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근본으로 돌아가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가는(歸根) 것입니까?”
“돌아가려 하면 곧 어긋나버린다(擬卽差)."
'근본, 근원(根原)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공부는 바로 자성(自性)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이 우주의 근원을 파헤치는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뜻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텐데, 잘 숙고해 보기 바란다. 조주는 이 질문에 대하여, '돌아가려 하면 즉시 어긋나 버린다'고 말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무엇을 한다고 하면 곧 틀려 버린다'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마음의 근원, 소크라테스가 말한 '참 너 자신'을 찾아서(당연히 이 그리스 철학자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지만)수행하고 공부를 하고 있다. 질문대로 근본으로 회귀,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려고 하면, 곧 무엇이라도 분별하고, 재고, 따지고, 이게 옳으니 저게 바른 것 같으니, 헤아리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이 근원은 저만큼 달아나 있다는 말이다. 근본은 지금 있는 그대로인데, 돌아간다면 돌아갈 곳이 있는가?
166. '말을 벗어나야 해탈'
한 스님이 물었다.
“말(言句)을 여의지 않고서 어떻게 해야 해탈할 수 있습니까?”
“말을 여의는 것이 해탈이다.”
“조금 전에 아무도 저를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느냐?”
“큰스님께서 어찌 가려내지 못합니까?”
“나는 벌써 가려냈다.”
언구(言句), 즉 말 마디, 언어를 벗어나지 않고, 달리 말하면 말, 언어 가운데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탈할 수 있을까? 질문의 요점이다. 석가로부터 달마대사 이래로 도, 선(道, 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언어를 세우지 않고 말 길도 끊어지고, 심행처멸(心行處滅), 마음 가는 곳도 사라진 곳에 있다고 한다.
참으로 찾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우리 바로 코앞에 있는데, 사방에 없는 곳이 없는데, 이를 바깥에서만 찾으려 하니 하세월이란 이야기를 많이 한다. 도(道)란 바로 이것이다. 찾·았·다!
조주는 그 수행자의 질문에 선의 교과서적인 가르침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 즉 말의 길을 떠난 곳에 있다고 대답한다. “말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해탈이다”는 바로 그 말이다. 이 수행자는 뭔가 대단히 심술이 났는지, “아무도 저에게 여기로 오라고 한 사람은 없다.”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누가 널 여기에 오라고 했느냐? 그럼 왜 왔니?” 그래도 조주는 친절하게 응답해 준다.
그 수행자는 이제 조주 너도 한번 걸려 들어 봐라, 나의 이 말엔 아무 대꾸도 못하겠지? 생각하곤, “큰스님께서 당장 가려내 주십시오.”하고 자칭 전광석화처럼 내려친다. 내가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챘느냐 이것이다. 그러자 조주는 "벌써 가려냈느니라“ 이미 너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말이다.
이 짧은 문답 속에서 자세히 가리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그 스님도 '눈먼 자'로서 꽃밭 속에 누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조금 마음 공부한 흔적은 있다만, 제가 ‘왜 눈먼 자가 꽃밭 속에 누웠다고 했는가?’를 깊이 의심해 알아내야 본분사에 가까워진다.
167. '지혜로 나아감'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이 아니면 지혜에 즉(卽)하지 못합니다. 큰 스님께서 한 마디(一句) 해주십시오.”
“나는 그대만 못하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는 말은 도(道)의 세계에서 영원히 통용될 진리이다. 부처란 곧 깨달음으로, 이것은 다른 말로 바로 지혜이다. 그래서 불법의 세계에서는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慈悲心)과 지혜, 곧 보리, 반야를 가장 중시한다. '번뇌가 곧 보리요, 반야요, 부처이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번뇌를 번뇌로 보지 않으면 곧 지혜, 깨달음이다. 이를 말로만 아닌 마음으로 제대로 느껴야 한다.
'마음이 아니면 지혜에 즉(卽)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음만이 지혜에 즉(卽)한다, 지혜로 나아가서 딱 통한다는 말로서 제대로 본 안목이다. 그리곤 한마디 해 달라고 조주에게 간청한다. 조주의“나는 그대만 못하다."는 대답은 진심이 담겼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 그 수행자가 진실로 '마음이 아니면 지혜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득하여 깊은 도(道)의 경지에 올라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 '마음이 곧 지혜이다.' 옛사람들의 말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대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 있는가? 모두 다 갖추고 있는 게 그대 마음인데!' 억!
168. '귀결점은 어디에 있나?'
“무엇이 귀결점(畢竟) 입니까?”
“귀결점이다.”
“어느 귀결점 말씀입니까?”
“내가 귀결점이거늘 그대는 말을 물을 줄도모르는군.”
“묻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귀결점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필경(畢竟)'이란 말을 다른 말로 귀결점이라고 했는데, 선(禪)의 세계에서는 낙처(落處), 떨어지는 곳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조사, 선사의 말씀, 법문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 상징화, 반어적인 것이 많은데 도대체 말이 성립되지도 않는 것 같고, 어떨 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있음직한 황당한 표현들인데 그런 말씀의 이면에 담긴 뜻(意), 요지(要旨)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낙처(落處)를 제대로 보아야 바른 안목(正眼)을 갖췄다고 하는 것이다. 황당한 표현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다 속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말의 코드(code), 암호화라고 했다.
위 문답은 '낙처란 무엇인지' 물으니, '조주 나 자신이 귀결점이다. 묻는 법도 모르냐? 제대로 물어라!' 등 여러모로 황당한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이해들 하시겠는가? 조주선사는 마무리로 '낙처, 귀결점이란게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했는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 뜻을 알아야지 아무도 떨어지는 곳을 볼 수는 없다. 깊이 의심해서 탐구해야 귀결점이 나타남을 명심해야 한다.
낙처(落處)라고 하니 생각이 나는데, 옛날 중국 당나라 때에 유명한 세속의 불자인 방거사라는 분이 소위 선(禪)을 공부하는 스님 10명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하늘에 눈(雪)이 펄펄 날리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 눈이 송이송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때 모든 스님이 물었다.
“눈이 어디로 떨어집니까?”
그러자 방거사는 손바닥으로 한 스님을 철썩 때렸는데, 선수행자들 모두가 “거사는 너무 거칠게 굴지 마시오.” 하고 항의했다.
방거사가 말하기를,
“자네들이 이런 식이면서 선수행자라 자칭하니 염라대왕은 그대들을 결코 놔주지 않을 것이다.”
스님들은 “거사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방거사는 다시 손바닥으로 한 스님을 철썩 때리고는 말했다.
“눈으로 보나 장님 같고, 입으로 말하나 벙어리 같구나."
눈(雪)이 떨어지는 곳, 낙처(落處)를 몰라서 스님들이 거사에게 호되게 당했다. 눈이란 건 하늘로부터 땅으로 떨어져 바로 녹기도 하고 쌓이기도 하는데 ‘왜 어디로 떨어집니까?’ 하고 물어봐서 따귀를 맞는가. 한심한 노릇이지만 그 말의 낙처(落處)가 어디인지 몰라서 병신 취급을 당한 것이다. 그 눈은 어디로 떨어지는가? 바로 코앞에 있다.
169. '실오라기도 내려 놓아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구나.”
마음속에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았으면, 이 또한 아주 좋은 일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의 해설도 단도직입(單刀直入), 즉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곧바로 찌르는 격이라, 우리 마음에서 온갖 번뇌를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것을 실오라기 한 올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한번 뛰어넘자마자 즉시 부처의 지위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도(道)이고, 여러분이 갈 길이다. '한 올의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았다' 라고 하면 즉시 마음속의 모든 번뇌를 털어내야 한다. 그곳이 부처의 자리이다. 아주 가까이 있다.
그 수행자가“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조주도 칭찬해 줄 수밖에. "그래 정말 장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구나!” 그런데 이 스님이 정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가. 털끝 먼지 하나 없으면서 계속 실오라기 타령만 하고 있겠는가 이 말이다.
도(道)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한다. 실오라기, 실오라기 하고 있으면 수만 톤의 무거운 실오라기가 마음에 실린다. 이 스님의 짐이 한 보따리다.
170. '머리에 붙은 불 끄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대로 본받아라.”
“어디를 말씀입니까?”
“남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
법화경에서 '모든 중생은 머리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아이들과 같다'고 비유한다. 영원부터 시작하여 미래세까지 육도중생을 윤회하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즉 발등, 아니 머리꼭지 위에 불이 떨어져 활활 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붙은 불을 끌 생각조차 않고, 헤벌레 여자가 좋으니, 꽃이 예쁘니, 고급 팰리스 단지가 안락하니 하며 이 세상 속의 즐거움에 빠져들어 중생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그 누구 잘못이라고 이를 탓하겠는가? 모두 자기 자신의 허물이다.
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여러분들이다. 오늘도 열심히 마음 공부하여 3계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려고 하는, 성인의 지위가 곧 보장된 여러분이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안다. 오직 믿고 실천하면 곧 온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나누고 배워야 한다. 그 참구하는 자세면 자세, 깊이 침잠(선정)하는 시간이면 시간, 행주좌와 어디서나 의심하는 마음이면 마음, 그러나 남의 화두는 아닌 자기 화두를 일념(一念)으로 참구해야 한다.
'왜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고 했는가?' 또는 '중생도, 부처도, 물건도 아닌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등 자기의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하면, 불은 곧 꺼지고, 그 불 속에서 찬 얼음 한 덩어리가 튀어 나올 것이다. 여러분의 부처이다. 화이팅!
171. '공겁(空劫)의 주인'
“공겁(空劫) 가운데는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그 안에 앉아 있다.”
“무슨 법을 설하십니까?”
“그대가 묻는 것을 말한다.”
경전을 보면,이 세계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세계는 항상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의 네 시기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한 겁(劫)이라고 하면 사실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말한다.
사겁(四劫)은 우주의 생성, 소멸의 과정을 시간의 단위로 설명하는 것인데, 인류가 생성하여 번성해 가는 시기는 성겁, 생성되어 안주하는 시기는 주겁, 온 세계가 파괴되어 가는 시기는 괴겁, 소멸되어 공허로 돌아가는 시기는 공겁이라 한다. 선적으로 우리는 공겁의 시기를 지향한다. 바로 4겁은 우주 그 자체인 마음을 깨달아가는 흐름이란 소리이다.
위 질문에서, 온 세계가 소멸되어 공(空)으로 돌아가는 공겁(空劫) 중에서는 주인이 누구인지 물으니, 조주는 자기가 그 안에 앉아 있다고 한다. 조주만 앉아 있는가? 저도, 여러분도 모두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세계가 다시 번성해 나가지 않겠는가.
아이폰(I-phone)으로 세계를 휘어잡은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에 한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점심 한번 먹을 기회가 생긴다면 자기 재산의 반을 내놓겠다'고. 확실히 깨달으면 참 자신을 뚜렷이 알 수 있는데 소씨(氏) 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찍 소리 못하게 깨달아서 이 세상을 제대로 바꾸어야 한다. 그 안에서 조주선사나, 저나, 여러분이나 한 목소리로 법(法)을 설하는 때가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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