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가르기
권자이
잘 띄워진 메줏장을 (메주를) 소금물에 넣고 칠십일 만에 된장과 간장을 분리하는 장 가르기를 했다. ↖“장은 일 년 식량이다(.)”라고 하던 엄마 말이 떠오른다.
지난해 초겨울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메주를 만들고 짚으로 묶어 베란다 빨래걸이에 달아두었다. 집이 남향이고 고층이라서 하루 (온)종일 햇볕이 들어 메주가 아주 잘 띄워진다. 그러니 (장) 담는 날 바로 짚을 벗겨서 씻고 소금물에 넣으면 된다. 콩 여섯 되로 만든 메주는 물 한말에 천일염 두되를 넣고 숯과 마른 고추를 띄우면 된다. 장 담기는 이렇게 간단하다. 올해로 십년 째 하는 일이다.(로서 장 담기는 이렇게 간단하다.)
엄마가 작고 하신후로 언니 장을 얻어먹다가 언니가 고희를 맞은 해부터 (내가) 장 담기를 시작했다. 사촌 올케언니에게는 언니가 장을 담아 주었는데 장 담기를 시작하고는 올케에게 (이제는) 내가 보내준다. 그러다 보니 엄마(에)서부터 세 모녀가 (대를 이어) 담아주고 있는 셈이다. 오빠나 남동생이 (남형제가) 없는 우리 집인데 사촌 올케가 (마치) 친 올케처럼 부모님께 잘했었다. 아버지가 뇌경색이 왔을 때는 서울로 모시고가서 며칠간 입원치료 하는 동안 간병은 물론이고 (올케) 집에 모시면서 통원 치료까지 도맡았다. 사십 여 년 전 올케가 새댁일 때 일이(었)다. 그 후로도 두 분 생신은 물론이고 명절까지 챙기고 수시로 안부 전화도 잊지 않았다. 이런 올케에게 엄마는 (이런 올케를) 늘 고마워하며 우리들인데 (에게) “내 죽고 난 뒤에도 니들 올케 공 잊어서는 안 된다.”고 노래처럼 말씀하셨다. 부족함 없이 사는 올케가 자연식을 좋아해서 장이라도 담아주고 싶어서 여태껏 이렇게 매번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올케언니는 당신이 한(베푼) 것은 생각에도 없고, 올케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도 그저 내가 하는 (해주는) 것에는 (을 마냥) 고마워만 한다.
엄마는 살아생전 장독을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 했다. (모든 음식 맛은 장맛에서 좌지우지 된다고 하셨다.) ↖지금은 장독에 덮는 유리뚜껑이 잘나와 (생산되고) 있어 마당에 (둔) 장독을 두고 (이) 비가와도 (비를 맞아도) 빗물이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엄마 시절에는 공기와 햇볕을 쬐기 위해 망사 천으로 가렸다. 또 망사 가림 막은 파리나 벌레가 못 들어가게 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니 비가 오면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나 빨래 그 어떤 것도 제쳐두고 장독부터 덮는다. 아침이면 들일을 하로(러) 가기 전에 행주로 장독을 윤이 나도록 씻고 딱은 (닦은) 후 날씨를 봐가면서 뚜껑을 얼(열)어놓는다. 저녁에 돌아오면 또 장독 뚜껑부터 덮는다. 모든 음식 맛은 장맛에서 좌지우지 된다고 했다. ↖요즘에야 그저 옛말이 되어버렸지 않은가.(옛 얘기일 뿐이다.)
시중에는 갖가지 장이 있어 입맛에 맞는 걸로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도 나는 번거롭다고 여기면 번거로울 수도 있는 장 담기를 고집한다. (왜냐하면) ↖시중에(서) 파는 장은 화학조미료 맛이 강해서 장에 원래 맛인 (본디 장맛인) 짭짤하면서도 (은은히 감도는) 단맛이 감도는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맛은 7.(~)80%는 소금에 달려있다.
희고 윤기 나는 천일염을 3년 이상 간수를 빼면 소금 두 알이 붙지 않을 만큼 포슬포슬 하다. 그때(쯤) 소금에서 단맛이 난다. 엄마로부터 익힌 맛이고 배운 것이다. 엄마는(,) 그 집 음식은 장맛에 달렸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했으니 장에 대한 애착을 지금 생각해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된장과 간장을 가르고 있으니 정말 장에서 단내가 솔솔 난다. ↖간장은 일단 햇볕이 잘 드는 마당이 아니라서 큰 솥에 담아 달이고, 된장은 도깨비 방망이로 콩 조각을 갈았다. 질그릇 독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꼭꼭 눌러서 넣고 위에 랩을 깔고 소금을 엷게 펴서 덮었다. ↖내가 마치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고무장갑을 벗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장을 찍어 혀에 대고 맛을 보니 코끝에 단내가 살짝 돌며 짭짤한 맛에 스스로가 뿌듯하다. ↖내 삶도 (우리) 올케언니처럼 (혹은) 장맛처럼 이렇게 늘 여여如如 하기를 바람 해본다.(깊고 그윽하기를 소원한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연희
토요일 오후의 여유를 맘껏 누리다 우연히 어떤 드라마의 재방을 (재방송되는 드라마를) 몰아서 보게 되었다. 주인공인 남교사가 제자를 지켜주지 못해 자신이 죽였다고 오열을 했다. 교무실에 상담을 하려고 찾아온 제자를 바빠서 (바쁘다는 핑계로) 나중에 보자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 제자가 자살을 해버렸다.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하며 울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며 예전 일이 생각이 났다.
그 장면을 보고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찝찝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첫 부임한 남자중학교에서 담임은 중1을 수업은 중3을 맡겼다. 초보 교사가(라) 담임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업무가 손에 익지 않아) 반 학생들과 교류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전달사항 전하고 납부할 돈 거두는 역할이 (고작이었다.) 밖에는 없었다. 아침에 학생들끼리 자습시키고 3학년 보충수업을, 오후에 종례 마치기 바쁘게 (또) 3학년 보충수업을 해야 했다. 청소 검사도 못하니 교실도 깨끗하지 못했다. (우리) 반 학생들과 도무지 정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이름 겨우 익힐 정도 있(였)다. 교무회의 때엔 내가 맡은 반이 학생 주임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청소상태 불량이거나 책걸상 파손이 많은 문제반이었다. 매일의 (눈코 뜰 새 없는) 학교 생활에 서서히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한 말썽꾸러기가 걸핏하면 결석을 했다. 집에 (몇 차례) 찾아가기도 몇 번하고 학부모 호출도 했었다.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않았다.) 파출소에 가서 고개 숙이고 데려오기도 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한 번만 더 사고를 치면 퇴학당할 지경인데 또 사고를 냈다. 학교폭력에 무단결석이다. 폭력을 당한 학생의 담임이 무섭게 대응을 했다. 학생주임이 (그 학생을) 퇴학을 시키겠다고 말을 했다. 끝까지 지켜줘야 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도 못하고 자퇴로 처리가 됐다. 한편으론 (할 말은 아니지만)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2년쯤 후 (어느 날) 수업하고 나오니(는데) 복도에서 그 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도 길고 (를 기르고) 사복을 입어서 성인 티가 나서 몰라봤다. 무심히 지나치는데 그 청년이 "선생님" 하고 불렀다.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하는데 (품세가) 몇 년 사이에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동생 때문에 학교에 왔다가 인사라도 하고 갈려고 (가려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 사이에 철이 든 그 애를 보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눈을 맞춰 얘기를 (맞추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그때 생각이 났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학생부와 마찰을 빚더라도 퇴학만은 막았어야 했다. 억지로(라도) 밀고 나가 중학교 졸업은 시켰어야 하는데 중학 졸업장도 없이 어찌 뭘 하고 살아갈까? 늘 죄책감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중학교 1학년 5반 조**, 이제 60이 되었을 그 제자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에 마음이 아팠다. (짠하다.) 한 번쯤 만나서 미안했다고 하고 싶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중학교 1학년 5반 조** ↖미안하다 미안해 그때 담임이 못 지켜줘서.
드라마를 보고 40년 너머의 세월을 거슬러 갔다. (드라마 한 편이 40년 그 까마득한 세월 너머로 나를 데려간 오늘이다.) 여러 가지 생각에 젖은 마음이 아주 무거운 토요일 오후였다. (착찹한 마음이 물 묻은 솜처럼 무겁다.)
단 한 사람
배정행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있을 때 삶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 가에 따라 죽음과 삶이 결정된다고 한다. 건물이 갑자기 무너져 그 안에 매몰되었을 때, 생사를 가르는 전장의 현장에서, (이나) 혹은 산소 마스크에 의지하여 생을 연명하고 있는 중환자실에서조차 (이 그렇다.) 꼭 살아서 나가 만날 사람이 있는 사람은 살아날 확률이 높다. 저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이승에 묶어 두게 하는 힘, 그것은 바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봉무 공원의 단산지에 자주 가는 편이다. 그 주변에 백화점이 새로 생겨 가봤다가 우연히 알게 된 곳이다. 저수지 둘레길 따라 걸어 보니 야산으로 둘러 쌓여(싸여) 풍광이 좋고 둑방길을 걸을 땐 속이 시원할 만큼 시야가 훤해진다. 사실 내가 그곳을 자주 찾는 덴 다른 이유가 있다. (까닭은) 어떤 고양이 때문이다.
길 고양이를 식구로 들이고 부터 어딜 가든 고양이가 눈에 띄었다. 그날도 둘레길을 걷다가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어떤 아저씨의 무릎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보통 고양이들은 구속 받는 (당하는)걸 싫어해서 목줄을 매어서 밖에 데리고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하도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아저씨네 고양이에요?"
(하도 이상해서) 그렇게 물어보면서 (봤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 목에 목줄도 없었다.
"아, 이 고양이는 제 고양이가 아니예요. 여기 단산지에서 태어났어요. 제 어미가 새끼를 네 마리 낳았는데 그 중에서 요 아이만 살아 남았죠. 제가 발견하고 먹이를 갖다 주곤 했는데 희안(희한)하게 다른 새끼들은 날 본체만체해도 이 아이만은 날 잘 따랐어요." ↘(그가 잠시 뜸을 들이며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내처 설명하였다.) "그래서 살아남았나 싶어요. 얼마 전 어미한테서 독립해서 이 주변에 자리 잡았는데 제가 매일 와서 먹이도 주고 잠시 같이 놀아 주고 갑니다."
고양이와 사람과의 인연도 이렇듯 무슨 끈이 있어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 단산지 둘레길 동북 방향 벤치로 가면 어김없이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고양이가 사람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보다가 가곤 했다. 그 사연을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날엔 같은 시각 그곳을 지나가는데 고양이만 그 벤치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저씨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저씨가 그날은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고양이는 그 아저씨가 오는 쪽 방향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그 눈빛이 하도 처량해서 나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아이의 감정이 이입되어 옆에 힘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단산지를 돌아 나왔다.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왔겠지(,) 설마 그 아이를 포기한 것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다독였다.)
그 후로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다시 가보았는데 그날은 그 아저씨가 와 있었다. 아저씨가 안 오던(오지 않던) 날 그 고양이가 얼마나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더니 일요일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그날은 기다리지 말라고 말해 줄 수도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일요일엔 나라도 먹이를 좀 갖다 주어야 겠다고 생각을 해보았다. (했다.)
어떤 날은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는데 고양이의 비명 소리가 (이)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검은 털이 섞인 인상이 고약한 고양이 두 마리가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노란 아기 고양이는 어디로 쫓겨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영역 싸움에 밀려서 어디로 떠나야 한다면 그 고양이는 더 이상 아저씨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자리를 지킨다는 (지켜낸다는) 것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지.(일이겠는가.)
며칠 후 노란 고양이는 그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꼭 그 자리가 아니면 안 되었기에, 그 아저씨를 만날 수 없다면 죽는 수 밖에 없었기에, (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 보다 덩치 큰 고양이를, 그것도 두 마리나 되는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나 보다. 노란 고양이는 마치 개선 장군처럼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제도 그 고양이를 보고 왔다. 시간이 늦어서 그 아저씨는 보지 못했으나 먹이가 일회용 용기에 담긴 채 놓여 있는 걸로 보아 금방 다녀 간 듯 했다. 고양이는 갈색 낙엽이 쌓여 있는 길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아저씨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좀 전에 내려왔을 것이니 그 아쉬운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길 고양이의 수명은 길어봤자 2~3년이라고 한다. 집 고양이가 10년 이상을 살 수 있는데 비해 짧은 수명이다. 전염병이 돌면 피해갈 수가 없고 먹이나 물을 충분히 먹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만하다. (할 것이다.) 그래도 그 고양이만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아저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으니 다른 어떤 고양이 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혼자 살아가려면 외롭고 힘들겠지만 매일 한번 아저씨를 만나 먹이를 먹고 그 무릎에 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 기다림의 시간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기는 (삶이 고달프기는) 매 한가지다. 그러나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에 (있고 없음에) 따라 그 고난을 이겨낼 수도, 못 이겨낼 수도 있다고 한다. (삶의 성패가 엇갈린다.) 사랑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여삼추
이지연
연차(휴가)라 아침을 먹고 쉬고 있을 때였다.
‘오늘 합격자 발표 날이에요.’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발표가 이틀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일자가 당겨진 모양이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발표 시간이 오후 2시라고 나와 있었다.
아들은 전국 모의고사에서 상위권이었으며 본 (변호사) 시험에서도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당락이 가려지는 날이 되니 마음이 무척 떨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흐르던지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딸에게 떨린다고 하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다.
“엄마는 쓸데없이 왜 걱정하는데. 미리 축하 현수막이나 주문해 놓지.”
발표 시간인 오후 2시가 (이) 되어도 아들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홈페이지 접속자가 많으니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리겠지.’ 대범한 척 10분을 더 기다렸다. 지루한 10분을 기다린 끝에 법무부 사이트에 들어가니 공개 시간 이후에 확인하라는 문구만 떴다.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오후 2시부터 정부 인사와 로스쿨 교수, 변호사 등 변호사 시험 관련자들이 산정 기준을 정한 뒤 5시 경에 발표가 날 예정이라는 기사가 몇 개 있었다. 합격률을 몇 퍼센트로 할지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는 과정인 것 같았다.
다시 3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봐야 될(할) 책이 있었지만 읽어도 (을 펼쳤지만) 겉핥기만 되었고 머릿속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별 내용 (영혼) 없는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도 했지만(,) 시간은 더디 흘렀다. 세탁기에 수건을 쓸어 넣고 ‘삶음’버튼을 누르고 속옷 손빨래도 했다. 욕실에 세제를 뿌려 솔로 바닥을 빡빡 문질렀다. 타일 바닥을 헹구고 밖에 나오니 (도) 30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애꿎은 사과를 씹어 먹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를 노려보았다. 웬 걸 초침은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내 마음도 5시를 향해 달음질쳤다.
초침이 일만 번을 넘게 돌고서야 5시가 되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모바일로 법무부 사이트에 들어갔다. ‘어라, 이건 또 뭔가?’ 시스템 점검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아들에게 카톡을 해도 대답이 없다. 근무 중이라 휴대(스마트)폰을 바로 확인하지 않는 것을 이해 해야 (헤아렸어야) 했다. 사이트는 접속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었는지 먹통이었다. 15분이 더 지나서야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합격했어요.’ 간단명료했다. (‘후유~’) 비로소 제대로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남편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친정, 시댁 단톡방에 소식을 올렸다. 잠시 후 카톡과 전화벨이 춤을 추었다. 통화하는 내 목소리와 남편 소리가 날아다녔다. 퇴근하면서 전화하는 아들의 목소리도 한 템포 올라가 있었다. 현수막을 걸어주기로 한 단체에 ‘ 제 11회 변호사 시험 고득점 합격’이란 문구를 보내 주었다. 성적은 내일 확인할 수 있지만 고득점이라 썼다고 그 누가 태클을 걸겠나. 시어머니께서도 이제는 안심이라며(고) 어깨를 들썩이며 춤사위를 선보였다.
시험 친 후 긍정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곧바로 취업을 한 아들이다. 출판사에서 자신이 친 시험 해설지 만드는 작업을 끝내고 두어 달 전부터 로펌에 근무한다.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종일 마음을 졸였다. 딸아이는 (숨 막히게 전개되는 집안 사정에 개의치 않고 제 일에 집중하는 눈치다. 부모는 1촌 자매는 2촌이라더니 그 짝이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걸 보면 아마도 내가 부모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내일이면 우리 동네 곳곳에 아들(의 등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릴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제와는 다른 아들의 또 다른 미래를 예고한 오늘이라 기분이 한층 업 되었다. (살다가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다.
깃대봉의 추억
엄영희
물방울이 후두둑(후드득) 떨어진다. 캄캄한 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산길이다. 간간이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발자국 소리인가? 몸의 감각 중 귀만 살아 있다. 내 발자국에 마이크라도 붙어서 증폭된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낮에 한 번 올라갔다 내려 온 길임에도 불구하고 밤에 만난 산길은 낯설다. (고) 무섭다.
남도의 햇살 아래 감탄을 연발하며 올랐던 몇 시간 전의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여긴 어디며 나는 누구인가? 오리무중이다.)
함께 온 가이드는 저만치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희미한 손전등을 들고 어둠 속에 비치는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가 남자라고 느껴지는 순간 다리가 풀린다. 이 야밤에 아무도 없는 산중에 남자와 단 둘이라니….
온 신경을 귀에다 집중해 보지만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드문드문 있던 민가를 벗어나 겨우 산 초입(어귀)에 들어섰는데 어찌 해야 하나? 비상시엔 민가의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냅다 뛰는 것을 상상해 본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기쯤에서 주저앉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길가 나직한 바위 하나를 찾았다.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못가겠어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께(게)요."
"네, 그러세요."
잠시 주춤하던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따라갈 걸 그랬나?' 혼자서 산길에서 (혼자) 기다리는 것도 무섭다. 초긴장의 감각으로 어둠을 느낀다. 빛이 제한된 시간, 눈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이 안테나를 뻗는다. 산은 온갖 소리와 냄새와 느낌을 가지고 있다. 불청객 때문에 잠을 깬 나무들의 소리, 바닷물을 머금은 이슬방울들, 푸드덕 새들의 날개 짓(날갯짓)도 들린다. 바다 짠 내음이 나고, 안개비가 내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쁜 (재바른) 걸음과 헉헉거리는 거친 호흡이 어렴풋이 들린다. 점점 가까이 온다. 두 사람이 두런거린다. 남편이다. 마중을 간 가이드와 만나서 (함께) 내려온 것이다.
홍도와 흑산도 여행을 몇 년간 별렀다. 맞춤한 날짜에 여행팀이 있어서 남편과 함께 합류했다. 1박2일의 여행 시기가 마침 공휴일이 낀 주말이라 홍도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주민 수 세 배 정도의 관광객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낮에는 한국 100대 명산인 깃대봉 등산을 했다. 팀원들 끼리 저녁을 먹으려고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평소 사진 찍으랴, 등산하랴 바쁜 남편의 사정에 맞추어 각자 편한 대로 목적지에서 만나곤 했다. 남편에게 휴대전화를 했다. 우리 팀의 원래 계획은 깃대봉 정상을 찍고 출발지인 홍도 2리로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이 양반은 반대쪽으로 넘어가 있다. 더 복잡하고 집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어둑발도 짙어지고 있는데 본인이 알아서 그곳에서 숙소를 구해 잘 예정이란다. 그나마 한 시름 놓았다.
한 방을 쓰는 일행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잘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저히 잘 데가 없어서 도로 산을 넘어 가야겠다."
"이 밤중에 혼자 어디를 와요. 하룻밤 묵을 곳이 그리도 없을라구?"
"없어, 민박은 물론이고 현지 분이 소개해줘서 교회에 묵을 수 있는지도 물어봤는데 어렵네. 지금 출발한다."
전화는(가) 끊기고 만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저녁식사 때부터 남편이 없어진 걸 안 가이드가 관심 있게 물어온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
"지금 산을 넘어 온대요. 마중이라도 가 보려구요."
"혼자 어떻게 가요. 저도 갈게요."
야밤 산길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허겁지겁 숲길을 헤쳐 왔을 남편과 가이드와 늦은 밤 민박집에 도착했다. 사정을 들은 민박집 아지매(아줌마)가 말했다.
“잘 데가 참 거시기 하죠이….”
아지매(아줌마)는 찰지고 친절한 말씨로 그 시간에도 군소리 없이 밥상을 차려 주었다.
"거시기, 국이 없어 어째야 쓰까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밥상 차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늦은 저녁은 먹었지만 잘 곳도 없다. 벌써 방 배정도 다 했고, 지친 일행들은 잠에 골아(곯아) 떨어져 있다.
"거시기만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자면 된당께."
그날 밤 남편은 주인집 부부가 자는 방에 끼여 발칫잠을 잤다.
참 거시기한 날이다. 일렁이는 파도를 만끽하며 섬 일주도 하고, 배 위에서 만들어 주는 (선상) 횟감도 (회도) 사 먹고, 낮에 올랐던 산을 외간남자와 밤에도 (또 타고.) 다녀오고.
전라도 아지매(아줌마)들의 착착 붙는 말투가 유난히 정겹던 곳 홍도와 깃대봉의 추억이다. (아련하다.) (11.4매)
삶, 의미 그리고 죽음
이형국
옥상 난간을 두 손으로 잡으며 한 발 더 내디딘다. 아래를 내려보면본능적 두려움이 일어날 것 같아 (두려울까 봐) 먼 하늘만(을) 응시한다. 어스름 새벽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약간의 차가움이 마지막 남은 (알딸딸한) 술기운마저 앗아간다. 이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나란 존재는 이제 없어질 거다. 그래서 그런가(그래선가), 외롭다.
한평생 가슴에 멍울로 남았던 두 아이의 혼사도 끝났다. 이 정도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서 더는 할 일은(이) 없어진 셈이다. 외국에 유학 중인 막내 놈이야 제 앞을 가름할 (앞가림할) 만큼 총명하다. 게다가 제 어미가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눈을 꼭 감는다. 한 발 내디디니 내 몸은 어느새 허공 타고 가벼워진다. 순간, 얼마 전 태어난 손녀가 불현듯 떠오른다. ‘마지막인데… 그 애를 내 품에 꼭 한 번 안아봤어야 했었는데….’
‘참으로 지루한 게 삶’이란 처참한 의식이 가슴 속을 헤집고 다닌 지가 20년도 넘었다.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이 나를 괴롭힌다. 무의미한 삶, (하고) 미래가 없는 삶, 삶 자체가 짐이 되어버린 삶, 하루빨리 이 구차한 삶을 정리해야 할 텐데, 아직도 이승에서 책임져야 할 부채가 남아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일oil 가격의 급등으로 인한 중동의 건설 붐boom이 온 지구상에 불어 닥쳤다. 국내 경기 불황으로 인해, 자구책 마련에 급급해하던 건설업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동에 진출했다. 중동 특수는 국내 경제개발에 크나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파견직원도 개인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정부와 회사의 홍보에 따라, 모두 가족을 뒤로하고 (너도나도) 그 무더운 열사熱砂 속에 뛰어들었다. 돌아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무지갯빛 희망을 안고서. 그들은 (우리는) 햇빛이 이글거리는 낯선 이국땅에서 핏빛 구슬땀을 흘렸다.
토목土木을 전공한 나는 모某 기업에서 촉망받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국하여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여야만 했다. 반쯤은 실명된 흐릿한 눈(이었다.) , 생활엔 그다지 불편치 (하지) 않았다(지만) 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지만, 시력 장애인인 나에게 일을 하라고 할 (를 채용할) 회사는 없었다.
그 당시 신문 지상에 가십 거리였던 ‘외국파견 근로자의 바람난 아내’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였다. 같은 경우라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닥칠 줄이야. 변질되어버린 (망가진) 내 몸뚱이는, 병원 병상에서 아내의 간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여러 가지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런데 병원을 찾는 아내의 발걸음이 하루가 다르게 뜸해져 갔다. 어쩌다 찾아와주는 아내의 기색도 날이 갈수록 점점 무표정해가고 있음을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아내에게 무슨 변화가 있는 것이다. 두렵고 초조해하던 나의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물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내에게 남자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나와 는 절친이었던 자와. 비정하게도 아내는 어린 두 아이를 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천지가 암흑으로 뒤덮인 듯한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독한 배신감에 이어, 두 아이에 대한 (과 더불어 아이들) 걱정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직도 어미 치마끈을 놓지 않으려 할 어린아이들이 아닌가!.
‘아이들이 어미 잃은 고통과 슬픔을 어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정신적 공백은 또 어떡하고. 그래 용서하자, 돌아올 수만 있다면. 무조건 매달려 읍소泣訴가 필요하다면 그리라도 하자(보자.)’ 나의 기원이 통했는가! (지) 아내는 얼마 후 사라질 때처럼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저도) 어미였으니, 제 속으로 낳은 아이들이 얼마가 보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얼마간뿐, 아내는 또다시 모든 걸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단 한 번이라도 배부르게 받아보지 못하고 늘 정에 굶주린 채, 두 아이는 자랐다. 큰 애가 겨우 아장거리고 둘째는 갓 태어난 때, 나는 중동으로 집을 떠나 있었다. 제 어미로 인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부대끼며) 성장해온 아이들이다. 속절없이 바라보다, 돌아서서 피눈물 흘려야 했던 나였다.
처음으로 세상을 마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고달픈 삶을 끝내려 해도 아이들이 저 자신의 (제)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 저 애들, 자립할 때까지는 내 몸뚱이 부서져 버리더라도 아비 도리 다하자. 내 눈으로 확인이 되면, 그때 가서 이 세상과 담판하자.’
두 아이는 고아도 아니면서 이 집 저 집 전전하게 되었다. 형편에 따라 큰 집으로 (또는), 할머니 집으로 옮겨 다녔다. 다들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잘 돌봐줬겠지만, 어디 부모의 정만 하였겠는가. 그러니 눈칫밥이란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 트라우마는 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철이 들면서 공부보다는 먹고 사는 일, 즉 어린 나이였지만 돈벌이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나에겐 나의 육신에 대한 구완할 사람보다 이 아이들을 키워 줄 심성 착한 여인이 필요했다. 형수의 주선으로 혼인을 한 번 실패한 여인을 맞아들였다.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새 아내는 얌전하고 참한 여인이었다. 새로 이룬 가정, 아이도 (를) 낳으면서 집안 꼴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인간의 본성이랄까! 예측하지 않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계모 된 본성은 예외가 없었다.)
아내는 (제 자식과 두 아이를 눈에 띄게 차별하였다.) 두 아이와 제가 낳은 아이와의 양육에는 내 눈에 가끔 뜨일 만큼 차별이 존재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치 보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아이들의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가정이란 걸 다시 가졌구나.’ 하는 (새 가정을 꾸린 걸) 후회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깊어가는 전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스러움의 아이러니는 내 심장을 점점 더 피멍으로 물들게 하였다.
아내가 있지만, (고) 자식들이 있지만, 그리고 형님 내외분과 어머니도 계시지만, 이 상심을 이겨낼 방법은 술, 술밖에 없었다. 밤거리를 갈지(之)자로 비틀대며 고래고래 노래를 빌어 눈물을 흘려야만 잠이 들 수 있었다. 삶에 대한 나의 결심은 차츰 힘을 잃어갔다. 내 가슴에 뭉쳐져 있는 이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항상 홀로 흘리는 눈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내 운명이 외로움, 바로 그 자체일 수밖에. ‘죽자, 그래, 미련 없는 이 세상이야 내가 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래 죽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편지를 남겼다. 아내에게, 큰아이, 둘째 아이, (그리고) 막내 아이(에 이르기)까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먼저 떠나야 하는 미안함을 (썼다.) 세상은 나를 보고 비겁하다 할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비겁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쓸모없이 외로운 영혼을 지닌 채 연명하느니 차라리 비겁함을 택하기로 했다.
사흘 후면 구정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 손녀를 데리고 나를 보러 오겠지. 안돼. 그때까지 기다리면 안 돼. 그 애들 때문에 내 마음이 약해질지 모르니까, 서두르자. 한 시라도 서두르자.’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난 조용히 일어났다. 이젠 결행해야 한다. 아무도 눈치채기 전에 난 이 세상과 하직을 하여야 한다.
내 소지품을 하나씩 하나씩 가지런히 식탁 끝머리에 둔다. 사용하던 카드는 어젯밤 다 잘라버렸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이제 내가 소지한 건 없다. 내 영혼도 어제 마지막 술잔에다 부어놓고 나왔다.
조용히 현관문을 나서 전부터 봐 두었던 근처 아파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걸음도 나에겐 마지막 걸음이겠지. 두려운 맘이 울컥 든다. 누가 나를 부르지나 않을까 기다려진다. 그러나, 차가운 새벽바람만 불어올 뿐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2009) (19.8매)
그걸 자랑하느냐고
이광조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년에 있었던 일은 생각나지 않아서 안절부절(못)하는데 아득한 옛 일은 생생하게 남아있기도 하니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기억이 다 희미한 것도(이) 아니요, 중요했던 일이라고 야무지게 저장되어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기억의 메커니즘이 생뚱맞다는(고) 생각을 하면서도, 제멋대로 나부대는 이 기억이란 것을 붙잡고 실랑이 하는 일이 그리 싫지는 않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엄청난 일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문득 떠오른 한 조각 기억으로 지난 세월을 되새김 하는 일을 하찮은 공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현재와 잇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기억이란 놈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요,(다.) 밋밋하게 남아있는 삶의 자취에 무늬를 더 하는 잇속도 있을 수 있다. 내 의식의 표면에 아무 연결고리 없이 떠오른 옛 일 한 장면을 두고 어쭙잖은 ‘기억론’을 펴보는 것부터가 기억이 건네는 선물이라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문을 걸어 잠갔다. 창호지를 바른 문에 그림자가 비칠까봐 벽에 붙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 아이가 마당에 (으로)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자 다시 두세 번 더 당기며 용을 쓰는 바람에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그를 (광경을) 본 것 같았다.
“복수야, 무슨 일이고? 왜 이카노?”
“광조가 내 새 들고 내뺐어요.”
“언제? 광조 어데 있는데?”
“이 방에 있어요. 신발이 여 있잖아요!”
무모한 짓이란 걸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복수가 나무에 올라가 둥지에서 (새) 새끼 한 마리를 들고 내려와 내게 잘 잡고 있으라고 했다. 한 마리 더 가지러 다시 나무에 올라간 그 사이에 욕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고것을 그(복수)가 나무에서 내려오는 순간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나무 위 새둥지를 향해 접근하는 복수를 쳐다보며 여러 차례 마음을 뒤집다가, 뚜렷한 결심도 없이 몸이 지레 움직이고 말았다. 우리 집까지는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여서 뛰어가면 잡히지 않고 내 방에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댓살 많아서 나의 보스노릇을 했던 복수의 권위와 뒷일은 고려할 처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어머니가 문을 열도록 나를 설득했다. 어머니가 새를 얻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문고리를 풀었는데, 내 것이 아니니 돌려주라고 하자 원통해서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복수를 다독이며 내게 한 마리를 주라고 어머니가 사정하던 것까지는 어슴푸레 생각나는데, 그 다음 일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일곱 살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었던 새 새끼에 마음이 일어서 도발을 했고, 여의치 않자 울며불며 떼를 썼던 모양이다.
‘탐심을 발했다가 여의치 않으면 화를 내고 그런 어리석음이 되풀이 되는 게 중생이라’는 구절을 읽다가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60년쯤 사장되어 있던 장면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 재생 구조가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사이 한 번도 반추해본 일이 없었던 그 때 일이 어떻게 불쑥 나타났을까.
내 의식에서 그 일이 부채 내지는 죄의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던 걸까? 어린 마음에도 남의 것을 가지고 도망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가책은 있었을 것이(다.) 요, 그것이 인간 고통의 씨앗이 된다는 지적에 화들짝 놀라면서 이실직고 하고 나서는 일일 수도 있다.
엄한 집안 분위기와 소심한 성격 탓으로 ‘착한 아이’틀에 갇혀 지냈던 유년기에 본능의 부추김에 충실했던 그 일은, (일이었다.) 눌러놓은 욕망은(이) 겉치레 도덕을 언제든지 찢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양심을 좇는 마음은 미미하기만 하니’라면서 훈계하는 옛사람의 가르침도 일곱 살짜리의 흔들리는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걸 자랑하느냐고? (아니다.) 잘했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참아도 안 될 때는 터트리는 것도 눈감아 주고 싶다.그 일이 있은(고 난) 뒤에도 복수를 따라 다니며 똘마니 노릇 했던 일이 몇 가지 더 생각나는(난다.) 걸 보면 그럭저럭 세상은 흘러가게 되어 있으니까. (이 일 저 일 겪으면서도 붙어 다닌 걸 보면 세상도 그럭저럭 흘러가는 게 아닌가 싶다.) (22년 4월 26일 10.8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합평한 것 다 읽고 나니 엄청스레 공부 많이 한듯해서 뿌듯합니다^^
모든 글 보셨군요. ㅎ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들며 날며 퇴고를 계속하다보면 분명 좋은 글이 되실 겁니다.
선생님 덕택에 공부 많이 합니다. 많은 시간과 정성 쏟아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움 되셨다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알파고 확인보다 더 정교합니다~~
붉은 색이 강렬하긴 해요.ㅎ
글 잡고 늘어져 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