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이달의 문제작: 불가항력인 '시간'과 불가사의한 '마음' /
양병호
등록일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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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
不可抗力인 ‘시간’과 不可思議한 ‘마음’
양병호
<시인·전북대 국문과 교수>
시간은 실체가 없다. 하지만 시간은 다양한 징후들을 통해 존재를 발현한다. 인간은 생로병사를 통해 시간을 확인하고 수용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은 거대한 천체 현상으로부터 사소한 자연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정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태양과 달의 운행으로 인한 낮과 밤의 순환, 비나 눈의 자연 낙하운동 등을 통해 시간은 존재성을 드러낸다. 특히 이 시간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숙명적 속성을 드러내주는 매개이다. 인간은 시간의 구속과 제약으로 인하여 일회성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일필휘지로 단 한번만 쓸 수 있는 인생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한계와 제약으로 인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속성을 드러낸다. 시간은 직진의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 즉 시간은 진행하면 되돌아올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시간은 불가역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리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여 지나간 인생은 회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정할 수도 없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가고 오지 않는 과거를 반성하고 추억할 따름이다. 나아가 인간은 이 시간의 엄숙한 절대적 강압에 의해 언젠가 꼭 한 번은 죽어줘야 할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시간의 단절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꿈을 꾼다. 이른바 불로장생을 꿈꾸는 것이다. 아니 불멸과 불사를 지향하며 영원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극복하면, 예컨대 시간을 자유자재로 통제 가능하게 된다면, 그 때 인간은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원 불사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과학의 힘을 빌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선형성을 입체적으로 해결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모반적인 꿈, 혹은 혁명적인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현재 인간은 시간의 불가역성, 선형성, 일회성 등으로 인해 불완전한 인간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인간과 시간 사이의 숙명적 조건은 삶의 여러 제약들을 제기한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죽음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다양한 제약과 한계를 제공하는 시간에 대해 시인들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시간에 대해 허무와 무상을 노래한다. 과거의 순간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환기한다. 일회적인 삶의 소중한 가치와 의의에 대해 형상화한다. 시간을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토로한다. 하여튼 인간을 인간답게 규정하는 시간의 절대적 엄숙성은 인간을 겸허하게 한다. 시간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바라기 둥근 얼굴에 까만 씨알로 꼭꼭 점을 찍었다
큰 손 하나와 작은 손 하나가 번갈아가며
간난이 세수 시키듯 훔치고 있다
간난이는 잠이 많아서
팔다리가 점점 길어진다
팔다리가 길어진 아이를 엄마는
두 팔에 안고 환하게 웃는다
진흙길을 굴러가는 수레
뒤에 남은 웅숭깊은 바퀴자국을
한참만에야 바스러트려버리는 바람은
나무 등걸에도 나이테를 긋는 바람은
간밤에 자동차와 자동차가 맞붙다가 사라지는 소리를
새벽에 세상을 떠난 어느 환자의 마지막 숨소리를
큰 손 하나와 작은 손 하나로 낱낱이
해바라기 얼굴을 훔치며 기록하고 있다
밤이 되어도 잠잠해지지 않는다
- 김규화, 「바람 1-얼굴」 전문
이 시는 ‘바람’을 통해 시간의 흐름/경과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즉 이 시는 ‘바람’ 연작시인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는 ‘얼굴’의 이미지를 모자이크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모자이크 기법은 의미 논리적이지 않아서 여백을 메워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달리 생각하면 독자에게 시 이해의 재구 능력을 요구한다. 아니면 독자에게 시 해석의 창조성을 발현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의 이미지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차원에서 꼼꼼하게 읽어보자.
이 시를 이끌어가는 핵심어는 단연 ‘바람’이다. 바람은 일찍이 하늘의 기운 혹은 우주의 숨과 기운으로 이해되어 왔다. 한편 바람은 자연의 섭리나 이법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 바람은 허무, 무상, 삶의 기복, 불안, 가변성 등의 내포 속성을 지니고 있다.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명구를 발상하기도 했다. 다음에 상술하겠지만, 이 시에서 ‘바람’은 파괴자 혹은 지우개로 기능한다. 동시에 ‘바람’은 기록자로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에서 ‘바람’은 모든 존재를 풍화시켜 닳아지게 만드는 속성을 지님으로써 ‘시간’의 대리물로 작동한다.
1연은 ‘해바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바라기는 ‘시계’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해바라기와 시계는 여러 차원의 공통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원형이라는 형태적 동일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해바라기는 향일성 식물로 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해바라기는 시간의 의미 속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한다. 특히 “까만 씨알로 찍힌 점”은 시간을 표시하는 표지로 보인다. 2행의 “큰 손과 작은 손”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연상시킨다. 3행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이동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의 운행은 매우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신생의 긍정적 이미지로 드러난다.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간난이 세수 시키듯”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열림으로 인지하고 있다.
2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간난이”의 성장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시계로부터 이미지가 이월된 ‘간난이’는 신생아라 잠이 많다. 예컨대 간난이의 활동 시간은 매우 적고 오히려 시간을 정지시키는 잠을 많이 잔다. 여기서 시간의 역설적 상황이 제시된다. 즉 “잠이 많아서 팔다리가 길어진다”는 인과관계는 시간을 축적함으로써 인간이 생장한다는 논리이다. 엄마는 이렇게 “간난이”로부터 성장한 “아이”를 보고 만족한다.
3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변화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생명은 “수레”의 운명이 되어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헤치고 나아간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의 뒤에 삶의 흔적을 남긴다. 이는 그 삶이 지나쳐온 인생사의 자국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취도 얼마 가지 않아 “바람”에 의해 흔적 없이 지워지고 만다. 나아가 세월이 흘러갔음을 드러내는 “나이테”를 새겨 놓는다. 이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남긴 흔적, 기억, 역사 등도 결국은 “바람”에 의해 소멸되어 버린다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의 재현으로 보인다.
4연은 소멸과 무화의 기능을 지닌 “바람”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상황에 개입하고 있는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현실세계에서는 과학문명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충돌과 파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인간도 질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있는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바람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을 “소리”를 통해 시간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의 기록 과정은 시간의 진행 과정임과 동시에 소멸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5연에서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 시는 ‘바람’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억과 소멸의 변증법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물들인 “해바라기, 얼굴, 수레, 바퀴, 나이테” 등은 모두 원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시간의 운행이 순환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시간은 바람처럼 모든 사물과 기억을 풍화시켜 소멸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소멸과 함께 또 다른 신생의 “간난이”들이 성장하며 세계를 이어나가는 순환적 운행을 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시간과 바람 속에 소멸을 하는 세계의 풍경이 여백이 많은 이미지들의 연결로 쓸쓸한 우수를 환기하고 있다.
노인정 앞 가로등에 묶여 있는 자전거 한 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한 자리 그대로
겨울부터 봄까지 가을 지나 다시 겨울까지
체인 풀리고 페달 빠져도 그 자리 그대로
이 길 갈라치면 길보다 먼저 나타나는 자
한자리 지키기도 힘들어
노인정 앞 불 꺼진 가로등
그대로 기대고 있는 녹슨 자전거 한 대
지나가는 사람들 흘금 바라보다가
지나치던 사람들 힐끔 돌아보면
그러거나 말거나 바람 빠진 몸 축 늘어뜨리는
한 자리에서 늙어버린 자전거 한 대
그제처럼 어제처럼 오늘도 스쳐가다가, 으아
핸들아, 바퀴야, 단 한 번이라도 팍팍 굴러가보자
- 서정우, 「구르자, 바퀴」 전문
이 시도 시간의 퇴색으로 인하여 운동성과 활기를 상실한 존재를 “자전거”라는 대리물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자전거는 낡고, 녹슬고, 묶여 있고, 늙어 있는 상태로 인지된다. 특히 이 자전거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는 “노인정 앞”이다. 이와 같은 공간의 인접성으로 인해 “자전거”는 시간이 오래 경과한 존재를 환유한다. 예컨대 이 “자전거”는 노인정 공간 안에 있는 ‘노인’을 환기한다. 이 시는 시간에 굴복한 혹은 시간에 압도당한 존재인 “자전거”를 통해 간접적으로 노인들의 쓸쓸한 삶을 투사하고 있다.
1연은 자전거의 “묶여 있는” 상태가 강조되고 있다. 그것도 동일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아니 일 년 내내 고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예컨대 자전거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전혀 움직임 없이 존재한다. 시간이 흘러감에도 동일한 공간에서 움직임이 없는 삶은 일종의 유폐 감금된 상황이다. 특히 동작과 운동을 작동하는 체인과 페달은 망가진 상태이다. 이로 인해 자전거로 표상된 존재는 활동성과 운동성이 제거된 상태로 존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달리 말하면 죽음과 유사한 상태로 인지된다.
화자는 노인정 앞에 붙박여 있는 ‘자전거’를 연민의 눈길로 응시하고 있다. 화자의 시선에는 자신의 나아갈 길보다 먼저 ‘자전거’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역시 그 자전거는 매우 위약한 공간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자전거가 지키는 자리는 심지어 “가로등”까지 꺼져 있어 매우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럼에도 상황을 타개할 의지나 힘이 없기 때문에 ‘자전거’는 “그대로”, “기대어”, “녹슬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자전거라는 존재가 매우 수동적이며 활동성이 저하된 상태에 처해 있음을 표상한다.
화자는 노인정 앞에 묶여 있는 자전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한다.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운동성과 활력이 제거된 자전거를 바라보는 행인들의 시선은 “흘금, 힐끔”으로 인지된다. 이는 자전거의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상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타자들의 연민의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전거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타자의 동정과 연민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조용히 한 자리에서 “늙어가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타인들처럼 노인정 앞을 스쳐지나가다가 문득 새로운 각성을 한다. 화자는 활력을 잃어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자전거’가 생기를 되찾아 예전처럼 활발하게 삶을 이루기를 희망한다. 이 작품에는 시간 앞에 서서히 낡고 늙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시간의 절대적 위력 앞에 결국은 풍화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의 모습을 “자전거”를 통해 우회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언어들은 대장간의 칼로 녹슬어 있다
태양이 시간을 돌리는지
시간이 태양을 돌리는지
궁금하지 않은 나의 삶이 식상하다
달의 짜여진 공식처럼
세상엔 그녀의 달거리와 한통속 아닌 것이 없다
지구가 기울어져 한 쪽으로 도는 것과
나의 메시지가 물처럼 아래로만 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바람 따라 구름 흐르고, 그녀 따라 내 마음 흐르는
물리학의 법칙엔 예외가 없다
먹고 마시는 몸의 기계적 활동은 건망증의 뇌가 지시하기 전
내장들이 먼저 아우성 쳤기 때문이리라
주기적인 사랑에 길들여지고
빡빡한 일정표가 나의 삶을 제 맘대로 살고
장기들은 때마다 지급되는 양분에 군말이 없다
날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으며 중독되는 생각들
부활과 윤회의 소식이 또 다른 반복일 뿐,
새 것이 되지 못한 지 오래다
쏟아진 우유가 다시 컵에 담기지 않는
고뇌하는 중년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화살에
집 나간 나의 언어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태양이 뜨듯
사랑한다는 메시지의 처절한 진동
집요한 울림이 아침마다 그녀 몸에 녹슨 못을 박는다
- 김기덕,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 전문
이 시는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일상적 삶의 반복을 다채로운 묘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상적 삶이란 항상 새롭고 신선한 세계와 만나 가슴 벅찬 설렘과 희열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삶의 주체자의 의식과 행동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일상은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상투적인 것이어서 권태와 환멸을 자아낸다. 우리의 삶은 규격과 반복의 일상에 길들여져 타성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노출하기 쉽다. 이 시의 제목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는 주어 “사랑한다는 메시지”와 서술어 “낡아 보인다”로 구성되어 있다. 주어 “사랑한다는 메시지”는 원래 항상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낡아 보인다.” 이는 듣는 이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선하고 자극적이어야 할 사랑의 메시지가 낡아서 더 이상 자극과 충격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권태와 환멸을 제공하는 현실. 이 비극적인 현실을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자.
이 시의 첫 행에서 화자는 자신의 언어가 “칼”이기를 바란다. 예컨대 화자는 자신의 언어가 칼처럼 선명하고 자극적이고 명확하기를 바란다. 언어는 의식을 발현하기 위한 도구이다. 따라서 화자 자신의 언어 혹은 의식이 칼처럼 명징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의 언어/의식은 “녹슬어” 있다. 그것도 “대장간의 칼”로 무미건조하게 상투화되어가고 있다. 말하자면 언어/의식이 태어나자마자 활용되지도 못하고 상실되고 만 것이다. 이 시구는 언어와 의식의 원초적 불구성을 드러낸다.
화자는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일상의 자아는 세계의 변화에 대한 근원적 질문 같은 것에 무관심하다. 예컨대 세계의 변화를 주동하는 요소인 시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의 이러한 관성적이며 무의식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또한 화자는 권태를 유발하는 요인이 자아와 더불어 세계에 있음을 토로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시 모두 예측 가능한 “짜여진 공식”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출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세상사는 “그녀의 달거리와 한통속”이다. 이는 ‘달거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어서, 화자가 인식하는 세상사는 예측 가능한 도식성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화자는 이처럼 무반성적, 무의식적, 도식적 삶의 반복에 대해 회의와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은 지구의 자전과 자아의 의식 사이의 인과관계가 존재하느냐의 여부이다. 지구가 23.5도로 기울어진 채 자전하는 운동으로 인해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또한 화자 자신의 메시지가 물처럼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은 논어에서 말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상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화자 자신의 행동이나 의식이 자연의 천체 운동과 어떤 긴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한 것이다. 이는 독립적인 자아 존재가 사실은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 보이지 않는 관계로 서로 엮어 있다는 존재의 대연쇄에 대한 궁금증이다.
이러한 성찰 이후에 화자는 자연의 현상과 자신의 일상을 “물리학의 법칙”으로 은유한다. 구름은 바람을 따라 운동하고, 자아는 그녀를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현상은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중력의 법칙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예컨대 바람과 구름 사이의 인과 관계와 그녀와 자신 사이의 인과 관계는 물리학의 법칙처럼 정해진 도식에 따라 운명처럼 진행된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해진 도식에 따라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운명론적인 생각이다.
화자는 심지어 우리의 육체 활동도 “기계적”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한다. 즉 우리의 음식 섭취 행위도 신체 기관들의 기계적, 도식적, 상투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나아가 화자 자신의 피동적, 수동적, 타성적, 반복적 삶에 대한 자각적 성찰이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화자는 사랑도 “주기적”으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에 “길들여지는” 피동적 행위로 인식한다. 또한 자신의 일상적 삶도 자의적이거나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이며 수동적인 상태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한다. 심지어 육체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공급되는 음식물에 의해 사육되는 것으로 인지된다. 화자의 모든 삶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이고 피동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화자의 생각/인식/정서 역시 “신문, 뉴스”의 타율적 주입에 따라 “중독”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 생각 공급자의 조종에 따라 교묘하게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활과 윤회의 소식” 역시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반복”으로 전락한다. 이 역시 상투적이고 낡은 것일 뿐이다. 일회적으로 명멸하는 세상사는 더 이상 수정되거나 새로운 것으로 갱신할 수 없다. 시간은 가혹한 것이다. 시간은 환원과 수정을 용인하지 않는다. 시간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낡고 닳아지게 만들어 결국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언어들”/생각들/인식들은 귀가하지 못한 채 방황을 하며 떠돌게 된다.
화자의 삶 혹은 우리의 인생은 “아침이면 어김없이 태양이 뜨듯” 도식에 따라 반복적으로 운행하는 상투적인 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사랑한다는 메시지의 처절한 진동”도 상대를 녹슬게 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우리의 사랑은 원래 자신의 전 존재를 투기하여 애정을 주는 것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주체적이고 신선하고 생동적이어서 역설적으로 “처절”할 정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진정성과 치열성은 오히려 “그녀”를 낡고 닳아지도록 추동하는 “못”일 따름이다.
이 시는 우리의 삶을 타성적, 피동적, 수동적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시각은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타율적 존재로서의 삶의 도식성은 니힐리즘을 유발한다. 인간은 시간의 절대성 앞에서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삶을 영위하며 낡고 닳아지다가 결국은 무상하게 죽음에 이른다는 이런 인식은 허무의 정서를 자아낸다. 심지어 치열하고 진정한 사랑조차 상대를 녹슬게 하는 “못”이라는 은유는 인생이 무상함을 더욱 고취시킨다. 이 시는 허무한 인생을 집요하고 처절하게 그러나 매우 감각적으로 시니컬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인간의 마음은 참말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인문학의 영원한 탐구 주제가 된다. 인문학의 학문 분야인 문학, 철학, 역사학, 언어학 등 모든 부문에서 인간의 마음은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특히 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형상화하고, 인간의 마음을 위무하는데 힘써온 예술 장르이다. 시는 정서와 서정을 환기하기 위하여 다양한 작시법을 활용한다. 여기서 서정 혹은 정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위기를 말한다. 시인은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한다. 즉 희로애락애오욕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표상하기 위하여 심사숙고한다. 시는 마음의 교감을 통하여 공감에 이르기를 꿈꾼다. 시를 통해 마음의 진정성을 소통하는 것은 영혼의 교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네 마음을 그려 전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긴 세월을 함께 해도
때로 네 마음 알 수 없어 언성이 오갔던 일
전시회를 둘러보며
저 때는 맑고 뽀송하여 따뜻한,
어느 때는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
함께 웃었던 날은 구름 위에 앉은 듯 평화로웠고
어느 날은 습하고 퀴퀴한
또 어떤 날은 어릴 적 친구들과 가재를 잡았구나 하며
마음 꺼내 널은 너에게
네 웃음 닮은
꽃 한 다발 내려놓으며
표현하지 않았던 내 고마움도 걸어놓을 수 있게
- 박강남, 「마음 전시회」 전문
이 시는 화자 “나”와 상대방 “너”의 마음의 교감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은 그 동안 서로 마음을 소통하며 살아 왔지만 상대의 마음을 읽고 해독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마음 읽기의 곤란함은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회를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까지 나아간다. “마음”은 형체가 없는 추상이어서 서로 교감하는 데에 일정한 장애를 일으킨다. 특히 화자 “나”는 상대방 “너”의 마음을 읽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해결책으로 “네 마음”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 전시회를 갖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이는 나와 너의 마음 소통을 객관적으로 공인받고 싶은 욕망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오면서 겪은 불통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여 서로 다투었던 일화, 서로 교감과 소통이 원활하여 “맑고 뽀송하고 따뜻한” 상태의 마음, 서로 상대의 마음을 잘못 읽고 이해하지 못하여 “차갑게 얼어붙은” 상태의 마음 등이다. 그리고 소통이 잘 되어 공감이 잘 되던 날의 마음은 “평화” 상태였고, 역으로 불통이 되어 공감을 이루지 못했던 날은 “습하고 퀴퀴한” 불화의 상태였음을 제시한다.
3, 4연에서는 화자에게 상대가 동심에 젖어 과거의 추억을 “꺼내 널은” 마음을 통해 화평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대의 허심탄회한 마음 보여주기에 대해 화자 역시 화답한다. 그것은 상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바치는 “꽃 한 다발”로 드러난다. 이 시는 결국 부부 혹은 동료 사이에 불투명하고 불가사의한 마음을 구체화시켜 상호 소통 교감함으로써 행복하고 평화로운 관계가 성립된다는 메시지를 표상한다. 이 시는 인간들 사이의 마음 전달하기가 어려운 이 시대 현실에 간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효과가 있다.
아직은 찬 3월의 빗속에서 그대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에선 설설 끓는 체온을 식히느라 허옇게 김이 올랐다 어데 골목 모퉁이에선가 밤마실 나간 어미를 찾는 아기고양이가 울었다 밑장빼기 게임에 실패한 나무 블록처럼 무너져 내린 시절들을 수습하려 그대는 무릎을 꺾었을까 나는 그저 그간 참고 있던 말들을 토해 냈을 뿐인데 함박 피었던 목련꽃 모가지 툭툭 떨어져나갔다 그대 어깨가 기어이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오래도록 일어서지 못할 그 곁에 그대 그림자가 혼자 하얗게 눈물을 훔치고 있었으니
- 배선옥, 「나는 치자꽃 손수건을 준비해드리리」 전문
이 시는 제목이 환기하는 바와 같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화자 “나”와 상대인 “그대”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마음 주고받기가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 상황을 맞고 있다. 즉 사랑하는 “그대”와 사랑 받는 “나”의 불화 관계가 함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일종의 설화처럼 선명하고 감각적인 사랑과 이별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즉 서로 사랑하는 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서정적인 마음의 불협화음이 몽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텍스트에 밝혀 있지 않지만, “그대”는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그대의 “고개를 숙였다”는 행위를 통해 압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의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화자인 “나”에게 용서를 구하러 왔다. 비를 맞으며 용서를 구하는 “그대”에게선 사랑의 열정과 뉘우침의 진정성으로 인하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는 “허옇게 김이 올랐다”는 선명한 시각적 장면 제시로 인해 함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시적 긴장감은 어미를 찾는 “아기고양이의 울음소리”라는 청각적 효과로 인하여 그 간절함과 비극적 정조의 분위기가 더욱 강화된다.
특히 “그대”는 “나”와의 관계를 행복했던 시절의 원상으로 복구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하여 애원한다. 이 구절 또한 “밑장빼기 게임의 실패”라는 구체적인 상황 제시로 인해 그대가 저지른 잘못이 감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아가 이 ‘밑장빼기 게임’은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의 과정을 암시하는 기능까지도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그대의 간절하고 진정성 있는 자세는 “무릎을 꺾었을까”라는 설의법 종지를 통해 어렴풋한 몽환적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에 대응하여 화자는 “그간 참고 있는 말들”을 토로한다. 이는 “그대”가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에 대한 화자의 참았던 마음의 노출이다. 또한 화자의 이 마음의 표명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관계는 비극적 상황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이는 “함박 피었던 목련꽃 모가지 툭툭 떨어져나갔다”는 비극적 풍경을 통해 무너져 내린 둘 사이의 불화 관계를 환기시키는 훌륭한 서정적 묘사로 나타난다. 이러한 화자의 반응에 “그대”는 좌절과 절망의 자세로 “고꾸라질” 뿐이다. 그 좌절과 절망의 장면은 그대가 “혼자 하얗게 눈물을 훔치고” 있다는 실연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런데 이 시의 본문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으니”라는 미완의 문장으로 마친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이 본문의 미완결 문장을 받아 완성하는 형식을 취한다. 예컨대 “그대가 나의 이별 통보로 좌절하여 눈물을 훔치고 있었으니” 본문 마지막 문장 다음에 시 제목 “나는 치자꽃 손수건을 준비해드리리”로 이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자와 그대 사이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함축적인 장면 제시로 인해 구조적인 스토리를 형성한다. 이 작품의 근저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이별하는 마음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과 자극이 시 속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이끌고 가는 동인이다. 이 시는 시속 인물인 화자 나와 상대인 그대의 마음과 정서를 간접적인 풍경이나 장면 제시를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작시법은 서사 양식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인데, 서정 양식에서 활용함으로써 불가사의한 사랑하는 마음의 구체성을 훌륭하게 표상하고 있다.
현대시가 다루는 주요 소재인 시간의 불가항력과 마음의 불가사의를 초점으로 하여 시를 살펴보았다. 시인들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의 절대성에 대해 좌절과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정면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일상의 반복성과 도식성으로 인한 권태와 환멸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응전의 태도를 갖는다. 또한 시간의 강압에 의해 낡고 닳아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운명을 직시하고 있다. 한편 시인들은 불가사의한 인간의 마음을 집요하게 형상화한다. 그것은 일찍이 시의 감정과 정서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해독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결을 다루는 시인들은 그 불가사의한 마음의 정체를 찾아 오늘도 여전히 언어의 자갈밭을 헤매고 있다. 기꺼이, 자청하여, 피 흘리면서, 외롭고, 처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