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YOUR ESSAYLIFE
언양에세이포럼
22기-13차시
일시: 2024년 5월 14일(화) 3시00분
목록
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혼자 생활하기 연습 | 김연희 | 7 | 권춘애 |
2 | 노치원생 오라버니 | 배정순 | 7 | 김선애 |
3 | 현충일에 | 김순향 | 5 | 김인옥 |
4 | 누나별 콘서트 | 예수백 | 3 | 민창현 |
5 |
합평순서/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혼자 생활하기 연습/김연희 7
1. 비 오는 휴일 오후다. 동행할 사람을 찾다가 혼자서 집을 나섰다. 집에서 조금 나가면 태화강 국가 정원이 있다. 국가 정원을 한 바퀴 돌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걸음으로 만 보가 된다.
2. 혼자 걸으니, 누구와 보조를 맞출 필요도 없고 내 생각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다. 은빛 물살을 가르며 물오리가 자맥질하고 있다. 우산을 들고 걷는 길이 고요하다. 내 마음도 고요하다.
3. 만 보 걷기는 새해 아침에 세운 계획이다. 걷기의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당뇨병으로 오래전부터 약을 먹고 있어 해마다 새해가 되면 결심한 계획이었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올해만큼은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4. 그 동안 만 보 걷기를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함께 갈 사람이 없어서이다. 올해부터는 무엇이든지 혼자 해 보기로 했다. 지난주에는 혼자 쇼핑도 했다. 미술관에도 혼자 갔다. 텃밭에도 이제 혼자 가보려고 한다.
5. 어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서 십여 년 더 살다 가셨다. 스무 살에 아버지와 혼인 하고 평생을 함께 살다가 사별 후 혼자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힘들어했다.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 어머니 집에 자주 들르기로 결연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유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드리지 못했다.
6. 어머니는 우리 자매들을 보면 “늙은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있을 건 다 있어야 하고 할 건 다 해야 한다.” 하면서 “못을 박아 달라, 시장 같이 가자, 병원 가자, 등등 딸들을 호출했다. 우리를 보면 “너희 아버지가 마늘은 다 까주었는데, 빨래는 걷어다 턱 던져 주면 다 개비 주었는데, 분리수거는 다 해 주었는데” 하면서 혼자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하는 현실을 힘겨워했다.
7.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원망은 때때로 분노로 바뀌기도 했다. 우리 자매들은 그런 엄마에게 “이제 홀로 살아가야 하니 혼자서 하는 취미생활을 해 보시라, 물고기를 키워보시라, 식물을 키워보시라” 하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외로움을 느끼는 마음은 점점 커졌고 외로움은 우울증을 가져왔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 자매들은 노년이 행복해지려면 혼자서 생활하는 것을 젊을 때부터 연습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8. 어머니가 가시고 나는 혼자서 생활하는 습관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홀로 하는 취미생활로 다육식물 키우기에 심취해 보기도 하고, 집 가까이 텃밭을 일구어 보기도 하고, 쇼핑을 위해 외출 해 보기도 했지만 혼자 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 작심은 일 년도 되지 않아 산책하러 갈 때 남편을 찾고 친구를 찾고 동생들을 불렀다. 시장보기는 무겁다는 이유로 남편이 떠 맡았다.
9. 노인이 되면 사회생활이 축소되고 사회관계가 주로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다. 자녀가 출가하고 부부만 생활하다가 어느 한쪽이 먼저 떠나게 되면 사회관계망은 더욱 축소된다.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오래 생존하여 여성 혼자서 생활할 가능성이 크다. 좁혀진 사회관계를 넓히기는 쉽지않다.
10. 요양원에 입소하고자 하는 분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배우자가 떠나고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치매가 온 경우도 많다. 노인이 될수록 사람에 기대어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노년기를 진정 행복하게 보내길 원한다면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가고자 하는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혼자서 생활하는 것을 연습한다면 노년기에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1. 태화강 십리 대밭 길을 걷고 오는 길에 시장을 보고 돌아왔다. 남편이 없는 날은 혼자서 간단하게 식사 했지만, 오늘은 구색을 갖추어 식사 해 보려고 한다. 나를 위해 요리하고, 근사한 상차림을 해서 혼자만의 만찬을 즐겨 볼 생각이다. 올해는 꼭 취미 생활도, 운동도,여행도 혼자 해 보리라 다짐을 해 본다. (11.2)
2. 노치원생 오라버니 / 배정순 7
1. 병환 중이던 작은 올케의 부고를 받고 서울에 올라왔다.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어 셋째 오빠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잠자리를 안내받아 들어간 방에 짧은 편지며 그림, 조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에 없던 풍경이다. 동화 나라에 온 기분이 되어 얼른 든 생각이 손주들 작품이구나 싶었다.
2. 가까이 가 보니 단문의 편지글이 낯익은 필체였다. “여보 고맙소. 당신을 사랑하오!” 그때에야 감이 왔다. 이 방안 전시물의 주인은 노치원생 오라버니라는 걸. 콧날이 시큰했다. 분명 마음이 가라앉을 상황인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 인생은 이렇게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아기가 되어 제 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이 그랬다.
3. 올케의 남편 돌보는 손길이 갓난아기 돌보는 엄마의 마음 같았다. 오빠가 언제 저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내가 오라버니와 언니의 사는 모습에서 인생행로의 귀의歸意라고 느낀 건 사는 모습이 따듯한 봄날 같아서이다. 올케의 병든 남편 돌보는 손길이 엄마의 그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오라버니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올케의 말이 빈말로 드리지 않았다.
4. 우리 가족의 아픈 과거사가 되살아난다. 큰 오라버니는 시골에서 살다가 자식들이라도 잘 키워볼 요량으로 전답을 팔아 서울에 올라왔다. 둘째 오라버니가 일찍이 서울에 자리를 잡아 권위 있는 의류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을 했고, 큰 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운좋게 현대 금강 계발 스카웃 되어 해외지사에 진출했으니 믿을만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데 믿었던 사업체는 몇 년 안 가 불황에, 나라의 경제 위기까지 겹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깨달은 건 사업이 기울고 난 후였다.
5.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사업이야말로 하모니가 성공의 핵이었는데 오라버니들에겐 그게 빠져있었다. 사업체에 선장이 많아 중심 잡기가 어려우니 바람 앞에 등불일 수밖에. 부표 잃은 배가 순항할 순 없지 않은가.
6. 죽은 사람 코도 베간다는 서울, 엉성한 사업은 엄혹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업하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다면 누군들 못할까. 부표 잃은 배가 순항할 순 없지 않은가. 형제들은 빈 털털이로 바닥에 떨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7. 그때 아마도 식구가 단출한 셋째 오라버니 지분이 가장 적었지 싶다. 오빠는 기술도 있고 아직 젊으니 취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낮아진 마음으로 욕심 없이 세탁업을 선택했다. 옷과 연관된 일이고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리라 믿었던 게다.
8. 노력한 만큼 보상은 돌아온다는 말 대로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 한 목적으로 일하니 시나브로 재산이 늘어났다. 집 사고 아들딸도 말썽 없이 잘 자라주어 아들은 큰 제약 회사의 지점장, 딸은 외국계 회사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확보해 일하고 있다. 나이가 있고 생활의 여유도 생겨 세탁일을 접었다. 자식들도 분가하고 이제부터는 부부중심의 삶을 살고 싶어 올케는 올케대로, 오라버니는 서예 학원에 등록했다.
9. 목표 지향적인 오라버니의 성향 탓일까. 모처럼 주어진 노년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을까? 취미생활도 일하듯 서예에 매료되어 온종일 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화선지에 한획한획 그을 완성해 가는 게 너무 즐겁다고 했다. 오라버니의 목소리에 윤이 흘렀다.
어느 날 전시회를 한다고 했다. 개인전이 아닌 합동 전시회인데도 좋은 글을 선보이기 위해 서실에서 산다고 했다. 그게 무리였을까? 전시회에 낼 글 준비하다가 서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뇌졸중! 그 후유증으로 언어도 어눌해졌다. 더불어 그 좋아하던 서실도 갈 수 없게 되었다.
10. 평생 일만 하던 오라버니가 뒤늦게 찾은 행복은 펼쳐보기도 전에 무너져 내렸다. 그 후 삶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우울했으리라. 불행은 꼬리를 물고 온다고 했던가. 얼마 안 있어 같은 병명으로 다시 쓰러지는 치명타를 입었다. 병원에 달려갔지만, 그때는 이미 치료 적기를 넘긴 후였다.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그 후의 삶은 우울함이 일상이었지 싶다. 마음의 병이 깊어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애석하게도 혈관성 치매라는 달갑잖은 진단을 내렸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부터 살만하다 싶었는데 우리 오라버니 인생 억울해서 어쩌나!
11. 우여곡절 끝에 평정심을 찾았지만 오빠는 올케에게 아이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올케의 눈물겨운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규칙적인 운동, 옷 입고 벗을 때, 치매에 좋은 음식을 챙기기, 매사 부실하지 않도록 언니 손길이 따라다녔다. 집에서만 간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가 노치원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 유치원 보내듯 남편을 노치원에 등록했다.
12. 다행히 오라버니가 순한 치매여서 노치원에 적응을 잘한다고 했다. 웃음이 많아졌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셨다. 치매 증상의 한 부류라고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올케도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남편이 없으니 숨 쉴 틈이 생겼다며 그 삶에 적응해 살고 있다.
올케는 노치원 설립자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다들 전직 대통령을 정치 못했다고 원망하지만 치매 환자를 위한 시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해준 대통령이어서 고맙다고. 가끔 노치원 오빠 수업 영상을 보내오기도 한다. 언니는 오빠가 이리 가무에 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 모습이 평화롭다. 아마 드러내지 않아 그렇지 그 속에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배태하고 있으리라. 하긴 오라버니가 교회에 직분을 맞고 있어, 일 아니면 휴일에 교회 나가는 일이었지 춤을 추고 놀 여유는 없이 산 분들이다.
14. 주위에서 보면 가족이 조금만 치매기를 보이면 자식들까지 나서서 요양원에 보내버리는 게 보편적인 추세다. 한데 우리 오라버니는 치매인데도 아내의 정성스런 돌봄을 받아 포실하게 살고 있다. 자식들도 지극 정성이다. 성공은 부나 명예가 아닌 살아낸 과정이라고 볼 때, 오라버니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정이 흐르는 화목한 가정을 가꾸지 않았는가. 가족의 따뜻한 간병 받으며 살다 가는 거니 오라버니 인생, 그리 억울할 건 없을 것 같다.
3. 현충일에 / 김순향5
1. 현충일 아침이다. 초여름 녹색바람이 산드럽다.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부터 찾아 조기를 달고 손녀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빠 도움을 받아서 동생과 함께 조기를 달아 보렴!”
2. 할 일을 다 한 듯 기분이 가뿐해서 산책을 나선다. 산책이래야 아파트 단지 내를 한 바퀴 도는 것이지만, 오늘은 동별로 태극기가 게양 되어있는 수를 꼼꼼히 확인한다. 내 기분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세대의 숫자에 따라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3. 이럴 수가 있을까! 칠백 세대가 살고 있는 큰 동네에서 조기를 단 집이 칠십 세대가 되지 않는다. 어떤 동에는 태극기가 대여섯 집만 달려있다. 아쉬운 마음에 관리실에 조기를 달 수 있도록 홍보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4. 각 행정기관에서도 국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공식적인 행사를 한다. 그러나 드러나는 행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쟁터에서 산화된 국군용사들의 고마움을 국민들 가슴에 심어주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현충일 전날이나 아침에라도 조기 달기를 홍보해 주었으면’하는 바람은 나만의 욕심이었을까!
5. 내가 특히 현충일 조기를 다는 일에 관심을 갖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충원이나 국군묘지에 안장되어 세상에 왔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는 국군들은 그나마 나은 셈이다. 그들의 영혼은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 위로라도 받는다. 그러나 흔적 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무명 인사와 용사들의 넋을 위로해 줄 방법은 오로지 조기 게양과 일 분간 울리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묵념뿐이다.
6. 그 무명 인사 속엔 내 피붙이도 있어 현충일엔 마음이 더욱 숙연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현충일 조기 게양에 정성을 다했고 가까운 이들에게도 조기 달기를 권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동네만 봐도 몇몇 사람만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뿐, 그저 하루 노는 날로 퇴색되고 있어 안타깝다.
7. 요즈음은 학교에서도 경축일이나 현충일 의식을 하지 않으니 자라는 세대들이 의식 노래를 알 턱이 없다. 게다가 요즈음 현충일에 다는 조기에 대해 반발을 보이는 측도 있다. 북한이 주적이라 알고 살아온 사람과 주적이 아니라는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 간의 간극 차는 크다.
8. 한국 전쟁을 겪은 나는 지금의 내 나라가 더없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은 내 외가를 풍비박산을 내버렸다. 살림뿐 아니라 둘째와 넷째 외삼촌까지 끌고 가버렸다. 두 분의 생사는 아무리 알아내려고 애를 써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연세로 보아 타계했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삭정이 빈 가슴으로 평생을 살았을 두 외숙모와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이지러진 삶을 보상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친정을 생각하며 흘린 어머니의 눈물이 지금도 내 가슴에 흥건히 남아있는데, 어찌 내가 북한을 주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9. 햇빛이 사위어 가는 저녁 무렵 조기를 내린다. 그까짓 국기가 뭐라고, 국기를 달지 않는다고 애국심이 희석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게다. 그러나 그냥 단순히 조기를 다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 조기를 달면서 자연스레 현충일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대를 이어 훈습 되어갈 수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몹시 안타깝다.
10. 시원한 바람을 쐬러 방천둑에 나가니 노란 금계국과 개망초가 지천이다. 손에 들려있는 까만 수첩을 내려다본다. 우리 아파트 동별 국기게양 기록이다. 오래전 이사 와서부터 올해 현충일까지의 태극기가 달린 세대의 숫자가 적혀있다. 경축일과 현충일에 태극기를 다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용을 쓰던 흔적이다. 시간 흐를수록 휘날리는 태극기 수가 줄어들었고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특히 오늘은 처참하다.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재간이 없어 이젠 나도 놓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11. 흔적을 지우며 떠내려가는 강물을 배웅한다. 강물은 물결치는 대로 살라고 내게 교훈을 준다. 내년에도 현충일은 왔다가 잘 지나갈 것이고 나도 무심히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 갈 것이다. 그래도 귀에는 아직 현충일 노래가 쟁쟁거린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충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님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아 그 충성 새로워라
4. 누나별 콘서트/예수백 3
1). 야외무대가 직전 연습 행사인 리허설로 떠들썩하다. 문학관 가을 행사가 곧 시작될 모양이다. 지역 악단의 구수한 연주와 사회자의 맛깔나는 멘트는 참석한 관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문학관에서 기획한 무대는 산사에서 펼쳐지는 산사 음악회를 연상하게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는 그윽하게 무르익고 있었다.
2). 가을은 이미 깊었는지 저녁 어둠은 바로 찾아왔고, 하늘에 뜬 반달과 별들은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대에 꾸며진 각양각색의 조명은 어둠에 가려진 하늘길을 찾고 있듯이 연신 번쩍이고 있었다. 높고 낮은 음계의 음악 소리는 조명과 함께 하늘로 높이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파란 조명은 파란 소리를 싣고, 빨간 조명은 빨간 소리를 머금고, 멀고 먼 저 하늘길로 가없는 불빛 밝히고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빛은 이 고운 소리를 어디까지 실어 나르는 것일까. 아무리 멀고 먼 하늘길이라도 목적지는 저 반짝이고 있는 별일 지도 모른다.
3). 빛과 소리가 만나 빛·소리의 우주 열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소리는 빛을 타고 먼 여행을 쉼 없이 떠나고 또 떠나고 있었다. 밤하늘에 고요히 떠 있는 별, 소리 없는 별들에게 이 아름다운 소리의 음악을 가지각색의 등불에 태워서 보내고 있었다.
4). 내 기억 속의 별은 대부분 여름밤의 별이다. 여름날 저녁 식사는 주로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서 하는 날이 많았다. 모깃불이 한창 타들어 가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면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무릎을 내어주시곤 했다.
5). 누워서 보는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은하수나 흐릿한 별은 별로 쳐주지도 않았고, 크고 밝은 별만을 별로 여겼다. 하지만 별을 쳐다보며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하나, 둘 셋하고 헤아려 보는 것이었다. 헤아리기 시작하는 별의 숫자도 곧잘 잊어버렸다. 그리고 또 헤아리는 것이 전부였다.
6). 그러다 길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볼 때면 할아버지는 ‘떨어지는 별은 장군이 죽을 징조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별은 장군으로 상징되는 출세와 명예였다. 옆에 같이 앉아있는 어머니는 북두칠성을 ‘칠성님’이라고 불렀다. 그 별은 소원을 들어주는 신령스러운 별이라고 했다.
7). 나는 가만히 하늘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을 나의 별로 정했다. 별자리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나의 별에게 어른이 되면 장군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빛나는 별. 옆집 익이도 내가 정한 장군별을 자기 별이라고 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별이 정확히 같은 별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우리는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하루만 지나면 그 별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장군별도 익이도 나도 서로가 잊혀 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8).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 별은 더욱 영롱히 빛난다. 그즈음, 별 하나가 언양 화장산 자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생은 그 별을 ‘누나별’이라고 했다. 누나가 저 별처럼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동생은 혼자만이 정하고 남몰래 부르던 별이었다. 밤에만 부를 수 있었던 그 이름, ‘누나별’. 화장산 자락에 가만히 두고 그는 갔다. 오랜 옛날부터 이름이 없던 자기에게 ‘누나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슬픈 눈으로 한없이 함께 해주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9). 날 맑은 밤, 밤마다 숲속 언저리를 비추어 찾았지만, 그의 흔적만이 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밤을 꼬박 새우고 돌아서서 가는 새벽녘, ‘누나별’의 쓸쓸한 뒷모습은 차라리 창백한 연민이었다.
10). 도시의 불빛이 밝아오면 숨고, 구름이 가리면 구름에게 내어주고, 비가 오면 비에게 양보했다. 절망과 애틋함은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이고 회한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미리 가져와서 절망하는 것도 애틋함을 미리 가져와서 애틋해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것 같았다.
11). 그래서 별은 그리움이고 용서이고 사랑이고 희망일 것이다. 희망은 미래이며, 영원히 시들지 않는 신선함이 아닐까. 또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별이 가진 커다란 동질감과 여유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떠나간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할 때도 밤하늘의 별을 보기도 했을 것이다. 저 별을 같이 볼 수 있다는 실낱같은 믿음을 마음에 품고, 별이 주는 여유로움으로 아름답게 잊기도 했을 것이다.
12). 무대는 한껏 무르익어 가고 형형색색의 빛은 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아름다운 선율은 소리 내어 ‘누나별’로 소식을 보낸다. 더 이상 애절한 누나별만의 곡조가 아니라 자상한 엄마별, 아빠별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별이 함께 하는 해맑은 가족별을 꿈꾸어 가고 있었다.
13). 효심이 지극한 고등학생이 눈이 불편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무대에 섰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이 전율로 다가왔다. 이제는 장군별이 아닌 나의 별을 조용히 품어본다. 별이 가슴에 기대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