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계약 집중연재 -「침투당한 공화국-서독內 슈타지」 발췌(2)슈타지에게 놀아난 서독 학생운동
저자 후베르투스 크나베 독일연방정부 슈타지 文書 연구소 연구원
1959년 출생. 브레멘 대학에서 역사·독일문학 전공. 베를린에서 박사학위. 1992년부터 독일연방정부의 슈타지 문서 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東유럽 在野운동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서도 냈다. 독일연방의회의 과제로서 슈타지 문서 연구에 착수했다.
번역 金 周 一 前 조선일보 논설위원, 駐헝가리 특파원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생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瀆神(독신), 다시 말해 神에 대한 不敬(불경)과도 같았다.
역사학자이자, 한때 사회주의 독일학생연합(SDS: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 프랑크푸르트 지부 간부였던 볼프강 크라우스하르는 1998년 4월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생시절」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크라우스하르는 주간지 슈테른의 청탁을 받고 이 글을 썼지만, 슈테른 편집간부들은 막상 글을 받아보고는 싣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크라우스하르는 문필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紙의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68학생운동 세대에게는 오늘날까지도 「反動의 기수」로 통하는 이 신문에 말이다.
이 기고문에서 크라우스하르는 「서독 학생운동에 대한 동독 정보기관들의 야만적이고 비열하기 짝이없는 침투행위」를 지적하고 나섰다. 동독정보기관 슈타지 문서가 공개된 지 7년이 지나고서도 여전히 터부로 여겨졌던 이 아픈 부분, 즉 서독 학생운동의 「실체」를 크라우스하르가 노골적으로 건드리고 나왔으니 좌파들의 분노어린 반향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서독 시절의 「의회 밖 야당(APO-Ausserparlamentarische Opposition·在野)」 세력은 때로 좀 지나친 면이 있긴 했지만, 戰後(전후) 서독 사회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작용을 했다는 점에서는 대단한 해방운동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오랫동안 끌어온 교육개혁을 비롯해서 나치 과거사 극복, 섹스 혁명, 서독사회 제반 영역에서의 민주화 성취 등은 모두 오늘날까지도 학생운동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학생운동을 戰後 서독 역사에서 가장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당시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서독 사회의 한 작은 부분에 국한되었던 것이고, 또 마르크시즘이라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도 이 지구상 대부분의 실험장에서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운동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독 지역에서는 그와 관련한 神話가 깨지지 않았다.
서독 수도 본의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는 그것이 좌파에 의해 주도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동독 공산당 지도부와 이들이 조종하는 슈타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그 이유는 陣營(진영)간 대립논리 때문이라 하겠다.
東베를린의 공산정권은 처음부터 서독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1956년 불법화된 독일공산당(KPD)만 이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민당內 좌파세력, 노조, 그리고 대학생들을 끈질기게 협력 상대로 포섭하고, 이용, 악용했다. 그들은 또 엄청난 예산과 힘을 쏟아 노조와 정당과 각종 조직에 침투해 들어갔는데, 그것은 공산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이들 정치·경제·사회 단체에서만이라도 체제에 반대하는 좌파세력을 조성키 위해서였다. 동독 공산당은 이런 성격의 「對서독 작업」(베를린 장벽 구축 전까지는 이를 「全獨(전독) 작업」이라 일컬음)을 이행키 위해 동독의 모든 행정 구역과 대중 조직들을 총괄하고, 서독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중앙통제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다.
청년·학생 운동 통해 공산주의 침투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는 1961년 11월 사민당의 소위 「兩立不可(양립불가) 결의」 이후부터는 노동자 계급의 敵과 투쟁키 위한, 사민당의 잠재적 연합세력들 가운데 1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독에서는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독 공산당과의 정치적 접촉이 금기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SDS는 동독의 자유독일청소년단(FDJ:사실상의 동독 공산당 청년조직)과 일찍부터 상호 교류 협력해 왔다. 1950년대에 활동한 여러 反核(반핵) 단체들과 1955년 대학생 잡지로 창간된 「콩크레트」誌도 동독으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클라우스 라이너 뢸의 편집책임下에 출판된 「콩크레트」誌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독의 자유독일청소년단(FDJ) 중앙 협의회에 의해 창간되어 곧 서독 대학생들에 대한 공산주의 침투 본부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서독의 각 대학內 잠재적 「진보세력」에 침투하고 이들을 이용키 위해 동독 공산당이 들고나온 전략은 소위 「집게운동」, 다시 말해 양면공격이라는 것이었다. 동독 공산당과 그 산하 청년조직이 정치 프로파간다를 비롯해서 서독內 파트너 단체를 초대하고, 접촉하고, 「행동을 위한 연합체」를 구성하고, 서독에서의 불법활동을 위한 동지를 규합하는 일을 맡은 반면, 국가안전부는 이와 병행해 은밀히 서독지역으로 간첩을 침투시켜 정보활동을 수행하는 식의 양면작전을 펼쳤다. 이런 방법으로 동독 측 정치적 「대화 파트너」, 즉 동독 권력자들은 서독의 모든 주요 내부정보를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서독內 좌파 재야 세력을 도구로 이용하는 데 필요한 기초정보를 정기적으로 얻어냈다.
서독 사회에 대한 양면침투 활동은 대부분 철저한 비밀 속에 계획, 이행되어, 오늘날까지도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그 실체가 연구되고, 드러나 있다. 학생운동에 관한 연구는 이제까지 「68 학생운동 세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현대사 기술에서도 지난 날의 그 학생운동 신화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슈타지의 서독 좌파세력 침투와 관련해서도 오직 단편적인 문서들만이 전해지고 있다. 일차적으로 슈타지 본부가 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슈타지의 행동양식은 西베를린의 例를 참고하면 비교적 상세히 再구성할 수 있다. 西베를린에서의 정보활동은 소위 「방첩」 담당 정보부서들, 특히 SDS를 상대로 조직적으로 침투 활동을 벌인 슈타지 본부 제20국(1964년까지는 제5국)도 대규모로 관여했었다. SDS 西베를린市 지부는 전체회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0명 회원을 거느리고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부여되었다.
「서독의 정체를 폭로한다」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가 서독內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에 침투해 들어간 최초의 기록문서는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나왔다. 당시 이미 親동독 세력들은 서독 학생연합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58년 10월 전국 대의원 회의에서 처음으로 정통 좌파출신 학생 오스발트 휼러가 연방의장에 선출되었다.
3개월 후인 1959년 1월3일과 4일, 양일간 대학생 反核 위원회는 西베를린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절차상의 트릭으로(뢸:우리는 다수세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승리를 이끌어 내고 싶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동독과의 직접협상과 양독간에 『어떤 형식의 과도적 연방안이 가능한지』 조사해 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같은 요구는 동독 공산당 정치 총노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당시 일반 국민들 사이에 폭풍 같은 분노를 유발시켰다.
오스발트 휼러 의장이 독단으로 지시해 만든 전단을 통해 SDS 지도부는 곧 말썽도 많은 이 대회 결의안에 지지를 표명하고 나왔다. 그 텍스트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전국 각 대학에 배포되었다. 그들은 맹세하듯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학생 대회는 회의 全과정에서 민주적 규칙을 철저히 지켰고, 모든 결정은 진지하고도 철저한 토론을 거쳐 정당하게 이루어졌다」
그 당시 이미 사민당 간부회의에서는 이들 SDS 지도부가 그 많은 전단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어디서 조달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1970년대 프랑크푸르트市 소재 마르크스주의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SDS 회장이었던 에버하르트 데네는 사민당 당수 에리히 올렌하우어에게, 『만약 SDS가 베를린에서 「명백히 동독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대회를 개최」했고, 그러면서 동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민당 측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법정에 10만 마르크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해 뜻을 이루었다.
1950년대 말 이후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주관해 「서독의 정체를 폭로한다」고 벌인 캠페인은 SDS 내부에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SDS의 일원인 볼프강 코펠과 라인하르트 마리아 슈트레커였다.
1954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코펠은 원래 서독 칼스루에市 출신으로서 SDS 의장 휼러의 측근 동료였다. 코펠은 주로 동독 측 자료를 근거로 해서 「속죄하지 않은 나치 법관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그 6개월 뒤, 그는 나치 출신 서독 법관들의 판결문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후에 코펠은 동독의 지원을 받는 「독일평화연맹(DFU)」 간부로 일했다.
중도파로 가장, SDS로 침투
슈타지는 이 무렵 뚜렷한 목표下에 계속해서 스파이를 SDS 안으로 침투시키고 있었다.
당시 자유 베를린대학(西베를린 소재) 학생이던 페터 하일만도 그렇게 SDS에 침투한 슈타지 첩자였다. 동독의 자유독일청소년단(FDJ) 임원을 역임한 바 있는 하일만은 1956년 동독의 한 감옥에서 슈타지에 협력하기로 서약하고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프락치 임무를 부여받고 곧 바로 西베를린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슈타지의 지시에 따라 대학에 등록한 그는 사민당원들과 접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SDS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하일만은 국제학생연맹 독일 대학생협회(VDS), 그리고 그 산하조직인 대학생연구회에서도 슈타지의 첩자로 암약했다. 처음엔 「율리우스 뮐러」라는 가명으로 나중엔 「아드리안 페퍼코른」이라는 가명으로 정보 보고서를 작성한 그는 1980년대 말까지 적극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해냈다. 그 代價로 하일만은 이미 1950년대에 400에서 500마르크까지의 월급 및 용돈을 받았고, 특별수당도 한 차례 받았다.
하일만은 슈타지에 열심히 정보보고를 하면서도 밖으로는 온건한 중도파 입장인 것처럼 행동했다. 1959년부터 1961년 사이, 그는 SDS 내부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평가해 정기적으로 슈타지에 보고했으며 내부적인 결의사항과 회의록 내용들도 함께 넘겨 주었다.
1959년 말썽도 많았던 프랑크푸르트 대회에 참석한 바 있는 하일만은 SDS 의장 휼러派가 너무 앞서 나가면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고 당시 슈타지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하일만은 그의 보고서에서 콩크레트 그룹이, 심지어는 소련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앞선 요구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얼마 후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 베를린 지부는 서독 괴팅겐에서 열리는 비상 연방대의원 대회에 하일만을 대표로 파견했다. SDS 연방간부회의 위원 선거에서 콩크레트派는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이와 달리 슈타지가 침투시킨 스파이 페터 하일만은 마침내 5명으로 구성된 간부회의 입성에 성공을 거두었다.
하일만은 이제 간부회의에서 나온 모든 회의록은 물론 간부회의 위원들의 주소, 곧 있을 인사결정에 관한 정보,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민당 지도부와의 갈등 문제 그리고 西베를린 지부內의 활동계획 등과 관련된 정보도 모두 슈타지에 보고했다. 간부회의 활동을 통해 하일만은 SDS를 「사민당의 왼쪽」에 자리하는 단체로 부각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동독과의 공식적인 관계는 아주 서서히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이었다.
1959년 10월, 실제로 최초의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 공식 대표단이 FDJ(자유독일청소년단·동독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의 초청을 받고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그러나 FDJ의 초청에 따른 방문은 아직은 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에서 내부적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1961년 3월, 하일만은 슈타지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SDS와 FDJ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아직 시기상조다. 다른 기관들, 이를테면 라이프치히 메세(전시회)라든가 대학들, 또는 여러 연구소들을 통해서는 아마도 접촉이 가능할 것이니 최소한 이를 계획이라도 해 두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키 위해 하일만은 대개 2주일에 한 번 슈타지와 만났다. 하일만을 관리하는 슈타지 장교 빌만 대위는 서류에 기재한 메모에서 하일만에 대한 만족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비밀직원(GM)은 업무에 의욕적이고, 그리고 창의적이다. 그는 항상 흥미롭고 국가안전부에 유익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키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언제나 모범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것이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리라」
西베를린 학생운동에 침투한 바르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하일만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다는 정보가 슈타지에게 들어왔다. 「GM과의 긴밀한 협력도 이제 한동안 중단해야 할 기회가 왔다」고 슈타지는 생각했다.
동독 국가안전부는 하일만을 포기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SDS 西베를린 지부內에 새로이 설치한 비서 자리에 발터 바르텔이라는 또 다른 스파이를 앉혔기 때문이다. 동독 공산당의 오랜 당원으로 매사에 활동적인 바르텔은 이때부터 西베를린 학생운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東베를린 소재 훔볼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인민 경찰로 근무한 그는 1950년대 초반 슈타지에 보고서를 올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바르텔은 그러나 훔볼트 대학內 당지도부와의 논쟁 끝에 1956년 西베를린으로 넘어갔다. 3년 후, 슈타지 요원과 접선하면서 그는 다시 슈타지와의 협력의사를 밝히고 나왔다.
바르텔이 부여받은 주요 과제들 중의 하나는 「SDS內 좌·우파 그룹에 관한 정보와 이들 좌·우파 그룹의 동·서독 정책과 관련된 SDS의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SDS 주최 세미나라든가 SDS內의 개별 그룹 및 수많은 회원들에 관한 정보, 그리고 회의록이라든가, 회람, 편지 또는 회원명부와 같은 유용한 협회 내부 자료도 전해 주었다.
FDJ와 슈타지의 합동 작전
바르텔은 지속적으로 때로는 매일같이 슈타지에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그냥 바르텔이 하라는 대로 작성한 SDS 회원들의 인사기록 카드들은 그렇게 해서 모두 슈타지의 손에 들어갔다.
바르텔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슈타지의 서독 침투 개선안을 주기적으로 내놓았다. 그가 보기엔 西베를린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공산주의 침투공작은 때로 서툴기만 했다. 바르텔은 슈타지에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어떻게 하면 SDS內에서 동독의 지위를 강화하고, 반대로 사민당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나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1960년 7월, 마침내 사민당은 SDS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키로 결정했다. 그로 인해 바르텔도 당에서 받아오던 월급을 더 이상 못 받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슈타지의 비밀 정보요원(GM)인 바르텔은 FDJ(자유독일청소년단)에게 사민당의 재정지원 중단으로 생긴 빈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슈타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일련의 대학생들이 요즘 사민당에 대한 불만으로 SDS에 새로이 가입했다면서 활동강화를 통해 이들 대학생들의 긍정적 태도를 좀더 확고히 다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바르텔은 SDS의 심각한 재정난과 관련하여 슈타지로부터 익명으로 당장 지원을 받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슈타지는 이렇게 호응했다.
「FDJ를 위해 제안한다. 현재 계좌에 5마르크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니 SDS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닌 모양이다.
대회참석에 교통비와 여타 비용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SDS에 대한 FDJ의 비밀 재정지원 계획을 가능하면 조속히 이행하기 바란다. 11월 초엔 SDS 西베를린 지부 간부회의 위원선거가 있다. FDJ가 원하는 후보자를 당선시킬 좋은 기회라고 본다」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SDS는 사민당과의 완전 결별만을 모면했다. 이같은 경험을 계기로 바르텔은 그 얼마 후 슈타지에 또다시 자신의 SDS와 관련한 전략 방안을 보고했다.
「휼러 의장派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에서나 볼 수 있는 획일화된 용어들을 쓰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분명한 목표下에 차근차근히, 그러면서도 전술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새로운 좌파세력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밖의 이런저런 제안을 갖고 바르텔은 계속 슈타지의 문을 두드렸다. 서독에서 찾아오는 나이브한 방문객들을 상대로 좀더 강력히 동독 공산당 가입을 권유키 위해 1961년 초 그가 내놓은 제안도 그런 것이었다. 바르텔은 그같은 목적으로 내놓은 이 제안에서 상설 전시장과 영화상영장, 거기다 덧붙여 옷을 잘 차려입고 말 솜씨가 좋은 상담 전문가를 갖춘 정보센터를 설치하고 주장했다.
西獨 헌법수호청의 정보제공자가 된 슈타지 스파이
FDJ(자유독일청소년단)에게는 유명 교수의 강연회와 가벼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저녁 대화를 마련해 젊고 편견이 없는 高학력자들을 주로 초청하라고 권했다. 활동기반을 넓히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西베를린의 진보적인 교수들도 동참시키자고 했다. 열정에 넘친 바르텔은 심리적인 방법을 써서 약 2만5000명의 西베를린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들의 부르주아적 이념을 개조해 보는 것은 어떠냐는 의견도 내놓았다.
서독에서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바르텔은 슈타지에 동독 언론들로 하여금 자신을 비방하는 글을 쓰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또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를 브란트 도당의 부속물로 전락시키려 든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글을 직접 써서 함께 보내기도 했다.
바르텔은 1960년 10월, 마침내 슈타지의 허락下에 신원을 숨기고 서독 헌법수호청에 정보제공자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슈투텐트」라는 가명으로 그곳에서 정보 제공자로 일하는 代價로 정기적인 봉급을 받았다.
바르텔의 새로운 임무수행에 만족한 슈타지는 1961년 10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르텔은 윌슨과 마셔 두 스파이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는데, 이 자료가 함께 도움을 주어 이들을 체포하게 되었다」
바르텔 대신에 이젠 그의 친한 친구인 디트리히 슈타리츠가 SDS內 정보를 빼내어 슈타지에 넘겨 주는 임무를 맡았다. 젊은 정치학자인 슈타리츠를 슈타지에 소개하고, 나중에 서독 헌법수호청에도 소개한 것은 바르텔이었다. 슈타리츠는 자신에 관한 슈타지 문서가 공개된 후 언론기관에 돌린 해명서에서 그 누구도 고의로 해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학 교수로서 그 사이 정년 퇴직한 이 동독 연구가는 이젠 지난 날 동독 공산당 기관지였던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에 서평을 기고하고 있다. 슈타리츠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58년에 벌써 SDS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그 3년 뒤 西베를린의 오토-주르 연구소에서 그룹회장 감투를 맡았다. 1962년에는 SDS 베를린 지부 간부회의 정치 자문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슈타지의 진보세력의 기반강화 노력
1961년 9월 슈타지 간첩으로 포섭된 슈타리츠는 「에리히」라는 가명을 사용해 정기적으로 SDS로부터 보고를 올렸는데, 그의 임무수행 열성은 결코 「전임자」에 뒤지지 않았다.
슈타지가 주로 슈타리츠로부터 보고받은 것은 SDS 내부갈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슈타리츠는 슈타지 요원과 만날 때마다 여러 가지 과제를 부여받았다.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 내부 비공개 모임 및 각종 일반회의에 관한 보고에서부터 개개인의 주소자료 제공에 이르기까지 그 과제도 다양했다.
슈타리츠가 보내 온 관련 문서들을 보면 많은 부분에서 마치 SDS의 「Who’s Who」, 즉 인명사전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특히 베를린 지부 회원들과 간부들의 경우, 개개인의 특징과 구체적인 경력 및 학력, 그리고 정치관이 특색 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는 슈타지에 많은 양의 인물 평가의 보고서를 건네 주면서 그 가운데서 적합한 인물을 골라 쓸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도 함께 주었다. 1962년 11월 스타리츠는 SDS 베를린市 지부회원 전체 명단을 슈타지에 넘겨 주었다.
슈타리츠의 정보 보고는 1963년 SDS로부터 서독 헌법수호청과 관련한 활동 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그해 4월 헌법수호청으로부터 「라베」라는 가명을 얻었다.
동독과 여타 소련 진영 국가들은 당시 점점 커지고 있는 좌파 재야 세력을 힘껏 지원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이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동독 국가안전부는 정보활동을 통해 진보적 사회세력을 지원하고 이들에게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과제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슈타지 두목인 에리히 밀케는 1965년 국가안전부 휘하 장성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현재의 서독 선거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에르하르트 정권과 그의 보복주의 정책, 비상조치법과 核무장, 그리고 월남戰 지원거부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것이다. 全세계 인류는 核정치는 그야말로 모험주의 정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밀케는 서독에서의 그같은 변화와 움직임이 자신의 권력 영역인 동독에까지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까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동독 젊은이들의 저질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을 일깨울 경우, 敵들에게 유리한 본능을 일깨울 경우 敵들에게 유리한 형세만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유념하라』고 했다.
뤼브케 대통령을 나치주의자로 모략
동독의 對서독 공작엔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대한 항의와 반대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동독 공산당은 이를 독일과 미국 관계를 이간시키기 위해 쐐기를 박는 데 조직적으로 이용했다. 그같은 목적을 위해 공산당 산하조직인 FDJ(자유독일청소년단)는 1965년 베트남의 참상과 관련한 수많은 자료를 SDS에 지원, 전시회를 개최토록 했다.
1966년 2월 FDJ 회원들은 西베를린 대학생들이 「더러운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에 이어 西베를린에 있는 아메리카 하우스 앞에 집결, 그곳의 미국 성조기를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은 당시 미국의 지원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던 孤島(고도) 西베를린에서는 정말 믿기 힘든 도발이었다. 공산 베트콩도 미군이나 월남군 못지않게 잔악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反美(반미)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는 비상조치법과 독일연방군(서독군) 및 北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도 그리고 동독을 인정하고 서독의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도 동독의 지원을 받았다. 1967년 6월2일, 이란 王 팔레비의 西베를린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 중, 대학생 벤노 오네조르그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자 동독 공산정권은 마치 國葬(국장)을 치르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屍身(시신) 행렬을 자신들의 영토로 통과케 했다.
1년 후 SDS가 수도 본을 향해 정부의 비상조치법에 항의하는 행군에 나섰을 때는 이들에게 특별열차까지 제공했다. 때로는 공산당수 발터 울브리히트가 직접 나서서 학생운동과 관련한 인쇄문을 편집하기도 했다.
나치 과거와의 비판적 대결, 또는 투쟁은 동독 공산당에게는 여전히 서독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 되고 있다. 동독 국가안전부는 「화해하지 않은 나치 사법부」에 대한 공격을 끝내고 이젠 그 누구보다도 1964년 6월 연방 대통령 재선 후 동독 공산당의 캠페인 표적이 된 하인리히 뤼브케에게 화살의 방향을 돌렸다.
공산당과 국가안전부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對뤼브케 공작 그룹」은 1966년 2월, SDS를 선동해 反뤼브케 운동을 벌이게 한다는 목표下에 FDJ(자유독일청소년단)가 초청한 SDS 간부 대표단과 함께 뤼브케 관련 전시회를 방문하고, 뎅글러 박사 동지와 대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SDS는 그 얼마 후 슈타지가 준비하고 정리해 준 다큐멘트를 서독에서 전시했다.
1966년 10월 본 대학이 뤼브케 대통령에게 대학평의회 명예위원 자격증을 수여하자 일부 학생들이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다. 1968년 2월에 있은 항의시위에서는 SDS 회원들이 본 대학 VIP 방명록에 있는 뤼브케 대통령의 서명에 나치 유태인 수용소 건축 기술자라는 말을 휘갈겨 써넣었다.
이 말은 뤼브케 대통령을 비방키 위해 동독 공산당이 선전용으로 개발한 용어였다. 뤼브케 대통령을 비방하는 이같은 투쟁은 1966년 3월에 이미 동독 공산당에 의해 전술로 승격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동독 공산당은 학생운동에서 강력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反권위주의 경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 反권위주의 학생운동 세력은 서방진영內 노동자 계급의 敵은 물론, 좌파 전통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反旗를 들고, 부분적으로는 중국 공산주의 노선 이탈자들의 영향을 받아 現存(현존)하는 사회주의, 즉 東유럽 공산주의에도 반대했다.
68 학생운동의 代父 루디 두치케
이름을 들자면 루디 두치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1961년 1월 베른트 라벨과 함께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에 가입하고 얼마 후 西베를린市 지부 자문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파괴 및 전복활동이라는 구상을 들고 나와 고참동지들로부터 불신을 샀다.
1966년 2월, 대학생 가두시위에 앞서 그가 야간 포스터 붙이기 운동을 통해 피압박자들에게 『무기를 손에 들어라』고 호소하고 나오자, SDS內 기득권 세력은 그의 저돌적인 행동을 이유로 협회에서 즉각 축출하고자 했다. 그 사이 다시 西베를린으로 돌아온 SDS 前 서기 바르텔은 이 사건을 슈타지에 이렇게 보고했다.
『두치케는 SDS內에서 철저히 無정부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西베를린에서 두치케 그룹이 벌이고 있는 활동이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銳意(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치케派 학생들을 판단할 때, 이들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보려는 평가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SDS內에서 이들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논쟁을 일으킬 경우, 그것은 얼마 동안 SDS를 마비시키거나 신뢰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해체로 몰고갈지도 모른다. 내 판단으로는 두치케 그룹의 행동은 그처럼 무모하고 도발적이어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 숨통을 끊어야 한다』
디트리히 슈타리츠 역시 슈타지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두치케를 두고 명백한 동독의 敵이라고 표현하면서, 1966년 12월의 베트남戰 반대데모 때 공산당수 발터 울브리히트의 초상을 태울 뻔한 사건도 그의 책임이라고 못박았다. 두치케는 동독의 사회주의를 더럽기 짝이 없는 사회주의로 표현하고 있다고 슈타리츠는 덧붙였다.
사실, 두치케는 동독 사회주의를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이다. 1940년 동독 루켄발데 근처의 쉐네펠트라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는 스포츠 기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두치케는 병역의무에 해당하는, 소위 동독 인민군에서의 「명예봉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대학입학이 불허되었고, 그러자 베를린 장벽구축 4일 전 西베를린으로 넘어갔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공화국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두치케는 SDS 西베를린市 지부장으로 1968년 2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대규모 학생집회가 있기 앞서 「행동 단일화」 문제를 놓고 FDJ와 직접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선박에 무기와 지원병을 실어 베트남 전선으로 보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슈타지·KGB의 反戰운동 조종
동독 공산당과 슈타지가 베트남戰 반대시위를 온 힘을 다해 지원했다는 사실은 두치케 관련 자료가 아닌, 일련의 다른 문서들에서 알아낸 것이다. 1966년 2월에 이미 알베르트 노르덴은 동료 정치국원인 베르너 람베르츠에게 西베를린에서의 베트남戰 반대시위와 관련한 정보를 편지에 담아 상세히 전해 주었다.
그는 그같은 편지와 함께 「미국의 베트남戰 개입과 그에 대한 서독에서의 논쟁」이라는 제목의 논문 한 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독일에서 베트남戰의 대량학살에 항의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은 정의와 민족의 자결 원칙,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全세계 전선의 한 부분이다」
동독의 슈타지와 소련의 KGB는 미국의 베트남 공격을 매도키 위한 조처를 통해 국제여론에 영향력을 행사코자 했으며, 시종일관 정치적 갈등상황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1967년 4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정보기관회의에서 참석자들은 「1967년 한 해를 위한 공동행동조처에 관하여」라는 의제에서 서독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매도하고, 서독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더욱 강화키로 결의했다.
법정(트리부날)이라는 이름의 집단 행동의 일환으로, 특히 민주 법률가 국제위원회와 미국의 베트남 공격이 지닌 추한 성격을 폭로한 여타 조직들을 지원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련의 KGB는 베트남戰에서 화학戰이 가져다 준 결과와 전쟁수행 과정에서의 미국과 서독 간의 군사협력說과 관련해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앞장서서 조직한 국제 법정은 베트남戰에서의 미국의 행동을 세계 여론 앞에서 맹렬히 공격했는데 그것은 西베를린 학생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67년 5월 디트리히 슈타리츠가 슈타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西베를린 자유대학 학생대표들은 러셀 법정의 증인들과 직원들로 하여금 대학 대강당에서 보고회를 갖도록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회에서 또 한 사람의 연설자로 예정되었던 서독 시사평론가 에리히 쿠비는 보고회 준비위원들에게 자신이 연설자로 참가하는 것은 미국의 베트남戰 개입을 심판하는 것과 동시에 西베를린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도 함께 요구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노벰버會와 리퍼블릭 클럽
이 무렵 학생운동에 대한 슈타지의 영향력 행사는 특히 1966년 11월 창립된 노벰버會(November Gesellschaft)를 통해 이루어졌다. 슈타리츠와 그의 스파이 동지인 바르텔이 바로 이 노벰버會의 핵심멤버였다. 주로 좌파 전통주의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그 사이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의 反권위적인 정책에 반기를 들어 성격이 크게 변했다. 슈타리츠의 정보 보고에 따르면, 노벰버會는 금속노조 소속 단체들로부터 자금을 얻어 창립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창립회원들은 西베를린 출신 자민당 소속 연방의회 의원인 윌리암 보름의 친구들과 재력가들이 3만~4만 마르크 정도를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보름 의원은 당시 급진적 민주주의자이자 동독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비쳐졌는데, 사실은 1969년 이래 슈타지의 對外 책임자 마르쿠스 볼프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을 정도로 슈타지에게는 아주 중요하고도 영향력이 큰 스파이였다.
西베를린의 지도적 좌파인사들은 보름이야말로 동독과 대화를 하고 지금까지 對동독 관계에서 보이고 있는 우파의 경직된 태도를 부드럽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보아 1967년에 있은 그의 연방의회 선거 출마를 적극 지원했다. 그를 지지하는 서명자 명단에는 작가 귄터 그라스와 정치학자인 오십 플레히트하임, 그리고 디트리히 슈타리츠도 들어 있었다. 그해 3월 西베를린 슈타인플라츠 광장 옆 슈투덴텐 하우스에서 있은 보름 의원 지원 집회에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약 1500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이렇듯이 그에 대한 지원 캠페인은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보름은 서독 연방의회(분데스타크)의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에까지 선출되었고, 자민당의 西베를린市黨 명예의장(1969년)과 연방간부회의 위원(1970년)으로도 선출되어 슈타지는 그를 통해 자민당 최고 지도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노벰버會는 사민당이 보수정당인 기민·기사당과의 大연정에 참여한 것에 대한 反작용으로 창립되었다. 大연정은 사민당內의 좌파는 물론이고 사민당 밖의 좌파들로부터도 큰 저항에 부딪혔다. 동독 공산당도 바트 고데스베르크 전당대회(1959년)를 계기로 시작된 사민당의 방향전환, 즉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의 방향전환을 맹렬히 비난했으며, 특히 헤르베르트 붸너(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등 두 전직 총리와 함께 사민당을 이끈 3頭 마차의 1人)를 두고는 「배신자」라면서 철저히 매도했다.
『동독으로부터의 지원금도 반대 않는다』
슈타리츠에 따르면 노벰버會의 목표는 비판적인 좌파세력을 조직화하고 모든 좌파 지식인과 노동조합 잠재세력을 한 군데로 모아 하나의 클럽을 만드는 데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만든 클럽은 그날 그날 일어나는 현실 정치 문제에 입장표명을 해야 하고 도서실과의 관계, 즉 이론적인 연구와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원들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사회주의 연합 및 여타 좌파세력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노벰버會 내부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슈타지 보고서는 동독 공산당수 발터 울브리히트에게까지 올라갔다. 거기엔 이런 의견도 들어 있었다.
『익명으로만 한다면, 동독으로부터 오는 지원금도 반대하지 않는다』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內 기득권 세력은 오랜 준비기간 끝에 1967년 4월 西베를린에서 리퍼블릭 클럽(RC)을 창설했다. 클럽은 처음엔 샬로텐부르크의 빌란트슈트세 거리에 사무실을 차렸다. 초대회장은 독일학생연합(vds) 대변인을 지낸 바 있는 클라우스 메쉬카트가, 부회장은 마리아네 레겐스부르거와 로타르 핑칼 두 사람이 맡았다.
슈타리츠는 슈타지에 올린 보고서에서 간부회의 위원 9명 가운데 오직 2명에 대해서만, 때때로 이들을 中化(중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간부회의가 전적으로 슈타리츠의 의도대로 구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슈타리츠는 또 그 다음 보고서에서 노벰버會의 이념과 사상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행, 관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리퍼블릭 클럽 안에는 바르텔과 슈타리츠 이외에 「G. 슈나이더」라는 가명의 非공식 정보원(IM)이 슈타지 첩자로 일했다. 슈타지內 선전·선동 담당부서는 리퍼블릭 클럽에 3명의 독자적인 非공식 정보원(IM)과 4명의 소위 접선 인물(KP)을 밑에 거느리고 있었다. 하이네만과 자이츠 박사도 그 일원인데 이들은 그 뒤 20년이 지나서까지 첩자노릇을 계속하면서 슈타지에 수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자민당의 중진 정치인 윌리엄 보름의 경우, 클럽 창설 때 15만 마르크를 지원했다고 하는데, 이 돈도 사실은 슈타지 본부의 자금이었다고 한다.
左派학생토론회에 동독 간부들 초청
리퍼블릭 클럽은 곧 학생운동을 조직하는 센터가 되었다. 요하네스 아그놀리, 페터 브뤼크너, 프리츠 토이펠과 같은 SDS 및 APO(의회 밖 야당) 지도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렸고, 서독 전역 수많은 도시에 이와 유사한 학생단체가 생겨, 1968년 10월엔 그같은 클럽들이 모두 42개에 달했다.
베를린 소재 리퍼블릭 클럽에서는 클럽창설 며칠 후부터 벌써 활켄(매), 노벰버會, SDS 등 여러 좌파그룹 대표들이 모여, 장차 있을 문제를 협의했다. 소위 조정위원회라는 것은 그렇게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정기적으로 때로는 매일 같이 리퍼블릭 클럽에서 만나 회의를 가졌다.
1967년 6월2일, 이란의 팔레비王 반대시위과정에서 폭력충돌이 있고 나서부터 리퍼블릭 클럽에는 학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클럽 창설 멤버들은 玉石을 가리는 어려움, 즉 장차 회원으로 가입할 학생들만 골라서 받아들인다는 문제에 부딪쳤다.
이때부터 리퍼블릭 클럽에서는 공동 대학생 위원회(ASTA)와 베트남 위원회 등 각종 대학생 단체들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1968년 3월, 東베를린 훔볼트 대학 디터 클라인 교수가 작성한 구체적인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운동의 전술·전략과 관련한 소규모 토론회에는 동독 간부들도 초대되었다고 한다. 클라인 교수는 당시 리퍼블릭 클럽이 모든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독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면서 발터 바르텔을 포함한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 고참 멤버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클라인 교수의 보고대로라면 그의 그같은 비판은 토론회 참석자들로부터 아주 유익한 평판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노동자 계급의 혁명 잠재력을 부정하고, 사회주의 역시 관료화된 통치제제라는 중상모략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이 역시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토론에 이어 있은 회의에서 리퍼블릭 클럽 간부회의 위원들은 동독 공산당 西베를린 지부와의 행동 단일화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에 대해 SDS 중앙협의회 다수 회원들은 리퍼블릭 클럽 대표들이 의회 밖 야당(APO)의 이름을 빌려 멋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면서 동독 공산당의 침투전략을 비난했다. 두치케의 친구 베른트 라벨은 타게스슈피겔 지면을 통해 동독 공산당과의 행동 단일화 반대 의사를 밝히고자 했지만 중앙협의회는 그같은 異見을 내부적으로 해결키로 결정했다.
「새로운 신문은 통일 정책 관련 터부를 가차없이 무시해 버릴 것」
시사주간지 슈피겔誌 발행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이 학생운동 관련의 신문사업 재정지원에서 손을 떼자 엑스트라-딘스트紙 편집국도 사무실을 리퍼블릭 클럽 건물로 옮겼다. 당시 APO 세력에 언론광장을 하나 마련해 주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동독 정보기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문을 하나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원래 호르스트 말러와 1964년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발터 바르텔 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1966년 1월 마침내 이들 두 사람은 루돌프 아우크슈타인과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아우크슈타인은 西베를린 독자를 상대로 우선은 週刊(주간)으로 새로운 신문을 발행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아우크슈타인의 생각대로라면 「이 신문은 西베를린市 정부의 새로운 對동독 정책에 길을 열어줄 것이며, 통일정책과 관련한 현재의 모든 터부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가차없이 무시해 버릴 것」이라고 했다. 정식으로 신문을 발행하기 앞서 시험용으로 만들어 보는 견본판 준비위원회는 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엔 페터 하일만과 발터 바르텔 두 명의 슈타지 첩자가 들어가 있었다.
며칠 후 준비위원회는 처음으로 인사案을 내놓았고, 그러자 바르텔은 자신을 관리하는 슈타지 담당장교의 지시에 따라 이를 즉각 슈타지에 보고했다. 하일만은 슈타지 첩자인 자기 부인까지 편집국 비서 직책을 주어 신문 발행에 동참시키자고 제안했다.
신문의 제호는 「호이테(Heute:오늘)」로 하기로 했다. 신문발행 준비작업은 아우크슈타인의 위임에 따라 대부분 바르텔이 맡아 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바르텔은 정기적으로 슈타지에 정보 보고를 올렸다.
편집국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자리들은 언론인으로 계속 일해 오던 슈테판 라이스너, 헤르만 L. 그렘리차, 마틴 부흐홀츠, 발터 바르텔, 그리고 이때까지 포어베르츠紙에서 일해 오던 칼 구고모스 등이 차지했다. 편집국의 실제 책임은 구고모스가 맡기로 했다.
신문발행과 관련된 정보는 모두 슈타지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지 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창간주역들과 관해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콩크레트誌 편집장으로 있는 그렘리차에 대해서는 연방검찰총장이 1993년 간첩혐의로 기소여부를 결정키 위한 수사절차를 밟았으나 無爲로 끝나고 말았다.
이 무렵 구고모스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1966년 3월 사민당 출신 거물 정치인 헤르베르트 붸너를 상대로 방대한 분량의 익명 고소장이 나돌았는데, 구고모스가 그 작성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 고소장은 동독 공산당의 안티(Anti) 붸너 캠페인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와 주간신문 차이트紙에만 실렸었다.
슈타지 지원으로 신문 창간
그 뒤 구고모스는 다양한 형태의 좌파 신문 발행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프로젝트들은 이념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모두 동독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것들이었다. 동독 정권 붕괴 후 2명의 전직 슈타지 본부 제10국 요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구고모스는 국가안전부에 구스타프라는 가명으로 등록되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구고모스는 포어베르츠紙 기자로 있었을 때 국가안전부의 초대를 받아 베를린 近郊(근교)의 데메리츠湖畔(호반)에서 密談을 가졌다고 이들 중 한 정보원이 나중에 구체적으로 밝혔다. 바로 이 자리에서 西베를린 독자를 상대로 하는 좌파신문 발행계획이 짜였으며, 이를 위해 슈타지는 돈은 물론, 신문 발행에 따른 노하우까지 제공키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엑스트라-딘스트」紙이고, 구고모스가 바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슈타지 본부에 남아 있는 문서에는 실제로 「구스타프」라는 간첩명이 등록번호와 함께 1967년 제10국 정보원으로 올라 있었다. 구스타프는 1970년대 말 비어만과 좌파세계라든가 자유와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西베를린 보호위원회 활동 등을 슈타지에 보고했으며 그 외에 사민당內 좌파세력인 프랑크푸르트 서클의 모임 사민당의 現 상황, 그리고 사회주의 좌파정당 창설 시도 등과 같은 정보도 보고했다.
호이테紙에 대한 아우크슈타인의 관심 및 참여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견본판 3호가 나오고 난 다음 그는 신문에 대한 評을 하면서 저널리즘的인 매력이 부족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1967년 1월, 아우크슈타인은 결국 이 신문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고 편집국 진용의 일부를 슈피겔誌로 데려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바르텔은 노벰버會에 선거운동 기간만이라도 가두판매를 주로 하는 대중신문의 형태로 일주일에 한번 발행하는 주간 신문을 발행해 보자고 제의했다. 「엑스트라블라트」라는 이름의 이 신문 창간호는 1967년 2월11일, 1만 부가 발행되어 150명의 자원자들에 의해 길거리에서 팔렸다.
아우크슈타인은 西베를린 학생운동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지 않아 엑스트라블라트紙에 1만마르크를 지원하고, 앞으로도 계속 재정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엑스트라블라트紙는 동독 공산당(SED) 西베를린 지부 수뇌부가 신임 편집국장 바르텔에게 소개해 준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슈타리츠에 의하면 엑스트라블라트紙의 정치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쿠르트(바르텔과 同一人임)가 결정했고, 그는 每號(매호)마다 발행에 앞서 노벰버會 간부들과 만나 대체적인 정치적 노선을 토론토록 했다. 그리고 주식회사 엑스트라블라트의 사업 총책임은 칼 구고모스가 맡기로 했다.
엑스트라블라트紙에 「콘쳅토어」라는 필명으로 게재되는 글들은 원칙적으로 SDS 고참회원들의 공동작품이었다. 첫 號를 받아본 한 동독방송 특파원은 『엑스트라블라트紙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西베를린에서 정치를 하는 데 아주 유용한, 바로 그런 언어들』이라고 평가했다.
親동독 분위기 조성에 노력한 좌파신문들
슈타리츠의 보고에 따르면, 쾰른 소재의 서독 헌법수호청은 자기들에게도 정보를 제공키로 되어 있는 바르텔이 엑스트라블라트紙의 창간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헌법수호청은 바르텔이 자기들과도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우크슈타인에게 알려 주었고, 그러자 아우크슈타인은 즉각 엑스트라블라트紙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었다. 그 결과, 일주일에 한 번 나오던 엑스트라블라트紙는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발행하게 되었고, 재정지원도 이제 다른 곳에서 나왔다.
그러나 어쩌다 발행되는 신문에 만족하지 못한 바르텔은 새로운 신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바르텔은 편집국의 주요 간부들(발터 바르텔, 칼 구고모스, 마틴 부흐홀츠, 한네스 슈벵거)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엑스트라-딘스트」라는 題號의 신문을 새로이 창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르텔의 구상대로 이 신문은 일주일에 두 차례 발행하고, 『동독에 관한 독점정보와 동·서독간의 문제점들을 내용으로 담는다』고 했다.
그 뒤부터 엑스트라-딘스트紙는 노조와 사민당원들이 주로 읽는, 좌파 전통주의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문내용에 대해서는 물론 편집국장 자리에 앉은 칼 구고모스가 책임을 맡았고, 경영에 대한 총 책임은 발터 바르텔이, 그 대리인으로는 구고모스로 정해졌다.
엑스트라-딘스트紙는 지속적인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게 西베를린과 여타 지역의 좌파 학생운동과 행동을 같이했으며 한결같이 親동독적인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거의 「혁명의 해」나 다름없는 1968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났을 즈음, 엑스트라-딘스트紙 편집진은, 보잘 것 없는 정보지에 불과한 이 신문은 이제 집어치우고 제대로 된 신문을 하나 만들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제대로 된 신문 창간 계획은 동독 공산당에겐 너무도 중요한 것이어서 黨중앙위 서독담당 부서장인 헤르베르트 헤버는 국가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에게 직접 견본판을 보내 주도록 했을 정도였다. 헤버는 견본판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발행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신문의 주된 정치적 관심사는 서독과 西베를린 지역의 다양한 정치·사회 세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동맹체를 만들어 서독 사회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극복하는 데 一助(일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디 노이에」라는 題號로 1979년 2월부터 발행된 이 신문은 실제로 서독 전역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편집국장 구고모스가 재정난으로 다시금 동독으로 들어가 구걸행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디 노이에」紙는 정기구독자가 늘어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후 발행을 중지해야만 했다.
봉기 청년들과 미군의 충돌방안 모색
엑스트라-딘스트紙 사람들이나, 노벰버會, 리퍼블릭 클럽 회원들의 주요 관심사는 교실 안 세미나에서 떠드는 추상적 마르크스主義가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증오의 대상인 자본주의 체제를 제거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SDS와 여타의 좌파그룹들과 함께 정치적 전복에 유사한 행동을 계획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최소한 동독 영토로 둘러싸여 있는 西베를린에서만은 1967년, 그같은 정치적 전복이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이들은 생각했었다.
노벰버會는 정치적 전복을 위해 5월에 이미 「봉기에 나선 젊은이들은 西베를린市 정부 및 미군헌병들과 직접 충돌케 하는」 방안을 구상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베트남戰에 반대하는 항의시위가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은 물론, 西베를린市 전체의 상황을 첨예한 反체제 분위기로 몰고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6월2일, 이란 王 팔레비 반대시위 중 대학생 벤노 오네조르그가 총에 맞아 죽으면서 시위가 격화일로로 치닫자 슈타지는 한 정보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팔레비 반대시위는 원래 이같은 결과를 고려해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內의 좌파세력과 反체제 성향의 생활공동체(코뮨) 추종자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사태를 계속 에스컬레이트시키고 있다」
6월 중순경 슈타지 본부 정보분석가들은 APO(의회밖 야당·在野세력)와 한 상세한 현장정보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리퍼블릭 클립 지도부는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가졌다. 토론 결과 西베를린 지역의 APO는 지배계층으로부터 더 이상 한 줌밖에 안 되는 少數 세력으로 무시당할 상황이 아니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赤旗(적기)는 다시 많은 西베를린 시민들로부터 거부감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동독 공산당 西베를린 지부(SED)도 다시 그곳 주민들 앞에 하나의 정당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지난 몇 년간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이론은 그가 산업 노동자들에 대해 희망을 걸지 않고 있어 오히려 방해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APO 세력이 계속 성장하려면, 조직 차원에서 더욱 견고해져야 하고, 다른 여러 그룹들의 진보세력이 그렇게 하듯이 대중선동이라는 長期(장기) 전략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1968년 6월 노벰버會는 자체협의에서 西베를린 지역 상황을 더욱 첨예화하기 위한 전략적 지도노선을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SDS(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 대표들과 만나 앞으로의 행동을 위한 협의를 갖기로 했는데, 이같은 협의는 그 얼마 후 금속노조 산하의 청소년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자칭 혁명가들은 이 의미깊은 모임에서 앞으로 펼쳐나갈 정치적 행동 구상, 말하자면 혁명을 달성하기까지 자신들이 취할 행동방안을 짜냈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동독 공산당과 소련의 오랜 요구대로 西베를린이 자유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여기서 자유도시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 분리된 별도의 정치단위로서 美·英·佛·蘇 등 연합국에 의해 그 독립을 보장받는 도시를 뜻하는 것이라고 SDS 대표단은 주장했다.
루디 두치케는 자유도시論에서 소위 연동장치(트랜스미션) 효과를 기대했다. 다시말해 그는 자유도시 西베를린이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실험장이 서독은 물론 동독에까지 영향을 끼쳐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희망한 것이다.
西베를린을 서독으로부터 독립시켜야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대학에서 일고 있는 이같은 혁명의 불꽃을 어떻게 광범위한 대중 속으로, 특히 노동자들 속으로 옮아가게 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했다. 이와 관련한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즉, 학생들의 소요로 이미 西베를린에 대한 기업인들의 투자의욕이 눈에 띄게 감퇴했다. 이같은 투자의욕 감퇴는 소요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심해질 것이고, 이같은 분위기에서 학생운동을 더욱 강화하고, 이를 공장으로까지 확산시키면 결국은 더욱 큰 사회불안 또는 반란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디트리히 슈타리츠는 다음과 같은 구상을 녹음기에 담아 슈타지에 보냈다.
⒜ 학생데모를 통해, 또는 집회에서의 성명서 발표를 통해 정치적 불안을 증폭시킨다.
⒝ 개별 공장들과의 관계강화를 이룩해 상황에 따라 공장들로 하여금 학생 소요를 지원토록 한다.
⒞ 공장에서 격렬한 불법파업을 시도해 파업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될 수도 있다.
⒟ 정치적으로 西베를린을 서독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홍보한다.
⒠ 모든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집시켜 대중운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같은 대중운동은 西베를린市 정부를 뒤흔들어, 결국 위에 설명한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다. 그에 필요한 예상 시간은 5년에서 10년까지로 잡는다.
슈타리츠의 구상에 나타난 이 대단하기 이를 데 없는 혁명적 열정은 동독 공산당에게까지도 섬뜩하게 받아들여졌다. 한 정보원 보고에 의하면, 어쨌든 노벰버會 지도부는 동독이 西베를린 학생운동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했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두치케의 영향력下에 이같은 反동독 집단이 늘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동독정권 지지자로 통하고 있는 바르텔과 직접적인 의견충돌을 빚기도 했다.
금속노조 청소년 학교에서 있은 실무협의 3일 후, 슈타지는 슈타리츠를 만나, 西베를린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재의 反체제 운동의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같은 운동의 목적에 가장 합당한 구호는 어떤 것인지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는 일차적 과제로 공장노동자들과의 밀접한 관계는 물론 노조간부들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 필요성도 함께 강조되었다. 그리고 비상 조치법과 西베를린의 염가판매에 대한 투쟁도 핵심과제로 삼기로 했다. 슈타지內 슈타리츠 담당장교인 브라반트는 슈타지가 취할 조처라는 항목 밑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경우에 따라 있을지도 모를 좌파세력에 대한 지원문제를 국가안전부에서 협의한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제한된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이들보다 성공적이었던 곳은 대학이었다. 대학內 운동권에서는 1967년 여름, 두치케를 비롯한 여타의 학생들을 상대로 징계 절차를 밟았다. 그러자 많은 동료학생들이 두치케派에 連帶(연대)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 밖에 西베를린市 APO(의회밖 야당·在野) 세력은 우파 출판인인 악셀 슈프링거의 재산 몰수를 위한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한, 소위 시민법정을 준비키 위해 리퍼블릭 클럽의 슈프링거 위원회는 모든 자료를 아주 열심히 모았다. 슈타지는 사전에 이미 그같은 구상에 관해 정보보고를 받았다.
노벰버會는 이 무렵 APO內에서의 자신들의 지도적 역할강화를 추구하고 나섰다. 1967년 9월 슈타리츠는 노벰버會를 개혁해 마침내 西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좌파그룹들 사이의 조정위원회 기능을 부여할 계획이라고 슈타지에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조직으로서의 중심역할은 점점 리퍼블릭 클럽으로 넘어갔고, 그러면서 노벰버會는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