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1
사실, 19세기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 때 여성운동도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의 치레 또는 복장도 개량되었다. 무엇보다 여성복의 획기적 변화는 ‘장옷과 쓰개치마의 벗기’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내외법에 따라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사대부)와 장옷(서민 여성)을 입었다. 이를 뭉뚱그려 ‘쓰개’라 했다.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굴레였다. 이를 벗기려는 운동은 개화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신식 여학생들도 장옷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여학교마다 ‘쓰개 폐지 조치’를 연달아 내렸다. 1911년 배화학당에서 마지막으로 폐지했다. 여학생들이 쓰개 벗기의 선두주자였던 셈이다. 여성 얼굴 가리개는 차츰 양산으로 대치되었으며 부채를 비롯해 목도리와 솔을 이용했다. 쓰개 벗기는 여성 해방의 상징물이 되었다.
여성복의 기본인 치마·저고리의 개량운동이 동시에 세차게 일어났다. 저고리는 개화바람을 타고 갑자기 앞가슴을 여밀 정도로 짧아지고 소매도 좁게 만들어 입었다. 짧은 저고리는 기생들이나 접대부들이 유행을 선도했다.
그리하여 제대로 여미지 않으면 유방과 허리가 드러나기 일쑤였다.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이 체조시간에 여러 동작을 할 때 겨드랑이가 보이기 일쑤였고 말기가 흘러내려 유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여성들은 본의 아니게도 치부를 보여주는 꼴이 되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여학교와 여성 단체에서는 머리를 짜냈다. 그리하여 고안해낸 것이 통치마였다. 통치마는 트인 옆 자락을 막고 말기를 없애고 재킷처럼 어깨에 끈을 달아 걸쳐 매게 했다. 통치마는 끈을 달아 어깨에 걸쳐 입게 만들었으므로 유방을 조여 매지 않아도 되었으며 옆 자락이 터지지 않아 속곳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래 자락이 처음에는 발목 위쯤 내려와 땅에 끌리지만 않게 했는데 차츰 조금씩 짧아져 무릎 아래까지 올라와 종아리를 드러냈다. 1930년대 ‘모던 걸’들 사이에서 유행한 미니스커트의 원조인 셈이었다.
이 치마를 편리하고 깡동하여 ‘깡동치마’라고도 불렀다. 깡동치마는 우리 겨레가 수천년 동안 입어온 치마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 의미를 던진다. 여성들은 이 치마를 입으면서 유방을 조여 매지 않아도 되었다. 또 간편하고 여성 신체의 일부를 드러내 건강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여성 몸을 감추게만 한 관습과 질곡을 과감하게 타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성 신체를 해방시킨 옷’이기도 했다. 통치마는 주로 신식 여성들과 여학생들이 입었다. 개화기 때부터 흑색옷을 권장했고 조선총독부도 이를 권장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사람 위해 옷 났지, 옷 위해 사람 났나’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저고리는 조금 길게 하여 윗배 정도에 내려오게 했으며 소매는 좁게 만들었다. 또 옷고름보다 단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치마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색깔은 거의 백색으로 했다. 그리하여 검정 통치마와 흰 저고리를 한 세트로 삼았다.
다음에는 두루마기의 착용이다. 두루마기의 어원은 ‘폭이 두루 막혔다’에서 유래했다. 두루마기는 양반 상민 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행을 탔다. 여성의 경우 옥양목이나 비단 옷감에 여러 가지 물감을 들여 입었다. 여성 두루마기는 방한용으로도 입었고 여성의 멋을 과시하는 사치용으로도 입었다. 양반 부녀자들이나 기생이나 서민 여자들도 두루 입었다. 그래서 두루마기는 ‘만민 평등의 옷’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다음에는 여성의 머리모양도 변화를 보였다. 개화 초기 여학생의 댕기머리는 길이가 짧아져서 어깨의 중간쯤 내려오게 했다. 또 두 갈래로 땋기도 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비녀를 사용치 않고 머리를 묶어 망(網)을 씌우거나 핀을 꽂는 풍조도 일어났다. 자연스레 궁중 여인이나 양반 부녀자들이 하던 화려한 수식(首飾)이 사라졌다. 따라서 머리 모양이나 수식을 보고는 여성 신분을 가릴 수 없었다.
정작 여성 머리 모양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192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보브 스타일’이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뒤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여성 복장의 변화와 함께 헤어스타일도 실용적이고 간결한 실루엣인 보브 스타일로 변화했다. 머리끝을 짧게 늘어뜨린 것이 쇼트 보브, 끝을 길게 늘어뜨린 것이 롱 보브였다.
최승희는 일본에서 무용 수업을 마치고 1929년 귀국했다. 그런데 많은 신여성들은 단발한 그녀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승희의 단발은 롱 보브 스타일로 웨이브를 넣지 않고 옆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단발의 추세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거센 흐름이었다.
1934년 무렵부터 단발 바람이 전국에 불었다. 아직 전발(電髮·파마)이 유행을 타지 않을 때였다. 전파 속도는 가히 경이적이었다. 단발을 하면 간편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으며, 빈부와 신분을 가리지 않는 ‘평등의 머리 모양’이었다. 단발은 재래의 비녀머리와 파마의 중간 단계에서 유행을 탄 머리모양이었다.
끝으로 고무신의 등장을 들 수 있겠다. 고무신은 처음에는 일본 고베의 신발업자들이 조선의 갖신 짚신의 모양을 본받아 고안해낸 신발이다. 우리의 전통 신발은 사계절의 절기에 맞게 구두와는 달리 윗부분은 드러내놓고 아랫부분은 감아 싸는 모양이었다.
조선 신발업자들은 남성용은 코를 펑퍼짐하게 만들었고, 여성용은 뾰족하게 하고 좁게 만들었다. 그 형태도 아름답거니와 질기고 물이 새지 않아 실용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또 값이 싼 질이 낮은 고무로 만든 검정 고무신이 등장하여 도시 빈민이나 농민들이 애용했다. 고무신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때때로 품귀현상을 빚었다.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니 고무신을 신은 것만 보면 대감인지, 장사꾼인지, 백정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으니 가위 평등의 신발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근대화가 전개되면서 여성들의 복식변화는 여권신장의 한 몫을 담당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물결을 타기도 하고 사회주의의 여성평등사상에 영향을 입기도 하고, 유럽의 여권 신장에 힘을 얻기도 하는 시기에 여성들 스스로 평등운동을 전개한 결과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여성 평등권은 더욱 확대되는 추세이다. 가부장적 권위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이번 기회에 호주제의 폐지를 이룩해야 새로운 사회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전시동원 일환 ‘몸뻬’로 여성복 통일-
193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전시체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민중을 짓누른 질곡의 시대였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국민복령을 공포하고 국민복의 기본 만듦새를 제정했다. 규제의 대상은 조선식 전통복장과 서양의 영향에 따라 유행을 탄 복장이었다.

몸뻬를 입고 일하는 여학생들 -일제는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여서들에게 몸뻬를 입으라고 강요했다
조선복장은 불편의 상징이며, 서양 복장은 개인주의의 표상이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일본인으로서 자각을 망각시키는 것이라고 떠들었다. 따라서 복장의 표준화는 “국민들의 사상이 황도정신으로 모아지고 생활습관을 정례화하여 총력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제복을 입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간편과 실질과 평등을 추구한 여성의 복식이 획일된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복을 제도로 통제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표준복과 몸뻬가 등장했다. 직장 여성들에게는 표준복, 가정의 여성들에게는 몸뻬를 입게 했던 것이다. 표준복은 남성들의 국민복과 비슷하게 만들었으나 몸뻬는 사뭇 달랐다. 몸뻬는 여성의 하의로 바지와 비슷했다. 가랑이 너비를 활동하기 편리하게 만들고 허리에 닿는 윗부분에는 고무줄을 넣어 허리띠를 대신케 했다. 가랑이 끝에도 조이거나 고무줄을 넣어 깡똥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가랑이가 터진 여성 속옷인 가래바지나 남자의 양복바지와 비슷했다. 몸뻬는 거의 검정색으로 통일케 했다. 다만 저고리는 당시 유행하던 흰색의 것을 허용했다.
여성들이 강요한다고 이런 옷을 입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몸뻬를 입으면 시아버지나 어른들 앞에서 가랑이를 벌리고 다닌다고 하여 더 입기를 꺼렸다. 여성들은 가랑이를 벌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중세 서양 여자들도 말을 탈 때 두 발을 모아 말 위에 올라갔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국민복을 입지 않으면 ‘비국민’이라는 딱지를 붙였듯이 여성들도 몸뻬를 입지 않으면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아무튼 여성들은 차츰 몸뻬 차림으로 공장에도 다녔고 솔방울을 따러 다녔으며 모내기에도 동원되었다. 몸뻬 입기에 관성이 붙자 일하는 데에 편리하고 보온효과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촌여성들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몸뻬는 해방과 함께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여성들은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몸뻬는 그 동기는 다를지라도 바지차림의 실마리를 연 것이다.
(옮김)
※ 지난번에 이어서 36부작을 마져 올리겠습니다.