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는 현실의 안온한 삶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
자아의 존재와 실존에 대한 물음은 문학의 대표적인 주제이다. 삶의 일면과 양상을 형상화해서 인간이 걷는 삶의 의미를 찾고 존재 자체를 향한 물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소설의 기본적인 양식이다. 평론은 그 물음을 던지는 인물들에 내재한 의식과 심리를 추적한다.
예를 들어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를 두고 그가 타고난 감각을 통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포착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응전하며,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과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그렸다는 식의 서술은 글의 분량을 늘리고 추임새를 넣기 위해 필요할지언정 <남쪽 계단을 보라>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언급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작의 기본적인 양식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언급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는 세계와 ‘나’ 사이에 십 분의 시차가 생긴 주인공 나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맹목적인 이상향’을 꿈꾸는 현대인의 모습과 내면의 심리를 보여준다. 작품의 핵심은 나와 세계 사이에 생긴 십 분의 시차와 그 시차를 발견하고 불안해하는 나의 심리이다.
소설은 세 명의 등장인물이 이끈다. 나는 여성의류 회사에서 일한다. 밤을 새고 출근하는 길에 한 여자를 목격하면서 나의 시간과 세계와의 시차를 느끼고 불안에 빠진다. 곽우길은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의 불현듯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만났는데, 그는 낯선 장소와 예외적인 시간에 대한 경험을 나에게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의 불안은 증폭된다. 세희는 나의 약혼녀이다. 낯선 시간의 존재를 느끼고 불안해하는 나를 위로하며 현실에 머물도록 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내게는 두 가지 부조화의 감정이 놓여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과 “신상품 기획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작성한 보고서” 사이의 미묘한 부조화이다. 앞의 감정은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맹목적인 욕망이며 뒤의 감정은 현실에서 성공하려는 실질적인 욕망이다. 뒤의 욕망에 따라 나는 신상품 기획회의 보고서를 만드느라 밤을 새우고 출근하다가 단풍나무 길에서 한 여자를 목격한다. 그때 밤새워 만든 보고서를 집에 두고 온 것을 안 나는 집으로 다시 가서 보고서를 챙겨 나온다. 나는 십 분 전에 보았던 그 여자의 뒷모습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본다.
나는 회사까지 오는 동안 멈춰져 있던 십 분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세계’와 나 사이에 십 분의 시차가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는 출근길에 생긴 시차 때문에 회사에서 내내 허둥댄다. 나는 퇴근 무렵 고등학교 동창 곽우길의 연락을 받는다. 오랜만에 만난 곽우길은 자신이 아주 낯선 장소, 예외적인 시간을 경험하곤 한다고 이야기한다. 낯선 시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그를 따라 불안을 느낀다.
나는 곽우길과 헤어져 결혼을 약속한 ‘세희’에게 쫓기듯 전화를 걸고 그녀를 만나 나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세희’는 나에게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세희’는 나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에 맞춘다. ‘세희’의 집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새벽녘 다시 남쪽 계단 위에 하늘색 옷을 입고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설은 나의 기대 또는 불안감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서 열릴 신상품 기회회의 준비를 위해 나는 밤을 거의 새웠다. 기대 또는 불안감은 컴퓨터 앞에 높인 컬러사진을 거의 한 시간이나 들여다보다가 일어났다.
“그러다 불현듯 봄, 서른 살이라는 나이,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젊음과 쓸쓸한 추억, 돌연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 혹은 곧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대와 불안이라는 모순된 상황의 원인은 겉으로는 신상품 기획회의이다. 그러나 나는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기대의 불안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예기치 못했던 일은 기획회의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데서 일어날 수도 있다. ‘불현듯 봄’, ‘서른이라는 나이’, ‘고통스러웠던 젊음과 쓸쓸한 추억’,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 같은 경험들은 불안의 원인이다. 그것들은 과거에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으로 들어갔다. 인간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갈망하는 것, 충격적인 것, 경험한 것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이것은 꿈으로 또는 현실에서 기대 또는 불안으로 나타난다. 내가 경험했던 일들, 평소의 생각, 억압당한 본능과 욕구는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지금 나의 의식에게 반영된다. 개인의 무의식을 반영한 것이 개인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곧 꿈이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Freud). 따라서 경험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대감은 없다.
기대감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불안은 두 가지 상반된 욕망,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욕망과 현실에서 성공하려는 욕망 사이의 부조화에서 비롯된다. 나는 두 해 전에 서울을 떠나 전원으로 이사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또는 서울의 높은 집값 때문에 전원으로 간 게 아니라 일요일마저 서울에서 살기가 싫다는 좀 사치스러운 이유로 이사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라고 설명한다. 나는 잠실에 있는 회사로 출근한다. 자본주의를 놓을 수 없다. 이 부조화는 소설에서 드러나게 대비되지 않고 서로 다른 문장에서 나타난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과 “신상품 기획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작성한 보고서”가 그것들이다.
겉으로 그리고 안으로 일어나는 부조화 또는 모순은 내게 오늘 새벽 ‘불안장애’를 일으켰다. 두 가지 욕망 가운데 ‘불안장애’의 원인은 서울의 삶, 곧 직장생활이다. ‘불안장애’에는 ‘범불안장애’, ‘사회공포증’, ‘공황장애’, ‘공황발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분리 불안 장애’ 등이 있는데 내게 닥친 것은 ‘범불안장애’이다. 미국정신의학회가 펴낸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 4권에 따르면, 범불안장애의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안절부절 못하거나 긴장이 고조된 느낌’, ‘쉽게 피로해짐’, ‘정신집중의 어려움이나 멍한 상태’, ‘자극에 대한 과민성’, ‘근육 긴장감’, ‘수면장애’ 등 여섯 가지이다.
내게 범불안장애를 안긴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나로 하여금 밤을 새우게 만들었고 기대와 불안을 교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의 증세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이 정도 초보적인 범불안장애는 누구나 갖고 있다. 범불안장애 진단이 내려지려면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을 주고 여섯 달 이상 지속돼야 한다. 구조적으로 볼 때 범불안장애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놓인 부조화가 해결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프로이트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융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라깡의 것이다. 라깡은 프로이트를 계승하고 복원하며 한편으로는 변형시켰으므로 크게는 두 부류이다.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지금부터라도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에” 시달렸다. 내게는 지금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이 필요하다. 그런 은밀한 욕망과 함께 나는 지금 긴장이 고조돼 있으며, 멍한 상태이며 자극에 대해 과민해져 있다. 긴장이 고조돼 밤을 꼬박 새운 뒤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나는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섰다. 출근길, 나는 우연히 단풍나무 길에서 한 여자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남자인 내가 보기엔 문이 부시게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뒤에서 목격한 신비한 하늘색 여자의 뒷모습. 불면으로 침침해져 있던 머릿속이 깨끗이 밝아오며 나는 절로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삼십 미터쯤으로 좁혀졌을 때 나는 밤새 만든 회의보고서를 빠뜨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남쪽 계단을 보니 전철역 입구로 들어서는 하늘색 여자가 들어온다.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이쪽을 아득히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내가 그녀를 다시 본 것은 불과 십 분 후였다. 지각을 걱정하며 다시 집을 나서 전철역을 향하던 중, 나는 “영사기의 필름을 거꾸로” 돌려 같은 장면을 반복해 보듯, 그 여자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습으로 재차 목격한다.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와 전철역으로 가는데, 그녀는 아까처럼 전방 오십 미터 지점에서 하늘빛 옷자락을 흔들며 걸어간 것이다. 과민해져서 출근길에 허깨비의 여자를 보았다. 십 분 전에 보았던 그녀가 십 분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전철역에 이르기까지의 십 분이라는 시간이 멈추어진 셈이다. 나는 그 비현실적 경험을 착각으로 치부하지 못하고 통제 불가의 심리적 당혹감에 빠진다.
그래서 나는 회사까지 오는 동안 “완전히 멈춰져 있던 그 십 분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생각 때문에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밤을 꼬박 새워서 “허깨비를 본 모양”이라고 치부해버리려 했지만 백주대낮에 허깨비를 본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나는 피사의 사탑처럼 이미 중심 각도가 기울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십 분 앞이거나 혹은 십 분 뒤인 장소에 버려졌다는 묘한 느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남들은 아홉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나만이 아홉시 십 분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문제는 앞이거나 뒤가 아니라 ‘세계’와 ‘나’사이에 간격이 발생했다는 것일 터였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윤대녕 소설의 분석에 사용된 이론은 융의 그림자 이론이다. 융은 그의 분석심리학에서 자아를 보완하는 원형으로서 그림자를 제시했다. 그림자는 융이 초기에 즐겨 사용했다. 그는 분석심리학을 위해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 다양한 개념들을 제시했는데,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이성으로서 제시되는 반면에 ‘그림자’는 동성으로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남쪽 계단을 보라〉에는 곽우길의 모습이 마치 내 그림자같이 느껴지며, 바람이 불고 있었고 일그러진 그림자 두 개가 수면에서 유령처럼 어른거린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서술만으로 그림자 이론을 대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융의 그림자는 의식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영역을 대표하거나,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취하지 못한 영역을 이미지화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악이나 공포의 대상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런 부정성을 넘어 자신을 발달시켜야 하는 과제에 놓여 있다. 그것이 그림자를 무의식의 세계로 쫓아버리지 않고 그림자와의 대결을 통해 그림자를 자신의 부정적 측면이나 결여된 측면으로 의식화해 자아로 통합하는 것이 자아를 발달시키는 길이며 자기를 실현하는 길, 곧 개성화의 길이라고 융은 주장했다.
그림자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융의 분석심리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가 성의 역할을 중시한 데 비해 융은 덜 중요시했고, 프로이트가 아동기의 갈등을 중시한 데 비해 융은 내담자가 당면한 갈등을 분석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융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인간 정신에 대한 분석을 주관적 체험과 현상학을 바탕으로 체계화하여 더욱 새롭게 정교화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분석심리학이다. 그는 무의식에는 개인 자신의 무의식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무의식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사람들은 내향성인 사람과 외향성인 사람으로 분류된다고 생각했다.
융은 인간에게는 수세기에 걸친 전체 경험의 저장고로서의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제안했다. 집단무의식은 사고나 기억 같은 의식적 요소와는 달리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현재가 과거 경험에 기초해 결정되고 나머지는 무의식으로부터 전해져 온다고 믿었는데, 융은 프로이트와 달리 인간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포함해 의사결정과 목표설정 등을 제안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중요한 목표는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개인적 원형 세계와 개인적 삶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주의와 개방을 통해서만 자신의 개인적 원형을 개인적 삶과 조화시킬 수 있다. 한편으로 융은 심리학적 성숙과정을 고려하고, 개성화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여기에서 그림자 개념이 출현한다. 개성화 작업을 위해 인간은 자신의 자아 뒤에 있는 그림자까지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황하게 융의 분석심리학과 그림자 개념을 언급한 까닭은 <남쪽 계단을 보라>를 융의 그림자 개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융의 그림자와 이 소설 해설은 맞지 않아 보인다.
누가 나를 ‘세계’의 바깥으로 슬쩍 밀어놓은 것일까. 누가 그날 아침에 하늘색 옷자락 한 조각을 그 후미진 전철역 남쪽 계단에 떨어뜨려놓았던 것일까.
나를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놓은 ‘누구’는 나를 지배하는 감정의 배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기투’로, 사르뜨르는 ‘무’로, 프로이트와 라캉은 ‘무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항상 특정 상황으로부터 세상을 인식하지만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그 상황을 초월하거나 극복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에 대해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것’, ‘기투’라고 했다. 주체로서 우리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 있지만 다음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래로 기투한다.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 또는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세계를 향해 그리고 미래 속으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끊임없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용어로 탈존이며 자기의식이다. 독일에 가서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었던 사르트르는 자기의식을 두고 본질적으로 ‘무’라고 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해 ‘다른 장면’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변치 않는 인간의 욕망이 작동하는 장소’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가리켜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아 또는 주체가 아닌 타자가 인간을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라캉은 타자를 소타자(little other)와 대타자(big other) 두 종류로 구분했다. 소타자는 상상계의 타자들이다. 우리는 이 타자들을 통일되고 통합되고 일관된 자아들로 간주한다. 소타자들은 우리 자신의 반영들이며 우리에게 완전히 통일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에 대타자는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 안으로 동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성이다. 대타자는 상징계의 타자들이다. 대타자는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담론이며 그들의 욕망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내재화하고 변형한다. 라캉은 우리의 욕망이 항상 타자의 욕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말했다. 상상계와 상징계를 은유적으로 간략하게 규정하자. 상상계는 나와 어머니의 공간이다. 상징계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를 거쳐 내가 생활하는 사회의 공간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이미지를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 연장에 어머니가 있다. 사회의 공간은 언어를 매개로 내게 명령하고 나는 그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나를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놓은 것은 “지금부터라도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과 “신상품 기획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작성한 보고서”에 대한 욕망이다. 두 욕망 모두 일차적으로 나로부터 발생했다. 그것들은 나 자신의 반영이며 따라서 상상계의 욕망이다. 그러나 서울을 견디기 어려워 전원으로 간 것이나 밤새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상징계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구’는 상상계의 무의식이면서 동시에 상징계를 향한 저항이다. 상상계와 상징계로부터 동시에 영향을 받은 무의식은 하나로 압축하면 상징계를 향한 저항이다.
그래서 나는 밤샘 작업을 하며 상념들을 이어갔다. 출근길에서의 ‘비현실적 경험’이 나를 불안하게 압도해 나와 세계 사이에 십 분의 간격이 생겼다. 그것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불안의 입자들이 활성화된 것이다. ‘비현실적 경험’은 단순한 착각이나 신비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동요하는, 상징계의 무의식이다.
세계와 십 분의 시간 간격이 생긴 것은 상징계 무의식과 상상계의 무의식의 간격이다. 새벽에 내가 가졌던 불안이 십 분의 간격을 의식하게끔 만들었다. 불안과 시간 간격 사이의 원인과 결과를 단언하기는 이런 불안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무의식이다. 명쾌하게 상징계의 질서와는 다른 삶을 추구하는 욕망이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는 누구나 까닭 모르게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내가 기투하려는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내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출근 후에 나는 일상적 균형감을 찾으려 애쓰지만, “궤도를 이탈한” 것 같은 심적 혼란은 하루 종일 이어진다. 물론 나는 예사롭지 않은 이상 징후를 아직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건너온 모종의 신호로 파악하지 못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되찾으려는 기존의 질서는 ‘월례회의’, ‘여성의류 신상품 기획회의’, ‘기조실담당자’, ‘참고자료와 품위서들’, ‘상대적으로 빨랐던 진급’, ‘부장의 눈치’, ‘황금 골무상 파리 패션쇼’ 같은 것들이 내게 피로도를 가중시킨다. 나는 지금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져있다.
이 부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세속적 현실’이라거나 ‘자본주의적 삶, 곧 낯익은 현실 세계가 주는 안정감의 상실’을 원인으로 든다. 그런 요소가 없지 않겠으나 나를 결정적으로 옥죄는 것은 후기산업사회나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이나 피로도가 아니다. 그런 염증이나 피로라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런 분석은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가식적이다.
회사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중성이며 비겁한 태도이다.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염증이나 피로를 갖고 있으면서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이 그 자리의 최고 적임자가 아님에도 단지 급여를 받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이상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진보인 양 대접받는 통념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삼성전자를 욕하면서 여전히 갤럭시 스마트폰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은 행태이다. 그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잘 나가는 자의, 그래서 자전거의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는데 언덕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불안이다.
‘월례회의’, ‘여성의류 신상품 기획회의’, ‘기조실담당자’, ‘참고자료와 품위서들’, ‘상대적으로 빨랐던 진급’, ‘부장의 눈치’, ‘황금 골무상 파리 패션쇼’ 같은 것들은 상징계에 퍼져 있는 타자들이다. 이런 상징계의 타자들이 나의 무의식을 충동한다.
나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허둥댔다. 내 모습이 회사 중역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느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핀트가 안 맞은 사진처럼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내가 나를 보는 것도 있고 남이 나를 보는, 곧 내가 보이는 것도 있다. 내내 허둥대는 모습을 내가 보는 것, 허둥대는 모습이 보이는 것 두 가지로 드러난다. 보는 것은 시선이며 보이는 것은 응시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상상계이며 보임을 아는 것은 상징계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보여지는 것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돼 있다. 나의 의식은 지금 나의 안에서 그리고 나의 바깥에서 모두 압박을 받고 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라깡의 용어로 실재계이다. 실재계는 현실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니 나는 지금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부재중이었다. 오히려 나는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내게 걸려온 전화 메모를 발견했다.
퇴근 후 나는 고등학교 동창 곽우길을 만났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여섯 시 이십오 분이었다. 그는 내가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이 늦었다고 말했다. 나는 여섯 시 십 분에 통화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여섯 시에 통화했다고 말했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왕래도 없었던 뜻밖의 인물과의 만남은 나의 심리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 나는 이 친구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궁금하나 알지 못한다.
곽우길은 내게 세계는 회전문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어느 한쪽 면, 한쪽 칸에 속해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투명한 저쪽 면에 볼 때가 있고 그래서 갑자기 혼란이 온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낯선 장소라든가 예외적인 시간 따위를 가끔 경험한다고 했고 나는 아침에 보았던 하늘색 원피스의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는 투명한 회전문 저쪽 칸에 서 있었다. 그는 그게 정말로 실재하는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와 대조적으로 그는 사랑하는 여자로부터의 배신, 파산, 가까운 자의 때 이른 죽음, 청춘의 사라진 기쁨과 희망 등을 경험했고 이제는 짊어지기 힘든 것들만 남았다고 했다. 그는 이제 전혀 다른 삶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나의 그림자처럼 여겨졌다.
나의 삶과 곽우길의 삶은 대조적이다. 소설 안에서 볼 때 나는 큰 실패를 겪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배신은커녕 올가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나이만 먹은 것 같은 느낌이 있으나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했다. 고통스러웠던 젊음과 쓸쓸한 추억이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을 모두 넘어섰다. 내게 기대와 같은 크기로 불안이 있기는 하지만 곽우길이 느끼는 것은 좌절이므로 나의 불안과는 다르다. 곽우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불안은 확대된다. 막연하게 지녔던 불안이 오늘 회사일로 해서 증폭됐고 거기에 곽우길을 만나 그의 좌절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곽우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무의식을 자극하기 시작해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리곤 내가 밟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것이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그가 내게 한 치명적인 말은 자기가 불안한 욕망과 타자의 명령 사이에 있는 미끄럼틀 위에 서 있는데 그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이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의 상황이 그의 처지가 나의 처지처럼 느껴지니 나 역시 그처럼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었다. 곽우길의 삶은 아마도 이십대의 십 년 동안 실패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회로부터의 관심에서도 멀어졌고 사회에 대해 가지는 감정도 고갈되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은 남은 사회적 감정을 소진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적 감정은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이며 따라서 사회적 감정의 결여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아침에 보았던 여자는 계단을 올라갔으니 나의 처지와 곽우길의 처지는 분명히 다르다. 다만 나는 오 분 늦은 출근으로 인해 업무가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고 그럼에도 거기에 불안을 느꼈는데 곽우길을 만나면서는 나의 심리적 불안이 더욱 엉망이 되어 이제는 신경증처럼 다가오고 있다. 곽우길은 사라지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가 “나만이 정든 세계에서 추방돼 낯선 어둠 속에 버려져 있다는 참담한 외로움”마저 느끼게 되었다. 아들러는 “인간 영혼의 삶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생성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변형하면 “인간의 심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생성이다.” 내게 생성의 영향을 주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기도 하고 나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새벽의 묘한 기분, 회사에서의 사건에 이어 곽우길과의 만남에서 나는 내면의 심리적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참담한 외로움은 나의 ‘방어(Newman, Duff, Baumeister 등의 개념)와 충동(Wessten의 개념)이 표상들을 왜곡’시키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나의 억압기제가 망가지면서 그런 심리적 상태로 온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나의 상징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희에게 전화를 했고 세희가 일곱 번째의 발신음이 들리고 나서 전화를 받는 동안 불안은 더욱 증폭되어 그 목소리마저 생소하게 느껴졌다. 세희에게 전화를 한 까닭은 남쪽 계단의 여자가 상징하는 무의식으로부터 탈출해 현실의 의식으로 돌아오고자 함 또는 무의식으로부터 이탈해 현실계로 돌아오고자 함이었다. 나 스스로 그렇게 할 힘이 소진됐기에 나는 세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는 세희에게 가장 먼저 지금 몇 시인지를 물었다. 나의 시간과 세계 사이의 시간은 삼 분 삼십 초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세계 바깥으로 유괴돼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그동안 세희를 아끼느라 말하지 않았던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시간이 쭈글거리기 시작하고 원치 않는데도 다른 세계가 내게 개입하려 하고 있단 말이야. 자기 죽음을 연장하기 위하여 돌연 먼 친구가 찾아오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세희에게 “타자의 속도라는 게 내게 개입해” 있다고 말했다. 세희의 반응은 의사처럼 대단히 상식적이었다. “차종에 따라서는 최고 시속이 백 킬로도 있고 이백 킬로도 있고 삼백 킬로도 되는 게 있어요. (…) 알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마다 제 속도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세희는 의식하지 못했겠으나, 남의 속도를 눈치 볼 것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를 즐기라는 나의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치료이다. 그러나 세희 역시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아니 나를 세계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같이 밤을 새자고 했다. 세희는 잠이 들었고 나를 그녀를 안아 침대에 뉘고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남쪽 계단 위에 하늘색 옷일 입고 서서 홀연히 이쪽을 쳐다보는 여자의 모습을 또렷이 목도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은 사치였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세계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야 세희와 결혼도 하고 좋은 직장에서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의 실제 무의식이었다. 나는 지난 스물네 시간 동안 허위의 무의식 속을 헤엄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오르기 힘든 계단을 오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안온한 상징계를 떠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세희에게 다가감은 상징계로부터 상상계로의 이동 또는 어머니의 품으로의 회귀, 피할 수 없는 남자의 속성이다.
“나는 두려운 생각에 빠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 데 섬처럼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우기 위해 침대 모서리로 급히 다가갔다.”
나는 내가 리플리라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