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우리집 대소사
1. 체 통
2. 화 해
3. 탈장 수술
4. 보모 고조부 이장
5. 무학 코러스
6. 작은형 이장
7. 집사람 성형 수술
8. 터키 지진 구호품
9. 이태원 참사 답사
10. HP 교체
11. 해외 여행
1) 오끼나와
2) 코카서스 3국
3) 탄탄탄 3국
4) 집사람 라오스
1.체 통
1월에 내 생일 잔치를 하려고 식당을 예약하고 사촌들에게 연락하라고 작은 아들한테 말 하였다.
매번 하던 일이라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작은 형의 큰아들 혁용이가 내 생일 전날 나한테 전화를 걸어 자기는 안 간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작년 정월에 산소에서 내가 자기 동생인 혁봉이 아들보고 너희집안을 이끌어갈 인물이라고 하여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다.
자기 아들이 장손인데 장손을 무시하고 차손한테만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또 우리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를 욕만 했다고 불만을 이제 표시하는 것이다.
혁용이가 이렇게나오기 까지는 자기 형제들 하고 많은 대화를 하고 블만이 쌓인 것이 이번에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정월에 우리 집에서 세배를 할 때 혁용이 아들보고는 너희집안의 장손이니 네가 너희 집안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덕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다 잊어버리고 이번에 혁봉이 장남에게 덕담을 한 것을 동생인 혁봉이 애들은 잘 보고 형인 자기가 못산다고 자기애들은 차별을 하여 기분이 나빠 이번 생일잔치에 참석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자기 자식보다 혁봉이 자식만 편애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기 형제간에도 차별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기들 형제에 대하여 차별을 하거나 편애한다는 생각을 추호도 한 적이 없는데 이것이 지천명의 나이를 먹은 조카의 생각이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일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이 얼얼하고 체통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런 말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정월에 그런 일이 있고 일 년이 되어서 그런 말을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때 바로 문제를 제기 했으면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끝날 일을 지금에 와서 크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혁봉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혁용이는 자기만 기분 나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와이프도 작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서운했다고 하며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혁용이네 식구들한테 내가 죄를 진 것 같이 되어 버려 아닌 밤중에 홍두께 라고 벼락 맞는 격이다.
그리고 이번 생일잔치에 동생인 혁봉이는 참석할거란다.
자기 형제 식구들 중에 자기식구만 참석을 안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정월에도 산소나 우리 집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하도 이이가 없어 할아버지 산소에도 안갈 거냐고 하니 그렇단다.
아주 절교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여태껏 화목하게 지냈는데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다.
내가 우리 집안의 좌상으로 조카들한테 잘 하려고 노력을 여태껏 해 왔는데 말 한마디에 여태껏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다.
매년 정원 명절에 년래행사로 조카들이 우리 집에 와서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는데 이제는 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큰형의 장남인 혁성이가 판교 집안의 보상금을 가지고 나르샤 하는 바람에 지금껏 나타나지 않아 혁용이가 차례 지낼 때 장손 역할을 했는데 혁용이 까지 사라진다는 것이다.
청계산에 5대조부터 아버지 까지 산소가 모셔져 있는데 첫째 둘째가 사라지고 막내인 나만 남게 되었다.
전화로 산소에 안 온다는 혁용이에게 넌 할아버지 산소에도 안 오냐고 다그치니 말도 안한다.
나의 전화 목소리도 커지고 열화도 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안보고 이제 연을 끊겠다는 거냐고 역정을 내기 시작 하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연인데 조상을 숭배하는 숭모사상을 헌신짝 같이 버리고 안동 권씨의 체통도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만나서 이야기해도 쾌심 스러운데 그것도 생일 전날 전화로 하다니 모든 게 못마땅하다.
큰소리로 계속 통화를 하니 집사람이 장녀인 혁인이 한테 전화를 하여 너희 작은 아버지가 혁용이에게 하는 전화를 들어보라며 종자들이 다 그러냐며 집사람 특유의 페를 찌르는 말을 해댄다.
내 생일날 혁용이네 식구는 안 올 것으로 알았지만 혁봉이 네 식구는 물론 혁인이 혁란이네 모든 식구들이 다 오지 않았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경권이 승희네 식구들이 왔지만 삼십 명 예약이 자리가 허전하다.
집사람의 전화 영향으로 혁인네 형제들이 옛날에 서운했던 일만 모두 생각해 내어 아예 발을 끊은 것이다.
자기 형제들 끼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우리가 잘 한건 모두 묻혀버리고 서운한 생각만 하여 아무 소식이 없다.
옛날에 서운했던 일은 자기아버지에 대한 우리 형제들이 비난했던 일도 포함되는 것 같다.
나의 형이고 자기 아버지인 오택이 형이 생전에 여러 사람에게 페를 끼치고 그 사실을 성인이 된 자식들도 거의 알고 있다.
형은 친척은 물론 금토동 수원 외가집까지 가서 돈을 빌리고 갚지를 않아 친척들의 원성을 샀다.
판교 김 할아버지에게도 돈을 갚지 않아 우리아버님을 호출하여 이른 봄에 판교 갔다 집으로 돌아오다 감기에 걸려 바로 세상을 하직하여 막내 누이가 오빠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형은 일을 벌이는 것마다 실패를 하고 빌린 돈을 갚지를 못한다.
모든 일에 실패를 거듭하니 집에서도 천대를 받고 자식들한테도 돌림을 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형제는 집에서 자식한테도 천대를 받아서 죽으면 자식들이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막상 형이 죽으니 핏줄은 못 속인다고 자식들이 아버지 돌아가신 것은 무척이나 서럽게 생각하고 옛날 잘못한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려 신통하기 까지 하다.
그 어렵게 자란 자식들이 지금은 어엿한 생활에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번에 혁용이 한태서 일이 터진 것이다.
나에게 전화 통보한 그 후로 한 번의 전화도 없다.
차례 지내러 산소에도 안 온다.
고조부. 할아버지 이장 때도 안 왔다.
우리는 조카에게 잘하려고 했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친구간이면 의리나 없다고 하지 쫓아가 패줄 수도 없고 작은 아버지로서 체통만 꾸겨 버렸다.
2. 화 해
금토동 오주 형이 사촌형 오영 이와 나와의 화해의 장을 만들기 위하여 9/13일 교대역 일식집 설국에서 만남을 주선하였다.
오주 형은 오영이 동생 숙자의 음성 종중 땅 소송사건 또 청계산 숙자의 성남 법원 경매사건 또 청계산을 사촌 큰형이 팔아먹고 남아있는 청계산에 얽힌 사촌과 우리 집에 관한 사연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에 고조부와 부모님 산소를 밑으로 이장하는 문제를 반대하는 오영이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오주 형이다.
내가 남아있는 청계산 종토를 종중 땅으로 명의변경을 하자고 하니 끝까지 반대하고 있다.
법적으로 하자고 나서는 오영이 형에게 장문의 편지와 오영이를 만나서 큰아버지가 산 땅도 아니고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땅을 종중 명의로 해야지 큰집이라고 자기 앞으로 등기를 하고 자기 땅이라고 고집을 하면 되느냐고 다구 쳤다.
이때의 장문의 편지 복사 본을 오주에게 송부하여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 집안 망신이라도 책으로 출간하여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하였다.
나의 말을 우습게 알다가 내가 8순에 종토에 대한 사촌간 대립 이라는 항목을 넣어 “덤으로 사는 인생” 이란 책을 출간하여 오영이에게 우송을 하였다.
장문의 편지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편지는 보지 않고 무시하고 있다가 이번 책은 본 모양이다.
책을 읽어보고 자존심이 상했던지 고조부 산소 이장도 반대하고 이장하면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한다.
오영이 양부인 당숙의 묘는 6/16일 북한강 공원에 (백로5호) 오영이와 같이 가서 처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불같은 당숙은 예의범절에 어긋나면 불호령을 치고 현충사 덕수이씨 종가로 시집을 간 딸에게도 인사 왔다가 줄행랑을 치게 하시는 엄격한 분이다.
작은형 오택이가 양자 갔다가 두 번씩이나 파양을 하고 조암의 부자인 당숙에게 오영이가 양자로 갔다.
당숙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양자로 들어가 당숙의 호통도 들어보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고 당숙의 땅을 상속받았다.
또 사촌 큰형이 자식 없이 죽으니 사촌집의 땅도 오영이가 상속을 받는 행운을 거머쥔 것이다.
오주형은 당숙이 6.25때 오주형네 집으로 피란을 왔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6.25때 꽁보리밥도 먹기 힘든 시절에 당숙은 쌀밥을 드셨다는 것이다.
화해의 장을 만든 오주 형이 나와 오영이를 화해시키고 청계산 남은 땅을 종중으로 돌리면 어떠냐고 하다가 말문을 닫아버렸다.
오영이가 2천만 원을 줄 테니 청계산 5대조부터 모두 화장하자고 하여 나는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일축하였다.
있는 산소를 파묘하여 납골당에 모시자니 금토동 증조할아버지 파묘하고 땅 팔아먹던 행위를 반복하려는 것 같다.
고조부 우리 부모산소를 밑으로 이장하는 것을 인정 할 테니 청계산을 종중 땅으로 만들자는 소리는 하지 말란다.
내가 젊었을 때 청계산은 하오고개를 포함하여 5십만 평 정도였는데 다 팔아먹고 지금은 한등성이만 남아있다.
3.탈장 수술
단순한 병인데도 무슨 병인지를 몰라 허둥대기도 한다.
몇 개월 전부터 허리에 통증이 와서 대상 포진인줄 알고 진찰을 하니 아니라고 한다.
다음엔 맹장인줄알고 물어보니 아니라고 한다.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부터 아프더니 만보를 걸으면 오른쪽 배 위에까지 오고 왼쪽 배까지 통증이 온다.
두러 누어 잘 때는 통증이 없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고 움직이면 배가 아프다.
토사곽란이 와서 병원에 가서 배의 통증 멎는 약만 타온다.
위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고 밥을 먹으면 다 토해낸다.
X-ray를 찍고 MRI를 찍으니 협착증 약만 준다.
의사가 옷을 벗겨보더니 육안으로 탈장이라고 한다.
그러고 내가 봐도 오른쪽 가랑이 위가 툭 튀어나온 것이 보이니 탈장이 확실하다.
나도 둔감하지 이렇게 눈으로 봐도 금세 알아볼 일을 몇 개월 동안 고생하고 딴 짓만 하고 참고 있었다는 것이 바보스럽다.
성모병원에 이첩하여 담당 의사를 만나니 CT를 찍으라고 한다.
75세 이상은 위험도가 높아 세 가지 검사를 추가로 해야 하고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한단다.
수술일자는 한 달 후에나 할 수 있다고 한다.
탈장 복대를 하니 통증도 없고 행동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한 달이라는 시간에 이미 예약되어 있는 중앙아시아 여행을 수술 전에 갔다 오기로 하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집사람이 우리 집 양반이 탈장 복대를 차고 여행 왔다고 하니 같이 간 여행객이 자기가 탈장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쁨병원이 탈장 전문이라고 하며 추천을 한다.
귀국하자마자 기쁨병원에 찾아가 진료를 하니 다른 병원과 자기 병원의 수술하는 차이를 설명하고 전신마취는 안한다고 한다.
전신마취를 안 한다고 하니 집사람이 만족해하여 즉시 수술일자를 잡았다.
집사람은 내가 나이가 들어 전신마취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수술을 하러 가니 나이를 먹은 노인들이 탈장수술을 하러 많이 와 있다.
탈장이 노인에게 많이 오는 모양이다.
수술은 반시간만에 끝나나 하루 입원을 하고 다음날인 11월 8일 퇴원을 하였다.
우혜수술이라고 한다.
4. 부모 고조부모 이장
정월에 설날이나 추석에 부모님이나 고조부모 산소에 차례를 지내려 올라가면 모두 땀을 흘리고 차례를 지내고 내려온다.
부모님 묘소나 고조부모님 산소가 청계산 하오고개 산 능선 7부 능선에 있으니 도로에서 올라가는데 약 반 시간이 걸린다.
겨울에 올라가도 땀이 솟는다.
차례를 지내는 식구나 조카들도 남자만 배낭에 제물을 메고 올라간다.
산소를 높이 써서 차례를 지내며 모두 불만이 많다.
그렇다고 마땅히 좋은 해결책도 없다.
양지바른 야산을 구입하여 현대식으로 가족묘를 5대조부터 조성하던지 납골 봉분을 하여 모시고 싶다.
내가 좌상이라고 하여도 종중에 조금도 관심이 없고 어기장만 놓는 사촌이 있어 나 혼자 결정하기엔 여러모로 문제점이 나타났다.
팔십 평생 한 번도 차례에 참석한 적도 없고 제사한번 지내지 않은 사촌은 제외하기로 하였다.
여러 각도로 생각을 하다 일단은 7부 능선에 있는 산소를 2부 능선에 모시어 후손들이 차례를 지내는데 7부 능선 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덜게 하기로 하였다,
윤년인 4년 전에 2부 능선에 일단 가묘를 조성하고 윤년인 금년에 가묘에 이장을 하였다.
이장을 하는데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5대조가 비인 현감이고 아들인 고조부(益圭 字 璣玉) 는 통덕랑인데 그 옛날에 이 산 꼭대기에 고조부 산소를 썼을 때는 풍수지리학상 충분한 고려를 하여 여기 높은 곳을 선택하여 산소를 썼을 것이다.
그 이유도 모르고 차례 지내기 어렵고 자손들이 불평이 많아 산소를 이장한다는 소신은 너머나 이유가 빈약하다.
그렇다고 이장한 2부 능선의 자리가 명당이고 풍수학적으로라도 연구한 적도 없다.
현재같이 7부 능선에 그대로 두면 내가 사후에 페총이 될 확율이 대단히 많다.
지금 우리나라는 조상 숭배의 사상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에 최소한 페총은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이장하기 위하여 6월에 전문 이장 업체를 찾아 2023년 7월 12일이 좋은 날이라고 하여 이장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금년은 유난히 날씨가 더워 작업 시작을 8시에서 7시로 변경을 하였다.
작업을 할 때 내가 근심을 한 것은 이백여년이 넘는 고조부 묘는 칠성판 밑의 회 공구리가 얼마나 많이 처져 있느냐이다.
20세 경 할아버지 묘를 금토동에서 음성으로 이장할 때 회 공구리가 얼마나 강한지 포크레인이 브레카로 한 시간을 두드려도 깨지지 않아 오시에 하관시간을 맞추느냐고 고심을 한 기억이 난다.
부모 묘는 내가 관여를 했으니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고조부 묘는 감도 잡을 수 없고 묘가 산꼭대기라 포크레인이 올라 갈수도 없고 곡굉이로 해야 하는데 만약을 위하여 수동 브레카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둘째아들 혁범이와 6시부터 나는 서울 에서 혁범이는 수원에서부터 청계산 하오고개에 와서 7시에 인부들과 만나 고조부 산소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고조부와 부모님 묘소에 이장한다는 고해와 간이로 혁범이와 제사를 올리고 작업을 시작 하였다.
인부들은 고조부모와 부모묘소를 2개조로 나누어서 삽으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이 올라온다면 순식간에 할 일을 손으로 작업을 하는 것을 보니 흙일을 하는게 안스러워 보였다.
고조부 묘에서 붉은 벽돌 반 만한 네모의 지석이 나왔다,
지석이 계속 나온다.
지석은 恭人海州吳氏之墓 子坐 라고 쓰여 있는 10개의 지석이 나왔다.
海자 뒷면에는 壬申生 州자 뒷면에는 庚辰卒 이라고 쓰여 있다.
子 자 뒷면에는 巳 자 坐 자 뒷면에는 坐 자가 쓰여 있다
고조부묘라고 중앙을 개복했는데 이런 지석이 나온 것은 고조부 배위인 부인의 묘라는 뜻이다.
족보에는 배위 묘는 용인읍 삼면 내곡 이라고 적혀있어 고조할머니는 용인에 있기 때문에 고조 할아버지 혼자 모셔 있는 줄 알았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업 인부중 팀장이 산소 중앙 흙이 생흙인 것을 보니 여기가 아니라고 한다.
여지껏 이 산소에다 차례를 지냈는데 아니라니 난감하고 산소 근처를 다 파보는 수밖에 없다.
팀장이 인부에게 윗쪽으로 더 파보란다.
윗쪽으로 더 파 올라가니 정강이 뼈가 나타난다.
다 수습을 하니 여자의 뼈란다.
고조할머니의 유골인 것이다.
팀장이 할머니 유골 있는데서 좌 쪽으로 파라고 한다.
유골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근심하던 고조할아버지 유골도 수습을 하였다.
정위치는 아니지만 쉽게 유골도 찾을 수 있었고 근심하던 회공구리도 나오지 않아 작업을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유골이 있는 데가 봉분 중앙이라면 산소의 총 면적이 매우 큰 묘가 된다.
금토동 증조부의 묘에 버금가는 크기다.
20세 경 할아버지는 대형 옻 관에 이중 관이었는데 이후 언제인지는 몰라도 우리집안은 탈관을 쓴다는 전래가 있어 부모님 묘도 탈관을 하여 모셨다.
부모(寧默 字 準如, 配 慶州金氏 在任)님 쌍묘는 오른쪽에 아버님 왼쪽 봉이 어머님으로 남좌 여우의 일반적인 묘의 위치와 반대다.
고조 할아버지 묘하에 있는 부모님 묘를 보니 어머님 유골은 이미 작업이 끝난 상태이고 쌍묘의 오른 쪽인 아버님 묘는 좌골은 수습이 되고 두개골만 남아있다.
광중의 머리 근처에 수맥이 있어 물이 조금이나마 솟아올라 고이면 퍼내야 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고 하지만 이 높은 산등성이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눈으로 확인하며 놀라워 이장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막내 누이가 꿈에 어머니가 천장에서 물이 새어 물이 떨어진다고 손에 종이를 들고 물을 막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해몽은 못했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수맥이 흐르는 것을 가르처 주느라고 현몽을 하신 것 같다.
6월에 이상고온으로 날씨가 너머나 더워 삽질을 하는 인부들이 걱정이 되었는데 느닷없는 집중호우에 장마가 닥첬다.
이장한다는 전날은 정부에서 극한호우경보가 발령되었다.
이장하는 날 청계산에 가니 장마 하늘이 흐리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고조부모와 부모님 유골을 다 수습하는데도 날씨가 흐리기만 하여 오히려 여름에 작업하는데 날씨까지 큰 도움을 주어 하늘이 어찌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비가 올 것을 대비하여 우비 판초 텐트등 이장하는데 필요외의 준비를 했는데 다 필요 없게 되었으니 하늘이 살려주었다.
이장을 하고 다음날부터 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오송 참사 예천 산사태가 나고 인명 피해가 50여명이 나서 나라가 집중 폭우에 아우성이다.
고조부나 부모님 파묘한 장소를 정리하고 부모님 비석은 아버님 판 곳에 묻고 상석은 그대로 두었다.
다 정리하고 가묘에 내려오니 포크레인이 올라 왔다.
이제부터는 기계가 작업을 하고 사람은 보좌만 하면 된다.
가묘에는 집사람이 막내 누이를 데리고 제물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작은 며느리도 한몫을 하느냐고 제상에 올릴 나물 등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포크레인이 고조부의 가묘 봉분을 모두 허물고 오른쪽에 고조할머니 왼쪽에 고조부 유골을 안치하고 칠성판을 깔고 잘 모셨다.
화장을 하지 않고 유골을 그대로 모시니 일거리가 줄어든 것 같다.
고조할머니 옆에는 위에서 있던 대로 공인해주오씨지묘 란 지석을 묻었다.
부모님 가묘도 봉분을 모두 허물고 오른쪽에 어머니 왼 쪽에 아버지를 모셨다.
위에 있던 어머니가 왼쪽에 있던 때와 반대다.
누울 자리를 파는데 푸석한 암석인데도 포크레인으로 잘 파이지 않는다.
작은 삽날로 파서 바닥이 석관처럼 단단하였다.
아버님은 위에서 수맥이 흐르던 곳에 계시다가 따듯한 구둘장 같이 느끼실 거다.
날씨나 회공구리 때문에 고심을 하던 문제들은 해소되고 일도 빨리 끝나 1시에 인부들이 철수를 하였다.
산소에 잔디는 흙이 마사토라 잔디가 살기 어려우니 다른 흙을 덮어 두라고 하다.
인부들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즐거운 듯이 일하는 모습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인부들이 철수하고 산소에 제물을 차리고 새집에서 편안히 사시라고 제사를 드렸다.
부모님에게는 물이 나는 곳에 계시다가 따듯한 방에 모셨으니 편안히 쉬시라고 하였다.
윗쪽에 계실 때 아버님이나 어머님 제사에는 우리 부부가 꼭 올라와 산소에서 우리 집안의 큰일을 건건이 부모님에게 꼭 고했다
작년에는 어머니 제사에 올라오다가 집사람이 넘어져 궁뎅이에 시퍼런 멍이 어린이 손바닥만하게 나기도 하였다.
이제는 그런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다.
집사람이 이장이 무사히 끝났으니 거나하게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운중 농원으로 갔다.
막내 누이도 날씨가 어떻게 이렇게 도와 줄 수가 있느냐며 부모님도 새집에서 잘 지내실거라고 한다.
이장을 하는데 혁범이가 큰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 이장을 한다고 조카들에게 알려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 쾌심하기 짝이 없다.
수년간 고심하며 해결하려던 이장을 하고나니 속이 후련하고 여기까지가 내가 할일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문제는 이제 나의 손에서 떠나 후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고조부모님 부모님 새집에서 편안히 잘 쉬십시요.
5.무학 코러스
23년 11월 3일 오후 5시 소월 아트홀에서 무학코러스 창단 연주회가 열렸다.
무학여고 동문 합창단인 무학 코러스는 ‘춤추는 학들... 설레는 마음으로... ’ 라는 표방으로 무학 코러스라는 공식 명칭으로 창단 합창 연주회를 열었다.
2017년 창단한 무학동문 합창단은 코로나 사태로 쉬다가 2022년부터 재개하여 강릉 세계합창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선후배가 열심히 모여 연습하고 친목을 다지며 합창단을 발전시켰다.
본격적으로 무학동문 합창단을 무학코러스라고 개명을 하고 오늘 창단 연주회 까지 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정규문 회장의 열성으로 매주 수도권에서 모여든 37명의 대원이 왕십리 학교에서 모여 송현주 지휘자의 지도아래 일사분란하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오늘 나타나 무학코러스 창단 연주회가 성공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소월 아트홀에 무학코러스 창단 연주회를 보기위하여 운집한 청중이 홀을 꽉 채우니 합창 단원들도 흐뭇해 했을 것이다.
청중의 대부분은 가족들이기에 더욱 애정 깊게 합창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 집사람도 이 연주회 때문에 무척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어제 저녁에 집사람이 신경이 예민하여 나에게 사사건건이 시비를 건다.
내일 연주회에 안와도 좋다는 등 저녁 먹기 전에 주전부리는 왜 하느냐는 등 불은 왜 키냐는 등 건수 같지도 않은 일로 계속 시비를 걸어 참다못해 큰소리로 서로 지지 않고 싸움을 하게 됐다.
그 바람에 토론토의 큰 아들 식구들과 예약된 스카이프 통화도 안하고 각방에서 잤다.
다음날 집사람은 내가 참석 할 줄 알고 미리 준비를 다 해 놓고 점심에 먼저 연주회장으로 가고 오후에 작은 아들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같이 연주회장인 소월아트홀로 갔다.
연주회가 끝나고 홀에서 손자가 꽃다발을 할머니에게 주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식구가 모두 모여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는 체로 하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6.작은형 부부 이장
10월 27일 소원하던 작은 형의 둘째 아들 혁봉이가 만나자고 한다.
첫째 혁용이가 정월에 우리 집과 연을 끊겠다고 전화로 통보하고 처음 받는 전화다.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 하니 역시 자기 형제들 생각은 자기 아버지가 생전에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또 자기들 크면서 어렵게 살며 기를 펴지 못하고 크며 나름대로 불만이 있지만 참고 견디는 생활을 하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형제들이 사전에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생활을 했나를 조금씩이라도 이야기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두어 시간 이야기 하다 청계산 하오고개에 있는 자기 부모 산소를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모시겠다고 한다.
자식이 자기 아버지 산소를 이장하겠다는데 내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도 다음 주 토요일인 11월 4일 이장하기 턱밑에 이장하겠다고 통보하러 온 것이다.
나는 청계산 하오고개에 5대조 산소 밑에 잘 모시어 있는 자기 아버지 산소를 일부러 파서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이장을 하겠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산소에 있으면 사초하는 것 외엔 문제될 것이 없는데 애쓰고 화장을 하여 항아리에 뼛가루를 보관 하고 년 회비 내는 것이 나는 영 못마땅하다.
산소 쓸 자리가 없어서 납골당에 모시는 데 멀쩡히 있는 산소에서 파내어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모신다는 것이 내 소견으로 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장하는데 내가 가냐고 물으니 식구들이 아직 오는 것을 꺼려한다고 하여 나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작은형 식구들이 크리스천이라 차례 때도 큰절을 하지 않고 기도만 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예수를 믿어 산소와 제사나 차례에 거부반응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철저한 안동 권씨 집안에 유교적으로 내려오는 차례지내는 조상 숭배 풍습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사촌 육촌 온 집안 식구가 모여 즐거운 정월을 보내는 풍습은 이제 사라져 가는 것이다.
작은 형이 살아생전에 무슨 일만 생기면 나에게 찾아와 해결해 달라는 모습이 오버랩 되어 나의 뇌리를 스친다.
우리 삼형제중에 다 죽고 나 혼자 남아 우리 집의 좌상이 되었는데 조카들의 행태에 눈살이 찌프려 진다.
나는 선조들의 세향제에 열심히 쫓아다니며 종중의 일도 보고 있는데 조카들은 따로 놀고 있으니 내가 헛개비 장난하고 있는 것 같다.
작은 형의 새 보금자리
성남시 영생관리 사업소 제2추모원 (납골당)
1층 영장실 1075번
부 권오택 1939. 4. 7일 생. 2011. 4. 9일 졸
모 이인희 1939. 6. 25일 생 1989, 4. 22일 졸
7.성형 수술
우리나라 성형수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성형수술 병원은 강남에 몰려있고 그중에서도 압구정을 비롯하여 신사역과 강남역 근처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손재주가 좋아 성형수술의사는 그 손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여자들은 얼굴에 민감하여 예뻐지기 위하여 틈만 나면 성형외과를 찾아 수술 후에 퉁퉁 부은 얼굴로 마스크 쓰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쌍거플 수술은 보편화 되어 있고 주름살 제거나 코나 턱 까지 얼굴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집사람이 친구들을 만나면 재는 얼굴에 칼 댔다 라며 성형 수술한 것을 꼬집는다.
나는 수술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니까 그것도 구별 못하느냐고 비아냥댄다.
그러던 집사람이 나도 모르게 눈 밑의 주름살을 제거하고 왔다.
집사람 얼굴은 자기 친구들에 비해 십여 년 이상 젊어 보인다.
얼굴에 주름도 없고 팽팽하여 사람들이 무슨 크림을 바르느냐고 물을 정도다.
그런 여자가 눈 밑에 약간 주름이 있어 보기 싫다고 정형수술을 하고 온 것이다.
사전에 나에게 말했으면 죽어라 하고 말렸을 것이다.
그것도 서울서 천리나 떨어진 진주시에 까지 가서 수술을 한 것이다.
내가 탈장수술을 하고 난 후에 며칠이 안 되서 친구들 하고 진주에 갔다 온다고 하여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며칠이 안되어 11월 21일 친구들과 또 진주를 간다고 하여 무슨 일이냐고 하니 친구들과 약속한 것이 있어 간다고 한다.
그 친구들이 카토릭의대 간호과 출신들이다.
병원에 대하여는 바삭하게 잘 아는 여인들이 진주에 가서 정형수술을 하고 온 것이다.
진주에 동창 친구의 남편이 진주에서 병원을 한다는 것이다,
아들도 같이 병원을 한다고 하여 수술 실력이 좋다고 하며 동창들이 원정 수술을 하고 온 것이다.
얼마만큼 기술이 좋은지 얼마만큼 수술비를 할인해 주었는지는 차치하고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나와 그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는 여자들이 몰려가서 천릿길도 멀다않고 수술을 하고 온 것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친구병원이라 기왕하려면 친구병원에서 한다면 강남에 있으면 몰라도 진주까지 가서 하다니 이해불능이다.
실밥 뽑으러 또 진주에 갔다 왔다.
미친 짓을 계속 하는 것 같다.
수술한지 한 달이 되어 눈 밑의 주름살은 없어졌지만 눈을 뜨면 옛날같이 자연스러운 눈의 모양이 아니다.
좀 더 있으면 자연스럽게 된다는데 내가 보기엔 전에 같이 자연스럽게 되기는 글른것 같다.
하지 않아도 될 수술을 하여 나의 심기를 건드려 논는다.
8.터키 지진 구호품
튀르키예라고 국명을 바꾼 터키에 2월 6일 진도 7.8이라는 최강도 지진이 가지안테프의 서북쪽 37Km 지점에서 발생하여 터키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뒤따라 진도 7.5의 여진이 연달아 발생하여 6천년 역사의 가지안테프를 초토화 시켰다.
지진지역으로 가는 길은 다 끊어져 구호대가 현지에 가기도 힘든 지경이다.
건물이나 고적이 문어진 것은 물론이고 인명피해도 3,8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최강의 지진이 발생 했으니 터키로서는 최대의 비운이다.
우리나라와는 형제 국이라고 2002년 월드컵 때 다져진 형제국의 의리는 즉시 국가에서 터키에 구조요원을 파견하였다.
민간단체에서는 추위와 숙박에 속수무책인 터키 지진 난민에 구호금과 구호품을 모집하고 있었다.
민간단체에서는 쓰던 텐트나 중고 옷가지도 괜찮으니 빨리 터키에 보낼 수 있도록 많이 보내달라고 한다.
구호품을 모아서 터키 가는 비행기 편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 있는 텐트 2개가 들은 1박스와 겨울 아웃룩 1박스 런닝과 양말 한 박스 하여 3박스를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민간단체에 우송하였다.
3박스가 라면상자로 치면 6상자의 부피보다 큰 것 같다.
우체국에는 나 이외에 구호품을 보내려고 온 시민이 제법 있다.
나는 새 옷이 아니고 헌옷을 보내는 것이 못내 미안한 감이 드나 안 보내는 것보다야 낳지 않나 하고 나 자신을 위안하였다.
나의 구호품이 몇 사람이라도 혜택을 보았으면 좋겠다.
9.이태원 참사 답사
집사람과 이태원 가서 식사를 한번 하자고 하여 5월 1일 저녁에 이태원을 갔다.
이태원은 내가 처음 스키 배울 때 스키복을 싸게 구입하기 위하여 이태원을 갔고 또 가끔씩 가다 외국냄새가 나는 이태원을 집사람과 술 한 잔하며 식사하기 위하여 들르는 곳이다.
이번에는 작년인 2022년 10월 29일 핼로원 데이를 앞두고 이태원 참사가 나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는데 압사가 났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어 확인 겸 이태원에 식사하러 갔다.
해밀턴 호텔 앞뒤 골목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 압사사고가 났을까 하고 추리하며 살펴보았다.
골목에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산자의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요 조그맣고 짧은 골목에서 100여명이 압사를 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압사당하여 죽은 자가 거의 20대 청소년이다.
혈기 왕성한 20대 청소년이 아무리 위에서 밀었다 해도 두세 명 죽어도 대단한 사고다.
그런데 무려 159명이 죽다니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을 할 수가 없다.
이 골목에 백여 명 들어가면 꽉 찬다.
위에서 밀어 100여명이 태풍에 벼이삭 쓰러지듯 넘어져 몽땅 죽어야 100여명이다.
왜 이렇게 죽었는지 젊은이들이 사전에 약을 복용했던지 어떤 조직에 의해 조직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고서는 이 많은 청소년이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은 자들에 대한 부검을 했다는 보도도 못 봤다.
핼로원 데이를 즐기려다 애처롭게 죽은 자들의 부모는 왜 사전 사고 방지를 못했느냐고 정부를 비판한다.
이태원 참사 추모회와 사고 대책회의를 하는데 회의를 주관하는 자가 세월호 사고를 주관했던 자이다.
자기들이 제주도에 놀러 세월호 타고가다 사망한 것이나 이태원에서 핼로원 데이를 즐기기 위하여 모여 있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나 개인이 자기 즐기기 위하여 한 행동을 국가보고 책임지라함은 납득할 수가 없다.
이태원 사고 나기 한 시간 전에 집사람은 삼각지에서 태극 집회를 끝내고 이태원을 거처 집에 왔다.
그래서 더 민감하게 이태원 참사에 촉각을 세우고 귀추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씁쓸한 마음으로 근처의 만만한 소주 집에서 한잔하고 귀가 하였다.
10.H P 교체
우리나라는 IT 강국이다.
우리나라는 WI - FI 네트워크가 잘 깔려있어 전화를 버스나 지하철 또는 걸어가면서 노상에서 핸드폰으로 자유롭게 전화뿐만 아니라 카톡도 할 수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호텔 밖에서 와이파이가 제대로 터지는 국가는 보지 못하였다.
호텔 안에서도 와이파이 인증을 받아야 카톡이라도 할 수 있다.
국내에서만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IT의 혜택을 누리며 마음 놓고 인터넷을 하며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선진 문화를 모르며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핸드폰을 꼭 가지고 다녀야 하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집에다 옷을 놓고 오면 참아도 핸드폰을 놓고 오면 되돌아가 핸드폰을 가지고 와야 한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남발하다보니 친구와 지하철을 탔는데 헤어지면 어느 칸에 있느냐고 전화를 걸어 만나야 한다.
업무용은 물론이고 개인 필수품인 이런 전화기가 고장이 났다.
삼성 갤럭시 S20 G5형으로 내가 쓰기엔 충분하고 불편함이 없는 전화기다.
서비스 센터에 가니 기판에 문제가 있어 보증수리 기간이 끝나 수리하는데 새로 구입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친구들은 구형인 2G 폰이나 알뜰 폰을 쓰는 친구들도 있는데 핸드폰을 바꾸려니 신경이 쓰인다.
작은 아들이 삼성 센터에 데리고 가더니 신형을 고른다.
삼성 겔럭시 Z 폴더 3로 화면이 접히는 폴더 폰이다.
아버지 생일 선물로 핸드폰을 자기가 사서 준다는 것이다.
사용기능이 어찌나 많은지 다 사용하기는 글렀고 내가 쓰는 기능만 익히기에도 여러 날이 걸릴 것 같다.
화면이 넓어서 좋기는 한데 무겁고 두꺼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는 불편함이 있다.
이번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가서 전철 정거장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데 현지인들이 나를 보지 않고 내 핸드폰만 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접히는 폴더 폰이 아직 생소한 모양이다.
아들 덕분에 신형 핸드폰도 구입하고 뉴코아 애슈리 퀸즈에서 식구들이 식사도 하고 복이 터진 날이다.
11. 해외 여행
1)오키나와 5일
한 겨울에 오키나와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2023. 1/15-1/19 롯데투어 23명)
우리니라가 겨울이니까 남쪽에 있는 오키나와는 여름일줄 알고 수영복까지 준비를 하였다.
막상 오키나와를 가보니 날씨가 초겨울 날씨에다가 흐리고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더 춥다.
여행 내내 햇볕을 구경 못하고 윈드자켓에다가 내복을 입었다.
여행하는데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오키나와는 겨울이 관광 비수기라 바다 비치에 널려있는 대형 호텔이 많이 비어있다.
겨울 관광을 무시해서 그런지 호텔내부에 수영장 있는 호텔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일본의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 현은 옛날 류구 왕국을 일본이 흡수한 것이다.
조그만 섬 인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매우 크다.
작은 섬까지 합치면 제주도만하니 일본의 해양국토가 무한대로 넓어진 기분이다.
본섬의 반은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다.
B2 스텔스기 등 한국의 유사시 긴급출동 할 수 있는 미국의 전진 기지다.
입출국시 E 티켓은 물론이고 캐리어도 자동으로 이동하여 컴퓨터 문맹은 물어보다 시간 다 보낸다.
일본은 아예 입국시 비지타 재팬이라고 앱을 깔라고 하는데 비밀번호 때문에 한참 애를 먹었다.
여권만 가지면 문맹이라도 안내원의 도움으로 입출국은 할 수 있으나 일행과 떨어질 수밖에 없어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3차 코로나 접종 영문 기록은 기본이다.
단지 공항에서의 몸수색은 옛날과 변함이 없다.
점심을 먹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류구 왕국 시절 왕궁인 슈리성을 보았다.
우리나라같이 왕궁이 담으로 처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고지에 축성으로 되어있어 적을 방어하는 성 같다.
오키나와 중심지 나하에 있는 국제거리를 갔다.
상점이 1마일에 걸쳐 있는데 음식점을 비롯하여 술 과자 의류점이 줄지어 있는데 일본의 술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과자 종류도 다양하게 많고 일본인답게 조그맣고 예쁘게 만들어 손님이 열심히 주워 담게 만들었다.
나도 질세라 한 보따리 샀다.
옆에 있는 아메리카 빌리지로 가서 미국식 젊은이들 맞게 만들어 놓은 음식점이나 가게를 구경하며 바다 경치를 구경하며 집사람과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가네 비치호텔에 숙소를 정 했는데 오션뷰라 베란다에서 바다를 보면 펼쳐진 해양이 멋있긴 한데 섬 둘레가 모두 바다고 길을 가며 보이는 것이 바다라 오션뷰라 해도 감흥이 오지 않는다.
다음날 오키나와 국영기념공원에 가서 세계최대의 수족관도 보고 돌고래 쇼도 보았다.
우리나라에선 동물보호란 이름으로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하던 돌고래를 제주도 앞바다에 풀어놓아 돌고래 쇼가 없어졌는데 여기선 돌고래를 태평양에 풀어줄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음식점들은 집에 조경을 잘 해놓아 참으로 보기가 좋다.
관광식당이라서가 아니고 일본인들의 기본 습성이 아기자기 하게 꾸며 놓는 것을 좋아 하는 것 같다.
비세후쿠기 가로수 길을 갔는데 방풍림이 바닷가에 심어져 방풍림사이로 걸어가면 흥취가 나는 걸어볼만한 길이다.
방풍림 나무를 복나무라고 하며 방풍림 사이로 집들이 지어져 있고 바다가 보이기도 하고 방풍림 골목이 여기저기 있어 집과 바다를 이어준다.
선조들이 방풍림 조성을 참 잘해 주었다.
집들은 거의 다 관광객을 위한 음식점인데 겨울철이라 영업을 하지 않는다.
3일차 그라스보트를 탔는데 조그만 보트 밑바닥에 그라스를 깔아 배 밑바닥을 보라는 것이다.
근해로 나가 배 밑 유리로 산호초나 물고기를 보라는 줄 알았더니 항구 근처에서 밑밥을 던지며 몰리는 물고기 보는 것이 전부다.
만인이 앉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하는 만좌모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다.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코끼리 코같이 생긴 바위와 에메랄드빛 바다는 공원의 경치를 한껏 더 상승시켜준다.
수산시장은 규모가 작고 기대에 못 미처 실망했다.
그래도 회 한사라 구입하여 저녁 안주거리로 준비 하였다.
4일차에 미사키 공원에서 해안가 풍경을 구경하라고 하는데 이런 풍경은 여기저기 있는 것 같다.
오키나와 월드는 류구 왕국 전통 춤과 놀이 뱀 쇼를 하고 체험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종유석이 있는 동굴은 컴컴하고 평화기념 공원에는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
오키나와는 류구 왕국 시절 홍길동이 이상향의 도시를 건설하였다는 말도 있고 삼별초가 몽고군에 쫓겨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와서 나라를 건설하였다는 말이 있어 혹시나 하고 눈 여겨 보았지만 그런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우미카지 테라스는 그리스 산토리니 기분이 나는 하얗게 칠한 조그만 가게들이 계단식으로 지어져 있다.
카페가 주종을 이루고 관광객을 위한 스낵들이다.
여행갈 때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예민한 집사람이 서슴치 않고 던지는 말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는 젊은 여자 일행이 칭찬해 주며 본받을게 많다고 하니 집사람이 기분이 상승되어 더 잘하고 기뻐하여 나도 즐겁게 만들었다.
오키나와는 관광을 위한 섬이지 현지인들의 삶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2).코카서스 3국.
코카서스 3국 여행기
코카서스 3국이란 코카서스 산맥 남측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3국을 말한다,
코카서스 산맥 북측은 소련이고 3국 남측으로는 터키 이란이 있다.
동쪽으로 카스피해에서 서쪽으로는 흑해 까지에 3국이 있다.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3국 중에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람교이고 지금의 투르키예인 터키와 친화적이다.
조지아는 카도릭 정교회이고 소련시절 구루지아라고 불렸던 조지아는 세계에서 최초로 카도릭 정교회를 국교로 정한 국가다.
스탈린의 탄생지이며 고향인 구루지아는 지금도 러시아와 친화적이다.
아르메니아도 카도릭 정교회이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카도릭 정교회를 국교로 선포한 국가다.
아르메니아인 들은 노아의 방주가 기착한 아라랏트 산을 신격화 하고 있다.
현재 아라랏트산 봉우리는 터키 소유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의 인종 학살로 천만명 이상 삼천만명이 학살되어 호로코스트 탑을 세우고 기억하고 있다.
서방의 카도릭 교회와 중앙아시아나 소련의 카도릭 정교회의 차이는 정교회는 교회 초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식교회 예식을 지금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의 규모나 위치는 서방의 화려하고 규모가 큰 것에 비해 초라할 정도다.
교회를 정교회에서는 수도원이라고 하고 서방에서는 교회나 성당이라고 한다.
각 나라마다 러시아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국명을 부친다.
코카서스 3국은 주위의 강대국인 이란 페르시아 제국 터키의 오스만 제국 소련에게 계속 지배되어 오다가 소련 연방이 해체되며 1991년 독립이 된지 30여년 밖에 되지 않는 불운한 역사를 갖고 있는 국가다.
3국 모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가 축적되었다는 증거다.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 페케지로 8박10일 @3,930,000 x 2. 2023.5.22-5.31. 30명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라 인원미달로 연기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원이 많다.
이들은 4, 50개국을 넘나들은 여행의 고수들이다.
여행을 갈 때에는 그 지역의 기초지식을 갖추고 가야 하는게 기본이다.
나는 코카서스 3국의 국명도 생소하고 그 나라의 수도 이름도 모르고 오직 가이드의 설명에만 의존하려고 떠났으니 여행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에 나 자신이 한심하고 창피함을 감출수가 없다.
여행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보인다.
많이 알면 여행하며 보는 것이 깊이 있게 보이는데 아는 것이 없으니 그림 같이만 보인다.
사진을 찍어도 이 도시에서 찍었는지 저 도시에서 찍었는지 구분하기조차 힘들다.
두바이를 경유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를 가는데 둘째날 점심이다.
아제르바이잔의 메이든 타워는 800년의 역사를 가진 5m 벽두께로 30m 높이인데 전망대로서는 몰라도 예술성은 안 보인다.
메이든 타워 구시가지 쉬르반사 궁전 모두 세계문화유산이지만 볼바르 해변공원이 월등히 볼만하고 확 트인 카스피해를 보면 시원함 까지 느낀다.
바쿠시내 중심가엔 동대문 프라자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브쎈타의 독특한 곡선의 스타일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세째날
고부스탄의 석기시대 암각화가 세계문화유산이며 쉐마키의 쥬메모스크는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모스크사원이다.
칸사라이 궁전은 왕궁으로서는 규모가 작으나 화려한 문양과 섬세한 글라스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예쁜 저택으로 대 재벌의 별장이라면 손색이 없겠다.
카라반사라이는 실크로드를 드나들던 상인들의 숙소인데 500여개의 숙소가 있고 잘 정돈되어 있어 현재의 5성급 대형 호텔과 견줄 만 하다.
넷째날은
국경을 넘어 조지아로 가서 방어용 시그나기 성벽을 보고 보드베 수도원을 찾았다.
주요성지인 보드베 수도원은 성녀 니노가 일생을 은수자로 보낸 곳이다.
니노의 십자가는 횡목이 수평이 아니고 八(팔)자 같이 늘어져있는 포도나무 십자가다.
성녀 니노는 여왕과 왕을 개종시켜 조지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게 하였다.
조지아 와인이 유명하다고 한다.
껍질과 씨까지 몽탕 넣어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커다란 독을 땅속에 넣어 반년동안 숙성시킨다.
나는 40도나 되는 짜짜 1병을 샀다.
멀리 가니 포장을 잘 해 달라고 하니 비닐 봉투에 싸서 주며 포장을 못해 준다고 한다.
여행객을 위해 포장해 준다는 개념이 없다.
여기 사람들이 순수하긴 하지만 조그만 신경을 쓰면 될 터인데 아쉽지만 짜짜 유리병을 가방 옷 속에 넣어 깨지지 않게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닷세째 되는 날
므즈헤타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을 갔다.
성녀 니노의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고 언덕에서 보면 세갈래로 흐르는 쿠라강을 볼수 있는데 합수되는 두물 머리에 흙탕물과 파란 물이 완연히 구별된다.
조지아 므즈헤타의 고리에서 스탈린이 태어났다.
청년시절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활약하던 스탈린이 소련의 실력자가 되었을 때다.
소련중심가에서 스탈린이 소련의 변방에서 온 촌놈이라고 멸시당하면서 철권이 되어 맑스 레닌주의를 밀어 부치며 자유진영에 맞서는 강력한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인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은 프레스코 벽화로 치장하였으며 조지아 왕들의 대관식이나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며 조지아 최대 고대의 건축물이다.
아나누리 성채는 성채와 교회가 함께 들어선 복합 건물이고 진발리 호수와 성채의 전경은 장관을 이룬다.
성채를 보고나오다 떠돌이 개 코카 스패니얼을 만났다.
나는 단독주택에 살때 코카 암수 두마리를 15년 동안 기른 적이 있다.
귀가 커서 밥을 먹을 때 귀가 밥그릇에 빠지는 잉글리쉬 코카 스패니얼 서양개다.
아메리칸 코카 스패니얼은 잉글리쉬 코카보다 약간 큰 중개다.
나는 이 순박하기만 한 코카 스패니얼이 서양개인줄 알았더니 여기 코카서스지방이 원조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집 코카는 늙어서 개집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하더니 내가 출근 하려고 나오니 이 개가 나의 다리를 비비고 하지 않던 행동을 하여 집사람에게 개를 잘 보라고 한 후 출근을 하였다.
퇴근을 하여보니 코카가 죽어 있었다.
자기가 죽기 전에 주인에게 최대한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예의를 차린 것이다.
구다우리의 파노라마 조형물은 소련과 조지아간의 우정을 위한 기념비로 모자이크 타일화다.
이렇게 외진 산꼭대기에 이렇게 대형의 타일화를 세울 필요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관광 소재가 없어서 인지 관광버스는 이 먼 곳을 이 타일화를 보기 위하여 온다.
엿세째
간곳은 코카서스 산맥의 중턱에 위치한 원뿔 모양의 게르게티 성삼위일체 성당이다.
고도에 지어진 성당이라 성당에서 보는 깊은 계곡과 산세가 볼수록 경외감을 느낀다.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트빌리시 방어요새인 나리칼라 요새를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티빌리시가 한눈에 보이며 등성이에는 조지아의 어마니란 커다란 동상이 서 있는데 손에 칼이 들려 있다.
여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으니 섬득한 기분이 든다.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재건을 계속한 시오니 성당, 5세기 경에 건축된 조지아 정교회로 스탈린이 투옥되기도 한 메테히 교회, 트리빌리시의 랜드마크로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사메바 대성당 등 조지아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유가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사후에 유명해진 화가 피로스마니도 조지아 출신이다.
이렛날
조지아에서 가방을 끌고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아흐파트 수도원을 보았다.
데베드 협곡위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코카서스 지방에서 제일 큰 세반호수는 아르메니아 인의 젓줄이다.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는 생선을 이 세반 호수에서 공급한다.
세반 수도원이 있는데 호수와 수도원이 어우러져 경치가 뷰 포인트로선 최고다.
호수를 둘러보기 위하여 관광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는데 간이 화장실 같은 것을 두어개 지어놓고 그나마 문을 잠근다.
우리가 가니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어놓고 돈을 받는다.
그나마 화장실이 많지가 않아 화장실을 찾아 다녀야 한다.
이들이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을 보면 놀래 자빠질 거다.
여드랫날
신성 샘이 있던 동굴을 파서 세운 게그하드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중세 아르메니아 수도원의 건축및 장식예술을 온전하게 보관하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르니 신전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가르니 협곡에 지은 신전으로 원뿔형 수도원만 보다가 생둥맏게 그리스 양식의 이오니아 양식의 신전이 나타나니 황당한 느낌이 든다.
가르니의 주상절리는 자연의 힘으로 이 거대한 주상절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다.
코비랍 수도원은 성 그레고리오가 13년간 수감되어 있던 지하 감옥 위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아라랏산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아라랏산은 노아의 방주가 도착했다는 산으로 아르메니아에서는 신격화된 산이다.
우리나라사람들이 백두산을 신성시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라랏산의 최고봉은 투르키에 영토이고 아르메니아 코비랍 수도원에서 아라랏산을 보는데 구름이 끼어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아라랏산 인근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아르메니아 꼬냑이 유명하다.
꼬냑 박물관은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을 멸종시키겠다고 자행한 인종학살로 천만명 이상 삼천만명이 학살당한 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진 기념관이다.
넓은 벌판에 추모탑도 높게 세워져 있다.
국경이 맞다은 무슬림의 오스만과 기독교의 아르메니아인의 악연을 느낄 수 있다.
아흐렛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두바이로 갔다.
두바이 미래박물관이나 에미레이트 타워나 삼성이 지은 세계 최고층 건물 버즈칼리파나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버스타고 외관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귀국을 하기 위하여 트랜스퍼 하는 곳이 두바이 공항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바이 몰에서 분수쇼를 보기는 했다.
하루만 더 있으면 두바이를 다 돌을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밤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두바이 에미레이트를 전에 관광을 온 적이 있어 서운하지는 않았다.
대한 항공 칼은 세계적인 우수 항공사다.
다른 나라 항공기를 타도 우리나라 칼만한 서비스나 안정감은 찾을 수 없다.
장시간 비행에 올 때는 영화를 세편이나 보았는데 귀국할 때는 피곤하여 한편만 보았다.
이제 장거리 여행은 체력의 한계가 와서 대단한 결심을 하기 전에는 숙고해야할 일이다.
기내에서 몸을 비틀며 잠을 자다 점심에 인천공항에서 내려 집에 오면서 빨리 시차적응을 해서 몸의 균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얼마나 빨리 회복될지는 나의 처신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코카서스 3국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산세가 아름답다. 협곡을 감상하면 경이롭기까지 한 좋은 경치가 많다.
3)탄 탄 탄 여행
집사람보고 탄탄탄 여행가자고 하니 좋다고 한다.
여행가자고 하면 부정적인 말을 먼저 하는 집사람이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
탄탄탄이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을 말하는 우리의 은어다.
이슬람국가에서 스탄이 국가라는 뜻이다.
여행 일정을 잡아놓았는데 탈장이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토사곽란이 일어나 X - ray, CT, MRI, 모두 촬영을 하였는데도 병명을 찾지 못하다가 의사가 옷을 벗어보라고 하더니 탈장이네요 하고 육안 확인을 하였다.
대학 병원으로 이첩하여 수술을 하려니 한 달 후에나 되어 탈창 밴드를 훈도시 처럼 차고 여행길에 올랐다.
2023. 10. 16. - 10. 25. (8박 10일)
하나투어 @3,799,000 x 2인, 인원 21명, OZ
밤 비행기라 이른 점심을 먹고 8시간 만에 인천공항에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도착 하였다.
인천공항에 타슈켄트 가는 티켓발급 창구가 십여 개로 한 면을 다 차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중앙아시아로 왕래하는 인구가 매우 많다는 증거를 인천 공항에 와서 느끼게 되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에 내리니 4시간의 시간차로 또 밤이 되었다.
야간 비행에 제대로 자지 못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다시 밤이 와서 호텔에서 자니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지 가이드는 우즈베키스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였다는 우즈베키스탄 여인인데 발음이 정확하여 듣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이 한국말을 잘하고 안내도 잘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
아침에 호텔에서 나오니 바로 타슈켄트 역에서 사마르칸트행 급행열차를 탔다.
전에 우즈베키스탄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사마르칸트를 거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실크로드의 중요 길목에서 부를 축적하여 도시 전체가 부를 누렸던 사마르칸트다.
티무르제국을 건설하여 흑해에서부터 카스피해를 포함하고 중국까지 이르는 대 제국 티무르의 수도가 사마르칸트 였다.
당시에는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은 호화로운 도시가 대항해시대에서 실크로드의 이점을 잃어버리고 러시아의 영향에 들어가서 더 이상 발전을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중세 과학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에 천문대 지하에 대리석으로 만든 옥분의가 있다.
죽은 자의 거리라 불리는 사하진다 영묘는 왕과 유명인의 묘인데 묘가 있는 건축물은 호화로운 타일을 붙여 아름다운 건물로 우리나라 묘와는 전혀 다른 묘를 보여준다.
비비하늄모스크는 티무르 왕이 총애하던 비비하늄을 기억하가 위하여 건설한 모스크 인데 외부의 모자이크는 아름답고 황홀하며 돔은 크고 상부가 화려하다.
죽은 왕비를 위하여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 다는 것이 좋기는 하나 과연 국가를 경영하는 차원에서는 재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에서 제일 자랑하는 광장이다.
중앙과 좌우에 화려한 건축물이 있으며 야간에는 색색의 조명을 비추어 넓은 광장이 호화롭게 변한다.
관광객은 꼭 한번 들르는 레기스탄 광장이다.
야간 조명아래 집사람의 태극권 동영상을 찍었다.
구르아미르는 티무르 왕과 자손들의 묘다.
묘인지 사원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건축물의 내외관의 화려한 조각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타슈켄트 ;
우즈베키스탄의 현 수도인 타슈켄트의 구 시가지에 있는 이맘 모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을 보관하고 있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교의 중심지로 3개의 모스크가 몰려있다.
러시아어로 쁠롭은 중앙아시아의 대중적인 요리인데 우리나라 볶음밥과 비슷하다.
대형 쁠롭 식당은 가마솥의 크기가 우리나라 대형 사찰의 큰 가마솥 같은 것이 여덟 개나 걸려있다.
볶은 쌀 판 위에는 새가 날라 와서 먹기도 하는데 요리사들은 무관심하다.
초르수란 바자르는 대형 돔 안에 과일 채소 반찬거리 옷 등 다양한 종류를 판매하는 시장으로 규모가 크다.
우리는 견과류를 몇 키로 손 발짓 하며 구입하여서 기분 좋게 나왔다.
타슈켄트 지하철은 세 개의 노선이 있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역사 내부는 화려한 무늬와 작품들이 있어 지하철 선로 쪽을 촬영하려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으니 지하철 타려고 기다리는 승객이 관광객인 우리를 처다 보지 않고 내 손에 들은 핸드폰을 모두 응시한다.
삼성 켈럭시 Z 폴드라 접었다 펴는 핸드폰이라 촬영하려고 핸드폰을 펴니 처음 보는 핸드폰이라 모두 신기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타슈켄트의 중심가는 예상외로 사람이 많지 않고 티무르 광장은 넓직하고 티무르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듯 티무르왕의 기마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새로 건축한 미노루 모스크는 아름다운 모스크로 화이트 모스크다.
키르키스스탄.
알아르차 국립공원은 키르키스스탄의 첫 번째 국립공원으로 만년설은 볼 수 있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부라나 타워는 토크목에 있는 스키타이 민족인 소그드인이 지은 건축물로 천문대와 전망대 역할을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벌판에 혼자 우뚝 솟은 탑은 초라하고 처량하게 보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이식쿨의 암각화는 촐폰아타 강의 선상지에 있는데 돌에 산양 사슴 등 동물의 형상을 그려놓았는데 암각화를 그려놓은 돌이 굉장히 많고 넓은 지역에 있다.
이렇게 많은 암각화를 돌에 새겨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스묘나스꼬예 계곡은 높은 산이지만 산세가 완만하여 양떼 말무리들이 대자연에서 자유롭게 살고 몽골의 게르와 비슷한 유르트에서 생활한다.
르호르도 종교관은 세계의 종교 화합을 이루고자 이슬람 불교 정교회 천주교 유대교 등 하나씩 관을 만들어 각자의 영적 장소를 만들었으나 종교관으로서는 빈약해 보인다.
나중에 더 크게 내용을 알차게 하면 충분한 공간이 있어 멋있는 종교 화합의 관이 될 것 같다.
정원의 조각과 조형물들은 사진 촬영에 좋은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기증한 에밀레종도 있어 한번 울려 봤다.
이식쿨 호수는 천산 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대형호수로 제주도만하다.
천산산맥의 빙하가 흘러들어 차가울 줄 알았으나 호수 지하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나와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해발 1600m에 있는 호수다.
호수에 붙어있는 리조트에서 자고 노천온천도 해 보았다.
비슈케크;
키르키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는 국가적인 행사가 행해지는 알라투 광장에는 키르키스스탄인의 추앙을 받는 마나스 기마상이 있다.
2차 대전 때 소련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승리의 광장에는 기념탑과 영원한 불꽃이 있다.
소련연방의 영향으로 곳곳에 소련의 흔적이 도사리고 있다.
비슈케크에 있는 바자르는 나라의 각 곳의 시장을 모아놓은 것같이 큰 시장이다.
카자흐스탄;
넓은 국토를 갖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은 단군의 뿌리를 카자흐스탄에서 찾기도 한다.
차른 캐니언은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며 154km 나 되는 협곡은 기암괴석으로 카자흐스탄의 국립공원이다.
협곡을 걷다보면 인간이 왜소해 보이고 걸어도 걸어도 비슷비슷한 협곡의 기암괴석이 거기가 거기 같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 콕토베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는 관람차 놀이기구 식당 선물 가게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으며 알마티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가 있어 곤돌라를 타고 한번 올라갈만하다.
알마티 시내를 내려다보면 중앙아시아인데 유럽의 도시를 보는 느낌이다.
침블락에는 천연스키장이 있는데 눈을 만드는 제설기는 없고 천연 눈으로 동계 아시안 게임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치른 훌륭한 스키장이다.
리조트에는 삼성 엘지 현대의 광고가 크게 걸려있고 중국의 하이얼도 있다.
현지인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태우 하고 아는 체를 한다.
카자흐스탄에 대우자동차공장이 있던 곳이라 대우를 태우라고 발음을 한다.
국제적인 대우구릅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알마티의 판필로프 광장에는 소련에 부속되어 있던 15개 공화국의 병사들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거대한 기념비가 있다.
나치에 저항하다 전사한 알마티의28명 판필로프 장군 부대원들을 기념하기위하여 만든 공원이다.
젠코바 성당은 목조건물로 아름답게 지어진 거대한 건물로 스탄 국가인 아스람 권에서 모스크가 아닌 성당을 보니 생소한 느낌이 든다.
밖에서 봐도 아름답고 성당안도 화려하고 신도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도수가 많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가장번화가인 알마티의 아르바트 거리는 고급 쇼핑과 문화를 느낄 수 있고 자유로운 거리다.
질뇨늬 바자르는 알마티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며 농축산물 시장으로 녹색시장이라고 불린다.
키르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는 길만 가르쳐 주지 역사나 그 나라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에피소드는 하나도 없어 눈으로 본 것 이외에는 머리에 들어가 감명을 받은 것이 없다.
버스를 타고 몇 시간씩 달리는데 앉아서 졸기만 하면 된다.
동유럽 갈 때 해박한 지식으로 그 많이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에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쉬지 않고 이야기 해주든 가이드가 그립다.
전에 여행갈 때는 각자 소개도 하여 개인 친목도 생기고 했는데 요즈음은 개인 사생활침해라고 그것도 안한다.
여행객이 궁금해 하는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중국의 성장이 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전투를 한 것은 아예 모르고 있다.
고선지가 마지막에 후진트에서 패해 중국인 수만명이 포로로 잡혀가서 중국의 화약과 종이 만드는 기술을 유럽에 전파하게 되었다.
성경이 빨리 전파된 원인도 중국인의 종이 만드는 기술을 유럽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불꽃놀이 하는 화약이 유럽에서는 대포로 발전하였다.
4).집사람 라오스
집사람은 한국 라오스 친선의 밤 참석차 라오스여행을 4박5일 하였다.
5월 말일 코카서스 3국 여행을 마치고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행사라고 반달 만에 라오스를 가는 것은 무리다.
민요모임에서 한팀으로 라오스에 가서 친선의 밤에 무대에서 한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남은 시간은 라오스 여행을 하고 6월 19일 귀국하는 것이다.
라오스는 나하고 전에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굳이 갈 필요성 까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요팀에서 가기로 하여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간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 라오스 친선의 밤 행사에 라오스에 있는 한국 고위 관리나 라오스 관리가 참석을 하여 라오스에 간 명분을 세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