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처참한 결혼식
주칠칠, 왕련화, 웅묘아 세 사람의 처지는 심랑처럼 낭만스럽지도
편하지도 못했다. 물론 심랑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고 말이다.
그들 세 사람은 한 석실에 구금됐다.
첫째날, 그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튿날, 그들은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뒤 백비비가 왔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화사했고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주칠칠은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곧 눈을 감았다.
백비비는 일부러 그녀 악에 가서는 말을 걸었다.
주 아가씨, 주 소저(小姐), 안녕?
주칠칠이 큰소리로 외쳤다.
백 궁주, 백 왕비, 난 안녕하지 못해. 조금도 좋지 않아.
왜 기분이 좋지 않지?
주칠칠이 냉소를 쳤다.
그럼 당신은 기분이 좋은가?
나야 당연히 기분이 너무 좋지. 내 평생에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은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네게 없는 것이 내게 생겼거든?
너의 그 악독함이 물론 내게는 없지.
백비비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저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너도 미치도록 원하는 것이지만 너는 한평생 그것을 얻지 못할
거야.
주칠칠이 소리 질렀다.
네가 무엇을 얻었든지 난 아무렇지도 않아.
만약 그것이 뭔지를 안다면 아마 부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려도 모자랄
걸?
주칠칠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뭐지? 네가 말하는 게 대체 뭐지?
백비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직은 알려줄 수 없어.
주칠칠은 내심 달려가 그녀를 한 입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심랑은 어디 있지?
그는 아주 잘있어. 내가 여기 온 것도 바로 그 역시 아주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야.
주칠칠은 목메인 소리로 물었다.
왜지? 왜지?
백비비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내가 얻은 그것은 바로 그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주칠칠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다시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불그스레한 홍조가 떠오르자 온 몸이 갑자기 떨려왔다.
너와 그가...... 뭘...... 공유했다고?
백비비가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착한 동생, 혼자서 잘 생각해 봐. 하지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주칠칠의 얼굴을 한 번 꼬집더니 깔깔거리며 떠났다.
주칠칠은 그 자리에서 넋을 잃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웅묘아가 그녀를 달랬다.
칠칠, 울지 마라. 네가 운다면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질 뿐이야.
하지만 그녀...... 그녀가 심랑하고...... 혹시...... 혹시.......
그녀와 심랑이 무슨 일이 있겠어? 설마 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주칠칠은 계속 통곡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 악독한 여자는 무슨 짓이든지 해낼 수 있단
말이에요.
웅묘아가 부드럽게 달랬다.
바보, 그녀는 다만 너를 약올리려는 것뿐이야. 그녀의 말을
믿어서는.......
왕련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르오.
주칠칠은 목메인 소리로 되뇌었다.
사실이 아니에요. 사실이 아닐 거예요.
왕련화가 물었다.
사실이 아니라면서 울기는 왜 울지?
웅묘아가 소리 질렀다.
왕련화, 넌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 그녀를 상심하게 하느냔
말이다.
왕련화가 조용히 말했다.
난 다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웅묘아는 화가 났다.
너희 두 남매는 어쩌면 그리도 똑 같지? 시시각각 남들이
고통스러워하기를 바라고 너희들은 남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봐야만
자신이 행복해지는 건가?
그렇소. 나와 그녀는 확실히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소.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어떤 점?
왕련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는 심랑을 사랑하지만 난 아니오.
웅묘아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주칠칠을 보고는 호통쳤다.
닥쳐라! 그녀가 심랑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심랑을 죽이려 하지?
물론 그녀는 심랑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오.
왜?
두 가지 원인이 있소. 첫째, 쾌락왕을 위해서요. 그녀는 복수하기 위해서
쾌락왕과 혼인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심랑에게 시집가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는 잠깐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얻지 못하는 사물에 대해서는 파괴를 할 뿐이오.
그녀도 심랑과 결혼할 수 없게 되자 그를 죽이려는 것이오.
웅묘아가 냉소를 쳤다.
그건 정말로 사람의 마음이 아니군.
더구나 쾌락왕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복수했다 하더라고 여전히 심랑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소. 그녀는 심랑이 정말로 원하는
상대는 그녀가 아니고 주칠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왕련화의 말에 주칠칠이 목메인 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녀는 왜 나를 죽이지 않죠? 심랑만 살 수 있다면 내가 죽어도 난
상관없어요.
왕련화가 냉소를 흘렸다.
정말로 위대한 사랑이군. 너무도 감동스럽고 존경해 마지않소. 하지만
위대한 주 아가씨, 그녀가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역시 심랑마저 죽일
수밖에 없소.
왜죠?
그녀가 당신을 죽이고 심랑과 혼인을 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심랑은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할 거요. 심랑이 당신을 그리워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욱 증오할 것이오.
웅묘아가 말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군.
왕련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심랑의 몸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심랑의 마음은 얻지
못할 것이오. 심랑의 마음을 얻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심랑을 죽이겠다는
것이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녀가 반드시 심랑을 죽이는 도리밖에 없다는 거요.
이것은 하늘의 안배가 너무 공교롭지 못해서이니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주칠칠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했다.
하늘은 왜 이러한 배려를 했을까요? 왜죠?
웅묘아가 화를 냈다.
저 자식의 헛소리를 듣지 마라. 백비비의 마음을 알기는 어떻게 알겠어?
왕련화가 조용히 웃었다.
백비비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소? 우리들의 몸에는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웅묘아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하늘은 어째서 당신들 같은 자들을 태어나게
했을까?
왕련화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것은 하늘조차도 인간 세상의 좋은 구경을 하고 싶어서 일 것이오.
이것은 정말로 좋은 연극이다.
하지만 이 연극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비극이 희극보다 많다는데...... 그것도 너무
많다는데.
각양 각색의 비단 옷감들은 모두 새것이었고 또한 모두가 강렬한 색상을
띠고 있었다. 지금 이 모든 옷감들이 이 오래된 석실에, 그것도 바로
주칠칠의 악에 쌓여 있었다.
건장한 두 명의 부인네들이 옷들을 하나씩 들추어내면서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들을 웅묘아가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방심기는 뒷짐을 진 채 옆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은 모두가 소주에 있는 서복상(瑞馥祥)에서 구입한 옷들입니다. 세
분께서 각자 한 벌씩 선택하시면 소생이 사람을 시켜 갈아 입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왕련화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쾌락왕께서는 너무도 자상하시군요. 혹시 우리에게 모두 새옷을 갈아
입혀놓고는 죽이려는 것이오?
방심기가 웃었다.
이제보니 세 분께서는 아직도 모르고 계셨군요.
뭘 모른다는 거요?
내일이 바로 대왕께서 백비비 아가씨와 혼례를 치루는 날입니다.
대왕께서는 세 분께서 새옷으로 갈아입고 그 분의 혼례에 참석하기를
바라고 계시지요.
주칠칠이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정말로 결혼하는 겁니까?
그렇게 중대한 일을 농담으로 하겠습니까?
주칠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과연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중얼 거렸다.
내일...... 그들이 곧.......
웅묘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 성미가 되게 급하군.
왕련화가 웃었다.
그렇다면 난 분홍색을 고르겠소. 쾌락왕에게 즐거운 기색을 보태게
말이오.
방심기가 말했다.
덕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분 웅 공자께서는?
웅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난 공자도 아니고 내 평생 이런 빌어먹을 옷은 입어 본 적이 없어. 난
발가벗고 나갈지언정 이런 옷은 입지 않겠어.
방심기가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대왕께서 이미 명령을 내리셨으니 웅 공자께서 갈아입지 않으시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웅 공자께서 고르지 못하겠다면 소생이 대신 이
빨간 옷으로 갈아 입혀 드리죠.
웅묘아가 괴성을 질렀다.
빨간 옷을? 날 죽이려는 거냐?
왕련화가 웃었다.
당신은 죽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빨간 옷을 입는 것이 두렵소?
하물며 이 빨간색은 정열과 호기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니 마땅히 좋아해야
한다오.
웅묘아는 그를 노려보며 '흥'하고 코방귀를 뀌고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심기가 물었다.
그럼 주 아가씨께서는?
주칠칠은 눈을 약간 굴리더니 조용히 물었다.
심랑은 어떤 색을 선택했죠?
방심기가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모릅니다.
당신이 왜 모르죠?
심 공자의 일체는 전부 백 아가씨께서 돌보고 있습니다.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면서 천천히 말했다.
내일, 내일이 지난 후, 그녀는 그래도 그를 돌볼 수 있을까요? 내일이
지나면 그녀는 어떻게 할 작정이죠?"
왕련화가 탄식을 했다.
내일이 지나면 우리들은 또 어떻게 되겠소?
웅묘아는 백비비와 쾌락왕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또 그들이 결혼한 후에
생길 갖가지 비극적인 결과들이 떠오르고 다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그는 갑자기 간이 콩알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이라, 내일은 대체 어떤 날이 될까? 정말이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
백비비는 비스듬히 침상에 기대어 심랑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일이면 난 결혼해요.
심랑은 망연하게 대답했다.
응!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나요?
없소.
백비비는 입술을 깨물고 웃으며 물었다.
당신은 느낌이 없다구요? 내일 이후 당신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런 것들은 내일 이후에 생각해도 되오.
백비비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흥분되는 날인지 아세요? 그렇게
위대한 날의 전야에 당신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구요?
난 전혀 느낌이 없소.
백비비가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이미 무감각해졌단 말인가요?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무감각한 사람은 고통이 없고 고통 없는 사람은 곧 복이 있는 사람이지.
백비비는 그의 그 얄미운 미소를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 혹시 내심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게 아닌가요?
무감각한 사람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겠소?
당신은 나를 속일 생각은 말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그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당신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절대로 어떤 희망도 포기하지 않아요.
글쎄.......
당신에게 어떤 꿍꿍이 속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응? 그런가?
백비비는 갑자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내일은 바로 천백 년 이래로 가장 위대하고도 괴이하며, 가장
즐거우면서도 가장 비참한 혼례가 거행되는 날이에요. 내일에 발생할
일들은 분명 무림에 천 년 만 년 전해져 내려갈 거예요. 내일이면 곧 천백
년 이래 강호에서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긴장되며 가장 흥분된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녀는 감정이 격해지자 심랑의 손을 잡고는 다시 큰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내가 정밀하게 계획한 거예요.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요. 난 절대로 내 일을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절대로
내 계획을 파괴할 수 없어요.
이 '위대한 날'은 드디어 다가왔다.
이 모든 일은 과연 엄밀한 계획 아래 진행되어 갔다. 추호의 혼란스러움도
없고 추호의 빈틈도 없었다. 모든 비참하고 두려운 결과는 곧 예견할 수
있게 됐다.
웅묘아는 빨간 옷을 입고 아주 깨끗하게 치장을 하자 사람이 매우 훤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온통 울그락불그락한 것이 눈알이 톡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왕련화는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매우 조용하게 말했다.
웅 형, 난 당신이 이렇게 예쁠 줄은 생각도 못했소. 당신의 이렇게 예쁜
모습은 처음 봤소. 오늘 당신은 마치 새신랑 같으오.
웅묘아가 이를 악물었다.
넌 오늘 마치 내 손자 같구나.
그는 정말로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가장 가소로운 욕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웃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또
어떻게 웃음이 나오겠는가?
그들은 모두 마치 꼭둑각시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깥의
폭죽소리가 들리자 이어서 몇몇 대한들이 그들을 들고 나갔다.
넓은 궁전은 곳곳에 초롱불을 달고 오색천으로 장식됐다. 그러자 이
오래된 궁전은 금새 선명한 색상으로 한겹 옷이 입혀지면서 더욱
휘황찬란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쩐지 음산하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화려한 장식으로는 옛날부터 이곳에 배어있는 음산한 흔적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괴이한 도안은 선명한 색채 속에서 가끔 고개를 내밀고는 마치 비웃듯이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넓은 궁전의 곳곳이 상서롭지 못한 기운들이
도사리고 있는 듯 했다.
이곳은 원래부터 상서롭지 못한 곳이었다.
휘황찬란한 누란 왕조(樓蘭王朝)도 바로 이곳에서 매몰됐다.
옥석으로 된 계단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맨 악에는 옥석으로 만든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쾌락왕과 그의 왕비의
자리인 듯했다.
그 아래에는 좌우, 양쪽으로 각각 긴 상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네
쌍의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전부 다 금옥으로 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들이었다.
궁전 안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으며 모두가 길복(吉服)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다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 뒤에도 어떤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대체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 것인가?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몰랐다.
주칠칠이 들려져서 들어왔을 때 심랑은 이미 왼쪽의 긴 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심랑을 수없이 봐왔지만 지금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거의 숨이
멎을 뻔 했고 얼굴도 마치 불에 달군 듯이 타 올랐다.
심랑은 지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이여,감사합니다! 주칠칠은 드디어 심랑의 곁에 앉을 수 있게 됐다.
심랑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지난 며칠 동안 당신은 잘 지냈소?
주칠칠은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여자의 마음이란!
심랑이 물었다.
당신은 왜 나를 아는 척 하지 않는 거요?
주칠칠은 눈언저리를 붉히면서 눈물을 흘리려 했다.
심랑이 다시 물었다.
당신...... 당신은 왜 상심해하는 거요?
주칠칠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전 당신처럼 그렇게 즐겁지 못했어요.
심랑이 어리둥절해하면서 되물었다.
내가 즐거웠다고?
당신의 옷을 갈아 입혀주고 당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즐겁지 않았나요?
그녀의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심랑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또 옹졸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
말해 보세요. 그녀와 당신이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데 그게 대체
뭐죠?
당신은 어째서 항상 남의 말만 믿소?
주칠칠은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다만 옆으로 째려보듯 그를
노려봤는데 그의 입가에는 뜻밖에도 그 얄밉고 귀찮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주칠칠은 한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즐겁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웃을 수 있죠?
심랑이 가볍게 대답했다.
난 확실히 즐겁소.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오.
그럼 대체 무슨 이유죠?
심랑의 목소리가 더욱 나지막해졌다.
지금은 묻지 마시오. 당신도 곧 알게 될 것이오.
그의 눈에는 또다시 기지가 충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게
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주칠칠은 그를 바라보고는 조용히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는 묻지 않았다.
궁전 양쪽의 긴 상 뒤에는 금의 대한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쾌락왕의 부하들 같았다. 비단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약간은 어색한
듯했다.
궁전 양 옆에 있는 기둥 뒤에는 엷은 망사가 쳐 있었다. 망사 안으로
날씬한 소녀들의 몸매가 보였는데 이번 혼례의 악사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풍악소리는 울리지 않았기에 서로의 호흡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여기는 물론 덥지 않았다. 열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음산하고 선선했다.
이때 금의 왕관으로 차린 방심기가 궁전 밖에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허리춤에 있던 장검은 이미 떼어놓은 상태였고 그는 눈을 돌려
살피고는 곧장 심랑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매우 유쾌한 듯했고 걸음걸이도 매우 경쾌했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매우 바쁘시겠군요?
방심기가 몸을 숙이며 웃었다.
바쁠 정도의 일이 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죠.
바깥의 사정은 어떻소?
방심기가 웃었다.
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구름 한 점 없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전쟁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전쟁 같은 일이 나지 않았소?
주위 백 리 내외에는 모두 고요합니다. 추호의 경각할 만한 일은 나지
않았습니다. 심 공자께서는 안심하시고 이곳에서 술을 드십시오. 절대로
심 공자님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심랑이 크게 웃었다.
보아하니 오늘은 나도 크게 취해야 할 것 같군.
심 공자와 주 아가씨, 왕 공자, 그리고 웅 공자께서는 오늘 대왕
혼례식의 유일한 귀빈들이십니다. 네 분께서 오늘 맘껏 즐기시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유감된 일이죠.
주칠칠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손님이 우리 네 사람 밖에 없단 말인가요?
무림에서 네 분 외에 대왕의 귀빈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칠칠이 냉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해야겠군요.
갑자기 한 급풍 기사가 다급히 걸어오면서 말했다.
큰형님께서는 어서 준비하십시오. 혼례가 곧 거행될 겁니다.
풍악소리가 울렸다. 박자가 깨끗하면서도 느릿했다.
열여섯 쌍의 동남동녀(童男童女) 중에서 일부분은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일부분은 상서로운 기기를 받쳐들면서 저 빨간 융단의 맨 끝쪽으로부터
풍악소리의 반주에 맞춰 걸어왔다.
이때 네 명의 길복을 입은 소녀가 살며시 심랑 등 네 사람의 몸뒤로 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은으로 만든 술주전자로 각기 그들에게 술을 따랐다.
심랑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그 소녀는 그의 귓가에 대고 가볍게 말했다.
왕비께서 소녀에게 분부하셨습니다. 공자께서 반 마디라도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할 때는 소녀의 왼손에 들린 칼이 공자님의 신추혈(神樞穴)로
곧바로 찔러 갈 거예요.
심랑이 곁눈질해 보니 주칠칠 등의 안색도 약간씩 변해 있었다. 아마
그들도 똑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차가운 칼날은 이미 꽃을 수놓은 등받이를 통과하여 심랑의 등줄기에
닿았다.
심랑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 아가씨도 너무 조심성이 깊군. 소생 등이 분위기를 망칠 사람
같이 보인단 말이오?
공자께서 말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죠.
소녀는 서서히 몸을 폈지만 칼날만은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백비비가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 심랑이 그녀와 쾌락왕과의 관계를
발설하는 것이다.
그녀는 일을 함에 있어서 추호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랑은 비록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동남동녀들은 거의 다 걸어왔다.
이어서 열여섯 쌍의 오색 옷을 입은 녹의 소녀들이 들어왔다.
풍악소리의 박자는 더욱 느려졌다.
궁전 안에는 심랑 등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 일어서 있었다.
드디어 몸에 보라색 비단으로 된 장포를 입고 머리에 높은 왕관을 쓴
쾌락왕이 방심기와 세 명의 영준한 소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융단 위로
걸어왔다.
그의 턱밑 긴 수염은 비단처럼 다듬어져 있었다. 불빛에서 그의 양미간
사이의 상처도 흡사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는 풍악소리의 박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사방에 눈길을 주며 이 와중에서도
전혀 일대 무림의 효웅의 자태를 잃지 않았다.
웅묘아가 가볍게 웃었다.
쾌락왕은 신랑이 되어서도 마치 싸울 상대를 찾는 듯하는군.
그의 말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쾌락왕의 빛나는
눈길은 이미 그에게 무섭게 쏘아갔다.
이때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오금이 저려서 아뭇소리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웅묘아는 오히려 짐짓 못 본 척 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쾌락왕, 축하하오. 오늘은 당신의 좋은 날인데 좀 친절하게 대합시다.
신부가 당신의 그 모습을 보면 놀라 자빠지겠소.
그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크게 웃고 떠들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쾌락왕도 눈살을 약간 찌푸리더니 곧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안심하게. 본왕의 신부는 누구도 놀라 자빠지게 할 수 없을 테니.
왕련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맞는 말이야.
큰 웃음소리와 함게 쾌락왕은 오른쪽 돌계단을 올라가 의자에 앉았다.
풍악소리는 계속 울렸고 모두들 시선을 입구쪽으로 돌려서 신부를
기다렸다. 하지만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신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일부러 소리높여 말했다.
이건 어떻게 된 노릇이죠? 신부는 어디갔나요?
웅묘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옷 벗고 도망간 게 아닐까?
그들은 물론 백비비가 절대로 오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부러 쾌락왕의 약을 올리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쾌락왕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 누굴 무서워 하겠는가!
쾌락왕의 안색도 점차 굳어졌다.
그녀는 어디로 갔느냐?
방심기는 고개를 가까이 하고는 침중하게 말했다.
반 시진 전만 해도 제자는 백화궁 안에서 왕비께서 화장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곳에 또 누가 있느냐?
결혼용 화장 경험이 풍부한 두 명의 화장사와 관외에서 꽃가루 장사를
겸직하면서 머리 빗기로 유명한 노인과 왕비의 비녀가 있었습니다.
쾌락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 빗는 노인이라.......
방심기가 웃었다.
그 노인은 관외에서만 오십 년 동안 일해왔습니다. 그리고 대갓집
규수들이 시집 갈 때는 모두가 그 사람이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를 자세히 조사해 봤느냐?
제자는 비단 자세히 그를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몸수색도 해봤습니다.
그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 변장한 것이 아니며 다른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를 들여 보낸 것입니다.
쾌락왕은 약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본왕이 이 며칠간 너무 오늘의 혼사에 신경을 써서 다른 일에는 다소
소홀했었다. 네가 좀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방심기가 공손하게 말했다.
대왕께서 이렇듯 아껴주시는 데 제자는 마땅히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쾌락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처음으로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지?
제자는 방금 사람을 보냈습니다.
너는 다시 가 보아라, 그곳에 혹시.......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활짝 웃었다.
왔다.
그들의 말은 너무도 작아서 다른 사람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쾌락왕이 활짝 웃자 모두들 문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의 신부이며 미래의 쾌락왕비.......
백비비가 과연 문 입구에 나타났다.
화기로운 풍악소리에 그녀는 아름다운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오색찬란한 사의(紗衣)를 입었다. 그리고 오색으로 된 긴 비단천은
융단 위로 쓸어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꽃을 부리는 선녀의 모습 같았다.
그녀는 머리에 봉관(鳳冠)을 쓰고 있었는데 그 밑으로 정교하게 주렴이
늘어 뜨려져 있었다. 은색 안개 같은 주광(珠光)사이로 보인 그녀의
교태롭게 웃는 모습은 선녀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분명 한 걸음씩 걷고 있었고 또 붉은 융단 위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마치 오색 구름 위를 걷는 듯했고 더우기 그
아름다운 자태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남자들이다. 그 모든 남자들은 내심 찬탄의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누가 이런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생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일 거야.
다만 심랑 등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누구든지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것도 없이 재수가 없는 사람이다. 특히 지금
신랑이 되는 쾌락왕에게는.......
그는 원래 매우 쾌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생 중에서 다시는
행복할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장내의 사람들은 이 혼례의 호화로움과 장엄함에 모두가 하나 같이
부러워했다. 다만 심랑 등은 이것이 가장 처참한 비극의 서막(序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비비는 사뿐사뿐 돌계단으로 걸어왔다.
쾌락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손에는 세 개의 반지가 쥐여져
있었는데 마치 반짝이는 별처럼 빛났다.
웅묘아가 크게 떠벌였다.
신부가 왔는데 신랑은 일어서서 맞이하지 않으시오?
쾌락왕이 크게 웃었다.
마땅히 그래야지.
들러리가 백비비를 부축했다.
쾌락왕도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했고 손을 흔들어 주면서 웃었다.
여러분들도 맘껏 술을 드시오. 맘껏 즐기시오.
웅묘아가 물었다
이렇게 혼례를 끝낸단 말이오?
쾌락왕이 고개를 젖히며 웃어 제꼈다.
설마 본왕도 일반 세속적인 사람들처럼 복잡한 절차를 밟으란 말인가?
그의 눈길은 사방을 한 번 쓸더니 말을 이었다.
본왕은 오늘 이 혼례를 하면서 다만 정중함을 원하지 결코 번잡한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혼례를 치루는 것은 다만 여러분들에게
본왕이 절세적의 미녀를 신부로 얻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백비비도 수줍어 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귓속말처럼 속삭였다.
대왕께 감사드립니다.
결국 쾌락왕도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고 장내에도 환호성이 진동했다.
쾌락왕은 눈빛을 빛내면서 말했다.
네 분 귀빈께서도 역시 술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
웅묘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만약 이 계집애들에게 술을 먹이게 한다면 난 당장에 땅바닥에다 뱉어
내겠소.
쾌락왕이 약간 생각하더니 곧 분부했다.
심기야, 가서 저들 왼쪽 어깨의 견정혈(肩井穴)을 풀어줘라. 오늘은 보통
경사스런 날이 아니니 누구도 술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견정혈은 수양명경(手陽明經)의 가장 꼭지에 위치해 있다. 이 혈도를
제압당하면 팔 전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혈도가 제압된
상태에서 이 견정혈을 풀어줘도 다른 부위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진기(眞氣)도 여전히 흐를 수 없다.
그러니 제압이 풀린 팔로는 절대 다른 혈도를 풀 수가 없는 것이다.
웅묘아 등도 비록 이 팔을 쓸 수는 있었지만 술마시고 안주를 집는 것
외에는 역시 쓸모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술마시고 안주를 집어 먹게 됐다.
술이 세 바퀴를 돌자 쾌락왕은 눈을 사방으로 살피면서 또 다시 수염을
매만지면서 크게 웃었다.
지금이야 말로 그의 사업의 가장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이상이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중원으로
진격하는 날도 머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웃지 않을 수 있겠나?
그의 웃음소리가 의기양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술은, 놀라울 정도로 소비됐다. 환락의 소리도 역시 더욱 진동했다.
쾌락왕은 이 모든 것을 눈 아래에 두고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 자네는 이 천백 년 동안의 무림사(武林史)에서 본왕과 같은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있는 걸 봤는가? 또 이 세상에서 본왕보다 더 쾌활한
사람을 봤는가?
심랑이 약간 미소를 지었다.
최고봉에 이르면 모든 것은 하향(下向)하게 마련이며 극락의 기쁨은 결코
오래되지 않으니.......
쾌락왕의 안색이 굳어지면서 화를 냈다.
심랑, 자네는 지금 내 손에 잡혀있는 포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심랑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미소도 여전한 채 천천히 말했다.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은 입에 쓰고 충심어린 충고는 귀에 거슬리듯이
당신이 듣지 않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소?
쾌락왕은 비수 같은 눈빛으로 심랑을 노려봤다.
장내의 웃음소리는 갑자기 가라 앉았고 주칠칠, 웅묘아는 벌써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쾌락왕이 다시 한껏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는 질투를 하는군. 심랑, 자네는 질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자네는 본왕이 이룩한 것을 질투하고 또 본왕이 이토록 자랑스러운 아내를
얻는 것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왕련화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화를 내지 않소.
심랑과 같은 사람에게 질투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데 왜 화를 내겠는가?
그는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양손을 높이 들고 말했다.
너희들은 전무후무한 본왕의 위대한 성취에 석 잔을 통쾌히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방에서 우렁차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입니다.
결국 모두들 일어나서 환호를 터뜨리며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왕련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들은 곧 동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들에게도 곧 죽음이 임박해왔는데
심랑, 당신은 아직도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소?
심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나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소?
시기는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설마 우리들의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요?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웅묘아가 크게 웃었다.
죽으면 죽는 거지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먼저 삼백 잔이나 마시고 보자.
주칠칠이 조용히 말했다.
난 정말 지금 죽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심랑이 그래도 내 곁에
있으니까요.
웅묘아가 잔을 높이 들었다.
심랑, 자네에게 경의의 표시로 내가 먼저 석 잔 마시겠네. 내 생애에
자네 같은 친구를 두었기에 난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을 수 있었네.
그의 웃음소리는 예전처럼 호쾌했지만 침통하고 비통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가 비통하게 느끼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심랑 때문이었다.
영웅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지 석별의 정을 아쉬워할 뿐이다.
이별...... 이것이 정말로 이들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인가?
장내에는 온통 환호소리였지만 그들만은 초췌했다.
쾌락왕의 눈길이 백비비에게 향하자 백비비의 웃는 모습이 진주빛 사이로
보였다. 진주빛이 어찌 부드러운 그녀의 미소와 견줄 수 있으랴? 진주빛이
또 어찌 그녀의 아름다움과 견줄 수 있으랴?
간간히 전해오는 담담한 향기는 마치 꿈 속에서 흘러 나온 듯했다.
쾌락왕은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고 수염을 쓰마듬으면서 웃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맘껏 마셔라! 여기서 취해 죽어도 괜찮다. 본왕은......
하하하, 본왕은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길은 여전히
백비비를 보고 있었다.
왕련화가 낄낄댔다.
그렇군요. '일각이 여삼추'라, 어서 빨리 동방화촉을 밝혀야 겠군요.
쾌락왕이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왕련화는 역시 풍류를 아는 사람이야.
갑자기 문 밖에서 한 사람이 성큼 달려왔다.
그자도 색깔이 선명한 옷을 입었지만 경장 차림에다 얼굴에는 전혀
술기운이 없었다. 그의 등에는 비스듬히 녹색 검집의 장검이 꽃혀 있었다.
심랑의 눈빛이 번쩍였다.
아마도 궁밖의 순찰보는 자 같군.
왕련화가 말했다.
그렇군.
웅묘아도 표정이 변했다.
저 자의 표정으로 봐서는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왕련화가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러길 바랄 뿐이야. 그러길 바랄 뿐이야.
방심기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맞이하러 갔다. 두 사람이 몇 마디 귓속말을
나누자 방심기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쾌락왕은 눈빛을 반짝이며 자리에 앉아서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내의 시선들은 모두 방심기에게 집중됐다.
방심기는 몸을 돌려서 쾌락왕의 곁으로 뛰어 가서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밖에 사람들이 왔는데 대왕께 경축하러 왔다고 합니다.
쾌락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경축? 본왕이 오늘 결혼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밖으로 전했느냐?
이 소식은 전혀 밖으로 보낸 적이 없습니다.
쾌락왕은 탁자를 치면서 역정을 냈다.
소식이 밖으로 새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방심기는 고개를 숙였다.
제자의 방비를 소홀히 한 죄,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쾌락왕의 안색이 약간 풀어지더니 서서히 말했다.
사람의 입이 많으니 너만을 탓할 수는 없지. 다만 이 사람들이 그토록
위험천만한 길을 통과하면서 이 벽지로 온 것을 보면 분명 좋은 뜻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왕의 오늘날의 선망으로 볼 때, 남들이 모험을 감수하면서 대왕께
경축하러 온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쾌락왕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그는 웃음이 떠오를 듯하다가 다시 안색을 가라앉히면서 침중하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몇 명이 왔느냐?
일행이 모두 아홉 명이고 두 개의 상자를 들고 왔는데 대왕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모습들이냐?
급풍십사 호에 따르면 이 아홉 사람의 인솔자는 합밀(哈密) 과일의 거부
남전도옥(藍田盜玉) 복공직(卜公直)이라고 합니다. 이 자는 논밭이 수천
마지기에 가산은 만금에 달하으며 경공도 일류고수에 속합니다.
쾌락왕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복공직이라...... 본왕도 그의 이름을 들은 것 같군. 다만 그는 평소에
본왕과 전혀 왕래가 없었는데 또 어떻게 이렇게 선물을 보내왔지?
방심기가 웃었다.
아마도 그는 이 기회를 빌미로 대왕께 잘 보이고 대왕의 수하로
들어오려고 할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 무림의 사람치고 대왕의 문하에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쾌락왕이 수염을 매만지면서 크게 웃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들을 들어오라고 해라. 어차피 그들은 아홉 명 밖에 안
되니 죽고 싶지 않은 바에는 설마 딴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
주칠칠이 살며시 물었다.
심랑, 저 복공직이란 사람이 정말로 선물을 주려고 온 것일까요?
심랑이 미소 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왕련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복공직 같은 사람들은 선물을 보낼 사람들이 아니오.
웅묘아가 물었다.
그 남전도옥 복공직이란 사람의 이름은 나도 전에 들었소. 그는 강호에서
이름있는 사람이지만 쾌락왕과 비교한다면 상대도 안 될 거요.
심랑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천천히 말했다.
이 속에는 분명히 우리들이 생각해 내지도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오.
절대로 이렇게 단순할 리가 없지. 특히 내가 이상히 여기는 것은 그 두
개의 상자.......
왕련화가 냉랭하게 웃었다.
그 상자 안에 설마 사람을 먹는 요괴라도 있단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쾌락왕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모르는 일이지.
이때 그 두 개의 상자는 옮겨져 들어왔다.
이 두 개의 상자는 매우 진귀한 장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덟 개의
모서리에는 모두 황금으로 박혀 있었고 자물쇠 역시 황금으로 만든
것이다.
상자를 든 여덟 사람은 옷은 비록 화려했지만 모습은 매우 평범했다. 이런
사람들이 길을 간다고 하면 눈여겨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복공직의 모습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빛나는 눈은 안으로 푹 파여져 들어갔고 두개골은 오히려 툭 튀어
나왔다. 그의 머리는 약간 노란빛을 띤 검은 색이었고 약간은 곱슬이었다.
또 그의 눈은 약간 녹색을 띠었다.
그의 옷은 매우 화려했다. 하지만 짧은 옷에 묶은 머리, 금으로 된
귀걸이를 찬 모습은 매우 괴이하게 보였다. 어쨌든 그의 얼굴에 띤 웃음은
매우 친절했다.
웅묘아가 살며시 말했다.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이 복공직의 모친은 절색의 오랑케 여자로 몸에는
폐르시아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무공을 지녔다고 하던데 이 복공직이
과연 그의 모친의 재주를 이어 받았는지 모르겠군.
왕련화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 신비한 무공이오?
강호 사람들의 말은 각기 달라서 확실히는 모르지만 듣기로는 일종의
마술이라고 하던데.......
그는 약간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서서히 말을 이었다.
이 마술의 최대 장점은 바로 도주(逃走)지.
왕련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주?
이 마술을 배운 사람이 도망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쫓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 강호에서는 복공직의 경공술이 천하제일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이 마술과 관계가 있는 듯 싶군.
왕련화의 입가에도 역시 한 가닥의 미소가 번졌다.
도주라...... 아주 재미가 있는데.......
상자는 이미 쾌락왕 면전의 돌계단 아래에 옮겨졌다.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은 전부 다 복공직의 특이한 외모에 집중됐다.
아무도 상자를 들고 있는 여덟 명의 대한을 주의하지 않았다.
쾌락왕의 눈도 역시 복공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압박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도 복공직은 여전히 편안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느긋한 모습으로, 심지어는 귀걸이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풍악소리는 여전히 울렸다.
장내의 한쪽 귀퉁이에서 높고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외쳤다.
남강의 복공직이 알현합니다.
복공직은 걸음을 빨리하여 몇 걸음 악으로 가서는 몸을 숙였다.
남강의 후배 복공직이 대왕을 알현합니다. 그리고 대왕의 혼인을 축하
드립니다.
쾌락왕은 자리에 앉아 몸을 약간 구부리며 웃었다.
귀하께서 이렇게 먼 걸음을 오시느라고 참으로 수고가 많았소. 본왕은
참으로 감당할 수가 없구려.
후배는 오랫동안 대왕의 명성을 흠모해 왔으며 다만 직접 뵙지를 못한
것이 한이었지요. 오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온 것을 대왕께서
탓하지 않으신다면 후배의 크나큰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쾌락왕은 '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복선생은 너무 겸손하시오. 어서 이곳으로 앉으시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들이 돌계단 아래에 주안상을 마련했다.
복공직은 눈을 지그시 내려 뜨고 콧잔등을 보는 듯 고개 숙이며 악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자리에 앉지는 않고 몸을 숙이며 말했다.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후배는 먼저 대왕께서 후배가
가져온 변변찮은 선물을 받으신 후에 앉을 수 있겠습니다.
쾌락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큰 걸음을 하게 한 것도 감당할 수 없는데 어찌 귀하의 선물까지 받는단
말이오?
대왕께서는 천하제일의 갑부인지라 세상에는 더이상 대왕의 눈에 들어올
물건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배도 감히 속된 물건을
갖고 오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우연하게도 기연(奇緣)이 닿아 후배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표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왕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후배는 매우 실망할 겁니다.
쾌락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본왕은 기꺼이 받겠네.
그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면서 형형한 눈빛으로 그 상자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이어서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복 선생이 그렇게 말씀한 걸로 봐서 이 상자 안의 물건은 분명 본왕의
견식을 넓혀 줄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겠구려. 본왕은 갑자기 빨리 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소.
복공직이 몸을 굽히며 웃었다.
이 물건은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후배는 확실히 큰 심혈을
기울여서 손에 넣은 것입니다. 대왕이 즐거워하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후배는 만족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그 여덞 명의 대한은 상자를 돌계단 악에
놓았다.
이 궁전 안의 수백 쌍의 눈들이 이 상자에 집중됐다. 모두가 하나같이 이
상자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히 여겼다.
이때 주렴 뒤에 몽롱하게 감춰진 신부 백비비의 눈만은 상자를 보지 않고
오히려 쾌락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 상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그 상자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상자에는 자물쇠가 있었지만 잠그지는 않았다.
복공직의 파란 눈은 괴이한 빛을 반짝이며 서서히 상자를 열면서 웃었다.
후배는 대왕께 살아있는 선물을 올리니 눈여겨 봐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는 놀람의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이 상자 안에는 뜻밖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 있었다.
거의 완전하게 벌거벗은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