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극의 원리와 특징
1. 1970년대부터 등장하여 80-90년대까지 전 계층, 전국으로 확산한 마당극은 전통적인 연희양식을 계승한 자생적인 연극양식이다. 서구 연극의 영향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던 한국 연극의 순수주의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점차 성장하고 있던 민중의 의식과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한국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연극 양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당극의 시작은 ‘탈춤부흥운동’에서 출발한다. 민족적인 것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인식한 젊은이들이 각 지역의 탈놀이을 배우고 그것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을 갖는다. 특히 70년대는 탈춤과 마당극의 다양한 실험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채희완, 김지하, 임진택 등이었고, 특히 채희완과 임진택은 마당극 운동의 중추로 활동하게 된다.
2. 마당극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성장과 함께 대학의 ‘운동현장’의 중심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84년까지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탈춤이나 마당극 공연은 학생들이 유일하게 모일 수 있는 행사였고 자연스럽게 시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억압된 상황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활용하여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고발하는 마당극 공연을 활성화시켰다. 비록 예술적 수준은 떨어지고 대학생들의 미성숙한 관념성이 부각되었지만, 공동의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뭉쳐진 동질성은 마당극의 열기를 확산시켰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연되었던 마당극은 점차 노동운동, 농민운동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하는 중요한 양식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주류 연극계와 대비되는 재야연극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3. 마당극은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변혁적 움직임과 궤를 같이 한다. 마당극의 시작이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과 외세의 침투로 인한 민족적 자괴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극에서 다루는 내용은 권력에 의한 잘못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왜곡된 질서에 의해 고통받고 피해받은 하층계급의 삶이 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80년 광주항쟁의 비극은 미국에 대한 분노와 외세에 의한 민중들의 고통에 주목하게 만들었고 고통받았던 민중들의 역사가 극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고통받는 민중과 권력과 부를 통하여 민중을 압박하는 세력과의 이분법적 구조는 자연스럽게 적대적 세력을 개별적 존재가 아닌 특정의 사회계층적 인물로 형상화하였고 인물들에 대한 묘사 또한 서구 연극처럼 내적인 진실이나 심리적 개연성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생생함과 사회적 현실과의 개연성을 통하여 민중들의 개별적 삶을 표현하였다. 그런 이유로 마당극의 등장인물은 개인적인 특성보다는 집단적 성격이 강조되었고 개인의 고통 또한 특정 집단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상처에서 출발되었음을 표현하였다.
4. 마당극은 기존 연극 무대와는 다르게 열려진 마당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특징을 갖게 된다. 마당극은 과거 탈춤처럼 독립된 공연으로보다는 축제나 행사의 일부분으로 활용되었다. 이런 행사성은 자연스럽게 공연의 성격을 동질적인 전체성을 띠게 만들었다. 공연에 참여하는 공연자나 관객들 모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문제나 이슈에 대한 동질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은 자연스럽게 배우와 관객 모두의 집단성을 높이고 관객들의 자발성을 향상시키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배우과 관객의 자발적인 교류는 극의 활발한 전개를 이끌어내는 핵심적 요소였고 극의 성공을 가져오는 방식이었다. 마당극은 관객들의 참여를 요구하였고 극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틈을 만들어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마당극 공연은 공연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뒷풀이를 통하여 공연자와 관객 모두 하나가 되는 난장을 벌이는 것 또한 마당극이 지닌 집단적 축제와 행사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며 ‘현장운동’의 핵심적 구성요인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5. 마당극의 극적 구성과 특징은 많은 요소를 전통적인 탈놀이 형식에서 차용하였다. 극의 전개가 내용의 인과적인 방식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분절적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각각의 내용이 독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내면적인 심리적 표현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대거리 방식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 마당의 개방성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이 같은 장소에서 다양하고 동시적으로 전개된다는 점 등은 탈춤의 전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마당극의 다차원적 성격은 여러 개의 공간이 동시에 등장하거나 순차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과거와 미래가 같은 곳에서 표현되거나, 또는 현실상황과 극적상황이 어떤 방해물이 없이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표현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마당극의 특성은 때론 연극의 문법을 파괴한다고 주류 연극계로부터 비난받기도 하지만, 사회적 진실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고 다양한 인물들의 종합적인 견해를 하나의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접근으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동질적인 의식을 지닌 관객들에게 이러한 다차원성은 결코 혼란이 아니라 익숙한 것들의 드러남을 통하여 사건의 진실에 좀 더 명확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6. 마당극은 주류 연극무대가 아닌 운동현장과 지방을 중심으로 더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방언과 비속어가 자연스럽게 활용되었다. 특히 지방에서 공연되는 마당극은 방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적 현장에 대한 세밀한 인식에 도달하게 하였고 압박을 받았던 그 지역 민중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언어는 인식과 행동을 지배한다. 언어가 달라지면 내밀하고 세부적인 감각과 인식에 대한 표현의 정확성은 혼란을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내용일지라도 표현의 차이는 문제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때문이다. 비속어의 사용 또한 그렇다. 민중의 일상적 언어였던 비속어는 탈놀이 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속어는 민중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대한 방법이었다. 방언과 비속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주겠지만, 마당극이 다루고 있는 사회적 주제와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우선은 최대한 객관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재현이 필요한 것이다.
7. 마당극은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같이 급격하게 성장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공연되었다. 마당극의 확산에는 비록 성격은 달리할지라도 1970년대부터 시작한 민예극장의 판소리와 고전을 바탕으로 개작한 마당극 공연과 1980년대 MBC에서 오랫동안 공연했던 ‘마당놀이’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마당극은 이렇게 재야뿐 아니라 주류의 문화계에서도 한동안 대표적인 연극 양식으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외형적인 민주화 흐름 속에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힘이 약화되었고 그와 병행하여 재야의 마당극 공연 또한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현장운동’이라는 마당극의 특징이 현장운동 약화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한동인 명절 최고의 인기작품이었던 MBC의 마당놀이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활기를 잃고 쇠퇴하면서 과거의 인기를 잃게 된다. 80-90년대 한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마당극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8. 마당극은 70-80년대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통해 한국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접근한 연극이었으며, 전통적인 연희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민중적 삶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삶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켰고 새로운 예술에 대한 실험적 도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 연극 평론가는 마당극의 연극적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만남, 육체, 거시적 시야의 다차원성과 분절성, 놀이성의 회복 등은 매스·멀티미디어의 시대에 연극 같은 공연 예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하지만 마당극이 갖고 있는 자체적인 문제점도 컸다. 우선 사회운동적 성격이 강했던 터라 작품의 질이나 연기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작품의 다양한 변화를 위한 시도가 부족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질적 하락이라는 문제점을 노정시켰다. 또한 마당극의 ‘공동체적 집단화’라는 핵심적인 성격이 점차 개인주의적이고 개별성을 중시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9. 21세기 들어서 우려했던대로 마당극은 점차 사라졌고 이제는 거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변화된 시대는 연극 무대에서도 ‘뮤지컬’의 전성기로 변모하였다. 개인적인 취향과 소비적인 관심이 주류가 되고 있는 시대에 집단성과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했던 마당극의 특징은 이제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당극은 철저하게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관객들의 참여와 자발성이 없어진다면 존재하기 쉽지 않은 연극적 양식이다. 마당극적인 요소가 사회운동 현장에서 아직도 활용되고는 있지만, 공연으로서의 마당극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마당극은 이제 다시 복원될 수 없는 양식일까? 열려진 공간에서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펼쳐지는 마당극의 열기는 다시 보기 어려운 공연일까?
10. 현재 대부분의 인기공연은 극장이나 운동장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같이 합창하고 참여한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 또한 집단성과 자발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장같이 보인다. 하지만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스타에 대한 추종을 통해 모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의식과는 관계없다. ‘마당극’적인 양식은 점차 수동화되고 자율성을 잃어버린 시대에 인간의 자발성과 정체성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형식적이고 내용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 장점은 현재의 팬덤현상과는 다르게 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예술이 삶을 추동하는 힘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마당극’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한때 뜨거웠던 예술양식에 대한 회고적 느낌을 넘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마당극의 핵심적 원리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첫댓글 - 문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움직인다. 유행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전이 된다. 가치와 철학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