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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외 4개국, 주마간산격 여행기
호에타우에른 국립공원 펜션에서 촬영한 아침 풍경(멀리 눈 덮인 산)
오스트리아 외 4개국, 주마간산격 여행기
우람한 산과 청남빛 호수, 울창한 숲과 넓은 공원,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집과 고풍스런 성(城)들을 볼 수 있는 곳, 유럽.
이번(7월 25일~8월 6일)에 14 번째 외국 여행에 유럽만 세 번째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25 km 북쪽의 작은 도시 프리드베르그에서 아내와 딸, 셋이 승용차로 출발하여 동남쪽 오스트리아의 호에타우에른,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 빈트가르 계곡, 보이니 호수, 포스토이나 동굴, 크로아티아의 플리트 비체,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짤즈부르크의 미라벨 궁전, 독일의 바트나우하임, 하이델베르그, 다름 슈타트,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를 스쳐 지나가듯 둘러보았다.
2주일의 여행에 승용차로 약 3천 km를 달렸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산과 숲, 호수와 도시들을 보았고, 잘 가꾸어 놓은 중세의 건물이나 유럽풍의 가옥, 꽃과 나무가 아름다운 정원, 오랜 연륜을 가진 공원 등, 여러 곳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동경과 부러움을 가지고 즐거운 여행을 했다.
1. 오스트리아 호에타우에른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자연
호에타우에른 오스트리아의 최초의 국립공원으로서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악지대에 있다. 오스트리아의 최고봉인 해발 3,798 m 의 그로스글로크너산이 있는 곳이다.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인 7월 16일 아침에 TV ‘영상앨범 산’을 보았는데 천혜의 자연임을 알게 되어 이 공원을 이번 여행의 첫 코스로 잡았다.
독일 프리드베르그에서 출발하여 호에타우에른을 향하여 달리는 동안 고속도로 양쪽으로 우거져 늘어선 나무들. 푸르고 넓은 들판, 드문드문 나타나는 전원주택들, 여러 광경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공기가 맑아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도 싱그러웠다.
비가 멎은 저녁 무렵, 호에타우에른 산길 정상에 서니 먼 산봉우리에는 눈과 구름이 덮여 있고 하얀 구름이 마을 아래로 내려 앉아있다. TV에서 본 장엄한 산악지대를 실제로 본 것이다.
독일에서 약 600 km를 달려와 첫날에 묵은 집은 산 중턱 바로 아래에 있는 민박(펜션) 집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창밖을 보니 웅장한 산, 높은 산봉우리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스위스 융프라우나 노르웨이 남부에서 본 고산준령과 비슷했다. 발코니로 나오니 집 아래의 풀밭에는 얼룩소들이 방울소리를 울리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이었다.
아침밥을 지어 먹고 숙소에서 나와 크리믈러 폭포에 가느라 미터질 마을을 지나는데 높은 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가 보였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차를 돌려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 숙소에서 준 할인 티켓으로 탈 수 있었다. 케이블카 안을 들여다보니 4인용 식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빵과 차, 과일이 놓여 있다. 어느 노부부로 보이는 가족이 귀족스런 아침 식사를 막 시작하려 했다. 식사비를 물어보니 아침에만 식사를 준비해 준다는데 1인당 15(약 2만원), 또는 19(약 2만5천원) 유로였다. 기발한 발상이다.
30여 분, 약 5 km 쯤 케이블카로 오르는데 특이하게도 기역자로 꺾어 올랐다. 산의 정상에서 내리니 바람이 서늘했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고, 동쪽으로 능선이 이어졌는데 산이 높아선지 나무가 없어 시야가 넓게 펼쳐졌다. 정상에서 100여 m 아래에는 초지가 조성되어 있고 그 한 쪽에는 축구장만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 위 풀밭에서 세 마리의 얼룩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초지를 가꾸고 나무를 심지 않았는지 산이 높아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지 건너편 북쪽 산도 민둥산이었다. 전망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해발 2,000 m 이상의 산들이 하늘에 맞닿은 듯, 산봉우리와 산맥이 산수화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케이블카로 내려와 크리믈러 폭포에 갔다. 산비탈과 계곡으로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계단식 폭포였다. 굽이굽이 쏟아지는 폭포의 길이가 무려 380여 m 나 된단다. 규모가 유럽 최대라는데 하얀 폭포로 쏟아지는 수량이 많아 물소리가 커서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로 하얀 물보라가 바람을 타고 연기처럼 퍼져나갔다.
흐르는 폭포 옆으로 Z자 모양의 산길을 지그재그로 30분 정도 오르니 다리가 아팠다. 산마루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과 빵을 사 먹으며 잠깐 쉬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덕 위의 집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40여 년 전 달력의 사진을 보며 동경했던 모습이었다. 조금 더 오르니 호수가 나왔고 그 호수 끝, 1 km 전방에 또 폭포 물줄기가 하얗게 흘러내렸다. 더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슬로베니아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안은 채 돌아서야 했다.
폭포 입구에서 곧장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이 있지만 차를 미터질 방향으로 되돌려 유명한 호흐알펜 슈트라세 고개 길로 접어들었다. 유럽에는 대부분 통행료가 없지만 여기에서는 35유로(약 4만원)의 통행료를 내야 했다. 산기슭을 달리다가 경관 좋은 쉼터가 나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쉼터의 옆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고,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볼 수 있는 맞은편 산 위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그 만년설이 녹아 내려 하얀 물줄기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쉼터의 수도꼭지에서는 깨끗한 물이 솟아나왔고 옆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있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50대 중년의 남자에게 서툰 영어로 질문을 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사업상 서울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코리아를 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서울을 다녀왔다니 더 반가웠다.
산 옆구리에 Z자 모양으로 여러 번 U턴 하듯 오르는데 36번은 꺾어야 해발 2,571 m를 넘을 수 있었다. 이 험준한 고개 길이 48 km 였다. 산 고개에 서니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3,798 m 의 그로스글로크너산이 맞은편에 우뚝 서 있는데 구름이 끼어 중턱까지만 보였다. 아쉽게도 비가 내려 그 유명한 에델바이스 스피체 전망대에 나가보지 못하고 차 속에 앉아 있다가 지나치고 말았다. 그 전망대에는 서보지 못했지만 곳곳에 전망대가 있어 몇 차례 차를 세우고 맞은편 산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산 위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여러 가닥의 물줄기가 고산준령임을 깨닫게 했다.
내려오는데 우람한 앞산 여러 봉우리가 나무나 풀, 심지어 흙조차 없이 바위로만 우뚝우뚝 솟아 있어 그 장엄함이 신비로웠다.
2. 슬로베니아의 블래드성과 보히니 호수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의 국경을 넘자 약 5 km 정도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예약한 펜션을 찾아갔다. 펜션 주인으로부터 블래드시 인근의 명소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방을 방에 옮기고 짐을 푼 후, 5분쯤 걸어 나오니 블래드 호수.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해질 무렵이었다. 호수 속에 산 그림자가 담겨 있다. 산 위에는 사진으로 보았던 블래드성이 수직 130 m 암벽 위에 치솟아 있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호수 안에는 몇 마리의 오리가 떠다녔다. 노를 저으며 작은 배를 타는 이, 호수 주변 길을 산책하는 이,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이 등, 많은 관광객들이 모두 아늑하고 평화로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호수 가장자리에서 수영하던 젊은이 둘이 물을 털고 나왔다. 젊다는 건 좋은 거다. 늘씬한 키에 탄탄한 젊음, 건강미가 부러웠다.
밤이 되자 호수 주변의 건물에서 불꽃이 피어나고, 그 불빛이 호수에서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반짝거렸다. 음식점 정원에서는 바이올린과 건반악기로 두 사람이 협연하는데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작은 피아노처럼 보였는데 소리가 매우 맑고 영롱하여 무슨 악기인지 궁금하여 나중에 음악 선생님에게 문의하니 쳄벨로라 했다. 음식점 정원의 테이블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으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 모습조차도 풍경화의 한 소품이었으며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호텔과 상가가 있는 왼쪽으로 1 km쯤 가니 그곳에서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공연장으로 올라가보니 어느 여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머리가 하얀 70~80세로 보이는 할머니 둘이 나와 음악에 맞추어 어설프게 춤을 추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감정 조절이 안 되었나 보다.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알려준 빈트가르 계곡을 갔다. 소박한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마을의 골목길을 빠져나가니 주차장이 나왔다. 60대의 주차 안내원이 안내를 해주는데 특별하게도 주차료를 받지 않았다. 동양인인 나에게 운전을 잘한다고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까지 해주었다. 유럽 관광지의 특징이긴 하지만 입구에 음식점이나 찻집, 기념품 가게 하나 없어 유원지나 명승지 같지 않았다. 이정표나 표지판 등, 간판이 없고 입장표를 파는 작은 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관광명소가 그렇다.
계곡으로 들어가니 꽤나 많은 물이 거대한 바위 협곡으로 맑게 흘렀다. 그 길이가 약 3 km나 이어졌다. 협곡을 걷는데 싸늘할 정도로 시원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왔는데 부산에서 왔다는 40대의 한국인 가족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이는 어떻게 이런 골짜기를 알고 왔을까? 이 협곡에는 작은 폭포도 있고, 물 흐름을 따라 가니 계곡 끝에는 물을 막은 작은 댐이 있었다. 그 댐 위의 조그만 카페에서 커피를 팔았다.
다시 입구로 나와 블래드 성에 도착한 건 10시 반경. 해가 중천에 떠올라 햇빛이 따갑지만 블래드 호수의 물빛이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짙은 청남색, 아니 청녹색이랄까? 세 가지 색, 청명한 햇빛과 산의 녹색, 그리고 석회질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빛깔이었다. 성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호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 예쁜 교회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성의 왼쪽에는 아담한 음식점이 있는데 야외의 테이블에서 차도 팔았다.
한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왔는지 많이 몰려왔다. 한국 관광객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관광을 하러 왔다기보다는 사진 촬영하러 온 것이 주 목적인 것처럼 사진촬영에 열중했다. “하나 둘 셋”을 세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썬 그라스나 모자를 썼고, 옷이 화려하거나 화장이 곱다. 특히 아가씨들은 입술 색이 대부분 빨갛다. 그래서 한국 사람인 걸 바로 알 수 있다.
블래드성 안에는 박물관을 만들어 옛날 유물들을 진열, 전시해 놓았다. 캠코더로 촬영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나왔다.
40분쯤 차를 타고 보히니 호수에 갔다. 이곳 역시 유명한 호수이고 관광지인데 가게가 서너 개만 보였다. 주차장을 찾느라 표지판을 보고 평범해 보이는 다리를 건넜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돌다리였다.
호수를 비켜 지나가 산의 한쪽 주차장에 차를 두고 호수 입구로 다시 돌아왔다. 점심을 해결하고자 음식점으로 가서 테이블에 앉아 피자와 맥주 한 컵을 먹었다. 물도 사 먹어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맥주를 먹게 된 것이다. 식당에 붙어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혼자서 호수 둘레를 달렸다. 산기슭 가장자리에 시멘트 산책로가 있어 보행자와 자전거가 다녔지만 자동차 도로에도 자전거가 달려 나도 용기를 내서 아스팔트 도로로 내려와 자동차와 함께 달렸다.
자전거 핸들의 손잡이가 부드러운 합성고무로 되어 잡기가 좋았다. 보기에는 허름한 21단 자전거였는데 부드럽게 잘 나갔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지만 길이 한쪽에만 있다 하여 호수 끝까지 5km 쯤 달려갔다. 밀림으로 숲이 울창하여 호수 끝자락을 보지 못해 1 km를 더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나오다가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어 들어갔더니 호수 끝자락이 나왔다. 약 45분쯤 라이딩을 했는데 자전거 대여료는 30분 값, 3 유로만 받았다.
호수 위에서는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떠있고, 돌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 사바 강의 시작이다. 그 강을 따라 사람들이 카약을 타고 하류로 노를 저어 갔다. 아름다운 산천에서 수상 레포츠로 여유로운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3. 신비로운 포스토이나 동굴
보히니 호수에서 차를 몰고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동굴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했는데 동굴의 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 입구인지를 알 수 없었다.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몇 사람에게 물어물어 티켓 판매소를 찾아갔다. 티켓을 구입하고 한국말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가이드(소형 라디오 같음) 3개를 만 원 정도 주고 빌렸다.
동굴로 들어가 미니 열차에 올라탔다. 대여섯 량의 열차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100여 명쯤 앉아 작은 기관차에 의해 동굴 안쪽으로 무려 4 Km를 들어가서 내렸다. 북한군이 비밀리에 뚫어놓은 땅굴 같기도 했다. 안내자 뒤를 따라 서서히 걸어가니 1번 장소부터 16번 장소 이상 나아가는 코스다. 통로가 그리 넓지 않아 어깨나 머리가 부딪힐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점점 넓어졌고 수많은 종유석들이 나왔다. 천정에 국수가닥이나 고드름 같은 석순, 거대한 기둥 같은 종유석이 수없이 많았다. 길이가 24 km나 되지만 5 km 내외만 개방한다는데 종유석의 수효나 종류가 다양하여 세계 최대 이벤트 동굴이라 했다. 4 km 안쪽 동굴 광장에는 1,000여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을 만큼 넓고, 5~6층 정도의 높이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갈색의 종유석이 많지만 노란색, 붉은색, 백옥 같은 흰색 기둥도 있었다. 고드름 같은 종유석, 피사의 사탑이나 커틴 무늬 같은 종유석이 만물상을 이루어 놓았다. 중국 장가계의 황룡동굴도 어마어마했지만 이보다는 적은 규모였다. 종유석은 100년에 1 cm 정도만 자란다니 10 cm를 자라려면 천년의 세월이 걸리겠다. 수 만년의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이루어졌다니 그 세월을 잠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위산 속의 석회석이 물에 녹아 동굴이 만들어진다는데 이 동굴을 개장한 100여 년 간에 3,400 만 명 정도가 이 동굴을 다녀갔다 한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이 기관차의 진동과 마찰로 동굴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특히 이곳에서만 ‘인간 물고기(human fish)’가 발견되었다는데 생김새는 긴 미꾸라지 같은데 네 발이 달려 도룡뇽 같기도 했다. 하얀색 물고기로서 백인과 비슷한 피부를 가졌다고 붙인 이름이란다. 이 프로테우스라는 도룡뇽을 복원시켜 커다란 수조에 넣어 관람객에게 보여주었다. 신비로운 물고기였다.
4. 비취빛의 계단식 호수, 플리트 비채
16 개의 계단식 호수. 아름답고 신비로워 요정들이 사는 호수라는 크로아티아의 플리트 비체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산골마을처럼 허술한 집들이 드문드문 나오는 슬로베니아 시골길을 서너 시간 달렸다. 여기에도 이농민(離農民)이 많은지 빈 집들이 많았고 눈에 띄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고속도로 게이트 같은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어 조금 달리니 우측으로 바다가 잠깐 보이는데 아드리아해 같았다. 그리고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굽이굽이 달렸다. 세계적인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술한 입구라서 제대로 찾아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2게이트로 들어가 산 속 나무 사이에 주차를 하고 입장권을 구하는 곳까지 1 km는 걸었나 보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20분 정도를 기다렸다.
H 코스로 돌아보기 위해 다시 셔틀 버스 타는 곳까지 걷느라 땡볕에 10분은 걸었다. 버스로 10분 정도 이동해서 호수로 들어가니 축구장만한 청록색 호수가 나왔다. 어른의 다리 두께 정도의 너도밤나무를 뗏목처럼 엮어 놓은 폭 2m 의 발판을 걸어 호수 가장자리로 걸었다. 사람들이 먹이를 주기 때문인지, 잡지 않기 때문인지 송어들이 사람 쪽으로 떼를 지어 다가왔다.
짙은 청녹색 호수의 물빛이 정말 아름다웠다. 깨끗한 물일뿐인데 어떻게 저런 비취색으로 보일까? 이 호수가 아름다운 건 바로 여러 빛깔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늘색과 숲속의 녹색만 비쳤다면 우리나라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파란 빛이련만 이곳의 물빛은 윤기 나는 비취빛이었다. 호수 바닥에 노란 석회 성분이 가라앉아서 그렇게 고운 빛으로 보였을 거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선지 해발 600~1200 m 의 산들이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평이하게 보이는 산에 어떻게 16 층의 계단식 호수가 형성 되었을까? 석회동굴이 꺼져 물이 고였고, 나무들이 폭우에 쓰러져 밀려 내려가다 걸치고 모래나 흙이 덮인 후, 이끼가 자라고 거기에 석회석이 덮여 이런 호수가 만들어진단다. 그렇게 호수가 반복적으로 이어져 이런 계단식 호수가 되었다. 호수를 굽이굽이 돌아서 내려가면 다시 호수가 나왔다. 그렇게 호수를 돌고 돌아 내려가길 반복하다가 수원 원천호 정도의 큰 호수에서는 배를 탔다. 약 2 km 정도의 거리를 배가 15분쯤 천천히 이동하여 호수 밖으로 나왔다. 음식점과 상점, 광장이 있었다. 그늘 아래 테이블이 있어 그곳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로 더위와 피로를 달랬다. 햇빛에 나가면 따가울 정도지만 습기가 없어 끈적거리지 않고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했다.
다시 호수를 지나 Z자 모양의 오름길을 몇 번 꺾어져 오르니 지나온 호수들이 발 아래로 층층이 펼쳐져 있다. 아름다운 계곡 사이의 호수에 하늘과 숲이 담기고 호수 가장자리에는 여러 가닥의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놓았다. 요정들이 사는 산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린다. 요정들이 있다면 당연히 이런 곳에서 살겠다 싶었다.
언덕 위에 오르니 셔틀버스 정류장. 세 칸이 열차처럼 이어진 버스 2 대가 줄지어 도착하여 올라탔다. 완만한 경사로 굽어진 숲길을 10분 정도 달려 입장했던 출입구로 돌아왔다. 이 호수를 돌아보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지만 우리가 걸었던 H 코스가 가장 인기가 있단다.
숙소로 가기 위해 차를 타고 30분쯤 이동하니 아주 한적한 시골이 나왔다. 주소를 입력하여 네비를 보고 따라갔는데 주소로는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를 세우고 잔디밭에서 잔치를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이 시골 할아버지들은 영어를 몰라 말이 안 통하자 제스츄어로 설명해 주었다. 알려준 대로 찾아가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숙소에 전화를 하자 숙소에서 사람이 차를 타고 마중 나와 집을 찾았다.
잔잔한 구릉지대에 전망이 좋은 2층집이었다. 새 건물인데 2층을 쓰게 되었다. 서쪽 산 능성이의 저녁놀이 아름다웠고 어둠이 내리자 하늘에 반달보다 조금 통통한 달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숲에서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합창 소리가 50년 전 고향 마을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와 같았다.
5. 산 속 호수 할슈타트, 짤즈부르크의 거리와 미라벨 궁전
알프스가 펼쳐놓은 아름다운 대 화원의 숲속 나라.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요, 이 뮤지컬 영화의 배경이었던 오스트리아. 그 영화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과 호수,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만들어 세계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스토리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 영화의 대표곡, ‘에델바이스’와 ‘도레미송’은 세계인들이 지금도 많이 부르고 있는 노래다. 내가 유일하게 영어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에델바이스’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가장 기대가 컸던 나라다.
크로아티아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다시 왔다. 두 나라는 가까운 이웃이라서 자연 경관이 크게 달라질 건 없으련만 분위기가 달랐다.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 양쪽 벽에 미색을 칠하고 조명을 밝게 했다. 터널의 왼쪽 벽을 막고 밝은 색을 칠하여 터널의 어두움에 따른 불안감을 덜었고, 마주 오는 차량의 라이트도 보이지 않아 운전하기가 수월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산길로 접어들어 산을 넘는데 왼쪽으로 큰 호수가 길게 보였다. 적당한 장소에서 차를 멈추고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딸이 운전대를 잡고 그냥 지나쳐 버려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놓쳤다.
터널을 몇 개 지나고 산을 내려가니 호수가 나왔다. 산과 호수, 산마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할슈타트였다. 간신히 주차장을 찾아 주차한 후 호수가로 나왔다. 유람선이 떠나간 승선장 옆으로 백조 몇 마리가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었다. 백조는 하얀 고니이지만 새끼들은 부드러운 갈색이다. 닭도 갈색에 검붉은 깃을 가지고 있지만 병아리는 대체로 노랑색이다.
고니는 새 중에서 가장 크고 하얀 빛이라 고고해 보인다. 발레의 동작이나 옷차림이 바로 고니의 모습과 동작을 따온 거라는 데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고개를 쳐들고 기다리는 모습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신비롭고 고고하게 보이는 백조. 그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호수 가장자리로 지어진 집들, 벼랑에 지은 집들이 그림 같이 예쁘다. 발코니에 피어난 제라늄꽃. 그리고 집 모퉁이나 공간에 조성해 놓은 작은 정원들. 활짝 피어난 여러 가지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집은 저택이 아닐지라도 여러 가지의 형태로 아기자기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동네였다.
이곳에 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이 산의 높은 곳에 소금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소금 값이 금값이었던 시절, 소금을 채취하여 돈을 벌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산벼랑에 집을 짓고 살면서 비롯되었다 한다. 지금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오기 때문에 기념품 가게 등 쇼핑 상가도 많아지고 광장도 잘 조성 되어있다.
이 호수가 아름다운 것은 산과 호수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예쁘게 지어 놓은 집과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더 환상적인 경치가 된 것 같다. 자연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인공과 만났을 때 환상적인 절경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호숫가 마을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교회 지붕도 멋진 장면이다. 마을의 센터나 전망 좋은 언덕 위에는 어김없이 교회나 성당 지붕이 뾰족하게 솟아있다. 기독교가 그들의 삶에 정신적 지주가 되거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두드러지게 지었나 보다.
이 마을 광장에서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여럿 만났다. 반가움을 나누고 서로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벤치에 앉아 예쁜 집들을 살펴보며 잠시 쉬었다가 일어섰다. 아쉽게도 산 위에 있는 옛날의 소금 광산과 산 위에서의 전망을 보지 못하고 떠나와 아쉬웠다.
해가 기울 즈음에 호수마을을 빠져나와 예약한 숙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10 km 쯤 떨어진 바트이슐 마을이다. 작은 강을 끼고 시골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GOOD ROOM" 아파트 호텔이라 씌어진 펜션인데 단순한 색상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집이었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는데 언덕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집들이 아담하고, 정원을 잘 가꾸어 분위기가 좋았다. 더구나 나즈막한 생울타리라서 집안이 훤히 보였다. 집을 잘 꾸미는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기쁨을 주기 위한 것 같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니 않아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언덕을 향해 완만한 경사로를 15분쯤 올라가 내려다보니 마을 전체가 잘 보였다. 어느 집 정원에는 작은 소형차가 있었는데 차 뒤 트렁크 위에 꽃이 활짝 핀 화분을 얹어 놓았다. 꽃마차 같았다. 참 신선한 발상이다.
반달이 떠올랐는데 정확히 수직이었다. 우리나라의 반달은 약간 기울었는데 이곳의 반달은 왼쪽이 정확히 수직이다. 노르웨이에서도 그랬는데 여기도 그렇다. 북쪽이 가까워일까?
숙소에 돌아와 아내와 딸에게 밖에서 보고 온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음날 아침 그 언덕까지 일부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었다.
짤즈부르크로 가는 동안 아름다운 마을을 많이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 나와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구릉지대의 푸른 초원에는 야생화들이 피어있고 우람한 산들이 언덕을 에워싸고, 높고 낮은 언덕에는 예쁜 집들이 드문드문 앉아있다. 금방이라도 ‘에델바이스 ♫, 도레미 ♫’ 하며 영화의 주인공이 나타날 것 만 같았다. 아니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되어 서 있는 것 같았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건지, 빈 집인지, 정말 요정이 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짤즈부르크 시내의 주택가 주차장에 주차했는데 주차장은 암벽을 뚫어 만들었는지 굴 속 같았다. 주차장에서 나와 개울을 건너 쇼핑 매장과 기념품점이 밀집한 게트라이데 거리로 갔다. 좁은 골목이지만 깨끗했다. 걸어가며 쇼윈도의 상품을 보며 사진을 촬영했다.
상가를 돌아보고 삼거리의 조그만 광장에 있는 노상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잠시 쉬고 있는데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어 나도 다가가 귀동냥을 했다. 그리하여 바로 뒤 노란 건물이 모차르트 생가임을 알았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에 이곳에는 생선 가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한 집만 생선을 팔고 있단다. 가이드는 모짜르트 생가를 들어가 보든지, 짤즈성을 보든지 관광객들이 선택하도록 한 후, 짤즈성을 보려는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모차르트 생가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나오자 모차르트 광장이 나왔다. 광장 가운데 분수대가 있고 모차르트 동상이 있었다.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마차가 한 대 지나갔다. 개울을 건너 15분쯤 걸어서 미라벨 궁전에 도착했다.
영화에서 본 긴 직사각형의 궁전, 그 궁전 앞 정원에 꽃베고니아와 여러 종류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푸른 잔디밭에 S 자 모양으로 꽃베고니아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왔던 후문은 평이한 철제 대문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왜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를 부르는 가족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은 대부분 그 궁전의 후문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그 궁전 정원에는 그보다 아름다운 배경이 얼마든지 많지만 그 영화가 준 감동으로 자신도 주인공처럼 서고 싶었을 것이다.
헬브룬 궁전에 가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을 더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딸 집이 있는 프리드베르그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안고 차에 올랐다. 독일 고속도로의 대부분은 아우토반이라 속도 제한이 없어 시속 160으로 달리는 데도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갔다. 유럽의 고속도로는 대부분 통행료가 없다. 제한속도가 대체로 130 이다. 편도 1차선 도로에서 한국은 60 이하지만 유럽에선 대부분 80 이하라 자동차들이 상당히 빨리 달렸다. 1차선으로 추월하고 나면 대부분의 차들이 2차선으로 들어간다. 먼저 가려는 차에게 길을 양보해 주기 위해서다.
방향 깜박이를 켜면 그들은 대부분 양보해 주었다. 한국에선 방향등으로 깜박이를 켜면 절반 가랑이 앞차에 가까이 들이대 추월을 방해한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양보한다. 왜 그럴까? 달리면서 깜박이 등을 켜면 다른 사람들이 잘 양보해 주어, 기분 좋은 주행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선진 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20여 년 전 크락션을 많이 울렸다. 그리하여 서양 사람들이 크락션을 잘 울리지 않는다는 걸 부러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이제 양식 있는 사람들은 크락션을 거의 울리지 않는다.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면 크락션 소리가 너무나 빈번하다. 경적 소리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란 걸 깨달은 우리도 이제는 크락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6. 휴양 도시 바트나우 하임, 여유롭고 아름다운 마을
딸은 출근하고, 아내와 나는 프리드베르그역에서 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 북쪽 바트나우하임으로 갔다. 열차표는 어제 딸이 자동판매기에서 왕복표로 구입해 놓았다. 역으로 와서 열차를 기다리다 독일인에게 우리가 가려는 바트나우하임 가는 차의 플랫홈이 맞는지, 다음에 오는 열차가 바트나우로 가는 차인지 물어 확인했다. 키가 큰 독일 40대 남자가 허리를 굽혀 매우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고마웠다. 역에서 역무원이나 차장을 거의 볼 수 없고 표를 개찰하는 이도 받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바트나우하임역에서 내려 공원 방향으로 갔다. 3년 전 딸이 근무했다는 약국을 지나며 살펴보니 간판도 보이지 않을 만큼 허술한데 7 명이 근무했다 한다. 독일의 상가는 간판이 없거나 조그만 표지판 같아서 우리나라처럼 간판으로 찾기는 쉽지 않다.
이 도시의 약도가 그려진 안내 표지판을 보고 중앙로로 걸어가는데 양쪽의 3~4층 주택의 모양이나 하얀색 집들이 참 보기 좋았다. 5분쯤 걸어가니 공원이 나왔다. 넓은 초원과 우람하게 늘어선 나무들, 공원 가운데에는 호수 같은 못이 있고 기러기와 오리들이 유영을 하거나 호숫가에 나와서 무리지어 있었다.
70~8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산책을 했다. 혼자, 또는 부부가 조용히 걸었다. 둘이 걷더라도 별 말이 없었다. 노부부들은 대부분 손을 잡고 걸었다. 넓은 공원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모습, 사색이나 명상하는 장면도 보기 좋았다. 호수 우측의 넓고 푸른 잔디밭에는 한 두 사람이 골프를 치고 있었다.
예초기로 공원의 풀을 깎으며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가족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나들이객,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주부 등 넓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산책을 했다. 공원 한 바퀴 도는데 1시간 정도 걸렸다. 차도 쪽으로 나오니 광장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여러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인구는 3만 정도로 작은 읍 단위 마을이지만 요양원이 많아 약국이 잘 돼 딸의 약국 주인이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정말 노인 천국 같았다. 노후의 삶은 이렇게 경치 좋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보내면 좋겠다 싶었다.
공원에서 나와 상가로 와서 커피와 빵 하나를 주문하여 독일 사람들 사이에 앉아 먹었다. 휴식도 필요하지만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동 자전거를 끌고 온 80대 할머니에게 서툰 영어로 말을 걸었더니 그 자전거로 산에도 다닌다고 자랑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지만 손발과 얼굴 표정, 몇 마디 영어로 약간의 소통은 가능했다.
7. 하이델베르그와 다름슈타트
딸을 푸랑크푸르트 서쪽 변두리에 있는 직장 앞에서 내려주고, 나와 아내는 동남쪽의 친척 집으로 갔다. 네비를 보며 25분쯤 달려서 찾아갔다. 친척의 운전과 안내로 중세 유적도시인 하이델베르그시에 갔다. 도심지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두고 중심가를 지나 베르그성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걸었다. 친척은 경사진 벽 쪽에 허름한 나무 벤치에 앉아, 자신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어학 공부하던 30년 전에 자주 앉았던 곳이라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세 번이나 지났지만 변함없는 모습에 올 때마다 반갑다 했다.
이 도시가 생긴지 600년 이상이 되었으니 그 역사에 비하면 그분의 30년 세월이야 우스운 일일 것이다. 독일 최초의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1386년에 개교했다니 정말 아득한 세월이다. 하이델베르그성을 13 세기에 짓기 시작했다니 먼 옛날에 저 거대한 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후 전쟁과 벼락으로 성의 일부가 무너져 복원을 했다지만 그래도 일부는 부서진 대로 놓아둬 유서 깊은 역사가 충분히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은 주로 목재로 지어졌고, 벽은 흙으로, 지붕은 기와를 얹어 화재에 약하고 습기에도 약하여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석회와 흙을 섞어 만든 붉은 벽돌이라서 지금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성곽을 지탱하고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낙서들이 많이 있었다. 알파벳, 한자, 일본글자도 있지만 한글의 낙서도 있었다. 낙서도 유적으로 삼은 건가? 날짜가 몇 년 지난 것까지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3층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포도주통이 있었다. 높이 7 m, 폭 8.5 m 나 되어 18만 리터를 넣을 수 있다니 어마어마한 포도주통이다. 1751년에 제작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통이었다 한다.
약재상박물관이 시대별로 있었다. 약재를 써는 작두, 무게를 다는 천칭, 약재를 넣어둔 찬장 등이 우리나라의 한약방 모습과 흡사했다. 주로 약초를 썼지만 광물질, 어류, 심지어 뱀 껍질도 약재로 썼다. 옛날에는 우리나 서양이나 비슷한 한약재를 쓴 것이다.
도심지로 나와 비스마르크 광장을 보고 하우푸트 거리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서 점심으로 새우밥, 고기볶음 등을 맥주와 함께 먹었다. 교회와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실내가 넓고 천정이 높은 성당에 들어가니 웅장한 오르간 연주 소리가 들렸다. 한 연주자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벽면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건반 위로 여러 개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고 연주에 따라 움직였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살았던 생가는 프랑크푸르트에 잘 보존되고 있지만 이 도시를 좋아했던 괴테는 여기 살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며 ‘서동시집’을 발간했다.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어강을 건너는 카롤테어 다리에 올랐다. 250 m 나 되는 돌다리에 오르니 하이델베르그 성의 위용이 잘 보였다. 성의 맞은편 아래쪽으로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있고 그 대학 건물이 있는 산의 우측, 중턱에 있는 소로(小路)는 철학자들이 많이 걸었다고 ‘철학자의 길’이라 했다. 강의 상류에 운하가 있어 지켜보니 화물선 하나가 운하로 들어갔다.
다리의 입구로 내려오니 우측에 4~5층의 집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1700년대의 건물이라 했다. 300년이나 된 건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300년이 지나도 현대 건물처럼 보일까.
하이델베르그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달리다가 다름슈타트시로 들어갔다. 이 조그만 도시에도 여전히 트램(시가 전차)이 다녔다. 짤즈부르크에도 전차가 다녔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나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도 배기가스 없는 전차가 달리는데 왜 우리는 서울의 전차를 흔적조차 없앴을까? 3량의 칸으로 전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소음이 거의 없이 천천히 지나갔다.
다름슈타트시에 도착하여 주택가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나오니 흐렸던 하늘이 너무 맑아 눈이 부시어 썬그라스를 썼다. 유럽 여행 중 처음으로 색안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시로 변하는 독일 날씨. 하이델베르그에서 잠시 비를 맞기도 하였는데 언제 그랬나는 듯이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셨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다름슈타트 공대에서 잠시 실례하려 했는데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서둘러 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원에 있는 식당으로 가니 야외 테이블에 식탁보를 씌우며 잔치 준비를 하고 있어 양해를 구하고 그 식당의 화장실을 이용했다.
공원에는 커다란 회화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웠고, 아름드리 푸라타너스가 여러 그루 늘어 서 있었다. 나무의 몸통이 5 미터는 되는 듯,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안아야 껴안을 수 있는 두께였다. 그렇게 우람한 플라타너스를 보니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가 생각났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 먼 길에 올 제, / 홀로 되어 외로울 제 /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플라타너스는 우람하게 자라 커다란 잎으로 넓은 그늘을 드리워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그렇게 우람한 남성적 모습이 그 시인의 꿈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다시 나무로 태어난다면 플라타너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준 나무다. 플라타너스는 속성수로서 5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가로수와 정원수로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칠엽수라 부르는 마로니에도 엄청나게 컸고 가시돋힌 열매도 컸다.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이파리와 나무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나무다. 안내해 준 친척은 열매가 밤나무처럼 보여 너도밤나무라고 했다. 그러나, 찾아보니 우리나라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너도밤나무와는 달랐다. 플리트 비체의 산책로에 엮어놓은 나무 발판도 너도밤나무라 했다. 이 마로니에는 유럽 곳곳에서 자생하고, 정원수로 심어 유명한 공원에는 우람하게 자라나 공원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우리나라 동숭동에도 마로니에 공원이 있다. 마로니에로 알고 그 이름을 썼을 텐데 그 이름이 이국적이라 잘 기억할 수 있었다. 40여 년 전 가수 박 건이 부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가사에도 마로니에가 등장했다.
그러나 둥숭동의 마로니에 공원에는 마로니에가 없다. 일본칠엽수가 있을 뿐이다. 마로니에 열매는 가시가 돋혀 있지만 칠엽수 열매는 가시가 없다. 열매가 익었을 때, 껍질 속에 잘 익은 알밤 같은 씨앗이 나오는데 그것은 칠엽수 열매다.
공원의 왼쪽 아담한 못에 오리들이 물 위에서 놀고 있었다. 누군가 먹이를 주니 오리들이 다가왔는데 먹이가 떨어진 1~2 미터 전방에서 멈추었다. 자세히 보니 새끼 너댓마리가 먹이를 받아먹는데 어미 오리들은 뒤에서 포진해 있을 뿐 먹이 가까이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친척은 저 오리들이 참 기특하다는 것이다. 어린 새끼들이 먹이를 먹도록 양보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집이 좀 큰 오리가 다른 오리들을 쪼며 먹이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린 것들이 먹이를 먹도록 보호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어미 오리의 본능적 양보라니 오리의 생태가 놀랍다.
프랑크푸르트의 친척집에 돌아오니 저녁상을 한국 음식으로 화려하게 차려 주었다. 여행 중 매일 먹은 양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돌아갈 길이 염려되어 술을 먹지 못해 아쉬웠으나 모처럼 포식할 수 있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아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여 기름값이라도 하라고 봉투를 드리니 한사코 거절하셨다. 빚진 마음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네비를 따라 운전하며 10분쯤 달렸는데 차가 많이 밀렸다. 고가도로로 올라가는 길을 막고 차들을 우회시켰다. 우회 도로로 접어들자 네비는 돌아가라고 U턴 표시로 계속 떠올라 당황했다. 돌아가봐야 막힌 길인데 네비는 계속 우회 표시를 떠올렸다. 네비를 다시 조작하여 우회도로를 찾아야 하는데 독일어로 안내하는 네비라서 바꿀 수가 없었다. 네비를 무시하고 방향만 맞추어 달렸다. 오늘 따라 깜박 잊고 휴대폰을 집에 놓고 왔고, 아내 전화는 로밍이 안 돼 딸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딸에게 그 사정을 알릴 수 없어 몹시 당황했다.
길을 막아놓으니 차들이 정체하여 제 속도로 달릴 수도 없었다. 친척 집에서 딸의 직장 앞에 내가 도착할 시각을 전화로 알려 주었는데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30분 정도를 방향 감각만으로 달리다 보니 네비가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다. 25분 거리를 1시간이 걸려서야 딸이 기다리는 곳에 다가갈 수 있었다. 도저히 예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딸이 30분 이상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외국에서 상상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8. 도시 가운데로 유람선이 다니는 스트라스부르그
강 사이로 그림 같은 집들이 늘어선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시. 독일 남서부 국경에서 가까워 두 나라의 전쟁 통에 국적이 바뀐 도시다. 그래서 나이든 시민 중에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건물 역시 독일풍과 프랑스 양식이 혼재하고 있다. 사람들의 생김새야 구분이 잘 안되었지만 복장과 건축 양식이 조금 달랐다. 독일인들은 남녀노소 청바지를 즐겨 입고 수수하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복장이 다양하고 패션이 세련되어 보였다. 독일 건물은 단순하지만 프랑스 건물들은 디자인이 다양하고 색상이 밝았다. 강변에 빼곡히 자리잡은 건물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개성적이고 화려한 집들이었다.
이 도시 가운데로 라인강의 지류가 호수처럼 고여 있어 천정이 없는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녔다. TV 방송 ‘꽃보다 할배’ 라는 프로에 이 도시가 등장하여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또한 한국 단체 관광객들은 여러 나라의 도시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국경에 인접한 나라들을 대충 보도록 안내했을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광장에 모여 주변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고, 사진 촬영을 하느라 혼잡했다. 그렇지만 그런 걸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 광장에서 골목으로 접어들면 기념품 가게와 쇼핑 상가가 이어져 구경거리가 많다. 광장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유람선을 타려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우리도 타보려고 20분을 기다렸지만 20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노점에서 파는 핫도그로 시장기나 면하려고 하나씩 사 들고 먹으며 걸었다.
아름다운 골목길, 강변으로 굽이굽이 걷는데, 이젤과 건물 벽에 산뜻한 수채화가 걸려 있었다. 하얀 A4 용지에 그린 수채화인데 건물 한두 개를 심플하게 조그맣게 그렸다. 동양 여자가 수채화를 그리고 있어 잠시 살펴보며 “와! 색상이 참 예쁘다.” 한 마디 했더니, 그 화가가 “한국에서 오셨군요.” 하고 인사했다. 너무나 반가워 인사를 하고, 어떻게 여기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유학 왔다가 학위를 마치고, 그림 그리는 게 좋아 여기까지 와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 고 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길이 예쁘고 전망대도 나오는데 입장료도 없으니 꼭 보고 가라고 알려주었다.
돌아오면서 ‘다시 만나면 그림 한 장 사야지’ 생각했는데 다른 길로 오느라 만나지 못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장 사 주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그림 값도 10 유로, 약 13,000원 정도인데 왜 그리 망설였을까. 돌아오며,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쉬웠고 그 화가에게 미안했다.
9. 그들의 문화와 환경, 생활모습
오스트리아에서 뮨헨 방향으로 가던 중 고속도로에 차가 밀려 차들이 길게 정지해 있었다. 편도 3차선이었는데 우리 차는 1차선에 줄을 이어 정차했다. 그런데 1차선의 차량들은 중앙선 가까이 차를 붙였고, 2차선과 3차선의 차량은 우측으로 가까이 붙여 1차선과 2차선 사이에 차량 한 대가 넉넉하게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길게 마련되었다. 응급차나 비상 차량이 통과하도록 그렇게 차를 세운단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가능했을까? 그 공간에 얌체처럼 끼어들은 차 때문에 길은 꽉 막히고 말았을 것이다. 선진국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하지 않는 오토바이의 고속도로 진입이 여기에선 제약이 없다. 승용차는 거의가 소형이었고 대형차는 보기 어려웠다. 고속도로에 이따금 쉼터가 있는데 대체로 피크닉 테이블도 있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점심을 해결했고, 화장실도 무료로 이용했다. 그런데 일부 서양 사람들은 햇빛이 따가운데도 그 햇빛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을 먹었다.
공중화장실이 거의 없는 유럽에서는 대부분 약 70센트(약 900원)의 이용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무료 화장실을 이용하려 했다. 모짜르트 생가 앞에서도 카페의 커피를 주문했기에 이곳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하고자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도어 앞에서 번호를 입력하려는데 안에서 아이가 나와 얼른 들어갔다. 우리나라처럼 화장실 이용이 편한 나라는 별로 없다. 유럽에서는 화장실 이용에 돈을 내야하고 음식점에서도 물조차 사 먹어야 한다.
이어링이나 목걸이와 같은 악세사리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듯, 유럽에서는 건물의 테라스나 창 밖에 화분이나 꽃을 가꾸어 놓아 보기가 좋다. 다리 난간이나 작은 공간에도 예쁜 화분을 놓아 운치를 더했다.
거리에서나 차 안에서나 흑인과 백인이 잘 어울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흑백의 십대 소녀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특별하게 보였다. 우리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10. 여행기 마무리, 동유럽 생태계와 환경 특징
‘자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산과 숲이다. 산이 많으면 강도 발달하고 나무가 잘 우거지면 숲도 풍성하다. 유럽은 인구밀도가 낮아 도시에도 아파트가 드물고, 교외에는 가옥들이 드문드문 여유롭게 자리하고 있다. 건물도 예쁘지만 정원이나 공원을 잘 가꾸어 놓아 삶이 여유로워 보였다.
독일에는 가문비나무가 많고 우람하게 잘 자란다. 그래서 독일가문비나무의 원산지가 독일이다. 삼나무, 히말리아시다, 전나무, 소나무 등 침엽수도 많고 마로니에와 사시나무 등 여러 종류의 활엽수도 울창하게 우거졌다. 히틀러의 숲 조성 정책으로 그렇게 되었다며 그의 공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독일 날씨는 변덕스럽다. 비가 내리다가도 금방 맑게 개어 햇빛이 쨍쨍 비친다. 그렇게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나무들의 식생이 좋은 것 같다. 따라서 독일 사람들은 비 맞는 것을 예사로 여겨 비를 맞아도 뛰어 가지 않는다. 태연하다.
한국에서는 폭염이 한창이라 하는데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더운 줄도 몰랐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딸은 에어컨이 없이 살았지만 그리 불편하지 않아 작은 선풍기 하나로 한여름을 보냈다. 시원해서인지 모기도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오버우어젤시에 한국인이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어 찾아갔다. ‘하이데크룩’ 식당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차로 인근에 있는 한국 식당을 찾아갔다. ‘서울식당’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영업을 하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은 휴업이었던 것이다.
독일을 떠나오는 날. 다시 ‘서울식당’을 찾아가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교외의 등산로 입구에 있는 식당 같은 곳인데 인근에 식당이라곤 그 집 하나뿐이었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안쪽 벽에는 대형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이는 가족으로 보였는데 동양 여자와 서양 남자였다. 그리고 서너 살 된 딸이 한국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에 독일 노인 네 명이 들어와 한국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엔 30세 전후의 한국 남자 둘이 들어와 식사를 했다. 여주인이 60세 전후의 한국 여자라서 “장사 잘 돼요?” 하고 물으니, “ 예. 어제는 자리가 없어서 손님을 다 받지 못했습니다.” 고 대답했다. 이 식당을 10년 이상 계속 운영하고 있다는 건 장사를 할 만하다는 뜻일 것이다.
독일의 자영업자는 취업자의 약 16 %, 우리나라는 33 %에 가깝다. 우리나라 보다 가게수가 절반 이하다. 그러니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식당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장사가 잘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식당이 많아서 경쟁이 심하고 벌이가 신통치 않아 운영을 계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식당에서 육개장을 한 그릇 먹고 식당을 나와 바로 앞의 울창한 숲길을 걸었다. 등산객과 자전거 라이더들을 많이 만났다. 일요일이어선지 주차장이 꽉 차 산기슭 길가에 주차를 하고 산길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길의 양 옆에는 키가 크게, 곧게 자란 삼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울창했다. 40 ~ 50년 전 우리나라 시골의 전봇대는 이런 나무에 까만 기름을 칠해 전신주로 썼다. 나무들이 촘촘하여 햇빛을 받기 위한 경쟁으로 길게 자랐는지, 식생이 좋아 그런지, 또는 두 가지 조건에 잘 맞았기 때문인지 나무들의 키가 컸다. 또 달맞이꽃도 한국에서는 개나리꽃 크기인데 유럽에서는 진달꽃 만큼이나 컸다.
우리나라 높은 산에서 본 진달래도 2 미터 이상 자란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나무도 햇빛 다툼으로 키가 더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일까? 아니면 식생 환경이 좋아서 나무도 잘 자라고 사람의 키도 큰 것인가? 대체로 추운 나라 사람들이 키가 크다. 북유럽이나 러시아 사람들도 키가 크다. 중국에서도 만주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대체로 크고 북경 부근 사람들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주차를 산기슭에 하고 내리다가 풀잎을 스쳤는데 따끔했다. 하이델베르그 성의 정원 풀밭에서도 발목을 쏘였는데 이틀이나 따끔거렸다. 벌에 쏘였거나 쏘내기(애벌레의 일종)에 쏘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양 쐐기풀(stinging nettle)에 쏘인 것이었다. 그 풀을 독일어로는 ‘브레네세’라 했다. 우리나라의 비듬처럼 자랐는데 이파리가 들깨 잎보다 조금 작았다. 그 톱니 모양의 잎에 살갗이 닿으면 쏘였다.
숲길을 걷다 보니 산딸기나 복분자 같은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있어 한 움큼 따서 딸과 아내에게 주었다. 단맛이 나는 것도 있지만 약간 시고 떫뜨름했다. 몇 년 전 독일 북부 루데스하임 포도밭 가장자리에서도 많이 따 먹었었다. 씨가 굵고 살도 적어 많이 먹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보니 ‘검은 딸기(black berry)’ 였다. 이 나무는 가시가 돋혀 있어 울타리용으로 심는다 했다.
유럽 여행 중 특별하게 먹어본 과일은 넓적 복숭아다. 동그란 복숭아가 눌린 만두 모양이다. 조금 작지만 달고 맛있었다. 한국에서도 근래에 어느 농가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여 결실에 성공했다는데 극히 소량만 출하했을 뿐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풀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이 있다. 미나리과 꽃들일 텐데 대나물이나 당근꽃과도 비슷하다. 유럽 여행 중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야생화들을 많이 보았다. 귀국해서 이름을 찾아보려고 디카로 많이 촬영했는데 컴퓨터로 사진을 정리하다가 500 장이 넘는 사진을 모두 날려버렸다. 딸의 컴퓨터가 독일어로 되어 있어 실수를 한 것이다. 참 안타까웠다.
비행기 탈 시간이 많이 남아서 ‘서울식당’ 아래의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많은 독일인들이 휴일이라선지 카페에 차분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주차장에서 라이더들이 자전거 앞바퀴를 빼고 승용차 뒤 트렁크에 실었다. 3년 전 북유럽 여행 중에는 자동차 뒤에 달고 다니는 걸 많이 보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광경을 보기가 드물었다. 아마 승용차의 트렁크에 싣기 때문이었나 보다.
유럽의 집 창밖에 걸어놓은 제라늄, 미라벨 궁전 정원에서 본 꽃베고니아, 다리 난간이나 화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페튜니아 등, 그 외에도 화려한 꽃들을 어느 도시나 공원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유럽에는 공기가 맑기 때문이지 남청색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매우 아름다웠다. 산 위로 떠가는 뭉게구름과 선명하며 붉은 노을도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 내 고향 마을의 구름도 그랬었다. 옛날엔 무지개도 흔히 볼 수 있었고, 밤이면 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도 아름다웠다. 보름달이 뜨면 아주 밝아서 동네를 다 볼 수 있었고, 멀리서 걸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식별할 수 있었다.
강이나 하천, 우리나라의 산간 마을에 백로나 오리가 늘어났고, 수원 서호천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여기저기서 펄떡인다. 2001년에는 보지 못했던 가마우지가 4년 전부터 서호 밤섬에 무수히 많아졌다. 우리나라의 하천이 살아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이 맑아지듯이 공기도 그렇게 다시 맑아질 수 있을까?
유럽에는 공기가 맑으니 사진이 선명하고 하늘, 호수, 구름, 꽃들도 잘 자라고 빛깔도 아름답다. 그렇게 자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살겠다 싶다. 풀벌레의 노래 소리도 부드럽고 유려하다.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도 풀벌레 합창 소리는 대동소이했다.
독일에서 뮨헨을 경유하여 600 km 이상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산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구릉지대라서 지평선 멀리 담장처럼 높이가 일정한 산등성이가 뱀이 엎드린 듯 길게 드러누워 있을 뿐이었다. 넓은 들에는 밀밭과 옥수수밭이 대부분이었고, 말을 기르는 농장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조금만 지대가 높아도 멀리 시야가 열렸고 부드러운 지평선을 보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넓은 들, 낮은 인구 밀도가 사람을 반갑게 대할 수 있게 만든 건 아닐까? 들에는 경작지로 개간하기 좋은 땅이 그냥 풀밭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식량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이 살기 좋으면 인구 밀도가 높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먹고 살기도 힘든 우리나라는 왜 그렇게 인구밀도가 높을까?
유럽이 일찍부터 자녀를 조금만 낳았기 때문일까, 험악한 전쟁이 많아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일까. 아메리카나 호주로 이민을 많이 갔기 때문일까. 인구밀도가 낮아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 같았다.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했다.
50여 년 전 중학교 때 사회 시간에,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산악 국가라 농경지가 적어 살기 어려운 나라라고 배운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의 두 나라는 유럽에서도 국민소득이 높고 살기 좋은 나라다. 외국 관광객이 많이 오니 관광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잘살 것 같다. 그 두 나라에서는 양이나 소를 기르는 걸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 지금처럼 여유 있는 삶을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
소득이 보장된 나라, 맑은 공기와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 전쟁과 분쟁이 적은 평화로운 나라. 이런 나라가 지상 낙원에 가까운 게 아닐까? 부러운 나라들이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독일 뮨헨 쪽으로 달리다가 산 아래 분지에 길게 뻗은 호수를 보았다. 산등성이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뽀얀 뭉게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언젠가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뉴질랜드와 호주, 캐나다에도 가보고 싶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감동적인 여행인 것 같다. 이번 유럽 동남쪽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사는 몇 나라를 보는 동안 매일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 피서도 잘했다. 한동안 여행 장면을 회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가보려는 꿈을 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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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책 쓰셔도 되겠어요..ㅎ
긴 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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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제 기억을 위한 정리였습니다. 공감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수려한 문체의 기행문이 너무 읽기에 좋습니다. 다시한번 유럽 여행길을 따라 상상해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끼리 24시간 함께하니까 참 좋았겠어요. 가족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딸 위로 여행이었지요. 여행동안은 아픔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선생님께서 쓰신 기행문을 많이 참고하였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