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가볍다.
여기가 끝인가.
지옥같은 현실을 떠나 네 잔상을 지독하게 쫓아왔는데...
"쯧쯧. 불쌍해."
아무도 없다.
"진짜 불쌍해!"
진짜 아무도 없었다.
"너 말고 그 여자가 불쌍해!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네가 그 여자를 왜 따라가?!"
나는 소리가 돌리는 곳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 아니 내렸다. 키의 반뼘만큼 작은, 머리가 하얗게 솟은 여자가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표독스레 눈을 치켜 올려뜨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세요?
"네가 기어코 쫓아온다고 하니, 내가 그 여자 올려보냈어!"
"....."
"불쌍해.... 불쌍해.... 왜 저승까지 쫓아와 네가! 네까짓게! 이런 못돼처먹은 심보 하고는.."
노파는 지팡이 삼던 나무 막대기를 위로 올려 내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네가 양심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그 행동이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노파가 지팡이로 가슴팍을 쿡쿡 찌를 때마다 내 걸음을 한발, 두발 뒤로 물러났다. 물리적으로 쿡쿡 닿아오는 아픔과 다르게 가슴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쑤심이 또 느껴진다.
"여자만 불쌍하지... 죽어서도 너같은 놈한테 도망쳐 살아야해... 불쌍한 것..."
"그 여자가...."
"불쌍한 것..."
"..누군데요."
"네가 왜 물어!"
노파가 또다시 호통을 쳤다.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듯, 노파의 감정에 따라 바닥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솟구쳐 오르는 물렁한 땅에 옆의 기둥을 짚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노한 이유가 대체 뭐지? 먼지구름이 가득해진 공간 속에서 숨을 몰아쉬길 찰나, 지진같던 진동이 드디어 멎었다. 진동이 멎기가 무섭게 바닥에 주저앉자 무릎을 꿇은 행세가 되었다.
"그 꼴로 아주 싹싹 빌어도 모자랄 망정이지! 이 푼순이 같은 게 지 아프고 힘든 건 못 참아서 따라올 결심을 했다는 게 웃기기만 해 아주. 이 비겁하고 못되고 빌어처먹을 놈아."
"아니 대체!"
그 순간. 어디선가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냘픈 울음소리는 분명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아주 익숙했다.
"너 여란이를 찾고 있는 게 아니냐?"
"....란이는,"
노파의 말에 다시 여자의 울음소리가 끊겼다.
"그러니까 네가 양심도 뭣도 없다는 게 아니야."
"....."
"방금 전 그 울음소리도 엊그제마냥 아주 익숙할 텐데 말이지."
노파는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았다. 다시 돌아가. 그 소리에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 돌아가라니. 대체 어디를. 내 다급한 마음을 표정을 보지 않아도 읽은 건지 노파는 말했다.
"어디긴. 네가 있는 곳으로 썩 꺼져."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는 노파의 팔을 붙잡았다. 노파는 크게 뿌리쳤다. 작은 체구와 다르게 그 힘이 어디서 나는건지 뿌리쳐진 내 몸이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노파는. 노파는 뒤로 엎어진 내 어깨를 발로 꾹 밟으며 지팡이로 삿대질을 했다.
"너는 아직 올 차례도 아니고, 시기도 아니고."
"....."
"그 뜻은 네가 감히 스스로 자살시도를 했다는 것이고."
"....."
"진짜 네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
"지금의 너는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고. 나는 그런 너를 잠시 불러낸 것 뿐이야."
"....잠, 잠시..."
"그러니 네가 있는 곳으로 다시 꺼져,"
노파가 허공에 크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점점 갈라지는 공간 틈새로 죽은 듯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니. 나는 허공으로 떨어지려는 내 몸을 붙들고 무릎을 꿇은 채 노파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마, 제발, 제발 하지마. 저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어. 내 간절한 목소리를 알아주기라도 한듯 노파는 지팡이를 멈추고 쪼그려앉아 내 눈높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후회 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내 간절함을 알아주었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그 두 눈은 내 간절함을 알아차렸다기보다,
"정말로 후회 하지 않을 자신, 다시는 이딴 어리석은 행동 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그래,"
손을 뻗어주는 척 하며 나를 다시 시험에 들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구만 그래."
"....."
"그래 내가 너를 란이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주마."
"....!"
노파는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과 다르게 또렷하게 들려오던 건 노파의 목소리에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너의 울음소리였다.
"딱 열 생이야, 그 안에 네 손으로 모든 걸 돌려놔.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는 내가 없앨거야. 저승이든 이승이든. 그것도 그 아이가 끝까지 내게 바랐던 일이지. 그게 내가 너한테 내리는 벌이다."
"....."
"너는 그 아이가 죽는 순간만 고통스러웠다고 생각하나? 저 울음소리는 네가 들었던 것이 아니야. 이곳에 와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울었고, 나는 그 아이가 안타까웠을 뿐이다."
노파의 키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남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얀 얼굴은 정말 없던 신이라도 있다고 믿게 만들만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네 선택이 너무 이기적이고 고까워서 나는 네게 유리한 길을 선택할 수가 없구나."
"....."
"기억해. 네가 그 아이에게 저지른 일을 모두. 전부 기억하고 그 아이를 똑바로 마주해라. 네 기억은 지우지 않을테니까."
"....."
"진실을 전부 알고도 감히 너한테 한 마디도 입 뻥긋 하지 못했던 그 아이의 고통을 직접 겪어봐."
"....."
"그 아이의 이름은 이제 여란이 아니다."
"....."
"그 아이의 이름은......"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들렸던 건, 너의 이름이었다.
/
눈이 헉 하고 떠졌다. 커튼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빛하며, 이상할 정도로 개운한 몸하며, 까맣게 꺼져있는 휴대폰까지 삼위일체를 이루며 등을 타고 흐르던 불안함은 점점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방전이 되어 중간에 꺼진듯한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며 나는 거실로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망했다...."
조금 늦은 수준도 아니고 지금쯤이면 아예 수업이 끝나갈 시간이겠네. 어차피 완전 늦었겠다 나는 점심까지 든든하게 먹고 학교를 가기로 정했다. 대충 젖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옴과 동시에 칫솔을 물며 꺼진 휴대폰을 켰다. 어 이제 들어온다. 켜진 홈화면에는 부재중 알람과 부재중 연락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여브세여"
-...뭐야? 김여주 핸드폰 아니예요?
"맞는뎅여"
-왜 귀여운 척이야. 뒤질래?
"이에 칫솔 물거 있어서 그렇거등!"
-뭐야 너 이제 씻어?
"엉. 점심까지 먹구 갈 예덩."
-오후 수업만 듣게?
"그래야지 머...."
칵 퉤. 우굴우굴 입에 물고 있던 치약과 물을 함께 뱉었다. 핸드폰은 스피커로 해두고 잠시 세면대 위로 올렸다. 입을 전부 헹구고 숙였던 허리를 펴 거울을 마주하자 당황스럽게 마주한 건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였다. 내가 세수하고 제대로 물기를 안 닦았나 싶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툭 떨어졌다. 그건 내 눈에서 흐르는 물기였다.
"...나 왜 울고있지?"
-뭐?
"어, 아냐! 야 나 씻는다. 끊어."
-다 씻었다며!
"이따 학교에서 보자~"
장난스레 수화기 너머로 호통을 들으며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순식간에 흘러들어온 적막 속에서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큼, 흠. 아아-. 아직 잠긴 목소리는 어딘가 듣기 버거웠다. 최근들어서 계속 그랬다. 분명 잘 자다가 일어났는데.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잠에서 깨면 이상하게 울고 있었다. 어딘가 가슴이 시리게 뻥 뚫린듯한 기분도 간혹가다 들었다. 월경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건가 하기엔 분명 일주일 전에 끝났는데. 그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응 오빠."
-지금 일어난 거야?
"응, 헤헤...."
잠긴 목소리가 티나지 않으려 가다듬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한번에 알아차버린다. 멋쩍게 웃자 오빠는 그저 못말린다는 듯 웃었다. 원래 1교시 수업을 들으러 9시에는 가야 하는 애가 두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 분명 걱정이 한 가득이었을텐데. 괜히 미안함에 입을 꾹 다물자 눈치챈 듯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제 학교 가겠네.
"응, 그래야지. 오후 수업도 뺄 수는 없으니까..."
-성실하네 그래도.
"나 원래 성실해!"
-원래 연락 받아야 했을 애가 두 시간 넘도록 연락도 없고 친구도 모른다고 하길래 갑자기 사춘기가 왔나 했지.
"아니 그건...."
-학교 갈 거면 태워다줄게.
"응?! 안 그래도 되는데!"
-어차피 집 앞이야. 점심시간 미리 당겨서 온 거니까 뭐라 하지 말고.
"알았어 그럼..."
바로 집 앞에서 기다린다는 오빠의 말에 나는 다급히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젖은 머리는 대충 한번 빗어내리고 립글로스를 찍어 발랐다. 운동화를 구겨 넣다가도 협탁에 두고 온 지갑이 보여 다시 신발을 벗긴 귀찮아 무릎걸음으로 쟁취해왔다. 기어간 무릎이 알싸하게 아파왔다. 무릎을 쓰다듬으며 기다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자 정말로 공동현관 바로 앞에 익숙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오빠가 보였다. 나는 쟁취해낸 지갑을 꼭 쥔 손으로 팔을 흔들었다. 오빠!
"뛰어오지 좀 마."
"그래도 기다리잖아."
"그니까. 기다리는데 왜 뛰어와."
짧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춰준 오빠가 조수석에 나를 태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기분좋게 눈이 감겼다. 그런 내 왼손을 깍지껴 온기를 채운 오빠가 내 옆모습을 한번 길게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눈 부었네."
"응? 아 늦게 일어나서 그런가봐... 또 나 놀리지말구.."
"귀여워서 그런건데."
손을 뻗어 부은 내 눈두덩이를 한번 쓸어준 오빠가 다시 손을 맞잡았다.
차마 울어서 눈이 부었다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답답하게도 그 이유를 전혀 모를 뿐더러, 그 일이 오늘 하루만이 아닌 하루 이틀, 심지어 꽤 되었다고 하면 오빠는 내 걱정을 진심으로 할게 눈에 뻔히 보였다. 괜히 이유도 모르는 걱정거리를 오빠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은 오빠에게선 시원한 어른의 향이 났다. 분명 나도 20살 넘은 성인이건만, 오빠는 그보다 훨씬 성숙하고 믿음직한 어른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나의 남자친구가 된거지? 싶을 정도로 그는 내게 너무 과분했고 완벽했다. 그런 오빠와의 첫만남마저 운명같았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보이려나.
내 친구들은 오빠와 나의 첫만남을 듣고 운명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나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이정도면 오빠와 나는 운명이 아닐까? 하고. 이런 내 생각을 오빠가 알게 된다면 또 어린애 취급하면서 웃어넘기고 말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그냥... 오빠 너무 잘생겼다 이런 생각?"
오빠는 내 말에 푸스스 웃었다. 잠깐 정차한 차 안에서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좋다. 진짜 너무 좋다...
"왜 이렇게 애교를 피우지 오늘."
"오빠가 너무 좋아서..."
이름 있는 좋은 대기업의 사회인인 그가 그저 일개 대학생인 나를 보며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을 했을 때는 심장이 터지도록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와는 비교도 안 되는 별 거지같은 전남친에 콩깍지에 씌여 차이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던 날, 왜 이렇게 내 연애는 잘 풀리지도 않고 되지도 않는지 한탄했던 날. 마치 주인공처럼 나타난 오빠는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집 가서 또 울지 말라고 내 손에는 그가 사오던 케이크를 쥐어주었다. 심지어 그것도 내가 좋아했던 치즈맛으로.
이정도로 완벽한 그가 대체 나를 왜 좋아할까. 만난지 얼마 안가 내 자신한테 권태기가 찾아온 내게 오빠는 처음으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너 내 옆에서 그 생각만 하고 있었어? 매일?'
'...매일은 아닌데....'
'네가 아니면 나는 좋아할 사람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거야?'
'나는 오빠한테 너무 초라하니까.....'
'김여주.'
처음으로 오빠한테 성까지 불린 내 이름에 놀라 오빠를 바라봤다.
'너 왜 자꾸 그런 생각해. 나랑 헤어지고 싶어?'
'아니야.... 내가 왜 그래... 그건 정말 아니야...'
'그럼 너 정말 왜,'
내 한마디, 한마디에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던 오빠는 끝내 내 앞에 주저앉는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당황한 나는 오히려 흘리던 눈물을 쏙 집어넣었다.
'나랑 헤어지기 싫다며.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해....'
'아니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생각한 게 정말 어리석고 터무니 없을 만큼 오빠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오빠한테 말도 안하고 그동안 혼자서 속에 품어온 의심을 키우고 키우다가 이렇게 일을 벌인 내가 못나보일 정도였다.
'헤어지지 말자 여주야... 우리 끝내지 말자... 너 이러면 오빠 진짜 힘들어..'
'아니야! 헤어지자는 거 아니었어....'
'그래, 그럼 됐어.'
그럼 됐어. 다행이야,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시는 이 남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은 협박으로도 쓰면 안 되겠다고 몸소 체험한 날이었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정말 산송장처럼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손은 덜덜 떨면서 숨도 헐떡거리다시피 하던 오빠가 너무 놀랐다며 나를 안았다. 정말 놀랐는지 쿵, 쿵, 쿵 미친듯이 뛰는 심장소리가 가슴팍을 타고 전해졌다. 오빠는 내가 그리도 좋을까?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사람처럼.
"오빠는 날 너무 좋아해."
"뭐야."
"날 너~무 좋아해서 문제야. 문제."
"이제 알았어?"
차를 학교앞에 멈춰세운 오빠가 안전벨트를 풀고 훅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내가 뒤로 얼굴을 빼자 내 뒤통수를 감싸쥔 오빠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피하지마."
"....."
"그리고 나는 너 사랑해."
오빠가 너무 좋다는 내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가 내 입술을 급하게 물었다.
/
지루했던 오후수업이 끝나고 다급하게 가방을 챙겼다. 안 그래도 몇 분 전부터 버스 시간을 보고 있었는데. 딱 2분만 늦게 끝나면 놓칠 것 같단 말이야. 왼쪽 다리를 미리 빼놓고 우사인볼트마냥 뛰어갈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이만 수업을 끝내겠다는 교수님의 말에 의자에서 번쩍 일어나 문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는지 입구부터 복도는 꽤 사람으로 붐볐다.
"아, 잠시만요... 아! 저 지나갈게요!"
길 곳곳을 막아오는 인파에 겨우 빠져나갔다 싶을 쯤,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혀 나는 메고있던 가방을 떨어트렸다. 아 씨... 나는 떨어트린 가방과 쏟아진 소지품을 모아 챙겨들었다. 버스 놓쳤겠네, 씨... 가끔은 별다른 거 아닌 일에 갑자기 화가 나고, 갑자기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나는 괜한 짜증과 함께 몰려오는 눈물에 신경질스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와 부딪힌 남자의 미안하다는 말에도 대충 대꾸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백현오빠♥]
핸드폰에 뜬 이름에 나는 뛰던 걸음을 멈췄다. 어차피 버스도 놓쳤겠다, 괜히 뛰었다는 생각에 화만 나고 억울해서 오빠의 전화를 막 받을 수가 없었다. 괜히 받았다가 내 짜증이 애먼 그에게 갈 것만 같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빠는 좋지않은 내 목소리에 당황할 게 뻔했다. 요란스레 울리던 휴대폰이 잠잠해지면서 꺼지기가 무섭게 다시 두번째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마저 고의로 받지 않은 채 바닥만 보며 걸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앞에서 잡았다. 길이 막혀 고개를 들어올리자 굳은 얼굴의 오빠가 보였다. 오빠는 여전히 핸드폰을 제 귀에 댄채로, 내 손에 쥐어진 채 울리는 내 핸드폰을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못 들은 것도 아닐텐데."
"....."
"왜 전화 안 받아. 여주야."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온 듯 보였다.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럼 나는 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을텐데... 괜히 그에게 옹졸해진 마음을 보일까봐 입을 꾹 다물었는데 오빠는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여주야,"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고 가셨어요. 오빠가 부르는 내 이름과 겹쳐서 뒤에서는 낯선 남자의 미성이 들려왔다. 떨어트리고 갔다며 차마 내가 챙기지 못한 필통을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건네며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다. 대충 필통을 가방에 쑤셔넣고 오빠에게 해명을 하기위해 고개를 들었을 찰나, 한층 굳어있던 오빠의 표정이 내 뒤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았지만, 그곳엔 내게 떨어트린 필통을 전해준 남자 뿐이었다.
"저기요...?"
"....."
"...안.. 가세요?"
"아."
오빠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보며 우두커니 서있던 정체모를 남자는 내 말에 그제야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야죠.
"그쪽 나한테 빚 졌으니까 나중에 커피라도 사줘요."
오빠의 눈길은 느껴지지도 않는지, 남자는 뻔뻔하게 나를 보며 제 말을 마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오빠는 그때까지도 남자가 사라지는 흔적을 끈질기게 쫓았다. 나는 오빠의 팔을 한번 잡아당겼다.
"...따로 안 만날거야 오빠. 알지?"
"너,"
오빠가 내 말을 끊고 내 두 팔을 꽉 잡았다. 사나웠던 얼굴은 금세 나를 향하면서 물었다. 사나웠던 얼굴은 그 안에 초조함을 담고 있어보였다.
"저 남자, 알아?"
"....."
"아는 사이냐고 여주야."
"아, 아니야."
"근데 왜 말을 더듬어."
"아니야, 진짜 아니야!"
항상 입이 닳도록 칭찬하며 완벽해보이던 오빠에게도 딱 하나 단점이라면 있었다. 항상 이성과 관련해서 오빠는 집착이 심했다. 평소에도 예민하게 굴었을 그인데, 하필이면 상황이 이렇게 겹친지라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일 정도로 거세게 숨을 쉬던 그가 머리를 쓸어넘기고 나를 질질 끌고갔다.
"오빠, 오빠! 진짜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오빠는 사람의 시선이 적은 길가에서야 멈춰섰다. 그리곤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는 듯 보였다. 또다시 가슴팍을 타고 그의 심장소리가 전해진다. 쿵, 쿵, 쿵, 쿵... 서로 끌어안길 몇분동안 유지하자 그의 심장소리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야?"
"나 몰라. 저 사람에 대해서 그냥 아-무것도 몰라! 오늘도 그냥 가방 떨어트려서 물건 좀 주워준 사람이야. 아니! 애초에 저 사람이 나한테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우리 오빠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텐데! 다음에 내가 만나면 먼저 어깨빵 날릴게! ...그것도 오빠는 싫으려나? 하여튼 저 사람이 먼저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저 사람이 먼저 너한테 부딪혔어?"
"...엉? 어, 어... 그렇겠지...?"
"여주야."
"응?"
"진짜 저 새끼 만나지마, 앞으로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응?"
"아, 알았어."
"약속해."
"무슨 이런 걸로 약속까지야..."
"빨리."
오빠는 내 손가락을 잡아채듯 가져가 꾹 눌러찍었다. 이게 뭐야, 귀엽게... 나는 다시 한번 오빠를 꽉 끌어안았다. 오빠는 손가락지장까지 나와 찍었으면서 뭐가 그리 불안한지 내 품에서 웅얼거렸다.
"진짜 저 새끼 만나지마 여주야 제발..."
"알았다니까! 흐흐, 진짜 귀엽게..."
"아니 그냥 나 빼고 다른 남자들이랑 만나지마. 접촉하지도 마. 항상 거리 이미터씩 유지해."
"뭐야... 밖에 나가지 말라는 거 아니야?"
"...안나가면 안돼?"
"진짜 왜이래 귀엽게! 미쳤나봐, 변백현..."
오빠는 내 품에서 숨을 색색 내쉬었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정도 안정이 되는지 그제서야 오빠는 아프지않게 내 머리를 톡 쳤다.
"뭐? 변백현? 귀여워? 또 맞먹으려 하지 이제."
"아니 내가 언제..."
"됐으니까 빨리 가자."
오빠는 나를 그대로 한번 있는 힘껏 꽉 안았다가 품에서 꺼냈다. 벌써 날이 지고 있었다.
/
헉하고 눈을 떴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을 땐 이제 막 오후 12시였다. 오늘 학교 안가지 참... 오빠랑 만나기로 한 시간인 4시가 되기 전이었다. 다행이다. 또 늦는 줄 알았네. 요즘따라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지. 나는 뒤척이며 휴대폰을 놓고 몸을 똑바로 돌려 천장을 바라본 채 누웠다. 그러자 관자놀이를 타고 무언가 주르륵 흘러내려 귓가를 적셨다. 이젠 손으로 익숙하게 닦아낼 수 있다.
"아 또 우네... 나 많이 졸린가?"
옛날에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해도 쉽게 안울었는데... 이젠 일상이 되어버렸네. 침대에서 조금 더 빈둥대다가 씻을까. 귀찮은데. 생각하다 괜히 미루면 나중에 더 귀찮아질 것 같아 미리 씻기로 했다. 씻고 나오자 오빠에게서 오늘 일이 일찍 마무리 될 것 같다며 괜찮으면 3시에 만나도 되겠냐 문자가 와있었다. 이것 봐. 미리 씻길 잘한 것 같지.
[응 좋아! 나 그럼 맞은편 카페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을게!]
옷 갈아입고 준비하고 미리 나가있는다 생각하면... 지금부터 움직이면 얼추 시간이 맞겠다 싶었다. 카페에 가서 미리 기다릴겸 최근에 산 책을 챙겼다. 오랜만에 들린 서점에서 그냥 이끌리듯 산 책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크기의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개인 승용차가 있었어도 이렇게 버스 시간 맞춰 일찍 나올 일은 없을텐데... 가끔 보면 오빠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느라 편하게 다녀서 잊고 있었던 내 처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오빠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 주세요."
주문을 마친 나는 진동벨을 받아 출입문이 잘보이는 쪽에 앉았다. 어차피 오빠도 곧 있음 오겠다 싶어 커피 두 잔을 미리 시켜놨다. 얼음 녹은 거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오빠는 연한 커피만 마시니까 얼음으로 희석하는 셈 친다 하고 주문한 거였다. 빨대를 꽂아넣고 앉아 가지고 나온 책을 펴 읽기 시작하는데.
"....?"
맞은편에 인기척이 들어 고개를 들어올리니 낯선 남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며칠 전 내게 쏟아진 가방을 정리해주고 필통을 건넨 그 남자였다. 그 남자가 자연스레 내 앞에 앉아 오빠 몫의 커피를 손에 쥐고 빨대를 쪽쪽 빨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져 그에게 뭐라 한마디 하려는 찰나, 남자가 더 빨랐다.
"에이, 나 얼음 녹은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럼 내놔요."
"사준 의미가 있지."
"아니, 어이 없어... 내놔요! 그쪽거 아닌데!"
"저번에 커피 한잔 사달라고 했던 거 잊었어요?"
먹기 싫음 말아요! 외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저 남자의 몫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변명 아닌 말을 하고 있어야 해?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갈 뻔한 말이었다. 내 표정을 본 남자가 웃기다는 듯 피식 웃었다. 되게 사납네.
"그러게 왜 남의 걸 덥썩 덥썩 먹어요! 오빠 줄려고 산건데...!"
"난 또. 저번에 내가 한 말 약속 지키려는 줄 알았지."
"그건 약속이 아니구요."
"어쨌든 지킨 건 맞으니까."
남자가 손에 든 커피를 한번 들어보이며 눈썹을 까딱였다. 나는 남자를 무시한 채 읽던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남자는 그런 날 보며 오~ 책도 읽어~ 문학소녀? 하며 놀림조로 말했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그는 이상한 인간이야. 오빠도 이 남자랑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얼른 가라고 하자.
"근데 오빠라면... 저번에 데리러 온 그 남자?"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죠?"
"오~ 반응 봐. 네 반응이 맞다고 대답하는데요?"
"제 말 따라하지 마시죠?"
"이게 어딜 봐서 따라하는 거죠?"
"지금도!"
순간 울컥한 나는 책을 힘있게 내려두었다. 책표지가 책상과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내 두눈과 마주한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의미를 모를 그의 미소에 나는 내려던 화를 숨기고 그를 달래듯 정중하게 말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요. 곧 올텐데 거기에 계속 앉아계실 건가요?"
"지금 만나고 있는 오빠가 잘해줘요?"
허-, 이건 무슨 신종 수법인가. 내가 도끼병은 아니다만 전형적인 호감 있는 남자의 그것이었다. 올라가있는 입꼬리하며, 나를 바라보는 저 묘한 두 눈 하며, 계속 무시했는데도 따라붙는 말꼬리 하며. 내가 직설적으로 비키란 소리를 안 해서 그런 것인지.
"혹시 죄송한데,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울리지는 않고?"
"저기요, 제가 먼저 물었는데요."
"그 오빠가 이번에는 잘해줘요?"
"그냥 제가 다른 곳으로 갈게요. 그쪽 말대로 제가 커피 한번 사준셈 치고요."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다 가방을 챙겨들었다. 무슨 이상한 남자야. 액땜 한다 생각하고 비킬 생각이었다. 사이비도 아니고,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걸 한다해도 할 얼굴이 아닌데. 가방을 어깨에 맨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다른 자리로 옮기려 할 때였다.
"여주씨 전생을 믿어요?"
물리적인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나를 잡아세운 남자의 의도대로 나는 한발자국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내려다봤다.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였다. 들을 필요 없다, 마주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해도 생각하는 머리랑 다르게 몸은 가만히 선 채 남자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나이 들어보이는 농담인가."
"....."
"그럼 이건 알아요? 전생에 죄를 지으면 개, 돼지 뭐 그런 걸로 태어난다는거."
"....."
"난 그 말이 너무 웃겨요."
"....."
"뭐 그럼 이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전생에 착한 일만 하고 살았나."
"....저한테 하는 소린가요?"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다 나는 이번엔 아예 몸을 돌려 남자가 있는 쪽을 향했다. 내 반응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요, 그것도 아주 커다란 죄를 지었을 땐,"
"....."
"아닌 척 숨기려 해도 죄를 지은 상대방을 보면 다 티가 나게 되어있어요."
"....."
"막 불안하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
"그걸 직접 옆에서 보고, 듣고, 느끼라고 하는 거예요. 개, 돼지 그런 걸로 태어나면 전생에 죄를 지었다는 양심도 느낄 수가 없잖아 이제."
"....."
"그냥 그렇더라구요."
남자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꼭 굳이 반박하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건지 그 의중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누굴 겨냥한 말인지도 전부 알 수가 없었다. 내 심오한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동시에 그런 남자의 옆으로 급하게 다가온 누군가가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조금 더 일찍 비켰어야 했는데."
"....."
"덕분에 커피는 잘 얻어먹어요, 여주씨."
"....."
"오빠랑 데이트 잘 하고~"
남자는 그대로 제 앞을 막아세운 인영을 툭 치고 비켜 지나갔다. 아직까지도 우두커니 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다가온 오빠는 내가 마시던 커피를 들어 얼음을 입에 넣고 까득 씹어먹었다. 급하게 온건지 항상 제자리였던 넥타이가 풀어져있었다. 오빠는 멍때리는 나의 손을 붙잡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카페에 놓고온 책이 생각나 오빠의 손을 잡아 힘을 주었지만, 도무지 먹히질 않았다. 내가 아무리 저지해도 오빠는 그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제 차에 나를 태우고나서 운전석에 앉았다. 화가 난걸까? 나는 그에게 다급히 방금 전의 일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빠 화났어? 방금 전의 그 남자는 진짜 내가 부른 거 아니야! 나 여기서 그냥 가만히 오빠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기 맘대로 내 앞에 앉아서...!"
"...입 다물어."
"..오빠...."
"아니, 하..."
내게 입을 다물라는 오빠의 반응에 놀란 내가 아무말도 못하고 굳어있자 오빠는 그제서야 자신이 내뱉은 말을 깨닫고 다급히 내 손을 쥐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 지금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상하게 방금 전 남자가 해주고 간 말이 뇌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오빠와 내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다른 연인들처럼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3자의 개입으로 불을 지피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게 맞아야 했다.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나를 보고 서로에게 감정이 상해 싸운다고 하더라도, 오빠에게 하는 말은 전부 내 의지와 선택으로 내뱉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방금 전 남자의 말은 그런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다.
"...오빠가 나한테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여주야."
내 말에 나를 달래던 오빠의 말이 뚝 멎었다. 내 손을 잡고 안절부절 못하던 오빠는 찬찬히 고개를 올려 나를 마주했다. 눈물이 맺힌 나를 바라보던 오빠의 얼굴이 굳는다. 오빠에게 잡힌 손을 빼내자 다급히 그런 내 손을 다시 붙잡아오는 오빠였다.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아니야, 미안해 여주야. 방금은... 방금은 오빠가 진짜 미쳤었나봐."
왜 이렇게 평소보다 더 서럽지? 다른 남자와 오빠 몰래 대화를 나눴던 것도 나고, 그런 나에게 한마디 할 수 있는 명분도 있는 것도 오빠이고, 심지어 전에 만나지 말라고도 한번 경고를 줬던 사람인데. 근데... 이번엔 오빠가 나한테 뭐라 한마디 하는 게 어쩜 이렇게 서러울까.
'지금 만나고 있는 오빠가 잘해줘요?'
"나한테 어떻게 이래 오빠가...."
'울리지는 않고?'
"나한테..."
'그 오빠가 이번에는 잘해줘요?'
이상하게 차오르는 감정에 나는 그대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오빠가 나를 뒤에서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엔 간간히 절망도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상한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빠의 차가운 얼굴과 눈빛... 그리고 그 말투와 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쫓아오는 오빠를 피해 걸음을 더 빨리 할 때였다. 나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오빠가 뒤에서 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코앞에서 나를 막고 선 남자와 두 눈이 마주쳤다. 아... 또 그 남자였다. 그 남자가...
"....."
나를 붙잡느라 쫓아온 오빠와 그 남자가 다시 마주했다. 남자는 오빠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 팔을 붙잡은 오빠의 손을 잠시 뿌리치고 한발짝 멀리 섰다. 프레임 밖에서 마주한 두 남자를 보니 그제서야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남자를 향해 오빠가 먼저 꾹 다물린 입을 열었다. 힘이 들어가있는 턱이 움푹 패일 정도로 오빠는 화를 참고 있는 듯 했다.
"너 뭐야."
"....."
"왜 네가 갑자기 나타나..."
"....."
"왜 잘 살고 있는 애 앞에!"
"잘 살고 있는 애?"
동시에 나는 밀려오는 구역감과 현기증에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꼭 서로를 죽일듯한 눈으로 위태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점점 현실세계와 멀어지듯 웅웅대는 시청각에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들리지가 않았다.
"큰 착각을 하는데."
"....."
"내가 너한테 준 건 기회가 아니라 벌이었어."
"....."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던 나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나를 본 오빠가 내게 다급히 다가왔다. 그런 오빠를 보며 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머리가 아스팔트에 박기 전 오빠의 품에 안긴 나는 그의 향을 맡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너 벌 덜 받았잖아."
오빠의 울음소리와 대비되게 남자의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럼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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