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복음의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리다
사도행전 15:1-35
설교에 앞서서 사도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지를 한번 외어 보겠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의 실루기아 항부터 출발합니다. 구브로 섬의 살라미와 바보,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버가를 거쳐서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다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간이 약 2년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세계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말씀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오늘 본문 1절에 의하면 유대로부터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온 거짓 선생들이 모세의 관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복음: 복음 플러스 행위로 구원받음
여러분,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거짓 복음으로써 교회를 무너뜨리는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즉 사도들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다가 모세의 관습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시작하여 율법의 행위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짓 선생들은 믿음 플러스 (율법)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심각한 주장이며,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세계 전도 여행을 통하여 세계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것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서 교회를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단 한 번도 모세의 관습을 따라서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단 한 사람의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이들의 가르침은 복음(福音)을 왜곡시키는 주장으로서 거짓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신데 그 율법을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하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오셔서 이루신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을 부정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부족하다고 한 것이 됩니다.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에 사도 바울과 형제들을 파송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 간에 다툼과 논쟁이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 형제들은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교회의 형제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서 사도 바울 일행은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가는 길에 서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경유하게 되었고, 거기에 세워진 교회들을 방문하여 제1차 세계 선교 여행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온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여 형제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착한 사도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그들에게 제1차 세계 전도 여행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셔서 행하신 모든 일에 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대로 선교사들과 함께하셔서 이방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게 하심으로 이방 세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크게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일행도 바로 이 일 때문에 사도와 장로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는데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믿은 소수의 사람이 다시 그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기독교 구원의 핵심인 “오직 믿음으로만” 혹은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이 복음의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와 사도들의 권위와 직권에 의해 해결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는 이러한 도리에 대해서 그의 사상 체계 속에 이미 다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이방인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상 체계는 아마도 이미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 13:38-39에서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 가운데서 이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라는 도리에 대해 설교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의 총회와 결정 사항
예루살렘에 모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관해 의논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해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변론과 논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이 과거 최초의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그들에게 전한 복음에 관해 설명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고넬료의 가정에 갔으며, 그곳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실 때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행위를 행하라는 요구가 없었다고 증거했습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확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베드로의 증언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모세의 율법에서 명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올바른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 회의의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교회 회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인격과 삶에 대하여 장애를 초래할만한 네 가지를 금(禁)하여 그 내용을 수리아 안디옥교회와 길리기아교회에 보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이 편지는 수리아 안디옥과 길리기아교회에만 보내진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통하여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전하여 졌고, 이 편지를 받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크게 기뻐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
이제 오늘부터 이러한 과정과 결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를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교회 회의, 즉 총회의 서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절을 보시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의 문제를 놓고 거짓 교사들과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과격한 분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이 두 사는 복음을 놓고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다투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매를 맞고 돌에 맞아 가면서도 유대인들과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은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줄줄 아는 사랑과 포용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을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준 교회라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복음 안에서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과 따뜻한 교제의 악수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34-38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만났을 때도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울고 서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마주는 정감과 사랑 가운데 헤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24에 의하면 바나바 역시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지키고 진리를 세워나가는 일에 있어서는 거짓 진리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있어서 복음의 본질이 믿음 플러스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일부 바리새인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부족함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 구원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단호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은 부족하다는 주장으로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그냥 지나쳐서는 교회가 온전하게 설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이비 기독교와 사이비 복음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 복음을 전하는 유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러한 사이비 기독교의 흐름은 유대주의에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세주로 믿지 않고 가만히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의 선동과 그 선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은 교회로 옮겨왔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유대주의적인 사상이 그리스도 화(化)하지 않아서 사상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믿음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에 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예수 믿기 전에 점쟁이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그 생각이 그리스도적이지 못해서 점쟁이로 있었던 때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는 이런 일들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러한 사이비 기독교의 주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이비 복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그의 여러 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6-10을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하여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단호하고 강한 어조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오늘 본문과 같은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복음 플러스 모세가 율법에 명한 할례를 행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한 밤빌리아 버가와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 이런 도시들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갈라디아는 북갈라디아가 있고 남갈라디아가 있습니다. 북갈라디아는 갈라디아의 원주민들을 말할 때 사용하고, 남갈라디아라고 할 때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지방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문제가 나왔으니까 간단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 즉 갈라디아서를 받는 대상이 북갈라디아냐 아니면 남갈라디아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의 사상이 언제 형성되었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고, 그 대상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사도 바울의 사상이 언제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사도 바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고, 그 대상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이런 사상이 바울에게는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바울신학 전체를 재구성하여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압축하면 두 의견으로 나뉩니다. 다 소개할 수 없지만, 하나는 오늘 본문에 있는 예루살렘의 회의에 사도 바울이 참석하였는데 지금까지 그러니까 예루살렘 회의까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몇 번 방문했으며, 또 예루살렘 회의는 몇 번째 방문 때 일이냐 하는 것은 바울신학을 재구성하는 요인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이 예루살렘 회의 때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세 번째 방문한 것 같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 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세 번째라면 첫 번째는 회심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다메섹으로 왔다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이고, 두 번째 방문은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때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다가 죽게 될 위험을 감지하고 유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약 7-8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바나바의 요청으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말씀 사역을 할 때 예루살렘이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교회 교우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라디아서 1:16-19에서 “…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예루살렘 방문은 첫 번째 방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라는 갈라디아서 2:1입니다. 여기 “십사 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두 번째냐? 혹은 세 번째냐? 하는 문제에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가 달라집니다. 이 두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에 일보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의견이 팽배하지만, 이런 두 의견 가운데 저는 갈라디아서 2:1의 예루살렘 방문이 두 번째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라는 주장이 옳다면 사도행전 11장의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됩니다.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갈라디아의 기록 연대는 A.D. 48-49년 어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A.D. 50년에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신학 사상,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사도 바울의 신학 사상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즉 약 16년 전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여 동안 머물면서 기도하며 묵상하며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참여하기 전에 써서 보낸 갈라디아서에서 벌써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회의에 참여하기 훨씬 전에 써서 보내진 편지입니다(약 16년 전). 그런데 그때에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즉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러한 곳에 유대로부터 온 거짓 교사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장로로부터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신임장(추천장)을 가지고 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거기에다가 모세의 율법에서 명한 할례를 받고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였던 것입니다. 즉 은혜 플러스 행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플러스 율법의 할례 행함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행위 구원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단호한 어조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9)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사이비 기독교의 주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태도 속에서 사랑과 진리가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진리의 칼잡이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진리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사랑의 성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진리에 있어서는 투쟁적인 전사(戰士)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와 사상의 어떤 문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어떻게 손상을 주고, 복음에 변질을 가져올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확고한 신학(神學)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기독교의 본질을 지켜나가는 일에 있어서 불붙는 정열을 쏟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진리를 훼손하는 일을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판단자가 되어서도 안 되며, 진리가 아닌 것까지 사랑으로 용납하여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진리를 변호할 능력이나 의욕을 갖지 아니한 무지한 박애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애정이 넘치는 진리의 변증자가 되며 진리를 보호하는 박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조화 있는 사람은 성령님의 충만하신 다스림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초대교회가 이러한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편안하게 큰 문제 없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방식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별 탈 없이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평온하게 진행하고, 그러면서 그 교회의 회원 수가 늘어나는 것이 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거짓과 사이비와 그릇된 진리 해석을 다 가지고서 그 일로 인해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이리저리 절충하여서 끌고 나가면 그것은 목회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두신 것은 진리를 증명하라고 두신 것이지 거짓을 증명하라고 두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러한 구차한 평온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교회가 신령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그것이 혈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거룩한 사랑이 언제나 있어서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싸움의 방식이 진리의 문제가 되는 것은 적의 공격이 주로 진리와 사상의 문제로 오기 때문입니다. 원래 교회는 진리를 그 존재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진리의 표상이 되기 때문에, 교회가 이 문제에서 양보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잘 보존하고 유지하여 계승하는 책임을 언제나 큰 것으로, 목숨 바쳐서 지켜야 할 자기의 사명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진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진리가 우리를 보존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진리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되면 이제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보존되고 계승되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가 모든 사람의 주장과 사상을 다 포함하여 의견을 잘 조정하고 행정과 운영을 잘하는 것을 제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과 그 복음의 참된 내용을 보이는 교회로서는 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인 집단으로 남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기독교의 진리에서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쳐서 바르게 가려고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쓰시고, 또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길에서 쓰임을 받는 것’이라는 말로서 그릇된 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너무나 왜곡된 기독교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바른 분별을 잃어버리고 매우 방황하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활동이 어떤 결과를 조금은 내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막대한 혼란과 왜곡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성경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 27장을 보시면 유다 왕 요담의 시대는 매우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시대였습니다. 요담은 암몬 자손들을 쳐서 이기고 각 산중에 성읍도 건축하고 망대도 건축하였습니다. 국방을 튼튼하게 한 것입니다. 나라는 점점 더 부강해 갔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요담 왕은 정치를 매우 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활동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2-4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부강하여 평온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병들어 가는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따라 살아서 신령한 삶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평소에 진리와 비 진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릇된 진리가 왔을 때 비 진리가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주장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그릇된 성경해석은 사이비를 만들어 냅니다. 사이비가 발전하면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보다도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지 않을 때 교회는 외형적으로 번영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병들어 아주 괴팍한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령하지 못한 종교적인 집단이 되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아는 일에 힘씁시다. 신령한 교회, 진리를 훼손하지 않고 풍성히 설명해 내는 교회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래서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혼탁한 세상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을 위해 힘쓰다 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우리가 됩시다. 아멘
(2014. 5. 28 수요 예배)
(2023. 6. 11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