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고서적상 배익기(54)씨는 지난달 12일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투표에 참가한 9만8488명 중 465표를 얻어 낙선했다. "당선되면 실제 상주본을 공개하겠다"던 공약도 지킬 수 없게 됐다.
선거에 앞선 지난달 9일 배씨는 국보(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같은 판본인 상주본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그는 선거에 떨어지고 나선 "문화재청이 내 상주본을 장물(贓物)로 취급하면서 강제로 소유권을 빼앗으려 했던 사연을 보도해 주면 상주본을 공개하겠다"고 필자를 비롯한 기자들에게 제안했다. 배씨는 예전에 "대기업에서 나에게 거액을 주면 상주본을 내놓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국보급 유산을 볼모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들렸다.
배씨는 2008년 "집을 수리하다 발견했다"며 상주본을 처음 공개했다. 그런데 골동품 판매업자 조모씨가 '배씨가 책을 훔쳐갔다'며 그를 고발했다. 법원은 조씨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배씨의 절도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 과정에서 1년 복역을 했던 배씨는 풀려난 뒤엔 상주본 보관 장소를 함구(緘口)하고 있다.
조씨는 2012년 타계하기 전 상주본을 서류상으로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문화재청은 이를 근거로 작년 12월 법원으로부터 상주본이 국가 소유임을 인정받은 뒤 3차례에 걸쳐 배씨에게 인도 요청을 했다. 배씨가 계속 버티면 이달 안에 문화재 은닉 혐의로 고발하고, 강제 집행을 통해 상주본을 국가에 귀속시킬 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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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배씨는 "문화재청은 반환 청구를 할 권한이 없다"면서 지난달 25일 대구지법 상주지원에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하며 맞불을 놨다. 또 다른 법정 다툼이 시작되면서 문화재청은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할 처지다. 소장자와 정부의 지루한 줄다리기 탓에 국보급 문화재가 적절한 보존·관리 조치도 없이 9년 동안이나 방치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2017.05.08 03:04/조선일보)
훈민정음의 그림자
Ⅰ.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信眉)의 상관성
1. 집현전 학자들의 사호 반대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사회는 발전 혹은 퇴행을 한다. 먼저 국보 70호이며 세계기록문화 유산인 <훈민정음>의 창제를 둘러싼 신미선사의 사호시비와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상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세종이 타계하기 20일 전 무렵, 신미선사에게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우국이세 비지쌍운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란 시호를 유언으로 내린다. 여기서 우국이세(祐國利世)라는 표현과 존자(尊者)라는 표현이 갈등의 불을 지핀다.
문종이 즉위하자 온갖 반대상소에 직면한다. 무려 40회 이상에 박팽년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나 대사헌과 대사간의 상소를 접하면서 절충의 지혜를 짜낸다. 20일 만에 마침내 시호를 일부 바꾼 것이다. 시호는 조금 수정한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로 본디의 시호에서 '우국이세'를 '도생이물(度生利物)'로, '존자'를 '종사(宗師)'로 바꾸어 전지한다. 세조 때 와서 다시 혜각존자로 복원하여 쓰게 된다.
세종은 별세 전에 신미선사가 주석하던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금동불상과 관음상, 그리고 대세지보살을 새로 조성하여 시주하였으며, 사찰을 크게 중건해 줌으로써 억불숭유를 표방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상천외의 은전을 내린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왕조실록에 신미선사의 주도적인 <훈민정음> 창제의 조력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인가. 선사의 이름을 드러냄은 화롯불에 기름은 들어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 세상에서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독자적으로 만든다 함은,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미국이나 유엔에 알리지 않고 핵무기를 만든 거나 다름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훈민정음>의 반포도 연말에 전광석화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때는 계해년(1446) 동지 무렵,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들도 본국으로 다 돌아갔고 중국의 황제에게 신년하례를 하기 위해서 동지사 사절단이 떠난 뒤였다. 이 조용한 기간에 기습적으로 반포(12월 말일)를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음이 신미선사가 관여하여 만들었다고 한다면 선사는 물론, 불교계에도 엄청난 피해가 일어났을 것이다.
2. 부제학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집현전의 머리격인 최만리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훈민정음> 반대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2)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西蕃)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3)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만만치 않은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4) 송사에 억울한 일이 생김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닌 담당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5) 새 글자를 만듦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이므로, 온 국민과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숙고를 함이 마땅하다. 아무런 논의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였고, 성상의 건강을 해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6)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될 세자가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러했다. 다른 부서도 아닌 집현전 학자들인 최만리의 반대는 임금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이다. 임금은 최만리를 일시 옥에 가두었으나 인재를 아끼는 마음으로 바로 풀어 주었다. 임금은 포괄적으로 상소에 대한 답을 내렸다.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닌 백성을 편안해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밝혔다. 세부적으로는 4)번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6)번 의견에 대하여 <훈민정음>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훈민정음> 창제 반대론자에 대한 조율을 하였다.
한자에 대하여 표준음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여러모로 불편해 하는 엄연한 사실을 저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예로써 '牧丹'을 두고 어떤 이는 '목단'으로 어떤 이는 '모란'으로 발음한다. 이러니 똑같이 한문을 공부하고도 서로 뜻이 통하지 않는 결과가 생긴 것이다. 또, 그들은 <훈민정음>만 가지고 관리를 뽑으면 아무도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유교 경전의 학습과 연구는 국가에서 정한 핵심요소다. 조정에서는 시험 과목에 한문을 추가한다는 것이지 <훈민정음>만으로 관리를 뽑는다고 한 적이 없다. 장차 한자를 아는 사람이 적어지면 삼강오륜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주 지나친 생각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한자는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 극히 일부 사람들만 사용해 왔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자를 모르고 살아 왔다. 끝으로, <훈민정음> 창제는 유교 정신의 실천과 나라의 사회 질서 확립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세종이 정음을 창제하였다고는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미선사의 시호를 반대함은 물론이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김문, 정창손 같은 이들이 정면으로 정음 창제를 반대하고, 최만리는 끝내 사직을 하고 낙향을 한다. <훈민정음> 해례부 용자례에는 집현전 신하들이 <훈민정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술회하기도 한다(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之所能發揮也).
2. 신미선사는 누구
2-1. 기구한 출생의 여로
신미 선사는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의 맏형이다.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법주사에 들어가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 태어났을 적에 그의 왼손 손바닥에는 임금 왕(王)자가 손금으로 새겨져 었었다. 부모에게는 엄청난 걱정거리였다. 신라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자라서 나라의 역적이 된다고 하여 나라 법에 따라서 잡아 죽였기에 죽음을 면하려면 배내 병신처럼 늘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 수밖에 없었다.
선사는 외모가 출중하고 평소 말을 잘하지 않았다.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였다. 눈을 부릅뜨면 그의 눈빛에 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기품으로 보아 관상으로는 임금이 될 기상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머리가 뛰어나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다.
선사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의 후손으로 승려가 되기 전 유교 경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출가해서는 8만 장경을 보다가 고승들이 번역한 범어 경전이 이상한 데가 많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역자의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에 그러했다. 범어로 된 경전들을 탐독하고 나름 상당한 독해력과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선사의 가전에 따르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교에 뜻을 두어 자칭 신미(信眉)라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은 26년(1444) 5째 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27년(1445) 7째 왕자인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28년(1946)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 동안에 세 분을 잃고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던 중 병환으로 헤맬 적에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세종은 신미선사의 <훈민정음>에 협찬한 공으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해 주었다. 문종은 선왕의 유지에 근거하여 신미선사를 도생이물혜각종사(度生利物慧覺宗師)에 임명하였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을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였으나 효험이 없던 바 신미선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되었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선사와 가까워 졌고 신미선사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고 인물 됨됨이에 푹 빠졌다.
세종은 신미선사에게 혜존각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선사의 신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선왕의 뜻을 받들어 왕에 오르자 사호를 하니 혜각존자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대군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존자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 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선사를 우두머리로 효령대군과 김수온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하니 100종에 이르렀다. 선사는 속리산 복천사와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와 낙산사, 그리고 대자암 등을 중수하고 국책으로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매우 컸다. 성종 10년에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니 복천사 남쪽 언덕에 신미부도를 세웠다.
2-2.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일꾼
선사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은 한글 창제와 관련이 깊다. <복천암사적기(福泉庵事蹟記)>에,
"세종은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선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
라 적고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 미터 가면 신미선사 부도탑이 있다. 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선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설은 그 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
말하자면, 세종대왕의 명령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발음기관을 본 뜬 발음기관 상형이란 것이었다. 이에 못지않게 오늘날 가장 주목해야 할 담론이 바로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조선 성종 때 대제학이었던 성현(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신미선사의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장, 효령대군 문집, 조선왕조실록, 영산김씨 족보 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선사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선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선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보시의 개념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들이 쉽고 간편하게 누구나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많은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민의를 얻고자하는 배려가 컸던 것으로도 보인다.
세종은 신미선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디딤돌을 놓아준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금동불상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선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慧覺尊子)라는 왕사격의 법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선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世宗朝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영산김씨세보>).
여러 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선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암당실기(秀巖堂實記)>에 따르면 그가 써놓은 진언(眞言)과 다라니(多羅尼)며 범어친필을 보면 소리글자인 “범어”에 대한 남다른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사가 실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반대하는 학자- 최만리,김문,정창손 등-가 많았으며 <훈민정음> 창제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까지 올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신미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미선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이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신앙과 함께.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부터 경연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세자인 문종을 첨사원(詹事院)을 두어 섭정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세종실록>의 몇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20년 5월 27일 이후 두 달 동안 세자가 서무를 대결하게 하고 임금의 뜻을 전 지하도록 했다.
20년 6월 12일 임금의 병증을 기록, 요동과 북경의 의원에게 약을 묻다.
21년 2월 13일 성상의 미령. 여러 차례 각지의 온정 조사
24년 2월 21일 온정에 거둥.
24년 3월 3일 이후 두 달 동안 강원도 이천 온정에 거둥.
25년 3월 3일 이후 한 달 동안 온정 거둥.
26년 1월 27일 석 달 동안 초수에 거둥
27년 1월 18일 세자에게 양위, 만류 상소로 시행하지 못함.
2-3. 세조와의 인연
조선 왕조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즉위초에 국정을 바로 잡고 모든 정무를 직접 챙기기에 편할 날이 없었다. 몸에는 항상 고생스러운 피부병이 떠날 날이 없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전날 보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여러 형제를 해치고 어진 신하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불교를 반대하여 세종과 문종에게 상소를 하였던 신하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조는 만년에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참회의 길로 침잠하니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려 하였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혜각존자 신미였다. 신미는 학덕을 갖춘 뛰어난 당대의 도승으로서 복천사에 머물고 있었다. 세조는 신미의 존호를 복원시켰다. 다시 혜각존자로 부르게 된다. 아무도 입을 대지 못했다.
신미선사의 초청은 받은 세조 10년(1464) 2월 28일에 신숙주 이하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청주에서 이틀 밤을 자고 장재리를 거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에 이르렀다. 바로 길옆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를 길 위로 드리우고 있어서 임금이 탄 연의 지붕이 걸릴 것만 같았다. 이 때 대왕은 연위에서 손으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아, 저 가지 아, 저 가지”
이렇게 외치자 그 순간 나무는 늘어진 가지를 위로 쳐들었다. 임금은 가상히 여겨 즉석에서 정 2품의 벼슬을 주었다. 따라서 이 소나무를 정 2품송이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이 때 선사는 떡을 1백여 동이를 만들어 가져와 군사들을 먹였다고 한다.
정 2품송을 지나 복천사에 도착한 임금은 신미선사의 법회에 자리하여 티끌 같은 세상에 물든 자신의 심신이 부끄러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무한한 법열을 느꼈다. 법열을 경험한 까닭이리라. 복천사 계곡물에 몇 차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많이 나았다. 그 뒤로 세조와 선사는 물과 고기로 평생을 더욱 은혜롭게 지냈다. 복천사 법회를 마치고 떠날 무렵, 임금이 선사에게 무엇으로 답을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선사는 세조대왕에게 청하였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는데, 오랜 세월 심히 퇴락하여 민망한 지경에 있으니 대왕께서 이 보궁을 중수하시면 그 공덕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세조는 기꺼이 승낙하고 이에 바로 학열(學悅) 선사를 상원사로 보내어 중수를 마치고 6월에 낙성식을 갖기로 하였다. 이때 신미선사는 상원사에서 세조대왕을 초청하였다.
때는 5.6월 염천이라 날씨가 찌는 듯 하였고 대왕의 온몸은 피부병에 덮여 이때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정을 누구보다도 신미선사가 잘 알고 있었기에 왕을 초청한 것이다. 낙성식에서 진종일 땀을 흘린 대왕은 밤이 되자 절에서 마련한 목욕장소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옥 같은 석간수에 들어가니 전신이 녹아내릴 것같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이어린 동자가 느닷없이 들어와서 고운 두 손으로 등을 문지르니 심신이 날아갈 듯싶었다. 정말 고마웠다. 대왕은 등 뒤에 있는 동자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동자야, 너 어디사니. 이렇게 고마운 데가 있나.”
“고맙긴요, 저는 이절에 살고 있어요. 대왕님.”
“아, 그래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것이 있는데 꼭 들어주겠나? 약속해...”
“예, 대왕님. 무엇이든 하교하옵소서, 대왕님.”
“참으로 착하구나. 다른 게 아니고 나의 몸에 손을 댔다는 말을 남한테 절대로 하지 말라.”
세조왕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신하된 자가 옥체에 손을 대면 극형에 처하는 법이 있기에 동자의 신상이 염려되어 한 말이다. 그러자 동자는 대왕을 향하여 저도 대왕님께 청이 있으니 꼭 들어달라고 한다.
세조는 나이도 어리고 조그만 놈이 청이 있단 말이 하도 귀엽고 앙증스러워서 너의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자는 태연히 하는 말이,
“대왕님께서는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전하의 등을 문질렀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마세요. 꼭 약속이요.”
하였다. 세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동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부스럼이 이때부터 씻은 듯 낫다. 또한 세조는 신미선사의 도력에 힘입어 복천사에서는 세조가 목욕했던 당시에 현신했던 문수보살의 상이 모셔져 있다.
2-4. 선사의 법력과 보시
산이 속세를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멀리 한다(山不離俗俗離山). 최치원 시에서 유래된 바, 속리산 하면 법주사가 떠오른다. 혜각존자 신미선사가 한 때 이 절에 머물러 면벽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이 절의 스님들이 허위허위 신미선사의 참선장에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듣고 본즉 도둑 스무 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 젊은 중들을 묶어놓고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달려온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말도 제대로 못했다. 뜻밖의 일을 당한 선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 사람들아.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자네들은 주인이지 않은가?”
창고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음대로 다 가져가게 하라는 것이다. 이 절에는 토지가 많아서 한 해 천여 석의 거두미를 할 뿐 아니라 비단과 무명, 그릇과 잡화가 창고에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 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이며 비단이며 무명이며 그릇 등 닥치는 대로 지게 밧줄이 끊어지도록 마냥 짊어지고 줄행랑을 쳤다. 도둑들은 허둥대며 도망을 쳤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밤새도록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맴돌이를 한 셈이다. 선사의 도력에 걸려든 것이다.
당황한 도둑들은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선사 앞에 나가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러자 신미선사는 태연히 도둑떼에게 말을 했다.
“너희들은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뒤로 흉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 이러고 사는가. 마음을 바로 써라.”
도둑들은 무릎을 꿇은 채 선사의 말에 할 말을 잃고 용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갔다. 그네들은 다시 선남선녀들이 되어 착한 백성들로 되돌아갔다.
Ⅱ. <훈민정음>의 범자 기원 가능성
열사람 열소리 격으로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러다 1940년 안동의 와룡면 주하동(두루실) 이한걸 님의 고택 벽장을 고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왔다. 이후로는 <훈민정음>은 발음기관 상형이라는 창제원리가 확고해졌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창제 반포된 뒤에도 끊임없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범자기원이 머리를 들고 있다. 범자기원의 흐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범자 기원의 담론
(1) 요동성 육왕탑(삼국유사 기이 탑상) : 고구려의 동명성왕이 요동을 돌아보다 삼중토탑(三重土塔)을 발견하였다. 그 아래 묻혀 있던 명(銘)에 범어가 있었다.
(2) 글자의 모양이 범자를 닮았다(字體依梵字)
世宗設諺文廳 命申高靈成三問等製諺文 初終聲八字 初聲八字 中聲十一字 其字體依梵字爲之 本國及諸國語音 文字所不能記者悉無 洪武正韻諸字 亦皆以諺文書之 遂分五音而別之 曰牙舌脣齒喉 脣音有輕重之殊 舌音有正反之別 字亦有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之差 雖無知婦人 無不瞭然曉之 聖人創物之智 有非凡力之所及也—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초종성 8자 종성8자 중성 12자/7음4성-因聲而音叶七調(<훈민정음>용자례))
(3)<훈민정음>의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닮았다(諺書字樣全倣梵字)
我國諺書字樣 全倣梵字 始於世宗朝 設局撰出 而制字之巧 實自睿算云 夫諺書出而萬方語音 無不可通者 所謂非聖人不能也—(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4)<훈민정음>은 범자에서 연원했다.
我訓民正音淵源 … 而終不出於梵字範圍矣(황윤석의 <韻學本源>)
(5)한글이 새계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글자인데 산스크리트에 근거한 문자라고 생각한다.-(언더우드(Underwood)의 <와서 우리를 도우라(The Call of Korea)>. 헐버트
(Hulbert) 등
(6) 파스파 문자를 모방하였다.
<훈민정음>의 글자체가 초종성 2자 초성 2자, 중성이 12자이니 범자(梵字)에 의거하여 만든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에서는 “언문의 발음법을 살펴 보건대, 모두 몽고의 <운회(韻會)>를 본떴으니 황 찬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숙주의 <홍무정운서(洪武正韻序)>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또 이른바 언문의 글자체가 범자를 본떴다고 하는 것은 또한 몽고자를 말한다. 이 몽고자는 원의 세조 때 국사인 파스파(發思八)가 왕명을 따라서 만들었다.
파스파는 티베트의 라마승이었다. 범자에 의거, 몽고자를 만들고 이를 천하에 반포하여 행하게 하니 나라에 큰 공이 되었다. 나이 22세의 원 세조가 존경하여 ‘開敎宣文輔治大聖至德普覺眞智佑國如意大寶法王’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에 더하여 ‘西天佛子大元帝師’라는 호를 내렸다. 왕명을 내려 천하의 교문을 통일시켰다’고 쓰여 있다.(수라, 졸화치 등)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7) 자방고전(字倣古篆)의 고전은 범자
고전(古篆)은 (1) 중국의 옛 전서 (2)몽고의 파스파 문자-<몽고의 전서>로 해석할 수 있는 바, 후자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현대국어의 19개 자음과 범어의 조음위치와 조음방법을 비교분석, 거의 일치한다. 모음 5개와 범어의 음소를 비교 분석한 결과 거의 같다(김봉태(2001)의 <훈민정음>의 음운체계와 글자모양>).
(8) <훈민정음>과 각필구결(角筆口訣)
한글의 범어 모방설을 뒷받침하는 최근의 논의는, 이승재 교수(서울대)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에서 불이 붙었다. ‘각필’이란 상아나 대나무로 뾰족하게 깎아 만든 필기구로서, 옛 문헌의 글자 옆에 점과 선ㆍ부호 등을 눌러서 표시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던 표기 방식을 뜻한다. 흔히 부점(符點) 문자라고도 한다.
2001년 8일 서울시립대서 열린 구결학회 제 2회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훈민정음>이 고려 불경의 각필 자형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을 들고 나온 이승재 교수가 이날 자신의 논문을 공식 발표했고, 이에 대한 국내 학자들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 교수는 이날 오후 ‘부호자의 문자론적 의의’란 논문을 발표하며,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연구 결과를 확인했다.
“일본 고바야시(小林) 교수가 작년 7월 한국 문헌에서 각필(角筆)을 발견한 이후 <초조대장경>, <화엄경> 등에 문장부호나 어미나 조사로 쓰인 각필 자형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정리를 해보니 17개의 자형이 <훈민정음>의 자·모음과 일치했다. 자음 부분은 약한 느낌이 있지만, 모음으로 오면 그 같은 대응은 체계적이다.” 이어서 지정 토론에 나선 이현희 교수(서울대)는,
“지금까지 <훈민정음>에 대한 수많은 기원설이 있어왔지만, 이 교수의 장담대로 이번 경우처럼 많은 일치를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고 했다. 이 교수는 나아가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 언급된 ‘고자(古字)’, 또 18세기 학자 신경준이 언급한 ‘속용문자(俗用文字)’가 무엇인지 늘 의문의 대상이었다. 이 교수가 <훈민정음> 모음과의 관련을 지적한 점토가 바로 그것들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고 덧붙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세종 시기까지 우리 문화의 결정체랄 수 있는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밝히는 데 있어 이 교수의 논의가 큰 의미를 갖는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음 부분과 달리 자음 부분의 기원을 따지는 논의에 있어서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들을 했다. 백두현(경북대) 교수가 이날 학술대회 막판 열린 종합토론에서 ‘창호 무늬’ 얘기를 꺼냈다. 백 교수는,
“특히 초성에 관한 이교수의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제시하고 있듯 ‘ㄱ, ㄴ, ㄷ 등이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 땄다’는 등의 과학적인 제자 원리를 부정하면서 비언어학적·비과학적인 제자 원리를 내놓는 것이고, <훈민정음>이 각필 부호 구결을 참고했다는 정도인지, 기원 삼았다는 것인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앞서 한영균 교수(울산대)도,
“창살을 모방했다는 얘기나 똑같은 얘기이며, 형태를 참고했을 진 몰라도 문자체계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
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하여 이승재 교수는 말하였다.
“언어학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창호지나 문창살을 각필 부호에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발음기관 상형과 관련, ㅁ 소리를 낼 때 입모양이 네모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 같은 이론은 창제 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1438) 발견과 의의
2-1. <복천선원연력(福泉禪院年歷)>의 관련 기록
1446년까지 4년에 걸쳐서 논의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어에서 참고하여 18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을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시험으로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에 토를 달고 번역하여 '우리글이 완성되었다'며 이를 갖고 가서 세종대왕께 보여드리자, 대왕께서는 너무 기뻐하면서 크게 칭찬하시었다.
“이걸로 노래를 한 번 지어보라.”
이로부터 나온 것이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이며, <석보상절>이란 부처님의 생애를 정음으로 언해를 하게 된다. 세종 이후 연산군에 이르는 약 50년 동안 한글로 만들어진 책의 8할이 불교경전이고, 유교 경전의 번역은 1할 정도에 그친다. 만약 정음이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글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신미선사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훈민정음>은 신숙주와 성삼문 등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회의적이다.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삼문은 한글창제 무렵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으나 다음 해 일본 사신으로 갔었기 때문에 깊이 관여할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
2-2. <원각선종석보>의 발견과 의의
<훈민정음>해례의 어지를 보면, 세종은 정음 창제를 널리 알리기 이전에 이미 정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세종실록)
정인지의 <용자례(用字例)>에서 이미 오래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알맹이 부분이 “略揭例義以示之”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줄여서 예를 들어 그 뜻을 보였다”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줄였다 함은 바로 <원각선종석보> 5권의 내용을 줄였음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원각선종석보>가 정식으로 <훈민정음>의 반포 8년 전인 세종 20년(1438)에 만들어 보였기에 그렇다. 표기의 모든 부분에서 서로가 일치 한다. 특히 합용병서와 음운체계며 7음 4성체계가 일치한다.
해인사에서 입적한 일타선사(日陀, 1929-1999)가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중국에서 손에 넣어 소장했다. 이 책이 최초의 <훈민정음>으로 간행한 책으로 인정된다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보다 여러 해를 앞서게 된다.
세종 20년(1438, 정통(正統) 3년)에 만들어진 <원각선종석보>는 모두 5권으로 되어 있으나, 나머지 4권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서지적인 고증이 어려운 상태다. 일타 선사의 소장본을 여증동 명예교수(경상대)가 갖고 있다.
3. 한국어와 범어
3-1. 범어는 어떤 언어 <불교사전>을 보면, 범어란 기원전 800년 무렵 인도로 전래된 셈계통의 외래어다. <교육세계백과선사전>을 보면, <대영백과사전>의 기록을 인용,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고 있다. 범어는 산스크리트어이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인도에 쓰이는 고급 문어다. 산스크리트는 ‘완성된 언어’라는 뜻으로 속어 프라크리트에 대한 아어를 뜻한다. 범어는 범천소설(梵天所說)의 언어란 말이다. 범어의 특징으로서, 명사와 대명사 및 형용사의 성․수․격의 어미변화로 주어․목적어 등을 드러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로 나타낸다. 범어를 적는 인쇄에 쓰이는 글자를 데바나가리(Devanӑgarỉ)라 한다. 이는 47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며, 자음은 33자로서 항상 모음(a)를 동반한다. 우리말 같이 <가나다라.....하>로 끝이 난다. 이 문자의 기원은 멀리 북 셈계 글자로서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에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셈 문자의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 둘 이상의 <연속자음을 나타내려면 그 자음문자를 연합하여 하나의 결합문자>를 만드는 따위가 이 글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문장의 어순에 있어서 주어가 머리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선행하여 한정어로서 수식을 한다. 3-2. 범어는 인도어도 북셈계어도 아니다. 산스크리트나 범어라는 뜻에 인도나 그 민족을 드러내는 의미가 전혀 없다. 고급 문어라 함은 고급문장에만 쓰이는 언어로서 생활어가 아니고 문어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11억이나 되는 인도 사람 가운데 범어를 쓰는 사람은 겨우 1,0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범어란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범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영 devine)는 신성하다는 뜻이며, ‘나가’는 용이란 뜻하니 여기서도 인도를 상징하는 뜻이 전혀 없다. 흔히 인도에서는 천신이란 개념과 용이란 개념이 없고 제사를 의미하는 브라흐만(Brahman, 梵), 또는 참 나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을 종교적인 지고의 이념으로 쓴다. 용보다는 뱀의 일종인 코브라 또는 물고기가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범어는 본디 인도어가 아니라 외래어다. 그럼 범자는 북셈계의 페니키아 문자일까.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페니키아 문자의 자음이 22자인데” 범자는 자모가 47자, 자음이 33자로서 오히려 시기적으로 앞선 페니키아 문자보다 그 자모가 더 많다. 문자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일수록 간략하여 글자가 적은데 그 반대이기에 그러하다. 또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는 것도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뿐이 아니고 우리민족의 고대 필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이다. <사전>에 대승경의 범자를 북셈계 페니키아 문자에서 기원되었다고 함은 서구인에 의한 서구중심적 발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3. 상고시대 우리나라에 범어가 있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에도 그 나름으로 글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보이는 복희의 용서가 곧 범어인 것이다. 왜냐하면 범어는 이를 데바나가리라 하는데, 데바나가리는 용서(龍書)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복희의 용서는 곧 범어라 추정할 수 있고, 범어는 곧 복희의 용서라 추정할 수 있다. 한자라는 말도 한 대 이후에 쓰인 말이고 갑골문자 시대에는 서계 곧 계(契)가 있었다. 본디는 ‘㓞’라 하는데 이는 기(欺)와 흘(訖)의 반절이었다. 반절이란 그 속성상 한자를 이용하여 소리를 적는 표기방법이었다. 그러니 ‘㓞’란 곧 한글의 <글>이라 읽었다. 나무나 뼈나 거북이 등과 배에 칼로 흠을 내어 글자를 새겨 전달하였던 수단의 시기를 이른다. 우리말 ‘글’의 어원이 ‘긋다’의 ‘긋’에서 비롯하였음을 떠올리면 가늠이 간다. 말하자면 새김을 이른다. 원시 <대승경(大乘經)>이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서 인도로 전승되었다고 할 경우, 원시 대승경에 쓰여 진 범어는 당연히 우리민족의 범어라고 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더욱이 범어는 인도의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이고, 북셈계 문자도 아님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대승경>이란 널리 인간 전체를 구제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의 한 교파의 다섯 가지의 불경을 이른다. <화엄경>, <대집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이 이에 값한다.
3-4. 범어는 우리민족의 언어와 비슷하다. 말이란 주로 어휘와 문법과 음운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구조체라 할 수 있다. 이를 나누어 살펴보면 한국어와 범어의 공통점은 아래와 같다.
1) 범어와 우리말에 같은 기초어휘가 많다. 대승불교가 성립된 이래 <대승경>이 여러 차례 만들어지면서 <대승경>에 쓰여진 범어의 용어가 인도어로 바뀌어 질 수도 있고, 우리민족의 어휘도 2천여 년 전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한문을 일상어로 함께 쓰면서 많은 변모를 거듭해 왔다. 비슷한 어휘를 몇 개 살펴보기로 한다. *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국(拘尸國)을 구시나라(拘尸那羅)라 하는데, 여기 ‘나라(那羅)’는 우리말에서도 ‘나라’라 한다. * ‘차마(叉摩)’는 ‘참다(忍)’라는 뜻인데 우리말의 ‘참다’와 같다. * 파라사화(波羅奢華)는 ‘파란 잎’을, 파라니밀(波羅尼蜜)은 ‘파란 하늘’을 의미한다. 여기 ‘파라’는 우리말의 ‘파랗다’와 같은 뜻이다.
*아리랑의 어원을 범어로 찾아보면. 아리(अऱइari)와 -랑(ळअङlang)의 함성어로, “임은 갔습니다”라는 이별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다.
* 한국을 동국정운식 표기로 보면 <韓國귁>이라 하는데 이는 ‘칸국(khanguk)’이니 왕국이란 말이고, 사투리도 범어로 ‘크샤투리아(ksiatria)'로 머리의 'K'이 떨어지면, 샤투리>사투리 곧 왕족의 말이란 뜻이 된다(knife-knuckle-know 등). 크샤트리아는 고대 인도에서 이르는 카스트 가운데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의 크샤트리아다. 말하자면 제사장 집단인 브라만 다음으로 정치와 군사와 경제를 다스리던 왕족으로 특정한 시기에 돌연한 이유로 민족이동을 하여 한반도로 들어와서 마한-진한-변한을 이루었다가 오늘날의 한국을 세워 살고 있다.
2) 어법이 우리말과 비슷하다. * 어순의 경우, 독립어로 감탄사를 제외하면, 범어는 그 문장구조에 있어서 언제나 주어가 머리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에 앞선다. 이는 우리말의 어순과 그대로 일치된다. * 어미변화에 있어서, 범어는 체언이나 형용사의 성과 수, 그리고 격이 어미변화로 주어, 목적어 등의 기능을 드러낸다. 아울러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다. * 한글에서와 같이 범어도 자음마다 언제나 모음과 주로 (a)와 결합하여 쓰인다.* 한글과 같이 고대 범어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3-5. 인도 구자라트주에 한글이 쓰인다. 인도에 한글과 같은 글자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면 믿을 것인가.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거기에 1,000명 정도의 한글식 범자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인동의 구자라트 주에 가면, 간판에서 기이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으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구자라트어에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 ‘ㄱ ㄴ ㄷ ㄹ ㅁ ㅅ ㅇ과 같은 7자의 자음과 모음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10자가 꼭 같았다. 즉 받침 글자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 식으로 읽으며 다닐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이 있었고, 남인도 구자라트 주에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쓰고 있다니, 그 문자는 고조선 시대의 한글이라 할 수밖에 없다.Ⅲ. 한반도와 인도의 문화적 상관성 1. 인도의 드라비다어와 아리안어 우리말과 비슷한 어휘는 드라비다어와 아리안어계의 말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드라비다어에서는 약 1,200개, 힌디어・우루두어・다리어・희랍어・영어 등의 아리안어계에서는 400개 이상의 비슷 어휘가 발견되었다. 알타이어에서 발견되는 비슷 어휘는 불확실하지만 인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동작어> 가요 → 자요(힌디어, 네팔어) 와요 → 와요(힌디어, 네팔어) 〈천체〉라(太陽) → 라(중동, 남부 유럽, 이집트) 수리(太陽) → 수리(다리어, 우루두어, 힌디어) 해 또는 새 → 하(산스크리트어) 별 → 빌(드라비다어) 구름 → 쿠룬(다리어) 달 → 탈(다리어) 〈인칭〉나 → 나(드라비다어) 너 → 니(드라비다어) 어머니 → 엄마(드라비다어) 아버지 → 아뻐지(싱할리어) 〈장소〉골(邑, 村) → 골(다리어) …데 → …데(희랍어) 부리 또는 벌 → 푸라(힌디어), 부리(태국어), 풀(영어) 바다 → 바하르(다리어, 아랍어) 내(川) → 나하르(다리어, 아랍어) 〈곡식 및 음식〉보리 → 바어리(영어) 밀 → 밀(제분소; 영어) 쌀 → 살 또는 할(힌디어, 드라비다어) 벼 → 비아(힌디어, 드라비다어) 밥 → 밧(힌디어, 드라비다어) 〈긍정 및 부정〉 예 → 예스(영어 등 아리안어계) 않 → 안, 안티(영어 등 아리안어계) 〈고대어〉 어라가(백제의 왕) → 라자(힌디어, 우루두어, 다리어) 어륙(백제의 왕비) → 렉(다리어) * ‘어’는 경칭임. 어머니, 어버이 등 2. 한반도 문화와의 관련성⑴ 신앙 및 무속 : 태양 숭배 - 태양을 향해 절을 하고, 태양을 수레바퀴 문양으로 나타내는 등 인도의 것과 가장 비슷하다. /솟대 및 소도 - 솟대에 새(鳥)를 올려놓거나, 소도를 신성 지역으로 하는 등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의 것과 비슷하다. 남성 성기 숭배 - 인도,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한국으로 이어지는 이동 경로가 확인된다 /무속 - 우리의 무속은 북방의 엑스타시(탈혼)보다는 동남아의 포재션(빙의)에 더 가깝다. /(무당의) 띠배 -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지에서 오늘날에도 대대적으로 행하고 있다. ⑵ 탄생 설화 : 한반도는 천손설화와 난생설화가 공존한다. /천손 설화: 인도, 라오스, 태국 동북부 지역의 것과 일치한다. /난생 설화: 베트남,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의 용의 알, 박, 오이 등의 설화와 비슷하다. 알타이어족의 주된 탄생 설화는 이리(투르크족), 흰 사슴(몽고) 등 동물 설화다. ⑶ 농경 문화 : 쌀, 호미, 낫, 도리깨 등 남방의 것과 같다. 또한 가축으로는 돼지, 닭, 하마 등 모두 남방 혹은 서방의 것이 대부분이다. ⑷ 음식 문화 : 김치(인도,독일), 젓갈(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장아찌(태국, 베트남), 묵(태국, 베트남), 막걸리(라오스, 베트남), 된장・고추장(태국) 등 우리의 주요한 음식은 대부분 동남아의 것과 비슷하다. ⑸ 장례법 - 지석묘(고인돌):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우리나라로부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아프가니스탄, 요르단, 독일, 프랑스 등 모두 남방 또는 서방의 선상에 있다. /옹관묘: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에서 무수히 많은 옹관묘가 발견된다. 중국의 섬서성 부근에도 옹관묘가 출토된다. / 풍장: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것과 비슷하다. /적석묘: 북방에서 발견되는 적석묘를 만든 사람들인 스키타이족들은 알타이어족이 아닌 아리안어족이었다. /석관묘: 북방, 남방, 서방 각처에서 발견된다.⑹ 음악과 춤 : 우리 음악의 특징인 무장단,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과 3박자의 형식이 모두 태국, 인도와 비슷하다. 이러한 음악적인 특징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더욱 뚜렷하다. 특히 와공후, 수공후, 생황, 거문고, 장고 등 우리나라 전통 악기가 동남아 및 인도에서 많이 발견된다. 춤은 인도의 것과 가장 비슷하다. 특히 사자 탈춤(베트남, 라오스)이 전래된 장소는 동남아시아임이 확실해 보인다. ⑺ 놀이 문화 : 비석치기(동남아 일대), 자치기(베트남, 라오스), 꼬누(베트남), 구슬치기(캄보디아), 닭싸움(동남아 일대), 소싸움(중국 서남부, 인도네시아), 대젓갈 놀이(베트남) 등 우리 놀이 문화의 대부분이 동남아의 것과 같다. ⑻ 기타 : 애기 업기(태국, 미얀마), 빨래 방망이질(미얀마, 인도), 머리에 물건이기(인도네시아, 인도), 성황당(오끼나와, 인도) 등 한민족 고유의 풍속 대부분이 남방의 것과 일치한다. <삼국유사>의 김수로와 허황옥(인도), 신라 경문왕의 당나귀 귀(그리스), 나무꾼과 선녀(인도네시아)의 전설 등도 우리 민족의 남방과 서방의 관련설을 고리지어 준다. 3. 한민족의 유전자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과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복수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 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교수(단국대) 연구팀은,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복수의 민족기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에 발표되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 가지 염색체의 디엔에이(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와이(Y) 성염색체’의 디엔에이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다. 김 교수 연구팀은, 2001~2003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년엔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사피엔스)은 6-8만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3만 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Y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 년 전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 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마침내 오늘날의 한민족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