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떠날 때의 모습처럼 건조하게 단장한 산야가 차갑게 식어간다. 겨울채비를 하면서 왠지 서글퍼진다고 할 때면 여자의 여린 감성이러니 하고 흘려들었었다. 이제는 찬바람이 불어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그 말이 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힌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한 수원기독호스피스회 봉사자들과 호스피스병원에서 별세한 유가족들을 위한 호봉산악회의 나들이. 신라의 전성기를 누렸던 <신문왕 호국행차 길>을 찾는 힐링 트레킹이다. 아내가 뒤에서 밀어줄 때는 나 홀로여도 천년왕국의 제왕이 부럽지 않게 유유자적 여행을 하며 전국의 산을 동네 앞 뒷산 오르듯이 등반을 즐겼었기에. 일명 <왕의 길>이라고도 하는 유별한 곳을 호젓하게 걸으려니 폐왕이 되어 궁을 떠나는 것처럼 행보가 헛갈려진다.
아내는 호스피스봉사자로 돌보던 환자를 가끔 떠나보내곤 했다. 그러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떠났었기에 나도 유족이 되어 올 들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을 맞아 세 번째다. 아침 일찍 수원을 떠날 때의 날씨는 흐리고 차가워지는 바람결이 마음을 시리게 했다. 두해 전 바로 이맘 때였다. 아내가 당연히 호스피스병원으로 행선을 잡는 날인줄 알고 있는데 몸이 안 좋다며 무슨 말을 하려는 기색으로 한참을 뭉그적대고 있다. 이윽고 호스피스 봉사자들 산악회에서 먼 곳으로 등산을 가는 날인데 나는 이라며 넋을 잃은 사람처럼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산이 좋아 등반을 일삼는 나와는 다르게 일이 많기도 하고 늘 바빠서 같이 못하던 아내가 약수터가 있는 동네 앞 산엘 갔으면 했다. 모처럼 이어서 기꺼이 손을 잡아주며 나지막한 덕성산을 올랐다. 괜찮았던지 계속 다니면 몸도 나아질 것 같다며 같이 다녔으면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 그냥 다녀보라고만 하고 말았다. 며칠을 혼자서 겨우겨우 다니는 중에 10월 하순이 가고 다음날 기어이 병원신세를 지게 되더니 투병 40일 만에 훌쩍 가버렸다. 안면이 익은 몇 분과 인사를 나누다가 오늘처럼 나들이를 했었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 친동기간처럼 다정하게 지냈던 권사님을 찾았다. 그런데 감기로 집에서 쉬고 있다는 것이어서 대화로라도 마음을 녹이고 싶었던 생각을 접고 말았다.
수원을 벗어나 한 참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에 구름은 다 걷히고 햇살이 쏟아져 차창을 달구니 마음이 포근해 진다. 누런 들판이 눈을 부시게 하는 당진-영덕 간을 신바람 나게 달려 낯에 익은 경주에 들어섰다. 국제마라톤대회를 알리는 아취와 펄럭이는 현수막들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이어서 기분이 상승된다. 인솔자인 하나호스피스재단 회장님께서 점심을 좀 일찍 먹게 되면 계획에 없는데 한 곳을 더 가볼 수 있을 것 것이라고 해 점심을 서둘렀다. 경주에 들려본 게 몇 번째인가? 올 4월 초 경주의 남산을 등반하면서 요상하게 불어 닥친 광풍에 넘어졌던 트라우마가 스쳐간다. 난생 처음으로 곤드레 비빔밥을 시켜 맛있게 먹자니 아내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들었던 수저를 멈추고 “여보 당신도 같이 먹어봐요. 이렇게 맛이 있는 줄을 몰랐잖아요. 우리도 집에서 해먹읍시다.”라고 속말을 했다.
창연해 보이는 경주의 매력에 빠져드는 이들 몇 분이 모처럼 이라며 불국사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9km 정도 된다는 목적지를 찾아 보문관광단지를 우회하여 상수원지를 지나 고즈넉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신문왕 호국행차 길, 일명 <왕의 길>’이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왕이 행차했었다는 길 주변을 살피다보니 요즘엔 깊은 산속에서도 보기 힘든 고염나무들이 곳곳에서 잔득 열매를 달고 단맛을 달구고 있다. 아내도 같이 와서 봤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말하지 않는 슬픔이>라는 정현종의 시 구절을 되새긴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들리지 않은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라고….
태풍 ‘콩레이’로 탐방로가 유실되었으니 주의하라는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내가 보기로는 별로 위험한 곳이 없는 것 같아 자연재해의 흔적을 탐사하는 정도라 차라리 내 마음이 시린 것만큼의 고생을 자초하고 싶었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기지사’란 오래된 절 경내를 통과한다. 발그스레하게 익어가는 대봉감과 민들레, 코스모스, 과꽃이 만발하고 있어 생전에 그 사람이 좋아하는 정물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바닷가로 옮겨가 짭짤한 갯바람을 쏘이며 문무왕 능을 바라보고 해변을 거닐다 버스에 올랐다. 모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껏 이야기꽃을 피우며 집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나도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집에 가자’라고 했던 아내의 마지막 말이 귓전에 울려 사진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201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