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5)
10. <몽실몽실한 원을 따라가면(1) – 세잔 ‘대수욕도’> 읽기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 단위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술에 있어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여 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에 집중하는 것을 말하며,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짧은 구절과 동일한 음의 반복, 일정한 박자와 화음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위 ‘빙산이론’에 따르면, 빙산이 오직 8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만 물 위에 떠 있고 나머지는 물속에 잠겨 있듯이, 훌륭한 작가라면 물밑에 잠겨 있는 얼음처럼, 말로 표현하는 부분보다 오리혀 말로 표현하지 않은 부분을 더 높이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불필요한 언어를 최대한 제외시키려 했기 때문에 독자는 행간의 의미파악에 집중해야 한다. 소설에서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어휘, 문장구조, 주제, 등장인물 등을 단순화한다. 문장도 짧고 단순한 수사를 사용하며 대화도 짧고 반복적인 표현을 쓴다.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독자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상상하도록, 언어보다 침묵을 선호한다. 가능한 수식어를 삼가고 의미를 한정시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미니멀리즘은 형식상 단순히 짧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표현과 주제와 기교의 간결성이 중요하고, 나아가 예술 혹은 삶의 근본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
시에 있어서 일본의 하이쿠, 우리나라의 전통 단시조, 그리고 최근 시도되고 있는 『자유문학』(신세훈)의 민조시와 『조선문학』(박진환)의 풍시조 등이 미니멀리즘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시에 있어서도 단시들은 대부분 미니멀리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주제나 어휘 및 구조 등에서의 단순성이 중요하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은 한국미술에 단색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1975년 동경화랑이 기획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전’(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이 개최되면서부터 단색회화가 우리나라에 등장하였으며, 요즘 이우환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조각에 있어서 대표작가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94)는 <무제(Untitled)>라는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특히 <무제 1966>에서 보면, 똑같은 사각형의 판을 나란히 벽같은 수직면에 일정 간격으로 붙여 놓은 것이다.
도널드 저드, <무제 1966>
도널드 저드의 작품을 보면, 우리나라 시인 이상(1910~37)의 시 <오감도-시제1호>를 연상시킨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이상을 미니멀리스트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13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4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5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6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7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8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9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0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1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상 <오감도 시제1호>, 조선중앙일보 1934.7.24.
이상(李箱)의 시에서 등장하는 단어는 아해, 무섭다, 도로, 골목길, 질주 등 단순하다. 구성 또한 아주 단순하다. 무서운 아이와 무섭다는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최소의 단어로 무서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이처럼 시의 길이가 아니라 최소의 단어와 구성으로 짜진 그리고 나머지 여백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장점이 있다.
신규호는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지배적 정서는 ‘무서움(공포)’이며, 그것은 제목 ‘오감도’가 암시하듯 까마귀가 상징하는 ‘죽음’ 때문에 비롯된다. (······) 시인 이상은 시간관에 의한 자아와 인간의식을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한 결과, 파편적이고 죄악 덩어리인 과거라는 망각의 시간과, 미래라는 헛된 환영의 시간을 변증법적으로 초극하여 ‘영원’을 획득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신규호, 「이상李箱 김해경의 편유적編喩的 시세계·3」, 『시문학』 574호, 2019.5, 86-114쪽).
필자의 시 <몽실몽실한 원을 따라가면(1)>은 세잔의 <대수욕도>를 보고나서,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즘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세잔은 모든 자연현상은 원기둥, 구, 원뿔로 함축된다고 주장하였다. 세잔이 주장은 바로 미니멀리즘적 사유방식이다. <대수욕도>는 말년에 아틀리에에서 모델이 없이, 자기의 원칙에 입각하여,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그린 작품 중에 하나다. 만물은 원기둥과 구와 원뿔로 요약하려고 한 것이다. 사실 나머지는 세잔에게 있어서 모두 수식어요 부속장치들일 뿐이다. 사람에 비유한다면 옷일 뿐이다. 발가벗긴 인간의 모습, 그것이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바 일 것이다.
원기둥 위
원뿔 거꾸로
그 위 공
위태롭다
원기둥 위
공 그 위
원뿔 거꾸로
위태롭다
공위
원뿔 똑바로
그 위 원기둥
더욱 위태롭다
원뿔 거꾸로
그 위 공
그 위 원기둥
더욱 위태롭다
세잔의 어떤 조합도 위태롭다
플라톤도 뉴턴도 위태롭다
빨강, 파란, 노랑도 위태롭다
우리는
항상
왠지
어디서나
무언지
알 수 없이
위태로울 뿐이다
- 김철교 <몽실몽실한 원을 따라가면(1) – 세잔 ‘대수욕도’>
시인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위태롭고 불안한 인류의 지금-여기를 시에 담고 있다. 이러한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은 ‘본질’을 탐색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담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죄짓기 이전의 이마고 데이(Imago Dei: 하나님의 형상)를 회복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 하겠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의 원죄를 벗어나기 위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고난과 영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불교에서는 해탈이요, 선교의 도인이 되는 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 또한 허망한 일일지도 모른다. 삶의 본질에 대한 어떠한 질문에도, ‘불변의 답변’은 ‘없다’는 결론밖에 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 결국 원기둥, 원뿔, 구(공)로 세상만사가 위태롭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본질적인 것(세잔)의 위태로움, 이성(플라톤)의 위태로움, 감성(빨간, 파란, 노랑)의 위태로움, 다시 말하면 최소의 개념으로 총체적인 위태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세상의 종말을 향한 질주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잔, <대수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