현실이 아닌 먼 미래의 비전에 불과하였다. 또한 한국 전도사들은 50불 정도를 지원 받으며 미국 선교사를 보조하였다.
[20] 학생총무: 60년대 UBF 초창기 대학을 졸업한 목자가 부족하여 제주(송창윤), 대구(이진화), 대전(서덕근)에 학생총무 제도를 두었다. 당시 우리는 믿음이 어리고 십자가가 너무 힘들어 이런 직책을 맡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기 보다는 신세를 망쳤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이런 직책을 맡으면 “너 잘 못 걸렸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당시 목사나 전도사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소명을 받은 분들 외에는 지금 같이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았다.
[21]. 허선일(노아): 1963년 충남대 공대 입학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공대개척에 헌신한 후 71년 졸업하고, 고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며 천안 선교회 개척역사에 헌신. 현 천안북중 교장인 한기옥 아내와 아들 준석, 딸 지연이를 두고 1985년 간경화로 소천하였다.
[22] 김득룡: 1970년 대전대 영문과 졸업.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교육철학 전공하고 한남대 철학과 교수. 대학원장으로 한남대 글로벌 칼리지 창립. 1965-7년 대전개척역사에 헌신. 현재 한남대 철학교수로 재직하며 노은침례교회 안수집사로 시무하며 조치원 외국인 교회에서 봉사.
[23] 홍덕순(보나): 1970년 대전대 성문과 졸업. 69년 서울 본부 인턴훈련을 거쳐 다음해 대구개척 역사에 참여하고 72년 청주 국제대학선교협의회(CMI)를 개척하다 1984년 대전으로 인사이동 대전 성장역사를 섬김. 현재 대전열방선교교회 원로 목사로 서천 산야초건강원 원장.
[24] 임열수: 1971년 대전대 영문과 졸업. 대전 개척기 학사회장으로 헌신하다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현재 복음신학대학대학원 총장으로 재직. 또한 부인 박성자 목사와 교회를 개척하고 있음.
[25] 이 론: 1970년 대전 간호대를 졸업하고 서독 선교사 훈련 받던 중 1971년 서베드로 대전 총무와 결혼하고 대전선교회와 한양선교회를 거쳐 현재 오지 선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26] 박희영: 1972년 충남대 의과대 졸업하고 부산 메리놀 병원 X-Ray과장 역임. 학생시절 대전 CMI 학생회 대표 및 일용할 양식부장으로 헌신.
[27] 김혜순: 1975년 충남대 의과대를 졸업하고 서울 보훈병원 내과과장을 거쳐 현재 천호동 혜성내과 원장. 졸업 후 종로 CMI에서 제자양성하며 의료봉사로 헌신.
[28] 조준찬: 1976년 충남대 의과대 졸업하고 대구 조준찬내과의원 원장. 대구 제일교회 장로로 시무.
[29] 최명환(스테반): 1974년 충남대 공대 수석 졸업. 동대학원 졸업하고 독일 도르트문트 대학 유학하여 박사. 대학 1학년부터 대전CMI 역사에 동참하여 주일집회를 개근한 것으로 유명하며, 지성으로 제자양성을 하여 임감천(인섭), 조준찬 형제와 김혜순 자매를 목자로 세웠다. 독일 백길례 선교사와 결혼하고 현재 독일 보쿰 담임 선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30] 우남식: 1974년 충남대 공대 졸업하고 인하대 교육학 박사. 1982년 인천을 개척하고 현재 CMI 인천대학마을교회 담임 목사, CMI 사무총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31] 안재룡(안드레아스): 충남대 1975년 공대 졸업하고 윤영기 선교사와 결혼. 독일 아헨 공대 유학 건축학 박사로 아헨 선교사로 재직.
[32] 김용대(이삭): 1975년 충남대 공대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후 30여년을 대전 본부센다에서 평신도 목자로 충성하며 현재 동아공고 교장과 대전열방선교교회 장로 임직.
[33] 방덕신(바울): 1976년 충남대 공대를 졸업하고, 대전개척역사에 헌신하다가 독일 조경숙 자매와 결혼하고 현재 호주 멜보른에서 CMI 선교사로 헌신.
[34] 손장원(리브가): 1974년 충남대 국문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다름슈타트 대학 사회복지학 전공. 개척기 대전 선교사업 실무자로 다년간 충성하였으며 서독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한상대 형제와 결혼 CMI 다름슈타트 선교회를 섬기고 있다.
[35] 박성자(사라): 1975년 충남대 국문과 졸업하고 대전 개척기 제자양성에 충성. 임열수 학사회장과 결혼. 현재 임열수 총장을 동역하며 미국에서 신학교졸업하고 여성목사로 서울교회를 개척하고 지금은 대전복음교회를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
[36] 안은경(마리아): 1975년 충남대 영문과 졸업. 대전 인턴목자로 대전과 세계선교 역사에 헌신. 공주CMI를 개척하고 우남식 목자와 결혼하여 인천개척에 헌신하고 있다.
[37] 윤영기(룻): 1975년 충남대 법경대 법학과 졸업하고 호스톤 여고 교사, 독일 퀼른대 법학박사과정 수료. 첫 유학생 선교사인 안재룡 형제와 결혼하고 퀼른 개척역사에 참여한 후 현재 아헨 선교사로 재직.
[38] 임인섭(감천, 다윗): 1975년 충남대 농대 졸업하고 총신대 졸업, 웨스트민스터 신학대 박사. 후암장로 교회 전도사로시무. 목동 장로교회 개척을 거쳐 현재 일산 충만한교회 담임 목사로 재직하며 CMI 해외선교협의회 지원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39] 김영환(아브라함): 1974년 숭전대 물리과를 졸업하고 임보영 사모와 결혼하고 고교교사로 재직하며 대전 개척역사를 30여년간 섬김. 평신도 목자로 10여년간 오정선교회를 개척하고 학사회장으로 대전과 세계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섬기며 현재 대전열방선교교회 장로로 임직하고 있다.
[40] 정덕오(베드로): 1975년 대전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 송순정 자매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시카고 한인교회 잡사로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준비하고 있다.
[41] 이일영(요셉): 1975년 대전대 영문과 졸업하고 김정녀 선교사와 결혼. 콜럼버스 대학 전자과 및 동대학원 MBA과정 수료하고 동대학 데이터베이스 팀장으로 근무. 현재 오하이오 콜럼버스에서 캠퍼스개척 선교사로 활동.
[42] 한정희(리브가): 1975년 대전대 영문과 졸업하고 동대학원 상담학과 석사 및 복음신학대학원대학 상담학 박사. 대전 열방선교교회 김용대 장로와 결혼하고 동역하여 30여 년간 대전캠퍼스 개척과 대전 선교사 지원에 헌신.
[43] 조경숙(루디아): 1972년 대전 갼호대 졸업하고 서독 선교사로 파송되어 헌신. 귀국하여 대전 수요회 출신 방덕신 형제와 결혼하고 현재 호주를 개척하고 지부장 사모로 헌신.
[44] 송희순: 1971년 청주 간호대를 졸업하고 독일 개척역사에 참여한 후, 김창제(이삭) 형제와 결혼하고 미국 톨리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톨리도 대학 로버트 놀란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여 놀란이 미국 대학생으로는 처음 거듭나게 되어 모든 미국 선교사들에게 미국 캠퍼스 선교비전을 주었다. 현재 미국 클리브랜드의 ubf 선교사로 충성하고 있다.
[45] 김승희(대범, 아브라함): 1974년 충북대 영문과 졸업하고 고교 교사로 청주개척역사에 학사회장으로 헌신.
[46] 박성환(갈렙): 1974년 충복대 농대를 졸업하고 수원 화공회사에 근무하며 수원개척함. 그는 9년간 수원을 개척하고 1987년 청주 책임목자로 인사이동 현재까지 담임으로 헌신.
[47] 김혜식(마리아): 1974년 충북대 가정과 졸업. 박성환 목자와 결혼하여 수원을 개척하고 현재 청주역사를 섬기고 있다.
[48] 청주CMI 개척: 홍덕순 목자는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와 같이 기독교 가정에서 핍박을 받지 않고 곱게 성장하여 영육간에 연약하였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서울과 대구에서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용광로 훈련을 받고 청주로 파송하셨다. 대전의 형제 자매들의 간절한 기도로 파송될 때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당시 비포장 도로인 국도를 따라 조치원을 거쳐 청주에 도착하였다. 대전의 서덕근 총무는 가다가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으나 끝까지 인내로 청주에 도착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절대 순종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주의 종이 되었다.
[49] 대전 졸업예배: 1969년 3월 이수민, 박행순, 김규진, 송정호, 베드로 등을 “7인의 선교사 파송” 이라는 제목으로 졸업예배를 드렸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드로 총무를 통해 주신 “졸업을 하고 선교회관에 남는 전임 목자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학사들은 직장생활을 하며 있는 곳에서 전도하고 또한 캠퍼스 복음사역에 참여해야 한다”는 선교방향에 따른 것이다. 같은 해 서독에 가는 학사들도 직장을 따라 가지만 돈 버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생활의 우선순위라는 방향에 따라 “선교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은 이를 축복하사 CMI(구 ubf)의 평신도 선교사 파송의 효시가 되게 하셨다.
[50] 첫 선교사 파송예배: 1969년 7월 15일 베드로 총무는 종로에서 첫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하러 갔다가, 1시간 전에 이창우 총무를 통해 파송말씀을 전하라는 방향을 받고 갑자기 전했다고 증언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서독 선교가 세계선교로 발전하면서 베드로 형제는 졸업하고 3년간만 선교회의 목자로 봉사하겠다는 마을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을 영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51] 김숙철: 1971년 대전 간호대 졸업하고 1972년 서독 초대 지부장으로 파송 받아 헌신. 한국 경희문 담임 목자인 허세민 형제와 결혼하고 25년간 경희문 개척과 세계선교역사에 헌신하였다.
[52] 이기향: 1971년 대전 간호대 졸업하고 1972년 서독 선교사로 파송 받아 헌신. 독일 3대 지부장인 이아브라함 선교사와 결혼하고 현재까지 독일개척에 헌신하고 있다.
[53] 허유강: 1973년 대전 간호대 졸업하고 서독 선교사로 파송 받아 현지에서 2대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헌신. 서울 종로 인턴 목자인 조성기(누가) 형제와 결혼하고 귀국하여 관악센다 개척역사에 헌신. 현재 숭실대 교수인 조성기 목사와 교회개척에 헌신.
[54] 유학생 선교사 파송: 당시 한국은 외화와 두뇌유출(Brain Drain)을 막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려면 문교부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했습니다. 또한 유학을 가려고 해도 학비가 없어 장학금을 보장받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에게 유학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79년 서베드로 총무가 서독 선교여행을 하며 독일과 유럽의 많은 대학이 학비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귀국하여 유학생 선교사 파송을 제안하고 대전에서 첫 선교사인 안재룡 학사를 서독에 파송하였다. 이어 1983년 한국정부는 유학자율화 정책을 발표하고 모든 유학규제를 풀고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후 하나님은 우리의 세계선교 신앙을 축복하셔서 지금까지 서독은 물론 세계 각국에 많은 유학생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55] 서독 선교사들의 헌금이 각 출신지구로 가지 않고, ubf 본부선교사업부로 보내져 종로 조흥은행에 쌓여 있었다. 은행장이 바뀔 때마다 종로 본부에 인사를 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ubf의 선교사업부 물질이 이창우 총무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공개적으로 관리되지 않아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76년과 92년 개혁과정에서 장부공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