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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 하는가
제목을 봐서는 너에게, 아니 나에게 묻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1969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이름을 가졌고 영국의 캐임브릿지에서 교육받았으며 현재는 런던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저자 알랑 드 보통의 처녀작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하며, 이 책 외에도 다섯 권의 저작을 냈는데 모두 14개국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사랑 이야기기는 하지만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구분이 어렵다. 역자의 말을 빌리면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연애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가지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을 독자로 앉혀놓고 새로운 통찰과 깨달음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묻고는 “저자는 이 책에서 1인칭 화자와 스물셋의 ‘클로이’라는 여자가 역어나가는 러브스토리를 제시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캐 나가는데 스토리가 도전적이다. 무엇인가 색다르고 독특한 이야기가 있어서 도전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스토리기 때문에 도전적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겪는 색다른 경험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어보았고 또 뻔해 보이는 연애담(戀愛談)에서 그들 모두가 미처 몰랐던 의미를 끄집어내겠다는 것이 대담한 시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책에서 느끼는 새로움이 단지 통찰의 새로움만이 아니라 글 쓰는 방식의 새로움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며 실제로 이 책을 읽다보면 소설처럼 흘러가는 이야기와 얼핏 딱딱해 보이는 철학적 사유가 얽히면서 때로 무엇인가 입 안에서 씹히고 터지는 그런 느낌이 드는 맛과 청량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해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벼움’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고도 했다. 알랑 드 보통의 재치와 유머는 가히 수준급이다. 다만 웃음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노력이 따라주어야 하고 앞서 말했듯이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고도 했다.
책은 저자가 스물다섯 살 젊은 나이에 쓴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가벼움’에는 재치와 유머라는 요소 외에 젊은 저자 자신이 절실한 실감이 바탕에 깔리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풋풋함과 탄력을 감당해야 한다. 지나치게 현학적(衒學的-학식의 두드러짐을 자랑하는)이라고 느끼는 독자들은 그 점에 대해 젊은 패기 때문인 것을 너그럽게 보여주기를 부탁드린다. (저자가 부탁한 적은 없지만)고도 했다. 또한 “노스텔지어에 젖어 연애를 바라볼 연배의 독자들은 자신이 겪어온 사건들을 되새기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리길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지 못할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고통스러운 갈망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엽게 여겨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운명적인 만남까지도 우리는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리지는 않는지 묻고 있는데 이것을 저자는 ‘낭만적 운명론’이라고 했다. 낭만적 운명그것은 ‘심리적 운명론’으로 이어지는데 “무엇인가 비참한 일이 일어날 때면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일상적인 인과론적 설명을 넘어서는 설명을 찾게 된다. 참담한 사건일수록 객관적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의미를 가져다붙이게 되고 심리적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경향도 강해진다. 비통함 때문에 당황하고 진이 빠진 상태에서 의문부호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왜 나인가? 왜 이런 일이? 왜 지금?’나는 과거를 샅샅이 뒤져 이런 일의 유래, 조짐, 잘못된 행동 등 내가 입은 상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찾아내려고 한다.”
클로이를 사랑하게 되고 잠자리를 같이 한얼마 뒤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오후 늦게 나는 그녀의 아버지와 정원을 거닐었다. 30년의 결혼 생활을 겪으며 독특한 결혼관을 가지게 된 근엄한 남자였다.
‘내 딸과 자네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네. 나는 사랑문제에 전문가가 아니지만 한 가지는 말해두겠네. 결국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네. 처음에 좋아한다고 해도 끝에 가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네. 처음에는 미워하다가도 결국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
만약 내가 딸아이가 사귀다가 좋아하게 된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을 때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생각해 본다. 클로이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남자친구에 대해 나는 딸을 믿지만 그 상대는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하고.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자아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이웃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쯤에서 출판사 서평을 보자. 아마 이것을 읽으면 독후감은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12월 초 늦은 아침 ‘나'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 항공기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운명적인 여인‘클로이’와 만났다. 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희박한 확률로 만났다는 “낭만적 운명론”에 젖어 단박에 사랑에 빠진다. 둘은 초기에는 서로를 ‘이상화’하고 서로의 말과 행동에서 ‘이면의 의미’를 찾고 ‘정신과 육체’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냐, 자유주의냐”를 놓고 갈등하기도 하지만 끝없이 상대의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했고 결국 “사랑을 말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윌’이라는 친구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라고 묻는 동시에 클로이와 윌은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나’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클로이를 붙잡기 위해 “낭만적 테러리즘”, 즉 엇나가는 사랑을 되돌리려고 억지를 쓰기도하나 실패하고 만다. 클로이가 윌을 택하자 ‘나’는 삶이 무의미해지는 동시에 그들에게 시위하고자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결국 미수에 그치고 ‘나’는 “예수 콤플렉스”-스스로 고통을 받도록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아프게 깨닫는다. 그 후에 나는 “심리적 운명론”을 좇아 그녀가 없는 삶, 곧 ‘생략’도 받아들인다. 시간이 흘러 실연의 상처를 극복한 ‘나’는 “사랑의 교훈”을 깨닫고 어느 순간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허점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간 희망의 승리이다.”이처럼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사랑에 관한 철학적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새로 경험하는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도 놀랍고 존경스러운 일이겠지만, 연애라는 ‘케케묵은’ 문제를 놓고 비상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놀랍다. 대다수 사람들이 연애하는 과정에서 사랑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가지기 마련인데 그런 독자에게 새로운 통찰과 깨달음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알랑 드 보통은 쉽지 않은 일을 능숙하게 해낸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보면 소설처럼 흘러나가는 이야기와 얼핏 딱딱해 보이는 철학적 사유가 얽히면서 때로는 뭔가 입안에서 씹히고 터지는 느낌이 드는 땅콩맛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때로는 온탕 냉탕을 왕복하는 것처럼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 알랑 드 보통의 재치와 유머는 상당한 지적 노력을 수반하는 수준 높은 매혹적인 ‘가벼움’같은 것 말이다. - 저자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저자는 1969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런던에 살면서 런던대학교에서 대학원생 철학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낭만적 운동(The Romantic Movement)(1994)>, <입 맞추고 말하기(Kiss&Tell)(1995)>, <프루스트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나(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1997)>,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2002)> 등을 썼다. - 역자 정영목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사람과 상징>, <감성과 이성>, <바르크스>, <신의 가면 Ⅲ:서양신화>,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 <딸 그리고 함께 오르는 산>, <제스처 라이프>, <도시의 과학자들>, <눈먼 자들의 도시>, <흉내>, <펠리컨 브리프>, <쥬라기 공원> 등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끝으로 내 나름의 책 읽은 감상은 우리 모두에게, 세상사람 누구에게도 흔한 그런 사랑이야기가 줄거리다. ‘나는 클로이와 우연히 비행기 안에서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다른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내 친구 윌을 사랑하게 되고 나는 그 일로 자학하다가 자살까지 기도한다. 그러나 실패하고 나서 레이철이라는 다른 여자를 만나기로 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이런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부터도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혜라는 것은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연주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 평정과 내적 평화를 목표로 삼으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또 지혜는 우리에게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 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은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했다. (2019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