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작가 최명희를 찾아서
召我 박정열 수필‧시(2016 한국문학시대/2018 호서문학회원)
누구나 꿈꾸며 산다. 꿈만 꾸는 인생으로 끝내서는 안 될 것 같다. 옹골찬 다짐을 채찍삼아 담금질을 거듭해야 한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책임은 오롯이 내 자신의 몫이다. 한 길에다 매진했다는 것은 분명 축복받을 일이다. 몰입하지 않고서야 이르지 못할 영역인 까닭이다. 한 인생을 살면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역사歷史를 짓는 일이다. 빛나는 인생을 살다간 소설「혼불」저자 고 최명희 작가를 찾아 나섰다.
혼불문학관이 있는 남원 노봉마을은 소설「혼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 매안마을의 종가, 노봉서원, 청주저수지, 샘바위, 호성암, 노적봉 마애불상, 달맞이동산, 서도역, 근심바위, 늦바위고개, 당골네집, 홍송숲 등 마을 주변이 온통 소설 속 그대로 오롯이 살아있다. 노봉마을은 실제로 최명희 작가 선대가 500년 동안 살아 온 선향先鄕이기도 하다.
아침 8시에 출발해 유성IC에서 호남고속도로에 올랐다. 계룡휴게소에서 잠시 정차를 했다. 휴게소 근처 산과 들은 완연한 가을 풍치를 드리우고 있었다. 인공으로 조성한 얕은 산은 폭포와 함께 단풍의 일색이다. 주변에 논과 밭은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고 있다. 휴대하고 간 빵으로 요기를 한다. 나는 평소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빈속인데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빵은 잘 어울렸다.
잠시 후, 다시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익산에서 장수로 가는 익산포항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언젠가 진안마이산을 갈 때 가본 길이라 다소 눈에 익었다. 얼마를 가자 완주순천고속도로로 다시 바꾸어 타야했다. 10시쯤 해서 북남원 IC에서 내려 745번지방도를 탔다. 10여분 남짓 달리자 서도書道역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이 서도역은 지난 9월에 종영된 드라마 ‘미스터선 샤인’의 촬영지이기도하다. 또 다른 감회가 물들어온다.
역사驛舍는 두메국민(초등)학교교사校舍처럼 후줄근하다. 그 옛날 학교건물처럼 지어졌다고 말은 해도 6,70년대의 한 학급 인원도 채 수용할 수없는 작은 목조건물이다. 현관미닫이문 지붕에는 ‘書道’ 아래 ‘서도’라고 쓴 해서체 하얀 입간판이 지난 시절을 추억하기에 좋았다.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흙벽을 송판으로 가림 질한 전형적인 일제하의 건축양식이다. 나무의 부식을 막기 위해 송판에 콜타르를 먹였다. 1943년 전라선의 일개 간이역으로 역무원을 배치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3년 만에 보통 역으로 승격하는 호황도 누렸었다.
소설「혼불」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서도역은 2002년 전라선 개량사업으로 헐릴 위기를 맞았다. 남원시가 매입하여 본래대로 복원하였다한다. 녹슨 선로위에 레일바이크 몇 대가 얹혔다. 1km 남짓한 혼불문학관과 연계해 지역소득사업으로 추진했던 것 같다. 그러나 10여대가 서있는 레일바이크는 시뻘겋게 녹이 슬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차를 움직여 혼불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은 쾌청한 가을 날씨아래 날아 갈 듯하다. 한옥양식의 깔끔한 기와집이 자태를 뽐내었다. 여러 문학관을 다녀봤지만 이런 고풍스런 건물은 처음이다. 주차장에서 본관으로 오르는 길이 자연석계단으로 만들어졌다. 돌계단 우측에는 지붕이 있는 계단 하나가 더 있었다. 이곳은 방문객이 원목참나무목판에 자기의 소원이나 희망을 적어 난간 대에 게시하였다. 목판은 아마도 이곳 문학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였다.
문학관마당에 오르자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이라 새긴 자연오석이 있다.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흐를 염려가 놓였으니 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비슬봉의 한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천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릴만한 곳이라 이르셨다. ‘소설“혼魂불”중에 있다’고 적혔다. 비석 뒤, 마당은 그야말로 대갓집마당처럼 널찍하다.
본관 벽에는 관혼상제사진을 전시하였다. 사진은 목조건물 외벽을 돌아가며 칸칸이 두 점씩 게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농사짓는 서도리풍경과 움막집 사진도 있다. 이런 모습들은 실제 소설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소설은 이곳 주민들 생활상을 녹여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맨 먼저 소설「혼불」의 저자 최명희 작가사진이 생전의 밝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역시, 가수 김상희씨와 흡사하다.
작가가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날렵한 끌이나/기능 좋은 쇠붙이를/가지지 못한 나는/그저 온 마음을/사무치게 갈아서/생애를 기우려/한 마디 한 마디/파 나가는 것이다./세월이 가고/시대가 바뀌어도/풍화 마모되지 않는/모국어 몇 모금을/그 자리에/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이/기둥하나 세울 수 있다면. -최명희- 이 글에 최명희작가의 문학정신이 오롯이 살아났다. 또 이런 글도 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도망 다니는 사람처럼/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모아 둔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 둔 채/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일부러 한 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그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이야기 「혼불」은 드디어/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최명희- 작가가 이 작품을 얼마나 치열하게 대했는지 가늠할 수가 있다.
“혼불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가 그 배경이다. 남원의 종가 며느리3대가 종가를 지키려는 애환과 당시의 풍습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1972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주 기전여고와 서울 보성여고교사로 재직하였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 「쓰러지는 빛」으로 등단,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공모전에서 당선작인 「혼불」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88년에서 1995년까지 신동아에 2부에서 5부까지 연재하였다. 1996년 12월에 소설「혼불」2부부터 5부까지 묶어 10권을 완간하였다.
작가는 1948년 10월 10일에 전주에서 출생. 무려 17년을 「혼불」집필에 몰두하였다. 1997년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단재 상(1997.7) 세종문화상(1997.10) 전북애향대상(1997.12) 여성동아 대상(1998.1) 호암예술상(1988.6)을 수상하고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혼불, 몌별(袂別), 만종(晩鐘), 정옥이, 제망매가 등, 단편이 있다. 그녀는 암에 걸려 몇 번씩 혼절하면서 1만 2천매에 이르는 원고를 정리하였다. 그녀는 3차례의 수술과 2년여의 투병생활에도 6,7부를 집필하는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1988년 12월 11일 향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하였다. <참조 www.honbul.go.kr/>
문학관을 나와 행랑채인 꽃심관을 찾았다. 여기는 문학관의 관리, 방문객의 안내 및 홍보를 하는 곳인 듯하다. 60대의 여자 분이 있었는데 친절하고 살가웠다. 소설「혼불」을 얼마나 아는가 묻는 설문지를 내밀었다. A4용지에는 ‘남원문화관광 상식고사’라는 4지선다형 10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10문항을 모두 맞추면 선물을 준다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험 보는 학생처럼 댓돌 난간에 주저앉았다. 맑은 가을 햇빛 속에 기념촬영도 했다. 궁금증에 대한 질문에 친절한 답을 듣고 나서야 댓돌을 내려섰다. 마당에서 또 문학관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했다.
사람 사는 방식은 수없이 많다. 돈이든 명예든 인생을 향유享有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근원적인 목적은 분명 자아실현에 있지 않을까. 소설 속 청주저수지는 잔잔한 바람에도 물결이 일었다. 저수지 옆 이엉올린 쉼터는 휴식로서보다, 아니 가을정취보다, 최명희 작가의 작의作意로 붉게 물들어있다. 단풍과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맑은 가을볕이 또 다시 저자 최명희의 작가정신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나는 혼불문학관 높은 지붕 위의 그 파란하늘을 보며 대전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첫댓글 올려주신 수필 잘 읽엇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