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중미사 후 방역활동입니다.
사목평의회의 후 방역활동입니다.
사목평의회의 모습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선포에 따른 준비사항, 성탄준비, 행사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신부님께서 신자모두가 성탄의 기쁨 잘 누릴수 있도록 힘들더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구역 토요일 청소 후 모습입니다. 성전바닥, 의자, 성전마당, 화장실 청소, 주보 삽지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안젤로, 안젤라 부부입니다.
봉사하는 모ㅡ습 아름답네요
화요일 방역활동후 모습입니다.
내가족처럼 생각하는 방역활동......
헌금 봉사합니다.
목요일 평일미사 모습입니다.
레지오에서 지하소성전 청소를 해주었습니다.
전례봉사 모습입니다.
일요일 아침 9시 교리모습입니다.
구자삼 프란치스코, 최동화 프란치스카 부부입니다.
임성한 바오로, 김은숙 막달레나 부부입니다.
이경희 모니카 자매님, 소중한 사진 감사합니다.
교중미사 전 방역활동모습입니다.
교중미사 제2독서 입니다.
교중미사 해설입니다.
교중미사 모습입니다.
교중미사 전 방역활동을 기도를 하였습니다.
미사 후 두분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요일 미사전 방역활동 모습입니다.
교중미사 전 방역활동모습입니다.
주차봉사 모습입니다.
화요일 미사전 방역활동 모습입니다.
<강론말씀>
찬미예수님!
오늘 미사를 시작하면서 해설자가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오늘은 대림1주, 2021년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고 또한 대희년이 선포된 은혜로운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옆에 모신 우리 성당의 주보 성인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사제, 한국 첫 순교 사제 안드레아 사제를 주보로 모신 우리 성당으로 보면, 더욱 영광된 한 해입니다. 오늘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가톨릭 교회가 올 한 해를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희년 개막 미사를 통해서 이렇게 신부님의 생애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우리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고 대희년을 시작한다면 더욱 은혜로운 한 해가 되지 싶습니다.
자, 여러분들! 이렇게 옆에 모셨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00년 전, 1821년 8월 21에 태어나셨습니다. 신부님의 9대 선조께서는 충청도 병마 절제사(忠淸道兵馬節制使)를 지내신 분이시고 증조부께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지내셨으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증조부께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박해를 겪으면서 이 집안 세속적으로는 가세가 기울게 되고 절박한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신부님께서 당진에서 태어나신 것도 다음과 같은 이유였겠습니다만, 그 당시 모든 신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오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서 삶의 터전까지 다 포기한채 모질고도 힘든 삶을 기도로 꿋꿋이 이겨 나가면서 신앙촌을 형성하며 생활하게 됩니다. 나중에 파리 외방 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로부터 파견되어 목숨걸고 들어 오신, (박해기간 한국 땅에서 프랑스 사제들이 이렇게 사목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모방 신부님께서는 사목 활동 하시면서 신자들과 함께 방인 사제의 필요성을 통감하시게 됩니다. 그 시절, 프랑스인으로서 사목을 할려니 얼마나 많은 한계를 느꼈을까요? 우리가 하는 말을 짧은 시간 안에 배운다 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말의 뉘앙스라는 것, 말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지요. 문화적인 이질감과 서양인으로서 자유롭게 사목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것도 큰 장애물이었지요. 일례로 저도 신학교 시절,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평생을 안동 교구에서 사목 활동하신 프랑스 신부님의 강론도 알아 듣기 힘들었으니.. 한국 말을 하시긴 하시는데 대충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만.. 교의 신학등을 가르치는데 너무 답답해서.. 그 강의 시간이 너무 싫기도 하고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 땅에서 사목을 하셨어도 언어를 완벽히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지요. 그래서 한국 땅에는 방인 사제가, 한국인이 사제가 되어 사목을 해야 하겠다.. 그래서 교회에 방인사제 양성을 위해서 교인의 자제들 가운데 재목이 될 만한 인재를 뽑습니다. 세 아이들을 뽑지요. 다들 충청남도 출신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충청남도 당진 출신(솔뫼)이고 그 다음에 최방제 프란치스코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며, 최양업(토마)신부님도 충청남도 청양 출신입니다. 세 명의 신심깊고 총명한 친구들을 뽑아서 외국어를 가르치고 (어느정도 유학 생활의 기본을 갖추기 위해 프랑스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쳐) 유학 준비를 합니다. 신부님은 15살 나이에 유학을 떠나신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서양 문물, 서양 사상과 신앙을 공부하러 유학하러 갔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지금도 유학을 가면 힘이 드는데, 그것도 열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유학 길을 나선 것입니다. 1836년 걸어서 국경을 넘어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 해서 마카오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정이 6개월~ 7개월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게 마카오에 갔는데, 중국에 여러 신학교가 있었지만 마카오의 신학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중국 대륙과 아시아 전교를 위한 전초 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기초 외국어를 다시 공부하고 그 당시는 강의를 라틴어로 했으니, 공부하기가 그들에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기본적인 언어는 프랑스말로 신학을 공부했는데, 4년만에 철학공부를 마칩니다. 신학교는 지금도 들어가면 철학공부를 마치고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철학의 기본 바탕이 없으면 그 위에 신학을 세울 수가 없지요. 그래서 철학 공부를 마치고 신학과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에서 조선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에 접근 할려고 하는 중에, 한국어를 불어로 통역 할 줄 아는 통역관을 찾고 있었는데, 신학교의 김대건 신부님이 선택되어 프랑스 함대의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침 그 시기에 조선 교회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영국의 남경조약이 체결되는 바람에, 프랑스 함대가 급히 중국으로 되돌아 가면서 조선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다시 중국,상해에서 요동 지역과 길림성에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장춘에서 북서쪽 70리에 있는 조그만 도시)에 머물며 신학 공부를 이어 나가십니다. 신부님은 그곳에서 한국 땅으로 들어 올려고 많은 시도를 병행하시지요.
예전 마카오에서 공부하실 때에도 민란이 일어나 필리핀 마닐라로 두 차례나 피난을 하며 공부를 하다 마카오 신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어려움도 겪으셨지요.. 함께 유학을 하던 최방제(프란치스코)는 열병으로 죽기도 했습니다(1838년).. 1842년 부터 신부님은 길림성 장춘에서, 후에 조선 땅에서 함께 사목 활동을 할 조선의 3대교구장이 되신 페레올 주교님과 함께 신학공부와 선교사들을 위한 밀입국 루트를 만드는데 집중을 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의주를 통해서 조선 땅에 들어가는 시도를 세 차례나 감행 하다가 실패를 하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이후, 상해에 계신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해상 루트를 통해 조선으로 가시기 위해 신부님께서는 신자 11명과 생전 처음 배를 타고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고, 상해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한 달여의 죽음의 항해..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끝에 상해에 도착하지요..
몸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1845년 8월 17일 사제서품(상해, 금가항 金家港)을 받으시게 됩니다. 서품을 받으시자마자 페레올 주교님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조선 땅으로 오게 됩니다. 밀입국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지요. 관헌에 잡히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에 그래도 비교적 안전한 해상 루트를 이용합니다. 그러다가 배가 좌초되어 제주도에 잠시 머물게도 됩니다. 그 이후, 전라도 강진 나바위에 당도하시고 조선 땅에서 신자들을 만나 짧은 사목 활동(두 달여)을 시작 하십니다. 신부님 서품받고 실제 사목한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동료 최 양업 (토마)신부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을 입국시키기 위해 백령도 지역에 중국 어선을 통해 해상지도와 입국 자료를 넘기고 돌아오다가 관헌들에게 잡혀서 형을 살게 됩니다. 형을 살면서 3개월 동안 40여 차례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일찍이 조선 천주 교회를 위하여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수학과 활동을 통해 얻은 김대건 신부의 신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와 서양어(라틴어, 불어)는 물론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김 신부는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공부하였고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구사하였지요. 조정에서도 신부님을 회유할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지요. 마침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학 죄인(邪學罪人) 김대건을 효수(梟首)토록 하라"는 헌종(헌종12년)의 명이 내려옵니다. 한강의 모래터(새남터), 망나니의 칼에 단번에 목이 날아가면 덜 고통스러웠을텐데.. 8번 만에 목이 떨어졌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옥중 서간을 남기게 됩니다.
페레올 주교님과 중국의 신부님들께 조선 교회를 돌보아 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고문으로 살점이 터지고..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조선 신자들에게 또한 회유문을 남기시고 순교의 칼 날을 받으십니다. 회유문 내용 중에, 창조주께서 계시고 창조주의 뜻에 따라 세상 만물이 조화롭게 살아가는데, 사람만이 창조주의 섭리를 찾고 깨닫지 못하고 살면 "아니 남만 못함"을 강조합니다. 신부님은 남기신 회유문에 '우리네 인생살이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허망하고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조주의 뜻을 찾고 그 은혜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에도 배주배은하면 되겠는냐 다시 말해서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의 은혜에 배반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느냐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살 바에야 아니 태어남만 못하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조선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합니다.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 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領洗)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마지막 서한에서)
열 다섯 살 나이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순교하신 나이 25살의 나이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지금 저의 나이를 보면, 그분의 삶에 두 곱절 한 것 보다 많고.. 또 그분의 나이에 3을 곱한 것보다 더 많이 사신 분들이 여기 앉아 계십니다. 사람이 오래 산다고 값어치 있는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요. 양(量)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본질은 아닙니다. 질(質)적인 면으로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삶에 견주어 보면, 우리의 오랜 삶의 시간들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순수하게 또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의미있게 아름다운 삶을 사셨던, 한국의 첫 사제는 우리 삶의 등불, 모범이 되신 것 입니다. 최후 증언을 하라는 형리에게 이렇게 당당히 이야기 합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순교 직전 최후 증언)
목이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국사범(사학죄인,邪學罪人) 으로, 나라에 중대한 흉악범으로 낙인이 찍혀 한강의 모래톱에 파묻히시지요. 그리고 관헌들이 그 형장을 삼엄하게 지키고.. 아무도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큰 죄인이기에 헌종이 그런 지시를 내렸지만, 신부님의 몇 개월 안 되는 사목 활동을 지켜 보고 자신도 사제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민식(원선시오)은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새남터 현장으로 달려 갑니다. 그리고 모래톱에 뭍힌 시신을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몰래 들어가 모래톱을 뒤지고 뒤져서 신부님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머리를 고운 명주로 싸서 가슴에 품고 몸체는 짊어지고 야반도주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묵주기도를 바치며 목숨을 걸고 무사히 옮길 수 있게 해라고 성모님께 도움을 구하며, 현재 용인 땅까지 운구를 합니다. 낮에는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밤에 움직였지요. 그곳까지 가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렇게 가다가 해가 떠오르자, 콩 밭에 시신을 숨겨놓고 있는데, 농사 지으러 농민들이 밭으로 나오는 바람에 들킬 수 있는 큰 위험에 처해지지만, 갑자기 마른 하늘에 큰 비가 쏟아졌다고 증언을 하지요. 비가 오니 농부들이 집으로 되돌아 가는 바람에 무사히 용인 땅까지 옮길 수 있었다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은혜로운 일들이 일어났고 그 이후, 신부님의 유해는 여러 성지에 모셔지게 되고, 그 덕분에 우리는 신부님과 순교자들의 삶을 듣고 배우며 살게 되었습니다. 1925년 비오 11세께서 시복식을 하였고, -제가 신학교 2학년때-(1984년에)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셨습니다. 신앙의 최고 모범을 살았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성식.. 성인의 깊은 영성에 대한 엄격한 검증과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가 녹아든 삶의 증거들이 없다면 가톨릭 교회는 겵코 성인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면, 1836년 유학길에 오르고 난 후,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3년 후인 1839년(기해박해)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부제때 조선 땅에 잠시 들어 와 머무르셨을 때,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으셨겠습니까마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처참했던 삶, 얼마나 궁금하고 걱정되셨겠습니까마는 마음이 약해질까봐..주어진 사목적 사명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상태이니 어머님께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고 신자들께 당부하셨지요. 그분의 철저했던 사명 의식을 느낄 수 있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한 목숨 희생하신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대희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해야 겠습니다. 더군다나 대희년을 맞이하여 우리 성당은 김대건 안드레아 주보 성인으로 모시는 성당이니 교구의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하러 올 것인데.. 대사 받는 조건으로 기도하러 저희 성당을 많은 분들이 찾겠지만, 저희 성당에 성 김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영성이 없고, 저희 성당에 그렇게 사신 신부님의 삶의 향기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부님의 삶을 저희가 온전히 대신 할 순 없지만, 신앙 안에서 그분과 운명을 함께 나누고 삶을 함께 살아 갈 때, 이 성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주보로 모신 영예로운 성당이 될 것 입니다. 솔직히 내어 놓을 것 없고..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 이런 준비를 소홀히 한 점을 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모두 열심히 신앙 생활에 더욱 매진하고 코로나19로 인해 힘들게 사는 모든 이에게 우리가 삶의 진정한 희망과 기쁨을 나누게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마음 모아 기도하고 봉사하도록 합시다. 또한 이 대희년 개막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가 흔들림 없는 순교 신앙을 배워 튼실한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하도록 합시다. 아멘!
첫댓글 이모 저모를 편집하여 올리시랴 수고 많았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한 목숨 희생하신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대희년을 맞아 주어진 십자가를 섭리로 받아들이며 주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를 이웃과 기쁘게 누리는 희년이되길 바래봅니다
신부님 탄생 200주년 대희년을 맞아
애덕을 실천하고
주님께 영적으로 의지하는기도생활을 더 열심히 하도록 다짐해 봅니다.
본당 주보성인이시며 탄생200주년을 기념하는 대희년선포에 성인의 발자취를 일깨워주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 부족한 나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하느님뜻에 맞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