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고난의 복음 - 苦難(고난) 극복의 글, 苦難(고난)의 축복 1 (94P)
- ‘殉命의 사람’, ‘성령님의 侍從’ 배종부 목사 -
♥ 우리는 누구나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 간다.
잘 이겨 나아 가야 함을 알면서도, 성령 충만, 성령 동행의 영성이 제대로 훈련되지 아니함으로, 늘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성령사관학교> 강의로, 하루 종일 나의 고난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신음하고, 씨름하기를 원한다.
무엇이 과연 나를 무너지게 하는가?
(2019.6.8.밤1:50)
♥ 1.깨어져야 쓰십니다
탈무드에 보면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신앙 인격도 영글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으시지만,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으시기에, 고난으로 내 자아를 깨뜨리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 중에 하나는
깨어지지 않은 상태로 유명해지고,
부서지지 않은 상태로 크게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거센 파도가 노련한 항해사를 만들어 내듯이,
끝이 안보이는 혹독한 광야학교는
나의 거친 자아를 곱게 부숴뜨리고 곱게 다져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적합한 그릇으로 빚으시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내 자아가 부서지고,
내 자아가 녹아지는 것입니다.
빨리 부서지고, 빨리 만들어지고 싶은데
아직도 주님이 쓰시기에 부적합하여, 고난 중에 있습니다.
지금의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아가 빨리 깨어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보다 더 사모해야 할 은혜는
내가 고운 가루처럼 부서지고 바스라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들이
부서지는 경험이나
광야학교를 거치지 않은 채로도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깨어짐과 부서짐이 없는 영적인 사람은
주의 일에 장애가 되고
오히려 뭇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옥합이 깨어져야 향유가 흐르고 향기가 진동하듯이...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항아리가 깨어져야 횃불이 나와 승리하듯이...
광야에서 반석이 터질 때 생수가 흘러 갈증을 해갈 되듯이...
내 자아가 깨지고, 터지고, 부서져야,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대장장이는
쇠붙이를 불에 달궜다가, 물에 담궜다가...
그것도 모자라, 큰 망치로 후려칩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볶인 쇠붙이는 마침내
소중한 연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루도 쉴 날이 없이,
불에 담궜다가, 물에 넣는 훈련을 하십니다.
좀 숨돌릴 만하여 고개를 들 만하면
또 후려치셔서 고개도 못들도록
납작하게 나를 훈련하여, 만드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단단한 자아가 깨어지고 만들어지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담금질을 계속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내 자신을 신뢰하는 데도 쓰임 받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쓰심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어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곱에게 21년의 잡초 같은 삶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에게 40년의 처철한 고독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에게 13년의 한이 맺힌 역경의 삶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썩어야 열매가 맺히듯,
내가 깨어지고 썩어져야 열매를 맺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내가 죽는 길이 사는 길이며,
내가 부서지는 길이 바르게 쓰임받는 길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깨질 때까지 기다리시며,
마음 아파하시고, 인내하시고 계십니다.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나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된다는 것을
환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고난의 파도가 아무리 거세어도
큰 풍랑 뒤에 일하실 주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인내로 엎드립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주실 축복과 비교할 수 없음을 믿고 인내하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어느 무명의 목사가-
♥ 2.광야학교는 오히려 축복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분과 함께 하는 광야는 오히려 천국입니다.
갈망은 만족을 위함입니다.
기다림은 만남을 위함입니다.
비우라 하심은 채우기 위함입니다.
버리라 하심은 소유케 하심입니다.
침묵은 응답을 위함입니다.
고통은 축복을 위함입니다.
연단은 쓰심을 위함입니다.
밤이 깊다는 말은, 새벽이 가까왔다는 말인 것처럼
고난이 크고 깊다는 것은, 얼마 있지 않아 축복이 온다는 뜻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축복 앞에서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두고 보시기에도 아까운 우리들을
광야로 몰아 넣으셔서 달달 볶으실까요?
우리가 동의하든 안하든 간에,
우리를 광야로 몰아 넣으신 배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의도가 숨어 있음을
그러나 우리는 우매하여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자원하여 광야학교에 자원 입학하였겠습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정신 차리고 보니까,
광야학교 교정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지요.
서둘러 돌아 서려니 이제껏 걸어 온 길 억울하고,
서둘러 앞으로 가려 하니 가야 할 길 막막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
우리의 최근 진통이 아닐런지요?
광야의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문득 문득 생각나고 떠오르는 애굽의 그리움과 사무침은,
우리를 더 큰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곤 합니다.
'차라리 예수를 믿지나 말 것을 그랬나?'
'누가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줄 알았나?'
'차라리 은혜 받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 걸 그랬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감정의 기복도 시간마다 춤을 춥니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들려 오는 애굽의 소식들은,
아물어 가던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합니다.
이래서 속 상하고, 저래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광야의 길이 초행이라 더욱 더 힘겹고 불안한 듯 합니다.
광야의 일상은, 온통 풀벌레 소리와 짐승 우는 소리 뿐
위로와 격려의 말은 침묵하는 곳입니다.
숨을 곳도, 쉴 곳도, 피할 곳도, 편히 누울 곳도 없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마저, 나를 찌르고 누릅니다.
그렇다고 먹을 양식도 풍성하지 않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극도의 외로움입니다.
어디 한 곳, 누구 하나, 내 마음 알아 줄이 없고
내 마음 붙일 곳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이방인 뿐입니다.
혼자 아파야 하고,
혼자 이겨야 하고,
혼자 감당해야 하고,
혼자 싸워야 합니다.
아무도 나의 힘 되어 주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이해 못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하며,
내가 날 봐도 시원치 않은데, 누가 나를 반기겠습니까?
병들고 찢긴 영혼
나도 내가 싫은데,
누군들 좋아하겠습니까?
다 부질 없음을 알면서도 또 사람에게 기댐을 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아담의 후예들인가 봅니다.
이러다가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망할 것 같습니다.
끝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 이 광야에서 벗어날지도 모름이,
더욱 더 기력을 쇠하게 하고, 마음의 병을 중하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생각하면
살아 있음이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리도 밤은 짧은지...
'몇 날이고 깨어나지 않을 수는 없는지..'
'남들은 잠도 많더만...'
'다른 것들은 잊어 버리기도 잘 하더만...
어째 그렇게도 통증의 조각들은 선명하게
새록 새록 밀물되어 기억에 새겨지는지...
'눈 뜨자 말자, 어제의 삶의 무게가 배가 되어,
또 하루를 짓누릅니다.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이미 들켜 버린 고난 앞에 잠 마져 비켜 갑니다.
어제의 상처와 긴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오늘은 또, 어떤 낯선 공격 앞에 시달려야 하는지...
방어할 기력 조차 없는 나를,
이 하루도 가만 두지 않을 듯 싶습니다.
일찍부터 서두름이 오늘도 심상치가 않을 듯 합니다.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 냄'이라고 말함이
더 적절한 표현인 듯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광야생활의 설레임과 신선함도 잠깐,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지쳐만 갑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보다 짐승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습보다 블레셋 군대의 병사들의 모습이, 더 또렷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보다 적들의 손이 나를 더 움켜 쥐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쯤 주님이 심방 오셔서
"사랑하는 자녀야! 많이 힘들지?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더 기운을 내!"
라고 하신다면 죽어도 참을 터인데,
하나님의 침묵하심에는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왜 참아야 되는지?'
'무엇 때문에 참아야 되는지'를 모름이
더 큰 속상함으로 나를 무너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원망도 후회도 못하는 것은,
나의 죄를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렇게 하루가 저물기를 막연히 지켜 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 갑니다.
정말이지, 광야를 이미 통과한 지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입니다.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없었다면, 벌써 안 참았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선을 베푸신다'는 말씀이 없었다면, 못 기다렸을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말씀이 없었다면, 악으로 돌아 섰을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없었다면, 벌써 도망이라도 갔을 것입니다.
형편은 점점 형편 없어지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지라도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없으신 말씀과,
그 말씀의 성취를 붙들고
이렇게 버티고 있음이 또 다른 은총일 뿐입니다.
광야가 아니었다면
내 혈기, 고집, 교만, 탐욕, 성질, 모난 성품, 위선, 가증, 자존심...
변화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조금도 실수함이 없으셨음을 압니다.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충분히, 잘 하신 일입니다.
언제나 광야의 모진 훈련으로 몰골은 상하여 있지만,
그 속에 살며시 감추어진 또 다른 나의 모습에,
그저 다행스럽고 감사할 뿐입니다.
기왕에 광야로 몰아 넣으셨으니
하나님의 사람 만들어 주시옵소서.
철 들고, 사람 되고, 알곡 되어
광야학교 1등으로 졸업하게 하옵소서.
사람은 누구나, 애쓰고 힘쓴다고 겸손해지고, 성질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지경까지 가야, 비로소 조금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맞아야 성질도 조금씩 죽습니다.
그런 면에서 맞음이 은혜이며, 고난이 유익입니다.
더 나아 가 광야학교가 주는 유익함의 절정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의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교만해서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상처 잘 받고, 사랑 받기 만을 끝없이 요구합니다.
그러나, 교만이 부서지면
웬만해서는 상처도 잘 안받지만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이 작업을 가능케 하는 학교가 광야학교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비극과 불행은
고통스러운 환경과 상황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귀한 일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하여 만나는 주님의 은혜는
최고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고난 자체가 자랑은 아니지만,
고난을 통하여 받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며 영광입니다.
반대로 은혜 없는 고난, 주님 없는 광야는 비극의 현장이겠지요.
그러므로, 고난 자체를 즐기거나 자랑치 마십시오.
고난을 통하여 만난, 은혜와 성숙을 누리고 자랑하십시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편하고 부족함이 없는 애굽이라도
'바로 왕'과 함께 하는 애굽생활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힘든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광야생활은 신나고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싫은 사람과 여행을 한번 해 보십시오.
얼마나 지루하고, 하루가 천년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는 여행하다가는 먹을 것이 떨어져도 감사하고,
길을 잃어도 감사하고, 추워도 괜찮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고생하다가 죽어도 한이 없는 것입니다.
광야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 생활은 기쁘고 신나는 곳입니다.
하나님 없는 궁궐 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가 바로 천국입니다.
광야는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면, 찾을지라도 안 보일 것이 광야생활입니다.
분명한 것은 광야의 삶은, 잠깐 통과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하지,
목적지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광야의 시간이, 나중에 영광의 size가 될 것이기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벌 중에 무서운 벌은 '내버려 두시는 것'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는 것,
우리에게 아무 일이 많은 것은 특권이며 축복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투명한대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난다면 혹, 당신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매를 신속히 대시어 돌아서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 안할 수 없는 이유는,
혈기를 참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겸손 안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 안할 수 없는 이유는,
기도 안할 수 없는 이유는,
말씀 안 읽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막대기가 너무 가까이에,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를 많이 맞으면,
매집이 좋아지는 단점도 있겠지만
반듯하게 성숙하는 장점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 가기 싫어하듯,
성도들도 광야학교를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때려서라도 학교에 보내듯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때려서라도 광야학교로 밀어 넣으십니다.
왜인가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고생 안시키기 위해, 작은 고생하라 하심입니다.
다~ 우리, 잘 되라고 하심입니다.
광야 없는 성숙과 축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부모가 가기 싫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 놓고 뒤돌아 서서 마음 아파 하듯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혹독한 광야학교에 밀어 넣으시고
돌아 서서 울고 계십니다.
우리가 갖가지 고난으로 힘겨워 할 때, 사실은 하나님이 더 힘들어 하십니다.
자녀가 힘들 때, 부모가 더 힘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기왕 맞을 매라면 기쁘게 맞읍시다.
기왕 들어 온 광야라면,
기쁘게 훈련 받아 우등생(모범생)으로 졸업합시다.
매 맞을 때 도망가거나, 광야에서 탈출하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재수, 삼수일테니까요.
너무, 광야 자체를 깊이 묵상하지 마십시오.
고난의 건너 편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지금 처한 상황들과 지금 찌르는 가시들로 인하여,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그 상황과 그 가시가 아니었다면
혹, 내 영혼 병들고 잠들어 버림 받을까 하여
눈물을 머금으시고 허락하신 훈련장이며,
박아 놓으신 가시임에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러니, 이제 광야를,
내가 가려 하지 마십시오.
은혜로 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은혜로 사는 법을 알아 가십시오.
내가 사는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은혜로 사는 광야는 신나는 곳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믿는 예수는, 쉽고 즐거운 일입니다.
광야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유일한 생존의 조건이었듯
고난 중에 있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은혜의 통로 뿐입니다.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삶은 그 어디나 감옥이지만,
은혜 있는 광야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며
하루 하루가, 축제의 날임에 틀림이 없을 겁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항상 기뻐 하는 것
주의 성령 함께 함인 줄 믿습니다.
♥ 3.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에베소서 1:1-10절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使徒)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聖徒)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信實)한 자(者)들에게 편지(便紙)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主)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찬송(讚頌)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복(福)으로 우리에게 복(福) 주시되, (4)곧 창세(創世) 전(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自己)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者)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恩惠)의 영광(榮光)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恩惠)의 풍성(豊盛)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罪) 사함을 받았으니, (8)이는 그가 모든 지혜(智慧)와 총명(聰明)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秘密)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爲)하여 예정(豫定)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배종부 목사 부흥성회 현황
2007년 부흥성회 단회 03개 교회
2008년 부흥성회 단회 09개 교회
2009년 부흥성회 단회 11개 교회
2010년 부흥성회 단회 05개 교회, 완편 03개 교회
2011년 부흥성회 단회 19개 교회, 완편 26개 교회
2012년 부흥성회 단회 01개 교회, 완편 19개 교회
2013년 부흥성회 단회 10개 교회, 완편 11개 교회
2014년 부흥성회 단회 01개 교회, 완편 06개 교회...
2024년 3월 현재 매 주일 완편 부흥성회 인도의 氣焰(기염)!
2008.6.22(주일) 경기 김포 <꿈이있는교회> 일일부흥성회
윤0 성 목사가 한번 부른다고 하여, 그 말을 따라 무려 8개월 동안 계속 주보에 광고를 내고, 마침내 일일부흥성회를 한번 했다.
어려운 교회 목사를 한번 초청하여 설교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의미 깊고 소중하다. 그 목사가 가진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계획이 있는지 모른다.
배목사여! 너도 당장 어려운 교회 목사들을 초청하여 한 달에 한번 부흥성회를 실시하라. 너를 위하여, 하나님이 쓰실 그 사람을 위하여...
사례로 주는 선교비는 기본 100만원이다. 매월 첫주 오후예배 1회부터 일단 시작하라. 전 교인들을 다 참석하도록 동원하라.
매월 네 개인적으로 교회 건축헌금 100만, 새성영성관 헌금 100만, 해외선교헌금 100만, 국내선교헌금 100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시하라.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며, 지난 15년 간을 개척교회 목사님들 수 백명을 강사로 불러, 나의 작은 새성교회 강단에 세웠다. 줄 잡아 30여 억원의 돈을 그들에게, 진정 나의 피를 철철 쏟으며 쏟아 부었다.
사람들은 나의 이 처절한 결단의 삶을 알 리가 없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1.자기가 죽어 버린 사람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弟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自己)를 부인(否認)하고, 자기(自己)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성령 충만한 사람
(행6:1)그 때에 제자(弟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人)들이 자기(自己)의 과부(寡婦)들이 그 매일 구제(救濟)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怨望)한대, (2)열 두 사도(使徒)가 모든 제자(弟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형제(兄弟)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聖靈)과 지혜(智慧)가 충만(充滿)하여 칭찬(稱讚) 듣는 사람 일곱을 택(擇)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우리는 기도(祈禱)하는 것과 말씀 전(傳)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聖靈)이 충만(充滿)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敎)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擇)하여 (6)사도(使徒)들 앞에 세우니, 사도(使徒)들이 기도(祈禱)하고 그들에게 안수(按手)하니라.
3.칭찬 듣는 사람
(3)형제(兄弟)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聖靈)과 지혜(智慧)가 충만(充滿)하여 칭찬(稱讚) 듣는 사람 일곱을 택(擇)하라.
4.착하고 충성된 종
(마25: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者)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主)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主人)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忠誠)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參與)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者)도 와서 가로되 주(主)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主人)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忠誠)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參與)할지어다 하고,
5.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
(마25: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者)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主)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主人)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忠誠)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參與)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者)도 와서 가로되 주(主)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主人)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忠誠)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忠誠)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參與)할지어다 하고,
6.순종, 복종하는 종
(히13:17)너희를 인도(引導)하는 자(者)들에게 순종(順從)하고 복종(服從)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靈魂)을 위(爲)하여 경성(警醒)하기를 자기(自己)가 회계(會計)할 자(者)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有益)이 없느니라.
7.목사에게 잘 하는 종
(마10:40)너희를 영접(迎接)하는 자(者)는 나를 영접(迎接)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迎接)하는 자(者)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迎接)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先知者)의 이름으로 선지자(先知者)를 영접(迎接)하는 자(者)는 선지자(先知者)의 상(賞)을 받을 것이요, 의인(義人)의 이름으로 의인(義人)을 영접(迎接)하는 자(者)는 의인(義人)의 상(賞)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弟子)의 이름으로 이 소자(小子) 중(中)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者)는 내가 진실(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決斷)코 상(賞)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나 만이 잘 할 수 있는 것 두 세가지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자.
정말로 해 보자.
진짜로 해 보자.
전심으로 해 보자.
기독교 2,000년 동안 하나님은 당신의 일군들을 세워 교회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때로는 박해 중에서, 때로는 세속주의 물결속에서 하나님은 지상의 교회들을 지키시고 택하신 일군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어왔으며, 복음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고, 교회의 일군 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요,
②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요,
③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처소요,
④ 교회는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형성하는 지체들 속에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택하여 세운 일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 교회는 거룩한 곳이어야 하고,
②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③ 교회를 통하여 온갖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④ 교회는 만인의 기도하는 집이고,
⑤ 만인이 찾아 들어 와 속죄의 은혜속에서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려야 할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등한시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교회의 문을 닫으면, 땅 위에 모든 은혜도 닫히고, 모든 길도 닫히고, 모든 축복도 닫히게 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 역사 속에 드러난 인류 역사의 계시였습니다.
20세기 동안 역사의 흐름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왕성하였던 나라들은 모두 땅 위에서 선진국가가 되었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개인이나, 민족은 모두 번영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것이 서구의 나라들이었습니다. 복음의 확장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행적이 유대 땅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 안디옥으로, 스페인으로, 로마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왔는데, 그 과정에서 보면, 아시아는 저들에 비하여 복음이 늦게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문이 늦게 열리게 되었고, 아시아는 잡다한 이방종교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제일 빈한한 나라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왕성해야, 나라도 왕성해집니다. 교회의 문이 닫히면, 모든 것이 닫힙니다.
북한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문을 닫았더니, 오늘날 먹는 양식 마저도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구 소련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문이 닫히니, 결국 나라도 와해 되었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로 서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서려면, 교회의 일군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교회의 일군들이 바로 서 있으면 나라도 바로 서게 되고, 가정도 바로 서게 되고, 민족도 바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바로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제직들이 바로 서지 못하고, 직분 된 우리들이 사회와 역사 앞에서 바로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서 있지 못한 결과로, 오늘의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워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은 신중하게, 기도하면서 택하여 세워야 하겠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집사를 택하여 세울 때 온 교회가 기도하면서 택하여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택하여 쓰시려고 하는가? 입니다.
1. 하나님은 먼저 믿음을 가진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은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은 믿음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지식, 재물, 지위, 그런 것은 세상에서는 우선으로 칠지 모르나, 하나님의 일군은 믿음이 없으면 합당치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아야, 그 다음에 무슨 일이든지 맡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였습니다.
그를 택하실 때, 하나님은 그의 무엇을 보았습니까?
지식, 사회적 지위, 재물... 그런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의(義)로 여긴 것은 그의 믿음을 보고 그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3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산 믿음의 소유자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은 그의 <존재>와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賞) 주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박해와 어려움에서도 낙심치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군은 바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6:3절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3:8절에 "이와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의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자>를 택하여 쓰십니다.
오늘의 사회는 능력 위주의 사회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 씁니다. 능력 없으면 자연히 도태되고 밀려 납니다. 그래서 모두들 능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능력 있고 교만한 사람은 안 쓰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칩니다. 교만은 사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완악이란?
① 마음이 굳은 사람,
② 고집 센 사람,
③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일군은 이런 사람들은 부적당합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믿음도 자기 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안 합니다. 더더욱 교회에서 자기 주장만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멀리하십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 중에 하나님이 물리친 것을 보면 모두 교만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울도, 여로보암도, 히스기야도, 모두 교만했기에 물리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이 능력이 없어서?
저들이 전술 전략이 모자라서?
저들이 싸움에 용맹함이 없어서 하나님이 물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만이 행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이란 속권(俗權)의 권위를 가지고 제사장 만이 행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눈 밖에 벗어 났었습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유다의 제 13대 왕으로 나이 25살에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부친 아하스 왕과는 달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성전 중심의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전국적으로 우상을 금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였고, 예루살렘 성안에 수로(水路)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 들이는 등 나라를 부강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만으로 변하여 자신이 나라를 번영시켰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교만을 떨었을 때, 죽을 병에 걸리게 하였습니다. 결국 통회 자복하여 겨우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신(使臣)들에게 나라의 부강(富强)을 자랑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나라의 보물들을 다 내보였기에, 결국 바벨론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겸손히 순종할 줄 아는 사람들을 미쁘게 여깁니다. 그 모범이 예수 그리스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자기를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왔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가장 높이 들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2:3절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세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말씀을 주고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33:11절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陣)으로 돌아 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은 모세 뿐입니다. 친구와 같이 서로 주고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광채가 드러 났습니다. 그리고 120세를 살면서도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이처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3. 하나님은 통회 자복할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온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완전무결한 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두가 허물이 있었고, 모두가 실수가 있었고, 모두가 실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회개할 줄 아는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윗 왕을 메시아 족보에서 아브라함 다음으로 꼽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행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조상으로 올랐습니까?
다윗은 10계명을 셋이나 범한 죄인이었습니다.
① 첫째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으니, 제 7계명을 범한 죄인입니다.
② 그 뿐입니까?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충복(忠僕)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내보내 죽게 하였으니,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했습니다.
③ 그리고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는 제 열번째 계명을 범했습니다.
이렇게 범한 죄인이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의 성군(聖君)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는가? 입니다. 그의 철저한 통회 자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단 선지의 책망을 듣는 순간, 그는 용상에서 내려 앉아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다윗을 보았고, 그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우리는 자기 변명 뿐이요, 스스로 죄인 됨을 고백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베드로의 경우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① 한 비자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하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면서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② 그 후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니, 베드로는 이번에는 맹세하며 부인하며 하는 말이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③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니까, 이번에는 베드로가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그것도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하였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한마디라도 책망하는 말도 없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만 묻고는 "내 양을 치라"고 사도권을 위임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다시 잘 읽어 보시면 세번째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할 때, <곧 닭이 울더라>라고 하고는 마태복음 26: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이렇게 자신의 허물과 죄를 통회 자복한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그릇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보존하지만, 죄를 범했을 때에는 철저하게 통회자복케 함으로 씻어서 쓰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용기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두고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통회 자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는 사람은 오늘도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나와서 겸손하게 자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먼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고,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하는 사람들을 들어서 쓰십니다.
어디에서 완전한 사람을 고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항상 돌아 보면서, 부단히 정진하는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