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에 임시 방어선을 친 173공수여단
병사들...
이들은 후방부대까지 포위된 상태로 꼬박 24시간
동안 월맹군의 파상공세와
미군의 오폭에 시달린끝에 겨우
구조되었다.
마지막으로 북베트남군은 1968년 1월 21일부터 DMZ 남방 9번 도로상에 있는 케산(Khe
Sanh)을
2개 사단 규모로 공격하였다. 존슨 미 대통령도 매일 상황을 확인할 정도였고 미국 신문과 TV는
연일 대서특필하였다.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관심거리였다.
모두의 관심을 끌만한 대 기만공세였다.
북베트남은 이와 같은 기만공세와 병행하여 협상 제스츄어도 보냈다.
우선 베트콩들은 미국이 남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의 연립정부를 세우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할 계획이라는 유언비어를 시중에 유포시켰다.
1967년 12월 20일 북베트남은 하노이에서 열린 외교관 리셉션에서 미국이 북폭을 중지한다면
미국과 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
오랫동안 협상신호를 기다렸던 미국을 긴장시켰음은 물론이다.
루마니아가 중재하도록 북베트남은 요청하였다.
1968년 1월 중순경 루마니아 대표가 하노이를 방문하자 미국은 호의를 보이기 위하여
그의 방문기간 동안 하노이 일대의 북폭을 제한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은 진작부터 1968년도 구정휴전은 1968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구정일자는 1월 30일)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휴전 개시일자 하루 전인 1월
26일에
민족해방전선은 구정휴전은 쌍방이 엄격히 준수하여야 한다고 마지막 능청을
부렸다.
북베트남은 공세의 보안을 위해서 전반적인 공세계획을 베트콩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수행하여야 할 개인임무만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훈련을 시켰을 뿐 다른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 타 지역에서는 어떻게 공세를 취하는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기만을 위해서 북베트남군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손실에 대하여
지압은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가 수천 또는
수만 명의 희생 따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목적 달성이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