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2.12]
지상강좌
택암擇菴 정태영丁泰榮 선생의 삶과 동학농민혁명
박성묵_예산역사연구소장, 예산교구장
1.머리말
정태영의 삶과 동학혁명 활동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후손 증언록처럼
가시밭길을 헤쳐나간 인물임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신창현 선장 포구는
물산이 모여들어 가장 번성했던 지역이다.
바닷길 창구로 열강의 움직임, 급변하는 정세 등
새로운 소식을 빨리 접하는데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나라를 구하고 널리 창생을 구제한다는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동학도 밀물처럼 들어와
욕망과 의지를 빼앗긴 채
길을 잃고 부유하던 민중들의 가슴에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고 빛이 되었다.
정태영은 일찍이 아산 대접주 안교선에 감화받아
동학에 입도하였고,
덕의대접주 박인호의 명을 받아
억압받는 농민대중에게
동학을 전하는 포덕사업에 힘썼다.
신창에서 갑오동학 기포를 주도하고
내포동학 세력과 연대하여 ‘척양척왜’ 깃발 아래
관군과 침략자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홍주성 패퇴 이후 관의 추격을 피해
잔여 동학군을 이끌고 차령산맥 깊은 산골에
수년간 풍찬노숙하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도피생활 중에도
수심정기로 동학의 대의를 지켰다.
정태영의 생애를 완전히 복원하고
그의 사상을 제대로 다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정태영에 대한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일부자료가
아들 정규희가 작성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증손자 정해곤 ‘구술자료’,
‘천도교예산교구 자료’를 바탕 삼아
정태영의 삶과 동학농민혁명 참여활동,
그리고 갑진개화운동의 발자취와
역사적 의의를 찾고자 한다.
2. 출생과 성장
정태영은 아버지 정대무와
어머니 김해김씨(1830~1918) 사이에서
1859년 8월 3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건섭建燮이며 자는 건화建和이다.
도호는 택암擇菴이며
태영泰榮은 천도교 교적에 올라있는 이름인데
호적명이 되었다.
정태영이 태어난 해는
수운대신사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기 1년 전이다.
아산시 선장면 돈포리는
구한말 신창현에 속한 곳으로
일명 ‘덴곶이’로 불렀던 자연부락이다.
정태영의 출생지는 합덕 신흥리로 추측된다.
증조부 정약천이 천주교(서학)에 입교하면서
박해를 피해 돈포리를 떠났다.
3대에 걸쳐 고향 일가친척과 교류가 소원해졌고
부모를 일찍 여위어서 자식들이 어려서
가문 내력을 전해 듣지 못해
생몰년대를 파악하기 어렵다.
1868년, 10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유소년시절 태영은
돈포리 강개울 건너 합덕 신흥리에서
형 빈섭斌燮과 누이와 함께
홀로 남겨진 어머니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이는 이재원李在原에게 출가했다.
그 후 정태영 형제는
압해정씨 집안들이 살고 있는 강 건너 돈포리
‘신원’에 정착하여 농토를 일궈 농사를 지었다.
이곳은 지대가 낮아
바닷물 유입과 여름철 폭우로 범람해
자주 피해가 발생하던 곳이다.
수해방지를 위해
둑을 쌓는 고된 일을 수년간 작업해
농토를 일군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정태영의 최초 제적등본을 보면
1915년 6월에 ‘당진군 합덕면 신흥리 2통3호’에서
지금의 선장면 돈포리(무無번지)으로
이거 신고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당시 살았던 신원 집터는 지목상 공유지라
번지가 없어 ‘무無번지’로 기록한 것이다.
정태영은 ‘천주학쟁이’ 집안이라는
주변의 눈총과 멸시를 받았으나
아랑곳 않고 어려운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한문 공부에 열중하였다.
주경야독하면서 시국정세에도 관심이 많았다.
포구를 끼고 있어 서울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884년,
그의 나이 26세 때 11살 아래인
김태화(金泰華1870~1912)를 맞이하여 결혼하였다.
이해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 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연속되는 혼란한 시국을 보면서
나라의 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결혼 2년 지나 첫딸을 낳고
갑오동학혁명 직후
을미년 정월에 장남 규희奎熙를 낳고
이어 차남 규철奎喆을 두었다.
외동딸은 신창 기포를 함께 주도한
이신교(李信敎 ?~1894) 의 장남
이세헌(李世憲1879~1938)에게 출가했다.
어렵게 농토를 일궈 농사를 지은 정태영은
그에게 부과되는 토지 부세제도의 문란과 부정이
농경을 포기하게 만들어
소농민들을 유리도산으로 몰아넣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목도하게 된다.
부세제도 자체가 문란하고 공정성을 상실한 데다
그 운영 또한 탐학한 수령과
아전의 수중에 장악되어있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합리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분차별도 철폐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품고
방법을 모색해 가고 있었다.
3. 동학입도와 포교
정태영은 나주정씨 명문가 집안 후손이면서
천주학쟁이 후손이라는 신분제약도 있었지만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위해
아량을 베푸는 너그러운 사람이며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으로
인망을 얻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하층민 대부분이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차별과 제약이 없는 사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역량을
재량껏 기르고 펼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던 그에게
세인들의 멸시와 차별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마침, 1870년대 말,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후천개벽사상 동학이
신창현 내 여러 마을에 암암리 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도한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기 시작했다.
동학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 사상은
신분제를 뛰어넘어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만민평등의 꿈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보국안민 즉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고자 하는,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상이었다.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은 관의 지목을 피해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산골을 전전하면서
시천주 사상을 전파했다.
아산지역에 동학을 전파한 사람은 안교선이다.
정태영은 더 망설일 필요 없이 안교선을 만나
동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28세 되던 해인 1886년 3월 10일
부인 김해김씨와 함께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당시 조선정부에서 정태영의 동학입도는
증조부가 천주교 입교 후
3대가 살아온 시련과 고난의 세월을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위험과 부담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 입도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새로운 인간 세상을 꿈꾸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정태영은 내수도(부인)과 함께
주문 수련 방법은
덕의대접주 박인호의 독공수행을 방식을 따라
수련에 정성을 다했다.
스승의 가르침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하늘을 본받으려고
지극한 마음으로 성·경·신을 다 했다.
도를 깨우치기 위해 막비도야莫非道也의 생활을 했다.
정태영은 동학의 수련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내고
무지를 자각하며
주인의식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수련을 통해 얻은 영성의 부활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자신을 함양하는데 있었지만
시대와 역사의 모순 앞에서 대의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힘으로도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34세 때,
임진년(1892) 10월에 있었던 공주취회는
동학조직이 처음으로 정부에 모습을 드러내놓고
요구안 낸 사건이다.
정태영의 참여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교조신원운동의 대열에
적극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계사년(1893) 2월 11일,
동학교도가 자신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복합상소를 광화문 앞에서 올렸다.
그러나 정부는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고 해산시킨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신창 현감 최재학은
동학교도 탐색과 체포를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오가작통’ 의 각 조목을
마을마다 실행할 것을 명령했다.
정태영은 1894년 1월에
북접대도주인 최시형으로부터 집강에 임명되고
같은 해 7월 접사로 임명받았다.
4. 동학혁명 신창기포 주도
정태영의 나이 36세 때 마침내,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봉기가 일어났다.
내포지역 동학세력도 영향을 받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해 4월 이후에 아산을 비롯한 내포지역은
호남처럼 전쟁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처에서 동학군들의 활동이 관에 저항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관을 무서워하지 않고 활동한 상황만큼은 분명하였다.
정태영의 동학조직도 사태를 주시하고
도소의 지침에 따라 움직였으나
억압받던 농민들의 돌출행동은 통제하기 어려웠다.
“저들은 스스로 왜倭와 양洋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매일 무기를 지니고
동쪽의 가옥에서 무리를 짓지 않으면
서쪽 동네에서 작당을 하여
국법과 왕장王章을 무시하고
방백과 수령을 도외시하였다.”
3월 26일경
백산대회로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예산·아산지역 박인호, 박덕칠의 동학조직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미 서산 원평에서 기포가 일어나
동학도인을 수탈하던 ‘이진사’를 응징하는
집단행동이 일어났다.
신창동학조직을 이끌던 정태영은
당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알 수 없지만,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중
4월 12일(양5.16) 보고된
일본인 상인의 첩보에 의하면 “덕산과 예산지역은
인민의 반수가 동학에 속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호남동학군이 계속해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장악한 소식이 전해지자
내포지역 동학조직은 더욱 고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학군의 폐정개혁안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청군에 진압요청을 하였다.
동학군은 진압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해산하였다.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니 일본군도 들어왔다.
아산 백석포는 청군이 상륙한 곳이다.
영접사 이중하의 지시에 따라 아산지역 백성들은
청군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청군의 일부 약탈까지 겹쳐
아산지역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다.
주둔할 명분이 없던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이로써 조선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해산했던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
척왜양 깃발을 들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청산에서
동학의 총두령 해월 최시형은 마침내 9월 18일
전국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려졌다.
이에 내포동학을 이끌던 덕의대접주 박인호도
9월 그믐 자시를 기해
내포지역 각 포에 기포령이 하달되었다.
총기포령은 한순간에 동학혁명을 전국화시켰다.
기포령을 전달받은 정태영은 긴급으로
탕정 곽완郭琓, 김경삼金敬三과
용화동 이신교에게 연락해 10월 1일 밤에
신창 돈포리 자신의 집에 모이게 했다.
“그러니께 그때 기록을 보면
신창군에서 기포를 했는데, 기포한 분이
내 조부하고 정태영 씨라는 분하고
곽원이라고 하는 분하고 세 분이 기포했다고.
그래가지고 그 기록에 보면은
결국 초토사 이승우에게 체포돼서 처형됐다,
요렇게만 나와요. 그리고
내 선친들이 말씀을 잘 해주질 않아.
왜냐면 당신네들의 고통을
자손들에게까지 주어서는 안되겠다.
또 알으면은 언젠가는 얘기하게 되면은
추적을 당한다 이거지. 이러니까
그 활동 상황이라든가 그 부근에 대해서는
일체 자손들에게 얘기하지 않고,
그저 신앙을 잘해야 된다는 얘기만 했지요.”
두령급이 모인 자리에서
긴박하게 움직이는 덕의대접주 박인호의
덕산군 장촌면 막동 ‘도소’ 상황과
전국각처의 소식을 듣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우선 정태영은 소문에 의하면
일본군의 신식무기는 화력 면에서 월등해
왜놈들과 싸우려면 무기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하고 확보방안을 강구한 끝에
10월 5일 밤에 온양관아를 습격해
관군의 무기를 탈취하기로 했다.
이들의 계획은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다가
5일 밤 거사해 성공한다.
정태영 부대는 다음 날 아침에 신창으로 떠나
지루동地樓洞에 주둔했다.
박인호의 덕포에 속했던 정태영 부대는
대접주 박희인의 예포 각지역 부대와 연대하여
내포지역 해미, 덕산, 대흥, 예산, 온양 등지의
관아를 점령해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했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이 1894년 10월 24일
면천 승전목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키자
고덕을 지나 구만포를 거쳐
오가에서 주둔 유숙하고 다음 날
정태영의 잔여부대인 남상면 판방리 수천명이 모여
신례원 관작리로 총집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관작리에 모인 동학군은 다음 날 아침
홍주 초토사가 보낸 관군과 민보군의 선제공격으로
잠시 주춤하다가 포위공격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10월 29일, 홍주성 패퇴 후
예산, 신창, 온양지역 동학군은 4일 정도
오가 역탑리에 주둔하고 향후 진로를 모색했다.
승기를 잡은 관군과
민보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계속되어
아산, 예산 등 내포지역 동학군은
색출 체포를 피해 도피하기 바빴다.
정태영은 피신도 중요하지만
패퇴 후 동학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온양의 지도자 이신교를 잃고
신창지역 흩어진 동학군이 유림들의 밀고로
이두황 진압군에게 붙잡혀 무참히 처형되자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없다며
살아남은 동학군을 규합해 동서 2개 조로 편성해
게릴라식 투쟁 대책을 강구하고
활동한 점이 나타난다.
정태영이 이끈 동학군 부대는
관군과 민보군의 대대적인 진압이 계속되자
신창에서 일본군과 최후접전 후
차령산맥 광덕 만복굴로 후퇴했다.
관군과 민보군의 추격과 체포를 피해
차령 깊은 산중 만복골로 왔지만
돈포리 신원집 노모와
만삭의 부인 김씨가 몹시 걱정되었다.
정태영은
각자 식솔들을 안전하게 도피시킬 것을 명하고
서릿발 허연 초겨울 야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주요 길목에는 유회군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정태영은 이미 동학괴수로 지목된 인물이라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
우선, 집안 살림살이를 남부여대하고
가솔들을 이끌고 산중으로 돌아오는데
만삭의 몸인 부인은 기력을 다해 걸었으니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방년이 안된 외동딸이 그나마 어머니를 도왔다.
시국상황이 안정되면 돈포리 가서 농사지을 전답은
이미 관속과 유림들에게 몰수당했다.
홍주성에서 체포돼 이승우에게 처형된 이신교 집안도
피해는 마찬가지였다.
갑오년 당시 나의 백부 세헌의 나이는 15세쯤이며
중부는 10세, 나의 아버지는 5세였고
막내 숙부는 유복자였다.
당시 조부(이신교)는
전기한 바와 같이 홍주성에서 살해당하고
생존한 가족들의 생활상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고생의 연속이었다.
할아버지가 소유했던
전답과 임야 가옥 등 많은 재산은
머슴살이하던 하인들이 모두 차지하고
그 재산이 ‘내 것이다. 우리 것이다’ 라고
말도 못했다고 한다. 말 하면
동학비도의 가족이라고 하여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심한 학대를 받기 때문이다.
정태영은 차령 깊은 산골에서
각 지역 동학교도들이 체포돼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혁명이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동학의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저항에 나선다는 각오를 다졌다.
효수당한 대접주 안교선의 죽음 앞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비분강개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5. 갑진개화운동 ‘진보회’ 활동
동학교단은 1898년
동학교단의 책임자 해월 최시형의 순도로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1900년
교권을 확립한 의암성사 손병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권동진, 양한묵, 오세창,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손병희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동학의 간부들을 일본으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국내로 돌아온 간부들은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大同會’라 하고
비밀리에 각 지방에 조직을 펴나갔다.
대동회는 중앙의 본부조직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나가던 중
정태영에게 참여의 기회가 왔다.
차령산맥 대술 이티 산중에 피신생활을 하다
작년부터 선장 군덕리 새터를 장만해 거주하였다.
정태영은 새로운 터전을 닦느라 밤낮없이 일하는데
지역에서 대동회라는 큰일을 맡게 되었다.
갑오동학혁명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일제와의 직접적인 항전이 아니라
진보적 민의를 결집시켜 민권을 신장하여
국권회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어 4월에 박인호, 홍병기 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에게
그동안의 국내사정을 보고하자,
“단결을 굳게 하여
마음과 뜻을 일치하게 하는 것이니…
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 하리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령에 따라 7월부터
대동회를 중립회中立會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관의 탄압이 극심하여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손병희가 1904년 7월 중립회를 조직해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던 계획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느냐 잃느냐 하는 시점에서
100만 동학교도의 목숨을 담보로 벌인
일대 도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용구는 손병희의 무장봉기 계획을
‘죽음만이 있을 뿐’인
경거망동이라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회의 명칭을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바꾸고
강령을 발표하게 한다.
당시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진보회 조직을 이용구에게 일임하였고,
이후 이용구는 8월 5일 진보회 통문을 통해
8월 말일까지 각지에 진보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1904년 11월 초까지
80여 군에 진보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진보회의 정체가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동학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부는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과 교섭하여
지난날 갑오동학혁명 때와 같은
동학토벌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는 충돌사건이 반발하고
발포, 구타 살상 등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정태영은 진보회 본부의 지시에 따라 8월 30일
중립회 신창·아산·온양 지역 통합회원 전부를
온양 용화동에 모여 ‘온양군진보회’를 출범시켰다.
온양은 사위 이세헌이 폭넓게 활동을 펼쳤다.
당시 온양군진보회 회장은 정태영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은 이일준李一俊, 평의원 사인士人3인,
농인5인, 상인2인이 뽑혀
직업 출신별로 균등하게 임원 구성을 하였다.
총회원은 2백 인이었다.
정태영은 이발사를 섭외한 후 9월 초
온양 진보회 회원을 온양읍 중에 집결시켜
일제히 단발흑의斷髮黑衣함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정부개혁과 국정쇄신을 부르짖었다.
‘충남진보회’는 북부는 온양과
남부는 논산(은산), 강경, 노성 지역이
강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1904년 9월 중순경 충남진보회가 결성되자
진보회 활동에
그동안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정태영은
충남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태영은 10월 14일 논산포에서
‘충남진보회 대회를 개최하고
진보회 활동 취지연설을 하였다.
대저 인민은 국가의 원기요
회사는 인민의 정론이니
잠시도 서로 떠나지 못할 자는 원기요
한날도 없지 못할 자는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인민이
족히 풍교를 유지하여 문명에 진보하겠거늘
정부 제씨가 취한 꿈을 깨지 못하여
비단 고식지계로 구차히 지벌뿐 아니라
안으로 성총을 옹폐하고 밖으로 성령을 포학하여
가혹한 정사로 압제하여
무죄한 백성이 점점 도탄에 빠지니 오호 통재라.
나라흥망이 오직 민심이 동일함과 각산하는데 있나니
첨군자는 동성과 동기로 일제히 분발하여
기약에 본회로 내도하여
당당한 정론으로 정부에 헌의하여
우리 강토를 보전하고 우리 생민을 구활함을
천만옹충하노라.
10월 18일(9.5음)에 정태영은
온양읍내 진보회 회원과 대소 인민을 결집시켜
정치개혁과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전하라는
진보회 통문을 설명하고 일깨워 주었다.
이에 온양군수는 정태영을 만나 논의를 하고
담판을 마친 후 해산을 촉구했다.
이날 발표한 통문은 같은 날짜로
논산진보회에서 ’대한매일신보’에 광고를 냈다.
대저 토지는 나라의 기업이요, 백성의 명맥이라.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고 백성은 재물에 모이고
재물은 토지에서 나는 고로
예로부터 인민의 산업을 절제하고
국가의 성공을 자뢰함이 오직 전토에 있는지라,
비록 촌토척지라도 다 국가의 강토라,
인민을 맡겨 작농하여
그 부세를 나라에 온전히 상납한 연 후에
재물 허해짐이 없고
나라에는 온전한 부세가 있을지라.
이런 고로 옛적에는 정전법이 있었고
각국에는 전토를 서로 매매함이 없으되,
유독 우리나라는 국가 강토를 사사로 서로 매매하여
도조 받는 것이 세납보다 여러 배가 되는 고로
부자는 더욱 부하고 빈한 자는 더욱 빈하니
백성의 재물이 어찌 폐하리오.
이제 만일 전토제도를 경장치 아니하면
반드시 인민과 나란히 난보할 경우에 이르니니
전답에 사사로 이 매매하는 법을 혁파하고
그 부세는 신식대로 탁지로 상납하고
그 세전인즉 매결에 삼량십분식 정하여
궁내부로 수납할 차로
십삼부 인민이 발통하여 회사를 설시하여
경부훈령이 불구에 행회하겠기로 널리 고시하니
이르는 곳마다 차차 전설하여
물론 경향이 전답하고 도조를 미리 출납치 말아서
후회함이 없게 하라 하였더라.
다음날 19일에는 강경포에 집회를 열자
관에서 만단효유하여도 회원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정태영은 진보회의 강령을 준수하고
무명잡세혁파,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다.
이로써 정태영은
충남의 대표적인 진보회 활동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이용구는
정부의 탄압을 빌미로 동학을 배신하고
일진회의 요구대로 이해 10월13일
진보회를 일진회로 합병,
친일단체 ‘일진회’로 둔갑시켰다.
6. 맺는 글
택암 정태영은 갑오년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으며,
지도자 이신교는 체포돼 처형되었다.
이후 일가족을 데리고 예산군 대술 천방산 깊은 산
‘이티’에 도피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정태영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국가 잃은 한을 품고 1922년 8월 26일 환원했다.
단발흑의로써 죽음을 각오하고
정부개혁, 국정갱신을 부르짖은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전개한 정태영의 활동은,
그가 동학혁명 신창기포에 이어
두 번째로 지도자급 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환원하기 전
마지막 여력을 모아 펼치려고 했던 3.1독립혁명은
노환이 깊어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아들 정규희와
여러 동지들에게 전해져
4.4선장시장만세시위로 나타났고
6.10만세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역사의 굴곡마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실천운동에는
어김없이 선열들의 발자취는 가르침이 되어 왔다.
정태영이 살았던 처절한 삶의 시대와
오늘날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
기후위기, 한반도 평화 공존, 내전과 폭정,
양극화와 불평등, 코로나19 팬데믹 확산 등
인류 앞에 산적한 시대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진 모두의 과제다.
정태영의 삶이 지역의 작은 역사라 치부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은 동학 역사성이다.
동학정신을 이어가는데
역사교훈으로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
2022년은 정태영 선생 환원 100주년이다.
내일의 후천개벽 세상을 위해
함께 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의 삶이
다시개벽으로 박동하며 살아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