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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자리가
아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순간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흐를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복수에 이어진 호스를 지팡이에 달고 집안을 오갈 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변이 나오지 않아 화장실의 변기에 앉아 애쓰다 못해 울부짖을 때가 그립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몸이 약해져 응급실을 거쳐 입원 4일 만에 아내는 저 멀리 갔습니다.
2022년 년 초부터 아내와 나는 도시락을 싸고 배낭을 메고 서울 둘레길을 시작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부부는 김포 삽니다. 나는 뱀띠 아내는 양띠입니다.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전망이 괜찮은 아파트지만 대출금은 아들이 냅니다.
내 수입은 노령연금과 건물을 관리하며 월 100만 원 정도였습니다.
아내의 수입은 는 국민연금 노령연금 합하여 650,000원 정도입니다.
아내도 일했으나 2021년 말로 그만두게 하였고 저도 일을 확 줄였습니다.
제 나이 70부터 제2의 삶을 살기로 하고 우선 둘레길 순례에 나섰습니다.
매주 화, 목, 토요일은 집에서 점심을 준비해 배낭에 넣고 서울 둘레길에 나섰습니다.
2019년 가을에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제가 참석을 했었습니다.
이어서 강화나들길을 카페인들과 걷는 도중에 코로나 대유행에 홀로 걸어야 했습니다.
서울 및 경기 일원의 수많은 둘레길을 홀로 때로는 몇 명이 2년여를 걸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서울 둘레길 160km를 완주하고 이어 한양 도성길을 완주하였습니다.
강화나들길 20개 코스 300km를 완주했습니다. 이어 경기 평화누리길을 걸었습니다.
김포의 대명항에서 철원 접경까지 걷자 이어서 경기도 외곽을 일주하는 경기둘레길
860km 걷기에 나섰습니다. 60대 말인 우리 부부 50대 말 부부 40대 말 부부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었습니다.
승용차 두 대로 시작점과 종점에 차를 두고 매주 토요일에 세 부부팀의 리더로
함께 걸었습니다. 화요일 목요일은 별도로 아내와 단둘이 경기 옛길인 삼남길 의주길
영남길 평해길을 걸었습니다. 목요일은 간혹 다른 카페인들과 영흥길 등을 걸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은 걸었습니다. 아내도 좋아했고 즐거워했습니다. 평생 일만
한 아내가 둘이 걸을 때도 즐거워했지만 팀의 일원으로 걷는 것도 매우 좋아했고
즐거워했습니다. 진정 옆에서 보기에도 아내는 즐거워했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경기도의 파주, 연천을 지나
포천, 가평을 거쳐 청평지역에 다다르자 아내가 소화불량을 얘기했고 속이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끝내 호명산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상천역에 홀로 남았고 아내의 둘레길
답사는 거기가 끝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내는 즐거워했고 어떤 증상도 없었습니다.
2022년 7월 25일 날 양천구에 소재한 홍익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자마자 바로 폐에 호스를 꽂고 음압격리치료실로 옮겨져 격리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폐에 물이 차니 우선 법정전염병이라 격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5일간을 입원하여 치료와 검사를 받은 결과 원발성 복막암 말기로 판정을
받았고 큰 병원을 빨리 가라 했습니다. 8월 3일 세브란스 암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오전에 풍채 좋은 김 00 교수가 왔다가 오후에 단아한 조00 교수가 왔고 이어
하루 만에 키가 좀 큰 김00 교수가 담당이 되었습니다. 조00 교수의 졸개 의사가
말하기를 치료를 아니 하면 6개월 항암 치료를 받으면 20개월 정도 산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김00 교수가 나를 탁자 맞은편에 앉히고 딸과 두 아들을 상대로 비대면으로
휴대전화 티빙을 연결했고 원발성 복막암으로 이미 여러 곳에 전이가 된 말기 암으로
최선의 항암 치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2021년 8월 첫 주부터 아내의 투병 생활 아니 그들의 계획된 항암 치료의 시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아내는 20개월도 못살고 세브란스 암병원에
입원한 지 딱 17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1차 항암 2차 항암 3차로 한 알에
7만 원 하는 약을 하루 두 알씩 먹는 신약에 의한 항암 (약값의 1/2은 한 달 후 결핵 암 협회에서 환급)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23년 11월 5일에 4차 항암으로 항암 주사를 맞았고
12월 4일에 4차 2회차를 맞았고 2024년 1월 3일에 3회차 항암 주사를 맞을 예정이었으나
끝내 그 김00 교수를 만나지 못하고 2024년 1월 1일에 아내는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12월 4일 병원에 갈 적에 큰아들이 차를 운전하고 가겠다고 했고 천안에 사는 막내와
약속했고 병원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 아들 녀석들이 아들 노릇을 하는구나 하고
교수한테 진료를 받을 때 아내와 아들 둘을 함께 들여보냈습니다. 아내가 나오고
한참 후에 두 아들이 진료실에서 나왔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나 같은 경우는 할 말도
없었고 그저 감사하다고 몸만 숙이고 나오곤 했습니다. 아들한테 왜 이리 늦었냐고
하니 물으니 그간 경과를 설명하고 이제는 항암도 할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게 어떻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동안은 무엇을 했다는 말인지 그렇다고 내가 따로 할 것은
없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어찌 되었든 항암 주사는 계속 맞아야 한다는 말만 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12월 20일경으로 생각합니다. 아내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습니다. 거의 매일
5,000보 이상을 걸었고 가리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세브란스의 처방 약은 대부분이
소화계통의 약이었고 신경계통의 약도 처방했으나 아내는 그리 심하지 않아 먹지를
않았습니다. 소고기를 구워주니 예전처럼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모두
토해냈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주사를 맞은 후 영양
상담하고 가라고 한 게 떠올랐습니다. 케어 음료만 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아내가 배변하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그랬었고 토해서 불편함을 해소했지만,
이번은 좀 심한듯했고 아내도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몸의 근력이 확 떨어졌습니다. 주방에서 그릇을 떨어드리고 숟가락도 제대로 쥐지를
못했습니다. 걸을 힘조차 없었고 손이 떨렸고 작은 요구르트를 받히지 못했고 떠먹는
것도 조절하지 못하고 헛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병원을 가야 했습니다. 세브란스에
전화를 걸어 예약된 날짜를 당기어 달라고 했으나 안된다고 했고 이틀 후 다시 거니
응급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이 종무식을 해서 쉰다고 아들 차를 타고 세브란스
응급실로 아침 일찍 7시에 왔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들어가며 복부에 찬
물을 빼면 괜찮아질 거야 하며 다독였고 오자마자 검사를 하더니 소변 호스를 끼고
코에 호스를 끼웠습니다.
응급실에서 온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고 저녁 7시경에 15병동에 입원이 되었습니다.
이미 아내는 기진맥진하여 눈을 감은 채 휠체어가 아닌 침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산소마스크를 썼고 혈압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도
괜찮아질 거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아내는 몹시 애를 쓰곤 했지만 설마 그렇게
쉽게 가리라곤 생각을 안 했습니다. 30일 저녁에 아내의 침상이 관찰실이라는
비어있는 일인실로 옮겨졌고 아침이면 다시 입원실로 간다기에 큰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의사가 면회할 사람 면회시키라고 했을 때도 나는 낌새를 못 차리고
김포 집에 가 있는 큰아들만 오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이 오니 다른 자식은 안 오냐고
말하기에 부리나케 막내아들과 딸을 불렀고 큰아들과 나는 당직 의사와 협의하여
연명치료를 안 한다는 거부서를 썼습니다.
큰아들과 천안 사는 막내아들과 며느리 인천 사는 큰딸은 아내를 흔들어 깨우며 손짓
몸짓으로 대화를 했고 딸과 아들들은 되돌아갔고 나는 아내 곁에서 잤습니다.
31일 날 아침에 다시 입원실로 옮겨졌고 아내는 링거와 진통제를 계속 맞았고
아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듣기는 하는 것 같았고 눈은 감은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팽팽하게 부은 배의 움직임만 숨결로 오르락내리락했고 얼굴을 옆으로 누운 채 누런
토사물을 조금씩 토하는 게 아니라 흘리듯 토해냈습니다. 옷이 더러워졌고 침대가
더러워져 방습포로 침대보를 가렸습니다.
저녁 무렵에 간호사들이 바삐 움직이더니 혈압이 떨어진다고 조처해야 한다고 했으나
나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사가 왔고 나는 거부를 했습니다. 의사는 환자로부터
직접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아내를 흔들어 깨우더니 복도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는 머리를 흔들고 손사래를 치며 확실히 거부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이 나쁜 놈! 전날 다른 의사와 함께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서류에
아들과 같이 서명했는데 이 무슨 추태인지 정말 나쁜 놈입니다.
내가 괜스레 죄인인 양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나와 아내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내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내년에는 자신이 이 세상에 없다고
올해 아들들의 생일을 일일이 챙겼고 며느리와 사위의 생일날도 기억하며 챙겼습니다.
친정 부모님이 지난가을에 결혼 70주년을 맞이하였고 큰사위인 나의 도움으로 직계
4대 34명을 장인어른 생일날 집으로 모이게 해서 거실에서 기념 촬영을 했고
장모님을 위해 경로당 친구들을 고깃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12월 13일 남편인 나의 생일에 정성껏 차려 겸상을 하며 자기 죽은 뒤에 애들을
잘 챙기고 딸과 외손자 3명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준비를 하고 미역국을 끓여도 아내가 죽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024년 1월 1일이 지나고 있었고 며칠을 가지고 간 컵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때웠고
정초라 간만에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 앞까지 갔다가 왠지 아내의 곁을
비우는 게 께름칙해 되돌아와서 컵라면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먹는데 간호사들이
침대보를 갈고 옷을 새로이 갈아입혔습니다. 이내 아내를 엊그제의 관찰실로 침상을
옮겼고 의사가 와서 살펴본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왔고 목둘레의 경동맥을 짚어보더니
나를 바라보며 아내의 이름을 대며 20시 1분 부로 사망했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병원과는 거기가 끝입니다. 자식들한테 전화했고 연고지인 양천구의 장례식장으로
전화를 걸어 장례식장을 예약했습니다.
곧 운구차를 보낸다고 했으나 운구차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운구차 운전사와 함께
아내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 기사는 아내를 장례식장으로 운구를 했고 나는 남아서
내짐을 챙기고 병원과 결산을 하고 사망진단서 10부를 끊고 챙겨야 했습니다.
운구비는 10만 원이었고 나는 뒤따라 가며 진단서를 휴대전화로 찍어 장례식장으로
보냈습니다. 김포가 주소지라 김포는 화장장이 없어 수도권 지역의 다른 관외 지역의
화장장을 빨리 예약해야 했기에 진단서가 필요했습니다. 3일 날은 화성지역에 오후
4시밖에 없어 결국 4일장으로 4일 날 12시로 예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를 더 살아 우리 나이로 칠십은 겨우 턱걸이를 했습니다.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진정 사랑했습니다. 문득문득 울컥울컥하고 잠시잠시 넋이
나가고 순간순간 다리가 풀리는 애통함 속에서 장례를 잘 마무리했고 92살 90살의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직접 딸의 산소를 찾아 슬픔을 달랬습니다.
화장한 후 오래전 준비되었던 산소에 유골함을 묻었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슬픔이 이렇게 큰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수시로 울컥쿨컥하여 홀로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기를 아래 눈두덩이 불룩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몇 번을 울컥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터이지만 그리 쉽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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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암과 싸우는 사람들 카페에 게시를 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